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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형은 아침에 일어나면 팔을 쭉 펴고 채 뜨이지도 않은 눈으로 물을 마셨다. 형은 그걸 버릇이라고 칭했다. 오랫동안 쌓아만든 버릇. 나는 이것을 버릇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아해했지만 나는 언제나 형의 말이면 그렇노라고 믿었다. 이 버릇은 형이 스스로를 열심히 지어온 노력의 증거 중 하나였다. 형은 살면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쌓고 다듬었다. 형은 그런 자신의 탑을 지키려고 나의 땅에 지진을 일으켰다.

 

 

 

 

 

우리의 탑

w.

 

 

 

 

 

 

 

다녤

[밥 먹었나] 오후 721

 아니 안 먹었어. 너도 안 먹었지? 뭐 시켜먹을까? 다니엘은 피자가 먹고 싶다고 했다. 성우는 다니엘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를 시켰다. 메뉴를 부러 묻지 않아도 뭘 좋아하는지 알았고 때로는 성우가 먹고 싶은 메뉴로 맘대로 시켜도 맛있게 같이 먹어주는 다니엘이었다.

 뒤에 기대 티비를 보고 있자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려 한기가 확 끼쳤다. 성우가 장난스레 몸을 떨자 다니엘이 냅다 달려와서 성우의 반팔 티 아래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으아악!"

"밖에 엄청 춥다."

 

 그래 보여. 성우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다니엘을 노려보자 다니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산 지 7년째였다. 다니엘과 성우는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났다. 분홍머리 신입생과 의욕 넘치는 학생회장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성우의 졸업 전까지 딱 붙어 다녔다. 성우의 졸업과 대입 이후에는 다니엘의 입시가 시작되었고 그 탓에 자주 보기는 힘들었지만 둘은 계속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다니엘이 성우의 대학에 철썩 붙어버린 이후로 둘의 동거가 시작됐다. 10년을 알고 7년을 같이 살자 서로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자신조차도.

 

"다니엘, 내일 데이트할까? 영화보자."

"그래. 알았다. 햄 보고 싶은 거 예매해라."

 

 

 

 옹성우. 이름만 불러도 손 끝 발끝까지 저리게 만드는 다니엘의 유일한 사람. 다니엘은 성우를 아주 오래 사랑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다니엘과 성우는 십 년을 알고 지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 중 십 년을 성우를 사랑했으며 앞으로 얼마나 사랑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성우가 다니엘을 사랑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한지는 3년이 되어갔다.  

 성우는 다니엘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3? 그보다 더? 다니엘은 다니엘 자신의 사랑한 날짜들이 아까워 성우에게 구태여 3년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다니엘은 성우와의 사랑한 나날들이 짧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겨울 드디어 종점에 도착했나보다고 또 다니엘은 생각했다. 다니엘의 종점은 어디인지 몰라서 얼마나 더 달려야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성우는 이제 종점에 도착했고 내릴 일만 남았다.

 

"다니엘."

", 미안타. 뭐라 그랬노?"

 

 성우의 곧은 손. 곧고 깨끗한 손. 그 손이 다니엘을 건드렸다. 다니엘은 성우를 마주보았다. 성우는 정신이 어디에 빠져있냐며 웃으며 다니엘을 가볍게 타박했고 다니엘은 평소와 같이 웃음을 짓다가 문득 이 모습이 마치 연극 같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지금 성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았다. 성우는 최선을 다해서 연기하고 있었다. 어느 무대에서보다 열심히, 또 진심으로.

 

 

 

 다니엘이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며 꽃다발을 건넸다. 성우가 주연을 맡은 연극은 환호 속에 무사히 마쳐졌다. 다니엘은 성우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형 와 이리 연기를 잘하노. 나 다른 사람인줄 알았다. "

"무슨 소리야. 그 정도는 아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과 칭찬이 오고갔다. 성우는 이곳저곳에 인사를 했고 다니엘도 덩달아 주변에 꾸벅 고개를 숙여댔다.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에 누군가 끼어들었고 성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니엘은 웃던 표정을 거뒀다.

 

"성우야, 진짜 멋있었어."

"시간 못 낼 것 같다더니, 애써서 보러 와줘서 너무 고마워."

"애인이 이정도도 못하면 안 되지."

 

 주변 분위기는 여전히 연극의 무사한 마무리를 기뻐하는데 다니엘의 공기만 차갑게 굳어있었다. 성우의 애인. 부러웠다. 저 자리를 차지할 수 없더라도, 성우 옆에 있음에 감사하며 살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러웠다. 몇 년, 그리고 몇 번을 봐왔던 형의 연애지만 매번 다니엘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다니엘은 성우에게 핸드크림을 쥐어준 후 애인과 있으니 비켜주겠다는 눈짓을 하고 대기실을 나갔다.

 

 

 

 사랑에 빠진 성우는 손끝이 닳아있었다. 때로는 붉게 얼룩지기까지 했고, 하얗게 거칠어지기도 했다. 성우는 자신이 쌓아온 것, 의도한 것들을 버릇이라고 칭하고 싶어 했지만 그것들은 버릇이 아니었다. 진짜 성우의 버릇은 따로 있었다. 자신이 지을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한 초조함. 그리고 성우가 더 이상 짓기를 원하지 않을 때가 오면 성우의 손은 아물었다. 다니엘은 성우의 옆에서 성우의 손이 갈라지고, 뜯어지고 또 아물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성우의 손은 애인과 헤어져도 한참을 아물지 않기도 하고, 애인과 헤어지기 전에 아물기도 했다.

 다른 수많은 인간관계들은 성우를 흔들지 못했지만 사랑은 성우를 흔들었다. 때로는 한 부분을 어긋나게 하기도 했고, 때로는 성우를 통째로 흔들기도 했다. 성우는 예측할 수 없는 사랑에 자신의 탑이 무너지기라도 할까 두려워했다.

다니엘은 성우의 겉으로는 친한 친구로서, 룸메이트로서 아무렇지 않게 성우의 손을 붙잡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제발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숨을 꾹 참으며 연고를 발라주었다. 성우의 손이 빨리 아물기를 바라면서.

 성우는 자신이 손톱을 뜯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언제, 왜 손톱을 뜯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니엘은 십 년간 꿈에서도 성우를 곱씹었기에 성우가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은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성우의 대부분을 알게 되었다. 성우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돌을 수없이 다듬고, 다듬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올렸다. 그런 성우에게 다듬을 수 없는 돌이란 얼마나 위태롭고 두려웠을까. 그래서 손톱을 뜯었다. 다듬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었던 성우의 흔적.

 성우의 손이 다시 엉망이 되면 다니엘의 가슴 역시 엉망이 되었다. 아닌 척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니엘은 성우만큼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티가 많이 났겠지만 성우가 다니엘의 그런 모습을 못 본체 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겠다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다니엘은 묻지 않았다. 성우가 손을 뜯으면 누구를 좋아하게 되었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성우의 손이 아물면 그 사람에게서 마음이 떠났는지, 헤어졌는지 따위는 더더욱 묻지 않았다. 만약에 숨길 수 없이 기쁜 마음이 새어나오기라도 하면 성우가 더 이상 다니엘과 룸메이트를 할 수 없다고 할까봐 다니엘은 두려워했다.

 그런 반복되는 날이었다. 그날도 다니엘은 성우의 손을 붙잡고 연고를 발라주고 있었다. 다니엘은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려는데 여념이 없었다. 성우가 갑자기 손을 빼기 직전까지. 성우는 갑작스럽게 손을 뺐다. 성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기가 미안하다고 했다. 갑자기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지금과는 다른 감정으로 너를 바라보게 되어서 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불편하면 따로 살겠다고 했다. 다니엘은 성우가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연기를 잘 했을 리는 없으므로. 다니엘은 성우가 그 말을 꺼내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십 년간 성우를 사랑해왔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왔던 마음들을 성우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성우의 표정이 놀랍도록 풀어졌다. 다니엘은 성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어주는 표정을 보면서 그토록 부러워했었다. 그 순간 성우는 그 표정, 사랑에 빠진 표정을 다니엘 앞에서 짓고 있었다.

 다니엘은 성우의 사랑을 얻고 아주 오랜 시간동안 득의양양했다. 성우의 손끝을 매일같이 확인하면서 이기적이게도 성우의 손끝이 오래오래 낫지 않기를 바랐다. 둘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묶일 수 없으므로 다니엘은 성우의 안정적인 기둥이 될 수 없었기에. 지난날들과는 달리 밤에 성우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이 상처가 어서 아물기를 바라지 않았다. 성우의 손이 아픈 이유가 다니엘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미안하면서도 계속 그러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다니엘은 모르는 척 하면서 매일같이 성우의 손을 한 번 더 붙잡을 수 있었다. 연고를 발라주면서 맘에도 없는 빨리 나아라,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꽃다발을 든 다니엘이 발끝을 툭툭 치며 역 앞에 서있었다. 오늘은 성우와의 첫 데이트 날이다. 같은 집에 살면서 따로 만나게 된 이유는 성우의 선약 때문이었다. 성우의 선약이 끝나면 밤에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손에 땀이 나 꽃다발이 흘러내릴 듯 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한 집에서 나오다보니 열심히 꾸미기에 민망했겠지만 오늘은 다행스럽게도 성우의 선약이 있었다. 첫 데이트다보니 꼭 멋있게 하고 싶었다. 첫 데이트라는 말이 이상한가 싶기도 했다. 둘은 어찌되었건 같이 살았고 연인보다는 친구라는 말로 정의된 관계로 지내온 지 7년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을 같이 살면서 단 둘이 영화를 보러온 적이 없을 리가 없었다. 영화관은 물론이고 맛집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랬던 수많은 날들과는 달랐고, 다르고 싶었다. 다니엘은 머리를 올리고 옷을 입고도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역 근처에서 꽃다발도 한 다발 샀다. 리시안셔스 몇 송이 주변에 안개꽃이 둘러져있는 꽃다발이었다. 괜히 오버하는 것 같아 망설였지만 뭐가 아까운가 싶어 성우가 오기 전에 사서 뒤에 감추고 있었다. 고작 십 분전에 도착했을 뿐인데 1분이 1년같았다. 옷매무새를 십 몇 번을 가다듬고, 거울을 몇 십번을 보아댔다. 약속시간이 1, 2분 남자 다니엘은 발끝을 세우고 더 빨리 땅을 톡톡 쳤다. 그러자 갑자기 뒤쪽에서 푸흡, 소리가 났다. 다니엘은 익숙한 소리에 뒤를 돌았다.

 

"너 진짜 귀엽다."

"아 뭐고!"

 

 한두어걸음 뒤에서 성우가 다니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우는 도착한 지 오 분정도 되었다고 했다. 성우는 다니엘이 꽃다발을 들고 계속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거울을 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을 게 분명했다. 멀찍이서 다른 사람을 보면서 큭큭 웃는 사람이라면 그런 의심을 받고도 남았다. 하지만 성우는 다니엘이 너무 사랑스러웠고, 커다란 손 안에 들려있는 꽃다발을 보며 설렜고 행복했다.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그 누구만큼 사랑했다. 다니엘은 자신을 아는 체하지 않았다면서 괜히 툴툴댔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을 보면서 웃었다. 다니엘은 잊었던 꽃다발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주섬주섬 꽃다발을 성우에게로 건넸다. 성우는 행복했다. 그리고 그 누구처럼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고,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다니엘은 딱 붙고 깜깜한 영화관 좌석에 앉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손잡기를 생각하느라 영화 시작 전부터 주의가 산만했다. 같이 먹겠다고 산 콜라와 팝콘에도 손이 가지를 않았다. 그토록 많이 잡아보았던 손인데 의미가 변했다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긴장시킬 수 있나 싶었다. 다니엘은 바지에 손을 문질렀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을 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자꾸 밖으로 비실비실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지금까지 다니엘이 어떻게 좋아하는 마음을 감춰왔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니엘은 애초에 영화를 열심히 볼 생각은 아니었다. 다니엘은 자꾸 영화관에 연인과 단 둘이 가면 있을법한 일들을 상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화관에서 지나친 스킨십은 주변에 민폐니 해봤자 고작 손잡기 뿐이었는데도 온통 그곳에 신경이 쏠려있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다니엘은 성우의 얼굴만 힐끔거렸다. 손을 잡고 싶어 꼼지락거리다가 다시 제자리로 손을 거뒀다가 했다. 성우는 다니엘의 속을 모르는 척 영화에 시선을 고정했다. 성우가 콜라를 쭉 빨아들이고 손을 내릴 때 그 손을 빤히 바라보던 다니엘이 성우의 손이 제자리를 내려오기 전에 손을 낚아챘다. 두근거렸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터져나갈 듯 뛰어서 영화 대사들이 모조리 귓전에서 도망쳤다. 손을 덥석 잡고 부끄러운지 고개는 반대쪽으로 돌린 다니엘을 보면서 성우는 영화관 팔걸이라도 하나 부수고 싶은 기분이었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온 몸을 타고 올랐다. 이렇게 다정하고 귀여운 사람이구나.  그동안 궁금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전 애인들을 문득 생각하면서 질투했다. 하지만 그런 건 곧 중요하지 않아졌다. 다니엘의 손이 성우의 손에 알맞게 끼워졌고 두 손은 아주 따뜻했다.

 

 

 

성우와 다니엘은 한참 말이 없었다. 오늘 시종일관 다니엘이 성우의 말에 어설피 웃었기 때문이었을까. 성우는 조바심을 내었지만 책상을 두드릴 뿐 손톱을 뜯지는 않았다. 함께 있기만 해도 따사롭던 공기가 이제는 건조했다.

 

"."

"말 하지 마. 뭐라고 말 할지 아니까, 싫어."

"햄 이제 나 안 좋아하잖아요."

 

 성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은 짓씹어도 입에 손을 가져다대지는 않았다. 다니엘은 고개를 수그렸다. 성우의 버릇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성우에게 버릇을 말해주어야 하는지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성우를 홀로 사랑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버릇이었다. 버릇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성우에게 감춰왔었지만 몇 번의 계절을 지나 이제는 말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다니엘은 오늘 데이트 시작부터 말을 계속 고르고 있었다. 어제 성우가 피자를 먹으며 데이트 얘기를 꺼냈을 때 다니엘은 잘 됐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카페에 앉아 이야기하는 상황이 그려졌다. 생각만 해도 어지러웠고 속이 뜨거워졌지만 다니엘은 참았다.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둘은 오늘도 영화관에 들어앉았다. 둘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은 자연스럽게 성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성우가 잠깐만, 하면서 손을 빼내었다. 다니엘은 그 순간 많은 상황들이 스쳐지나갔다. 언제부턴지 성우의 손을 보지 못하게 된 이유들이 물밀듯이 다니엘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성우는 다니엘에게 연고를 스스로 바르겠다고 하는 일이 잦아졌고, 찬바람이 부는 계절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손의 온기 대신 장갑을 나눠끼웠다. 마침내 다니엘은 깨달았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손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 내가 햄을 몇 년 좋아했는지 아나."

"십 년."

"우리가 같이 룸메이트인지는 몇 년 됐나."

"칠 년."

"우리가 사귄지는"

"곧 삼 년이네."

"내가 형 눈빛 달라진 거 하나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깬 사람은 다니엘이었다.

 

", 햄도 내가 모르는 나 알고 있제?"

", 그렇지."

"나도 형이 모르는 형을 안다."

 

 긴장 탓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괜스레 요란하게 느껴졌다. 성우는 다니엘이 어떤 말을 할까 조마조마했다. 성우는 다른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친구였고 지금은 연인인, 누구보다 소중한 다니엘을 이렇게 잃기를 원하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면 언젠가 서로 또는 누군가가 사랑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성우는 그것이 두려워 마음을 고백하지 않으려 아주 오랫동안 참아왔었다. 하지만 이미 사랑에 휘청이는 자신을 보면서 마음을 더 이상 참았다가는 뭔가 터져버리기라도 할 듯한 감정이었기에 자신의 탑에서 다니엘이라는 커다란 주춧돌과 이별할 각오를 했다. 그러자 다니엘은 울면서 자신도 형을 좋아한다는 답을 내놓았다. 운이 좋았다. 성우는 자신의 걱정들을 잊고 다니엘과 사랑에 빠졌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듯,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형은 손톱을 깨문다."

"나도 알아. 네가 매일 약 발라줬었잖아."

"언제 깨무는지 아나."

"언제?"

"누구 좋아할 때 깨문다. 누구 좋아서 어쩔 줄 몰라가 그 사람이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무서워서 깨문다고."

 

 성우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다니엘은 그런 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우의 연기는 완벽했다. 그동안 성우가 해왔던 연기처럼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일 조차도 성우는 능숙히 해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한 캐릭터를 연기하듯 식어버린 마음을 가진 자신 대신에 성우는 다니엘을 좋아하는 자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사랑이란 늘 몸이 먼저 나서는 일이기에, 그 연기란 얕은 속이기에 불과했다.

 

"그동안 모른 척 해줘서 고마워."

"아니다."

"근데 다니엘, 나 너랑 헤어지기 싫다는 거 진심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보내. 내가 너랑 어떻게 따로 살아. 그런 건 없어. 우리 할 수 있어. 나 할 수 있어."

"햄 지금 뭐라 말하는지는 알고 말하나."

 

다니엘이 이마를 짚었다. 아물어 멀쩡한 성우의 손을 보면서 다니엘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나한테 상처만 된다. 우리 헤어지는 기다."

 

 성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 위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다니엘은 성우의 모습에 당황해서 성우를 감싸 안았다. 오늘의 말들은 다 잊어버리자고 말하는 것처럼 성우는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성우의 눈물은 다니엘의 탑을 흔들었다. 자주 일어나지 않는 재난 같은 것이었다.

 

 

 

 다니엘과 성우는 그 날 일이 없었던 양 행동했다. 특히 성우가 그랬다. 둘은 서로를 볼 때면 어설피 웃었다. 최선의 방도였다. 앞으로 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갈 수도 없는 표류와 같은 상태였다. 다니엘은 주로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가거나, 집에 없었다. 종종 문자는 날아왔다. 본가에 왔다는 문자나, 친구 집에서 잔다는 문자였다. 성우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 다니엘을 기다렸다. 성우는 벌떡 일어나 옆자리를 더듬는 일이 잦아졌다. 성우는 다니엘의 행방을 몰랐고, 다니엘은 애써 자신의 행방을 매번 알리지 않았다. 성우는 홀로 티비를 켜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오늘도 다니엘을 기다렸다. 사랑하지 않는. 우리의 사랑이 꼭 지금까지의 사랑과 같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성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친구로도 오랜 시간 잘 해왔잖아.

 간만에 다니엘이 집에 있었다. 둘은 티비쪽을 바라보고 앉아 아무 말이 없었다. 서로의 끼니는 묻지 않았다. 그런 걸 묻기엔 너무 오랜 시간 둘은 정지해있었다. 성우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니엘아. 내일, 데이트 겸 해서."

"……."

"어디 나가자. 나 하고 싶은 거 있어."

 

 다니엘은 고개를 뒤로 넘겼다가 이내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성우는 먼저 씻는다는 말을 남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다니엘은 조금 울었다. 아직도 성우와 데이트라는 말을 들으면 설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형이 바라는 대로 헤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만으로는 연인이라는 사이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결국 상처받는 사람은 오로지 다니엘뿐이라는 사실을 다니엘은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건 연애 전에도 충분히 겪었다. 7년간의 짝사랑이란 다니엘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마음에도 남겼고 외적인 부분에도 남겼다. 다니엘은 형의 애인들을 보면서 뒤돌아 입술을 깨물어야했었고, 형이 그 애인들로 인해 가슴 아파 할 때면 다니엘 자신이 아프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팠다. 혼자 하는 사랑의 맨 얼굴이었다. 이걸 성우 앞에서 내보이면서 살 수는 없었다.

 

 

 

"다니엘, 일어나. 아침 먹자."

 

아침잠이 많은 성우가 다니엘을 깨웠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다니엘과 성우는 빵을 꺼내고 잼을 발랐다. 빵은 딱딱했고 잼은 차가웠다. 밖에는 눈이 가득 쌓여있었다. 성우는 창문 밖을 내다보더니 약간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다. 다니엘은 성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어디 가고 싶은데."

"산책, 산책이 하고 싶었어. 얘기하면서. 눈 내리니까 예뻐서 더 좋다."

 

 오래간만에 마주 본 얼굴들이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식탁을 대충 정리하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다니엘은 성우의 옷을 여미어줬다. 두툼한 신발을 신고 둘은 집 밖으로 나섰다.

 성우와 다니엘은 집 주변을 한참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아무 이야기가 오가지 않기도 했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했다. 성우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살짝 꺼내 허공에 흔들리고 있는 다니엘의 손을 살짝 잡았다. 전에는 빈틈없이 맞잡혔던 손이 성기다고 느꼈다. 성우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을 완전히 시인했다. 더 이상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하나가 아니라 둘로 쪼개졌으며 둘로 쪼개진 이유는 성우 자신이었다. 이곳은 종점이었다.

 성우가 코를 훌쩍이자 둘은 집으로 돌아왔다. 다니엘은 핫초코 한 잔과 블랙커피 한 잔을 탔다. 옷을 대충 벗어던지고 무릎에 이불을 덮었다. 머그잔에 담긴 음료들은 따뜻했다. 성우는 핫 초코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성우는 입술을 조금 옴직거리다 다시 핫초코를 마셨다.

 

"다니엘."

"말해라."

"우리 예전처럼, 친구로 지낼 수 없을까?"

"햄은 나한테 그런 말이 쉽게 나오나."

 

다니엘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다니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니엘은 잠깐 멈춰섰다가 뒤를 돌았다.

 

"햄 나한테 크게 실수한기다."

 

성우가 잡을 겨를도 없이 다니엘은 겉옷만 껴입고 집을 나갔다. 다니엘의 블랙커피는 온기도 채 가시지 않아있었다.

 

 

 

 다니엘은 전보다 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집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성우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계단에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기 일쑤였다. 그리고 어느 날, 성우와 다니엘이 집에서 마주쳤을 때에는 다니엘의 짐이 모두 상자에 포장되어있었다. 다니엘은 그것들을 모두 집 밖으로 옮겼다. 성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성우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쥐었다. 다니엘은 성우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 잘 살아라."

  

다니엘은 그 말을 남기고 집에서 완전히 나가버렸다. 성우는 아주 펑펑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