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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지나가요

 

 

 

 

 

 

 

 

 

오랜만에 넥타이까지 맨 게 영 답답했다. 집 대문 앞에 서서 자꾸만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니 지희가 계속 신경이 쓰였는지 내 어깨를 돌려세워 넥타이를 처음부터 다시 매 주었다. 잘생겼다니까? 진짜 괜찮아. 완전 최고야, 짱짱. 손에 든 선물세트가 유독 무거워 들고 있기 버거울 지경이었다. 아까 차에서 가지고 내릴 때는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빠, 이제 벨 누를게. 날이 추운데 지희를 집 앞에서 오래 세워둘 수도 없고 약속시간에 늦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 눌러. 지희의 손가락이 벨을 누른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상견례 이후로는 뵌 적 없던 지희의 부모님이 현관에 나와 서 계셨다. 그래도 곧 장모님, 장인이 되실 분들인데 뵐 때마다 세상에서 제일 먼 분들인 것처럼 어렵다. 허리를 푹 숙이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 . 내밀어지는 손을 공손히 잡고 흔들었다. 의례적인 인사가 지나가고, 눈을 돌려 현관쪽에 서 있는 키 큰 인영을 보았다.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는 지희의 남동생임이 틀림없다. 오늘 그를 보기 위해 이 집에 들른 것이었으니. 이제 남동생을 소개 받을 순서였다. 하지만 신발을 가지런히 두고 집에 발을 딛었을 때, 나는 내가 밟은 것이 현관 바닥인지 아니면 까마득한 허공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딱 이쯤에서 나쁜 꿈을 꾼 것처럼 깨어나면 좋을 텐데. 절망적인 머릿속과는 별개로 눈 앞에 보이는 형체는 또렷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저 서 있기만 하는 내가 이상했는지 지희가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기계적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옹성우입니다. 지희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인사치레라도 몇 마디 더 붙여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건너편에서 커다란 손이 다가온다. 맞잡는 손의 온도가 뜨거워 하마터면 그대로 손을 뺄 뻔 했다.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온도를 가진 남자가 말한다. 안녕하세요, 강다니엘입니다. 역시 똑같은 목소리에 나는 그때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대학교 4학년이면, 한참 지쳐있을 때였다. 급속도로 줄어드는 임용고시 디데이를 신경 쓰는 것도 짜증나는데 이제 와서 교생 실습을 보낸다니 솔직히 말해서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어차피 교생이라고 학생들이며 선생님들에게 죄다 무시당하고 제대로 된 수업도 못하고 올 게 뻔한데 시간 낭비 아닌가. 사범대학에 딸린 고등학교를 배정받은 나는 첫 출근날까지 오만가지 짜증에 휩싸여있었다. 아무렇게나 입고 갈 수가 없어 아는 형 양복을 빌려입은 것도 못 견디게 어색했다. 교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릴 때에도 내 머릿속은 밀린 인강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서 강다니엘은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는 학생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맡은 반 자체에 애정이 없었으니 어떤 학생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미없이 일주일 정도를 보내고, 담임 선생님의 출장으로 한 시간 수업을 맡게 된 날이, 다니엘이란 이름이 내 마음에 들어온 날과 일치함으로 거의 처음 만난 날이라고 해야 맞았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수업이라 준비고 뭐고 하나도 되어있지 않아 그날 들어가서 시를 필사하게 시켰다. 어떤 시든 좋으니, 핸드폰을 이용해서라도 마음에 드는 시를 검색해서 필사하도록. 어느정도 예상은 했다만 교실 안은 가관이었다. 최대한 짧은 시를 골라 아무렇게나 적는 학생부터, 노래 가사를 적는 학생, 심지어는 아무것도 적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드문드문 진지하게 시를 옮겨 적는 학생들 중에서도 강다니엘은 특히 열심이었다. 교실 뒤의 게시판을 보는 척 일부러 그의 근처를 맴돌며 힐끗힐끗 그의 종이를 훔쳐보았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치기 전까지 10분쯤 남았을 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그를 일으켜세웠다. 거기 학생, 필사한 거 낭독해 봐. 대다수의 학생이라면 말을 따르지 않았겠지만 얘라면 충분히 내 말대로 할 것이라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강다니엘은 그걸 저버리지 않았다.

 

 

 

 

 

]

 

1, 강다니엘입니다. 시키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하더니 목을 가다듬는다. 얘가 낭독한 것은 이응준 시인의 그대 오랜 불꽃이었다. 귀머거리에게는 음악이었고, 벙어리에게는 부르고 싶은 이름이었던 그대. 낮은 목소리가 교실을 채운다. 낭독을 마친 강다니엘이 자리에 앉는데 문득 눈이 마주쳤다. 나를 오래도록 보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나는 점점 학교에 가는 게 즐거워졌다. 1달여 남짓의 짧은 교생실습은 어느덧 20일 정도가 남아있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다니엘은 복도에서 서성이다가 출근하는 나를 맞이하곤 했다. 성우 쌤!!! 큰 목소리에 큰 몸짓이 뒤따르는 걸 볼 때마다 나는 걔보다 더 크게 웃었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나를 데리러 오고 수업이 끝나면 나를 데려다 주었다. 하나도 무겁지 않은 출석부까지 자진해서 나를 대신해 들고 다니는 얘를 볼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글쎄....

 

 

 

 

강다니엘이 손을 뗀다. 나는 불에 데인 듯 손을 툴툴 털고 싶었으나 다시 한번 여기가 여자 친구의 집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자각시키며 참았다. 그때도 단단한 손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한 어른 남자의 여문 손이다. 감전된 사람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우스꽝스럽게 넘어지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다니엘이 성큼성큼 앞서 부엌으로 들어간다. 나는 얘의 뒷모습을 보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앞으로도 계속 익숙하지 않았으면 했다. 얼굴 보고 살 자신이 없는데,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얘 자리는 내 맞은편이었다. 옆에 앉은 지희는 내가 긴장한 줄 알았는지 식탁 밑으로 연신 허벅지를 다독여 주었지만, 나는 그 눈을 보고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간이 꽤 지났다. 그러니 강산은 아니더라도 사람은 변하지 않았을까. 지희의 말대로라면 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고 지금도 유학 중이니 하루하루가 충만하고 바쁠 게 분명했다. 속으로 조심스럽게 바랐다. 제발 나를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태까지야 어느날의 따뜻한 순간으로 얘의 삶에 머물렀으면 하고 바랐었지만, 나 역시도 얘를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렇게 마주치는 건 싫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누가 그랬던가. 나는 지금 그의 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마음이 이렇게나 불편한데 밥이 제대로 넘어갔을 리가 없다. 밥을 가득 눌러담은 밥 공기를 비우는 건 엄청난 고역이었다. 이제 밥을 다 먹었으니 설거지를 하고 과일을 먹자. 순서를 정해두니 숙제처럼 느껴졌다.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푸르며 부엌으로 가는데 별안간 강다니엘이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에요, 가서 과일 드세요. 정중하게 사양하는 손길이 과했는지 손등이 닿는다. 뜨거운 걸 만진 사람처럼 후다닥 물러섰다.

 

 

 

 

 

제가 하게 해 주세요.”

“....”

처남.”

 

 

 

 

말하고도 내가 놀란 단어였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다니엘도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당혹감이라든지, 당황이라든지 하는 게 보였는데 그건 초면인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의 범주를 뛰어넘어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얘는 나를 잊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다. 강다니엘이 선수를 쳐 부엌으로 들어가버린다. 드라마에서도 나오지 않을 진부한 이야기다. 약혼자의 동생과 교생 실습 시절 몰래....

 

 

 

 

제가 할게요. 후다닥 걸어가는 게 좀 우스꽝스럽긴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얘 얼굴을 보고 과일까지 먹으면 정말로 체할지도 몰랐다. 주말에는 수업 연구를 해야 했으니 아프면 안 됐다. 나는 불쑥 고무장갑에 손부터 집어넣었다. 냉장고에서 과일을 가지고 가시던 지희의 어머니께서 우리 둘을 보시고 작게 웃으셨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싶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수세미 위에 주방세제를 짜고, 물을 틀 때까지도 얘는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릇 세 개쯤 씻었을 때였다.

 

 

 

 

선생님.”

 

 

 

 

얘가 나지막히 나를 불렀다. 물을 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듣지 못했다면 억지였다. 로봇처럼 어색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1

 

 

방금, 뭐라고....”

 

 

 

 

어색한 연기에 강다니엘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다. 이리저리 바쁘게 머리를 굴려도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생님, 여전하시네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다급하게 물을 트는 손이 떨리기까지 했다. 물소리 사이사이로 얘의 말이 파고든다. 애석하게도 빠짐없이 내 귀에 전달되었다. 심장이 북소리처럼 귀 바로 옆에서 울린다.

 

 

 

 

저 깜짝 놀랐어요.”

, 처남....”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겠다는 내 태도에 얘가 미간을 좁힌다. 이미 여기에서부터 나도 얘를 알아봤음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선생님 소리야 늘 지겹게 듣는 것이었지만 얘가 선생님 하고 나를 부를 때마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거나 혹은 펄쩍 뛰어오를 것 같았다. 시종일관 어색하게 웃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니엘은 내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 잘 지내셨죠. 임용고시 엄청 어려우셨을 텐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다시 만나니까, 참 그렇네요.”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끝끝내 마주치고야 마는 시선 속에서 불길이 피어오른다. 빨간색이 시야도 뒤덮고 머리도 뒤덮으며 위험 신호를 알렸다. 인생이야 원래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라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손끝과 발끝이 저릿한 게, 벌써부터 벌을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그날 단단히 체해 집에 도착해서는 먹은 모든 걸 게워내고 말았다. 완전히 지쳐 간신히 침대에 누워서는 자꾸 옛날 그때의 꿈을 꿨다. 천장에도, 베개에도 강다니엘이 따라다녀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

 

 

 

 

시간이 흘러간다. 강다니엘과 나는 화장대가 들어있는 박스를 사이에 두고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야근이라 화장대 조립은 예비 처남과 함께 하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지희가 원망스러웠다. 창피한 일이든 어쨌든 한때나마 마음에 담아두었던 사람과 함께 있는 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것도 신혼집에서, 단둘이서만, 이렇게 나란히.

 

 

 

 

 

.”

“...이제 선생님 아닌데 왜 그렇게 불러요.”

반말 해요. 그때는 반말 하셨으면서.”

요즘은 학교에서도 반말 안 해요. ...얼른 이것부터 끝내요.”

 

 

 

 

고등학교에서 선생님 하신다고 들었어요. 바라던 대로 됐네요. 다니엘이 칼로 박스에 붙어있던 테이프를 끊어낸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을 차곡차곡 꺼내다가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가볍게 그걸 받아든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행이에요, 잘 지낸 것 같아서. 얘가 눈을 접어서 웃는다. 어떻게 너는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던 그 시간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니. 나는 따라서 웃어 줄 수가 없어 못 본 척 하는 게 다였다. 내가 이음새를 잡고 있으면, 얘가 나사를 대고 드라이버를 돌린다. 말은 오고가지 않아도 조립 속도는 월등히 빨랐다. 지희와 했더라면 자정이 넘어서까지도 다 못했을 텐데.

 

 

 

 

어딘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이상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것과, 실행으로까지 옮기는 건 아예 별개의 문제다. 교생실습이 끝나던 날 어땠더라. 눈 앞의 이 예비처남은 사탕을 빼앗긴 어린애의 표정이 되어 나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 몇 장과 편지를 내밀었다. 언젠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사진작가가 되는 게 얘의 꿈이었다. 자신이 가장 찍고 싶은 피사체는 나라고, 그렇게 진심을 꾹꾹 눌러담은 편지였는데. 아주 언젠가 나를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더 빨리 자라겠다는 말은 있어도 기약도 없이 기다려달라는 말은 없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만 한 진심을 만날 수가 없었다. 잠깐 한눈을 팔고 있는데 얘가 나를 불렀다. , . 무슨 생각 해요. 이러다가 이거 어긋나겠다. 똑바로 잡아야지.

 

 

 

 

“... 그냥, 옛날 생각.”

“....”

얼굴 보고 있으면 생각나잖아.”

 

 

 

 

미세하게 틀어진 나무도막을 똑바로 맞췄다. 다니엘이 화장대의 다리부분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긴다. 잡고 있는 손에 힘이 풀려 그쪽으로 덩달아 끌려갔다. 나는, 안 보고 있어도 생각나던데. 얘도 나도 딱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서둘러 화장대 다리를 완성했고, 나는 재빨리 멀어졌다. 둘 다 그나마 어른 딱지를 달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강다니엘과 나를 이루는 부분에는 그래도 이성이 지배적이라서, 신혼집에서 처남과 매형이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서. 평소보다 빨리 뛰고 있는 심장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죄책감에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선지 나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다 빼고 순수하게 내 진심만 남겨놓으면 실습이 끝나고도 얘를 개인적으로 만난 건 내 의지였다. 다니엘이야 아직 애고,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탓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때 당시의 내 마음은 내 스스로도 이길 수가 없었다. 구차한 변명을 대자면 임용고시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얘를 만나서 뭔가를 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만나서, 밥을 먹고, 얘가 찍은 사진들을 구경하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가 그대로 헤어지곤 했다. 단 두번 그런 식으로 만난 게 전부였다.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거나 하는 류의 스킨쉽은 그때의 우리 사이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정정하겠다. 그때의 우리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도.

 

 

 

 

저녁은 드셨어요?”

아니.”

아직도 저녁 잘 안 먹어요? , 쌤도 진짜.”

 

 

 

 

그때보다 어깨가 넓어지고 더 단단해진 다니엘을 본다. 훌륭하게 자란 어른 남자였다. 이제 얘와 나 사이에서는 누가 더 큰 책임을 지게 될까. 밥 잘 먹어요. 마음속으로 무례하게 저울을 들이대는 나를 더 찔리게 만들 작정인 사람처럼 다니엘이 눈썹을 뉘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가 무의미하다. 누구 책임이긴, 당연히 전부 다 내 책임이지. 그랬던 건 아니지만 뜨겁게 사랑하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연인이라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같이 좀 웃어요.”

웃긴 얘기 아니야.”

그럼 쌤은 왜 웃는데요.”

 

 

 

 

나야 뭐, 그냥.... 화장대는 말이 오고가는 사이에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서랍의 손잡이를 끼워넣으니 인터넷으로 보던 완성품보다 훨 나았다. 누나가 좋아하겠네. 그러게, 지희 마음에 쏙 들겠다. 서로 꺼내면 안 되는 사람의 이름을 꺼낸 양 그 이후로 대화가 없었다. 서로 불타는 마음을 마주안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타는 가슴으로 살았으니 뜨겁게 사랑한 것도 맞는 말 아닐까. 사랑이라니, 머리를 잠깐 스친 것만으로도 영영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느낌이 들었다.

 

 

 

 

 

화장대를 들어서 안방으로 옮기는 일만이 남았다. 다리를 잡은 나는 몸체를 잡은 다니엘과 어깨가 닿았다. 얘도 옷을 다 입고 있고 나 또한 그랬으니 심장이 뛰는 게 전해질 리가 없음에도 혹시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는 게 닿을까 걱정이 됐다. 잔뜩 조심스러운 얼굴의 다니엘이 얼른 몸을 뒤로 뺐다. 그 짧은 찰나가 마치 영원처럼 길게 꼬리를 늘였다. 내가, 아니, 제가 할게요. 쌤은 가만 계세요.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을 할 새도 없이 다니엘이 화장대를 번쩍 들어 안방쪽으로 향한다. 나는 소소하게 방향 지시를 내리며 그 뒤를 따랐다. 텔레비전 옆에 사뿐하게 화장대가 놓인다. 굽혔던 허리를 편 얘랑 그리고 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랑, 안방에 단 둘이었다.

 

 

 

 

.”

“....”

만약에....”

 

 

 

 

내 이성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일말의 양심이 뒤에 나올 말을 재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 묻고 싶은 입이 간질거려 참기가 힘들다. 다니엘은 울고 싶은듯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만약에 말이에요, . 우리가, 우리가.... 어깨 근처를 배회하던 손이 닿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도망치듯 거실로 가버리는 등을 보다가 꼼지락거리고 있는 손가락을 말아쥐었다.

 

 

 

 

 

*

 

 

 

 

아픈 지희에게 줄 죽과 약을 사러 나온 길에 얘를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나를 보고 손을 들어 인사를 한 얘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짧게 목례를 했다.

 

 

 

 

반가워서 그냥....”

반가울 것도 많다. 여기서 뭐 해.”

편의점 가려고요.”

나는 죽이랑 약 사러. 집에 있지?”

 

 

 

 

일부러 주어를 빼고 말해도 대화는 잘 굴러갔다. 얘가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겨울의 거리를 같이 걸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다 보니까 제일 신기한 게 뭐냐면요, , 일단은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아요. 그리고 또 인종차별 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되게 많고. 다른 사람이 했더라면 뻔하고 흔했을 이야기도 얘의 입에서 나오니 충분히 들을 가치가 있는 말들로 변한다. 나는 평범한 일상을 조금 떠들었다. 방학이어도 보충 수업이 가득 잡혀 있고, 야자 감독은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된다고. 얘의 리액션이 어찌나 좋은지 가능하다면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런 부분까지 그대로인지 모르겠다.

 

 

 

 

너는 하나도 안 변했네.”

제가요? 저 엄청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전이랑 똑같아.”

쌤도 여전해요.”

 

 

 

 

여전히.... 밤의 거리로 조용히 사라지는 뒷말을 구태여 좇지 않았다. 그래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대신 팔꿈치로 얘의 옆구리를 툭 치며 놀리지 말라고 장난을 쳤다. , 놀리는 거 아닌데. 우리는 잠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이렇게 짧은 순간들이 쌓여 나는 영원토록 밤마다 뒤척이게 됨을 예감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어느새 우리는 길 끝에 다다라 번화가쪽으로 향하는 사거리 앞이었다. 죽집도, 약국도 지나친 지 오래다. 초록불이 켜지고 일제히 길을 건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었다.

 

 

 

 

 

.”

.”

저 있잖아요, 이번에 미국 들어가면 다시 안 들어오려고요.”

 

 

 

 

나는 너도 잘 지내라는둥 열심히 하라는둥의 제법 어른 흉내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을 깜박이면 눈물이 흐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눈가가 버석했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다시 다니엘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다. 매형과 처남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나갈, 지나간 사랑이다. 지나갈 마음이야. 지나갈 거야.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다니엘이 나지막히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지나가요. 가는 거 보고... 그때 저도 갈게요. 지금 우리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나는 다시 내 모든 걸 내 앞으로 돌리고 싶었다. 시작도, 끝도 모두. 너도 나도 사랑을 데리고 갈 수 없는데 어쩌자고 이렇게 마음만 커졌니. 결혼반지를 늘 끼고 다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채운 족쇄인 셈이다.

 

 

 

 

분명히 지나갈 텐데,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바람이 온몸을 할퀴는데도 무기력하게 서서 한껏 흔들리고만 있었다. 다니엘... 이런 마음으로 부르는 것조차 죄가 되는 이름을 힘겹게 뱉는다.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서만이라도 이것을 몰래몰래 사랑이라고 부르리라. 비록 지나간 것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