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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 월간 1월호부터 이어지는 시리즈 작품입니다.

 

 

 

온 세상이 하얗다. 차갑다. 아무도 밟지 않아 소복이 쌓인 눈 위를 특별한 이유도 없이 걸어 본다. 하얗고,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몽실몽실한 흰 눈. 그 위에 내 발자국이 예쁘게 남겨진다. 그걸 보고 돌아서서 웃었다.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흔적을 새겨둔 곳이 있다는 건, 꼭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서. 조금 뒤에 누가 지나가면 곧 뒤섞이고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잠시나마 그마저도 좋아하곤 한다. 아마 인간의 유전자에 본능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리라. 자신을 남기고,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내 흔적이 어디라도 새겨지기를. 다시 앞을 보고 이번에는 뛰었다. 아직도 함박눈이 펑펑 내리며 세상을 하얗게 뒤덮는 중이다. 특별한 것은 아니다. 보통의 겨울이었다. 어김없이 계절이 돌면 반드시 찾아오고야 마는

 

 

 

공중정원

W.비뮤

 

 

 

 

"어데를 그래 싸돌아 댕기노. 감기 걸린다."

"내 추위 별로 안탄다. 괘안타."

 

그 말을 뱉은 것이 무색하게 맑은 콧물이 빠르게 밑으로 떨어진다. 얼른 소매로 훔쳐냈지만 코를 훌쩍이자 재원이 끌끌 혀를 찬다

 

"눈 온다꼬 개새끼 마냥 뛰어다녔네. 안 봐도 뻔하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머쓱하게 뒷 목만 벅벅 긁었다

 

"조심 쫌 해라. 이 바로 앞이 적진인데. 니 너무 정신 빠진 거 아이가."

"전쟁 터진 거 다 우리 태어나기 전 얘기고, 이 상태로 20년도 넘었다."

"미친놈. 그게 최전방 지키는 군인이 할 말이가."

"...그건 아니제."

"아무튼 저 새끼들 항상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아주 지랄 맞은 놈들이다. 의거이 니 처신 단디 해라, 알긋나."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건 생각만 했다. 밖으로 꺼내면 또 핀잔을 들을 말이란 걸 알았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교대할 테니 이만 들어가 보라 권했다. 아직 교대시간 쫌 남았는데, 괘안나. 호의를 베푸니 그제야 얼굴 근육이 조금 풀어진다. 고개를 끄덕이니 길게 한숨을 쉬곤 씩 웃으면서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멍하니 또 반대편을 바라보며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항상 이 자리를 지키고, 언제 올 지 모르는 반대편의 습격에 대비할 것. 물론 습격 비슷한 것 조차 내가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없었다

 

소속감. 나라. 진영. 그런 걸 나열하면 속이 답답해졌다. 모두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에 뿌리깊은 소속감을 가지고 있다. 오랜 전쟁이 있었다고 했다. 물론 내가 태어나기 전에. 길고 긴 지옥 같던 전쟁에도 끝이 나질 않았다. 결국 지친 두 나라는 중간에 휴전선을 그었다. 그 경계를 지키며 다시 안정을 찾고, 완전히 망가진 땅을 보수하고 때를 기다리며, 그렇게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른다. 윗 세대는 아무래도 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라 과격한 생각을 지닌 것이 대부분이다. 지독한 놈들. 당장 씨를 말려서 죽여버려야 한다는 둥. 사실 이 정도는 약과이고 입에 담기도 힘들 만큼 뿌리깊은 적개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다. 그 사실을 그대로 듣고 자란 아이들은 직접적으로 겪지 않았음에도 그 뜻 모를 적개심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그러면서 다시 단단하게 뭉치고 사기를 다진다. 가끔은 표적에다 적진의 얼굴을 상상해 보라며 활을 쏘는 훈련을 시키는 것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기괴하고 두렵다. 마치 우리는 우리끼리 뭉치기 위해 누군가를 증오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같다. 반대편의 땅을 밟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아마 그 쪽도 같은 사정이 아닐까 하고, 상상해 본다. 오랜 세뇌에 뜻 모를 분노를 품고 평생 만난 적도 없는 나를 미워하며

 

저녁을 먹기 전에 항상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이건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특별한 절차였다.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한다. 손을 모으고 법당에 세워진 기도문을 세 번 읽어나간다. 고대의 언어라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그냥 시키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따라 할 뿐. 이걸 해야 밥을 주니까. 다 외운 것 같으면서도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모르니 항상 아리까리 해서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틀린 부분을 적당히 다시 읇조린다. 그리고 모았던 손을 푼다. 주로 쓰는 손의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꾹 누르면 척추를 찌릿하게 관통하며 피로했던 정신이 맑게 깨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별한 피를 물려받은 사람만 가능하다던데. 그게 우리 가문이라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선대의 조상이 고대의 제사장을 지냈다고 했다. 주술도 부릴 수 있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 지, 거짓을 말하는 지까지 가려낼 수 있다더라. 얼핏 들었던 내용이다. 물론 그런 건 지금 시대에 와서는 아무런 권력도 갖질 못하고 상관도 없다. 사실 무릎이 꿇려 앉혀진 채로 몇 시간이고 강제로 자세하게 들었던 것 같은데. 졸음이 쏟아지는 지루한 얘기에 정신 없이 꾸벅꾸벅 조느라 머리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뒤에 길게 펄럭이는 옷이 불편하다는 생각 뿐. 가끔씩 이런 길다란 옷을 갖춰 입고 명상을 하는 시간도 보내야만 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하라니까 또 한다. 얼핏 들었던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건, 사실은 그 주술들이 지금도 전부 다 전해지고 있으며, 상상도 하기 힘들만큼 큰 힘을 부릴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그만큼 그릇이 되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으로, 아직 우리 같은 어린 애들한테는 아무 것도 해 줄 말이 없다며 꾸벅꾸벅 졸던 머리를 딱 소리가 나게 맞았었다. 안 알려 준다니까 뭐, 나도 그럼 안 할래요.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대충 말했더니 또 불호령을 들었다

 

우적우적 밥을 씹으며 '왜 우리 집은 고기가 없노.'하고 한 마디 했다가 또 죽어라 잔소리를 들었다. 고기는 동물의 영혼이, 살생은 영혼을 죽이고, 어쩌구 저쩌구. 나는 기껏해야 그냥 머리 좀 맑게 해주는 거 그것 뿐인데. 고작 그거 누리려고 태어나면서부터 고기를 포기해야 한다니. 가끔은 군대밥이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강고기 소리를 들을 만큼 미친 사람마냥 퍼먹는 걸 보며 다들 안쓰러운지 자기 고기를 한 점씩 건네주었다. 저 쪽에도 이런 이상한 집안이 있을까. 없겠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눈이 가득 쌓여서 그런지 확고했던 경계가 오늘따라 모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경계. 경계. 중간에 그어진 경계를 경계하는 인생. 멀찍이 나와 멍하니 눈을 따라 걷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한다. 뽀드득 밟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저기."

"뭐고."

 

분명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등을 톡톡 두드려오며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놀라 파드득 몸을 떨었다. 사방을 휘휘 둘러봐도 분명 아무 것도 없었다. 넓고 넓은 하얀 평원. 그 위에서 한 쪽 뺨에 세 개의 점을 가진 소년과 나. 단 둘 뿐이다

 

", 저 쪽 애지."

 

아무도 없는데도 아주 작고 작게 목소리를 낮춰 소속을 묻는다. 그걸 듣자 그제야 긴장이 확 들며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여긴 어디지? 도대체 내가 얼마나 멀리 온 걸까. 뒤를 돌아 보았다. 사방이 하얗고, 우리 쪽 진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 상태였다. 방향감각이 잘 잡히질 않는다. 대답은 않고 매서워진 눈초리에 급히 변명하듯 소년이 덧붙인다

 

"아니, 옷이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런 옷은 아무도 안 입거든. 재수없다고...그리고 나 혼자야. 보다시피."

"......"

"어디 숨겨 둔 무기도 없고."

 

위 아래로 집요하게 훑어 내려가던 시선을 의식하더니 한 마디를 더 덧붙인다. 보이는 대로 다 죽여라. 뿌리가 글러먹은 놈들이다. 어려서부터 지겹게 들었던 말인데, 그거 지금 여기 적용해야 되는 게 맞는 걸까. 순진하게 활짝 벌어지며 웃음을 머금는 입술. 예리하게 빼어진 눈꼬리가 웃지 않으면 꽤 매서울 것 같은데 살살 눈웃음을 쳐서 예쁘게 휘어 있다. 찡긋 올라간 코 끝. 소년과 청년을 모두 담아내는 듯한 짙은 눈썹. 적당히 각진 반듯한 턱 선에 말도 안되게 작은 얼굴. 이렇게 잘생기고 예쁜 애를 어떻게 찔러 죽입니까, 아버지. 꼬맹이 때부터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난생 처음 만나서 마주하고 보니 더 말이 안 된다.

 

"그 쪽 사람들은 다 니처럼 생겼나?"

"아니."

 

정신 없이 얼굴 구경을 하다가 멍청한 질문이나 했다. 무시해도 될 헛소리에 진지하게 대꾸해줘서 내 바보스러움이 한층 더 부각되는 것 같다. 농담인데. 그 쪽 사람들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도 못하나? 이건 생각만 하고 말하진 않았다. 갑자기 아! 하고 뭔가 떠오른 건지 품 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무기가 없다고는 했지만 그걸 그렇게 말한다고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 이유는 더 없다. 칼이라도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주춤 물러난다. 칼 대신 몇 번 꼬깃꼬깃 접힌 종이가 나왔다

 

"이거."

"...뭐고 이게."

"폭탄 아니니까 받아 줘."

"......"

 

손바닥을 쫙 펴서 내밀었다. 그 위에 종이 뭉치가 톡 떨어진다. 순간 바람이 훅 불어서 살짝 날아갈 뻔한 것을 급히 손을 맞잡는 것으로 구해냈다. 어른들 또 거짓말 했네. 피도 눈물도 없고 냉혈한이라 손도 다 차갑다고 하더니, 차갑기는 무슨. 부드러운 온기에 폭 안기는 것 같다. 어쩐지 열이 조금 오른 얼굴을 느끼며 종이를 펴 보려고 하자 필사적으로 막았다.

 

"아아, 안 돼! 집에 가서 봐!"

"뭔데 그래."

"그냥 편진데. 내가 언젠가 반대편 사람 만나면 주려고, 가지고 다녔던 거야. 지금 읽지는 말고..."

 

뭐 별건가 했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의 간곡한 부탁이니 그 정도는 들어주기로 한다

 

"혹시 다음에 또 만나면 답장 줘."

"일단 보고, 그러고 싶으면. 그리고 평생 못 만날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혹시라고 했잖아. 이름은 좀 그렇고, 나이만 알려 주라."

"......"

"싫으면 말고. 빨리 결정해. 나 오래 비우면 안되서, 들어가 봐야 해. 나는 열 아홉."

 

발을 동동거리면서 초조하게 뒤를 돌아본다. 나한테 결정하라고 하더니 먼저 말해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그럼 나도 말하지 않으면 불편해지잖아. 그게 사실이라면 나 보다 한 살 많았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는 검증 불가능하지만. 얘가 다시 만날지 못 만날 지도 모르는 나에게 거짓말을 할 확률은? 거짓말을 해서 얻는 건 뭐지? 따위의 생각을 하다 포기했다. 내가 불분명하듯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말 한다고 해도 상대 역시 그게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나는 열 여덟."

"뭐야, 어리네. 형이라고 해."

 

나한테 굳이 형 소리를 받아서 얻는 게 뭔데. 서열 따져봤자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까 또 그냥 옛다 먹어라 싶다.

 

", ."

"이렇게 쉽게 불러줄 줄은 몰랐는데."

"언제 볼 지 모르니까요. 그냥 해 줄게요."

"고맙다. 나 갈게! 꼭 또 보자!"

 

손을 흔들더니 제 발자국을 찾아 따라 통통 튀는 걸음으로 되돌아간다. , 이 하얀 평원에서는 발자국을 찾아 되돌아 가면 되는구나. 그걸 보고 나도 따라서 왔던 발자국 그대로 뒤로 물러난다

 

편지 안에는 작은 사탕이 종이에 쌓여 있었다. 보자마자 입에 털어 넣었다가 다시 뱉을까 고민했다. 독이라도 들어있는 거 아냐? 에이, 설마. 잠깐 얼어붙었다가 이미 혀 끝에 퍼진 단맛이 좋아서 그냥 맘껏 굴려먹었다. 따뜻한 난로 앞에서 조심스레 종이를 풀었다. 똑바르게 쓰려고 노력한 글씨가 귀여워서 글자 위를 손가락으로 쓸어봤다. 이 종이 위에서 고개를 숙이고 정성 들여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 갔을 걔가 생각나서 괜히 한 번 더 웃었다

 

안녕? 이걸 읽고 있는 당신은 행운이 가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미남이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이죠. 당신이 궁금합니다. 그 쪽은 어떤 음식을 먹고, 매일 뭘 하면서 살아가는지. 우리를 많이 미워하고 있나요? 그런데 그건 우리도 같아요. 저는 그게 슬프네요. 나는 당신을 본 적도 없는데 미워해야 한다는 게. 그래도 이게 전해졌다는 건, 우리가 만났다는 뜻이겠죠. 다시 보고 싶습니다. 내가 이 편지를 전했다는 건, 제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뜻이니까요. 답장을 기다립니다. 당신을 보고 첫 눈에 반한 미남으로부터

 

푸핫. 이게 뭐야. 어쩐지 편지를 풀려고 하니 귀가 새빨개져선 필사적으로 뜯어말리던 다람쥐 같은 얼굴이 눈 앞에 다시 선연히 떠올랐다. 큭큭대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냥 착하고 이뻐 보이긴 했는데. 이렇게 골 때리는 애인 줄은 몰랐네. 아니, 그래 형. 그 형은 참 독특한 사람이었구나

다시 보고 싶습니다

다시 보고 싶습니다

괜히 거길 몇 번 더 훑었다. 물론 다 좋은데, 특히 그 부분이 마음에 훅 박혀 들어왔다. 나도. 나도 또 보고 싶네요. 빙긋 올라가는 입 꼬리를 느끼면서 글자 위를 어떤 촉감이 느껴지기라도 하듯 살살 쓸어본다

 

 

 

 

 

깜빡. 분명 정신이 깨어나긴 했는데 너무 깊이 들었던 잠에서 단번에 빠져 나오질 못했다. 가만히 누워서 깜빡깜빡 눈을 몇 번 감았다 떠 보고, 미간을 꾹꾹 눌러보며 몽롱한 정신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애썼다. 꿈 속에서 엄청 행복했던 것 같은데. 꿈은 꿈이라 또 빠른 속도로 썰물마냥 내 머릿속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잡고 싶어도 잡히지 않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이유는 몰라도 어쩐지 중요한 꿈 같아서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인상적이었던 풍경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간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직접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아무것도 없는 하얀 평원. 그 곳에서 누굴 만났던 것 같은데. 누굴 만났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확실히 여자는 아니고 남자였던 것 까지만. 꼭 이런 것은 얼굴만은 검은 베일에 가린 듯 기억이 휘발되어 버린다.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 어쩌겠어, 꿈인데. 창 밖의 어슴푸레한 빛이 아직 새벽녘인 것을 알려준다. 또 알람을 맞춰 둔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일어났는데도 오늘은 묘하게 몸이 가뿐하고 개운했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아서 그런가. 간만에 맑아진 정신에, 잠에서 깨어나니 팽팽 돌아가기 시작하는 머리가 상쾌하다. 벌떡 몸을 일으켜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켜 봤다. 간 밤에 와 있어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었다

 

[이거 그냥 밴드만 갈면 되요?]

[생각보다 따끔하고 쓰리네요]

[자꾸 만져서 그런가 통 낫질 않네요]

[만지면 안 되요? 만질 때마다 아프긴 한데]

[재환씨한테 물어보기는 눈치 보여서]

[아파요]

[일어나요 빨리]

 

하루 꼬박 없는 연락에 먼저 하기에도 괜히 할 말도 없어서 꾸물대다 속만 썩히며 잠들었는데. 일어나니 이렇게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는 메시지를 잔뜩 보내두었다. 별 것도 아닌 것처럼 굴더니 완전 어린애마냥 작은 상처에도 어리광을 부리는 게 나이에 걸맞지 않아 귀엽다. 꼴랑 하루 지났는데 당연히 안 낫지. 그리고 그걸 왜 만져. 관심 달라고 투정이라도 부려요? 귀여워. 어떡해. 귀여워서 미치겠다. 그렇게 어른스러운 척, 온갖 예의는 다 차리더니 하루 만에 이게 뭐야. 막 뭐라도 부수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을 베개를 몇 번 세게 때려 해결했다.

 

[내가 가서 봐 줄게요]

[만지지 마요 덧나니까]

[일어나 있으면 답장해요]

 

 고작 여섯 시도 안 된 시간에 곧장 머리를 감으러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욕실에 들어갔다. 카페 오픈이 9시니까 그쯤에 맞춰 가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알면서도 몸은 더 빨리 움직였다. 혹시라도 빨리 가면 빨리 만날 수 있을까 봐. 가만히 있어도 신경 쓰이는데. 이렇게 내 관심을 받고 싶어 안달을 내니 가속 페달을 밟은 것처럼 마음이 빠르게 내달린다. 아직 당신이 누군지 난 제대로 알지도 못해요. 뭐 하는 사람인지, 왜 내 앞에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버린 건지

이유도 모르고 당신을 좋아하고 있는데

이유도 모르고 이따금 당신을 미워하고 있는데.

신경 쓰이게 하지 말아요. 혹여 사랑이면 어떡해요. 나는 아직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따뜻한 물줄기가 나를 녹여낸다. 꼭 그런 건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