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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안개가 가득했다. 주변이 흐렸다. 낯설지만 익숙한 길. 나를 잡아 끄는 부드러운 손. 나무가 우거진 숲의 오솔길을 달린다. 또 익숙한 이 길을 지나면, 다시 폭발음이 들려오겠지. 몇 번이고 반복되는 꿈에 이제는 꿈의 내용마저 외워질 지경이다. 그리고 또 마주하게 되는 얼굴. 나는 그 얼굴 없는 사람을 붙잡고, 그 품에서 눈을 감는다. 흐릿한 인영에도 그 사람이 나를 품에 안고 엉엉 울고 있다는 건, 이미 여러 번 반복된 꿈을 통해 알고 있다.

 

"..허억..."

 

천장으로 부서지는 빛을 보며 눈을 깜빡.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축축하게 젖은 눈시울을 느끼곤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방금 전력질주를 한 사람처럼 숨이 찼다. 또 그 꿈이다. 며칠째 반복되고 있는 같은 꿈. 이제는 거의 내용을 외워 어디쯤에서 끝이 나는지 까지도 외워버릴 지경이다. 숨이 차게 어딘가로 도망가고, 그런 나를 도망치도록 이끄는 사람. 그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알 수 없다. 나를 이끄는 사람의 얼굴은 흐릿하게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인지, 꿈에서 깨고 나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손등으로 대충 눈물을 훔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잔뜩 부은 눈이 시큰거렸다. 땀으로 푹 젖은 몸이 무겁다. 천근 같은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찬 물을 들이켰다. 몸을 식히는 차가움에 서서히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푸른 빛이 들어오는 새벽. 또 이 시간. 항상 이맘때쯤 깨곤 했다. 꿀꺽꿀꺽 물을 넘기며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꿈의 내용을 붙잡아보려 애쓴다. 이미 반쯤 날아가 버린 꿈을 붙잡는 것은 힘든 일이다. 골이 띵하니 아파오는데 이상하게 심장은 저릿저릿 먹먹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진한 감정만이 남아 속이 시큰하다. 그것만은 잊혀지지 않고 오래 남아 나를 괴롭힌다. 얼굴 없는 그 사람이 죽을 만큼 그립다. 그리고 원망스럽다.

 

 

 

 

공중정원

W.비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어중간한 시간에 깨버려 남은 시간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시 자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질 않아 그렇게 새벽을 보냈다. 몸이 노곤노곤 축 쳐졌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수건처럼 자꾸만 땅으로 축축 처지는 것을 간신히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일부러 보폭을 크게 하여 걸으며 상쾌한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활기찬 기운이 가득한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니, 그래도 정신이 조금 깨어나기 시작한다.

 

아침 강의는 학점을 잘 준다고 해서 신청한 서양 미술사. 대게 이 시간에는 딴 짓을 하는 게 내 일이었는데. 그럴 기분도 아니고 딱히 할 만한 것도 없어 오랜만에 집중해서 수업을 들었다. 옆 자리에 앉은 재환이는 그런 내가 어색한지 자꾸만 팔을 콕콕 찔러댔다. 연습장에 줄을 죽죽 그어 빙고판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을 무시했다.

 

"수업 들어야지, 재환아."

", 니가 수업을 듣는다고?"

"내도 가끔은 듣는다."

", 재미 없어."

 

반응이 없는 내가 재미없는지 더 이상 앞을 보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차분히 앞을 보는가 싶더니 시간이 흐르고 고개가 꾸벅꾸벅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럼 그렇지.

 

집중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 속을 무겁게 짓누르는 꿈을 떨쳐내기 위해 뭐라도 집중할 만한 것이 필요했다. 화려한 색이 덧입혀진 그림을 멍하니 바라본다. 창과 방패. 서로에게 칼을 겨눈 그림. 그걸 보자 이상하게 또 가슴이 쿡쿡 저몄다. 마치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물론 어딘가에서 이미 본 그림일지도 모른다. 잘은 모르지만 유명한 그림이니 교수님이 보여주는 것이겠지. 내가 느끼는 것은 보았다기 보다는,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라는 감각이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 상상을 하는데 왠지 눈 앞에 푸른 빛이 펼쳐지는 듯 했다. 꿈 속의 마지막 장면에서 늘 보았던 그 푸른 빛 말이다.

 

", 일어나."

"...?"

"수업 듣는다면서,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자냐? 강의 끝난 줄도 모르고. 밥 먹으러 가자."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손에 몽롱한 단잠에 빠져들었던 정신을 겨우 잡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꽉 차 있던 강의실은 이미 텅 비어 있다. 머쓱해져서 뒷목을 벅벅 긁었다. 나 얼마나 잔 거야 도대체.

 

육개장을 입으로 훌훌 털어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뜨끈하고 칼칼한 국물이 속을 축이니 노곤하게 지친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 하다.

 

"게임 좀 그만해라. 눈 밑이 퀭하다. 수업시간에도 맨날 졸고."

"게임 안 했다."

"게임도 안 하는 놈이 요새 왜 그렇게 잠이 부족해? 밤에 대체 뭘 하길래. ...작작 좀 봐라. 너 그러다 뼈 삭아."

", 그런 거 아니라고."

"아무튼 잠 좀 자고 와. 너 완전 맛탱이 갔어."

 

딱히 대답하기 마땅치 않아 그릇을 들고 국물을 들이켰다. 맛탱이 간 거 나도 아는데, 그게 맘처럼 쉽지가 않다고.

 

며칠째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다. 항상 같은 길을 지나고, 같은 곳에서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항상 같은 사람과 그 모든 것을 함께한다.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슬프게도 울었다. 그리고 나는...그 사람을 가슴이 터질 듯 미워하고 그리워하며 눈을 감는다. 그리고 항상 눈물로 흠뻑 젖어 엉망이 된 채로 새벽녘에 눈을 뜬다.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누구를?"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정신 차려 보니 이미 입 밖으로 꺼내 놓은 뒤였다.

 

"너 매일 같은 꿈 꾼 적 있어?"

"...어릴 때? 그런 경험 한번 쯤 다들 있잖아."

"매일 같은 사람이 나오는데, 너무 자주 봐서 그런가. 실제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뻐?"

"몰라. 얼굴이 안 보여. 여잔지, 남잔지도 몰라."

". 그럼 난 패스."

 

장난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재환은 손사래를 쳤다. 내 얘기 하는데 누가 네 의사 물어봤냐. 어이가 없는데 피곤으로 지친 내게 농담을 거는 것이 불쾌하지만은 않아 긴장이 탁 풀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슬슬 웃음이 샌다.

 

"니가 뭔데."

"아니, 니가 실제로 있다며."

"아니, 그냥 느낌상 그렇다는 거지. 꿈 속의 사람이 실제로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그냥 신경 끄고 잠이나 푹 자. 너 진짜 그러다 훅 간다. 오케?"

"...오케."

 

무겁게 늘어진 몸이 체감하는 하루는 더 고단했고 느렸다. 집에 가는 길에 커피 한 잔을 사갔다. 술이나 마시자고 동기들이 붙잡았지만 피곤하단 것을 핑계로 거절했다. 강다니엘이 술자리를 마다하다니. 녀석들은 놀란 눈치였지만 최근 들어 정말로 피곤해 보였던 내 상태를 알고 있어 더 붙잡지 않았다.

 

빨대에 입술을 붙이고 쪽쪽대며 씁쓰름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분명 설탕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는데 달게 느껴진다. 씁쓰름하고 고소함 사이의 미묘한 달콤함. 입 안에 커피를 가득 머금고 혀를 녹녹하게 축였다. 자고 싶지 않은데. 며칠에 걸쳐 피로가 쌓인 고단한 몸은, 하루쯤 밤을 새고 싶다는 내 바람을 들어주지 못할 것 같다. 아직은 제출기한에 좀 여유가 있는 과제를 시작했다.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또 의식이 저 너머로 넘어간다. 선선한 바람이 창 밖에서 불어와 살짝살짝 머리카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저녁과 밤의 경계에서 모호한 빛이 천천히 사그라들 즈음. 다시 꿈은 시작된다.

 

* * *

 

왜 이 곳에 머무르는지, 왜 이 곳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그것만이 영혼에 새겨진 변함없는 진실이자, 나를 이 곳에 붙잡아 두는 동력이 된다.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있다. 아마 그 사람과 이 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고 믿어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여기로 올 것이라는 건 나의 짐작일 뿐. 나는 영겁의 세월을 이 곳에서 보내며 그 작은 것에 대한 기억도 확신도 없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채로 영생을 살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언젠간 만날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 한 가닥을 품고. 만나야만 해. 만난다고 뭔가 달라질까? 그런 반문 역시 수 없이 되풀이했다. 그런 의심의 조각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신념이 나를 이끈다. 그 사람을 만나야만 이 끝나지 않는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그리 믿고 있다. 손 끝에 온기를 퍼트리는 머그잔에 손가락을 천천히 눌러보다 빛이 쏟아지는 창 밖을 살핀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자신의 시간을 보낸다. 제한된 시간을 열심히 채운다. 그 속에서 오직 나만이 멈추어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이 곳에 머문 채.

 

"사장님. 원두 다 떨어졌는데요."

"찬장 열어보면 남은 게 좀 있을 텐데."

"...있긴 있는데, 이것도 조금 밖에 없어서요."

"일단 그걸로 내리고 있으면, 내가 사올게요."

"알겠습니다!"

 

옛 노래가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빼고 일어서며, 테이블 밑으로 의자를 넣어 자리를 정리했다. 새로 온 알바생 재환은 똘망똘망하고 눈치가 빨랐다. 시키지 않아도 손님이 없으면 재고를 체크하며 떨어져가는 물품을 기록하고 내게 알렸다. 서글서글한 순한 인상에 목소리도 좋아 은근히 주변 대학의 여학생 손님들도 늘었다. 대하기도 어렵지 않고, 여러 모로 오래간만에 잘 뽑은 아르바이트생이라 생각한다.

 

정기적으로 원두를 사오는 거래처에 들렀다. 이번에는 좀 색다른 시도를 해 볼까 싶어 매일 사가던 것이 아닌 추천을 받아 이것 저것 다양한 원두를 구매했다. 좀 더 묵직하고 신 맛이 나지 않는 다는 것과, 은은하게 초코향이 난다는 것도 있었다.

 

양 손 가득 무겁게 돌아가는 길의 발걸음은 가볍다. 제법 무게가 되어 슬슬 팔이 당겨왔다. 그래도 묘하게 붕 뜨는 기분에 힘들지 않았다.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 속에서도 기분의 높낮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오늘은 유독 날이 화창했고, 햇볕이 눈부시다. 내 마음을 위로 올려두기에 충분했다. 횡단보도를 기다리는데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조심해요!"

 

거친 손에 이끌려 뒤로 확 당겨졌다. 빛이 번쩍했고 순간 눈이 멀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눈 앞으로 차 한대가 번개같은 속도로 지나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봉투를 정리해서 다시 내 손에 들려주며, 나를 구해준 사람은 투덜투덜 거침없는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새끼네, 저거. 운전을 저따위로 해. 사람 하나 치려고 환장을 했나. 이미 지나간 차의 뒤에 대고 한바탕 욕을 하는 남자의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순하게만 생겨 조금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

 

"괜찮아요?"

 

봉투를 건네 받았다. 이상하게도 살짝 스친 손 끝이 불덩이에 닿은 듯 뜨거워 화들짝 손을 떼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환하게 웃었다. 햇살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는데, 그 눈부신 빛보다 찬란한 웃음을 본다. 하얀 피부에 순하게 늘어진 눈매는 널찍하고 단단한 몸과 대비되어 앳된 느낌을 준다. 한 쪽 눈 끝에 콕 찍힌 눈물 점은 묘한 인상을 자아낸다. 예쁘게 벌어져 호선을 만드는 입매를 물끄러미 훑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다.

 

"감사합니다."

", ."

"...그럼, 이만..."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사를 주고받고선 입을 다물었다. 나란히 서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린다. 슬쩍슬쩍 옆을 흘기며 나를 훑는 게 느껴졌지만 짐짓 모른 체 하며 앞을 보았다. 나는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차에 치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쇠하지 않는 몸에 보통은 죽을 정도의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다쳤을 때 회복이 빠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보통은 몇 달을 두고 고생할 것을 하루 이틀이면 아물어 버리곤 했다. 아마 심각한 정도의 사고를 당하면 하루로는 힘들지 않을까, 그렇다면 회복에 며칠이나 필요할까.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앞으로 걷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고 신호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봉투를 다시 단단히 고쳐 쥐고 길을 건넜다. 문득 주위를 둘러봤지만 눈물 점을 가진 남자는 이미 인파 속에 파묻혀 사라져 버렸다. 묘한 아쉬움에 혀 끝이 쓰다. 명분도 이유도 없지만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한 구석에서 피어나는 얄미운 반문에 나는 답할 수 없다. 그냥, 그냥...웃는 게 예뻐서?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충분치 않은 변명을 대보았지만 답으로 제출하기엔 역부족이다.

 

* * *

 

잠이 부족해 헛것을 보나. 무작정 도망쳤다. 어느 골목길로 들어와 턱 끝까지 찬 숨을 골랐다. 수면부족으로 인한 환각, 그런 걸까? 무릎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이곤 찢어질 듯한 목구멍으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환각이나 환영이라 해도, 어쨌든 나는 분명하게 보았다. 그 남자의 주변을 감싸는 푸른 빛을. 오직 그 사람만 그런 빛을 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부볐지만 그 빛은 오히려 점점 또렷하고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슬로우 모션처럼 그의 앞으로 차가 다가왔다. 그는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보통은 모른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다 하더라도. 빠른 속도로 자신의 앞으로 돌진하는 차를 피할 그런 능력은 대체로 없다. 그런데 내 눈에만 그 모든 것이 느렸다. 모든 감각이 내게 말한다. 그를 구하라고.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재빨리 그를 뒤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제야 모든 속도가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약간 무례하다 싶을 만큼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 역시 나를 미친 놈으로 만드는 이 사람을 눈에 새겨두고 싶어 굳이 따지지 않았다. 남자다운 얼굴에 선이 진하다. 작은 얼굴 안에 오밀조밀 담아진 이목구비는 어딘가 처연하고 깊은 인상을 준다. 부드러워서 만져보고 싶게 생긴 뺨에는 삼각형의 꼭지점마냥 세 개의 점이 콕콕 박혀있다. 잘생겼다, 라는 흔하디 흔한 말로 담아내기 힘들만큼 굳이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진하게 눈에 남았다. 그건 여전히 내 시야에 함께 담기는 푸른 빛이 아니었더라도 같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쯤 되면 환각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건 말도 안돼.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라 그렇게 쉽게 인정이 되질 않았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 봐도 그 남자 주변의 푸른 빛이 사라지질 않았다. 빛이 말을 한다고,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면 완전히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겠지. 그건 나를 불러들이고 있었다. 이미 이 남자를 만나고서부터 모든 것이 도무지 설명이 되질 않았다. 두려움에 나를 부르고 끌어들이는 그 빛의 반대쪽으로 달렸다.

 

쉼 없는 뜀박질에 찢어질 듯한 폐를 느끼며 애석하게도 꿈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들썩이던 가슴이 진정되자 내가 그 사람을 원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부푼 가슴을 찢어낼 듯한 벅찬 분노가 혈관 곳곳으로 퍼져나가 나를 잠식한다. 그를? ? 오늘 처음 본 사람을? 눈을 멀게 하는 푸른 빛덩이가 내게 감정을 건네준 걸까. 이 마음도 그 빛덩이도 모두 꿈 속의 것을 닮았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재빨리 다시 그와 마주친 횡단보도 앞으로 돌아갔지만 당연하게도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익숙한 길이다. 그런데 조금 달랐다. 계속해서 되풀이하던 그 길이 맞는데, 시간대가 달랐다. 항상 이 꿈의 시작점은 깊은 밤이었는데 지금은 이제 막 해가 넘어가는 저녁이었다. 나를 이끄는 부드러운 손도 같았지만 그 손은 나를 밖이 아닌 안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걸 지켜보는 나이자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는 내가 된다. 나를 안내하는 손은 매우 들뜬 듯 했지만 마음만 앞설 뿐 길을 잘 모르는 듯 했다. 아니, 몰랐다. 녀석은 우리 마을에 처음 들어오는 것이라 알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눈꺼풀이 질끈 감기는 것이 느껴져 생각의 끈을 놓으려 애썼다. 이것이 꿈이라 자각하며 고민하면 할 수록 점점 이 꿈에서 멀어지려 했다.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온전히 이 꿈 속의 내가 되어야 했다.

 

결국 갈팡질팡 길을 잃은 녀석의 손을 고쳐 잡고 내가 앞장서서 길을 이끌었다. 엄청나게 들떠 있었다. 우리 모두. 아니, 이 도시의 모두가 광적인 기쁨에 사로잡혀 있다. 엄청난 축제라도 열리는 걸까. 나는 예전부터 녀석을 데려가고 싶다고 생각해둔 곳이 있는 사람처럼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휘적휘적 마른 몸을 이끌고 데려간 곳은 옷을 대여해 주는 어느 양장점이었다. 빳빳하게 다려져 있는 옷들을 살피며 우리는 마주보고 환하게 웃는다. 그 얼굴을 살펴보려 할 수록 두통이 심해졌다. 필름이 돌아가듯 장면이 넘어갔다. 그와 나는 커다란 카메라 앞에서 눈부신 조명을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도저히 뇌를 파고들 듯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떴다. 눈 끝으로 고여있던 눈물이 옆 얼굴을 타고 죽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분명 '' 였다. '그녀'가 아니라. 나와 엇비슷한 키에 마른 듯 단단한 체격. 한 손에 들어올 듯한 작은 얼굴. 종이처럼 팔랑거리는 얇은 몸. 아직도 허리에 감아본 팔의 감촉이 되살아나는 듯 생생했다. 허리가 닿았던 오른 팔을 왼손으로 슬슬 쓸어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대충 슥슥 훔쳐 닦았다.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얼굴은 베일 뒤로 가린 듯 보이지 않았지만, 낮에 만난 그 남자를 닮았다. 꿈 속에서 단단하게 얽혀있던 손가락 마디마디의 감각이 여전히 선연해 의미 없이 손가락을 구부려 보다 다시 천천히 몸을 뉘였다. 일어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임을 창 밖의 어슴푸레한 빛이 일러준다. 퉁퉁 부은 눈가를 꼭꼭 눌러보았다. 실소가 터진다. 눈물이 익숙해지니 본래 헤프게 우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정말 우는 날이라고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는데. 이젠 손과 발로도 셈이 모자라 세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밤마다 찾아오는 진실 같은 환영은 내 안에 차곡차곡 더운 물을 끓여낸다.

 

막막했다. 뭘 해야 할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는데. 되풀이되는 꿈은 마치 내가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내가 어떤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평범했던 일상마저 의심하고 되새겨본다. 불안감에 폐부가 자꾸만 안쪽으로 달라 붙는 것 같다.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워진다.

 

그래. 사실은, 알았다. 그 남자다. 확실한 물증은커녕... 아니 최소한의 심증도 없었다. 꿈 속의 사람을 닮았다는 의심마저 막상 깨고 보니 의심을 제기하는 것 마저 터무니없이 황당한 일로 여겨진다. 단순히 내 망상 속에서 의심 한 줄기가 흘러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끄집어 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단 만난다고 쳐도...그 다음은? 도대체 내가 그 남자와 뭘 해야 하는데?

 

매일 밤 제 꿈에 같은 장면, 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게 당신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왜 제 꿈에 나타나 저를 괴롭히세요?

혹시 요즘 어떤 꿈을 꾸시나요? 저는 매일 같은 꿈을 꿔요.

 

전부 다 이상해. 완전히 정신이 나간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다짜고짜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 자신의 악몽에 대해 늘어놓는 사람. 최악 중에 최악이다.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이건 아냐. 그럼 다른 질문을 해 보자. 몇 살이세요? 당신은 어떤 사람이죠? 왜 제 눈에만 당신이 특별해 보이죠? 저는 마약 같은 건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데. 당신 주변에 푸른 빛이 감싸고 있다는 거 알아요? 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어요? , ...당신이 미워 죽겠고...왜 이렇게 자꾸 생각나죠? 나는 이제 막 당신을 처음 봤을 뿐인데.

 

역시 잠이 부족한 것이 문제다.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못한다. 꿈과 현실이 겹쳐지고 한데 섞여 엉망이다. 진창으로 떠밀려 허상과 내가 실제로 본 것 중 진실만을 골라내야 했다. 피로감에 푹 젖은 뇌는 생각하길 거부했다. 또 지끈지끈 시작되는 두통. 생각이나 고민은커녕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것 만이 남아 머리를 쿵쿵 때려댄다. 되풀이되는 새벽. . 도대체 왜. 너는 왜 나를 이리도 파고들어.

 

그 남자를 만나고서 처음으로 꿈이 변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특별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더라도, 내게는 한없이 특별했다.

 

지끈지끈 울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꼭꼭 눌러대다 맞춰진 퍼즐 한 조각에 번뜩 눈을 떴다. 동이 트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만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생각한다. 그렇지만 순전히 의무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감정이 앞섰다. 단 한 번. 그것도 아주 잠깐 본 사람에게 느낄만한 크기의 것이 아니다. 비정상적으로 비대하고, 그 바닥은 스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심이 깊다. 본래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야 터져 나온 것처럼. 꾸역꾸역 자꾸만 흘러나와 주워담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내 자신이 감당하기 버거워질 만큼. 낱낱이 해부하고 조각조각 잘라내어 그 성질을 파헤쳐 본다. 내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다. 나는 체면보다는 이 미로를 빠져나갈 방법이 더 절실해.

 

이 복잡다단한 꼬여버린 실타래는 그 색깔이 모두 다르다. 그 중 가장 많은 색깔을 차지하는 부분은 분명 깊은 애정과 사랑. 그 위로 복잡한 매듭을 짓고 있는 것은 원망과 증오. 또한 그 둘을 엮어내고 있는 것은 깊은 갈망과 집착.

 

두려움에 숨이 턱 막힌다. 이 많은 감정을 담아낼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누군가에게 그리 복잡한 감정을 느낄만한 인재가 되질 못했고, 더더군다나 몇 분 본 것이 고작인 사람에게 그럴 이유 또한 하등 없었다. 그건 내 안에서 끓여내었다기 보다는 어딘가에서 건네 받은 것처럼, 내게 맞지 않는 옷이다. 사이즈가 맞질 않아 교환을 해야만 하는 옷처럼,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벗어내고 싶다. 이건 내 것이 아냐. 당장에라도 벗어내어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이미 이 미로의 중심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찾아야 했다. 그게 뭐든지 간에.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나는 악착같이 매달리기로 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하지만은 않은 것들.

 

* * *

 

무작정 기다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천천히 그림을 끄적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배웠다거나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끝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레 솜씨는 늘었다. 하얀 종이 위에 슥슥 연필로 선을 잡아간다. 며칠째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얼굴이 종이 위로 조금씩 구현되기 시작한다. 갸름한 턱 선에 곧은 코. 도톰한 입술. 아랫입술이 특별히 도톰하고 말랑해 보였던 것 같아 신경을 써서 음영을 넣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정도가 된 것 같아 이번엔 눈꼬리의 각도에 정성을 쏟았다. 살짝 처진 눈매가 귀엽고 애처로웠는데. 몇 번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겨우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고개를 멀리 떼고 보았다. . 당연히 실물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이 정도면 조금 그리움을 달랠 정도는 되겠지. 마무리로 눈물 점을 콕 찍어내고 연필을 내려둔 순간 딸랑하고 문에 매달아둔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건 분명히 내가 방금 완성한 그림의 주인공이다.

 

"왔냐?"

". 니가 만들어 주는 거 한 번 먹어보게."

 

그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어쩐지 들키면 곤란해질 것 같아 재빠르게 그림을 뒤집어 엎어두었다. 알바생 재환과 친한 사이인 듯 킥킥대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대학생이었구나. 어려 보인다 싶기는 했는데.

 

"샷 추가해줘. 오늘 밤 샐 거다."

"이미 한 번 더 넣었어."

"부족해. 잠들 거 같다. 이거 너무 연해."

"카페인 중독이야? 작작 마셔라 좀."

"......"

", 더 넣었다."

"......"

", 다니엘."

 

모든 장면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 같다. 이름이 다니엘이구나. 멍하니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이름은 어느새 훅 박혀 든다. 가볍게 카페 안을 쓱 둘러보던 그의 시야 안에 내가 걸린다. 커피를 쥐고 있던 손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밑으로 떨어진다. 심하게 흔들리는 동공 속에 내가 담기는 것이 낯설다. 왜 그렇게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혹시 나를 찾았나요? 기다렸나요? ?

 

", 저분 우리 사장님. 잘생기셨지."

"...."

"그렇게 놀랄 정돈가...? 자주 봐서 익숙해졌나."

 

놀라움에 살짝 벌어졌던 입이 이내 다물어진다. 단단하게 붙어 물리는 입술이 어떤 의지를 다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앉아만 있는 것은 무례한 짓이라 여겨져 일어서 살짝 목례를 했다. 자석에 당겨지듯 그가 내 앞으로 걸어온다. 악수를 청하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고 그가 내 손을 맞잡았다. 악수라기엔 조금 길게 잡았던 손이 풀렸다. 그냥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다. 자주 보게 될 것 같아. 그리고 어쩌면 이 사람이...

 

"...둘이 아는 사이에요?"

 

재환이 조금 의외라는 듯 물었다. 차근차근 사실만을 말하기로 했다.

 

"그냥, 잠깐... 제가 차에 치일 뻔 한걸 구해줬었는데. 다시 봐서 반갑네요. 재환씨. 이 분이랑 얘기 좀 해도 괜찮죠?"

", 그럼요! 당연하죠."

 

자연스레 테이블 위에 엎어둔 연습장을 치워버렸다. 앉아요. 내 맞은 편 자리를 권했다. 얼이 빠진 사람마냥 내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아직 계산 안 했죠? 그냥 마셔요. 앞으로 종종 와서 마셔도 되고."

"...감사합니다."

 

괜히 덧붙인 말이 쓸데없이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지려 했다. 돌아온 것은 별 것 아닌 흔한 다섯 글자. 곰곰이 생각한 뒤에 신중하게 한 말임을 알았다. 불퉁하게 뱉어진 음절이나 그 안에서 적어도 미지근함 이상의 온도를 느낀다. 빨대에 그 통통한 입술을 붙이고 쪽쪽댄다. 밤을 새겠다고 했었나. 눈 밑이 퀭하고 머리가 아픈지 습관적으로 골을 꾹꾹 눌러대는 손가락을 보니 그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빤히 보였다.

 

"고마웠어요, 그 때."

"......"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린 것 같네요."

"..., ."

 

돌아오는 대답이 영 시원치 않다. 자주 와서 커피라도 마셔요, 라는 간지러운 말을 덧붙이려다 꾹 참아낸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차분히 기다리기를 택했다. 말이 없다거나 과묵하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너무 속에 가득 담긴 것들이 넘쳐 골라내기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뭐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꼭 붙인 것이 수 차례. 어울리지 않게 상의 끝 단을 양손으로 말아 쥐고 조금씩 끌어올리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내가 더 말을 건네지 않으니 은근히 다리를 달달 떨어대기 시작했다. 긴장했구나. 그 속에 빼곡히 뭘 쌓아 두었길래, 그리도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지.

 

액정이 잠깐 반짝하고 빛을 냈다. 별 것 아니겠지만 확인하려 잠금 화면을 풀어냈다. 그 순간 내 핸드폰을 다니엘이 빠르게 낚아채어 갔다. 어어, ...하며 내 입에서는 바보 같은 소리만 흘렀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배경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어 더 곤혹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이번에는 내 쪽이 긴장감에 숨이 막힌다.

 

"본인 사진이네요."

", ..."

"얼굴은 그대론데. 엄청 오래 전 사진 같다."

"하하... 그런 컨셉으로 찍었어요."

"옆에는 누군데요. 얼굴이 잘 안 보이는데."

"......"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었나? 미안해요."

 

등줄기가 서늘하고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건조하게 말라붙는 입술을 혀 끝을 내어 조금 축였다. 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아마 들키진 않겠지. 보통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니까. 아니, 사실대로 말한다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나는 어긋나 있는 존재다. 핸드폰을 쥐고선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는 어떤 번호를 찍어내더니 전화를 걸었다. 주머니에서 전화가 오고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내게 돌려주었다.

 

"이름, 뭐에요."

"...옹성우입니다."

"강다니엘. 저장해요."

"...왜요?"

 

반박하자는 뜻은 아니었다. 알고 싶었을 뿐이다.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얀 피부는 자연스레 분홍으로 물들어간다.

 

"...연락하고 싶으니까..."

"...왜요?"

"......"

"......"

 

따져 물으려던 것도 아니다. 정말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시간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긴 세월을 살았다. 이런 사람 또한 지금 내 눈 앞의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속이 울렁대는 것은 처음이다. 나는 오답을 골라선 안됐다. 착각을 해서도 안됐다. 답을 알기 위해 보내온 과정이 너무도 길었다. 반드시 답을 골라야만 해.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온 몸의 감각이 이 사람이라 외쳤다. 내가 많은 시간을 건너 그를 기다려 왔다고. 정말 너야? 만나면 그 뒤는? 나는 어떻게 되는데? 나는 왜 당신을 만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건너야만 했지? 내게 확신을 줘. 반드시 너라고.

 

"내가, 좋아하니까. 성우씨를..."

 

멋쩍은 듯 눈가를 긁는다. , 이건 반칙이었다. 쑥스러운 듯 호선을 그리며 벌어지는 입매는 내 경계를 너무도 쉽게 녹여냈다. 똑바로 보질 못하고 테이블 위를 방황하며 또륵 굴러다니는 눈동자. 그럼에도 그 대답은 제법 단단하고 솔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거짓으로 가득 찬, 유약한 나와 달리.

 

"...왜요."

 

이번 것은 트집에 가까웠음을 인정한다. 견고해 보이게 위장한 속이 빈 벽은 금이 가며 갈라지고 무너질 준비를 한다. 눈가가 뜨겁다. 불안하던 그의 시선이 들리고 내 안을 파고든다. 나를 삼켜낼 듯 불안정한 파도는 서툴고 어리다. 그래서 트집이 먹히질 않을 것임을 알았다.

 

"모르겠어요."

"......"

"그냥 계속 생각나고, 밉고...미치게 좋았다가도 밤새 원망하고..."

"......"

"모르겠어요.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진짜 미친 것 같은데..."

 

괴로운 듯 이어지는 고백. 귀를 틀어막고 싶다. 한 음절 한 마디마다 내 안에 깊이 엮어 들어와 가슴이 쿵쿵 뛰었다. 만약 내가 틀렸다고 해도. 잘못된 답이었다 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답이 아니라 해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란 신념에 확신을 준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짜여진판처럼. 내 의지로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입 끝이 양쪽으로 당겨지려는 것을 애써 참아내고 자판을 톡톡 눌렀다. 강다니엘. 말 없이 자신의 이름을 입력하고 번호를 저장해 두는 것을 보자 그는 웃었다. 이미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한다. 정말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들었던 것이라 의미가 없어야 할 말은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되풀이할수록 더 큰 의미가 되어.

 

다시 악수를 하자는 의미였는지 다소 성급하게 뻗어진 손은 내 앞의 커다란 유리잔을 밀어 넘어트렸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진 컵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난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큰 조각부터 치우려 했다. 다니엘이 거친 손짓으로 그런 내 손을 탁 쳐냈다.

 

"만지지 마요."

"...."

 

손가락이 베여 빨간 피가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초조하게 카운터를 돌아보는 다니엘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허둥지둥 이 쪽으로 오고 있는 재환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입 속으로 쑥 삼켜지는 내 손가락이 낯설다. 뜨겁고 열기가 가득한 입이 화끈거리는 상처에 달라붙는다. 그 열기는 손 끝에서부터 퍼져나가 내 몸의 온도를 높인다.

 

됐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빠르게 흐르던 피를 빨아내고 입이 떨어졌다. 쏘아보는 눈빛을 받아내기 힘들어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부서진 파편들을 쓸어 담으며 재환이 물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터에 밴드랑 연고 있어요. 괜찮아요."

"죄송해요. 제가 덤벙대가지고."

"그럴 수도 있죠. 저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뭐가 괜찮아요. 피가 뚝뚝 떨어졌는데."

 

정말로 괜찮은데. 구태여 힘을 들여 설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정도 상처는 내일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나는 다음날 왜 이렇게 빨리 아물어 버렸는가에 대한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작게 베여도 하루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진 않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내일 같은 자리를 스스로 베어내야 할 지도 모른다.

 

"가 봐요."

 

밴드를 붙이며 말했다. 생각보다 무심하게 나간 어투가 신경 쓰여 앞을 보니 역시나 눈이 축 처져서는 울상이다.

 

"그치만..."

"오늘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

"또 볼 거잖아요, 우리."

"......"

"...연락할게요."

 

괜히 간지러워 한 마디 덧붙이고는 고개를 틀어 아무것도 없는 벽을 봤다. 그래도 옆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다니엘의 표정이 눈에 빤히 보이는 것 같다. 발 끝을 돌다 목 언저리 어딘가로 방황하는 내 시야 안으로 다니엘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 들어온다.

 

 

 

 

 

그 밤은 드물게도 꿈을 꾸었다. 어둑한 오솔길을 숨이 차게 뛴다. 나는 뜻 모를 죄책감에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뛰고 있음을 깨닫던 순간,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눈을 떴다. 정말로 뛴 것처럼 헉헉대며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아봤지만 눈부신 햇살이 눈 위를 내리쬔다. 다시 눈을 떴다. 문득 생각이 나서 밴드가 붙여진 손가락을 눈 앞으로 가져왔다. 기분 탓일까. 간질간질 따끔한 것 같아 확인하기 위해 밴드를 떼어냈다.

 

베였던 자리는 하룻밤 새에 검붉은 색으로 변해있다. 밴드가 붙여져 있던 탓에 짓물러 조금 하얗게 부푼 살갗은 그 검붉은 실선을 더욱 또렷하게 나타낸다. 손톱을 세워 그 선대로 꾹 눌러보았다. 핏방울이 맺히고, 욱신거리는 아픔이 전해진다.

 

정말로 괜찮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