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월간녤옹

 

 

 

 

 

* 프랑스영화 프라이스리스(원제 Hors de Prix) AU

 

 

 

 

 

 잠이 들었나. 미동 없이 부유하던 그는 별안간 물장구를 쳤다. 둔중한 무게를 가지고 수면을 치는 소리가 돔으로 된 천장에 부딪혀 웅웅 울렸다. 밀려난 물이 밖으로 범람한다. 하얀 물보라와 함께 길쭉한 몸이 수영장을 가로질렀다. 모양을 바꾸는 물그림자가 빛이 닿는 모든 벽에 일렁였다. 산란하는 형광빛에 눈이 부시다. 성우는 그것을 빌미로 반쯤 눈을 감았다. 반쯤 졸고 있다는 말과 상통했다. 공을 차도 될 만큼 넓은 내부에 수영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하기는 누가 미쳤다고 새벽4시에 수영을 하겠어. 가뜩이나 디너파티가 열린 홀은 거의 건물 반대편에 위치하고 층수마저 달랐다. 성우도 약 다섯 시간쯤 전에는 그곳에 있었다.

 

 늦은 새벽에 긴급호출이 울렸다. 성우는 8층의 당직 중 하나였고. 하필이랄 것도 없었다. 사람 부리기에 익숙한 투숙객들은 자주 시간과 상관없이 긴급하지 않은 긴급호출 벨을 눌러댔으니.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의 느릿한 목소리는 칵테일을 조제해줄 사람을 찾았다. 전문 바텐더는 퇴근한지 오래다. 그렇다고 vip룸에 머무는 고객의 니즈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아쉬운대로 성우가 대타를 뛴다.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전부라 만들 수 있는 종류는 다양치 못하더라도. 아마 무슨 맛인지도 모를 테다. 이미 몇 잔, 아니 몇 병은 마신 목소리였다. 성우의 예상은 빗나가질 않았다. 다만 간과한 게 있다면 손님의 외형이었다.

 

 촤르륵 물 떨어지는 소리에 퍼득 눈을 떴다. 수영장에서 갓 나온 몸은 빠지는 곳 없이 온통 젖었다. 거기에 반사되는 빛이 물그림자보다 백배쯤 더 요란스럽다. 멍청한 옹성우야 아무리 일이 많았기로서니 1206호 투숙객을 잊다니. 하루에도 수십명의 손님들을 접하면서 한명한명을 기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가끔 뇌리에 강렬하게 남는 인상이 몇몇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번에는 사심과 관련된 것이다. 성우는 이 손님과 단 둘이 독대하게된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취향에 들어맞는 사람을 찾았으면 뭐하나 건들 수도 없는 손님인걸. 의미 없이 깨끗한 잔을 닦다가 마티니 잔의 표면에 달라붙은 소금알갱이를 하나 뜯어 입에 넣었다. .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뭐해요?

 

 . 숨을 잘못 들이키다가 사레에 걸려버렸다. 그는 요란스럽게 쿨럭이는 성우를 턱을 괴고 구경했다. 송골하게 맺힌 물이 근육의 굴곡을 타고 흘렀다. 무슨 어깨가 저렇게저도 모르게 물방울이 굴러가는 궤적을 따라 눈알이 움직였다. 어깨에 점이 있네. 이유 없이 더웠다.

 

 잘생겼다는 말 많이 듣죠.

 

 성우는 제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온 줄 알고 헙, 또다시 들이키며 입을 막았다. 성우를 따라 다니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그러네. 숨 먹는 게 버릇이에요? 작업성 다분한 말로 성우를 당황시킨 그는 또다시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그걸 꼭 그렇게 지긋이 보면서 물어야하는 일인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배회하는 눈동자가 퍽 부산스럽다.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이 버릇은 아니구요어물거리는 발음은 옹알이인지 한국어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다.

 

 이름이 뭐예요?

 

 다니엘은 괜히 담가놓은 체리를 이로 물고는 눈웃음쳤다. 저거 지금 나 꼬시는 거지. 게이인건 어떻게 알고. 침이 꼴깍 넘어갔다. 성우가 약간만 부주의한 사람이었다면 기꺼이 수작에 응했을 것이다. 그는 다니엘과 동행한 여성을 떠올리며 간신히 정신을 잡았다. 각방이 아닌 2인실을 예약한 두 손님은 한눈에 봐도 나이차가 상당했으므로,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은 수년간의 호텔짬밥으로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성우가 짐을 옮겨주었다. 보통 어머니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진 않지. 징그럽게 손을 주물거리지도 않는다. 옹성우입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다니엘은 홍씨냐 공씨냐 되묻는 일이 없었다. 단번에 알아들었거나 성 따위는 그닥 신경 쓰지 않는 것이리라.

 

 성우씨. 좋아요 성우씨, 본인 잘생긴 거 알죠.

 

 그거 알아요? 나는 분명 바텐더를 불렀는데, 저기서 연예인이 걸어오는 거예요. 다니엘은 긴 팔을 휘적이며 온몸으로 설명했다. 성우는 아니에요, 답잖게 몸을 꼬며 겸손을 떨었다. 솔직히 잘생기단 소리 살면서 많이 들어봤다. 이 얼굴로 익숙지 않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언제 들어도 순수한 감탄에서 나오는 칭찬은 영 간지러웠다. 보지 않아도 피부 위로 느껴졌다. 다니엘의 시선이. 찬찬히 음미하며 훑고 있는 것을. 마치 미술품을 감상하듯 말이다.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손님과 눈을 마주치되 너무 노골적으로 보지 말 것. 성우는 직원의 에티튜드를 속으로 떠올리며 눈을 다니엘의 턱에서 입술로, 코와 눈과 눈썹에까지 올렸다. 그 안에 담긴 열이 티나지 않았기를 빌면서.

 

 …할 말이 있어요?

 , 저도 처음부터 잘생기셨다고 생각했어요. 손님이요.

 

 수 초간 시선이 오간다. 연신 싱글벙글이던 다니엘 그는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를 지웠다. 가라앉는 눈. 내려가는 입매. 하향적 이미지가 우울하지 않게 어울렸다. 성우는 제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한 표정인 것을 몰랐다. 그것이 어떤 강한 어필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카운터 너머로 상체가 넘어온다. 소독한 물냄새가 훅 끼쳤다. 얼굴이 가까워요. 그런 말을 꺼낼 수도 없이 밀착했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꽉 쥔 오른손 위로 다른 손바닥이 덮어왔다. 왜 손님은 손도 따뜻한 건가요. 방금 전까지 수영하다 왔으면서. 오히려 성우의 손이 차가워서 달궈진 팬의 버터처럼 녹았다. 그의 안에서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대하는 방침에 대한 매뉴얼이 둥둥 떠다녔다. 모든 손님 그 중에서도 애인이나 동반자와 동행한 손님에게는 불필요한 접촉이 있어서는 안 됐다. 안 된다. 안 되는 거, 나두 아는데에성우는 마치 누군가에게 떠밀린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다물린 치열 위를 훑던 혀가 조심스레 파고든다. 다니엘의 혀는 그 몸만큼이나 축축하고 컸다. 가득 들어차서, 숨이 막혀서, 성우는 막힌 소리를 내다 흘러넘치기 직전의 타액을 버겁게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고 다니엘은 귀엽다는 마냥 목구멍으로 웃는다. 단단한 손바닥이 성우의 셔츠를 비집고 스믈스믈 올라왔다. 그것이 마치 신호인양 성우는 허겁지겁 다니엘의 목에 매달렸다. 그 단단한 어깨에 팔을 두르고 종래에는 허리에 종아리를 감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량의 아량

샥스핀

 

 

 

 

 

 

 

 정확하게 320초 서성였다. 흰색과 황금색 잎사귀무늬로 장식된 문 앞에서 검은 구두가 끊임없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성우는 괜히 그제나 어제나 다를 바 없는 보라색 유니폼의 매무새를 만졌다. 착장에 대해 정해진 메뉴얼이 있다는 사실은 성우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나마 부린 멋이라곤 평소 아끼던 고가의 향수를 뿌린 것이다. 해는 가장 높은 고도를 향해 움직이고 있고 새벽의 일은 방금만 같다. 성우는 한숨을 푹푹 쉬다 방문에 이마를 박았다. 이를테면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처럼 부풀어오르는 기대를 죽이는 중이다.

 

 나만 좋았던 건 아니겠지. 취해서 기억 못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런 거면 니가 어쩔 거야얼굴이 붉어지다 까맣게 죽다를 반복했다. 누가 보면 다이나믹한 영화라도 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노크 할지 말지 한참을 망설인 끝에 성우는 문고리를 잡아돌렸다. 절대 다른 속셈이 아니라 아침점검을 하러온 것뿐이다. 아침이라기엔 정오를 바라보는 시간이지만. 어제 무리한 손님이 혹시 불편하신 건 없나 해서, 응 고객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두어야 하니까. 먼저 취한 상태에서 20도 이상의 칵테일을 세잔이나 넣었으니 지금시간까지 자고 있을 것이었다.

 

 기가 막히게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침실로 들어가면 커다랗고 동그란 실루엣이 푹신한 이불에 파묻혀있다. 성우는 그늘을 만들지 않도록 비스듬히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어제는 그렇게, 그렇게, 어른 같았는데. 낮에 보니 완전히 애다. 베게에 눌린 볼이 말랑해 보인다. 성우는 인터넷 어딘가에서 본 하얗고 몽글거리는 개를 떠올린다. 꼭 그런 종 같았다.

 

 이렇게 몰래 들어와도 돼요?

 

 잠긴 목소리가 저 바닥을 긁으며 나왔다. 팔뚝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목소리에 감탄하느라 놀라는 건 그 다음이었다. , 안자고, 언제부터, 음절과 음절이 끊겨 단발적으로 나왔다. 다니엘은 아직 깨다만 얼굴로 한숨처럼 웃었다. 그쪽이 자꾸 우와, 우와, 거리는데 어떻게 안 깨요. 휘어진 눈꺼풀 사이로 까만 눈동자가 성우를 올곧게 본다.

 

 굿모닝 성우씨.

 정오예요. 이름 안 까먹었네요.

 

 나 그렇게 머리 안 나빠요. 쏟아지는 볕이 눈부신지 미간이 잔뜩 찡그려졌다. 성우는 순간 혀 깨물고 죽고 싶게 쪽팔렸던 기분이 저 하늘로 붕 떠버린다. 다니엘이 새벽의 일을 모른척해도 성우는 넘겨야했다. 직원이 만취한 손님과 밤을 보내다니 잘려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성우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의 직장 동료들이 말하던 공식에 따르자면 말이다.

 

 다니엘은 얼굴을 뻑뻑하게 문지르더니 몸을 일으켰다. 덮고 있던 시트가 내려간다. 어제 뒹굴던 그대로 나신이었다. 갓 일어나서인지 말랑한 볼에 따끈하게 열이 올랐다. 성우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입술을 꾹 찍었다. 얇은 순피로 다니엘의 얼굴 근육이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웃고 있나. 웃는 얼굴을 상상하는 것은 숨 쉬는 만큼이나 쉽다. 성우는 또 가만한 다니엘의 입술 위에도 쪽쪽 부딪혔다. 가벼운 버드키스가 아랫입술을 물고 늘어지는 농도짙은 접촉이 됐을 즈음. 성우의 어깨가 한뼘 뒤로 밀려났다. 휘둥그레 눈이 떠졌다. 그리고 성우는 다니엘의 어색하게 굳어진 얼굴을 발견한다. 그는 도톰한 눈두덩이를 긁으며 불안하게 말꼬리를 늘렸다. 내가

 

 내가 기대하게 한 것 같아요.

 뭘요…….

 

 , 아니 말하지 마요. 마음의 소리가 안쪽에서 아우성쳤다. 다니엘의 다음 말이 왜인지 짐작 되어서, 솔직한 심정 같으면 당장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미안해요 성우씨, 나는 돔페리뇽 한 병 사줄 수 없는 사람하고는 연애 안 해요.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출처는 풍선 같이 부푼 마음과 알량한 자존심일 것이다. 성우는 애써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겼다. 그것은 감촉 같았지만 다니엘에게 통하지 않았다. 다니엘의 안면에 드러난 죄책감이 더욱 속을 까맣게 태웠다. 그래. 애초에 이 사람은 돈 많은 마나님에게 붙은, 이를테면 빨판상어였다. 즐기고 이득을 취하는 것이 사랑보다 우선인 것이다. 알면 당장 손을 떼야했다. 제비에게 걸려 주머니 탈탈 털리는 것은 최악이었다. 돈으로 사람을 사야할 만큼 궁하지도 않았다. 제가 착각했네요, 그런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물론 어제는 정말 좋았,

 그깟 술 나도 사줄 수 있어요.

 ?

 사줄 수 있다고요.

 

 때로 뇌는 몸보다 솔직하지 못하고 지나친 감성은 이성을 마비시키곤 한다. 내뱉으면서도 터무니없는 객기인 것을 알았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요 제정신이다. 그러나 인지와 행동은 별개다. 적어도 지금 사랑인지 오기인지에 눈먼 옹성우에게는 그랬다. 왜요, 내가 못할 것 같아요? 성우가 다시 한 번 못박자 다니엘은 뒷머리를 긁적이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좋아요. 그럼 가요.

 어딜,

 

 다니엘이 의자에 널어둔 셔츠를 들었다. 성우는 버릇처럼 옆으로 물러섰다.

 

 돔페리뇽. 사준다매요.

 

 

 

 

 

 다니엘은 아직 한산한 레스토랑의 수많은 의자들 중 가장 구석지고 창가에 위치한 곳에 앉았다. 쭈뼛쭈뼛 뒤따라가던 성우를 홀직원들이 알아봤다. 대충 뭐하는 거냐는 시선이었다. 성우는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며 다니엘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여전히 뒤통수가 따가웠다. 지배인님에게 들켰다간 해고다. 진짜 뭐하고 있는 거야 옹성우. 스물 몇해 살면서 한 짓 중에 가장 미친 짓이다. 홀랑 반해버린 금발남자만 곁에 없었다면 성우는 이미 하얀 식탁보에 몇 번이고 이마를 박았을 것이다. 다니엘이 식탁 위에 팔을 올렸다. 예의 없는 자세. 다 큰 남자가 저러고 있으면 인상이 찌푸려져야 하는데 귀엽기만 하다. 중증이다. 하룻밤이 뭐라고. 보통 이상으로 지나치게 좋기는 했다. 다니엘은 상체를 성우쪽으로 기울여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랑 연애놀음이 하고 싶어요?

 

 연애놀음. 자존심상하고 동시에 구미 당기는 말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이윽고 손가락 세 개가 올라온다. 조건이 있어요. 갑자기 큰 불안감이 성우를 덮쳤다.

 

 첫째, 손잡기는 만원 포옹은 삼만원 키스는 십삼만원 섹스는 육십. 키스에 섹스까지 같이 하면 같이 씻는 건 서비스예요. 둘째, 내가 사달라는 거 다 사줘요. 이건 당연한 거니까 이의 없겠죠? 셋째, 데이트 중에 기분 상할만한 일이 있었으면 보상해줘요. 방법은 알아서 생각해요. 참고로 나 먹을 거 엄청 좋아해요.

 

 불안한 예상은 왜 항상 빗나가질 않나. 성우는 입이 절로 벌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순 날강도, 아니 금액은 둘째치고서라도 어느 부분이 연애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좀 더 상호적인게 아니었나. 다니엘의 말대로라면 성우는 다니엘을 돈으로 빌리는 거다. 마치 주유기계처럼. 머릿속에 표백제를 부은 마냥 순식간에 아연해졌다.

 

 연애, 라면서요.

 싫으면 말고요.

 

 누가 싫대요……. 말도 못 꺼내게 단호하다. 성우의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다니엘은 웃었다. 또 또 웃는다. 저 웃음이 문제다. 지옥 바닥까지 내려갔던 기분이 좀 살만해졌다고 쑥 올라와버리니까. 다니엘은 다가온 웨이터에게 간단하게 아침에 먹을 만한 것을 시켰다. 빵과 스튜, 샐러드 파스타와 그리고.

 

 성우씨 나 캐비어 먹고 싶어요.

 뭐요?

 

 캐비어요. 정말 못들은 거라고 생각했는지 다니엘은 다시 또박또박 음식의 이름을 말했다. 잠깐 정신이 혼미했다. 조금만 자제력이 없었다면 미쳤냐며 따졌을 것이다. 아까 사달라는 거 다 사달라고 했지. 벌써부터 시련이다.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 얼굴로 성우는 삐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시간이니 술은 생략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주문의 끝에는 돔페리뇽 한 잔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따라붙었다. 맙소사 진짜 내가 지불하나봐. 넋이 나간 성우에게 다니엘은 메뉴판을 건냈다.

 

 성우씨는 뭐 시킬래요?

 

 성우는 제 이름의 발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다니엘이 뱉는 것은 유난히 부드러웠다. 좀 달콤한 것 같기도 했다. 괜히 아침뉴스를 보고 계실 할아버지에게 감사했다. 정우가 될뻔한 이름이었으나 이가 몇 개 없으신 덕에 지읒은 쉽게 시옷으로 들렸다. 옹정우. 옹성우가 백배 천배 훨씬 낫다. 그는 매콤한 리조또 하나를 시키려다가 그냥 물 한잔을 부탁했다. 없어보여도 어쩔 수 없다. 아침 한 끼 다니엘의 위장으로 들어갈 것만 해도 한동안 거지로 살아야한다.

 

 다행히 다니엘은 파스타 반절을 성우에게 권했다. 양에 찰리 만무했지만 생으로 굶기보다야 양반이다. 몇십만원짜리 샴페인을 비우며 다니엘은 식사 후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 산업시대 장인이 어떻고 싱품의 질이 어떻고. 결국엔 쇼핑을 하겠다는 말이다. 당연히 돈의 소재는 본인이 아닐 테다. 위장에 넣은 것도 없는데 더부룩했다. 말을 하는 중에 성우도 본적만 있는 까만 알이 커다란 플레이트에 쥐톨만큼 나왔다. 포크질을 세 번 하면 깨끗하게 사라질 양이었다. 고직 저게 그 가격인 거지. 다니엘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입맛을 다셨다. 비슷하다면 비슷하지만, 다니엘의 사고는 성우와 조금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

 

 맛있는데 너무 적다. 한 접시 더 먹어도 되죠?

 

 진심일까. 진심이겠지. 적어도 다니엘은 마음에 없는 소리는 잘 하지 않는 성격이란 것을 파악했다. 성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가 초상난 분위기의 성우를 안쓰럽다는 눈으로 힐끔거리고 떠났다. 다니엘은 허브꿀을 얹은 모닝빵에 비프스튜, 토마토를 뺀 샐러드 파스타와 캐비어 두 접시, 그리고 돔페리뇽 한 잔을 아침으로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우는 치킨게임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두 대의 차가 양극단에 선다. 하나 둘 셋. 신호를 세면 둘은 동시에 서로에게 전속력으로 돌진한다. 먼저 핸들을 꺾는 사람이 패자이다. 성우는 1초에 마흔 일곱 번도 더 핸들을 꺾어 도망칠지 말지 시험에 들었다. 다니엘은 심술을 부리고 있다. 아니라면 더욱 큰일이다. 이런 마구잡이 소비벽이면 이틀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손에 들린 쇼핑백이 벌써 두 개다. 둘 다 가격이 상당한 유명, 또는 수재브랜드의 의류다. 명품거리라니. 이런 극악무도한 것이 왜 관광지 근처에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별 특별한 것도 없어 보이는 셔츠 한 장 코트 하나가 수십, 수백을 호가했다. 한도에 아슬아슬하다. 적금을 깨야 할 것 같다. 유럽여행을 위해 모으던 것인데 계획보다 몇년 미뤄야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보다 더일 수도 있고. 지나가다 부디 다니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더이상 없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구두 예쁘다. 성우씨 나 저거요.

 

 왜 아직 몰랐을까. 신은 성우를 버렸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성우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다니엘이 가리킨 쇼윈도에는 발음하기도 두려운 고급 브랜드명이 대문짝만하게 박혀있다. 성우가 말리기도 전에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는 다니엘의 뒷모습이 잔뜩 신나있었다. 체념은 이를수록 좋다. 저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말려. 성우는 세 템포정도 늦게 그를 따라 매장에 들어섰다. 진열대 앞에 서서 집중하는 입이 툭 튀어나와있다. 밑창부터 끈의 유무까지 꼼꼼하게 살피던 다니엘은 곧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냈다. 짙은 초코색 리본 없는 옥스퍼드, 클래식한 디자인에 굽 낮은 것. 홀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고른 구두에 제 발을 끼운다. 입고 있던 옷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외투까지 벗었다. 지켜보던 성우는 침착하게 지갑을 꺼냈다. 다니엘은 전신거울에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빙그르 몸을 돌려 성우에게 짠, 보여주었다.

 

 어때요?

 그거 사요. 사줄게요.

 

 당장 내일 밥을 못 먹더라도 저건 사야한다. 옥스퍼드를 신은 강다니엘은 정말. 정말. 진짜. 완전 멋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 외국모델보다도 잘났다.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발목이 사이즈를 체크하는 지 앞코를 땅에 대고 빙글 돌려졌다. 뒤꿈치에 힘줄이 선명하게 갈라진다. 백자처럼 하얗고 잘빠진 것이다. 성우는 바지로 감싼 다리를 상상하지 않기 위해 칵테일 제조법 따위를 떠올려야했다. 미도리샤워 알렉산더 예거밤 맨해튼. 단맛을 좋아하는 성우는 베르무트를 많이 넣어 제조하지만 다니엘은 드라이 베르무트를 선호한다. 콧잔등이 찡그려질 정도로 쓰다. 어떻게 그런 걸 마실 수 있을까.

 

 다니엘은 맛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했지. 씁쓸할 것을 알고도 자꾸 아른거려서 찾다보면, 외에는 생각도 안 나도록 길들여지는 거라고. 그날 맛봤던 물컹한 혀뿌리도 꼭 그런 맛이었다. 수영장 물그림자가 눈앞에 선했다. 출렁이던 수면과 용암처럼 뜨거웠던 체온 같은 것이.

 

 성우는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접었다. 나 진짜 밝히나봐. 이미 귀에서 불이 났을 테다. 손님? 손님? 캐셔는 카드를 내밀고 카운터 아래로 사라져버린 손님에 잔뜩 당혹스러워했다. 다니엘이 성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일으켜주려나 했더니 쇼핑백만 냉큼 들고 매장 입구로 발을 옮긴다. 경쾌한 구두소리를 멍하니 듣다가 퍼득 일어났다. 캐셔가 돌려주는 카드를 부랴부랴 받고 뛰듯이 걸었다. 어딜, 어딜 가요 니엘씨. 다니엘은 겨우 옆으로 따라붙은 성우에게 작은 시선만을 줄 뿐이다.

 

 해가 지고 있잖아요. 다음 순서는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대번에 알아들은 성우의 뒷목을 잡고 다니엘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끌어당겨진 줄도 모르게 은밀했다. 손에 쇼핑백이 있어서 옷을 당기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거리에는 아직 사람이 많았고,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본다면 다니엘의 품안에 갇힌 실루엣이 남자라는 것을 알 테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극을 느끼는 데만 해도 가빴다. 입안이 눅진하게 녹을 즈음 하순을 빨며 다니엘은 입을 뗐다. 키스는 했고. 어떻게, 같이 씻을래요? 성우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한껏 풀렸다. 다니엘은 성우의 첫 남자도 첫 섹스상대도 아니었지만, 확실한건 그의 인생에 있어 다니엘만큼 자극적인 존재는 전에도 후에도 결코 없으리란 것이었다.

 

 

 

 

 

 다니엘의 동행인은 대기업의 이사회 중 하나였다. 장기간 투숙을 예약한 것도 비즈니스의 일원으로 호텔에 외국인 바이어들이 평소보다 많이 머물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니엘은, 이를테면 일을 마치고 밤늦게 방에 들어가도 외롭지 않기 위해 데려온 애완동물 역할이었다. 오라면 오고 짖으라면 짖고. 재롱도 부리고요. 그래도 원하는 거 다 사주는 주인이니까요. 자조 섞인 말에 다니엘은 혼자 웃었다. 성우는 겉으로는 안타까워하면서 그들 사이에 감정적인 교류가 없다는 것에 몰래 만세를 외쳤다.

 

 그런 이유로 다니엘을 매일 만날 수는 없었다. 어느 날은 여자가 하루 종일 바빴고 어느 날은 일정이 아예 없어서, 그럴 때는 다니엘은 여자의 곁에 있었다. 밀애하는 기분이 스파이 영화를 찍는 것처럼 색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한번은 여자의 침대에서 다니엘과 뒹굴다가 갑자기 방주인이 와버려서 급히 장롱으로 숨었다. 하마터면 타인의 침대사정을 라이브로 들을 뻔했다. 다니엘이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간 덕에 미수로 그치기는 했어도. 성우는 그녀가 방을 떠나거든 저를 만나달라고 했지만. 모른다 만나는 것이 귀찮아서 일부러 연락을 않는 때도 있는지. 그저 다니엘을 믿고 기다릴 밖에 없었다.

 

 성우는 요즘 지배인님을 피해다녔다. 근무시간에 다니엘과 레스토랑에서 노닥거린 것을 어느 의리 없는 인간이 찔렀나보다. 그 후로도 여러 번 농땡이를 피웠으니 어떤 말이 들어갔는지는 모른다. 어찌 보면 진정한 낙하산이었다. 동문에다 아버지의 지인이라 사적이 친분이 있었다. 자주 덜렁거리는 성우가 아직도 잘리지 않고 호텔에 잘 붙어 있는 건 그 덕이 적지 않을 것이다. 월급 받을 날이 오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칠 테지만 아직은 달 중반이다. 아직은.

 

 말일이 되면 다니엘은 떠난다. 함께 온 나이 차이나는 여자와. 그 사실은 주기적으로 성우를 허무에 빠뜨렸다. 다니엘이 부자 마나님을 보내고 성우의 곁에 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없는 돈 긁어모아 줏대 없는 제비의 관심 조금 얻자고 퍼붓는 행위는, 바보의 셈으로도 부질없는 것이 당연하다. 한 겨울밤의 꿈이라고 꾸고 싶은 것일까. 저의 마음도 알 수 없다. 그러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다니엘이 연락이라도 주면, 다른 생각은 싹 사라지고 당장 그 얼굴을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성우는 이따금 수영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에는 정말 사랑받는 것 같았다. 아니다. 취기였을지언정 아침이 오기 직전까지 다니엘은 성우를 사랑했다. 그 잊을 수 없는 느낌이 성우를 기꺼이 불 가운데로 뛰어드는 부나방이 되게 했다. 풍차에게 달려드는 돈키호테로 만들었다.

 

 돈이 많았으면. 어디 가서 카드 낼 때 부끄러운 일 없게 말이다. 네 개째 한도초과로 빠꾸당하고 긴장감에 버벅이는 손이 비자카드를 꺼냈다. 이것마저 안 먹히면 큰일이다. 얼굴은 이미 터질듯이 붉어졌으리라. 다니엘쪽으로는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멋있어 보이는 건 진즉 포기했대도 적어도 비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오늘부로 실패했다. 마지막카드는 다행히 경고알림 없이 순탄히 긁어졌다. 쫓기듯 나갔다. 그 말이 어울렸다. 동정어린 시선들이 숨을 죄던 매장을 벗어나 말없이 걸었다. 성우야 민망했으니 그렇다쳐도 다니엘도, 불안하게 조용했다. 성우는 눈치를 보다 티나게 헛기침하며 다니엘의 손가락을 잡았다. 처음에는 검지. 중지. 약지까지 세 개를 쥘 때까지 잡힌 손의 주인은 잠잠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성우가 먼저 말문을 텄고. 다니엘은 돌연 깍지끼더니 아예 걸음을 멈췄다. 관성의 법칙으로 성우는 휘청였다.

 

 본론만 하지 왜 겁도 없이 밖으로 데리고 나와요. 돈도 없으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본론이요. 섹스만 하면 되잖아요.

 

 왜 이 사람은 나를 날아가게 좋게도, 때려주고 싶게 밉게도 만드는 걸까. 입 끝이 뒤집힌 U자처럼 내려갔다. 왜 말을 못되게 하냐고 따질 수도 있다.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쪽으로 한 없이 기울어져있는 애정의 척도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피곤했다. 낮에 다니엘과 있기 위해 근 며칠 야간근무를 자처해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눠들고있던 쇼핑백을 다니엘에게 넘겼다. 그중에 성우의 것은 없다.

 

 니엘씨가 좋아하니까 나는 이게 본론이에요.

 

 그 말을 들은 다니엘은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왈칵 얼굴을 구겼다. 그와 헤어지고 성우는 밤이 깊도록 내가 실수라도 했나 생각했지만, 도통 답을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