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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아마도 불변의 법칙

w.별피치내린다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세계를 구축하는 건 기억이나 추억 등 대부분 과거의 영향으로부터 올 것이다. 그리고 설마 그 기억이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세계에서는 아주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를테면, 밥 먹어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라든지. 코흘리개 시절 좋아하던 여자애가 철없는 장난에 의해 으앙, 하고 울어버릴 때의 목소리라든지. 아니면, 그저 이름이 불리는 소리로 인하여서도.

 

왜 모든 예시가 다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냐고 묻는다면, 강다니엘의 세계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니엘의 세계를 만드는 목소리 중 거의 대부분은 한 사람의 목소리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다니엘에게 삶의 순간에서 환희, 슬픔, 분노, 행복 등 인간이 느끼는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기억을 꺼내보라 한다면, 당연지사 그 목소리가 자동재생이었다. 그뿐이랴. 이름 붙이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도 다니엘은 그 목소리에서 배웠고, 그에게서 배운 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불변의 법칙처럼 작용했다.

 

그리고 분명 그 사람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면, 서글퍼지는 마음도 꽤나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세계에서 내 목소리가, 내 존재가 불변의 법칙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새에 훅. 고개를 들었더니 그제야 보이는 사람. 언제 이렇게까지 가까워졌지? 차마 인지하기도 전에 나에게 스며든 사람이 있다면."

 

귀에 쏙쏙 들리는 정확한 딕션.

 

"어쩌면 그 사람은 대가 없이 당신에게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설레어 온 가장 로맨틱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낭랑하고 청아한 목소리.

 

"아직 늦지 않았답니다. 인지하는 순간, 빠르게 뛰어오는 그 심장이 대답해주고 있군요. 지금 함께 있는 그 사람과 눈을 마주쳐보세요. 같은 온도임을 확인하는 날, 오늘이 아닐 이유가 있을까요?"

 

정당한 호흡과 편안한 톤까지.

 

 

"매번 다른 목소리로 만나는 로맨스를 읽어드려요, 오늘은 성우, 옹성우였습니다."

 

오케이, 녹음 끝. 수고하셨습니다.

 

김 피디가 큰소리로 외치자, 옹성우는 쓰고 있던 헤드폰을 곱게 내려놓고 부스 밖으로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터졌다. 수백 번은 족히 들었을 감탄이겠지만, 성우는 조금 멋쩍은 표정을 했다.

 

"진짜 대단해요, 성우씨. 대본도 고작 한 시간 전에 드렸는데."

"아니, 그러니까요. 아무리 저희 오래봤지만 이러시면은 저도 조금 곤란해가지구."

"에이, 또 없는 소리 한다. 15분 치 분량을 한 번도 안 씹고 바로 오케이 받았으면서."

"그게 직업이잖아요."

"이래서 옹성우, 옹성우 하는가봐. , 여기서 성우는 이름 아니고."

"아하하. 이름 개그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르시는 거죠, 지금."

 

원체 띄워주기를 잘하는 사람이지만 성우에게만큼은 곱절의 진심이 추가된다. 실없이 농담하는 사이로 감탄의 눈길이 이곳저곳에서 성우를 쓸어보았다. 부스 밖을 나오면 의외로 뭉글뭉글해지는 말투나 발음이 한몫했을 것이었다.

칭찬은 좋아해도, 시선은 좋아하지 않아 성우는 자연스럽게 그 공간에서 제일 친한 민현에게 가 붙었다. 김 피디는 으레 그러려니 여기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성우씨 드라마 씨디 하나 한다고?"

".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지금 디렉보는 애니메이션에 다준이 있거든. 오늘 아침에 말해주던데. 둘이 대학동기라며."

", 다준이요. 우와, 어제 말했는데 그새 한 다리를 건넜네. 어휴, 뭔 말을 못하겠어."

 

김 피디는 걔가 부러워서 그래, 장난처럼 웃고는 성우와 민현의 어깨를 동시에 툭툭 치고 나갈 채비를 했다. 해산 분위기가 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새 작품 첫 미팅이 언제라고?"

"성우야, 내가 스케줄 여러 번 말했잖아. 누가 보면 내가 너 매니저인 줄 알겠다."

 

민현은 핀잔을 주었지만, 부드럽게 말하는 투에서 딱히 책망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요새 작품이 밀려 들어와 바쁜 성우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민현도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막내 피디 타이틀을 달았지만, 같은 나이에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성우에게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

장르불문 다큐 나레이션부터 애니메이션 꼬마 주인공까지 종횡무진하는 옹성우는 예전부터 레전드라 불렸지만, 근래 들어 그것과 별개로 또 레전드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비엘작품 '' 전문 성우, 특히 바텀으로. 검색엔진에 옹성우, 라고 치면 연관검색어로 '신음소리'가 뜬다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계속해서 판이 커지고 있는 장르라고는 해도, 성우가 참여한 씨디는 여지없이 전례 없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맡는 배역마다 목소리 분위기가 확확 바뀌는 덕에 누구랑 붙여놔도 케미 터진다는 극찬 일색뿐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심지어 이번에 들어가는 새 작품은 예전부터 옹성우가 ''를 연기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많아서 벌써부터 기대작이었다.

 

"내일 오후 3. 미팅룸 A. 대본은 좀 연습했어?"

". 대충. 근데 어차피 상대역 선민 선배라며. 많이 합 맞춰봐서 괜찮을 거 같아."

 

민현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물었다.

 

"상대역 선민 성우님 아니야. 내가 말 안 했나?"

"선민 선배 아니야?"

"다른 작품이 먼저 계약된 상태라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했잖아. 이번에 신입으로 들어온 강,"

"옹성우!"

 

걷고 있는 복도 반대편에서 큰소리가 났다. 성우가 인사를 받았다. , 다준아. 민현은 말이 끊겨 언짢은 표정이었지만 상대방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야야. 나 완전 깜짝 놀랐잖아. 너 이번에 들어가는 거 상대역 알고."

 

성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걔 성우일 그만둔 줄 알았는데. 어쩌다가 다시 한대? 너랑 죽고 못 살았잖아."

 

주어가 빠진 문장들이 배려 없이 이어졌다. 성우는 이제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다준은 계속 입을 놀렸다. 대학 때도 지 신나면 앞뒤 없이 떠드는 놈인 줄은 알았지만. 한마디 하려고 입을 떼자마자 들려오는 이름에 성우는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너 후배, 인마, 강다니엘!"

 

3년만에 듣는 이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 입으로 수천 번은 넘게 불렀을 이름인데도 타인의 입을 통해 들으니 한없이 낯설었다. 가벼운 사이도 아니었고, 좋게 끝낸 것도 아니었던 헤어진 옛 연인의 이름. 3년이 걸려 겨우 잔잔하게 만들어놓은 감정의 파도가 그 이름 하나에 속절없이 요동쳤다.

 

 

 

 

 

 

무슨 정신으로 미팅을 끝냈는지 모르겠다. 새 작품의 총괄을 맡은 박 감독은 다행스럽게도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미묘한 기류가 흘렀지만, 박 감독은 그저 두 사람이 낯을 가리고 있다고 넘겨짚었다. 성우는 답답한 셔츠의 첫 단추를 풀었다.

그래도 조만간 호흡을 맞출 사람들인데 이렇게까지 굳어있으면 쓰겠냐며 박 감독이 끌고 온 술자리였다. 성우와 박감독이 한번, 다니엘과 박감독이 한번. 대화가 순환하지 못하고 뚝뚝 끊겼다.

"다니엘씨가 성우씨 대학후배였다면서요. 원래 얼굴만 아는 사이가 더 민망하죠, ."

분위기를 변명하기도 전에 알아서 오해해주신다. 대학후배가 아니라, 다준의 말에 의하면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고. 헤어졌다 3년 만에 재회한 상황이라고. 아까 답답한 건 셔츠 때문이 아니라 이 말이 목에 걸려 답답했었나 보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건지 박 감독의 전화가 울렸다. 실례 좀 할게요, 큰 건이라. 박 감독은 핸드폰을 챙기면서 술상에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같이 가져갔다.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서로 술잔만 쳐다보았다. 포장마차 안에 있는데도 왁자지껄한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던 성우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너는 내가 상대역인 거 알고 있었지."

"."

"그런데 왜 했어?"

"그럼 왜 안 해야 하는데요?"

 

성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내가 어떻게 니 얼굴 보고, 너는 어떻게 내 얼굴 보고 같이 작품을 해. 그것도, ? 이런이런 작품에서."

"로맨스?"

"미친 새끼."

 

툭툭 던지는 말마다 혈압을 오르게 만든다 싶더니, 결국 마지막에 가서 뇌출혈로 쓰러지게 할 요량인가 싶었다. 정말 말뿐이 아니라, 성우는 뒷골이 쨍하게 아파왔다.

욕지거리를 뱉었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허탈한 웃음이 났다. 대학시절에나 쓰던 입버릇이 먼 미래를 뚫고 지나와 툭 떨궈졌다. 그러니까 내 앞에 있는 얘 때문에. 성우는 마주한 과거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고작 얼굴 마주하고 말을 섞는 동안 불가항력으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스스륵 떠오른 빙산의 일각은 고작해야 완전히 고쳤다고 생각한 욕이라 할지라도, 그 아래에는 꾸덕한 옥탑방의 냄새라든지, 같이 쓰던 이불의 폭신함,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보았던 수백 편의 영화 같은....거대한 덩어리가 딸려왔다.

 

"왜 어떻게 지냈냐고 안 물어봐?"

 

다니엘이 물었다. 성우는 뻔뻔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니엘의 얼굴이 그렇지 않았다. 그 표정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나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겠구나. 성우는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내리눌렀다.

 

"니가 어떻게 지냈겠어. 나처럼 지냈겠지."

 

다니엘은 성우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너무 울어서 눈물샘에서 더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고, 거의 반쯤 죽은 송장처럼 들어간 군대에서 총까지 손댈 뻔하고, 나와서는 미친 사람처럼 연기연습만 했다고. 헤어지고 나서의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하지 마."

 

성우는 흔들리는 목소리를 잡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다니엘처럼 성우도 그가 떠난 후의 기억을 되짚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은 묵묵히 기다렸다.

 

"병신처럼 다 들어주고, 그랬냐고, 나도 그랬다고,"

 

목소리를 통제하는 일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격해진 감정 위로 발음이 눌리고 톤이 낮아졌다.

 

"그럴 거면 위한답시고 날 떠나지 말지 그랬냐고,"

 

다니엘은 옹성우의 목소리 하나로 숨긴 감정까지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성우가 그만큼의 감정을 보여주는 사람도 다니엘이 유일했다.

 

"다 받아주고, 껴안고 엉엉 울 것 같으니까, 나쁜 새끼야."

 

성우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울 것처럼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다니엘은 오히려 웃었다. 짐작한 대답이었다는 뜻이었다. 포장마차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두 사람의 공간만 고요했다. 다니엘은 소주잔을 들었다.

고요하다 생각한 건 틀렸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일은 그럴 수 없었다. 주량에 무색하게 속이 벌써 쓰렸다. 나도 너를 껴안고 울고 싶다고, 다니엘은 생각으로만 그치고 소주를 들이켰다.

 

 

 

 

 

 

 

다니엘은 어렸을 때 <도롱이의 천방지축 대모험>이라는 애니메이션의 광팬이었다. 그러니까 고작 7살이라 광팬이라 표현하기는 좀 그렇지만, 점심시간에 걸쳐 하는 그 만화가 끝날 때까지는 수저도 입에 대지 않고 화장실도 안 가고 티비 화면에 빨려 들어갈 만큼 집중해서 볼 정도였다. 다니엘의 어머니는 <대모험>이 결방했던 어느 날, 결국 도롱이가 모험을 하다 죽은 것이냐며 두 눈이 팅팅 부어 울어재끼는 아들을 보며 퍽이나 난감해하셨다. 다니엘, 도롱이 안 죽었어. 오늘은 좀 피곤해서 쉬고 내일 모험 떠난대.

 

같은 맥락에서 다니엘은 정말로 도롱이는 '도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도롱이 뒤에 사람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도롱이라는 존재가 정말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더빙이라는 개념을 아예 모를 때였다.

 

어느 날 중학생 소년이 된 다니엘은 까맣게 잊고 지냈던 도롱이와 우연찮게 마주하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건 티비에서가 아니라 라디오에서였다.

 

"하지 않을까 싶네요. 특별히 우리 옹성우군이 제일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요?"

"..다 너무 좋았어가지구 고르기 힘든데, 아무래도 기억에 제일 남는 거는 제가 처음으로 한 <도롱이의 천방지축 대모험>인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 때 나이가 몇 살이었죠?"

"8살이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이야. 진짜 대단하죠.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로 어린 아역이 더빙에 참여하는 일은 극히 드물잖아요. 그런 김에 부모님께 감사의 메시지를 남겨볼까요?"

"하하. 항상 감사하다구 생각해요. 사실 성우라는 직업이 돈을 잘 버는 직업도 아니구, 저희 부모님도 되게 고생하셨거든요. 그런데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아봐 주시고, 지원까지 해주시니까 너무 감사하죠. 대신, 너무 직업정신이 투철하셔서 아들 이름이 성우인거 빼고.."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고, 후로는 옹성우가 8살 때 녹음실 마이크 앞에서 처음으로 입을 뗐을 때 신동이 나타났다며 주변 어른들이 까무러쳤다는 이야기 등이 이어졌다. 타고나길 낭낭한 목소리도 한몫했다는 얘기도.

머리가 큰 다니엘도 더이상 도롱이가 진짜 도롱이가 아니라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 도르륵 굴러가는 청량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사람이 도롱이를 연기했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니, 사실은 그 목소리가.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그게 너무 미성이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라 생소하기까지 했다.

 

"부모님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거든요. 근데 저는 이게 되게 재밌는 거에요. 목소리 하나만 가지고 연기하려면 그 안에 감정이나 심지어 표정까지 들어있는 것처럼 해내야 하니까 더 어려운데 그래서 더 재밌고..또 해내면 되게 짜릿하구.. 막 희열감도 있고."

 

그게 다니엘 인생에 성우와 옹성우가 동시에 박차고 들어온 계기였다. 졸업 후의 다니엘은 극구 말리시는 부모님을 뒤로 하고 성우과에 덜컥 합격해 서울로 상경하겠다고 통보하고 그 길로 부산을 떠났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성우가 다니엘과 사귀고 나서 들은 이야기. 옹성우의 감상은 이거였다. 뭐야, 뭔데 쓸데없고 이상하게 로맨틱해.

 

우리나라에 성우 과가 있는 대학은 한곳이다. 적절한 필연과 적당한 우연으로 다니엘은 윗기 선배 옹성우를 만났다. 새내기 엠티 때 처음으로 성우를 만나는 자리에서 다니엘이 성우의 이름을 듣자마자 악수하던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 괴성을 지르고 펜션 주위를 두 바퀴 뛰고 돌아와 옹성우를 와락 안아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했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짜릿짜릿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고, 우리는 운명이 틀림없다고. 다니엘이 소란을 피우면 성우는 운명 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게 해줘서 고맙다고 웃었다. 말해준 적은 없는데, 진심이었다.

 

 

 

햇볕이 따뜻해서 옥탑방 창문을 열어두었다. 다니엘과 성우는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죽기라도 하는 것마냥 붙어 앉아서 대본집을 보며 연기연습 중이었다. 둘이 주로 고르는 대본은 비엘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몰입도가 남달랐을뿐더러, 생활연기부터 감정연기, 독백씬에는 나레이션 연습까지 할 수 있으니 둘에게는 최고의 연습 주제였다.

 

"솔직히 비엘 작품은 이제 거의 다 꿰고 있는 것 같아."

"맞나. 내는 이제 누가 제일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물으면 <옆집 남자의 은밀한 취미생활>이라고 말할 것 같다."

"그르니까. 진짜 그거 완전 노벨문학상 감인데. 나 그거보고 담날 학교 못 갔잖아, 마지막 장면에서 너무 울어가주구."

"오늘 맞춰본 것도 완전 재밌었지."

". 약간 캐릭터나 내용이 우리랑 비슷했어."

", 내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형도 그랬나."

 

다니엘이 별안간 성우를 와락 껴안았다. 성우는 좀 떨어지라고 웅얼웅얼 거리기만 할 뿐 껴안는 품을 밀어내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게 사랑스러워 성우의 이마 위에 쪽쪽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아까 대본에 이런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성우가 품에 안긴 채로 말했다

 

"솔직히 우리 이야기 대본으로 써도 재미있을 텐데."

"우리도 좀 인생 시트콤같이 살지요."

"캠퍼스 배경으로 하는 엔간한 작품보다 우리 얘기가 더 다이내믹하잖아."

"내는 그럼 성우형이 나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전화해서 여자인척 하고 싸워서 이긴 이야기 넣어야지.”

"그럼 나는 너 축제 때 내 후드티 다리에 입고 모델워킹한 거 넣을 거야.”

"에이, 그건 너무 약하지. 지난 번에 내가 사람 많은 데서 키스하려는 줄 알고 형이 놀라서 내 뺨 때린 거. 그리고 수습하려고 갑자기 대사 친 거. 그 때 진짜 웃겼는데. "

"...다니엘, 우리 흑역사 모음집을 만들고 그르는 거 아니야. 연애스토리라구."

 

그제야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린 다니엘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한 성우를 붙들고 한차례 또 뽀뽀세례를 퍼부었다. 간헐적으로 맞붙던 입술의 빈도가 줄고, 대신 더 깊어졌다. 웃던 얼굴들이 어느새 서로에게 집중했다. 웃다가도 한순간에 분위기가 불붙는 게 20대 청춘들다웠다.

 

"우리 정사씬 한번만 더 연습할까?"

 

입술을 다 떼지도 않고 다니엘이 짓궂게 물었다. 성우는 벌게진 얼굴로 투정 부렸다. 지금 목소리만 연습하려는 게 아닌 거 같은데. 다니엘은 이미 성우의 셔츠 단추를 푸르고 있었다.

 

"나는 정사씬 연습할 때 형이 내 팔뚝 잡는 게 그렇게 좋더라."

 

성우의 버릇이었다. 대본 속 주인공들이 관계를 맺을 상황을 연기할 때 다니엘의 팔뚝을 잡는. 시각적으로 아무것도 보이는 것 없이 신음소리와 음향효과만으로 상황을 생동감 있게 살려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상대와의 호흡이 중요했다. 서로에게 지금 이 정도의 흥분감이 있다,를 알려주기 위한 신호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진짜로 할 때도."

 

먼저 팔을 내어주는 다니엘과 그 위로 힘줄이 돋게 팔을 쥐는 성우. 다니엘이 숨을 참았다 터트리는 낮은 소리와 성우의 뚝뚝 끊어져 헐떡이는 신음. 서로의 체온과 숨소리를 의지하며 호흡을 맞추다 보면, 그 흥분감이 도를 넘어 꼭 침대로 넘어가길 몇 번이었고.

그럴 때면 온 세상에 둘 뿐이었다. 작은 옥탑방의 세계에서 불같이 사랑하고, 죽어라고 울고, 미친 듯이 웃고. 대본의 주인공들처럼 평범하고도 유별난 사랑을 했다. 영원히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옹성우는 이미 유명인이었다. 똘망똘망한 눈빛을 한 8살짜리 아이가 녹음 마이크에 대고 실감 나게 대사를 뱉는 광경은 아무래도 특종감은 되었을 것이라. 성우가 녹음하러 다니는 일상을 찍은 다큐멘터리가 꽤나 주목받았고, 후로도 토크쇼나 잡지인터뷰에도 실릴 정도였다. 물론 시간이 좀 지나자 대한민국의 특성상 금방 거품이 꺼지기는 했어도.

그렇다고 해도 같은 꿈을 가진 이들에게 성우는 일단 신기한 존재기는 했다. 그리고 부럽게도 가장 꿈에 가까이 있는 사람. 성우는 아직도 녹음제의를 받고 간간히 작품에 참여 중이었다.

여러모로 이미 내적 친밀감이 생겨있는 사람이 성격까지 쾌활하고 웃기기까지 해서. 성우의 겉모습을 보고 냉할 것 같다고 생각한 과 사람들은 적어도 이틀 안으로 생각을 고쳐먹곤 했다.

"옹성우, 이번에 무슨 애니메이션 한다며? , 완전 축하. 부럽다, 짜식."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아는 얼굴들이 축하인사를 해왔다. 성우는 웃으며 어어, 땡큐. 하고 지나갔다. 그냥 단역이야, 라고 말하기에는 성우계가 워낙 기회가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아 말을 아꼈다.

 

바쁘게 눈을 굴려 누군가를 찾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오는 B101 강의실을 지켜보던 성우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 왜 안나오지.

대부분 사람들이 빠져 이제는 찔끔찔끔 나오는 한두 명을 바라보다 성우는 강의실에 빼꼼 고개를 집어넣었다. , 통화 중이었구나. 한순간에 화악 밝아지는 얼굴에는 어제 내도록 함께 있던 게 무색하리만치 반가워 보였다.

 

"아이 알았다고. , 또 그 소리. 이제는 안 할 때도 되지 않았나. 내 벌써 1학기 끝나가는데."

 

성우는 다니엘 뒤로 살금살금 걸어왔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다니엘이 성우를 보곤 곤란하게 웃었다.

 

"그만 포기해라 엄마도. 일단 알았다, 내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끊는다."

 

성우는 다니엘 머리카락에 붙어있던 먼지를 떼어내며 물었다. 어머니?

 

"우리 엄마 닮아서 내가 고집이 센가.. 대단하다 울 엄니도."

"아직도 반대하셔?"

", 뭐 그렇지."

 

다니엘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강의실이 완전히 비어있음을 확인하고 성우를 품에 안았다.

 

"목소리도 멋있게 낳아주셨는데. 너 연기하는 거 들어보신 적 있어?"

"그런 거 신경도 안 쓴다. 돈은 돈대로 못 벌고, 고생은 고생대로 한다고 싫어만 하시고."

"대우를 좀 받으려면 상위 몇프로나 되야하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

"내는 그래도 직업만족도 최상인데. 애인 만족도도 최상이고."

 

내가 좋아하는 거 둘이나 가졌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나는. 다니엘이 순하게 웃으며 그랬다. 말 예쁘게 하는 거 봐, 내 애인. 성우는 따라 웃었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쉬었다. 도와줄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 무력감이 몰려왔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오며 산 성우는 하고 싶은 일을 반대하는 부모란 생소하기까지 했다. 뭐가 힘들어도 내색을 안 하는 다니엘을 잘 아는 성우는 불안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힘들 텐데. 부모와의 갈등은 오래가면 사람을 좀먹게 할 것이 뻔했다.

 

성우는 옥탑방에서 자취하고 있었고, 다니엘은 학교 근처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했다. 조건도 학교와의 거리도 훨씬 좋은데도 다니엘은 마다하지 않고 성우의 옥탑방을 들락거렸다. 성우는 다니엘의 물건이 거의 제 것만큼이나 쌓인 옥탑방을 둘러보며 밉지 않게 핀잔을 주었다. 이 정도면 집 합친 거랑 뭐가 달라.

 

"진짜 형이랑 같이 살까 봐."

"지금은 뭐 안 그렇구?"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요."

 

뜬금없이 고백을 던지는 다니엘에게 성우는 졌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내가 5년 먼저 좋아했으니까 시간이 아까워가 그런다.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쌓아둔 게 이만큼이라 빨리 줘야 하는데."

", 아마추어야? 내가 너 운명이라매. 뭘 조급해해."

 

성우가 시크하게 말했다. 다니엘이 하는 말버릇 중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를 인용하면서. 으악, 내 달달해서 죽는다. 성우의 말투가 달달함과 거리가 멀어도다니엘은 성우의 말뜻을 단박에 알아듣고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사랑스럽구로

다니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런 김에 우리 내일 오후수업인 거 알지요."

"뭐가 그런 김에야."

"우리 정사씬 연습 한번 할까요?"

 

성우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 그게 무슨 비밀신호야. 그냥 키스해. 다니엘이 크게 웃었다. 성우는 넘어오는 덩치에 뒤로 자빠졌지만 다니엘이 처세 좋게 머리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덕분에 성우의 머리와 분위기가 깨질 뻔한 걸 살렸다. 성우는 너 진짜 죽는다, 험하게 말했지만 입은 이미 푸슬푸슬 웃고 있었다.

문득 다니엘이 대단했다. 연기할 때 정말 좋아서 하는 티가 역력했고, 제게 애정을 줄 때는 넘치도록 부어준다. 힘들 텐데도 최선을 다해 좋아하는 걸 해내는 다니엘을 위해, 성우는 위로의 손길을 담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위로에 대한 대답으로 입술을 물고 달래듯 쪽쪽 빨다가 혀가 얽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등 뒤로 손이 대범하게 들어왔을 때,

 

 

"성우야."

 

현관에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쏟아진 플라스틱 통이 열려 갈비 조림 국물이 바닥을 적셨다. 성우가 좋아하는 반찬. 아마 인천에서 정성스레 담아져 왔을.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곤 뒤를 도셨다. 열대야라는 말이 무색하게 옥탑방의 공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절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와 동시에 성우는 얼굴을 감싸 안았다.

 

운명은 청춘이 행복한 걸 두고 보지 않았다. 서로에게 너무나도 커다란 감정이 무슨 장난이라도 되는 양. 비웃듯이 쉽사리 머리채를 잡아 차가운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성우는 눈물로 짓이겨져 따끔한 눈가를 계속 쓸어내렸다. 마음이 초조했다. 다니엘이 학교도 모조리 빠지고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 날 어쩌지도 못하고 우는 성우를 달래고 어른스럽게 다독인 게 다니엘이었다. 괜찮다, 햄아. 밤이 샐 때까지 우는 성우의 등을 도닥이고 끌어안고 위로했다. 잡다한 생각들로 과부하였지만, 단단한 다니엘의 품 안에 있으면서 성우는 마음 한편으로 안심이 됐다. 의지하고 싶고, 또 의지가 됐다.

좀만 지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해를 시킬 순 없더라도, 쫓겨나더라도. 다니엘을 포기할 순 없으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곁에만 있어 준다면.

 

<잘 생각해, 성우야. 평생에 해온 일이야. 순간으로 전부를 잃을 순 없잖니.>

 

두렵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엄마의 메시지를 받고 나서, 엄마가 무얼 걱정하는지 잘 알아 더 두려웠다. 그래도, 그래도.

 

쓸쓸한 옥탑방은 인기척이 들리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적막했다. 아래층에 연결된 철문을 끼이익 여는 소리와 계단을 꼭 두 칸씩 밟아 올라오는 소리가 천둥소리만큼 컸다. 성우는 달려나갈까 싶었다. 다니엘을 끔찍이도 보고 싶었지만, 일주일이나 연락을 하지 않았던 다니엘이 괘씸해 잠자코 있었다

 

"성우형."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온 다니엘은 또 천천히 성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벽에 기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성우에게 눈높이를 맞춘 다니엘은 우습게도 성우만큼이나 눈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그럴 거면 그냥 나하고 같이 울지. 여전히 힘든 일은 혼자 삭이는구나. 성우는 다니엘의 야윈 뺨을 쓰다듬었다.

한동안 말이 없는 다니엘을 천천히 뜯어봤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너 혼자 지내는 동안 무슨 생각한 거야.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 우리 이제 그만하자."

 

쓰다듬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심장이 서늘하게 식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다니엘의 눈빛을 보는 순간, 성우는 깨달았다. 얘 지금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연락 끊고 생각한 게 고작 그거야?"

".. 형은 나랑 다르잖아. 형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데. "

"나쁜 새끼야, 그래서 그만하자고."

"나 때문에 형 잘못되는 꼴 못 봐."

그럼 나는 나 때문에 니가 떠나는 꼴 봐야 해?”

 

다니엘은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독하게 참아냈다. 안 울려고 미리 많이 울어뒀는데. 쓸모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옹성우, 제발... 이건 내가 떠나야 맞다.”

 

성우는 그대로 고개를 다니엘의 어깨에 묻었다. 울음이 목구멍에서 막혀 온 몸이 아팠다.

 

<순간으로 전부를 잃을 순 없잖니.>

 

엄마 그게 아니에요. 지금 내 전부가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려 들어요. 순간으로 전부를 잃을까 두려워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얘는 지금 자신의 전부를 주고 있어요.

성우가 잠깐 보았던 다니엘의 눈빛은 세상을 잃은 자의 무너짐과 세상을 지킨 자의 단단함이 동시에 들어있었다.

 

"내한테서 제일 중요한 거 지키려는 방법이 이거여서 그런다. 옹성우, 제발 이번만 나한테 져주라."

 

다니엘은 성우에게 빌었다. 성우를 움직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성우가 다니엘의 팔을 부여잡았다. 너 진짜 치사해..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성우는 벌떡 일어났다. 너 진짜 치사해. 중얼거림이 점점 커져 이제 악에 받친 소리가 났다. 다니엘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보이지 않았지만 떨리는 어깨는 분명 울고 있었다.

 

그럴 거면 운명이라고 말하지 말지.”

“....”

너 진짜 치사해. 그럴 거면 이렇게 좋아하게 하지 말았어야지.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다니엘의 어깨가 떨림이 심해졌다. 성우는 그 순간 깨달았다. 다니엘이 어떤 마음으로 일주일을 보내고, 어떤 마음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어떤 마음으로 찾아와 이별을 통보했을지. 다니엘,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리고, 나도 너를.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너를.

 

성우가 그 마음을 몰랐다면 다니엘을 옥탑방에서 쫓아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다니엘의 순순한 등을 떠밀어 옥탑방 문을 쾅, 닫았을 때부터 성우는 주저앉아 숨이 넘어가도록 울다가 그 자리에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날, 현관에서 죽은 사람처럼 일어난 성우는 다니엘을 찾지 않았다.

성우는 머리가 밀려 군대를 갔고, 다니엘은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장장 3년의 연애였다.

 

 

 

 

 

 

 

 

 

 

"다니엘씨랑 성우씨 합이 진짜 잘 맞네요. 이번에 처음 작품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니까요. 신인인데 다니엘씨 연기도 엄청 잘하고. 성우씨랑은 좀 다르게 잘한다고 해야 하나. 엄청 자연스럽게 연기하지 않아요?"

 

녹음이 시작된 지 두 시간 만에 중간 브레이크 타임이 주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다니엘 주위로 금방 사람이 몰렸다.

 

"성우는 발음이나 대사 치는 스타일이 엄청 완벽하고 각 잡혀 있는 연기 같고 그런데."

"다니엘씨는 좀 부드러워. 발음이 씹혀도 생활감이 있어서 엄청 자연스럽게 들리고. 그래서 아까 8번째 씬 너무 좋았어. 진짜 대화하는 것 같아서."

 

누구보다 잘 아는 다니엘의 장점이었다. 다니엘은 사람 좋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했다. 성우는 말없이 물을 홀짝였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서로 대화하지 않은 채로 녹음에 들어갔지만 다니엘이 아무렇지 않은 척을 워낙 잘해 녹음 분위기도 다른 작품 때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변을 슥 둘러본 성우는 초조해졌다. 저 새끼는 좀 있으면 정사씬인데 신경도 안 쓰이나. 나만 미치겠나. 어디 가서 프로 의식하면 뒤처지지 않는다는 옹성우라, 괜히 성질이 났다.

 

", 우리 그럼 나가줄 테니까 화이팅입니다."

 

정사씬은 아무래도 다 같이 듣고 있으려면 연기하는 성우들도 민망하니, 자리를 비워주는 게 관례 같은 배려였다. 그래도 음향효과는 있어야 하긴 해서, 녹음 장비를 만지는 막내 피디인 민현만 부스 밖을 지키고 나머지는 자리를 비웠다.

 

"12 들어가겠습니다."

 

다니엘은 땀으로 축축한 손을 청바지에 애써 닦아냈다. 다니엘이라고 헤어진 옛 연인과 맞추는 정사씬이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기는. 벌벌거리는 손발을 감추느라 애 먹는 중이었다.

다니엘은 기다리고 있었다. 성우가 충분히 저를 미워해주길. 그게 다니엘의 가장 힘든 날들이자 성우의 가장 힘든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저에게 주는 처벌이었다.

그래도 이거는 너무..

다니엘은 남몰래 곤란하게 웃었다. 이거는 너무 심한 처벌이 아닌가.

 

두시간째 이어지는 녹음인데도 스토리 때문인지 두 사람의 연기 때문인지 긴장감이 끊기지 않았다. 전체적인 내용은 성우가 맡은 캐릭터의 복수극이었다. 원수의 아들인 다니엘 역을 이용해 복수하려 하지만, 그와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버린다. 다니엘은 성우의 정체를 알고서도 끝까지 사랑하는 남자 역을 맡았다.

녹음은 거의 후반부였고, 몰입감도 절정인 곳이라 가장 중요한 장면을 남겨둔 판이었다.

 

"너는 모르지. 내가 죽는 날까지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 너를 사랑하는 건데."

"사랑해."

"그래서 죽도록 괴로워. 너를 사랑하는 내가 미워."

"사랑해."

 

대사 사이사이에 괴로운 숨소리가 섞여들었고,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슬픈 비지엠이 뒤로 깔려있었다.

장담컨데, 베테랑 옹성우는 녹음하는 중간에 딴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절절한 다니엘의 고백을 들을 때마다 부스 밖으로 뛰쳐나갈 뻔한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이미 녹음하는 내내 태풍처럼 휘몰아치던 감정이었다. 나한테 하는 소리가 아니잖아. 정신차려 옹성우. 꼴사납게도 그런 생각을 하며 성우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좀 더 뒤에 흐느끼는 소리를 내야 하는 장면이 있다. 성우가 미리 준비했던 타이밍이 아닌데도,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음향효과로 뺨을 때리는 소리가 나더니, 성우는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을 참는 소리를 냈다. 팔을 휘어잡는 소리와 함께 뺨을 치는 소리가 멎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마. 너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알수록 내가 더 미워져. 알아?"

"사랑해."

"이거 놔. 안지마! 흐윽, 제발.."

"사랑해.."

 

성우는 터진 눈물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이 듣고 싶었다고. 우리가 헤어진 게 너무 사랑해서였는데, 어리석게도 사랑을 말하는 너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다고

낮고 진중한 너의 목소리. 넘치는 사랑을 담은 달콤한 목소리가 사랑을 속삭이던 수많은 밤들을 생각하며 영원 같은 고통을 버텨냈다고. 진심이 쏟아지는 만큼 울음이 통제되지 않고 터졌다.

이제 곧 키스신 후에 정사씬인데. 성우는 울음이 쉽게 멈추지 않아 당황했다. 끊어가기에는 타이밍이 애매했고, 감정조절을 하지 못한 건 개인의 실수라 성우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어떡하지, 그냥 끊어간다고 신호를 줘야 하나. 이제 다니엘 대사 한 번이면,

 

"언제까지고 말할 수 있어. 너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진짜로 이해할 때까지."

 

마지막 대사와 함께 스윽 딸려 올라온 다니엘의 팔을 성우가 바라보았다. 고개를 드니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몸은 빠르게 과거의 버릇을 기억했다. 0.1초쯤 순간의 판단으로 성우는 결심한 듯 헐떡이는 숨 새로 읍, 하고 막힌 소리를 냈다. 경직되어 올라간 어깨 조금 풀어졌다.

 

"하아.."

 

손목 조금 윗부분에 슬금슬금 자리 잡은 손은 수많은 연습처럼 자연스러웠다. 본격적으로 막힌 숨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음향효과가 들려오고 계속해서 성우는 달뜬 신음을 뱉었다. 성우는 숨을 껄떡이며 들이마실 때는 손에 힘을 주고, 다시 바들바들 떨어가며 내쉴 때는 손에 힘을 풀었다.

 

"으응..."

 

거의 본능으로 숨을 내뱉고 들이마셨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대본 없이 애드립으로 이어지는 신음소리는 완벽한 호흡으로 이어졌다. 터질 듯한 긴장감 속에 붙잡고 있는 팔 아래로 동맥이 둥둥 울리는 게 느껴졌다. 미묘하게 숨소리가 변할 때마다 성우와의 호흡이 점점 더 맞아떨어졌다. 성우는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다니엘의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과거에 떨어져 있던 시간을 모두 쏟아붓듯이.

,..!”

절정으로 치달았다. 몇 번이나 비음이 섞인 소리를 끊어내던 성우의 목소리가 높은 소리로 길게 끌어진다 싶더니, 팔뚝을 잡아 오는 손의 힘이 세졌다. 그리고는 손아귀의 힘이 주욱 풀렸다. 그와 동시에, 다니엘과 성우는 긴장된 숨을 후욱, 풀며 가쁜 호흡을 진정시켰다.

 

거친 호흡이 몰아치는 부스 안에서 성우와 다니엘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민현은 넋을 놓은 자신의 친구를 보며 물을 들이켰다. 성우는 초반에 숨도 안 쉬고 술잔을 들이키더니 지금은 술잔을 팽개치고 멍을 때리는 중이었다.

 

먼저 술친구 좀 해달라고 불러 놓고 멍만 때리는 건 무슨 심보일까, 성우야.”

 

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유전자가 흐름에도 민현은 성우의 거의 유일한 술친구였다. 동시에 제일 의지하는 친구일 수밖에 없었다. 성우의 감정과 상황을 재빠르게 눈치채는 세심함과 성우가 털어놓기 전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을 동시에 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얘기하려나, 민현은 이번에도 기다려줄 생각이었다.

 

민현아,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이냐면은..”

. 말해봐.”

첫사랑을 다시 만났거든.”

, 다니엘씨.”

...?”

 

그러려고 했는데. 조금 지나친가 싶었지만, 얼빠진 성우의 얼굴을 보고 민현은 결심했다. 오늘은 조금 성급해도 될 것 같다고.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려고 했지?”

 

성우는 민현에게 첫사랑의 존재를 알려준 적이 있었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얼빠진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안하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다니엘씨한테 엄청 쌩쌩 부는 칼바람 같이 굴어서 이상하다 싶었지. 근데 정사씬 녹음할 때 갑자기 팔을 잡길래. 궁금해서 다니엘씨한테 물어봤거든.”

 

성우 선배 버릇이에요, 다니엘이 그랬다. 그래야 호흡 맞추기 좋다고.

 

너 그런 버릇 없잖아.”

 

민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성우와 꽤 여러 번 작업하는 동안 단 한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걸 버릇이라 말했다. 다니엘과는 많은 시간을 그렇게 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 아직도 너 힘들게 하는 그 첫사랑.”

 

성우는 힘없이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무섭다 무서워 황민현.

 

그래서 어쩌고 싶은 거야? 첫사랑이랑.”

 

나도 그걸 모르겠어.

 

성우는 그렇게 말해놓고 자조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니엘이 밉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방식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성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저 부서질 것처럼 힘들었던 시기를 같이 보내고 싶었지만 또 혼자 참아낸 다니엘이 괘씸해서. 어쩌면 투정이었다.

용서는 벌써 했다. 이제는 뭐를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용기를 내야 할 때었다.

 

민현은 고민했지만 성우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성우다.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성우야, 그럼 왜 팔을 왜 잡았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면 그럴 수 없지. 의식하고 잡았다는 거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거잖아.”

 

“...”

 

왜 다시 내 앞에 나타났냐, 이거는 아니잖아. 꼴도 보기 싫은데 같이 일하게 된 상황에서 파토 안내고 작품을 계속 같이 한다고? 심지어 정사씬을 녹음하는데 예전 버릇을 그대로 했다고?”

 

“...”

 

그런 저의가 뭐야.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내가 하고 싶은 말. 성우가 중얼거렸다. 차분하고 또박또박 전해지는 민현의 말에 성우의 취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구실은 갖췄으니 달려나가야 될 때 아냐?”

민현이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술자리에 앉기도 전에 성우가 뛰어나갈 걸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건 완전히 취하지 못하고 버티던 성우에게도 반쯤은 해당되는 말이었다.

 

,나 다녀올게. 민현아, 미안. 진짜로 미안. 그리고,”

 

성우는 부산스럽게 옷과 핸드폰을 챙겼다. 그리고 가게 문을 열고 뒤돌아 민현에게 웃었다.

고마워.

 

민현은 뛰어나가는 성우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홀로 남겨진 민현은 나중에 성우에게 밥 한 끼 얻어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다니엘씨에게 얻어먹어야 하나?

 

 

 

 

 

성우는 무작정 거리로 나와 뛰었지만, 금세 갈 곳을 잃었다. 다시 만난 이후, 다니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까닭이었다. 성우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다니엘의 예전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3년 만이지만 번호는 쉽사리 눌렸다. 신호음이 갔다.

 

여보세요.”

 

성우는 파앗, 하고 웃었다. 상대는, 그러니까 여전히 같은 번호를 쓰는 다니엘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받기 전에 누군지 알고 받았다는 뜻이었다. 성우도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못 버틸 만큼은 아니었다. 다니엘이 불러준 주소 근처에 있는 놀이터는 그네가 알록달록했다. 그래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나머지 한쪽도 자리가 찼다.

 

익숙한 후드티었다. 성우는 또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동시에 울음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그걸 아직도 입냐.”

이거 편해. 그때 늘어나서.”

 

분위기는 놀랍게도 꽤나 편안했다. 성우는 민현이 한 말을 기억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성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너보다 한 살을 더 먹었어두 너가 더 어른스러웠잖아. 우리 둘 다 그때 어렸는데. “

 

다니엘은 조용히 들었다. 성우가 말하는 어렸을 때 보다 더 어렸을 적부터 사랑한 목소리였다. 사랑하는 그 목소리를 음미하듯 기다렸다.

 

그런데 나는 니가 다 책임지고 나를 떠난다는 게, 나만큼이나 힘들 거 아는데 어떻게든 혼자 해보려고 지랄 하는게...”

 

다니엘은 아마도 같은 자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성우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것도.

 

“...너무 화나고.”

 

3년이나 지나는 동안 옹성우를 잊지 못한 것도.

 

성우의 몸이 떨려왔다. 잘게 떨리는 몸이 처연했다.

 

“...속상하고, 미안하고..”

 

그래서 결국은 다시 찾아온 것도.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다니엘이 천천히 팔을 벌렸다.

 

그리고...보고싶었어.”

 

성우는 그 말과 함께 다니엘 품 안으로 안겼다.

보고 싶었어. 다니엘도 똑같이 말했다. 전부 이것 때문이었다. 옹성우가 미치게 보고 싶어서. 그를 떠나주는 게 답인 줄 알았던 어린 날의 다니엘이 감행했던 이별에 결국 스스로 고꾸라져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다시는 널 보내주는 일 따위. 두 번 다시 그런 실수 하지 않을게.

 

"그러기만 해봐, 이 나쁜 놈아. 그때는 이 정도로 안 끝나."

 

성우는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울먹한 목소리면서도 웃음기를 담은 눈은 예쁘게 휘어져 있어서. 사랑스러운 얼굴에 다니엘은 참지 못하고 두 뺨을 잡았다.

입술이 포개졌다. 눈물로 짠맛이 느껴졌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몇 년을 걸쳐 돌아온 서로의 자리. 익숙하게 나누는 숨소리와 입술의 촉감은 비어버린 시간으로 인해 낯설도록 황홀했고, 둘은 오래도록 그 숨을 나눌 명분이 있었다.

 

서로에게 돌아온 건 아마도 불변의 법칙이었을 수도 있겠다. 불안한 과거에 흔들려 그것이 불변의 법칙인 줄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네가 쌓아준 하나의 세계는 이미 나의 세계였고 너의 세계도 그랬다. 확실히 그 법칙을 인지한 순간, 우리는 그 법칙에 기쁘게 순응할 준비가 되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