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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어느 겨울

가벨

 

 

 

 

 

 

 

 

오늘은 바쁜 날이다. 아침부터 회의가 잡혀있었고, 밀린 서류도 마무리해야 하고, 야근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국에 최 과장이 밤에는 회식이 있다고도 했다. , 신입사원 하나가 들어온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필이면 이런 바쁜 날, 성우는 평소에 하지도 않던 지각을 했다. 최근에 계속된 야근 탓일까. 덕분에 아침부터 기나긴 잔소리를 얻어먹었다. 시무룩해진 표정과 함께 자리에 앉자 그를 측은하게 보고 있던 권대리가 말을 걸어왔다.

 

 

"요새 일 너무 무리해서 했나봐. 옹 대리가 지각도 다 하고."

"이놈의 회사에서 맨날 야근을 시키니 그렇지요……."

"오늘 회식이니까 기운 좀 내. 그리고, 우리 부서에 발령 난 그 신입, 잘생겼더라."

 

 

관심도 없던 성우의 귀가 쫑긋해졌다. 잘생겼다구요? 권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시고 있던 커피마저 책상에 올려둔 채 손으로 열심히 그의 모습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요따만한데, 다리는 이만큼 길어. 난 처음에 모델인 줄 알았잖아? 나였으면 그 기럭지 아까워서라도 모델하겠다."

"권 대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지금 심부름하러 3층 갔어. 곧 올걸?"

 

 

제 할만 마치고 권 대리는 유유히 자리로 돌아갔다. 궁금하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던 성우는 무거웠던 어깨를 피며 기지개를 켰다. 피곤하네. 결국 그는 일 시작하기 전에 잠이라도 조금 깰 겸 커피를 타러 갔다. 종이컵에 물을 받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곁에 서서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성우 형?"

 

 

갑작스레 불린 제 이름이 놀란 성우가 뒤를 돌아봤다. 회사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어딘가 낯익은 모습. 그는 미간을 좁히며 남자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반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강다니엘!"

 

 

 

 

 

오랜만에 본 반가운 얼굴에 성우는 밀렸던 일들도 잊은 채 휴게실로 가 다니엘과 담소를 나눴다. 다니엘은 그동안 많은 일들을 해왔다고 했다. 최대한 본인이 좋아하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하기. 그게 다 스펙으로 쌓여서 회사에 들어오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왠지, 문득, 성우는 다니엘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네.

 

10년도 넘었다. 아마 다니엘을 처음 만났던 게 수험생 신분이었을 때일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동네에서 성우는 다니엘 아버지가 하시는 슈퍼의 단골손님이었다. 고등학생이 돈이 얼마나 있겠는가. 주머니에 있는 동전 몇 개로 사먹을 수 있는 건 고작 불량식품들밖에 없다. 공부하다가 스트레스 받을 때 한 번씩 슈퍼에 가서 불량식품을 사먹곤 했다. 하루에 한 번 꼴로 가면 주인 아저씨가 있는 게 다반사였는데 언젠가부터 조그만 놈이 카운터에 보이기 시작했다. 강다니엘이었다. 의자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닌텐도를 하던 어린 다니엘은 게임에서 이겼는지 때때로 행복하게 웃는 소리도 들렸다.

 

성우가 다니엘을 처음 본 날이었다. 이거 계산해주세요. 간단히 먹을 300원 짜리 과자를 카운터에 올려놓자 다니엘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성우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형은 저보다 형인데 왜 저한테 존댓말 써요? 그때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 후로 슈퍼에 가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다니엘의 아버지가 앉아 계실 때에는 실망해서 돌아가기도 하고, 다니엘이 앉아 있을 때에는 신나서 한참을 떠들다 가기도 했다. 갑갑한 수험 생활에서 다니엘과 얘기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 비슷한 셈이었다. 잘 알지도 모르는 초등학생 아이랑 무슨 대화를 하겠냐만은, 성우는 속풀이를 하듯 다니엘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힘들다는 얘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어린 다니엘은, 제대로 이해는 안 가도 적어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들어주는 것은 잘 했다. 성우가 기분이 울적해보이는 날에는 아버지 몰래 초콜릿을 그의 손에 쥐어줬다. 그런 작은 배려들이 예뻤다. 그래서 더 이 어린 아이한테 마음을 퍼다 줬던 것 같다. 오죽하면 대학 합격 발표 날에도 다니엘에게 가장 먼저 찾아갔다.

 

 

"다니엘! 나 붙었어!"

"뭐가 붙었는데요?"

"나 가고 싶다고 했던 대학 있잖아. 거기 들어가게 됐어!"

 

 

열두 살의 다니엘은 대학 합격이 그리 큰일인지는 몰랐지만 열아홉의 성우를 따라 함께 웃으며 기뻐해주었다. 일곱 살이나 차이나는 그들이 친해질 수 있던 이유이다. 서로에게 진심을 다한다는 것.

 

성우가 대학에 입학을 하고, 다니엘은 6학년이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자취를 하며 대학을 다니는 탓에 슈퍼를 갈 일이 없어졌다. 집에 가는 날에는 꼭 슈퍼를 들렀는데 다니엘의 아버지가 계시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전처럼 실망해서 돌아가기 보다는 다니엘 좀 불러달라며 부탁을 했다. 다니엘이 신나서 성우에게로 달려오면 성우는 맛있는 간식들을 그의 손에 쥐어줬다. 그와 함께 알고 지낸 시간이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니엘의 성장 속도는 빨랐다. 키가 쑥쑥 커서 성우는 그를 볼 때마다 놀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니엘의 졸업식에도 찾아갔다. 엄청 큰 꽃다발과, 다니엘이 좋아하는 젤리를 한 박스 사들고 다니엘의 학교로 갔다. 전교 회장 강다니엘은 학생 대표로서 앞으로 나가 교장 선생님께 표창장도 수여받고, 나름의 짧은 연설도 함께 했다. 왠지 아들이 졸업하는 기분에 울컥한 마음이 들어 성우는 그 모든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가족과 함께 있을 다니엘에게 찾아갔다. 성우의 선물을 보며 기뻐할 다니엘의 얼굴을 생각한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다니엘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니엘아, 왜 울어? 졸업해서 그런 거야?"

 

 

다니엘은 말없이 눈물만 쏟았다. 그의 곁에 서있던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당황하여 그를 다독여주었다. 울지 마리, 어쩔 수 없는 거라 안 카나. 아버지는 다니엘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엉엉 울고 있는 다니엘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의 품에 조용히 선물을 안겨주고 가려다가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달려와 조용히 "사진……, 사진 찍어요." 하는 다니엘에 퉁퉁 부은 눈의 그와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뒤늦게 들은 사실이었다. 다니엘이 캐나다로 유학을 간다는 것을.

 

슈퍼에 갔을 때 다니엘의 아버지에게 들었다. 일이 생겨서 캐나다로 이민가게 되었다고. 그 뒤로 슈퍼에 관한 얘기와 이것저것 많은 얘기들을 해줬지만 성우의 사고회로는 이미 정지된 지 오래였다. 다니엘을 못 본다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다니엘의 교복 입은 모습을 보고 싶은데 그가 출국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 슈퍼를 가면 다니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떠나는 전날, 슈퍼 앞에 그가 서있었다. 성우가 오기만을 기다린 양, 성우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달려가 성우에게 안겼다. 성우는 말없이 그의 등을 토닥여줬다. 다니엘은 그새 또 키가 커있었다. 어느새 성우의 어깨 언저리에 머리가 머물렀다. 한참을 그의 품에 안겨있던 다니엘은 품에서 빠져나오며 훌쩍 거렸다.

 

 

"내 이제 가면, 형아 못 보는데 내 우예 살아요……."

 

 

성우도 슬픈 건 매한가지였지만 아이같이 칭얼거리는 다니엘의 말을 듣자니 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다니엘은 그를 휙 노려봤다.

 

 

"형은 내 못 보는데 슬프지도 않아요?"

"내가 너 간다는 소리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내가 그렇게 부를 땐 나오지도 않더니."

"그때는……, 아직 형 보고 말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가."

 

 

손을 마주잡고 성우를 올려다보는 다니엘은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 내 가도 내 안 잊을 거죠? 내랑 연락 계속 할 거죠? 형도 내 마이 좋아하지요? 헤어지기 전까지 쉴새없이 조잘거리던 다니엘은 성우의 연락처, 이메일 등 모든 것을 받아내고 나서야 들어갔다. 그렇게 다니엘과 해어졌다.

 

초반에는 꾸준히 이메일을 통해 연락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생활이 바빠져서 연락의 빈도는 점차 줄었고 어느 순간 끊겼다. 가끔 서로의 생각이 날 때도 선뜻 어느 누구도 먼저 메일을 보내지 못했다. 그렇게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스물 일곱의 다니엘과 서른 넷의 성우는 운명처럼 같은 회사에서 만났다.

 

 

 

 

성우는 그때를 기억하며 픽 웃었다. 시간이 정말 빠르구나.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았던, 옛날의 추억으로 남겨질 것만 같았던 다니엘을 보게 되다니. 것도 다 큰 성인으로.

 

 

"그동안 잘 지냈어? 연락도 안 하더라."

"형도 내한테 연락 한 번 안 해놓고 뭔 소리고. 낸 진짜 형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정말 안 본 사이에 무언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우선, 다니엘이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 놈일 줄은 몰랐다는 것. 성우는 마시고 았던 커피가 목에 걸린 양 켁켁거렸다. 와중에 다니엘은 또 그런 성우를 걱정해왔다. , 형 괘안나? 다정한 목소리에 왠지 울컥, 어딘가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듯 했다. 큰일이다. 많이 피곤한가보다.

 

 

 

같은 회사, 같은 사무실. 성우와 다니엘이 마주칠 일은 많았다. 원래도 안면이 있던 그들이 삽시간에 친해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성우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가 끝나던 날, 그는 다니엘에게 먼저 저녁 약속을 청했다. 그런 성우의 약속을 다니엘이 마다할 리가. 금방 오케이라는 대답과 함께 메뉴는 저가 고르겠다는 대답까지 받아냈다.

 

성우와의 저녁 식사는 처음인지라 한껏 들뜬 다니엘은 맛집을 검색하기에 열중했다. 바쁘지 않으니 하던 일은 잠시 미뤄두고, 머릿 속은 온통 저녁 생각 뿐이었다. 성우 형이 뭘 좋아했더라. 문득 머릿속에 스친 생각에 다니엘은 잠시 울적해졌다. 15년 전 그리고 현재. 항상 그와 대화할 때는 늘 다니엘이 신나서 말을 더 많이 걸고, 자기 얘기를 많이 했다. 생각해보면 성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했는지 들은 기억이 없었다. 더군다나 어릴 때 성우에게 얼핏 들었던 그의 자잘한 이야기들은 생각이 잘 나지도 않았다. 결국, 나름 분위기 있고 연인들이 자주 찾는다는 레스토랑 하나를 예약했다.

 

운전은 성우가 맡았다. 레스토랑은 고급 지고 비싼 값을 하듯 분위기가 좋았다. 조금 늦은 저녁 시간대라 사람도 많이 없어 조용했다.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면서, 음식이 나오고 다 먹을 때까지 그들은 쉴 틈 없이 대화를 나눴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면수 할 얘기는 끝이 없었다. 꼭 오랜만에 만난 동창같기도 했다. 다니엘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성우에 관한 얘기들을 들으며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 집. 갈래?"

 

 

밥을 다 먹고 차에 올라탈 때였다. ? 갑작스런 초대에 다니엘은 목소리에서부터 놀란 게 보였다.

 

 

"그냥. 술 먹자구."

 

 

역시나 이번에도 다니엘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가야죠.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대답하는 다니엘 덕에 괜스레 웃음이 흘러나왔다.

 

성우의 집은 깔끔했다. 최근에 바빠서 집 청소도 못했다고는 했지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깨끗했다. 다니엘의 입에서는 여러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가 여전히 아이 같아 보인 탓일까. 성우는 언제부턴가 그가 어떤 말을 할 때마다 작게라도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집에 있는 술들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다니엘은 물 만난 고기 마냥 신나있었다. 그가 술을 따라주고, 첫 잔은 가볍게 원샷. 집에 오니 성우는 한껏 편해진 모습으로 바뀌었다.

 

 

"형은 뭔가, 마이 바뀐 거 같다. 어릴 때랑."

"그래? 내 눈엔 네가 더 바뀐 거 같은데. 키도 나보다 커지구."

"아이, 형 내 봤을 때가 초등학교 땐데 그라모 당연하지요. 설마 그때랑 똑같을까."

"알지, 알지. 시간도 참 빠르다. 너랑 술 먹는 날이 다 오고."

 

 

추억을 회상하며 술잔은 계속해서 채워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 없이 다니엘이 주던 술을 쭉쭉 마시다보니 어느새 성우는 취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나 벌써 기분이 막 좋고 그르네. 성우는 붉어진 볼을 툭툭 쳤다.

 

이야기 주제는 계속해서 바뀌어갔다. 성우가 잠시 술을 깬다며 물을 마시는 동안 다니엘은 오히려 알코올을 더 들이켰다. 왠지 취하고 싶은 날이었다. 알코올의 힘을 빌려, 분위기의 힘을 빌려, 다니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 내 실은……, 형이 내 싫어할까봐 좀 겁났어요."

"내가 너를 왜 싫어해? 그때도, 지금도 난 여전히 네가 좋은데."

 

 

성우의 대답에 다니엘은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서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되게 두근거리면서도 몽글한 기분이 들고 무언가가 심장을 쿡쿡 찌르는 기분이었다.

 

 

"알아요, 알아. 내 지금은 형이랑 얘기도 마이 나눴고 그캐서 아는데, 캐나다로 갈 때는 내가 형을 버렸다고 생각할까봐 그기 무서웠다. 내가 좀 어렸잖아요, 그때."

 

 

다니엘은 그 말을 하면서 웃어보였다. 처음 듣는 그의 마음에 성우도 놀란 기색이었다.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고 또 뭉클하기까지 했다. 아이, 내가 또 분위기 다운되는 말 해뿟네. 다니엘은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잔을 들이켰다. 성우는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날 많이 생각해줘서 고마워. 라고 말을 해야 하나. 성우는 다니엘을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는 어색해진 공기에 손장난만 치고 있던 그는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성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바라봤다. 정적을 먼저 깬 건 성우였다. 그는 다니엘의 손을 마주잡으며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었다.

 

 

"고마워."

 

 

그냥, 마음 속 어딘가가 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연말이 다가오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뭐가 이렇게도 할 일이 많은 지, 야근은 계속해서 반복됐고 어쩌다 일찍 퇴근할 수 있는 날에는 꼭 회식이 잡혔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힘없는 직원 둘, 다니엘과 성우는 집에 가지도 못하고 회식 자리에 참석하게 됐다.

 

시끌벅적하고 분위기는 들떠있지만 피곤했다. 성우도, 다니엘도. 하지만 어쩌다 타켓이 돼 성우는 계속해서 술을 받아 마셔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게임을 해도 어쩜 그렇게 성우만 걸리는지. 딱 죽을 맛이었다. 속이 울렁거릴 참에 또 한 잔이 날아 들어왔다. 옹 대리, 그대로 쓰러지겠다. 깔깔대며 웃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셔야했다.

 

 

"제가 대신 마실게요."

 

 

그의 옆에 자리하던 다니엘은 그 누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성우의 잔을 넘겼다. 어떤 테이블에서는 환호가, 어떤 테이블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에이, 그걸 자네가 왜 마시나? 옹 대리가 쭉, 들이켰어야지."

"오늘 아침부터 대리님이 속 안 좋다카길래, 죄송합니다."

 

 

다니엘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답했다. 다들 웃어넘기는 분위기였고, 타겟은 금방 다른 사원으로 변경됐다. 시끄러운 틈을 타 성우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섰다. 조용히 눈치를 보던 다니엘도 그를 따라 나갔다.

 

겨울이나 바람도 찬데 성우는 겉옷 하나 걸치지 않고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다니엘은 조용히 그의 곁에 가 섰다.

 

 

"안 추워요? 지금 바람 억수로 찬데."

"술 깨려고 잠깐 나온 거라 금방 들어갈 거야. 넌 왜 나왔어?"

"형 걱정돼가 따라나왔지. 괘안아요? 술 마이 받아 묵던데."

"괜찮아."

 

 

다니엘은 걱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다 바로 옆에 있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잠시 뒤 그가 성우에게 건네준 건 숙취 해소 음료였다. 성우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연했다.

 

 

"고마워, 다니엘. 넌 여전히 예쁜 짓만 한다."

 

 

. 또다. 마음 속 어딘가가 간지럽고 몽글거리는 기분이 또 들었다. 다니엘은 얼마 전부터 으레짐작하고 있었다. 성우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저 형의 대한 동경심일까 생각해봤지만 오늘로서 확실한 결론이 내려졌다. 좋아하나보다.

 

춥다, 들어가자. 손을 마주 비비던 성우가 술집으로 몸을 틀었다.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잠시만요."

 

 

놀라 눈이 동그랗게 커진 성우가 뒤를 돌았다.

 

 

"왜그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충동적으로 잡은 거라 당황한 건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가 조금 더 적당한 표현이다.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던 다니엘은 술김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저랑, 크리스마스 때, 데이트 할래요?"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말했다. 정확하게 그리고 확실히 말해주고 싶어서. 멍하니 다니엘을 쳐다보단 성우가 어느 순간 풋하고 웃었다.

 

 

"데이트야? 우리 데이트라 하는 거야?"

 

 

남자 둘이 만나는 것 치고 데이트라는 표현은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저 혼자 좋아하는 거라 생각한 다니엘은 당연 얼굴이 붉어졌다. , 뭐 둘이 만나믄 그게 데이트라 카죠, ……. 오물거리며 말하는 입술이 귀여웠다. 성우는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려줬다.

 

 

"그래. 우리 다니엘이랑은 데이트라고 해야지. 얼른 들어가자, 춥다."

 

 

마음 속에 숨어있던 꽃이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바쁜 하루하루는 쉬지 않고 반복 됐고 시간은 빠르게도 흘러 어느새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크리스마스 당일은 회사에서도 편히 쉬라고 했으니 데이트 할 날만 남았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하던 다니엘에게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니엘아 미안. 오늘 과장님이 갑자기 부르셔서 못 만날 거 같아.]

 

 

허탈함. 마음 속은 쓰나미가 휩쓸고 간 듯 텅 빈 기분이 들었다. 이 날만을 기다려왔는데. 당분간은 또 바빠 만날 틈도 없을 것이다. 답장도 하지 못한 채 폰을 내려놓았다. 물론 성우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안다. 하지만…….

 

급한 일이었다. 제출한 보고서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가장 중요하고 오래 맡았던 일이라 성우도 긴장을 하고 달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건 그도 매한가지 임이 당연했다. 전면 수정을 해야했고, 급하게 불려나온 다른 직원들과 해야할 일들이 갑작스레 쌓여 아무래도 만나기는 불가능할 거라 예상했기에 결국 다니엘한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휴대폰을 다시 확인할 틈도 없이 이리저리 불러다녔다.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가장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고 어느새 달이 떴다. 시침이 9를 가리켜 넘어가고 있을 때쯤 다니엘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성우였다. 왠지 받기가 싫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울려대는 탓에 결국 받아들었다.

 

 

"미안해."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다니엘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그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정말, 진짜 미안해."

"……."

"집 앞이야."

"……?"

"나와줄 수 있어?"

 

 

놀라 눈이 크게 떠졌다. 달려나가 당장이라도 문을 부술 기세로 세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 앞엔 휴대폰을 손에 쥐고 고개를 푹 숙인 성우가 서있었다.

 

 

"들어와요."

"……미안."

"형 잘못도 아인데 뭐가 자꾸 미안하노. 고마 하고 들어와요. 춥겠다."

 

 

죄지은 사람처럼 느릿한 발걸음으로 다니엘의 집에 들어갔다. 다니엘은 그를 쇼파에 앉히고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 맥주 물래요? 성우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니엘은 맥주 두 캔과 간단히 먹을 오징어를 상에 올렸다. 니엘아, 미안. 성우는 또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과장님이 불렀다매요. 낸 진짜 괘안타. 담에 또 놀면 되지."

"그래도 내가 미안하잖아. 전부터 약속한 건데……."

", 형 입에서 미안하단 소리 나오는 거 별로 안 좋다. 고마해요. 나 진짜 괘안타 안 카나."

 

 

하는 수 없이 다니엘은 성우의 입에 오징어를 물렸다. 막상 입에 뭐가 들어오니 오물거리며 먹는 그의 모습에 다니엘은 왠지 웃음이 터져나왔다. , 지금 웃을 상황 아인데.

 

 

"……왜 웃어."

"클랐어요. 내 형 좋아하는갑다."

"?"

"형이 오늘 다 망쳤다. 내 원래 오늘 므찌게 고백 함 해볼라캤는데."

 

 

이상하게 알코올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구구절절 미리 짜놓기라도 한 듯 말이 우수수 쏟아졌다.

 

 

"내 오늘 형한테 진짜 진지하게 고백할라캤어요. 꽃도 사고, 예쁜 곳 데이트 하고, 맛있는 것도 무면서. 근데 다 물거품 돼가 초라한 고백 돼뿟네. 내 형 좋아해요. 오래 봤고 오래 좋아했다, 진짜로다가. 형아 내 고백 받아주면 안 돼요?"

 

 

솔직히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다. 성우는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도르르 굴렸다. 아니, 다니엘은 좋고, 정말 좋고 받아줄 수 있는데, 뭔가 상황 자체가 당황스러웠다. 다니엘은 그 사이 캔을 따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맥주 시원하네. 형도 얼른 무라. 성우은 손톱으로 책상을 살살 긁으며 생각을 하다 픗,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뭔데요. 형은 또 와 웃는데."

"너 진짜 웃겨서. 고백하려면 좀 무드 있게 하든가."

"내 말했잖아요. 누구때문에 다 실패했는데……."

"꽃도 샀다며. 그거라도 주지."

 

 

성우의 대답에 민망한듯 다니엘은 콧잔등을 긁적였다. 글타고 이 분위기에 로맨틱한 고백도 좀 웃기지 않나. 하지만 성우는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니 하는 수 없이 방에 고이 모셔뒀던 여러 꽃송이들이 가득한 꽃다발을 가져와 서웅에게 건넸다. 그러나 성우가 받으려 팔을 뻗자 휙 제 쪽으로 다시 가져갔다. 뭐야, 줬다 뺏어?

 

 

"형 이거 받아주면 내랑 사귀는 기다. 내 형 억수로 좋아한다는 거 진심이에요."

 

 

아까보다 한껏 진지해진 목소리였다. 잠시 침묵이 그들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성우가 입을 열었다.

 

 

"나두. 나두 좋아해. 전에는 그냥 귀여운 동생같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 순간 뭐 네가 좋아졌고……, 아 몰라. 꽃이나 줘!"

 

 

한 단어 한 단어 조심히 말을 잇다가 어느새 부끄러워졌는지 성우의 얼굴은 붉어져있었다. 성우는 다니엘의 손에 들린 꽃을 확 뺏어갔다. 이렇게 예쁜데, 오늘 제대로 고백 받은 걸로 치지, .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만져보다가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너 졸업식 때 내가 꽃 선물해줬는데, 이젠 내가 너한테 다 받아보네."

"그 꽃 내 캐나다 갈 때 챙겨갔다 알아요?"

"그 큰 걸?"

"울 엄니랑 아부지가 무겁다, 짐이다 카는 거 내가 막 우겨가 챙겨갔어요. 형 안 잊으려고."

 

 

울컥함이 치밀어 올랐다. 생각보다 그는 옹성우를 예전부터 좋아하고 있았나보다. 성우는 조심스레 꽃을 옆에 두고 다니엘을 꼭 껴안아주었다. 그냥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냥. 따뜻한 그의 몸이 느껴져 왠지 다니엘은 성우를 토닥여줬다. 고마워. 성우가 작게 속삭였다. 내가 더요. 다니엘이 나긋하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