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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펜션에 둘이 마주 앉았다. 근처에 계곡이 있어 여름이 성수기인 그곳엔 12월 초는 비수기였다. 마을을 이룬 펜션 동에 투숙객은 단둘밖에는 없었다. 바깥은 이미 어둑해져있었고, 둘은 차를 타고 오다 발견한 정육점에서 사온 고기에 술을 몇 병 마신 뒤였다. , 함 멈춰봐라. 오늘 소 잡았다고 써 있네. 다니엘은 처음 와보는 곳인데도 익숙하게 이것저것 요구하며 흥정했다. 오늘 육회가 좋아요. 서비스 많이 드릴게. 다니엘이 순간 멈칫하며 육회는 괜찮다고 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나. 성우가 역으로 제지해서 결국 구이용 고기만큼이나 푸짐하게 육회도 받았다.

 

 

고기는 상태가 좋았다. 성우도 술을 적게 마신 건 아니었지만 다니엘이 특히 많이 마셨다. 두 사람 분량으로 넉넉하게 인심을 써준 육회를 다니엘이 혼자서도 빠르게 해치워갔고, 그만큼이나 비워가는 술병이 늘어갔다. 하얀 얼굴이 발그레해져선 안 그래도 얼굴에 철철 흐르는 웃음이 더 흐드러졌고, 한동안 그대로 하이한 대화가 이어진다 싶었다.

 

 

분위기가 바뀐 건, 물 흐르듯 이어지던 대화가 끊어졌다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예전에 이럴 때에는 다니엘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를 생뚱맞은 화제를 꺼내며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지금의 다니엘은 어색해서라도 꼭 걸고 있는 디폴트 상태의 웃음기까지 싹 지운 상태였다. 그 얼굴이 느닷없이 성우를 향해왔다. 눈까지 가느다랗게 된 이 행동의 의도는 명백했다. 허락을 구하듯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어보였다. 부쩍 다가온 더운 숨결에 성우는 결국 얼굴을 돌렸다.

 

 

비껴난 다니엘의 얼굴이 성우의 목 언저리에 멈추어 좀처럼 물러나지 못하고 정지해 있었다. 닿지 않아도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다니엘의 얼굴 바로 한 겹 위를 흐르는 열기에 성우는 여전히 시선을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 갑자기 왜 이렇게 파고드는 거야?

 

 

3년 만이었다.

 

 

 

 

 

 

 

 

 

여행의 사정 

w.마요니

 

 

 

 

 

 

 

 

 

 

01. 성우

 

 

 

-형은 성 덕분에 못 찾을 수가 없겠더라. 내 한 번에 찾았다.

 

 

3년 만에, 그것도 sns의 댓글을 통해 찾아온 메시지라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난데없었다. 갑작스런 연락에 이쪽에서 궁금한 것은 보통은 '어떻게' 찾았냐가 아닌 '' 찾았냐라는 것일 텐데. 하지만 이유라는 게 꼭 있어야 했겠나. 다니엘이 군대를 가면서 연락이 끊기기 전까지 둘의 포지션은 '절친'이었으니까. 오랜만에 예전 생각이 나고, 그 추억에 대부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당시의 절친에게 연락을 한다는 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니 유난하게 스루하지 않고, 무난하게 답을 보내기로 했다.

 

 

-그래,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지금 캐나다에 있나봐?

 

 

짤막한 메시지였지만 뒤의 저 한 줄을 보태기 위해선 다니엘의 SNS를 대충이나마 훑어야했다. 꽤 많은 피드가 있었다. 영어 반, 한국어 반. 간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새 현지인 친구들도 많이 생긴 듯했다. 주로 셀카와 다니엘이 일한다는 카페의 사진이었는데 그의 현지 친구들은 물론, 기존의 친구들까지 뒤섞여 댓글들이 꽤 많았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댓글로 답을 할까 하다가 낯선 사람들 사이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는 멋쩍어서 DM으로 썼다. 그 후론 자연스럽게 핑퐁이었다. 시차가 있어 성우가 저녁에 보낸 메시지의 답이 아침에 와 있고, 그에 대한 답을 성우는 다시 저녁에 보내는 꼴이었지만 각자의 소소한 일상들을 주 화제로 삼는 무난한 대화는 오히려 끊는 것이 더 어색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담주쯤 이제사 늦은 휴가를 가게 되었다고 보낸 성우의 메시지에 다니엘의 답은 이렇게 돌아와 있었다.

 

 

 

-나도 담 주에 한국 가는데.

 

 

대화가 이어져 온 후 처음으로, 성우는 답을 보내지 못했다. ‘그래? 그럼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볼까?’ 라는 이 상황에 더없이 적절한 이 표현을 차마 쓸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다니엘의 입장이 아닌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봐야했다. 다니엘이야 자신이 그저 절친이었겠지만, 자신에게 다니엘은.

 

 

1년 반여, 마음에 품고 안달했지만 결국 고백도 못 해보고 접은 상대.

 

과거 애인의 사촌(육촌) .

 

 

적어도 성우의 입장에서는 꼭 만날 필요까지는, 게다가 빈말로라도 먼저 만나자고 할 이유는 더더욱 없지 싶었는데.

 

 

-형 휴가라 어디 여행이라도 가나. 갈 거면 나도 같이 가자. 푹 쉬기 좋은 예쁜 펜션 찾아봤다.

 

 

턴을 넘긴 대화는 다니엘에게서 헷갈릴 것 없는 분명한 메시지가 되어 펜션과 맛집들의 링크와 함께 돌아왔다. 그간 오갔던 대화 중, 캐나다의 와이파이 속도에 처음엔 적응이 안 되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성우는 꽤 여러 개가 되는 링크들을 쓱쓱 지나칠 수가 없어 다니엘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 중에서 두 번째 펜션이 예쁘고 좋아보인다는 얘기를 어찌어찌 답으로 보낸 거였는데,

 

 

-예약이랑 카 렌트만 형이 좀 알아봐도. 나도 면허 땄으니까 같이 운전하면 되겠다. 그러고보니 형 차 샀으려나?

 

-, 입사하면서 바로 샀어. 대중교통으론 애매해서.

 

-우와, 뭘로 산 거야. 그럼 이번에 같이 가면서 시승식 하자.

 

 

그저 다니엘의 말에 장단을 맞춰 대답해갔을 뿐인데 다니엘이 입국하고 이틀 후에 떠나기로 했고, 픽업 장소와 시간도 정해져버렸다.

 

 

..지금 대체 나, 뭐하고 있는 거지.

 

 

하루하루 약속한 날짜가 가까워져 가면서 숙소에선 예약 확인 문자가 몇 번에 걸쳐서 왔지만, 성우는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전날 홀린 듯이 짐을 싸두고, 당일 날 약속 장소까지 가는 동안도 성우에겐 비현실적인 망상들만 끊임없이 몰려왔다. 이 모든 것은 사실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이라서 픽업 장소에 가면 결국 아무도 있지 않고, 혼자서 떠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약속시간을 5분 남기고, 저 멀리서 예전과는 다름없는, 자기 머릿속에 남아있던 얼굴이 꼭 그 모습 그대로 이쪽을 알아볼 때에도, 가방을 둘러매고 오는 동안 몸이 부딪힌 다른 사람에게 몸을 쓱 굽혀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까보다 한껏 가까워진 얼굴이 온 근육으로 웃어 보이며 옆자리에 앉아선, 형 진짜 오랜만이다, 라며 팔을 뻗어 자신을 가볍게 안아오는 순간까지도.

 

 

모든 것이 생각은 물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들뿐이었다.

 

 

 

 

*

 

 

 

 

 

다니엘과 예전에 한 번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느닷없이 다니엘이 바다를 보러가고 싶다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던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에 수영 강사였던 다니엘은 거의 주6일 근무를 하는데다가 일요일도 당번제로 나가야 해서 멀리 떠나는 여행 같은 건 엄두도 못 내고 있을 때였는데 마침 그 다음 날은 다니엘이 한 달에 한 번 쉬는 토요일이었다.

 

 

-서울 오고 나서 바다를 한 번도 못 봤다.

 

-넌 맨날 물에서 살면서.

 

-그거랑은 좀 다르다. 들어가는 물이랑 바라보는 물은. 여기 물은 너무 좁다. 냄새부터 파이다.

 

 

다니엘의 궁시렁거리는 불만에 성우는 웃었다. 그 자리에선 잔말 말고 잠이나 푹 자라고 해놓고 헤어졌는데, 그 처진 어깨에 시무룩한 얼굴이 마음에 걸려서 결국 그날 인천 본가에서 무작정 어머니의 차를 끌고 왔다. 자다가 눈이 퉁퉁 부어 불려 나온 다니엘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 진짜 멋지다. 내 쫌 감동했다.

 

-... 나도 네 말 듣다보니 바다 보고 싶기도 했구, 운전하는 거 좀 좋아하기도 하구...

 

-역시 형은 낭만을 사랑하는구나. 밤 드라이브로 바다행이라니 크으..

 

 

내가 사랑하는 건 낭만이 아니라 너야,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그렇게 무작정 동해로 간 적이 있었다.

 

 

새해가 아니었음에도 해돋이를 기다리는 인파들이 꽤나 있었다. 아침 시간까지 몸을 녹이게 해준다는 식당 한 켠에서 둘은 국밥을 먹었다. 다니엘과 성우, 그리고 가족 단위로 온 두어 팀을 빼곤 대체로 짝을 이룬 남녀들이 많았다. , 저기 좀 봐라. 암만 봐도 저 사람들은 아직 썸타는 중인 갑다. 남자가 똥 싼 강아지맹키로 안절부절 못 하네. 근데 같이 여까지 왔으면 여자도 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잘 되는 거 아인가. 푸흣하고 웃는 다니엘을 따라 성우도 애매하게 웃었지만 속은 쓰렸다.

 

 

-형은 고백해본 적 있나?

 

-...거절당할지도 모르는 일은 잘 안 해.

 

-누가 형을 거절하겠노.

 

 

거절해도 형이 하겠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얼굴을 보곤 성우는 얼마 남아 있지 않았던 국물을 괜히 몇 번이고 숟가락으로 떠올렸다.

 

 

-내는 속 끓이는 건 못 한다. 나중에 후회하는 건 더 싫다.

 

-후회? ... 해서 더 후회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건 꼭 하고 살아야 한다. 못 하면 병난다.

 

 

형은 안 그러나? 라며 이쪽을 향해 씨익 웃어버리는 다니엘의 얼굴에는 어떠한 아쉬움도 없었다. 그래, 너는 지금 이대로가 좋구나. 몇 번이고 확인받는 진실은 뼈아팠다.

 

 

구름이 잔뜩 끼어 어정쩡하게 날이 밝아오는 바람에 결국 해돋이는 보지 못했지만 다니엘은 바다에서 내내 강아지마냥 신이 나 있었다. 속이 확 트이는 기분이다. 진짜 좋다. , 완전 고맙데이. 내가 이따 회랑 술이랑 제대로 쏠게. 요즘 오징어 회 진짜 맛있다. 오늘밤은 실컷 편하게 마시자.

 

 

하룻밤 자고 일요일에 올라가려던 계획은 다니엘의 센터에서 온 갑작스러운 연락으로 무산되었다. ...이럴 순 없다. 코가 쑥 빠진 다니엘을 오히려 성우가 위로해야 했다. 근데 나 좀 피곤하니까 조금만 자고 가도 될까. 그러자그러자. , 내가 담에는 꼭 운전 배워서 교대해줄게. 그때 꼭 같이 또 와야 한다. 그때는 꼭 술도 먹고 회도 먹자.

 

 

근처 모텔에 대실을 하고, 좁은 엘레베이터를 거쳐 함께 방에 들어갈 때에는 조금 의식이 되면서 두근거리기도 했지만- 다니엘은 들어가자마자 컴퓨터부터 만져보다가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지 이내 쓱 일어났다. , 나는 근처 피씨방 다녀올게. 형은 좀 자고 있어라. 보일러 도는데 시간 좀 걸리는 거 같으니 답답해도 덮고 있고. 이불 위에 벌렁 누워있었던 자신을 굳이 밑으로 밀어 넣곤 이불을 덮어 도닥도닥해주고 나서 이쪽을 향해 씨익 웃고 나가던 그 모습. 멍 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허탈한 웃음이 나오고, 잔뜩 너덜너덜해진 피곤함이 몰려와 혼자 까무룩 잠이 들었었지. 그 여행지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니엘은 군대에 가기 전까지 매사에 늘 그런 식이었는데.

 

 

그때와 똑같은 얼굴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다니엘. 네가 그렇게 내 앞에서 진지해지기를 바랐는데, 그때는 참 간절히 바라고 바랐었는데.

 

 

 

 

 

*

 

 

 

 

 

-...근데 갑자기라 하면 내 쫌 섭한데.

 

 

한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낮은 목소리가 불쑥 다니엘에게서 흘러나왔다.

 

 

-내가 캐나다 왜 갔는지 아나. 아니, 내가 군대에서 휴가 나와도 서울에는 왜 한 번도 안 갔는지 아나. 형은 궁금하지도 않았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성우는 생각지도 못했던 화제에 고개를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정색하고 밀고 들어오던 아까와는 달리 희미하게나마, 입 꼬리를 올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젖은 눈에 가라앉은 눈빛이 쓸쓸했다.

 

 

-웃기지. 형을 못 보게 되니까 갈수록 생각나는 게 온통 형뿐이데. 그때만 해도 내가 이미 늦었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첫 휴가 나가자마자 얼른 형한테 먼저 가야겠다. 형 빨리 보고 싶다 ....그 생각뿐이었다.

 

 

다니엘의 첫 휴가라면 3년 전 5월 즈음. 성우가 다니엘의 사촌 동생과 막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자신이 까맣게 몰랐던 긴 시간 동안, 진심으로 좋아해왔다는 그 아이의 고백에 당혹했으면서도 그 아이가 꼭 다니엘을 바라보던 자신 같아서 결국은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아직은 다니엘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었음에도.

 

 

-...그랬구나.

 

 

그때는 혹여라도 그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하고 헤벌쭉한 얼굴로 축하한다는 말을 들을까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촉박해서 본가에 들렀다가 바로 복귀한다고 전해듣고는 껄끄러운 상황을 피하게 되어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차라리 군대에선 괜찮았다. 암만 미칠 것 같아도 뭘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포기도 되고. 그 와중에 형이랑 있었던 일들 생각하면 적어도 그 순간만은 또 행복하기도 했고. ...근데 제대하고 나니까,

 

 

그 부분에서 말을 끊은 다니엘의 표정이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훅 어둡게 가라앉아 성우는 순간 주춤했다. 퍼뜩 이쪽의 반응을 느꼈는지 다니엘이 성우를 바라보곤 얼른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려 표정을 만들어보였다.

 

 

-부산도 서울이랑 너무 가깝더라. 맘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을 만큼.

 

-....

 

-안 되잖아. 그래서 떠났다. 먼 곳이 필요 했다. 어느 순간 확 돌아도 형 찾아갈 수 없는 곳. 그냥 형을 생각해도 되는 곳, 그냥 형을 가끔 그리워만 할 수 있는 곳. 나는 그런 곳밖에 있을 데가 없었다.

 

 

다니엘에게서 울컥울컥 터져 나오고 있는 말들이 성우의 지난 3년을 들쑥날쑥하게 헤집었다. 갑자기 너무 많이 등장한 수많은 만약들이 마치 스노우 볼이 뒤집혀진 것처럼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만약 조금만 더 내가 기다렸다면, 만약에 내가 먼저 말이라도 해보았다면, 혹은 또 만약, 만약에 만약.

 

 

...하지만 그게 뭐. 이제 와서 뭐. 성우는 자꾸 휘저어지는 감정들을 애써 가라 앉혔다. 달라질 것은 없잖아. 그 후로도 내게 중요한 많은 일들이 생겨버렸는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그땐 그랬다는 후일담일 뿐이지 않은가.

 

 

-...그냥 그랬다는 얘기다. 이제 와서 과거 얘기나 하러 온 건 아니다.

 

 

다니엘의 단단해진 시선이 성우를 감싸왔다. 무엇인가에 훅 빠져들었을 때 스쳐가던 예민하고 날카로운 모습. 다니엘의 이런 모습을 옆에서 바라본 적은 많이 있었지만, 다니엘이 이 같은 모습으로 온통 자신만을 바라봐 온 것은 처음이어서 성우는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다니엘의 시선에 단단히 붙들려버려 눈을 피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형은 진짜 이제 내가 아무렇지도 않나?

 

 

끈기 있게 한참을 기다리던 다니엘은 이번엔 손을 성우의 얼굴로 올려 뺨을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성우의 볼을, 그 위의 점들을 쓸어내려오다가 입술 부근에서 머물렀다. 피부 위로 직접 전해지는 열기에 성우의 몸이 움찔했다.

 

 

-내 확인해야 한다.

 

 

더 이상 몸을 뺄 수는 없다. 하지만 성우는 좀처럼 알맞은 대답이나 반응이 무엇일지 선택할 수 없었다. 명백하게 이미 지난 일이라고, 이제는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 얼굴을 맞닥뜨리지 않았을 때, 그의 숨결이나 손길을 접하지 않았을 때를 전제로 한 이야기였다.

 

 

-...일단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싫으면 싫다 해라. 귀에 닿아온 입술과 함께 미끄러지듯 들어온 이 말을 시작으로, 다니엘이 성우의 위로 온통 쏟아져 내렸다. 반칙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이 순간만큼은,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 성우에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여러 감각들과 감정 중, 가장 코어하고 퓨어한 것은 결국, 그간의 시간이 무색하게 생생하게 살아나버린, 다니엘을 만지고, 다니엘에 닿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뿐이었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이 밀려드는 어깨 위로 올라갔다. 잠시 주저하던 가는 팔이 탄탄한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일단 시작된 움직임은 양쪽 모두 여유 없이 거칠었다.

 

 

 

 

 

 

 

02. 다니엘

 

 

 

눈을 좀처럼 뜰 수 없던 것은 따뜻함 때문이었다. 온몸을 감고 있는 나른한 온기. 버석하면서도 포근한 이불을 한껏 안고 몸을 바르작거리고 있을 때 손끝에 사람의 기척이 걸려와 순간 움찔 놀랐다. 눈앞에도 한 움쿰인 이불을 걷어내고 나자 눈에 들어온 오목조목한 얼굴.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성우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보자 실감나는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평소엔 성실하게 8시까지 출근을 한다면서도 여전히 아침잠이 많은지 좀처럼 깰 생각을 안 한다. 대담하게 엄지손가락 끝으로 긴 속눈썹을 위 아래로 훑어보아도, 둥그런 코끝을 좌우로 문질러 보아도, 얇은 입술과 살짝 올라간 입 꼬리를 몇 번이고 덧그려 보아도, 볼에 찍힌 점을 이어보듯 쓸어내려 보...고 있는데,

 

 

-...언제 일어났어.

 

-방금

 

 

눈을 깊게 꿈쩍하고는 몇 번을 깜빡깜빡하던 눈동자가 다니엘을 향해왔다가 다시 가늘게 감겼다. 잠결에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쓸어 올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다니엘은 가는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날름 물었다. 하지마아.. 말꼬리를 늘이며 손을 빼고 돌아 누우려는 성우를 이불채로 폭삭 안아서 이쪽으로 끌어당기니 뭐라뭐라 꿍얼거리다가 결국은 얌전히 딸려온다. ...어쩌지. 너무 좋아. 한참을 이불인지 머리카락인지 목인지, 가리지 않고 입술을 부딪치고 있는데도 성우는 그새 다시 잠들었는지 잠잠했다.

 

 

간밤엔 기억이 드문드문 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간신히 참았던 것이 일순 뚝, 끊어지면서 어떻게든, 뭐든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충동에 그저 휩쓸려갔다. 가끔 성우가 너무 빠르다고 팔을 꾹 잡아와서 처음 몇 번은 허둥지둥 멈추기도 했지만 입술을 깨물며 허덕이는 발간 얼굴과 팔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마르고 탄탄한 선들을 보고 있자면, 금방이고 다시 확 돌아버렸다. 싫으면 언제든 놓아주겠다는 처음의 약속 같은 건 까맣게 잊고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려버렸다. 성우의 사정 같은 건 봐주지 않고 몰아붙여버렸다.

 

 

그런 행위들도 말도 안 되게 미치게 좋았지만. 지금, 성우의 모습 하나하나가 비로소 분명하게 자신의 기억 속으로 새겨지고 있는 지금. 온전한 정신과 감각으로 쌕쌕하는 숨소리와 보드라운 감촉, 작고 귀여운 얼굴을, 11초도 놓치지 않고 마음껏 만끽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순간.

 

 

지금이야말로 막 시작한 연인들의 시간 같아서, 이 사람이야말로 바로 언제까지고 쭉 갈 수 있는 내 사람인 것 같아서, 다니엘의 마음 깊은 곳부터 몽글하고 든든한 따뜻함이 한없이 차올랐다. 여기 있었어. 이미 놓쳐버린 것,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여기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

 

 

 

 

 

11월이었지만 캐나다에서는 10월부터 이미 초겨울.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은 더 추운 날이었다고 했다. 하필 그날 정전이 된 거였다. 다니엘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온수매트 속에서 덜덜 떨다가 너무 추워서 잠에서 깼다. 집안에서도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얼어 후우우 퍼져나갔다. 전등의 스위치를 몇 번 눌러 보고 나서 정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습관적으로 포트에 물을 데우려다가 또 아차했다. 옷을 있는 대로 껴입었지만 이미 한기가 들은 몸은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밖에 나가서 별이라도 볼까, 어차피 추운 건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그 같은 생각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손이 그대로 들러붙을 듯한 문고리에서 얼른 손을 떼고, 목에다 손을 밀어 넣고 어기적거리는 채로 다시 소파로 돌아와 웅크리고 앉았다. 몸을 데울 만한 게 없으니 생각이라도 데워볼까. 따끈한 커피, 머그 잔을 두 손으로 잡고, 따끈따끈... 근데 설거지 한 가득...... 이런 거 말고, 여름, 따뜻한 나라, 쨍쨍 내리쬐는 햇빛, 바다, 서핑, 물 속에 풍덩....... 암만 생각해도 반질한 빙판이랑 허연 눈밖에 안 떠오른다. 아니아니, 이런 거 말고, 이런 거 말고. 따뜻한 거, 행복한 거. 따뜻하면서 행복한 거. 지금처럼 춥고 처량하고 청승맞은 거 말고, 좋았던 때. 제일 행복했던 때.

 

 

작은 틈만 생기면 새어나오는 외로움은 이내 그리움이 되어버리곤 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과 사람에 대한.

 

.

.

.

 

-얼굴빛이 좋지 않네.

 

 

밤새 들어찬 한기는 카페의 아침 러시를 삐그덕거리며 정신없이 보내고 나서야 간신히 좀 풀어져 내렸다. 러시 후 한가해진 때, 이 시간의 단골 손님인 Mr.크렉이 다니엘을 보고 말을 걸어왔다. 크렉의 고정 메뉴인 카푸치노에 크랜베리 머핀은 늘 다니엘이 서빙해 왔지만 이런 식으로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크렉은 괜찮았어요? 어제 이 일대 대대적 정전이었다는데...

 

 

밤새 너무 추웠어요. 약간 과장되게 몸을 부르르 떠는 제스처를 해 보이는 다니엘을 크렉이 물끄러미 바라봐왔다. 크렉은 다니엘이 제일 먼저 눈에 익혔던 손님이었다. 이 마을의 대표적인 로컬 카페인 이곳엔 늘 오는 시간대, 늘 앉는 자리를 정해놓고 오는 단골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희끗한 은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는 적어도 60대쯤은 되었을 나이였지만 그 나이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소 무례할 정도의 자신감이나 거침없음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어딘지 모르게 늘 조심스럽고 우아한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굳이 젊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지금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잘생겼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그의 고정석인 창가 자리에 앉아 한장한장 책장이나 신문을 넘기는 모습을, 다니엘은 가끔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카푸치노 한 잔 더.

 

 

대답 대신 크렉은 주문을 보탰다. 약간 머쓱해진 다니엘이 얼른 다녀와서 서빙을 해오자니,

 

 

-내가 살 테니 함께 마시지.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단골들 중엔 오너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일개 알바생인 자신이 이런 권유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어떡하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크렉 외의 다른 손님은 없었다. 러시 후의 설거지 거리가 좀 남아있긴 했지만 그래도 잠깐은 괜찮겠지 싶어서 눈을 휘어 웃으며 감사 인사를 덧붙이고 그 앞에 앉으려는데,

 

 

-고마워할 거 없어.

 

-?

 

-이거 플러팅이니까.

 

 

순간 다니엘은 농담이라곤 한 점도 섞이지 않은 진지한 노신사의 얼굴을 실례를 무릅쓰고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월에도 쉽사리 탁해지지 않은 투명하고 푸른 눈이 자신을 똑바로 향해왔다.

 

 

-진심이지만 농담으로 해둬야겠군.

 

-..아하하하..

 

-이 나이가 되었어도 거절은 뼈아프니까.

 

-거절당할 것같은 일은 잘 안 해.

 

 

순간 조곤한 음성이 갑자기 귓가로 생생하게 살아오는 느낌에 다니엘은 손을 멈칫했다.

 

 

-후회하기보단 아쉬워하는 게 낫지.

 

-후회? ... 해서 더 후회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이쪽을 보며 씁쓸하게 웃어보이는 크렉의 얼굴이 갑자기 낯설면서 낯익었다.

 

 

-괜찮아?

 

 

얼떨결에 든 커피 잔에서 아직 채 식지 않은 커피가 후룩 밀려들어 읏뜨뜨하며 커피잔을 소란하게 내려놓았다. 그 난리에 크렉은 순간 좀 놀란 것 같았지만 곧 여느 때와 같은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서 한 얼굴을 생각해버린 다니엘은 여느 때의 크렉을 보듯 그를 볼 수 없었다.

 

 

-...설렜어요, 크렉.

 

 

.. 그런데요, 그게 미안하지만 크렉 덕분만은 아니구요, 꼭 크렉 같은 사람을 하나 알거든요. 근데 오늘 그 사람이 유난히 많이 생각이 나서, , 그 사람이 누구냐면요... 당황하다보니 굳이 상대방과는 상관없을, 궁금해 하지 않을 만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동안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던 크렉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 사람, 나만큼이나 잘생겼나보네.

 

-물론이에요. 완전.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는 다니엘을 보며 크렉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대타는 싫어, 하지만

 

 

-정리하고 온다면 받아줄 생각은 있어.

 

-정리요?

 

 

...근데 말이에요, 정리를 할 수 있을까요? 사실 뭐 하나 시작한 게 없는데... 이 말만은 왠지 꺼내놓지 못한 다니엘이 그저 머쓱하게 웃는 동안 크렉은 늘 그랬듯 가져온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조용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

.

.

 

그날 밤, 여느 때처럼 SNS에 자신의 셀카를 올리고 댓글을 확인하던 다니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돋보기 모양의 아이콘을 눌렀다. ong..s..eo.. 후두두둑 올라오는 비슷한 아이디들의 프로필 사진 중에서 바로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그였다. 머리스타일링이 달라지고 예전과 달리 안경을 쓰고 있긴 했지만 분명 옹성우, 그였다. 맥이 풀렸다. 이렇게 쉬웠는데. 나는 무엇을 피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 실은 찾는 게 무서웠던 것이 아니다. 성우의 지금을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그러면 끝내야 할지도 몰랐다. 이젠 습관이 된 그리움을. 자신은 그런 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대상이 성우라고 생각하니 무엇 하나 자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난 3년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자신해왔던 것들이 성우의 존재 앞에서 깨지고 깨져갔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런 얼굴은 공공재로 남아야 함.

 

-ㅇㅈ. 우리 회사 최초 옹씨 사원의 연애를 반대합니다.

 

 

피드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며칠 전에 올린 셀카가 있었다. 열심히 하나하나 댓글들까지 신경 써서 훑어봤지만 현재 사귀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사촌 동생과는 작년에 헤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졸업반을 앞둘 때까지도 군대를 안 간다더니 올 초에 드디어 갔다고 했었지. 집에 전화했을 때 건너 들어온 소식에 그때도 마음이 지금처럼 일렁였었다.

 

 

고민하다가 댓글을 택했다. 혹시라도 DM은 수신부터 거절할 수도 있으니까. 대부분 회사사람들로 보이는 댓글 중에서 오랜만에 연락한 성우의 동창으로 보이는 사람의 댓글이 있었다. 그래, 저 정도 느낌이면 되겠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오랜만이지만 친근하게.

 

 

찾는 것보다도 댓글을 쓰는 게 더 오래 걸렸다. 답을 기다렸던 반 하루 동안, 지난 3년이 다시 처음부터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 같았다.

 

 

 

 

*

 

 

 

 

 

-, 라면 먹을래?

 

 

포트에 물을 끓이고 컵라면의 비닐을 벗기고 있을 때 성우가 부스스 일어났다. 끄덕하고 자리에 앉으며 하품하는 양을 보곤 헤실 웃은 다니엘은, 물과 김치, 햇반까지 완벽하게 세팅해놓고 막판엔 나무젓가락을 탁, 쪼개는 것까지 완료해서 성우에게 건넸다. 그야말로 잘 차려진 밥상, 아니 라면상을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도록. 성우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젓가락을 얌전히 받아들고는 라면을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멍해보였지만 라면만은 야무지게 입으로 쏘옥쏘옥 잘도 들어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뭘 그렇게 봐, 라고 겸연쩍어하는 성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형은 먹는 모습도 꼭 형 같다.

 

 

...그거 욕은 아닌 거지? 어정쩡하게 웃어 보일 때 드러나는 삐뚜름한 치열이 귀여웠다. 계속 쏟아지는 다니엘의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곧 먹는 것에 집중해서 햇반에 김치까지 야무지게 싹싹 비워가는 것이 예뻤다. 저렇게 마른 몸인데도 먹는 것 하나는 진짜 끝내준다니까. 예전에도 맛있는 걸 찾아 먹이고 나면 왠지 사준 사람을 뿌듯하게 해주는, 먹이는 보람을 충만하게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지. 점심엔 또 뭘 먹으러 가지? 여까지 왔는데... ,

 

 

-, 우리 여기까지 온 김에 동해 쪽으로 넘어갈까? 하루 더 자고 가는 거 어떻나? 우리 예전에 동해 갔다가 오징어 회도 못 먹고 그냥 왔던 거 기억나나? 그때 못 먹은 거 지금 먹으러 가까?

 

 

신나하는 다니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우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은 선약이 있어. ... 그랬나.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뭐... 머쓱해진 다니엘이 머리를 쓱 긁고 있자니 성우가 수건을 들고 일어났다. 형 씻을라고? 나도 아직 안 씻었는데. 그래? 그럼 너 먼저 씻을래? 아니, 내말은 그니까...

 

 

-같이...씻으까?

 

 

홍조를 띈 다니엘의 얼굴 위로 성우가 던진 수건이 푹 씌워졌다. 예전에 수영장에선 종종 같이 씻었잖나, 라고 항변했다가 기어이 한 대 얻어맞았다.

 

 

닫힌 화장실 문 앞을 떠나지 못한 채 수건을 들고 서성거리고 있던 다니엘은 몸에서 김을 뽀얗게 풍기며 나온 성우의 머리를 말려주는 것까지는 허락을 받아냈다. 드라이는 안 돼. 내가 모양 잡아야 하니까. 단호한 성우의 말에 다니엘은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성우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부들부들 해주는 것만으로도 실은 충분히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젖어있는 성우의 머리카락들이 수건 사이의 손가락으로 걸려오는 자잘한 촉감과, 자연스레 눈을 감고 자신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는 성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결국 못 참고 몇 번이고 머리카락에 얼굴에, 입술에 츄츄 해대다가 또 한 소리를 들었다. 나는 너네 고양이가 아니야, 다니엘. 에헤이, 귀 먹는 거 아냐. 아니라고 했는데 또 하는 거 아니야. 에헤이.

 

 

방을 정리하고 퇴실까지 하고나니 더 이상 둘이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서 차에 올라타려는 성우를 잡아 끌고 펜션 동 안에 조성된 산책로로 갔다. 여그가 홈페이지에 참 예쁘게 나왔던데, 여까지 왔는데 함 봐야지. 내키지 않아보였지만 따라오는 성우의 팔을 얼른 단단히 잡고 손깍지까지 야무지게 끼고 길을 걸었다.

 

 

사실 펜션의 산책로는 별 것 없었다. 12월에 맞춰 트리 장식이 걸려 있긴 했지만, 낮이라서 나무에 전선이 얽힌 모습들이 적나라했고 전구 안이 투명하게 보이다보니 빈말로라도 예쁘단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사진에서처럼 아기자기하고 로맨틱하다기보단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냥 지금 이 상황이 다 좋았다. 마냥 좋았다. 적당히 쌀쌀해서 쨍하고 상쾌한 공기도 좋았고 오후를 향해가고 있어 점점 선명하고 깔깔하게 내리쬐는 햇빛도 좋았다. 그 햇빛 아래서 눈이 부신지 약간 찡그리고 자신을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성우가 특히나 좋았다. 길지 않았던 산책로를 한 바퀴 돌고 오는 동안, 몇 번이고 당겨서 안고, 키스하고, 성우의 목과 어깨에 파고들었다. 이런 곳에선 또 한 장 찍어줘야 한다. 간신히 찾은 그럴듯한 뷰에서 높게 들은 휴대폰 액정 안에는, 그린 듯이 잘생긴 얼굴 옆에 그의 허리를 감싸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는 자신의 얼굴이 비춰졌다. 나중엔 좀 울컥하기 까지 했다. 왜 그런 때가 있지 않나. 이 장면은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드는 때. 이 순간만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고, 어쩌면 이 순간을 보내기 위해서 지금껏 모든 일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벅찬 마음이 차오르는 때. 다니엘에겐 지금 이 순간, 지금의 매순간이 그랬다.

 

 

-오늘 저녁 약속 꼭 가야하나? 누구랑 약속인데.

 

 

네비에 목적지를 입력하는 성우를 보고 있자니, 이제 곧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나 아쉬워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미 몇 번이고 꺼냈던 말을 또 꺼내고 말았다. 꾹꾹 버튼을 누른 후 안내 시작을 누른 성우가 자신을 바라볼 때만해도 다니엘은 성우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까진 헤아려볼 여유가 없었다. 그저 자기 맘이 아쉽고 또 아쉬웠을 뿐이니까. 간신히 먼 길을 돌아서 만난 성우와 이젠 정말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계속 덤덤해 보이는 성우가 그저, 쪼오끔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같이 사는 사람.

 

-룸메?

 

 

그래서 다니엘은 성우에게 기어이 이 말을 하게 하고야 말았다.

 

 

-지금 만나는 사람.

 

 

 

 

*

 

 

 

 

 

 

-어우, 이 화상,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래?

 

-쫌 내비도.

 

-, 니 아무리 사회 나오면 동갑이라 말 까기로 했다지만, 너무 불손한 거 아니냐.

 

-그렇게 군대가 좋으면 다시 가시지 말입니다.

 

-어우...진짜 한 마디를 안 져요.

 

 

집에 들어온 이후로 다니엘은 밥도 안 먹고 한 이틀을 내리 잠만 잤다. 그동안 몇 번이고 재환이 깨어왔는데 이번은 등짝까지 후드려 패는 게 그냥 몇 대 맞는 걸로 끝날 기미가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는데 훌렁 들리는 이불 사이로 한기가 들어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얼른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만 빼꼼 내밀고 다시 웅크리자 재환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니는 무슨 이불하고 일심동체라도 되냐.

 

-내가 지금 춥다... 많이 춥다.. 캐나다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허이구.. 캐나다 추위 너만 아냐? 누가 들으면 가평이 아니라 어디 남극 기지라도 다녀온 줄 알겠네.

 

 

말은 그래도 재환은 느닷없이 한국에 있을 한 일주일 동안 재워줄 수 있냐는 말에 두말 않고 먼저 주소부터 찍어 보낸 사람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쏟아진 말이 몇 바가지이긴 했지만. 막 끓인 라면이 놓인 상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재환이 다니엘의 이불을 훅 끌어당겼다.

 

 

-, 됐고! 송장 치르기 싫으니까 얼른 이거나 먹고 기운차려서 빨리 가평이든 캐나다든 어디로든 빨리 있어야 할 곳으로 가라 쫌.

 

-....내는 이제 갈 곳이 없다..

 

-갈 곳이 없긴 왜 없어? 너 어디서든 잘 산다며? 니 특기가 낯선 곳 적응이라며? 추운 거 싫으면 저어기 따뜻한 나라 가면 되겠네? ?

 

-!

 

 

알림음에 반사적으로 폰을 확인한 다니엘의 눈에 갑자기 불이 들어왔다. 갑자기 이불을 박차고 정자세로 앉은 다니엘이 폰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뭐야뭐야, 라는 재환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니엘의 손가락이 토독토독 글자를 치기 시작했다. 타다닥 지웠다가 다시 토독토독. 그러고나서 다시 타다다닥 토독토독.

 

 

-, 뭔데 그래?

 

 

한참 만에 드디어 메시지를 보냈는지 다니엘은 폰을 던지고 벌렁 누웠다. 재환이 얼른 다니엘의 폰을 확인했다.

 

 

-내일 출국이라고 했지? 나 그날 휴가 마지막 날인데 공항에 데려다줄까?

 

-, 고맙!

 

 

한참을 낑낑거린 것에 비해서 짧은 내용에 재환이 가지미꼴 눈을 하고 다니엘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다니엘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이불을 둥글둥글 말고는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이후 첫 연락이었다.

 

 

 

 

 

*

 

 

 

 

 

출국 날, 성우는 재환의 집까지 자신을 태우러 와줬다. 재환은 굳이 따라 나왔다. 밤새 다니엘에게 시달리고 난 참이었다. ...이거 무슨 의미일까? 황금 같은 휴가 마지막 날에 왜 날 데려다줘? 그래, 그 형이 너한테 마음 있나보네. 근데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고 같이 살고 있대. 그래? 그럼 그냥 별 의미 없나보네. 아니 근데 인천공항이면 꽤 멀잖아. 너는 별 의미 없는 사람 공항 데려다줘? ..너한테 마음이 있긴 있나 보지. 근데 그 형이 또 취미가 운전이야. 괜히 내가 앞서 생각하는 건가? , 강다!! 잠이나 자! 낼 되면 알겠지!! 내가 형이라는 사람 그 면상 반드시 보고야 만다!!

 

 

한껏 뾰족하게 성우를 오르락내리락 봤던 재환은 자신의 깔깔한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예의바르게 목례를 하는 성우를 보고 헛기침을 큼큼했다. ...사람 헷갈리게 하긴 하네. 다니엘이 질겁을 하며 재환의 입을 막고 있자니 그 사이 성우가 다니엘의 캐리어를 실으려다 낑낑거리고 있었다. 얼른 캐리어를 낚아채듯 받아든 다니엘이 번쩍 들어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간다, ...내 고마웠다. , 고마우면 한동안 보지 말자. 재환과 인사를 하곤 성우와 함께 차에 올랐다.

 

 

골목길을 지나 좀 더 넓은 길이 나왔고, 더 넓은 길을 몇 번 더 지나니 금방 인천공항으로 곧장 뚫린 고속도로였다. 내내 다니엘은 성우의 안색을 살폈지만 별다를 것은 없었다.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어오는 게 평온해보이기까지 했다. 성우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가면서도 다니엘은 몸이 달았다. 아직 좀 더 할 이야기가 분명 남아있는데 차마 자기가 그 화제를 꺼낼 수 없었다. 그걸 입에 올리는 순간, 그나마의 균형이 깨져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처음에 한국에 오기로 결심했을 때엔, 아니 그 이전에 성우를 찾기로 결심했을 때엔 어느 쪽이든 받아들이고 결론을 내고 가리라, 꼭 정리를 하고 가리라, 다짐하고 온 것이었지만 막상 성우를 떠나야 할 시간이 바로 발끝까지 몰려오자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머리가 하얗게 비워져갔다.

 

 

출국장에 곧장 내려주고 가겠다는 성우를 데려다준 답례로 밥이라도 사게 해달라며 붙잡았다. 평소라면 길게 느껴졌을 수속 시간도 휙휙 지나가버리고 밥에 커피까지 먹고 나니 더 이상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이대로 정말 헤어지는 건가 싶어서 깜깜해하고 있는데,

 

 

-녜리야,

 

-.

 

-연락해.

 

 

무심하게 나온 그 한 마디에 다니엘은 순간 온 몸에 화르륵 불이 끼얹어진 것 같았다. 저 말이 무슨 의미일까. 아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형이 분명, 이게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나.

 

 

 

-빈말 아니지?

 

-.

 

-나 진짜 맨날 할 거야.

 

-.

 

-형 나쁜 사람 아니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다가 이게 무슨 말이야, 싶었지 눈을 찡긋하고 몸을 이쪽으로 기웃, 숙여오는 그.

 

 

-... 형이 만나고 있다는 사람.. 그 사람 두고 나랑도 연락하고 그러자는 거 아니지? 만약 그렇대도 나는 연락할 건데, 아니..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래도 연락하고 싶은데... 나는 그니까,

 

 

성우가 푸흣,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야, 하지만 다니엘은 하나도 웃을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태까지 마음 졸였던 것이 금방이라도 어디로든 울컥하고 터져나올 것 같았다.

 

 

-아냐.

 

 

단호한 대답.

 

 

-연락, 편하게 해도 돼.

 

 

다시금 분명한 목소리.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가자. 너 늦겠어, 라고 성우가 다니엘의 백팩을 챙기며 일어났다. 이쪽을 보고 웃는 얼굴이 기억 속 그 어느 때보다도 해사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다니엘이 성우의 팔을 끌어당겼다. 순간 비틀 했던 성우의 몸이 다니엘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 다니엘? 뭐하는 거야, 라고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성우의 팔이 다니엘을 밀어내려고 낑낑댔지만 다니엘에겐 그 손길마저도 찌릿했다. 정말 끝이 아니다, 이대로 보내도 끝이 아닌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서야 겨우,

 

시작인 거다.

 

 

 

 

 

 

 

00. 타인

 

 

 

접점이라곤 없어 보였다. 21살과 27, 대학생과 회사원. 수업을 모두 3교시 이후로 밀어놔서 평균 9시에 기상하는 학생과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아침 8시까지는 남들과 같이 자기 책상에 앉아있어야 하는 회사원. 일어나는 시간, 자는 시간은 물론 집에 있는 시간 자체가 좀처럼 맞지 않고 공감할 만한 대화 거리도 거의 없지만, 웬일인지 두 사람은 너무 잘 지내왔다.

 

 

함께 있을 때라곤 주말 정도. 그나마도 연하가 알바나 학원 등으로 종종 집을 비우는 편이지만, 가끔 둘다 맘껏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의 아침엔, 잠결에 서로의 흔적을 더듬더듬 찾다가 결국 물고 빨며 눅진하게 한바탕하면서 일어나곤 했다. 접점이라곤 오직 그 집, 그 방, 그 침대밖에 없을 두 사람이 각자의 리듬과 주파수로 하루하루를 보내가면서, 가끔 맞아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서로를 맘껏 찾고 탐했고, 그 순간을 보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각자의 생활로 자연스레 돌아갔다.

 

 

그러던 중, 연상이 여행을 가고 싶다 했다. 팀 내 막내라서 남들은 다 간다는 여름휴가도 못 가고 가을휴가는 엄두도 못 내다가 결국 연차를 강제 소비하기 위해 12월초라는 애매한 시점에 얻은 휴가였다. 연상을 두고 몇 번이고 엠티와 여행을 다녀왔던 연하가 자신이 아직 종강 전이란 이유로 그걸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혼자, 연하가 알기론 연상 혼자, 사실 누구랑 가든 연하가 크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는 짧은 여행을 다녀오고 난 다음이었는데.

 

 

연상이 여행 후 달라졌다는 것을 연하는 금방 알아차렸다. 예전에 연상이 연하와 동거를 시작하기 전, 연하를 아직 자신의 영역으로 들이기 전, 그 근처를 맴도는 연하를 대할 때 연상은 꼭 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자신이 연상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난 다음에도, 연상에게 가끔 그 얼굴이 스쳐갈 때가 있었다. 지금과 달리, 연상이 의도한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괜찮겠어요?

 

 

끝을 말하는 연상의 사정을 다 듣고 난 연하의 첫 마디는 이랬다. 그 말에 연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네가 왜 나에게 그렇게 물어. ...나쁜 쪽은 나인데. 그 말에 연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잘잘못을 가리자는 게 아니에요. 그저 나는 지금 꼭 알아야 해서.

 

 

-나는 이 이후의 형까지 걱정할 여유는 없어. 그래서 지금 묻는 거예요. 정말 괜찮겠어요? 이번엔 진짜로, 후회하지 않겠어요?

 

 

나는 절대로 다시 시작하지는 않을 거야. 받아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잘 생각해보고 대답해요. 연하의 말에 연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연하는 연상이 멈춰있는 시간을 기다려 줬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내 연상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아래로 끄덕거렸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가 비껴갔다.

그들의 마지막 접점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