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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선배 내 맘에 안 들죠

미키

 

 

 

 

 

 

 

 

 

 

선배 내 맘에 안 들죠?”

 

술 냄새가 훅 끼치는 유언을 말미삼아 떨어진 고개가 테이블 위로 처박혔다.

 

, 이 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지.

첫사랑과의 달콤한 재회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막장 드라마를 원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제가 준비한 시나리오는 좀더 잔잔한 추억이 깃든 그런 아련한 종류의 장르였다. 단단히 산 오해에 울고 싶은 자신보다 더 억울한 재환의 표정을 보며 성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환아.”

, 선배님. 정말 죄송합니다. 강다가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얘가 많이 취해가지고... , 야아! 일어나아! 너 이러고 뻗으면 뒷감당은 누가하라고!”

 

재환이 쩔쩔매며 성우의 눈치를 살폈다. 무표정한 성우를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다. 듣기로는 이 잘생긴 선배가 만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연영과 최고의 인싸라던데. 성우에게 찍힌다는 것은 새내기 재환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당사자야 필름이 끊길게 뻔하고, 자신은 무슨 죄인가 싶어 더 과격하게 다니엘의 등짝을 후려쳤다. 너는 오늘부터 친구가 아니라 웬수라고 말하는 찰진 손바닥. 더 이상 놔두었다간 다니엘의 등짝이 멀쩡하지 못할 듯 했다. 정신 차리라고오! 재환의 목소리에 애먼 성우가 정신을 찾았다. 꽐라가 된 후배를 챙기는 것은 선배로서 당연한 도리니까.

 

일단은 나랑 같이 얘 좀 부축해줄래?”

?”

...아니, 다니엘을 여기에 버려두고 갈 순 없잖아. 다른 애들도 많이 취했구.”

, 그럼 어디로 옮길까요...?”

 

그런 둘의 속도 모르고 이 작은 소동의 범인은 쌕쌕 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숙면 중. 변함 없이 애기같은 얼굴에 다시 한 번 한숨이 포옥. 변한 것은 자신에 대한 다니엘의 기억 뿐인가. 아니, 애초에 기억이라 할 것도 없다. 3년만에 다시 만난 다니엘에게 저는 완전 초면, 생면부지의 같은 과 선배일 뿐이었으니까. 과거 회상은 이쯤하고, 우선은 잘 익은 분홍색 복숭아를 치우는게 먼저였다.

 

내 자취방.”

 

누가 낼름 집어 먹기 전에.

 

 

 

옹성우 한정 운명 같았던 재회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4시간 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방학 내내 인천 본가에 있다가 학교로 돌아온 날이 개강 총회 겸 신입생 환영회였다. 막 입학해서 선배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후배가 생겼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그래서 답지 않은 고민을 하는 성우를 눈치챘는지 선배들이 억지를 부렸다. 결국은 우리 과 간판인 너가 오티도 불참하고 이번에도 빠져서야 되겠냐는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참석한 신입생 환영회였다.

 

신입생 환영회는 정문 앞 술집을 통째로 빌려 시작되었다. 소란스럽던 내부가 재학생들의 등장과 함께 가라앉았다. 맨 마지막에 들어온 성우가 그들을 죽 훑었다. 그 중 단연코 눈에 띄는 분홍 머리. 과 특성 상 각자 개성이 뚜렷한 연영과에서도 유독 생소한 스타일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숙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쟤도 참 어지간하다 싶었다. 한참을 그 동그란 정수리에서 떠날 줄 모르던 시선이 시작된 개회사에 그제야 떨어져나갔다.

 

앞으로 4년간 서로 잘 지내보자는 상투적이고 형식적인 이야기. 지금부터 고개 들고, 어깨 피고. 각 잡고 놀아보자는 말이 끝을 장식했다. 어째 저 식상한 레퍼토리는 작년 과짱 선배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냐며. 동기와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 받던 성우가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자리했던 시선의 방향. 분홍 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18살의 여름. 미국 유학 중 잠깐 들어온 누나를 위한 부산으로의 가족 여행. 그곳에서 만난 잊지 못할 설렘. 그리고 정말 말 그대로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았던 시간이 끝난 뒤 찾아온 열병. 그 끝에는 17살의 소년, 강의건이 있었다.

 

- 너는 바다에 사는데두 진짜 하얗다.

- 형도 지금 내 기집애같다고 놀리나.

 

성우 딴에는 칭찬이었는데 잔뜩 울상을 짓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 동글동글했는데 3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니었는지 이제는 날렵한 턱선하며 단단한 윤곽이 완연한 남자의 태를 갖추었다. 그래도 본디 순한 눈매와 도톰한 입술을 못 알아볼리 없었다. 4일간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저 얼굴이 환상처럼 떠오르며 성우를 괴롭혔더랬다. 온통 파랗고 뜨겁던 부산의 여름. 자꾸만 어지럽고 울렁거리던 가슴깨가 고작 더위 탓인줄만 알았던 성우가 그 정체를 알게 된 것은 20살의 여름이었다.

 

찰나의 순간 영원처럼 이어진 그리움에 눈물이 비죽 나올 것만 같았다. 다행히 쌍방으로 교차하던 시선 중 하나가 먼저 바닥을 향했다.

 

과 단합을 핑계로 한 테이블 당 자리 배치는 신입생 셋, 재학생 하나였다. 성우는 당연히 의건의 테이블에 앉으리라 다짐했다.

 

, 이제부터 내가 저기 앉는다.”

 

수가 맞지 않아 신입생 남자애 둘만 남은 테이블에 앉겠다고 자진하는 성우를 동기가 이상하게 훑었다.

 

어우. 저 시커먼 자리에 앉고 싶냐?”

 

의건도 하얗고, 그 옆에 앉은 애도 못지 않게 하얀데. 웬만한 여자애들보다 쟤네가 더 하얗다고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벌써부터 들썩거리는 몸이 간지러웠다.

 

근데 안될걸?”

? !”

 

대답 대신 턱 끝이 테이블을 가리켰다. 비어있던 맞은 편 자리를 차지한 3학년 여자 선배 둘. 재빠른 그들의 자리 선점에 경악으로 물든 성우의 얼굴을 마주하며 동기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핑크 보이지? 입학식 때부터 쟤 꼬시겠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냐.”

 

인기, 라고 한다면 성우를 빼놓을 수 없었다. 다만 하늘을 찌르는 자자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성우에게 고백을 하는 간큰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그게 다 너무 조각같은 외모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꼭 월례 행사처럼 그 못지 않게 잘난 인물들만 성우에게 대쉬를 하곤 했는데, 성우는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인 적이 없었다. 걔는 조금 더 귀여웠지. 아마 매번 떠오르던 얼굴때문에 그렇게 거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눈은 저만 달린 것도 아니었으니 남들의 생각도 다 똑같을 테였다.

 

그리고 옹성우 잘난 얼굴 뒀다 뭐하냐. 선배들이 2학년에 남신 하나 있다고 입 털어놔서 신입생 여자애들 기대가 장난 아님.”

 

그러니까 니 자리는 저기. 작전 상 일보 후퇴다. 제 등을 떠미는 동기의 손길에 성우가 생각했다. 긴 기다림의 끝에서 몇 시간 정도야 아주 짧을 테니까.

 

 

 

테이블을 두 번 정도 돌자 신입생 중 반이 맛이 갔다. 성우는 저 끝 테이블에서 따라주는 술을 죄다 받아 마시는 의건을 보며 찬 물만 벌컥 벌컥 들이켰다. 제 앞의 신입생이 제 이름을 공성우라고 하던지 홍성우라고 하던지 알게 뭐람. 성우가 직접 본 잔을 비우는 의건의 모습만 손가락 10개를 다 접었다 핀 횟수였다. 저렇게 마시다간 제 차례까지 멀쩡히 올 수 있는지. 심지어 여자 동기, 선배들이 차례로 테이블을 오가는 통에 엉덩이를 뗄 틈도 없어보였다. 한껏 초조해진 마음에 소주를 들이 붓고 싶다가도, 첫사랑과의 조우를 술냄새를 풍기면서 맞이하고 싶진 않다는 이성이 겨우 성우를 말렸다. 대신 일어나서 자리를 옮겼다. 하이에나와 같은 동기들에게 덜컥 의건이 잡아먹힐까 겁이 났다. 이럴 때야 말로 필살기를 사용할 때였다.

 

지혜야. 미안한데 나 여기 좀 앉아두 되지?”

 

안면의 모든 근육을 최대한 활용하며 활짝 웃었다. 결과는 안봐도 뻔하지. 쉽게 한 자리를 차지하자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여동기도 슬쩍 자리를 피해주었다. 성우는 그녀들이 가소롭기만 했다. 둘만의 추억에 잔뜩 자신감이 차올랐다. 드디어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Y대학교 연극영화과 18기 강다니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Y대학교 연극영화과 18기 김재환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다. 갑작스러운 성우의 등장에 의건, 아니 다니엘과 재환이 어색하게 웃었다. 쌩뚱맞은 자기소개에 설마 저가 착각한 건가 싶다가도, 저 외모와 피지컬은 이 세상에 둘 씩이나 존재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얼빠진 성우 대신 다니엘이 새 잔을 들어 성우의 앞에 가져다 주었다.

 

성우 선배님 맞으시죠?”

 

부산 사투리가 남아 있는 어조 속 자신의 이름에 성우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베시시 웃는 얼굴에 자리한 눈물점과 뾰족 튀어나온 앞니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선배님들께 성우 선배님 이야기를 많이 들어가... 제가 너무 버릇 없이 친한 척 한거 아니죠?”

으응? 그건 아니구.”

선배님 우리 짠해요!”

 

뭔가 싸한 예감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지만 빈 잔을 채워주는 재환때문에 일단은 한 잔을 털어 넣었다. 입 안을 감도는 쓴 맛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다시 제 앞에 놓인 것은 술이 아닌 물 한 잔.

 

선배님 여 물 드세요.”

 

예전처럼 자상하기가 여지없다. 냉수는 아까 너 때문에 많이 마셨는데. 말도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축였다. 뭐라고 운을 떼야할지 천천히 말을 고르다보니 자연스레 말을 아끼게 되었다. 일단은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한 순간 그 잠깐의 정적을 기다리지 못하고 성우의 동기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옹성우. 너 여기 있었냐? 결국 앉았네. 징하다, 진짜.”

조흔 말르 흘뜨 끄즈라.”

 

정말 도움이 안되는 자식이다. 고개를 돌려 잇새를 악문 성우의 작은 경고에 다시 엉거주춤 자리를 피한다. 굳은 얼굴을 유연하게 풀고 나서야 성우는 다시 둘을 마주 볼 수 있었다. 흠흠. 작게 목을 풀고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우와. 선배님 정말 옹씨에요? 강다. 너 옹씨 봤어?”

아니. 내도 옹씨는 첨 본다.”

 

신기하다는 듯 반짝거리는 두 쌍의 눈이 거짓 하나 없이 순수했다. 의건아, 오랜만이야. 고심 끝에 결정한 인사치고는 담백한 말 대신 무언의 허탈감이 흘러나왔다.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다니엘을 응시했다.

 

저는요. 선배님 이름이 유성우 인줄 알았지 뭐예요. 아까 눈이 마주쳤는데 사람이 우예 이래 별처럼 반짝거리나 해가.”

 

20살 남자가 21살 남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굉장히 낯 부끄러운 칭찬이. 성우의 눈 앞에서 별들이 반짝였다.

 

 

 

다니엘은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와 속을 부여 잡으며 깼다. 약한 주량도 아니었는데 오기로 소주를 들이 붓다 싶이 했으니 멀쩡한 것이 더 이상했다.

 

일찍 일어났네.”

 

어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신입생 환영회에 갔었고, 거기서 선배들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다가 암전. 필름이 제대로 끊겨 있었다. 아직도 술에 취해 흐물거리는 뇌세포들이 기억하는,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김재환이랑... 잘생긴 남자 선배. 지금 제 눈 앞에 있는,

 

옹성우 선배님?”

. 이름은 기억하는구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겼나 싶을 정도로 혀를 내둘렀던 외모와 특이한 성씨는 잊어버리는 것이 더 어려웠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깜빡 거리는 눈이 불안하게 주변을 탐색했다. 처음 보는 원룸, 홈웨어 차림의 성우.

 

, 여가 어디에요...?”

너 어제 완전 꽐라됐어. 나랑 재환이랑 너 들쳐 업구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줄 알아? 덩치는 또 왜 그렇게 큰 거야.”

 

다시 한 번 꿈은 절대 아니었다. 작게 투덜거리는 입술과는 달리 손은 숙취 해소 음료를 건내왔다. 다행히 길바닥이나 경찰서는 아니었으니, 지금의 상황이 다니엘에게는 최악까지는 아니어도 차악 정도는 되었다.

 

다니엘은 살면서 미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무해한 얼굴에 웃음이 많았고 붙임성이 좋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약간의 흠 아닌 흠은 취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안기는 주사였는데, 그조차도 모두가 귀여워 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너 사투리 쓰지마. 왜 웃어? 선배가 우스워? 웃지마.

못 마시겠으면 안 마셔두 돼. 궁금한거 있으면 다 물어보구.

전혀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나온 것과 같은 저 대사들은 모두 성우의 어록이었다. 다른 점이라 하면 그 대상의 차이랄까. 다니엘은 저는 잡아먹을 것처럼 굴어놓고, 재환에게는 상냥한 성우를 보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가 단단히 찍혔음을 눈치챘다.

 

진짜 죄송합니다. 혹시 제가 어제 취해서 무슨 실수라도...”

 

더 무서운 건 그 뒤로 휘발된 기억들. 팔짱을 끼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에 말문이 막혔다. 지금도 그 반짝이는 이채가 정말 밤하늘에 떠있는 별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주제 넘게 말을 건낸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때부터 성우의 일방적인 괴롭힘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말없이 노려보던 눈과 제 잔을 넘치게 채워주던 손에는 분명 알 수 없는 감정이 진득하게 녹아 있었다.

 

일단 그거나 마셔. 너 지금 술냄새 엄청 나.”

네에.”

 

어쩔 줄 모르고 쉴 새 없이 손만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저를 잊었다는 괘씸한 사실에 울컥해서 말이 부드럽게 나가지 않았다. 얌전히 빈 병을 내려놓고 큰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다소곳한 하얀 덩치에 순간 작게 웃음이 새어나가고 말았다. 갑작스런 성우의 웃음에 눈치를 보던 다니엘이 저도 씩하고 웃는다. 뭐가 좋다고 웃어, 웃기는. 매서운 타박 대신 성우가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해장하러 가자.”

 

가끔 친구들이 놀러올 때 쓰이는 일회용 칫솔을 던져주자 다니엘은 착실하게 준비를 마쳤다. 어제 입었던 옷을 입기에는 찝찝할 것 같다는 구색을 붙여가며 저에게는 조금 큰 추리닝 세트까지 던져주었다. 군말 없이 제 옷을 입은 다니엘이 마치 제 것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선배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드려야할-”

무슨 은혜까지, 오버하지마. 같은 과 선후배 사이에.”

, 아니. 아이참. 제 말은 그게 아니고...그럼 저 이제부터 선배님이랑 친하게 지내도 되는 거지요?”

 

해장국 집에서도 제 눈치를 먹는지 밥을 먹는지. 영 시원치 않은 수저질에 친히 깍두기까지 올려주고, 이런 건 선배가 사는 거라며 억지로 계산까지 했다. 성우를 보는 다니엘의 눈빛이 아까보다는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꼬리를 흔들며 친해져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 물음에 성우는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었다.

 

아니?”

 

이렇게 넘어가기에는 서운한 마음이 너무 컸으니까.

 

 

 

김짼. 내 그 때 개총 때 성우 선배님한테 실수한 거 있나.”

 

첫 개강 일주일 만에 옹성우의 별명은 옹스윗이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후배들이 알아서 떠받드는 얼굴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무게를 잡는 선배들 사이에서 성우는 따사로운 햇살 그 자체였다. 물론 강다니엘만 빼고. 오늘도 갑자기 호출을 때리는 성우 때문에 다니엘은 혼자 소품실을 정리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다니엘에게 성우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 피까지 말리는 존재였다.

 

차마 다른 동기들한테는 말도 못하고. 그나마 제일 친한 재환을 불러 막 소주 한 병을 비웠다. 비 맞은 강아지 꼴을 하고 있는 다니엘에게 혀를 한 번 차준 재환이 말없이 손을 들었다.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니 진짜 기억 안 나냐?”

. 하나도 안 나는데. 설마 내 욕이라도 했나?”

차라리 욕을 하지 그랬어.”

 

안주로 나온 골뱅이 무침을 뒤적거리며 재환이 별스럽지 않게 대꾸했다. 다니엘이 깡소주만 들이 붓는 탓에 안주는 죄다 재환의 몫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다니엘이 혼자 보기에는 아까웠다.

 

선배 내 맘에 안 들죠?”

?”

강다니엘씨. 니가 한 말이세요.”

 

어색한 사투리로 기억을 되짚어본다. 아무렴 성우가 개총에서 다니엘에게 까탈스럽게 굴었을 망정. 대뜸 저렇게 말하고 뻗은 후배에게 사실 성우의 처사는 관대로웠다. 다른 선배들 같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질게 뻔했다.

 

진짜? 진짜가? 하이고. 내 진짜 돌았었나 보네.”

이제라도 아셨으니 됐네요. 단체 기합 안 받은 것도 다행이거든.”

내 이제 어쩌지? ?”

 

머리를 쥐어 뜯는 다니엘을 말리기 보다는 통통한 골뱅이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어쩌긴 어째. 선배님의 발닦개가 돼야지 뭐.”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이럴 땐 술이 약이라고. 다니엘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새콤달콤한 골뱅이가 아주 맛이 있었다.

 

 

 

한 달 뒤에 있을 소연극을 핑계로 다니엘을 불러낸 성우였으나 사실 일거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충분히 혼자서 할 수 있는 정도. 연습이 끝나고 깔끔하게 정리된 소품실을 확인한 성우는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또 어떻게 다니엘을 불러 낼까. 소소한 고민 덕에 지루하지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아. Y대학교 연극영화과 18, 강의건, 아니 강다니엘입니다아.”

 

내내 다니엘 생각을 한 탓일까. 마법처럼 저를 기다리고 있는 다니엘에게서는 짙은 술냄새가 났다. 동기 여자애들한테 들은 바로는 강다니엘은 강의건이 맞았다. 사람들이 자꾸만 으건이라 부르는 통에 홧김에 한 개명이라고 했다. 정말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확인 사살에 마음 한 켠이 무거웠다. 0부터 시작할 미래가 까마득하다가도, 이렇게 저를 찾아온 다니엘을 보자니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쭈. 너 취했냐?”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가라앉히고 일부러 잔뜩 목소리를 깔자 더 울 것 같은 다니엘의 표정이 가관이다. 큰 덩치로 힝- 우는 소리를 내는데. 저 말랑거리는 볼을 죽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네에. 아뇨오. 내 안 취했는데요.”

집에 가서 자라. ?”

저희 집이 부산이어가지고 내 못 간디...”

 

마음 같아서는 동영상이라도 찍어 놓고 싶었다. 잔뜩 꼬인 혀에 말꼬리는 늘어지고. 귀여운 강다니엘이니까 봐줘야지. 어디까지 하는지 볼 요량으로 가만히 다니엘의 술주정을 방관했다.

 

내는요. 선배님이 지인짜 좋거든요.”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훅 들어오는 고백에 넌지시 물었다. 주정뱅이는 질색인데 이렇게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은 잘생긴 얼굴도 좋구요오.”

 

너무 당연한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것도 억수로 듣기가 좋은데요.”

 

그렇지. 다시 한 번 크게 끄덕이는 고개에 다니엘이 힛, 하고 웃었다.

 

그리구 아이, 이건 비밀인데요.”

 

아까 재환과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한 다짐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내일 일어나면 발로 찰 이불도 생각나지 않았다.

 

제 첫사랑이랑 닮은 것 같거든요.”

 

갑자기 훅 들어온 펀치에 성우는 정신을 못 차렸다. 비적비적 다가온 다니엘이 어느새 코 앞에서 성우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근데에 그 사람이 엄청 나쁜 사람이에요.”

, ?”

 

다니엘의 뜨거운 날숨이 그대로 성우의 폐부로 넘어왔다.

 

내만 두고 떠났거든요. 내는 좋아한다구, 고백도 못하고오...”

 

점점 다가오는 얼굴에 성우는 에라 모르겠다 눈을 감았다. 뭔가를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왜 입술은 지멋대로 앞으로 튀어나가는지.

 

, 다니엘?”

그래가지고 너무 미워서 일부러 생각을 안했더니 이제는 얼굴이랑 이름도 잘 기억이 안나요. 근데 선배님처럼 되게 반짝반짝...”

 

성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다니엘은 그때처럼 다시 한 번 폭탄을 던져 놓고 당당히 리타이어. 기가 찬 한숨이 허-하고 튀어나왔다. 풀어야 할 오해가 한둘이 아니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3.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왜 자꾸만 두근거리는 마음은 숨길 수가 없는지.

 

어쩌면 우리의 시작점은 0이 아니라 50정도이지 않을까. 우리의 시작은 뜨거운 부산이 아닌,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3월의 서울. 지금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