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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When we were young

멜피

 

 

 

 

 

 

"Hi, Mahina!"
"Hey, Ronald. 'Sup?"

 

 

 


저 멀리 빨간 벽돌이 예쁜 건물 앞에서 한 눈에 봐도 국적이 달라보이는 10대들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인사를 나눈다. 추워죽겠는데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실실 웃어. 낯 설고 물 선 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주머니에는 손을,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홀로 걸어가는 소년이 아무도 듣지 않는 심경을 속으로 삼켜본다. 1년만 있다가 죽어도 못 있겠다고 해야지. 아 애들이랑 피씨방 가고싶다. 주머니 안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생각하는 입매가 꾹, 맞물린 모양새가 단호하다.

 


"다니엘, 내가 부르는거 못 들었어?"

 


갑자기 왼쪽 어깨에 올라오는 손과 오른쪽 귀의 이어폰을 빼내는 손길에 놀라 돌아보면, 장난스레 미간을 찡그리며 웃고있는 수려한 얼굴.

 


"저쪽 사거리 횡단보도에서부터 계속 불렀는데, 노래를 이렇게 크게 듣고 있었네! 너 청력 나빠져."
"아..죄송합니다..."
"푸하, 아직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죄송부터 해?"
"아,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들어도 바보같은 답변에 허리를 젖히고 웃는 소년. 그 덕에 등굣길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으나 그것에 신경쓰는 이는 오직 다니엘 뿐이다.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이 소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신나느냐 아는 체를 하자,

 


"대니가 너무 귀여워서."

 


그에게 질문을 던진 이들의 눈길이 다니엘을 한 번 스쳐지나간다. 그 뿐이었다. 먼저가 됐든 나중이 됐든 다니엘에게 인사를 건네고, 눈을 맞추고, 안부를 묻는 이는 오직 다니엘보다 두 뼘정도 큰 이 소년 뿐이다. 보통의 학교와 달리 학생의 들고 남이 잦은 국제학교에서는 뉴페이스의 등장이 그닥 새로운 이벤트랄것도 없어서. 말장난을 좋아하는 다니엘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오해 없이 진심을 내보일 방법이 없어서 다니엘은 이의없이 혼자였다. 게다가 소년은 저보다 고학년이었으니 그의 친구들은 다니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했다. 민망한 분위기를 피하고 싶어 어깨에 올라온 팔을 슬쩍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느꼈는지 소년이 팔을 고쳐 감으며 몸을 붙여온다.

 


"혼자 다니지마."

 


일주일 전 아침. 전학 수속을 마치고 마주친 그와는 같은 나라에서 왔으니 친하게 지내라며 중매를 선 담임의 소개로 마지못해 5분 정도 안면만 텄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쌓아올린 5분의 역사에 어떤 것이 존재했던가 생각해본다. 이름, 나이, 체류기간, 고국에서 살던 곳 따위를 공유했을 뿐인 가볍디 가벼운 그 시간의 무게 위에서 던져지기엔 꽤나 무거운 대사라고 판단한 다니엘의 시선이 소년의 짙은 속눈썹 아래의 그것과 마주한다.

 


"배는 바꿔 타면 그만이지만, 파도를 바꿀 수 없다면 그에 맞춰서 노를 젓는 수 밖에 없어. 게다가 우린 배를 바꿔 타겠다는 결정도 아직은 일러. ......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전달되는 진심에 묻어난 음성은 작지만 듣기 좋은 공명을 가졌다. 온전한 타의로 이역만리 타국에 던져진 다니엘의 눈동자가 오랜만에 느낀 '우리'라는 단어가 주는 소속감 때문인지, 잔잔한 파도 위를 유영하는 작은 나룻배처럼 움직이는 듯 하다.

 


"억지로라도 마음을 붙여야 견뎌낼 수 있어. 그러다보면 정 붙일 구석이 생기더라. 그리고 사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똑같아."

 


두 사람이 쌓아올린 탑의 무게에 비해 지금의 이 대화 주제는 분명 무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눈 앞의 이 소년은 여려보이는 육체 속에 감춰진 영혼의 강골로 지금의 기류를 기꺼이 홀로 떠받치고 있다.

 


"내일부턴 나랑 아침에 같이 와, 점심도 같이먹구. 알았지?"

 


전조도 없이 전해진 밀도 높은 상냥함이 익숙치 않은 다니엘이 버릇처럼 시선을 손 끝으로 옮겼다가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려 하자, 그 움직임을 막아낸 소년이 대답을 종용한다.

 


"어허, 다니엘. 집안사람끼리는 원래 같이 다니는거야. 알았어? "

 


처음 통성명을 할 때 한국이름이 뭐냐고 묻고는 '성우'를 발음하기 힘들어 해 David라는 가명을 써야한다며 다니엘의 이름을 부러워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교사에게 'Daniel'과 'David'는 'Da Family'라며 헤어진 동생을 만났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집안사람을 운운하는 그의 말에 그 때를 떠올린 다니엘은 인종차별의 삼각형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머릿수마저 딸리는 이 곳에서 성우가 학생회장까지 할 수 있는 비결이 보편적 유머와 센스로 무장한 그의 화법 때문일거라 결론 내렸다. 그리고 아마 그 때 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다니엘이 성우에게 묘한 편안함과 유대감 같은걸 느낀 때가.

 


"형님이 물어보는데 얼른 대답해야지. 집안 법도에 장유유서가 엄연한데."

 


이 아침의 등굣길이 끝나가는 길목에서는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다른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

 

 

 


다니엘은 항공사에 근무하는 아버지가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아 덴마크 땅을 밟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중학교에는 행정상 입학 절차만 마쳐두고.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북유럽은 교민사회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매우 작았고, 그나마도 연령대가 높은 부부거나 유학생 아니면 현지인과 결혼한 경우라서 다니엘이 그 곳에서 마음을 나눌 상대가 더 적었다. 다니엘의 부모님조차 학교에 한국인 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교장에게 전해듣고 놀랄 정도였으니.
성우의 아버지는 외교부 직원이었고 코펜하겐에 온지는 1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나도 딱 지금 너랑 똑같은 시기에 왔네, 이것도 인연이다. 그치 다니엘. 눈을 맞춰오며 웃음을 건네는 성우의 주위가 화사하다.


 
"여기가 싫은거야 아님 한국을 떠난것 자체가 싫은거야?"

 


100% 호밀로만 만들어 까맣고 시큼한 폴콘브로트를 우물거리며 성우가 물었다.

 


"여기가 싫어서요.. 근데 형 그거 맛있어요?"

 


남이 먹다 뱉은 사탕을 주워먹는 꼬마를 쳐다보는 표정으로 다니엘이 대답하자 성우가 다니엘의 앞머리를 헤집는다.

 


"한 달만 지나봐 임마, 너도 나처럼 이거에 중독된다."

 


남들이 다 가고싶어 안달하는 북유럽이 왜 싫었냐고 물었다. 엄청 춥다고 해서요, 물론 영어도 유창하게 못 하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인데 여긴 영어권 나라도 아니고. 마음에 드는게 없었어요, 유럽이란거 빼고는.

 


"야, 그래도 한국처럼 때려 죽일듯이 춥진 않지 않냐? 여긴 좀 포근하게 추운 느낌인데... 안그래?"
때려 죽일듯이-라는 단어를 말 할 때의 표정에 원한이 가득 서려있어 감자를 포크로 푹푹 찍어대던 다니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니, 너 웃으니까 진짜 귀엽구나."

 

 

밤이 길고 추운 2월의 이 도시에서 환하고 따뜻한 곳을 찾게되는 것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확인할 필요도 없는 진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항상 성우의 주위에 사람이 많은 이유인 것 또한 분명했다. 뛰어난 영어실력이 뒷받침하는 우수한 성적, 문화적 차이를 거뜬히 뛰어넘는 잘 생기고 훤칠한 외모. 가볍게 던지는 농담에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그의 매너까지. 열 네살 소년 다니엘은 '세상은 넓고 잘난 놈은 많다'던 아버지의 말을 성우를 통해 실감했다.

 


"아- 잘 먹었다. 한국가면 폴콘 그리워서 어떻게 살지."

 


카페테리아로 오는 길에 점심 만이라도 맘편하게 한국말로 떠들면서 먹을거라며 저가 오는줄도 모르고친구들에게 엄포를 놓던 성우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딱딱하게 머리가 굳어 모든 것이 서툰 저에 비해 두 세 단계 앞을 보고 모든 것을 완벽히 해내는 성우와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난롯가에 앉아 따뜻한 머그컵을 그러쥐고 언 몸을 녹이듯 성우의 곁에서 그의 배려와 말들로 위로를, 힘을 얻고 싶었다. 어린 다니엘은 그런 성우의 곁이 오늘 하루만큼 더 좋아졌다.

 

 

 


-

 

 

 


다니엘의 의식에 '기억'이란 것이 자리잡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었다. 부모님의 결혼사진을 본 다니엘이 엄마아빠를 왜 저기 가둬놨냐고, 왜 자기만 여기 꺼내놨냐며 엄마아빠를 구하러 갈거라고 앙앙 울음을 터트렸고, 그 모습을 본 부모님은 폭소를 터트렸다.

 


"니엘아, 사진은 동화책 같은거야. 이거는 엄마아빠가 니엘이를 만나기 전인데 우리 다니엘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남겨놨어. 근데 봐봐, 동화책보다 더 진짜 같아서 좋지?"

 


동화책이라는 말에 울음을 그친 다니엘이 눈물 맺힌 촉촉한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보자 뽀얗고 보드라운 뺨을 쓸어주며 입을 맞춘 엄마가 아기의 호흡을 달랜다.

 


"우리 니엘이 동화책 좋아하잖아. 근데 사진이 훨씬 진짜같으니까 엄마아빠가 니엘이 만나면 보여주려고 동화책 대신에 이렇게 사진으로 찍은거야. 봐봐, 글씨는 없어도 너무 진짜같으니까 아~ 니엘이 엄마아빠구나~ 두 분이 행복하시구나~ 하고 알겠지?"

 


툭 튀어나온 채 눈물로 반질거리는 도톰한 아랫입술을 오물거리며 응, 하고 대답하는 아기의 입술에 입을 맞춘 엄마가 이윽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다.

 


"그래서 사진은 동화책 같은거야. 니엘이도 앞으로 새로 만날 사람들을 위해서 엄마처럼 한 장 한 장 직접 써보는거야. 그리고 그건 우리 다니엘만 쓸 수 있는 동화책이야. 우와- 진짜 멋있겠다 그치?"

 


 그 때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다니엘이 사진을 보는 것도, 찍는 것도 좋아하게 된 것은.

 

 

 


-

 

 

 


몸 쓰는 것을 꽤 잘하는 다니엘은 그만큼 자부심도 컸다. 단 하나, 아직 성장기라 그런지 좁은 어깨가 콤플렉스였으나 때마침 학교 수영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 매일 일과를 마치고 혼자 수영을 했고 덕분에 학생회 일로 귀가가 늦은 성우와 마주쳐 매일 하교도 함께 했다.

 


"다니엘, 내일 토요일인데 뭐해?"
"아.. 이제 여기 길도 좀 알 것 같고 해서... 사진이나 좀 찍으러 다니려고요."
"오~ 사진 찍는거 좋아해?"
"음...조금? 운동 다음으로 좋아하는거...?"
"나도 같이 가도 돼? 나 주말에 할 일 없어서 무지 심심할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공적인' 일과 전혀 관련 없이 온전히 '사적인'영역을 성우와 공유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등하굣길도 아닌 여가시간을 함께 하는 성우에게선 또 어떤 모습을 보게 될까. 사진 찍으러 나가는 길이 혼자가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아직 주무시는 엄마를 대신해 간식 도시락을 싸느라 분주한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2월 말의 코펜하겐은 역시나 꽤 추웠다. 그러나 성우의 말대로 어쩐지 포근히 감싸는 듯 부드러운 추위라 사실 다니엘은 현실에 닥친 코펜하겐의 생활이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는 것을 슬며시 깨닫는 중이었다. 발 끝으로 땅을 툭툭 치며 목에 건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다니엘의 손 끝에 빠알간 겨울이 맺혔다. 기다림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무심한 듯 주위를 둘러보는 다니엘의 까만 눈동자에 반가운 인영이 맺혔다.


조막만한 얼굴이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한다. 그 모습에 마음 속 어딘가가 바닥에서 살짝 떠오르는 듯 한 느낌이 든다. 카메라를 만지던 손의 반대쪽을 들어올리려다, 손에 든 간식가방이 걸리적거려 카메라를 놓고 조심스레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이쪽을 향하던 소년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고, 얼굴의 웃음이 조금 더 환해졌다.

 


"이야, 도시락도 싸왔어? 형이 반가워서 손까지 흔들고?"
"아빠가 싸줬어요, 처음으로 친구랑 놀러간다... 아, 친구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가 찡긋 하는 표정에 살짝 감춰진다.

 


"야,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 마음 맞으면 그게 친구지."

 


어깨를 툭 하고 치는 가벼운 손길이 오늘도 어김없이 다정하다. 마음이 맞으면 친구. 우리는 정말 마음이 맞는걸까. 특별한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등하교를 같이하고 점심을 몇 번 같이 먹었을 뿐인데 그것 만으로도 우리 영혼의 파장이 잘 맞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와.. 나 카메라 구경 한 번 해봐도 돼?"

 


카메라 위 손등에서 느껴지는 성우의 차가운 손끝에 정신을 차린 다니엘이 말 없이 카메라를 건넨다. 보고 계세요, 제가 앞장설게요. 발 밑에만 좀 조심하세요. 다니엘이 찍어온 사진에 시선을 묻은 채 소리 없는 숨을 내뱉는 성우를 보며 괜히 민망해진 다니엘이 슬쩍 카메라 스트랩을 잡고 성우를 이끌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거야?"
"King's Garden이요"
"아 거기.. 거기 그냥 공원인데..."
"아,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요. 다른 이유 없어요."

 


타박 타박 타박. 고개 한 번 들지않고 이것저것 던진 질문에 시덥잖은 대답을 내놔도 군소리 없이 여태 다니엘이 찍은 사진에 몰두한다. 그렇게 온전히 저에게 의지해 이끄는대로 조용히 따라오는 성우가 처음으로 귀여워진 다니엘이다.

 

 

King's Garden에서 시작해 그저 쭉 걸었다. 공원에서 사진을 찍다가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앉아 다니엘이 싸온 샌드위치와 감자칩, 그리고 첫 외출 기념이라며 성우가 산 핫초코를 먹었다. 제법 사진 연습을 한 다니엘은 빛의 각도에 따라 여기저기 앵글을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고, 그러느라 말 없이 훌쩍 자리를 옮기는 일이 잦았는데 성우는 단 한번을 '왜 말도 없이 가느냐'는 타박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다니엘이 사진을 찍고 슬쩍 곁에 서면 모니터로 사진을 보면서 이건 좋다, 이건 정말 좋다, 이건 왜 이렇게 찍은거냐, 진지한 감상으로 맞이할 뿐.

 

 

겨울의 북유럽은 외출을 긴 외출을 허락하지 않는다. 추운 날씨가 그러했고, 짧은 해가 더욱 그러했다. 두 소년들이 두른 머플러에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하얀 숨이 만들어낸 설탕같은 흔적들이 서렸다. 이 곳 저 곳을 조금은 바쁘게 움직인 저와 달리, 추운 공원에 가만히 서서 사진찍는 저를 구경만 했을 성우에게 미안함을 느낀 다니엘이 극구 괜찮다는 성우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집으로 데려다 준다.

 

 

"어쩌다가 사진에 취미를 붙인거야?"
"음... 어릴 때, 부모님 사진 보고 제가 울었는데 그 때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사진은 동화책보다 더 진짜같은 이야기책을 만드는 거라고. 제가 찍은 사진은 저만 만들 수 있는 책이라고. 그래서 그냥 사진이 좋았어요, 어릴 때 부터요."
"이야~ 울었던 너는 귀엽고 달래주신 어머니는 멋있으시다아. 어릴 때 부터 꾸준히 몰두할 수 있는 취미란거 진짜 멋있다, 다니엘."
"저만 쓸 수 있는 책이니까, 제가 그냥 평소에 보고 사는 것들, 순간 사소하게 느끼는 것들 찍는게 좋아요. 멋진 사진은 저 말고도 찍는 사람들 많으니까요."

 


멋있다는 성우의 말 때문이었을까, 오늘 하루종일 같이 하며 사소하게 나눴던 대화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친구'라는 그 한 마디 만큼 가까워진 마음 때문이었을까. 부모님에게도 하지 않았던 본인의 사진에 대한 주관을 난생 처음 성우에게 털어놓았다.

 


"맞아, 어려운 사진은 오히려 그냥 잊어버리게 돼. 내가 피부로 공감하지 않으면 그건 좋은 사진이 아닌 것 같더라구.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

 


어느 새 집 앞에 다다른 성우가 다니엘의 목도리 매무새를 만져주며 작별인사를 건넨다.

 


"나, 네 사진이 정말 좋아. 사진에서 보이는 네 속의 진짜 네가, 정말 너무 좋아 대니."

 

 


그 후 성우와 다니엘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마다 함께 출사를 다녔다. 때로는 성우의 주문대로 촬영을 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성우를 모델로 촬영을 하기도 하고. 다니엘은 성우를 찍는 일이 퍽 즐거웠다. 학교를 벗어나서도 성우에게는 늘 스포트라이트가 따라다녔다. 언제나 부드럽고 유쾌한 말을 건네는 입술과 선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눈빛. 다정하고 예의있는 몸짓까지. 구태여 포즈를 잡거나 표정연기를 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외모까지. 피사체를 마주할 때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고픈 다니엘의 사진에, 본인 삶의 숨결이 닿은 곳의 소중한 기억을 남기고 싶은 다니엘의 가치관에 더 할 나위 없이 부합하는 모델이었기에.

 

매 번 다니엘의 결과물에 칭찬을 아끼지 않던 성우가 학생회장의 위치를 이용해 학교 홍보물 제작을 빌미로 사진 공모전을 기획한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다니엘을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리라. 그 덕분에 티볼리 공원에서 처음 이뤄진 단체 촬영 행사에서 다니엘은 친구들이 조금 생겼고, 입상 후 학교신문에 인터뷰를 하면서 조금 더 학교에 정을 붙이게 됐다. 그렇게 다니엘은 성우 덕분에 학교에, 그리고 이 도시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비로소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오지 않는 삶의 순간들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오롯이 성우의 도움을 디딤돌 삼아.

 

 

 


-

 

 

 


"다니엘, 그거 알아?"

 


제법 따뜻해진 날씨에 뉴하운을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던 성우가 대뜸 하는 말에 눈썹을 쓱 올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발트해를 건너면, 스웨덴에 갈 수 있어. 말 그대로 기차로 바다를 건너는거야. 굉장히 굉장하고 엄청나게 엄청나지 않겠냐?"

 


망망대해 위를 건너는 기차라... 작은 것에도 낭만을 부여할 줄 아는 10대의 감성을 무한대로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상상이었다.

 


"다음주 콜?"

 


성우의 심장을 저격하는 듯 한 다니엘의 손짓에, 가슴을 움켜쥐고 으윽- 소리를 내더니 코올..하고 화답하는 성우.

 

 


그렇게 두 소년은 나란히 기차에 몸을 싣고 발트해를 건넜다. 깊디 깊어 파도마저 잔잔한 심해위를 아득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그 경험. 차창에 비치는 얼굴이 마치 검푸른 바다 위를 비추는 햇살처럼 물결에 투영되었다. 바다 위에 내가, 그리고 나와 함께 나란히 창 너머를 바라보는 내 옆의 소년이 스며든다. 창 밖에 보이던 육지가 어느 덧 끝이나고, 온전히 바다로 몸을 내던지는 그 순간의 풍경은 커다란 공기방울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과 같았다.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시각적인 자극이 주는 기분좋은 어색함과 머리 뒤쪽에서 느껴지는 짜릿함.

 

형, 저기 바닷물에 비취는 내 얼굴이 사실 창에 비취는 내 얼굴이 아니라 진짜 또 다른 내가 저 곳에 살고있는거면 어떡하죠. 다니엘은 곧잘 상상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단어들을 입밖으로 꺼내곤 했고, 그런 다니엘에게 성우는 단 한 번도 헛소리 말라고 핀잔주는 일이 없었다. 고요와 반성의 순간을 마주할 때면 언제든 저 곳에 살고있는 또 다른 너를 만날 수 있을거야. 하고 지금처럼 다정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렇게 바다 위에 떠오른 두 소년의 얼굴에 이따금 일렁이는 물결이 부딪혀 만들어낸 잔주름같은 파도의 거품은 글쎄, 두 소년의 마음이 부딪혀 기억 속에 새겨지는 주름일까. 보일 듯 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 자리에 있어서 평생 없어지지 않는 지금의 추억처럼.

 

 


5시간이 넘는 여정 끝에 도착한 스톡홀롬 곳곳을 두 소년은 정신 없이 돌아다녔다. 경도가 높아서 하늘도 높은걸까? 코펜하겐보다 하늘이 더 높은 것 같지 않냐는 성우의 말도 안되는 질문에 기자양반 될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받아치는 다니엘. 두 젊음의 웃음이 손을 맞잡고 올드타운의 오래된 건물 사이 가파른 계단을 숨 찬 기색도 없이 활보한다.

 


"찍사양반, 당신 사진, 내 기사에만 전속으로 싣게 해주지 않겠소?"

 


기념품가게를 돌아보던 성우가 북유럽의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트롤인형을 구경하며 말한다.

 


"그 트롤 인형이랑 똑같은 표정을 짓고 사진 하나 찍어주면 내 그리 하리다."

 


그러자 카메라를 들이대는 다니엘을 향해 거침없이 표정연기를 시작하는 성우다.


약속한거야, 너는 사진찍고 나는 기사쓰고. 우리 둘이 그렇게 평생 같이 대박내는거야. 알았지? 웃으며 성우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한 번 더 터지는 셔터음.


 

 


-

 

 

 


"아...근데 진짜 좀 갑자기다.."
"원래 한 번 움직이면 최소 3년은 있었는데, 이번엔 좀 빠르네... 내가 회장하고 그런게 처음이라 학교생활에 방해 될까봐 학기 끝날 때 말 해 주신거래......"

 


주말이면 한국으로 돌아간단다. 수영에서 본인의 기록을 갱신한 다니엘을 축하하는 의미로 하교길에 들른 공원에서 먹는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의 맛이 평소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다니엘이다. 저와 성우 둘 다 이 곳에 문자 그대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는 처지라 헤어짐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이렇게 갑작스레 다가올 줄은 전혀 몰랐던 터라. 아니, 사실 성우와 언젠가 '이별한다'는 전제 자체를 단 한 번도 두지 않았던 터라 다니엘은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을 현실에서 맞닥뜨린다는 건 아직 어린 다니엘에겐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경험이었을 테니까.

 


"..미..안해...다니엘..."
"에이... 형이 뭐가 미안해요, 형 잘못도 아닌데..."
"그래두... 말이 주말이지 이제 사흘 뒤라 인사할 시간도 별로 없구..해서..."
"아...형 짐도 싸고 해야겠네요..."

 


샌드위치의 베어문 단면이 몰래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말라가는 동안, 두 소년은 아무 말이 없다. 무슨 상념에 그리 가득 찼는지 아득한 눈빛을 하고는 그저 먼 곳의 잔디를 바라볼 뿐이다. 댕- 댕-. 벌써 저녁 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조금씩 시작되는 북유럽의 백야 덕택에 조금은 귀가를 늦춰도 될 핑계가 생긴 것을 이토록 다행으로 여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여름날이 소년들의 발치에 붉은 노을빛 햇살로 머물렀다.

 

종소리에 떠나간 의식을 불러온 다니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유없이 미안하고, 이유없이 버림받은 듯 한 지금 두 사람의 마음을 수습하기 위해서 다니엘은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처음 당신이 내 손을 잡아 주었으니, 잠깐이 되어야 마땅할 마지막은 내가 먼저 당신의 손을 잡겠다고.


그렇게 두 소년은 처음으로 손바닥을 마주하고, 손등과 손가락을 얽은 채 말 없이 그렇게 밝은 밤을 걸었다.
 

 

 


-

 

 

 


[이 번호 맞아?]


::ㅎㅎ 네 맞아요. 와 신기하네::


[ㅋㅋㅋ나도 짱 신기해. 널 한국에서 보다니!]


::ㅎㅎ그러니까요. 보자고 말은 했는데 진짜로 보게되니까 신기해요. 그치요.::


[응 ㅋㅋ 우리 대니 키는 좀 많이 컸어?]


::보시면 놀라실걸요. 저 진짜 많이 컸어요. 어깨도 넓어지고.::


[ㅋㅋㅋ다음주에 시간 되는거 맞지? 야 귀국한지 얼마 안됐을때 시간 많은거 다 알아~ 내가 해봐서 안다구!]


::ㅎㅎ맞아요 저 중학교 가기전에 덴마크 가는바람에 한국에 만날 친구들도 많이 없어요::


[야ㅜㅜ진짜로 그렇게 말하면 형 맘아프다ㅜㅜ 그럼 너 혹시 내일은 시간 되냐? 이 형님이 놀아주께]


::내일요? 아 내일...곤란하지 않네요, 형은 근데 내일 괜찮아요?::


[오케이! 그럼 내일 우리가 한국에서 만난다는 걸 실감할 수 있게 젤 한국적인 곳으로 가자. 북촌 콜?]


::ㅋㅋㅋㅋㅋ네, 콜이에요. 종로3가에서 봐요 형.::


[나 내일 11시쯤 일어날거니까 그 때 다시 연락할게! 잘자라 우리 애기]


::아 진짜 ㅎㅎㅎ 네 형 내일 봐요::

 

 


성우가 귀국하고 2년이 조금 안 되어 다니엘도 귀국했고 간간히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 받았던 터라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한국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함께 덴마크에 있을 때는 매일 얼굴을 봤고, 딱히 약속을 잡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가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기에 딱히 연락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후에는 이메일의 특성 상 연락이 오고 가는데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실시간으로 성우와 문자를 주고 받는 동안 액정 너머로 언뜻 보이는 본인의 올라간 광대가 어이없으면서도 마냥 즐거운 다니엘이다. 연애하는것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거고. 웃음섞인 혼잣말과 함께.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로 걸어가는데, 개찰구를 통과하는 작은 뒤통수가 익숙하다. 어딘가 어리숙한 걸음걸이,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작은 머리, 왜소해 보일만치 날씬한 몸인데 누군가의 곁을 지날 때면 실감하게 되는 큰 키. 좋은 옷걸이에 걸쳐진 검은 코트와 자연스럽게 세팅한 검은 머리가 지난 날 처럼 단정하다. 그 뒷모습을 조용히 따라가는 다니엘의 코 끝에 초겨울의 냄새가 스쳤고, 어느 덧 추운 계절의 대명사가 돼 버린 코펜하겐의 어느 거리 그 한 가운데 서 있다. 기차를 타고 바다를 건넜던 핵심 기억이 막 시작 되려던 그 때의 그 거리에

.

 


"그렇게 두리번거려도 한 번에 나 못 알아 볼텐데"

 


무심히 성우의 뒤를 지나치던 다니엘이 몰래 다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깜짝이야! 야! 너, 너! 와~! 다니엘, 언제 이렇게 많이 컸어어!?"

 


물리적 자극에 한 번 놀라고, 심리적 자극에 더 크게 놀란 성우는 어느 덧 눈높이가 훌쩍 높아진 다니엘의 넓은 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기에 바쁘다. 아니 지금 형이랑 키 차이 별로 안나는데, 형 왜이렇게 작아졌어요? 성우의 정수리에 큰 손을 턱 하고 얹으며 너스레를 떠는 다니엘의 가슴께를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콩, 하고 친 성우가 쓰읍-형님한테 까분다며 헤드락인 척 어깨동무를 해온다. 성우의 오른편에 맞닿은 자신의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그를 불편하게 하진 않을까, 하는 데 까지 다니엘의 생각이 미쳤다. 코트 너머로 전해지는 성우의 온기가 익숙하면서도 떨어져있던 세월 때문에 생경하게 느껴져 뒷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귓볼 아래 침샘이 조금 간지러운 것 같았다.

 


"또 가요?"
"응.. 이번엔 칠레. 두 달 뒤에 간대."

"와, 그럼 형 거기서 대학 가는건가?"
"아니 남미에서 대학 가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구, 아마 북미나 유럽쪽으로 갈 것 같아."
"그건 그래요. 기자 지망생 가오가 있지. 안그래요?"

 

 

북촌의 유명한 만두전골집에서 뜨끈한 만두를 호호불어 두 볼이 잔뜩 부풀도록 넣어가며 두 청춘이 미래를 나눈다.

 


"우리 사진기자님은 미래가 어떻게 되시려나아, 사진은 미국쪽인가?"

 


사리로 나온 공깃밥의 마지막 한 술에 겉절이를 척 올려 다니엘의 입에 넣어주는 성우. 아직 자세히는 안 알아봤어요, 그냥 영어랑 포트폴리오만 열심히 준비하는 중이에요. 아기새처럼 성우가 내미는 한 숟가락을 와앙 하고 문 다니엘이 대답하자, 아이구 여전히 잘 먹어서 예쁘네- 하며 하얗고 볼록한 볼을 톡톡 친 성우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잇는다.

 


"뭐 어디에 있든, 우린 지금처럼 계속 이메일로 연락하면서 다시 같이 있을 날을 기다리면 되는거니까. 너는 네가 잘 하는걸 하면서, 나는 내가 잘 하는걸 하면서."

 


다시 같이 있을 날. 7은 행운의 숫자라고 했고, 다니엘은 7글자로 이루어진 저 한 마디를 통해 그것의 진짜 의미를 지금 막 깨우치는 것 같았다. 성우를 만난 이래로 모든 것이 저에겐 행운이었기에. 그 때 처럼 다시 같이 있을 날.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든 그냥 그 날을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금방 끊어질 수 있는 타국에서의 짧은 인연이 오늘에까지 이어진 것 또한 행운이었기에, 다니엘은 성우가 말하는 미래의 그 행운 역시 굳게 믿기로 했다.


처음 덴마크에 적응하지 못하던 다니엘에게 성우가 말 했다. 타고있는 배가 마음에 안 들면 바꿔타면 되지만, 그 배가 떠 있는 바다는 바꿀 수 없으니 거기에 적응해야 한다고. 배를 바꿔타는 결정조차 스스로 못하는 우리는 더더욱 그에 순응해야 한다고.
그 때 만난 우리가, 지금도 많이 달라진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배를 바꿔타기로 결정할 수 있는 그 시기가 되면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무언의 전제. 냅킨으로 입을 닦고 립밤을 바르며 다니엘이 말했다. 쑥스러운 기색 없이 성우의 눈을 올곧게 응시하며.

 


"형이랑 같이 있는거면 나는 어디든 좋아요.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랑 있느냐가 중요하더라고요."

 


"우리 대니 많이 컸네. 이제 형이랑 똑같은 생각도 할 줄 알고."

 

 

 


-

 

 

 


뭐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다니엘은 꽤 이름난 영국의 아트컬리지의 사진과로 진학이 결정됐다. 학교 성적, 영어, 포트폴리오까지. 신경써야할 일이 너무 많아 살이 쭉쭉 빠졌다. 성우가 좋아하던 그 먹성이 어디 가지도 않았는데. 기숙사랑 OT자료를 이메일로 보내줄테니 확인하라고 했었지. 암호를 한참이나 생각해야 할 정도로 오랜만에 이메일을 확인했다.

 

[다니엘, 오랜만이야! 여기는 캐나다지롱]


무려 4개월 전에 성우가 보낸 메일이었다. 다니엘이 마지막으로 메일을 보낸 후 3개월 뒤에 온 회신. 와, 7개월만이라니. 헛웃음 뒤에 따라온 아련한 미소를 데리고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한 제목을 클릭했다.

 

 


- 다니엘! 잘 지내고 있어? 너 지금쯤이면 대입때문에 엄청 바쁘겠구나...


미안해ㅜㅜ 나도 입시때문에 넘 바쁘구 또 입학 하고 나니까 전공이 생각보다 빡세서 메일 확인을 못했어.. 그리고 학교과제랑 이런건 다 학교 인트라넷으로 하다보니까 메일 확인 할 정신이 없더라구ㅜㅜ 또 한 가지 핑계라면...내가 또 이 오지랖을 못 버리고 유학생 학생회에 들었어 ㅎㅎㅎ진짜 미안!! 석 달 만에 확인해서 혹시 너 삐졌으려나...


진짜 학생회는 둘째치고 학교가 너무 빡세서 그냥 아버지 따라 한국 들어가서 한국 대학 갈 걸 그랬나 생각 엄청 많이 해ㅜㅜ 그래도 캐나다 날씨도 좋고, 풍경이 좋아서 내가 진짜 참는다...ㅋㅋㅋ


다니엘, 이것좀 볼래? 나 대입 끝나고, 아버지 한국 들어가시기 전에 가족끼리 남미 여행을 했는데, 여기서 너 생각 진짜진짜 많이 했어. 왜 여기서 네 생각을 많이 했는지는... 사진속에 숨겨진 힌트를 보면 알 수 있을거야. 아 근데 너한테 사진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부끄러워 미치겠다 ㅋㅋㅋ


우리 대니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이 형이 많이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ㅜㅜ 근데 너 혹시 캐나다로 오는거면 내가 진짜 소름돋을 것 같아. ㅋㅋ 이런 운명이 있다니! 하면서 니가 좋아하는 짐캐리 흉내를 엄청나게 내고 다니겠지...ㅋㅋ


답장이...답장이 너무 늦어서 진짜 미안하구ㅜㅜ 소식 전해주라! -

 

 


오랜만에 느낀 성우의 흔적 끝에는 파란 하늘을 그대로 담고 있는 우유니 사막의 풍경이 뒤따랐다. 하늘과 땅이 온전히 하나되는 곳. 하늘을 담고있는 지상의 땅 위에 비친 성우의 얼굴. 마치 스톡홀름으로 가던 기차 안에서 파도위에 비친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 때의 기억을 불러오는 주문같은 사진. 구름을 밟고 서있는 다정한 옆모습. 구름 위의 내 사람. 홀로 외로운 시기를 보냈을지 모르는 저를 위해 하늘에서 보낸 사람. 성우는 다니엘에게 그런 사람일 것이다.


다니엘은 하늘보다 더 하늘처럼 빛나는 소금사막에 비친 성우의 실루엣을 손 끝으로 부드럽게 쓰다듬고선 영국에서 공부하게 됐다며 사진작가는 내가 아니라 형이 해야겠다고 급하게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젊은 청년의 삶이라는 건 깜깜한 귀신의 집을 통과하는 일과 같다. 어디서 어떤 것이 튀어 나올지 모르고, 주위를 둘러봐도 어둠 뿐이라 그저 눈 앞의 것에 집중한 채 밖을 향해 재빨리 걸어야 하는 것. 그래서 예상치 못하게 마주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최대한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 그 것들을 헤쳐나가고 어찌됐든 목표지점을 향해 서둘러야만 하는 것. 다니엘과 성우는 전력을 다해 각자의 어트랙션을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

 

 

 


다니엘의 어트랙션은 성공적이었다. 졸업을 즈음해 꽤 많은 수상을 하기 시작하다가 졸업전시회에서 지역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급부상해 대형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탄탄대로를 걷는 사진작가로 화려하게 사회에 데뷔했다. 에이전시에서 계약 기념으로 전시회를 제안했고, 여태 수상작들에 신작을 더해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열게 될, 신인에게는 조금 파격적인 조건의 전시회였다. 처음으로 본인의 이름을 걸고 하는 온전한 자신만의 쇼룸. 다니엘은 그 곳에 꼭 걸고 싶은 사진이 있었다.


바빠지기 전 부모님과 시간도 보낼 겸 귀국한 다니엘은 가족간의 회포를 풀고선 곧장 북촌으로 향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 이후의 재회. 그 곳을 꼭 담고 싶어서. 취미로 남겨 혼자만 끌어안고 넘어갔을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함께 할 미래를 당연하게 약속해 결국 이 자리에 올 수 있게 해준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리워서.

 

 


이미 계약 당시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와 경력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고, 학교의 졸업 전시회 수준이 아닌 에이전시를 끼고 하는 정식 사진전이었기 때문에 역시나 다니엘의 사진전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아직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깜냥이 안된다고 생각한 다니엘은 웬만한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하려고 했으나, 에이전시에서 요청을 다 수락하진 않아도 굵직한 매체에는 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 설득했다. 듣고보니 뭐, 어쨌든 작품성도 중요하지만 대중성과 인지도가 앞으로 활동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고, 영국은 자기 활동 무대면서 첫 단독 전시회이니만큼 인터뷰를 하는 것도 도움은 되리라 생각해서 겸손과 자기 PR의 타협 끝에 Independence의 인터뷰를 수락했다.

 


Savior's Whisper. 다니엘의 예명을 그대로 따온 첫 번째 사진전의 제목이다. 다니엘 사진의 특징이라면 피사체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나 온전한 인물사진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 모두가 어떤 풍경 사진이거나 한 인물의 일부분이다. 특히 관람객들에게 많은 주목과 질문을 받은 작품은 프레임 안이 깨끗하게 비어있는 Utopia...ing.

 

총 3주의 전시회 중 여론을 살피기 위해 인터뷰는 2주차 마지막 날 폐관 후로 잡혔다. 역시 생각보다 전시회가 성황을 이룬 덕분에 다니엘의 사인이 담긴 포토북이 일주일 만에 품절 위기를 맞았다. 넉살 좋게 사인을 부탁하는 매니저의 통화에 기꺼운 웃음을 건네고는 전시회장 한 켠의 사무실에 들러 팔이 아프도록 열심히 싸인을 했다. 싸인을 대충 마쳐갈 때 쯤 Sir, 하고 정중히 예의를 차린 매니저가 다가와 웬 동양인 남자가 이것 저것 메모해가며 심각한 얼굴로 관람하면서 사람들한테 감상도 물어보는게 어쩐지 사전취재차 온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유서깊은 언론사라 그런지 기자들도 무서울 것 같은 부담감이 있었던 다니엘은 미리 얼굴을 봐두면 일방적이긴 해도 내적 친분이 생겨서 인터뷰가 훨씬 편하지 않을까 싶어 펜을 내려놓고 슬쩍 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곳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 틈에 독특한 빛으로 빛나는 성우가 서 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조금 더 야위고, 조금 더 깊어진 눈빛을 한 채로. 시야 안에 그가 자리한 것 만으로도 코 끝과 피부에서 포근한 겨울냄새를 느끼게하는 마법을 부리면서.


이 사진을 찍은게 다니엘이라는건 꿈에도 모를 그가, 두 사람이 함께 탔던 열차 안에서 내면의 얼굴들을 마주하며 건넜던 발트해의 어디쯤을 찍은 사진 앞에서 열심히 관객들의 감상을 물어보고 있다. 작가가 가장 궁금한게 누구의 감상일지 당연히 짐작도 못 할 것이었다.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큰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다니엘이 꿈인가 싶어 눈도 비벼보고 볼도 꼬집어 보는데, 진지한 성우의 얼굴에 순식간에 미소가 피어나며 청명한 음성이 웃음으로 울리는걸 듣고나니 역시나 현실임이 와닿는다. 이 세상 어느 하늘 아래 있을지 몰랐던 다니엘만의 힘의 원천이, 언제 어떻게 정식으로 찾아 나서야 할까 고민 투성이었던 잃어버린 한 조각이 지금, 다니엘의 지척에서 그 옛날 그리운 시절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

 

 

 


마침내 다가온 인터뷰 날. 폐장 전 부터 전시회장에 와있던 다니엘이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성우를 기다린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어떤 표정으로 처음 성우를 마주해야 할까를 몇 시간째 고민하면서.


관람객들이 다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뷰어가 도착했다는 매니저의 말을 듣고 떨리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인터뷰 질문지를 체크하는 성우의 옆모습을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아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가 성우의 앞에 있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인기척을 느낀 성우가 고개를 들었고, 한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다. 그저 서로 눈을 맞춘 채.

 

 


티타임의 나라인 영국답게 매니저가 티테이블을 내오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성우가 감사하단 인사를 건넸다.

 

 

"자, 일단 인터뷰부터 빨리 끝낼까요."

 


한국말로 운을 띄우며 성우를 보고 웃는 다니엘에 그제서야 아, 그, 그럴까요? 하고 인터뷰지로 시선을 돌린 성우가 작게 심호흡을 하더니 하나씩 질문을 시작한다.


Reporter(이하 R): Savior's Whisper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우선 사진전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Savior's Whisper(이하 S): 아 반갑습니다 기자님. 뭐 저는 잘 하는걸 잘 한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 전시회가 영 쓸쓸할 것 같진 않았는데. 하하. 이 정도로 많이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R: 싸인 포토북 1차 품절 소식, 저도 들었습니다. 인터뷰를 많이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신인이신만큼 익숙치 않으실 것 같아 기본적으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실 질문 위주로 준비했으니 편하게 답변해주시면 됩니다.


S: 감사합니다. 기자님이 유난히 친숙하게 느껴져서 벌써부터 편합니다. 하하.


R: 다행입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질문인데요.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S: 10대 초반에 아버지때문에 한국을 떠나서 살 기회가 있었어요. 국제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 출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감을 좀 얻기도 했고, 저도 모르게 연습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때 저를 많이 응원 해주시는 분을 만나기도 했구요.


R: 그럼 사진 연습은 꽤 오래 하신거군요. 사진찍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뭐가 있을까요?


S: 음, 사실 저는 아직 사진작가로써의 경험은 많이 없는 편이지 않습니까? (R: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서 전시한 작품들도 그렇고 다른 작품들도 그렇고, 처음 대면하는 피사체를 찍은 경우가 많이 없어요. 제가 사진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때와, 그렇게 만들어 준 주변 환경을 떠올릴 수 있는 피사체에 아무래도 더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또 그런 사진들을 많이 좋아해주셨고요. 아무래도 피사체에 대한 제 애정이 많이 묻어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보시는 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 모든 사진을 통해서 아직까지도 반복재생되는 영화를 보고있어요. 근데 또 뭐 엄청나게 특별한 삶을 산 건 아니라 이 모든게 저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억은 아닐것이고, 그게 많은 분들이 제 사진을 좋아해 주시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R: 어찌보면 작가님의 집필 중인 자서전, 같은 거로군요. 작가님들의 사진이요.


S: 네, 와.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한 마디로 딱 정리해주시니까 정말 좋네요.


R: 감사합니다. 그럼 모든 작품에 추억이 깃들어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하나만 꼽는다면요?


S: 국제학교 시절 자주 갔던 공원을 찍은 Origin이랑 많은 분들의 토론주제가 되고 있는 Utopia...ing 입니다. 아, 덴마크에서 스웨덴으로 넘어가는 기차에서 찍은 발트해 사진, Reflection도 정말 좋아해요.


R: 역시 Utopia...ing에 특별한 사연이 있군요. 잠시 뒤에 여쭤보기로 하구요. 다음 질문 역시 전시회를 관람하신 많은 분들이 던져주신 질문입니다. 이제껏 찍으신 인물 사진들을 보면 다 손 끝, 뒤에서 찍은 반쪽 어깨처럼 일부분만 찍으셨어요. 얼굴이 나온 사진도 없고 온전한 인물사진 역시 단 하나도 없는데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S: 아, 인터뷰 일정을 잡고나서 대충 예상질문을 뽑아봤는데 이 질문은 사실 받고 싶은 질문이었어요. 제가 프로 포토그래퍼가 돼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사람을 가장 먼저 찍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어릴때는 소심하고 영어도 이만큼 잘 하질 못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게 참 힘들었어요. 그래서 삐딱선을 탈 준비를 한 상태였는데, 그 시기에 재능을 발견해주고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부모님 다음으로, 어쩌면 부모님 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입니다. 재능을 주신건 부모님인데 그냥 서랍장에 넣어둘 수도 있었던걸 꺼내서 예쁘게 닦아준게 그 분이에요. 그래서 인물사진을 시작한다면 그 분 사진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녹음기를 틀어놓고도 열심히 다니엘의 말을 받아적던 성우의 손이 결국 잠시 멈췄고, 성우가 인터뷰 내용을 받아적던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일 줄 모른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으나 둘 중 누구도 그 정적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러낸 진심에서 쏟아져 내리는 감정의 빛 줄기들을 침묵의 프리즘에 통과시켜 예쁜 색채로 정리하는 시간에 가까웠다.

 


R: 그렇군요. 작가님의 팬들이 그 분께 굉장히 감사드리겠는데요. 자, 이제 모두가 궁금해 하시는 질문입니다. Utopia...ing는 미완성 프레임인데 그 이유가 뭘까요?


S: 이 사진 역시 다시 만나서 찍을 그 분의 사진에 붙이고 싶은 제목이라 아직 미완성입니다. 그 분 자체가 저의 이상이고, 그 분과 함께 있던 모든 순간이 저에게는 너무나 완벽했던 하나의 세계라서 늘 그분과 함께 있을 때는 온전한 행복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이상향, 입니다.

 


놀라움에 살짝 올라간 짙은 눈썹 아래 성우의 까만 눈동자가 다니엘의 곧은 다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완벽했던 하나의 세계. 이상향. 저를 일컬어 다니엘이 내뱉은 뜨거운 진심.

 

 


R: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아마 이 인터뷰를 읽으실 모든 분들이 더욱 주목하시게 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계획과 작가님을 사랑해주시는 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S: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사진을 좋아하게 됐어요. 어머니께서 사진을 찍는건 저만 쓸 수 있는 동화책을 쓰는거랑 같다고 하셨거든요.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제가 아직 담아내지 못한 제 삶의 이야기를 조금 더 담아내보려고 합니다. 저의 삶이 곧 모두가 살아내고 있는 삶일테니까요. 그저 사진을 사랑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옆집 청년이 하는 이야기라 생각하시고 편안하게, 그리고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양념처럼 덧입혀서 마음껏 즐겨주시고 사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약에 취한 듯, 귀신에 홀린 듯 눈 앞의 성우에게 온 정신을 빼앗긴 채 작가로써의 이미지 같은 건 계산도 못하고 인터뷰가 끝이 났다. 마지막 다니엘의 답변을 노트에 정리한 성우가 녹음기를 정리하고, 노트를 접고 펜을 갈무리해 가방안에 넣고는 다시 한 번 똑바로 다니엘과 시선을 맞춘다.

 


"팬으로써, 그리고 인터뷰어로써 사적으로 궁금한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성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던 것 같은건 다니엘의 착각일까, 그 눈빛에 원망이 살짝 서린건 다니엘이 제 발 저린 탓이었을까. 멋쩍음에 허허 웃으며 얼마든지요. 하고 대답하는 다니엘.


"왜 본명이 아닌 예명으로 활동하시죠? 본명으로 활동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텐데요."

 


뒷 문장을 덧붙이는 성우가 급기야 다니엘을 흘겨보기에 이르렀다. 그런 성우에게 몸을 기울이며 나른한 저음의 울림이 또 한 번 진심을 담아낸다.

 

 


"제 예명이 Utopia...ing의 주인공 이니셜을 따서 만든거에요. 그 사람의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외로움의 암실에 갇혀있던 저에게 구원이었고, 빛이었거든요. 어쩜 이니셜도 본인같아요, 그쵸?"

 


여기까지 말을 마친 다니엘이 미지근해진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대답.

 


"그 분은 분명 자기 꿈을 이뤘을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아직 저는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더 성공하면. 그 때 제 유명세를 빌어서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려고 했죠. 근데 역시나 우리 둘은 꿈을 이뤘고 기적처럼 다시 만났네요. 행복합니다, 성우형."

 

 


흔들리는 성우의 눈빛과 살짝 떨리는 예쁜 입꼬리. 테이블위에 얌전히 놓인 성우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다니엘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유니사막 사진, 내가 너무 늦게 봤어요. 보통 입시도 아니고 유학입시라서 더 바쁘고 신경쓸게 많아서 포폴 준비하면서 내내 형 생각했는데 정작 메일 확인 할 생각을 못했어요, 나 진짜 바보같죠. 한참 있다가 부랴부랴 답장을 보내긴 했는데, 형도 많이 바빴죠."

 


겹친 손등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살짝 얽혀있는 두 사람의 엄지손가락.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라는 옷을 벗어내고 다가온 다니엘 덕분에 드디어 성우도 편안한 미소를 내보였다.

 

 


"아... 과제나 이런거 다 학교 인트라넷으로 해결하니까 내 개인 메일 쓸 일이 거의 없어서 나중엔 거의 잊고 지냈어. 보다시피 입사 한 후에는 회사메일 쓰고... 그래도 너 답장 확인은 했는데..."

 


갑자기 말꼬리를 늘리는 성우가 귀여운 다니엘이 언제 확인했느냐며 어느새 꽉 쥔 손을 흔들면서 물어본다.


"그게... 그... 군대에서......."
"뭐? 5년이나 지났는데? 5년동안 내 생각을 하나도 안 했단 말이에요!?"
"야, 무슨소리야! 내가 유학생 학생회에 있으면서 니 또래 애들 보면 니 생각을 얼마나 많이했는데! 다만... 다만 생각할 바로 그 당시에 메일을 확인할 수 없어서.. 그래서 나도 사람인지라 깜빡하는게 있구..."
"와, 나는 당연히 형이 답장 할 차롄데 답멜이 안와서 아 그냥 나 잊어버렸나보다 했단말이에요."
"미안해... 아니 군대에선 시간이 많잖아... 나보다 어린 후임들, 선임들 보면서 네 생각 정말 많이 했거든.. 하하하. 근데 니 말대로 5년이나 지나서, 너무 미안해서 답장을 못했어... 미안해, 다니엘."

 

 


몇 년 만인지 손에 꼽으려 해도 헷갈릴 만큼의 시간이 지나, 하늘의 도움으로 재회한 성우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자신의 이름이 기뻐 '다니엘이래' 하며 장난스레 입을 막고선 감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형 다시 만날줄은 진짜 몰랐어요. 캐나다에서 대학 다닌다고 해서 거기서 정착할 줄 알았거든요."
"나 원래 기자되는게 꿈이었잖아, 이왕 꾸는 꿈 크게 꿔보고 싶어서 영미권 메이저 언론사에만 지원했어. 하하, 나 진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들이댔네."

 


여전히 민망할 때면 목 언저리를 긁적이는 습관이 남은 성우를 보자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이 울컥 올라오는 다니엘. 테이블 위 성우의 손을 잡은 이후로 놓지 않았던 그 손을 꽉 쥐어본다. 그 때 성우의 핸드폰이 울리고, 확인 하니 선배 기자의 전화였다.

 


"다니엘, 나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명함을 건네며 일어나는 성우. 가방을 챙기고 허리를 펴 곧게 다니엘을 바라본 성우가 말한다.


"원래 이 기사 기획단계에서는 내꺼 아니었는데, 맡은 선배가 갑자기 사고가 나서 취재 단계부터 내가 넘겨받았거든. 우리 진짜 다시 만날 운명이었나봐. 방금 전화도 그 선배야. 어떻게 됐냐면서 자기한테 얼른 보내보래. 조만간 맥주 한 잔 하자."

 


웃으며 다니엘의 어깨를 툭툭 치는 성우의 손길을 받던 다니엘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 번 안아보자며 성우를 꼭 끌어안았고, 성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다니엘을 다정스레 토닥이는 성우다.

 

 


나 이제 갈게, 전화해. 하며 걸음을 떼고 그 뒤를 배웅하는 다니엘. 스튜디오를 나서서 멀어지는 성우를 바라보던 다니엘이 사무실로 뛰어들어가 카메라를 들고 나온다. 휴대폰을 들여다 보며 걷느라 멀리 가지 못한 성우를 따라 잡으려 뛰던 다니엘이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자 속도를 늦추고 카메라를 들었다. 재빠르게 들리는 셔터소리. 그려놓은 것 같은 날씬한 실루엣의 뒷모습을 몇 장 찍은 다니엘이 성우를 부른다.


성우형! 하면 돌아보는 순간의 모습을 셔터에 담는 다니엘. 처음에는 눈 앞의 다니엘과 그 손에 들린 놀란 성우가 예전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환한 미소를 보인다.

 


"다니엘, 내가 잘생기긴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찍는게 어딨어어"

 


겸연쩍을 때면 말꼬리를 늘이는 버릇도 여전했다.
 


"하하, 맞아요. 형은 옛날에도 잘생겼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잘생겼어요. 이거 봐봐요. 진짜 잘 나왔죠."

 


처음 출사를 나가던 날 다니엘의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 때의 성우가 과거를 뛰어넘어 지금 이 자리에 온 것만 같다. 정다운 기시감에 뒷목 어느 한 구석이 찌릿해진 다니엘이 그 곳을 몇 번 쓸어내렸다.

 


"야, 이렇게 막 찍었는데도 프로는 프로구나, 우리 다니엘. 역시 내 안목이 그냥 안목이 아니야."

 


다니엘에게 카메라를 넘겨주며 자연스레 팔짱을 낀 성우가 예쁜 점 위 짙고 풍성한 속눈썹을 찡긋하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나 다니엘은 지금만큼은 같은 무게의 농담으로 받아칠 생각이 없다. 성우를 찾기 위해 유명해져야겠다고 생각했고, 자기를 알아보고 기뻐해주길 바랐다. 온전히 제 삶을 살아내는 순간에도 그를 잊은 적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더 많은 드라마를 만들어냈음을 성우에게 다 털어놓은 지금. 꿈과 꿈이 맞닿아 마침내 기적을 만들어 낸 이 순간만큼은 마음과 마음이 닿아야 할 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 형 그 안목으로 보면 알겠죠. 내 인터뷰, 세상 사람들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면서 형 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인거요."

 

 

어느 새 팔짱을 풀어내고 다니엘 앞에 허리를 곧게 펴고 선 성우는 말이 없다. 다니엘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다음 주 신문에 실릴 다니엘의 인터뷰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면서도, 어간과 행간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는 이 세상에 옹성우 단 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건 아마 처음부터 이렇게 되도록 정해진 일 이었으리라. 인력으로는 절대 할 수 없고, 이 거대한 우주를 주관하는 어떤 이의 강력한 힘에 의해 연출되는 한 편의 영화처럼.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형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거에요. 학교도 알고 있었고, 마음 먹으면 부모님께 연락도 할 수 있었을거고. 근데 형 영국에 있는줄도 모르고, 이 넓은 세계 오대양 육대주 어딘가에 있을거란 생각만 하고는 더 유명해질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 처음에 형이 나한테 해준 것 만큼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형한테 가슴벅참을 선물하고 싶었거든요. 무심코 본 티비랑 신문이 특별하게 되는 순간을요. 아 근데 영국에 있는 줄 알았으면 가명도 안 쓰고 바로 강다니엘! 하고 등장 했을건데. 괜히 가오만 잡고 먼 길 돌아왔네요."

 


진지한 분위기로 시작한 고백이 어느 새 시트콤으로 장르를 전환했다. 밤안개 속에 번지듯 퍼진 가로등 불빛과 함께 굽이치며 흐르는 성우의 웃음이 마치 '대니가 귀여워서'라고 말했던 두 사람의 첫 등교길에서부터 이 곳까지 먼 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듯 하다.

 


"태양은 늘 그 자리에 있는거니까, 암실에 있다가도 문 하나만 열면 당연하게 빛 볼 수 있는 것 처럼 내 인생에도 늘 빛이 떠나질 않았어요."

 


웃음이 떠나지 않은 자리에 진중함이 깃든 성우의 양 뺨을 크고 하얀 손으로 가볍게 쥐어보인 다니엘이 깊은 호흡을 하고는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씹어 내뱉었다.

 


"형, 나 이제 정식으로 인물사진 시작해도 될까."

 


가만히, 다니엘의 무겁고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성우의 전화벨이 타이밍 좋게 울린다.

 

 

 


-

 

 

 


런던의 밀레니엄 브릿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전시회장.


Savior's Whisper: Pause and Completion. 하고 현수막이 걸렸다. 중세시대의 고풍스런 건물 안으로 들어가보면 부드러운 주황빛의 조명에 깔끔한 실내 디자인. 그리고 그 곳에 걸린 사진들

.
...ing#01, ...ing#02. 특별한 제목이 없이 넘버링이 전부인 사진들이 동선을 따라 주욱 걸려있다. 거리, 학교, 주택가, 놀이터, 운하. 운하가 있는 것을 보면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는 어떤 도시임을 짐작할 수 있고, 알록달록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건물의 벽면 또한 익숙하나 막상 이름은 잘 떠오르지 않는 북유럽의 어딘가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친숙하면서도 아련한 옛날의 기억같은 사진들을 쭉 따라가니 작년 이 장소에서 열린 것으로 추정되는 한 작가의 사진전 풍경이 또 하나의 사진이 되어 벽에 걸려있다. 그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런던아이가 빼꼼 보이는 고풍스러운 거리, 그리고 그 곳에 서있는 한 사람의 뒷 모습. 그리고 슬쩍 돌린 옆 모습에 담긴 옅은 미소 띈 입술.

 


지금 이 전시장에서 넘버링이 아닌 온전한 이름을 가진 단 하나의 사진. 단 한 사람의 사진으로 인물사진을 시작하고 싶다던 작가가 처음으로 완벽히 찍어낸 한 사람.

 


그의 Utopia.

 


그 기념비적 사진 옆 벽면에 낙서처럼 장난스레 쓰여진 한 문장.

 

 

 

Welcome to your utopia, my Danny.

 

 

 

 

**

 

 

Everybody loves the things you do
모두가 당신의 행동거지를 좋아하죠.
From the way you talk
당신이 대화를 하는 방법부터
To the way you move
당신의 몸짓까지.


Everybody here is watching you
여기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Cause you feel like home
당신에게는 마치 집 같은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에요.
You're like a dream come true
당신은 현실로 이뤄진 꿈같은 존재죠.


But if by chance you're here alone,
당신이 여기에 홀로 남아있는 순간이 온다면
Can I have a moment?
저에게 잠시 곁을 내어 주시겠어요?
Before I go?
제가 떠나가기 전에요.


'Cause I've been by myself all night long
이제껏 저는 많은 밤들을 홀로 지내왔거든요.
Hoping you're someone I used to know
당신이 제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말이에요.


You look like a movie
당신은 영화 같고
You sound like a song
노래 같아요.

My God
오, 신이여
This reminds me,
이것이 저로 하여금 상기하도록 하네요,
Of when we were young
우리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말이에요.


Let me photograph you in this light
이 빛 속의 당신을 사진으로 남기게 해주세요.
In case it is the last time
지금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잖아요.
That we might be exactly like we were
전에 우리가 그랬던 것과 아마 똑같을지도 몰라요.
Before we realized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기 전에요.


We were sad of getting old
우린 나이 듦을 슬퍼했었죠.
It made us restless
그것 때문에 마음 둘 곳이 없었죠.

It was just like a movie
마치 영화 같았고
It was just like a song
마치 노래 같았어요.


I was so scared to face my fears
나는 내 내면의 공포와 맞서는 게 두려웠어요.
'Cause nobody told me that you'd be here
당신이 여기 있다고 누구도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And I swore you moved overseas
당신이 다른 나라로 떠났다고 알고 있었어요.
That's what you said, when you left me
날 떠나면서 당신이 그렇게 말 한 그대로요.


You still look like a movie
당신은 여전히 한 편의 영화 같고
You still sound like a song
당신은 아직도 한 편의 노래 같아요.

My God
오, 신이여
This reminds me,
지금이 저에게 과거의 기억을 가져다 주네요,
Of when we were young
우리가 어렸던 그 시절을요.


Let me photograph you in this light
이 빛 속의 당신을 사진으로 남기게 해주세요.
In case it is the last time
지금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잖아요.
That we might be exactly like we were
전에 우리가 그랬던 것과 아마 똑같을 거에요.
Before we realized
우리가 알아차리기 전에 마지막이 다가왔던 그 때 처럼요.


We were sad of getting old
우린 나이 듦을 슬퍼했었죠.
It made us restless
그것 때문에 마음 둘 곳이 없었죠.


It was just like a movie
마치 영화 같았고,
It was just like a song
마치 노래 같았잖아요.


When we were young.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 말이에요.


It's hard to win me back
과거로 돌아가는 건 어렵겠죠.
Everything just takes me back
이 세상 모든 것 들이 저를 그 시절로 데려가네요.

To when you were there
당신이 그 곳에 있었던 그 때로,
To when you were there
당신이 그 곳에 있었던 그 때로.


And a part of me keeps holding on
아직 내 일부는 과거에 붙잡혀있어요.
Just in case it hasn't gone
아직 그 시간에 살고 있는 것 처럼요.

I guess I still care
아직도 난 그 시간을 살고 있어요, 내 생각엔 여전히 그래요, 난.

Do you still care?
당신도 여전히 그럴까요?


It was just like a movie
마치 영화에서처럼 말이에요.
It was just like a song
마치 노래에서처럼 말이에요.

My God
오, 신이여
This reminds me,
이 영화, 이 노래가 제 기억을 자극하네요,
Of when we were young
우리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말이에요.


When we were young...
우리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말이죠.


Let me photograph you in this light
이 빛 속의 당신을 사진으로 남기게 해주세요.
In case it is the last time
지금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잖아요.
That we might be exactly like we were
전에 우리가 그랬던 것과 아마 똑같을 거에요.
Before we realized
우리가 알아차리기 전에 마지막이 다가왔던 그 때 처럼요.


We were sad of getting old
우린 나이 듦을 슬퍼했었죠.
It made us restless
그것 때문에 마음 둘 곳이 없었죠.

I'm so mad I'm getting old
나이가 든다는게 날 미치게 해요.
It makes me reckless
그게 나를 무모하게 만들어요.


It was just like a movie
여전히 한 편의 영화 같았고,
It was just like a song
여전히 한 편의 노래 같았군요.


When we were young
우리가 어렸던 그 시절, 말이에요.

 

Adele - When we were 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