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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어떤 순정

라펠

 

 

 

 

 

 

 

 

 

 

 

장막과도 같이 봄을 물들였던 먼지를 걷고 온 여름의 더위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치달았다. 폭염주의보와 호우주의보는 하루가 멀다고 경쟁하듯 발효됐다. 이제는 별 감흥도 없어진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재난 경보 문자는 오늘도 울려왔다. 유달리 일찍 끝난 기말고사 후 연이은 자습과 교실 안 탈탈거리는 네 대의 선풍기, 그리고 수리 중인 에어컨. 글로 나열한대도 땀에 전 문장일 터였다. 교실 안의 대부분은 죽은 듯이 책상과 한 몸이 되어 널브러져 있고, 앉아 있는 아이들도 제각기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열어 놓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은 데친 시금치마냥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 주체 없이 흔들렸다. 수능특강 백오십삼 쪽의 1번 문항의 답은 5. 계절적 배경을 활용하여 생동감을 드러내고 있다. 괜히 고까운 마음이 들어 펜을 두어 번 딸깍거렸다.

 

 

속 편한 체육 선생은 자습 대신 측은한 눈빛으로 농구공 하나를 던져 주는 것을 끝으로 사라졌다. 성우는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에 대체적으로 딱히 흥미도 재능도 없었지만 체육관 구석에 박혀 잠이나 청하곤 싶지도 않았다. 두 세트 정도 뛰고 나니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땀으로 빨래를 한 듯이 푹 젖은 티셔츠조차 벗어던지고 공을 쫓아 뛰어다니는 애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진짜 어떻게 저러지. 성우와 마찬가지로 힘에 부친 몇은 제대로 작동되는 날이 손에 꼽는 체육관 한 편의 거대한 에어컨 앞에서 관전을 택했다. 체육관 안은 성우네 반 말고도 한 반이 더 있던 탓에 에어컨 앞은 이미 만원이었지만 성우는 대충 자리를 잡아 앉았다. 몇 반인진 모르겠지만 배드민턴 수행평가 중인 걸 보면 아마 2학년이지 싶었다.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에어컨은 정상적으로 작동했지만 땀에 절여진 아이들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는 듯 했다. 시선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포물선을 그리는 셔틀콕과 농구 코트, 형광등 몇 개가 나간 체육관 조명 등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더위 탓인지, 언젠가의 여름과도 같은 익숙한 단조로움에 질려서인지 이대로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옆에 앉은 성운이 오늘 석식 먹냐는 등의 시답잖은 얘기로 운을 뗐다. 몇 번의 영혼 없는 대화는 성우의 볼에 차가운 무언가가 갑작스레 닿으면서 끊겼다. 성우는 항상 한 템포 늦는 사람이었다. 일이 초 후 본능적으로 작게 외마디비명을 질렀다. 차가움의 근원지는 이온음료 캔이었다. 그리고 캔을 든 사람은 낯선 얼굴이었다. 2학년인가. 근데 얘가 왜?

 

마주친 시선에 웃음기를 띤 얼굴은 한 순간에 당황으로 바뀌었다. 아마 사람을 착각했던 모양이다. 별 일도 아닌데 연신 죄송하다는 말에 성우가 다 민망해졌다. 당황했는지 사투리가 사과에 섞여 나오던 그 애는 수행평가를 마친 2학년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옹성우 너 2학년에 여친 있었냐? 옆에선 성운이 예의 그 웃음소리로 자기가 더 웃긴지 성우의 등을 치며 웃었다. 뭐래. 성우는 주책이라는 듯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웃음을 그친 성운은 음료수나 뽑으러 가자며 성우를 툭툭 쳤다.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이유도 없이 평소엔 선택의 범주에 넣지도 않던 이온음료가 마시고 싶어졌다.

 

 

 

야자를 마치고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눕히면 보통 시계는 새벽 두 시 언저리였다. 유난히 피곤해 바로 잠에 들려던 참에 핸드폰 알림창에 처음 보는 이름이 떠 있었다. 미미한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간 카톡은 자기가 2학년 8반 강다니엘이라는 통성명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대충 오늘 체육관에서 착각해서 실수한 거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울고 있는 토끼 이모티콘과 함께. 기억하기에 아까 체육관에서 만났던 2학년은 덩치가 산만했다. 작고 귀여운 이모티콘과의 이질감에 웃어버렸다. 그냥 무시할만한 일에 이만한 사과라니. 답장을 고민하던 찰나 하나가 더 왔다.

 

[번호는 재환이한테 물어봤어요 갑자기 놀라셨음 죄송해요ㅠㅠ]

 

재환이는 성우와 같은 동아리 부원이었다. 내 연락처 찾기도 힘들었을 텐데. 그것보다 참 미안할 일도 많은 애였다. 그렇다고 귀찮다는 것도 아니어서 괜찮다는 식의 짧은 답장을 남겼다. 카카오톡 상단에는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에 대한 처리 여부를 묻고 있었다. 성우는 무의식적으로 친구 목록에 추가를 눌렀다. 쏟아지는 잠에 핸드폰을 덮으며 잠이 드는 찰나에 고민이 스쳤다. 왜 눌렀지?

 

 

 

언제나처럼 느지막한 등교였다. 반은 적당히 시끄러웠다. 며칠 째 수리되지 않는 에어컨과 행정실을 향한 욕설이 주를 이루었다. 적당히 이에 동조하며 다다른 책상 위엔 음료수 캔 하나. 성우의 발견을 기다렸다는 듯이 성운이 나섰다. , 어제 체육관 걔가 두고 가더라. 주변에 있던 몇이 관심을 보여 왔다. 옹성우 썸 타냐, 남고에서 무슨 소름 끼치는 소리냐며 본인들이 더 호들갑이었다. 과도한 반응들에 성우는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개소리냐며 쏘아붙였다. 일 교시 시작 전까지 구 분 정도 남은 시각이었다. 딱 그 만큼 미묘한 기분이었다.

 

 

이교시가 끝나고 성운과 들린 매점에서 다니엘을 만났다.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책상 위는 확인했냐며 물어오는 친근함에 고맙다는 말로 화답하는 찰나에 종이 울렸다. 뭔가 더 말할 게 있어 보이던 다니엘은 다음에 다시 보자며 제 친구들과 함께 사라졌다. 친화력이 사람으로 태어나면 쟤가 아닐까. 시답잖은 생각은 초콜렛 맛 아이스크림 껍질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다음 교시 담임이라며 벌써 앞에서 뛰어가는 성운의 뒤통수에 성우는 의리 없는 놈이라며 소리를 치고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또 땀 낼 생각을 하니 물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는 말에 홀려 내려온 자신이 모순적이게도 원망스러워졌다. 아직까지 여름은 끝을 알 수 없는 중턱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성우는 여태껏 얼굴을 몰랐던 게 이상할 정도로 다니엘과 자주 마주쳤다. 교무실 내려가는 계단에서, 급식실 앞에서, 매점 안에서. 교실 밖을 나갈 때마다 만나다 보니 몇 번째 만나는 것까지 인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멍청한 고민도 잠깐 했다. 그 고민은 몇 번이든 만나면 인사와 함께 꼭 몇 마디씩을 건네는 다니엘에 의해 멍청하고 쓸데없는 고민으로 남았다.

 

자주 보는 것 같다 너?”

그러게요. 형 오늘 석식 먹어요?”

. ?”

같이 먹자 그럴라고.”

너 친구들은 어쩌구.”

 

다니엘은 웃었다. 대답의 회피라기 보단 다 알면서 뭘 묻냐는 웃음, 단조롭기 그지없는 관념적 세상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파고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감정은 때때로 낯설다는 그 자체만으로 피곤을 안긴다. 객체가 무엇이든 방관하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생경함을 지워버리며 성우도 따라 웃었다. 그래, 그럼. 대답이 향하는 대상이 오로지 하나였을지는 모를 노릇이다. 과열된 세상에 미약하게나마 금이 가는 건 찰나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기까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

 

 

태어난 이래로 성우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코흘리개 적 성우가 종종 아버지의 행방을 물을 때면 어머니에게선 한 가지 대답만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외국에 나와 있는 거라고. 성우가 조금 더 어른에 가까워지면 아버지는 오실 거라고. 백지 같은 어린아이가 철석같이 믿던 사실은 오래 지나지 않아 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십 년 가까이 가족 앞에 공부를 핑계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가족일 수 있을까. 세상천지에 성우의 가족은 어머니 둘뿐이었다.

 

성우의 유년시절은 한정적이었다. 꾸불거리는 달동네 길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다 나오는 작은 주택.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담과 홈이 패인 평상, 평상만한 방 세 칸. 쉬는 날도 없이 늘 식당에 살다시피 하는 어머니. 어린 눈에 작은 공책같이 보이던 누르스름한 색의 통장을 펼치며 한숨짓던 어머니. 늦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평상에서 잠든 제 귓가에 미안하다며 뜻 모를 사과를 늘어놓으시던 어머니. 아들 앞에서 항상 웃으시던 어머니. 그러기에 더 가슴에 박혔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에 흘리듯 말한 적이 있다. 나도 지금 돈 벌고 싶다고. 좀처럼 혼을 내시지 않는 어머니였다. 기특하단 말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꾸중이 돌아오리라는 생각도 못 했었다. 드물게 성우를 책망하시는 눈에 숙연해졌다. 아마 성우가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나서도 허락해주시지 않을 눈치였다. 6학년 즈음에 성우의 친구 하나가 용돈벌이를 하자며 꺼낸 말이 있었다. 부모님 동의 없이 할 수 있는 알바가 있다고. 최저시급을 한참 못 미칠 뿐. 그 이후에 성우는 공부와 일 두 가지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타고난 머리도 나쁘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의 귀가는 아직이었다. 무엇 하나 그만둘 수 없었다. 포기하는 쪽은 인간관계였다.

 

성우는 언젠가부터 자의적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아예 단절했다는 건 아니고, 일정한 선 이상의 곁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외가 성운이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인 코흘리개 시절부터 친했고, 초등학교 일 학년부터 고등학교 삼 학년인 지금까지 무려 아홉 번의 같은 반을 지내왔다. 벽을 치려야 칠 수 없을 만한 사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이기도 했다. 주말과 방학 동안 공부와 병행할 수 있는 알바를 찾던 성우에게 성운이 삼촌이 운영하는 동네 카페의 알바 자리를 구해준 것도 성운이었다.. 카페는 외진 곳에 있어 오히려 저녁엔 손님이 뜸해 그 사이 공부하기도 편했다.

 

 

일요일 저녁 여섯 시를 향해 달려가던 시각인 지금도 카페 안엔 성우 외의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클래식 음악만이 잔잔하던 카페 내부에 울리는 도어벨에 언제나의 인사말을 건넸다. 어서오세요.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젠 학교 밖에서도 만나네?”

 

낯설지 않은 그는 놀랐는지 제 입을 틀어막은 오른손이 한참 동안 내려갈 생각을 않았다. , 뭐고. 대박이다. , 진짜 뭐고. 각양각색의 감탄사를 늘어놓다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다니엘에 성우도 따라 웃었다. 사람 한 명 더 들어온 것 치곤 지나치게 따뜻해진 기분이 들었다.

 

운명이네요.”

?”

, 우연이요. 우연.”

 

한참 고민이라도 하는 것 같던 다니엘이 꺼낸 말은 운명이었다. 운명이래. 옹성우가 소리내어 웃었다. 다니엘은 겸연쩍은 듯 쓰고 있는 모자를 만지작거리다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정정한 답은 우연이었다. 우연 정도가 적당했다. 지금은.

 

형 왜 카톡 안 봤어요?”

나 자기 전밖에 안 해,”

 

다니엘은 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쉽기라도 하냐고 장난을 걸었다. 너무 쉽게 긍정하는 다니엘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성우였다. 인기 많은 것도 피곤하다니까. 다니엘은 또 특유의 웃음소리로 한참 웃었다. 상황을 넘기는 일엔 웃음만큼 제격인 게 없었다.

 

오늘 밤에아니다. 지금 말하면 되겠네.”

그럼 재미가 없잖아요.”

너 웃긴 거 너도 알지?”

형이 웃었음 됐어요.”

 

결국 그 날 다니엘은 아메리카노 한 잔에 마감 시간까지 카페를 지켰다. 가끔 오는 손님들을 맞는 시간 빼고 시답잖은 얘기가 수도 없이 오갔다. 형은 뭐 좋아해요, 이 영화 봤어요, 재밌다 그러던데. 형 공부 잘하신다면서요. 시시콜콜한 질문에 신경이 거슬릴 법도 했는데 한 순간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달동네 언덕배기 계단을 오르면서도 한 걸음마다 생각이 계속됐다. 들뜨다가도 혼란스러워졌다. 되레 집으로 향하는 걸음만 빨라졌다. 그러면서 성우는 가만 생각했다. 집 간다고 좋은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하지. 모를 일이었다. 옹성우는 딱히 쓸모가 없어 거추장스러운 핸드폰을 집에 두고 다녔다.

 

 

다니엘이 말로 하면 재미가 없다고 했던 카톡을 확인하고 성우는 기가 차 웃었다. 지난주 목요일이었나, 석식 먹던 중에 다니엘이 사진 한 번만 찍어도 되냐면서 과하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묻길래 엉겁결에 브이 한 번 해준 적이 있었다. 아마 그 때 찍었을 사진과, 같이 온 말은 형 다람쥐 닮았어요. 십구 년 평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체구가 작은 편도 아니고.

 

[나 안 작은데?]

[형 손도 짝고 발도 짝고 그러잖아요]

 

진짜? 성우는 제 손발을 물끄러미 보았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작은지도 모르겠다. 근데 십구 년 평생 나도 몰랐던 걸 다니엘은 어떻게 알았을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자주 이러는 것 같은데. 괜히 신경이 쓰였지만 다니엘과 시답잖은 연락을 나누며 어느새 잊었다.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너 안 자?]

[형 잘라구요?]

[나 고삼이야 다니엘아]

[앜ㅋㅋㅋ알았어요]

[이건 답장하지 마요 미리 잘 자요 형]

 

다니엘의 마지막 답 이후로 한참 동안 핸드폰을 덮지 못 했다. 뭐야, 간지럽게. 지 여자친구도 아니고. 터져 나온 혼잣말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요즘 자신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급히 편 문제집에도 자꾸만 글씨들이 떠다녔다. 옹성우는 그 날 세 시간이 넘게 한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다.

 

 

 

한층 깊어진 더위와 함께 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 자율학습을 빠지고 방학 내내 성우가 출근하는 카페에 어쩐 일인지 다니엘도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다. 카페가 만석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다니엘과 성우에겐 말 그대로 하루 종일 함께 있는 하루가 계속되었다.

 

다니엘아.”

?”

너 친구 없어?”

많은데.”

그러면은 왜 매일 여기 죽치고 있어?”

 

다 알면서 뭘 묻냐는 표정이었다. 성우도 다 알면서 물은 말이 맞았고. 다니엘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어했다. 그럴 때마다 미리 말의 앞길을 막는 건 성우였다. 다니엘이 그 얘길 꺼내려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사무쳤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대체 뿌리는 무엇인지 아무래도 답이 안 나와 내린 대강의 결론은 이 이상은 성우에게 사치라는 궤변이었다. 다니엘은 더 이상 그 말을 꺼내려 들지 않았다. 성우는 다니엘에게 더 좋은 길이 있을 게 분명하다는 모종의 확신과 죄책감도 있었다. 사실 지금 이 상황도 자기의 욕심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표정으로도 다 보였는지 다니엘은 가끔 내비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생각이라도 읽힌 것 같아 성우는 웃어 보였다. 별로. 언젠가부터 다니엘의 어두운 표정을 보는 건 힘들었다.

 

그럼 이따 내랑 아이스크림 먹으러 안 갈래요? 새 맛 나왔다던데.”

나 거기 먹는 것만 먹는데. 딸기맛 그거.”

형 딸기 좋아했었나?”

아니 그냥처음 먹었던 맛이라서 쭉 먹고 있지.”

그게 뭐고. 이따 내랑 잠깐 다녀와요.”

 

새로 나왔다는 아이스크림은 성우가 계속 먹어왔던 기본 딸기맛보다 훨씬 맛있었다. 형은 취향이란 게 없었다며 장난스럽게 핀잔을 놓는 다니엘에게 취향 하나 알려줘서 고맙다며 웃는 내내 속이 썼다. 잊고 살았던가, 아님 진짜 알지도 못한 채 가뒀던 감정이 물꼬를 트는 것 같은 느낌에 혼란스러웠다. 다니엘은 자꾸 옹성우를 깨닫게 만든다. 무시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네가 말했듯 이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더운 바람에 눈을 감았다. 여름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짧은 여름방학이 끝이 났다. 2학기 중간고사까지도. 시간은 체감상 배로 빨라지는 기분이었다. 다니엘은 가까워진 수능에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덜 찾아오겠노라고 성우 앞에서 다짐을 했다. 전에 없이 비장한 모습에 수능까지 안 보는 건 어떠냐는 식으로 말했더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알겠다며 풀이 죽은 다니엘을 놀려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던 사이 찬바람이 불어왔다. 무더위를 탓하던, 질식할 것 같다며 손사래를 치던 여름이 언제였다고. 너무 빠른 가을이었다.

 

 

형 손금 봐줄까요?”

그건 무슨 쌍팔년도 작업이야?”

직구 너무 심한데.”

근데 너 손 왜 이렇게 차?”

원래 그래요.”

 

겨울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얼음장이면 어떡하냐며 성우는 타박을 놓았다. 그럼에도 겹쳐진 손을 빼진 않았다. 그리 웃긴 대화도 아니었는데 서로의 입가엔 누구 하나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핫팩 같은 거 없구?”

안타깝게.”

 

겹쳐져 있던 손을 그러잡았다. 인간핫팩 일분에 오백원. 옹성우도 강다니엘도 티 없이 웃었다.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가 담기는 게 한없이 낯간지러우면서도 웃음이 튀어나오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추위를 타는 성우의 주머니 속에 자리 잡은 핫팩의 존재를 뺀 모든 게 티 없는 진실이었다. 서로가 있기에 행복이었다.

 

근데 너 염색 물 많이 빠졌다.”

그러게요. 무슨 색 하지 다음엔.”

 

제 머리를 흩뜨리는 다니엘. 정전기가 일었는지 다니엘의 머리가 요상하게 떴다. 성우는 더듬이마냥 붕붕 뜬 머리를 가만 바라보다 손으로 두어 번 쓸었다. 다니엘은 장난으로 받아들인 듯 되레 웃으며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성우의 머리칼을 살짝 헝클었다. 분명히 정전기가 이는 건 제 머리카락일 텐데 성우의 마음 한 구석이 따끔거렸다. 그치, 가을이면 정전기도 나고 그렇겠지. 그럴 계절이었는데도.

 

 

 

카페 정리 아까 다 했어. 가자.”

 

카페 문도 닫고 나왔건만 다니엘은 아직도 뭘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다니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오늘 형 데려다 줘도 되나.”

다 아는 길을 뭘 데려다 줘.”

 

괜히 한 번 거절하는 척을 하면 다니엘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매번. 다니엘의 팔을 끌어당겼다. 다니엘은 다시 환해진 표정으로 재잘거렸다.

 

 

형 졸업식 때 나 우는 거 아이가.”

울긴 왜 울어.”

왜 울긴. 그때 내 좀 꼭 안아도.”

 

등치는 커가지구.

알았어.”

 

 

마음에 정전기가 인다. 따갑다, 다니엘아. 넌 대체 누구길래 날 이렇게 파고들까. 너무 좋아도 눈물이 난다고들 하던데 내 세상의 네가 너무 커서 난 울 것만 같았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둘은 한참을 걸었다. 서로의 발자국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너 안 늦겠어?”

우리 집 여서 십 분도 안 걸리는데.”

이건 다니엘의 거짓말.

이번만이야. 다신 오지마. 형 부담스럽다, 다니엘아.”

이건 옹성우의 거짓말.

 

, 되다.”

그니까 누가 따라오래.”

 

뒤따라오던 다니엘의 손이 성우를 약하게 잡아끌었다. 성우의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의 중턱이었다. 힘들다고 혼잣말을 하며 무작정 계단에 걸터앉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애 같아 웃어버렸다. 옆에 앉으라는 듯 제 옆자리를 탁탁 치는 다니엘에 길바닥이 얼마나 더러운 줄 아냐며 한 마디 핀잔을 놓으면서도 성우는 따라 앉았다. 처음 보는 하늘이었다.

 

여기 되게 이쁘다. 형네 집 근처 하늘이라 그런가.”

 

낯간지러운 소릴 잘도 하는 다니엘의 눈은 우주로 가득했다. 여느 도시의 밤하늘답지 않게 펼쳐진 새벽하늘엔 곳곳에서 별이 빛나고 있었다. 별 구경에 심취한 다니엘과 밤하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삼류 로맨스 영화 속에라도 들어온 듯 괜히 벅차오르는 마음과 때마침 시려오는 눈에 성우는 감정까지 망각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웃고 싶었을까, 울고 싶었을까. 불어오는 바람에 떠 있던 다니엘의 머리칼은 새까만 밤하늘에서 헤엄치는 듯 했다. 몇 번이나 곱씹어 뱉는 성우의 말 한 자 한 자가 떨렸다.

 

그러게. 이런 데 있는 줄도 몰랐네. 몇 년을 살았는데.”

 

짧다면 짧다지만 한평생을 다 아는 척, 모든 일을 이해하는 척 살아왔다. 티끌만한 억울함도 없이. 환경이 낳은 산물로 단조로움 위에서 살아갈 것을 스스로 종용해왔다. 내 무지를, 눌러 담았던 감정을 너는 상기시킨다. 나를 자각하게 한다. 다니엘. 골백번도 넘게 부른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내리는 별빛은 네 머리 위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더 담아두면 궁상맞게 밖에서 눈물이라도 흘릴까 싶어 소리 내어 불렀다. 그 찰나에도 또 무언가를 알았다. 난 네 이름을 부를 때의 그 음절마저, 바람 한 줄기마저 사랑하는구나.

 

 

다니엘.”

 

 

숨이 겹쳐졌다. 튼 입술은 조금 까슬했다. 달이 밝지 않았기에 별은 비로소 빛났고, 감은 눈 앞은 온전히 어둠이었지만 서로의 우주를 담았다. 서럽도록 생생한 느낌에 눈물을 삭혔다. 나의 기쁨이자 슬픔, 이기심이자 통증인 네 모든 날 속에 머무르고 싶었다. 먼 훗날 네 이름이 낯설어지길 염원해야 할 날이 올지라도, 네 이름 글자만으로 환상통마냥 앓게 될 날이 오더라도, 인생에 단 한 번의 예외를 둘 수 있다면 너였음 했다. 그토록 마주하기 힘겨웠던 나의 순정이었다. 둘 밖에 남지 않은 세상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피어났다. 언젠가의 새벽에 그들은 가감 없이 사랑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