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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알오버스 설정을 일부 추가, 변형하여 사용하였습니다.
 

 

 


 
 
*

A

 


  옛날 옛적에 저 높은 성 위에는 머리카락이 아주 길고 긴 공주가 살았다. 공주였던가, 그냥 마녀의 딸이었던가. 그냥 아예 다른 이야기였던가? 다니엘은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가 아무렴 어떻냐는 듯 그냥 미간을 찌푸렸다. 어릴 적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동화책에서 말했던 성은 저것보다 더 높았을까, 낮았을까. 그것보다 자신을 노려보는, 심히 노한 아버지의 얼굴이 이야기를 가리듯 떠오르면 다니엘은 실없는 동화를 잊어버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디선가 한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스물셋에 가출이라니. 그래, 이 나이면 출가라고 봐도 좋았지만 나오게 된 연유나 거의 도망치듯 나와 버린 자신의 이전 모습을 생각해보면 가출이라고 해야 백번 옳았다.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자신의 통장과 짐을 챙겨 도망 나온 지도 사흘 째. 워낙 능력이 좋으신 아버지시니 제 통장에 출금 내역만 떠도 곧바로 쫓아올 것 같아 첫날에 모조리 현금으로 뽑아 들고 다녔다.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것보다야 내막이 어두운 곳을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눈에 익은 금상무역의 경비직에 자원까지 했고. 경비실에서 재워주기까지 한다기에 얼씨구나 기회구나 했다. 이 정도면 들키지 않으리란 자신까지 생길 정도였으니까. 적어도 그 영감님은 자신이 오피스텔을 전전할 거란 생각에 빠져 사실 테니 한동안은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
 
  강씨 집안의 외동아들 강다니엘은 헤헤 웃고 다니는 망충한 강아지상에 참 순해 보인단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사실 한다면 하는 부산 놈이었다. 어찌나 성격이 강한지 사춘기의 극에 올랐던 18살, 아버지와 제대로 한 번 붙었던 그 때에 역시나 성격 강한 어머니가 없었다면 집안이 두 쪽 났을 것이라는 게 친척들의 평이었다. 그 집안 내력이 어머니와 아내에겐 약한 팔자인지라 둘 다 혼쭐이 나고서야 잠잠해졌으니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고. 이런 상황이니 어머니가 해외여행을 가버리신 다음 빈 집 사정이란 불 보듯 뻔했다. 라이프 스타일이 맞지 않았던 부자간에 무엇이 있었을까. 4차 대전, 5차 대전. 차가운 전쟁뿐이었지. 결국 강다니엘은 복수 겸 사고를 쳤고 그게 의외로 일이 커져 도망 나왔다. 사실 자기가 좀 심하기도 했던지라 아버지에게 뭐라 변명할 수 있는 것도 없어 아무 대응도 하지 않은 채 나온 것이었고. 다니엘은 이곳에 오기 전 일련의 과정들을 떠올리다 아직까지도 소름이 돋는 제 목 뒤를 긁적거리곤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선임인 김씨는 올해로 20년째 이 빌딩의 경비를 맡고 있다고 했다. 젊은 친구가 이런 힘든 일에도 자원을 한다며 저를 좋게 보는 통에 한 3층까지 안내받았을 땐 그의 취미가 낚시이며 좋아하는 낚싯대의 브랜드가 어디였는지까지 전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일주일만 더 하면 그의 족보까지 외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는 자신에게 딸이 한 명 있고 꽤 듬직한 알파 청년과 교제하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투 머치 인포메이션. 강청년하고 지금에서야 만나 아쉽네 라고 덧붙이는 김씨를 바라보며 강청년, 아니 강다니엘은 그저 사람 좋은 웃음으로 허허 웃어보여야 했다. 아저씨. 아저씨 앞에 있는 청년은 따님보다 그 듬직한 청년과 눈이 맞을 수도 있어요.
 
  그의 속을 모를 경비원 김씨는 똘똘하게도 이야기를 잘 알아듣는 강청년을 매우 좋아했다. 오늘 밤근무부터 잘 부탁한다며 곧바로 사라졌고 다니엘은 아르바이트의 인수인계란 게 이렇게나 짧은 것이었나 실감해야 했다. 뭐, 자신 혼자만 일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선임들이 CCTV를 지켜보고 로비를 지키는 동안 다니엘은 김씨의 기대대로 똘똘하게 손전등을 챙겼다.

 

 

 

 

 

 

 


발화점

w.옹상이몽
 

 

 

 

 


 

 

-
 

  복도는 어두웠고 다들 의외로 빨리 퇴근하는 것인지 사무실들은 깜깜하기만 했다. 아무도 없는 회사복도는 의외로 더 을씨년스러웠다. 사실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 일을 신청하기야 했다만.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게 있었는데, 스물셋의 씩씩한 강청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있다면 벌레와 귀신이었다. 다니엘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며 후회를 한마디씩 곱씹었다. 당장이라도 내일 다른 직업을 구할까 고민하다가, 적어도 아버지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이곳에서 자신을 찾을 수 없으리란 생각에 또 그만두게 된다. 한 층을 돌아보고 나면 온 몸이 바짝 굳어 삐걱대며 한 층을 올랐다. 다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동요를 한 소절씩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섬그늘에... 아니, 아니.."
 
  이건 아예 귀신을 부르려고 만든 동요 같다는 생각에 멈춰선 채 골똘히 생각했다. 또 부를 게 뭐가 있더라. 비행기도 이미 날려버렸고 학교 종도 다 쳐버렸으니 결국은 어릴 적 배우다 때려치웠던 젓가락 행진곡을 따따따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5층에 다다랐을 때.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니엘은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장이라도 내려갈 것처럼 계단 손잡이를 붙잡았다.
 
  "누, 누구세요...?"
 
  다니엘은 곧 바닥부터 스미듯 올라오는 냄새에 자연스레 코부터 연신 킁킁거렸다. 그에 대한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라면, 예부터 그의 별명이 사모예드였다는 것이다. 정말 사모예드같이 생겼다는 연유도 있다만 정말 개코라서. 다니엘은 제 코를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 백합향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웅크려 있던 겁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놀래킨 것이 괘씸하기까지 했다. 보아하니 알파인 듯한데. 어디서 영역 표시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다니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적어도 경비라면 사내 섹스 정도는 잡아줘야 신고식이 아닐까. 이 험난한 호르몬의 세계에서라면 더더욱. 알파 내를 낼 수 있는 귀신은 없다는 생각에 괜스레 무럭무럭 피어난 용기와 객기로 한걸음을 옮기자마자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장 잠긴 곳으로 모른 척 터덜터덜 걸어갔다. 문에 귀를 대보면 신음소리는 그곳에서 더 짙었다. 다니엘은 그대로 김씨가 기특하다며 전해주고 간 카드키를 인식시켜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메가 냄새는 왜 안 나지?
 
  "..."
 
  다니엘은 바닥에 엎어져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 날수밖에 없었다. 오메가가 있어야 할 자리엔 자신의 호르몬을 주체하지 못한 채 내뿜고만 있던 그 남자만이 있었다. 백합향이 원래 이렇게 독하던가. 다니엘은 작게 기침하곤 곧장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저기요. 정신 좀 차려요."
 
  다니엘은 비상시를 위해 가지고 다녔던 러트약이 있을까 제 주머니를 뒤졌다. 거의 콘돔처럼 들고 다니던 것이었는데. 이 비싼 걸 남한테 주게 될 줄은 몰랐다. 엎어져 있는 그의 몸을 뒤집자 눈물과 타액으로 잔뜩 젖은 얼굴이 보였는데, 다니엘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잔뜩 발갛게 오른 그 사람이.
 
  "..."
 
  너무 잘생겨서.
 
  한동안은 멍하니 숨만 고르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신음이 흐르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다니엘은 쪼매만 기다려요, 속삭이고는 어디선가 물을 떠왔다. 지갑 속에 두알 정도 넣어두었던 게 다행이었다. 약을 하나 뜯어 그에게 먹이려고 그의 뒷목을 팔로 감아 상체를 일으키는데 그가 제 손을 힘겹게 밀어냈다.
 
  "...아, 으... 나, 오메가, 에요..."
 
  뭔 소리고. 다니엘은 얼이 빠져 잘생긴 얼굴을 내려다보았고 그는 곧 다시 힘겹게 책상 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약, 흐... 저기, 밑에..."
 
  다니엘은 대처능력이 좋은 편이었다. 알 수 없는 소리에 얼이 빠져있다가도 상황이 급한 지라 곧장 그를 조심히 내려놓고는 책상 밑을 뒤지기 시작했다. 밀대를 가져와 슥슥 쓸어보면 알약이 보였다. 후후 불어 먼지를 털어내곤 다시 그에게 가 상체를 안아 일으켜주곤 입안에 흘려 넣어주었다.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고 켁켁대길래 물을 밀어 넣어줬지만 약까지 밀려나올 지경이었다. 다니엘은 그 광경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가 결국 내는 모른다, 중얼거리며 물을 입에 머금었다. 사심없이. 정말로. 곧 고개를 숙여 입 안으로 밀어 넣어주면 그가 힘겹게 약과 함께 물을 삼켰다.
 
  안심했거나 혹은 지쳤거나. 그는 곧장 기절하듯 잠들었고 다니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털썩 주저앉아 여전히 제 품에 안겨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식은땀에 잔뜩 절어 있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 그림자가 그대로 지면 얼굴 반쪽이 안 보일 정도로 선명한 이목구비였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 내 몇 달 만에 보던가. 선이랍시고 일부러 이상한 사람만 보내주었던 아버지의 심술에 다시 이가 갈렸다.
 
  움직이지도 않는 그를 계속 안고 있을 수는 없어서 일단 가까운 쇼파에 눕히고 근처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었다. 시계를 보아하니 곧 근무지를 다 돌고도 남을 시간이라 복귀를 하긴 해야 했다. 허나 러트 때문에 알파냄새를 잔뜩 묻히고 있는 이 사람을 데리고 내려갈 수도 없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익숙한 명패가 보였다. 아버지 사무실 책상에 떡하니 있던 그거. 당연히 이름은 다른 것이었다. 대표이사 옹성우, 라고 적혀 있었다. 다니엘은 다시 뒤를 돌아 그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옹성우일까, 아니면 옹성우와 관련된 사람일까. 무엇이 되었건 저런 멀쩡한 차림으로 무슨 일을 벌일 것 같진 않으니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내는 이제 모르는 일이다. 괜스레 시끄러운 일로 자신을 노출하고 싶지 않았던 강다니엘은 그대로 그곳을 나와 복귀했다.
 

 
-

 
  허술한 대처였으나 의외로 감은 좋았던 것인지 그 뒤 그 일이 곧장 말썽으로 돌아오진 않았다. 그 다음 근무까지만 하더라도 혹시나 저를 탓할까 김씨를 유심히 지켜봤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수장인 그가 모른다면 다들 모르는 거겠지. 그 후로 일주일을 더 새벽 경비를 서도 오메가라고 주장하던 그 알파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독한 백합향도 느껴지지 않았고. 허나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의 젖은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 날이 잦아졌다. 다니엘은 5층을 돌 때마다 괜스레 제 경비모를 눌러썼다. 이제 더 이상 이 복도들이 무섭지 않게 된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첫눈에 반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강다니엘은 23년 동안 그렇게 생각했었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이 외양만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 선을 보았던 그 사람들은 전부 못생긴 것도 아니었고 못생겼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여기저기 정재계 2세들 사이에서 블랙리스트로 꼽을 만한 똥매너들만 골라서 문제였지. 다니엘은 변명이라도 하듯 꿍얼거리며 그것들을 생각하다 문득 옹성우 이사의 사무실 앞에 서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나지도 않는 백합향이 코를 찌르듯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다니엘은 괜히 따가운 코를 부볐다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부정하고 부정해도, 결국 매일 밤은 똑같았다. 결국 그 앞에 멈춰 선 날들이 늘어나고, 결국 그가 옹성우인지 아닌지에 대해 늘 궁금해 했다. 시간이 지나면 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앞을 지나가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그의 달은 얼굴이 더욱 더 진해지고, 그의 향이 더욱 진해지면. 결국 그는 다니엘의 꿈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난 다니엘은 이불을 들춰보았다. 다행히도 몽정은 아니었지만 악몽처럼 코 밑으로 익숙한 백합향이 스치고 지나갔다. 창문을 쳐다보니 해는 지고 있었고. 곧 출근시간이었다. 다니엘은 제 머리를 헝클고는 그대로 다시 쓰러져 눈을 감았다. 아. 미치겠다.
 
 

-

 
  저주다. 이건 분명, 어머니가 오기 전 자신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며 돌아다니다 결국은 자신에게 저주까지 걸었을 아버지의 소행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날이 절망적일 수는 없었다. 그저 이리 객기를 부리다 어머니가 오시자마자 집으로 돌아가 판을 뒤집을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 회사에서의 하루들은 그저 부속적인 시간들에 불과해야 했고. 다니엘은 버릇처럼 옹성우 이사의 사무실 앞에 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은 벌어진 뒤였다.
 
  다니엘은 김씨에게 말해 하루만 시간을 바꾸었다. 그 날은 쭉 로비에 서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모조리 살펴 그 알파남을 찾기 시작했다. CCTV를 살피다가 결국은 주변을 돌아다니기까지 했고 일을 꽤 열심히 하는 청년이라며 칭찬까지 받을 정도로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허나 어디에도 그의 얼굴은 없었다. 다니엘은 결국 낮에도 인적 드문 5층으로 올라갔다. 중견진들의 사무실만 가득한 그곳. 신입 경비원이 갈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해고보다도 그를 찾는 게 더 시급한 일이었기에 곧장 버릇처럼 옹성우 이사의 사무실 앞에 섰다. 가만히 그렇게 서 있다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그 말이 들려오면 문을 열었고. 거짓말같이 그가 제 앞에 앉아있었다. 아주 말끔한 얼굴로. 옹성우는 정말로 그 옹성우였다. 맥이 빠질 정도로 간단한 열쇠였다.
 
  정말 이렇게 쉽게 발견할 줄은 몰랐던지라 다니엘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소리에 옹성우 이사는 서류를 뒤적이다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했다.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익숙한 경비원 복장과 얼굴을 보면 그의 얼굴은 사색으로 변했다. 안절부절 못하던 그가 후다닥 튀어나와 다니엘의 손목을 끌었고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원하는 게 뭐예요."
 
  다니엘은 이어지는 말에 제대로 이해가 가질 않아 그를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이내 그 말이 머릿속에 입력되고 나면 미간을 찌푸렸고. 원하는 거? 드라마에서 재벌집 어머니가 못 사는 여주인공한테나 할법한 대사다, 이거.
 
  "지금 내가 돈이라도 노리고 온 걸로 보여요?"
  "아니에요? 그러면은, 여길 왜 와요?"
  "아니, 그... 확인 좀 하려고..."
 
  다니엘은 그의 시선을 피해 뒷목을 긁적였다가 그를 뚱하니 바라보았다. 햇볕 아래 보는 그의 말끔한 얼굴은 역시나 잘생긴 그대로였다. 외모가 다는 아니라곤 하지만 막상 좋아하게 된 사람이 잘생겼다면 그건 그거대로 심장에 안 좋다. 방정맞은 심장소리는 무시하고 화난 척 좁힌 제 미간을 문질렀다.
 
  "내 어디서 돈으로 구질구질하게 하는 사람도 아이고. 걱정돼서 왔더니만, 이래 취급합니까? 그쪽이 옹성우인지 아인지도 몰라서 확인하려고 온 건데."
  "날 몰라요?"
  "...내 새벽만 다니느라 모르는데."
 
  뚱하니 그를 쳐다보면 그의 얼굴이 조금 붉다 싶었다. 귓바퀴도 발갛고. 제 착각인 것을 알아채자마자 솔직한 반응에 다니엘은 속으로 웃었다. 냉하게 생겨서는 속은 맹탕인 것 같아서. 괜스레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면 중증이었다.
 
  "...미안해요. 예민한 얘기라서... 그나저나, 베타죠? 덕분에 살았어요. 알파라도 오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베타. 꽤 많이 듣던 이야기라 익숙했다. 향이 없는 꽃이 집안 내력인지라 동백이란 판정을 받았을 때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베타죠? 향이 없으니 다들 그리 말하지만 막상 러트가 되면 가장 골치인 게 조매화 계열이지. 다니엘은 자신의 사정은 뒤로 밀어둔 채 묘하게 꼬인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옆으로 비딱하게 기울였다.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어 그대로 물었다.
 
  "그쪽. 알파 아니에요?"
 
  다니엘은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듯 자신을 쳐다보는 옹성우를 마주 보았다. 그는 이어 허탈하게 웃어 보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각자 타고난 성질을 가진다. 크게는 세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알파, 하나는 베타 그리고 또 하나는 오메가다. 베타는 기본적으로 향이 없다. 향을 맡을 수도 없고 제 향을 낼 수도 없다. 그를 제외한 알파와 오메가는 자신만의 향을 가지고 있으며 본연의 향을 맡을 수 있다. 아직 의학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인간의 DNA는 식물의 체계와 조금 닮아있으며 그 향 또한 각 꽃과 같이 종류로 쉽게 가를 수가 있었는데, 다니엘은 희귀하다면 희귀한 무향무취의 조매화였다. 동백.

  인간이니 벌겋게 변할 수도 없고, 새를 어떻게 꼬여낼 지도 알 수 없는 그 조매화의 종류였던 다니엘은 예전부터 집안의 골칫거리였다. 사실 조매화라서 골칫거리라기 보단... 알파인데도 향이 없던 탓에 어릴 적부터 놀림을 받고 결국은 왕따까지 당한 적도 있어 비뚤어진 탓이 더 컸을 것이다. 아버지는 더 강하게 자라라고 채찍질했고 그게 불씨를 키운 탓 또한 있었겠지. 다니엘은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자라버렸고 향도 없는 게 더 독하다는 옛말을 실현시켜 보이기까지 한다. 뚝심 있는 어머니를 곧이 닮아버린 나머지 자신을 건드린 있는 집 자식 얼굴에 멍을 낸 적도 있었고 은근히 조매화를 비꼬는 하청기업 사장님 얼굴에 물을 쪼르르 준적도 있었으니까.
  순둥순둥한 얼굴이라고 해도 어릴 적부터 강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운동은 모조리 섭렵했던 그의 덩치 또한 순하지 않았다.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고, 무사히 대학에 들어가나 했더니 멋대로 휴학해버려 유학을 강요받고 있는 처지였고. 한창 그 일로 아버지와 다투고 있던 찰나인지라 어머니가 여행을 가자마자 전쟁은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홧김이었다. 홧김에 기자에게 거짓정보를 풀었다. 자신이 오메가를 임신시켰다는 내용이었고 어차피 거짓정보이니 적당히 아버지의 뒷목을 잡았다가 진실이 밝혀지고 모든 상황은 다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기자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걸로 아버지를 협박했다. 뒷목을 잡다 못해 돌아가실 뻔 했다는 이야기를 박비서님께 들었으니 일이 꽤 커졌다는 이야기다. 결국 기자에게 진실을 밝히고 그를 고소하지 않겠다는 조건 하에 모든 일을 묻었지만. 아버지의 화는 하늘을 치솟았고 강다니엘은 결국 도망을 나오셨다.
 
  일말의 과정은 이러했다. 다니엘은 죽상으로 CCTV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어머니가 오셔서 중간에서 도와주시기만을 기다리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일은 더 복잡해져 버렸다. 사실 본인의 사정으로 복잡해진 건 아니지만. 다니엘은 로비의 전면 유리에 담긴 밤도시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섰다. 그와 약속이 곧이었기에 손전등을 챙기면 선임들은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며 하품을 연신 했다. 팔자 좋은 사람들. 다니엘은 그들의 시선을 피해 곧장 5층으로 향했다.
 
  5층에 도착하면 자연스레 늘 발걸음이 가던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똑똑 두드리면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마자 책상에 걸터앉아 새벽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그가 있었다. 이 사람은 출근 걱정도 안하나. 모종의 새벽모임이 되어버린 그곳은 이제 미지의 영역도 아니었기에 다니엘은 자연스레 쇼파에 푹 앉았다. 그가 부탁한 검진서를 내밀면 그가 다가와 그것을 받아들었고 맞은 편 쇼파에 앉았다. 한참 내용을 훑어보던 그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왠지 모를 안쓰러움에 도와주기는 했다만, 뭔가를 잘못 건드린 건 아닐까. 다니엘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 제 뒷목을 긁적였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가 손목으로 눈가를 누르기 시작하면 다니엘은 멍하니 그를 보았다.
 
  "...저기요."
  "...예?"
  "당신은 지금까지 알파로 살았잖아요."
  "...네."
  "만약에 사실 오메가였다고, 누가 알려주면. 어떤 기분일 거 같아요?"
 
  다니엘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웅얼거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게 조심히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가온 인기척에 그가 얼굴을 들면 눈가가 붉었다. 붉다 해도 전처럼 야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애처로워서, 다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그의 어깨를 안아 도닥거렸다. 적어도 자신이 그걸 알았을 땐, 위로가 필요할 거 같아서. 도닥이면 그의 얼굴이 제 어깨에 닿았다.
 
  "...아마, 내는. 그렇게 만든 새끼를 조지려고 하겠죠.“

  그 이야기에 옹성우는 어깨 위에서 잘게 떨며 웃었다.
 
  자신이 오메가인줄 알았던 알파 옹성우의 사정은 간단하고도 복잡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적 부모님을 사고로 잃었던 옹성우는 유일한 친인척이었던 삼촌 밑에서 자라왔다고 한다. 현대 사회라고 하더라도 아직 기업계에는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차별이 성별에 대한 차별만큼 뿌리 깊었던 지라 성인이 되어서도 오메가였던 옹성우는 회사를 물려받지 못했고 여전히 삼촌의 수하에서 살아왔다고 했다. 분명 삼촌이라는 작자가 옹성우의 기록을 위조했을 것이라 옹성우는 예측했다. 알파 옹성우 대신 오메가 옹성우를 만들어야 회사가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당연하게도 옹성우는 어릴 적부터 세뇌 당하듯 오메가의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그가 특별하게 지어준 약을 먹으며, 러트를 히트사이클이라고 오해하며. 그렇게 철저히 오메가라 무시당하며 살아왔고 그 날은 삼촌이 있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괜히 일을 더 하고 있던 새벽에 러트가 터졌다고 한다. 외양답지 않게 실수를 해 약을 책상 밑에 떨구었고. 러트는 점점 심해져 오고, 약은 손에 닿지 않고. 결국 끙끙거리며 바닥을 기고, 공포감에 절어 당장 죽고 싶어졌을 때. 강다니엘이 그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삼촌이 지어준 약은 당연하게도 러트에 관련된 약이었다. 다니엘은 부러 약에 대한 소견서까지 챙겨 그에게 전달했고 옹성우는 24년 만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리다면 아직 어릴 나이인데, 라고 스물세 살의 강다니엘은 생각했다.
 
  웃다가도 다시 충격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한참을 공황장애라도 온 듯 숨을 헐떡이던 그가 숨을 고르고, 겨우 그 박자가 잦아들었을 때. 성우는 곧 다니엘의 어깨에서 제 얼굴을 떼어냈다. 바닥만 바라보며 다시 숨을 고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니엘은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 넋이 나가버려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금방 울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나 좀 더 도와주면 안돼요...?"
 
  다니엘은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가 분명 울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 것만 같았다. 그가 다시 운다면. 다시 젖은 얼굴로 저를 쳐다본다면. 진짜 사람이 돌아버릴 수도 있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휙 끄덕였고 옹성우는 그의 긍정적인 반응에 작게 웃었다.
 
  모종의 새벽모임을 파하고. 다시 돌아와 근무를 하고. 아침이 되어서야 자려고 누우면 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늘상 우는 얼굴이었는데, 그 날은 유난히도 밝게 웃던 얼굴이었다. 우는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던 강다니엘이었지만, 웃는 것도 미치겠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 날은 그렇게 잠을 설쳤고, 그가 나오는 꿈을 꿀 수도 없을 정도로 날을 새고 나면 창문 너머로 다시 해가 졌다. 출근은 해야 했기에 결국 그렇게 일어나 세수를 하려 거울을 쳐다보았다. 벌써 어두운 그늘이 눈 밑으로 져 있었다.
 
  이러다간 백합 향에 질식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고 곧 그게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

B


  그의 옆에 있으면 코가 마비된 것만 같다. 유난히 그랬다.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는데, 코가 얼얼했다. 성우는 멍하니 다니엘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문득 그 새벽에 제 입가로 물을 흘려 넣던 그의 얼굴이 생각나면 괜스레 시선을 돌렸다. 제 귓가가 발갛게 오른 지도 모르고 그가 가져온 증거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척 했다. 강다니엘, 이라고 했던가. 스물세 살이라고 했던가.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문장들은 시선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눈길이 자꾸 그에게로 가 붙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정말 미쳐버렸을 수도 있겠다.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자신을 지탱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믿었던 삼촌이 자신을 그렇게 배신했을 때, 문득 외로웠던 자신이 삼촌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했던 모든 짓들이 생각났다. 뭐든지 열심히 했었다. 어릴 적부터 공부도 열심히 했고 일도 열심히 했고. 그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 잘해냈다. 그럼에도 오히려 자신을 징그럽다는 듯 쳐다보던 그 눈길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오메가여야 하는, 그리고 더 무능력했어야 했던 조카가 너무나도 잘 자라주었으니까. 그 사실이 문득 다가오면 겁부터 났는데, 그 상황을 유일하게 지켜보던 강다니엘이 말했다. 아마, 내는. 그렇게 만든 새끼를 조지려고 하겠죠. 그 순간 겁은 분노로 올바르게 옮겨 붙었고 나중에는 억울하기까지 했다.
 
  젊다면 젊은 나이였다. 젊은 나이에도, 오메가임에도 불구하고. 석사과정을 빠르게 마치고 삼촌을 도우며 살던 성우는 머리가 꽤 좋은 편이었다. 중요한 약을 책상 밑에 굴려 보낼 정도로 칠칠맞았지만 그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그는 자신이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차분히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혹여 라도 추적당할까 싶어 다니엘의 손을 빌려 증거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삼촌의 주식 지분을 확인하고 자신의 지분과 주주들의 지분을 확인하고. 어떻게 그를 엎어버려야 할까 고민을 하느라 골머리가 아파오면 눈앞에 무언가가 들이밀어졌다. 단 내. 코코아였다.
 
  "그쪽은 오메가 냄새 맡아본 적도 없죠?"
 
  성우는 멀뚱히 그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이곤 잔을 받았다. 홀짝이면 입 안이 금방 달아졌고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그쪽처럼 그렇게 위협적으로 독하진 않아요. 침이 고일 정도로 달지."
  "...내가, 그렇게 독해요?"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면 무언가 묘한 기분이었다. 왠지 모르게, 실망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실망스러운 평가라도 당한 것처럼. 성우는 제 기분을 모른 척하곤 잔만 홀짝였다. 자신의 앞에서 서류를 가져가 읽던 다니엘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시선을 굴렸다.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들여다보던 성우는 문득 자신이 그를 쳐다보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다시 쫓기듯 제 서류 위로 쳐다보았다. 그를 보지도 않는데, 그의 시선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온 몸의 촉각이 곤두서는 느낌. 그런 느낌이었다.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시계 초침 소리마다 몸이 잘게 떨릴 것만 같은 느낌.
 
  그는 흔쾌히 자신을 도와준다고 했다. 처음 그를 본 날의 새벽과 같았다. 우연히 발견한 자신을 쉽게 도와주는 그의 심성. 자신을 도와주는 것은 그저 그 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 보는 이의 복잡한 사정까지 이해하고 도닥이고 도와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삼촌의 노골적인 방해로 인해 친구라곤 사귀어본 적도 없고, 업무 외에는 사람을 제대로 가까이 해본 적도 없던 성우에게 그의 등장은 조금 센세이션이었다. 친구란 게 이런 감정이던가, 문득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좁은 옹성우의 세계에서 그에 걸 맞는 답을 쉽게 찾기는 어려웠고 강다니엘은 여전히 미지의 인물이었다.
 

  어느 날은 다니엘이 말했다. 내가 어릴 때는 지금보다 귀신을 더 무서워해가. 어머니가 동화를 엄청 읽어줬거든요? 그러면서 동화책을 뭉텅이로 전해줬다. 제 불면증을 언제 알아챈 것인지, 수면에 좋다는 건 죄다 가져와 탁상 위로 올려두기까지. 다니엘은 성우에게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멀뚱히 그를 바라보다 소동물처럼 경계하면 다니엘은 픽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그 눈이 문득 안심돼서. 성우는 결국 그의 곁으로 가 앉았다. 누워요, 하면 이 세상에 그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처럼 얌전히 말을 들었다. 그의 다리에 머리를 뉘이면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그게, 아인데. 중얼거리면서 시선을 굴리다가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제 눈을 감겨왔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지나가면 그렇게 눈이 감기고, 세상은 온통 까맸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옛날 옛적에, 부부가 살았다고 한다. 임신을 하게 된 아내는 마녀가 키우던 양배추를 탐냈고 남편은 몰래 그것을 훔쳐 아내에게 먹였다고 한다. 아내는 또 양배추를 먹고 싶어 했고 남편은 아내를 위해 다시 마녀의 밭에 가고야 만다. 허나 그 때 마녀에게 들키게 되고 태어날 아기를 준다면 용서해주겠다 하여 이를 승낙해버린다. 아이가 태어나고, 마녀는 약속대로 아이를 데려가 키웠다. 그 아이의 이름이 라푼젤이라고 했다.
 
  성우는 실눈을 떠 다니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순한 얼굴이 동화책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묘하게 날카로운 분위기였다. 그런 얼굴로 집중하며 읽는 게 동화책이라니. 묘하게 웃음이 났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소리를 막기 싫었다. 조용히 숨을 골랐다. 조금씩 잠이 몰려오는 것도 조금 신기할 정도였다.
 
  라푼젤은 그렇게 출구 없는 마녀의 탑에서 자라났고 그녀의 머리는 끝도 없이 자라났다고 했다. 마녀는 그녀의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를 창가에 늘여 그곳을 드나들었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왕자가 그 광경을 발견했고 똑같이 머리를 타고 오르다 라푼젤을 만나게 된다.
 
  일어나면 아침이었다. 그 때처럼 일어나면 제 몸엔 담요가 덮어져 있었고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제 앞에 가지런히 놓인 서류들만이 그의 존재를 증명했다. 성우는 힘없이 천장을 바라보다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왕자와 라푼젤은 어떻게 되었더라?
 

 
-

 
  다니엘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했다. 주주들과 성우의 지분을 모아도 조금 모자란 데다 주주들의 지분을 전부 모을 수 있다는 가망도 없었기 때문에 좌절하던 상황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이용할 수 있다고. 자신을 믿어달라고 했다. 이젠 그 밖에 믿을 사람이 없는데, 그는 믿지 않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는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믿어달라고 했고 성우는 알겠다고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그는 사라져 버렸다.
 
  차라리, 믿지 않겠다고 말할 걸 그랬나보다. 성우는 며칠 째 보이지 않는 그를 찾다가 결국 경비실까지 내려갔었다.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성실한 청년이었는데, 아쉽다고 토로하는 경비실장을 바라보다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사무실로 다시 올라갔다.
 
  무서워서 집에 다시 돌아갈 순 없었다. 이상하게 여기던 삼촌이 찾아와 말을 걸었을 때만큼은 온 힘을 짜내 연기했고 잘 넘어갔지만, 혼자 버텨내는 시간은 점점 한계를 보여 가고 있었다. 그가 경비실에서 지내왔던 것처럼 자신 또한 늘 사무실에서 지내왔다. 늘 열심히 하던 그였으니, 삼촌은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지 그저 그가 일에 미쳐버렸다고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잘 챙겨 먹으라며 보내준 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성우는 그것을 한 움큼 집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생애 처음으로 부리는 신경질이었다. 표현이었다. 가슴이 계속 뛰어 진정할 수 없었다.
 
  불면증도 점점 심해져 일주일을 세 시간 취침으로 버티던 중, 이대로는 그가 돌아오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우는 그가 전해주었던 동화책 더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창문 너머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결심한 듯 동화책 더미로 걸어가 라푼젤을 꺼내들었다. 그가 돌아오면 마저 읽어달라고 하려 했었다. 그 땐 너무나도 쉽게 잠이 들어, 결말을 듣지 못했으니까. 쇼파에 그대로 누워 책을 펼쳤다. 그가 보았을 삽화들을 하나 둘 넘기다가, 라푼젤과 왕자가 사랑에 빠졌음을 알았다.

 
  라푼젤과 왕자는 사랑에 빠졌다. 왕자는 아름다운 라푼젤을 찾아 탑을 드나들었고, 마녀는 결국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가 난 마녀는 라푼젤의 머리를 잘라버리고 그녀를 들판으로 내쫓았다. 왕자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라푼젤을 찾아왔고 마녀는 왕자를 가시덤불에 떨어뜨려 눈을 잃게 만들었다.
 
  성우는 가시덤불이 그려진 장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동화책을 덮었다. 제 눈을 잃은 것처럼 눈가가 뜨겁기만 해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표지의 라푼젤 위로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평생 탑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꾸 그런 기분이 들었다.
 

 
-

 
  그렇게 2주가 지나고. 기억 속 그의 얼굴은 점점 흐려지기만 했다. 그의 목소리를 잊지 않기 위해 동화책을 읽고 읽어도, 점점 그의 목소리가 제 목소리를 닮아가기만 했다. 이젠 병적으로 사무실에서 나오지 않는 그 때문에 삼촌은 그를 자주 찾아오기 시작했다. 괜찮다며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예의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그러다 병에 걸린다고 했다. 당분간은 입원하며 몸을 살피라는 이야기에 하얗게 질린 성우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카락이 잘린 라푼젤은 들판으로 내쫓기고, 왕자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라푼젤을 찾아온다. 마녀는 왕자를 가시덤불에 떨어뜨려 눈을 잃게 만든다.
 
  어릴 적에도 들어본 적 없는 동화내용에 집착하게 된 것도, 정말 삼촌의 말대로 다 병일지도 몰랐다. 제 앞길이란 걸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몰라서. 금발머리 소녀에게 자신을 이입한 채 결국은 쫓겨날 거라 겁에 질려 사는 것도. 다 병일지도 몰랐다. 성우는 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가 작게 숨을 골랐다. 이내 삼촌을 노려보았다. 제 말을 곧이 잘 듣기만 하던 옹성우가 처음 내보이는 표정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무슨 일이냐며 금세 윽박을 질러왔다. 그렇게 만든 새끼를, 조져요. 성우는 그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차분하게 숨을 골랐던 그 박자대로 다시 숨을 고르고, 조금씩 가쁜 숨이 멎어 가면 차가운 머리로 움직였다. 이미 사본은 충분히 만들어둔 뒤였다. 책상 서랍을 열고 진단서를 가져와 그의 얼굴에 던졌다.
 
  예전에 인터넷을 찾아본 적이 있는데. 마녀는 불에 타면 죽는다고 했다. 라푼젤은 이를 악 물었다.
 
 

-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증거들을 넘겼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다시 말끔한 얼굴로 주주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삼촌 또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인지 몇몇 주주들은 아예 걸쇠를 내 걸은 채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고독한 싸움이었다. 다시 사무실에 돌아오면 라푼젤을 제외한 다른 동화책들을 정신없이 읽다 지쳐 잠들기 일쑤였다.
 
  그러다 어느 날. 잠에서 깨면 햇볕이 눈 부셨다. 더 잘까. 고민했지만 일어나야 했다. 몸을 움직이면 덮여있던 담요가 툭 떨어졌다. 개구리 왕자를 읽다 또 담요도 덮지 못한 채 잠에 들었는데. 성우는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자리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있었다. 멍하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를 보고 있으면, 제 인기척에 의자가 돌았다. 한쪽 뺨이 거하게 부어있어 성우는 저도 모르게 튕겨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뺨을 감싸 쥐면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민망하다는 듯 웃어보였다.
 
  "뭐야. 뺨 왜 이래? 어?"
  "내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던 그가 버릇처럼 제 눈썹을 긁적거렸다.
 
  "아버지한테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도 된다고 캤더니. 씨게 한 방 날리고 마시더라고요. 낫고 보려고 했는데 안 낫네..."
  "아버지?"
 
  다니엘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제 자켓 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을 꺼내 보여주었다. 성우는 경쟁사명과 그의 이름을 한 번에 읽어내곤 또 다시 멍한 얼굴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다니엘은 뿌듯하다는 얼굴로 명함을 흔들다가 다시 지갑에 넣었고 자켓에 넣어 제 가슴께를 톡톡 두드렸다. 이내 이어지는 말은 더 현실감이 없었다.
 
  "우리 외국갈래요? 내 유학가야 하는데, 혼자는 안 간다."
 
  개구리왕자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기만 했다.
 
 
  개인으로 부딪히는 것과 기업으로 부딪히는 것. 어느 쪽이 더 영향력이 있는 지는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알 것이다. 성우는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다니엘의 회사 쪽으로 기운 주주들을 조금 배신감에 차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자신 또한 이 회사에 그다지 애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무너져가는 것을 바라보자니 조금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표정 관리 못하는 삼촌을 바라보는 것만큼은 꼬셨지만.
 
  공판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승기는 성우 쪽으로 기울었다. 재판도 도와준다던 다니엘의 도움을 거부하고 순전히 제 힘으로 모든 것을 이어나갔다. 더 이상 빈 집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니엘의 권유로 새 오피스텔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새 집. 처음으로 탑에서 벗어난 성우는 거실 한가운데에 서 멍하니 있다가 엉엉 울었다. 저를 쳐다보던 다니엘이 다가와 안아주면 더 서러워져서 거의 기절하기 직전까지 울었던 것 같다.
 
  성우는 쇼파 위에 누워 다니엘의 허벅지를 벤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 울고 난 뒤의 발간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다니엘은 자신을 줄곧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굴렸다가 다시 쳐다보아도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조금 민망할 정도여서, 시선만 이리저리 맴돌다 중얼거렸다.
 
  "동화책, 다시 읽어줘..."
  "...어떤 거요?"
  "라푼젤. 읽어주다 말았잖아."
 
  성우는 그곳을 벗어나듯 동화책을 찾아 나섰다가 찾아내면 다시 다가와 모른 척 그의 다리에 또 머리를 베고 누웠다. 다니엘은 동화책을 받아들어 기억을 되짚어 페이지를 펼쳤다.
 
  "왕자가 눈이 머는 것까지는 봤는데... 그거 새드엔딩이야?"
 
  다니엘은 심각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하나 둘 넘기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피면 해피라고, 새드면 새드라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 끝까지 넘기고 나면 조금 불안할 정도였다. 성우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제 두 손을 맞잡고 꼼지락거렸다. 가만히 책만 쳐다보고 있던 다니엘은 동화책의 중간 부분을 찢어내기 시작했다. 손에 돌돌 말더니 휴지통 쪽으로 각을 잡고 휙 던지면 골인이었다. 다니엘은 펼친 부분을 성우가 보기 좋게 돌려 보여주었다. 라푼젤과 왕자는 사랑에 빠졌고 중간 이야기는 그렇게 뜯긴 채 곧장 라푼젤의 눈물로 시력을 회복한 왕자는 라푼젤과 두 아이와 함께 자신의 나라로 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동화책의 결말을 읽다 그를 쳐다보면 그는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우는 그에게서 동화책을 가져와 제 얼굴에 덮은 채 푹 눌렀다.
 
  "난 옛날부터, 내가 알파였음 좋겠다고.... 매일같이, 생각했는데..."
  "..."
  "...널 보고, 다시 오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
 
  러트라도 온 것처럼 잔뜩 몸에 열이 올랐다. 얼굴도 발갛게 올랐을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동화책을 꾹 누르면 제 손 위로 커다란 손이 올랐다. 그 때의 촉감 그대로였다. 제 눈을 감기던, 그 커다랗고 따뜻한 손.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동화책에서 손을 떼고 나면 제 얼굴을 짓누르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 눈을 꾹 감고, 뜰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시선이 느껴졌고, 나지도 않는 그의 향에 코가 얼얼한 기분이었다.
 
  "...나처럼 독한 향은, 싫잖아."
 
  웅얼이듯 내뱉으면, 입술 위로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닿았다. 조금 놀라 제 주먹을 꾹 쥐었지만 역시 눈은 뜨지 못했다. 혀가 굳게 닫힌 입술 위를 쓸어내면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이 온전히 제 입가에 완전히 맞물리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의 손이 저를 어르듯 제 손을 감싸 쥔 그대로 엄지로 문질렀다. 성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가로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곧장 들려왔다.
 
  "무슨 꽃이던, 무슨 상관이야. 뿌리내리면 끝이에요."
 
  너는 왜 이렇게 나를 파고들까.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동백의 빨간색처럼, 성우는 제 온몸이 조용히, 발갛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

 

 


  여름. 비행기 안은 시원했으나 그래도 열 시간도 넘는 비행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지 오래였다. 성우는 쭉 몸을 늘여 기지개를 켰다가 졸음에 겨운 얼굴로 하품을 했다. 한국보다는 덜 습하고 그나마 기온도 낮은 편이라 여름이라고 하더라도 이곳은 살만해 보인다. 다행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한국에서의 숨 막히는 모든 일을 끝내고 휴가처럼 온 곳인지라 더 가슴이 트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또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시작점이나 다름없었지만. 기분이란 게 그랬다.
 
  자신의 회사는 병합되어 사라져버렸고 옹성우 뒤에 따라 붙던 직함 또한 사라진지 오래였다. 늘 해보고 싶었던 다른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제 옆에 캐리어를 쥔 채 선, 똑같은 처지의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본의 아니게 경영 공부를 시작하게 된 강청년은 선글라스를 낀 채 불만스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습관처럼 저를 쳐다보며 웃으면 괜히 또 귓가가 따끈했다.
 
  "그거 알아요?"
  "...뭐?"
  "여기선 알파랑 알파도 결혼할 수 있던데. 내 그거 하나 믿고 왔다."
 
  성우는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다니엘은 그를 보고 씩 웃더니 곧 앞으로 도착하는 차를 보곤 걸어 나갔다. 성우는 가만히 서 있다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를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트렁크가 열리고, 그는 나서서 혼자 끌고 있던 캐리어를 전부 실었다. 이내 성우에게 다가와 양 볼을 감싸 쥐었고 그대로 얼굴을 올려 시선을 마주쳤다.
 
  "우리 고양이나 두 마리 키울까요?"
 
  성우는 그가 만들었던 동화의 엔딩을 떠올렸다. 라푼젤과 왕자, 두 아이는 왕자의 나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였고 다니엘은 그럴 줄 알았다며 작게 웃었다.
 
  곧 그들은 그들의 나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