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월간녤옹

 

 

 

 

새벽이 밝으면 아침이 온다 

컨씰

 

 

 

 

 

 

 

 

 

성우는 창고를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무장을 점검했다. 총과 여분의 총알, 수류탄 몇 개와 창 한 자루. 몇 년 째 반복해온 일이지만 허투루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일개 생존자에 불과한 성우가 만만히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외계에서 온 몬스터들은.

 

어느 날 뉴욕 한가운데 포탈이 열렸다. 그 정체를 알아내기도 전에 외계의 생명체가 포탈을 넘어 지구에 당도했다.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러 이곳에 왔노라고, 외계인의 수장이 선언했다. 인간이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가마다 비상시국을 선포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총알, 폭탄, 미사일로도 외계인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인간보다 지혜로웠고, 마법이라는 특이한 힘을 사용했다.

 

일 년도 되지 않아 온 지구가 외계인의 손 안에 들어갔다. 외계인이 지구인을 다스리는 계급사회의 부활이었다. 외계인은 스스로를 알파로, 지구인을 베타로 구분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오메가가 있었다. 알파와 베타의 가장 큰 차이는 마법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알파와 알파 사이에서는 알파가 태어났고, 알파와 베타 사이에서는 베타가 태어났다. 지구인의 피가 섞인 아이들은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처음에 알파들은 알파끼리만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 수가 워낙 적다보니 문제가 생겼다. 그 대책이 바로 오메가, 즉 알파를 낳을 수 있는 지구인이었다. 몇 년에 걸친 생체실험 끝에 얻은 결과였다. 이들은 스스로 마법을 쓸 수는 없었지만 마법을 쓰는 알파를 낳을 수는 있었다.

 

세상은 도시와 도시 바깥으로 나뉘었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알파와 오메가, 소수의 베타가 거주하는 유토피아였다. 선택받지 못한 베타들은 성벽 밖에서 외계에서 넘어온 몬스터와 싸워야 했다. 알파들은 도시에 틀어박혀 베타를 돕지 않았다. 문명이 무너지고 약육강식의 세계가 도래했다. 하루하루 생존하는 게 일이었다.

 

성우는 베타 중에서도 좀 특이한 경우였다. 점검을 끝낸 성우가 무기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웠다. 알파의 특권이라는 마법이었다. 도시에서 추방된 늙은 알파에게 식량을 주고 배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한 일이었다. 마법이 없었다면 살아남기가 배로 힘들었으리라.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성우의 어머니는 소집에서 누락된 오메가였다고 했다. 베타와 오메가의 아이인 성우는 어찌된 일인지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성우는 낡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안전지대를 가로질러 샛길로 접어들자 눈앞에 반쯤 무너진 벽돌 건물이 보였다. 성우는 자전거를 끌고 건물의 지하로 내려갔다. 아래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저 왔어요."

", 성우 왔어?"

 

 

방에 들어서자마자 중년의 남자가 성우를 맞이했다. 건물의 주인이자 B구역 안전지대의 대표인 현호였다. 고아가 된 성우를 이 안전지대에 받아준 사람이기도 했다. 방을 둘러보니 확실히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아마 그 이유는…….

 

 

"오랜만이에요, ."

 

 

사람들에 둘러싸여 웃고 있던 다니엘이 성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성우는 다니엘을 무시하고 현호에게 말했다.

 

 

"배급관이랑 연락이 안 돼가지구 그런데, 따로 연락 온 게 있나 해서요."

"아니, 나도 연락받은 건 없는데."

 

 

현호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배급관은 A, B, C 안전지대를 대표해서 생활용품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사람이었다. 이번 달에는 성우가 물품을 받아오기로 했는데, 며칠 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럼 제가 한번 찾아가 볼까요?"

", 그래 주겠니?"

 

 

현호가 반색하며 성우를 보았다. 배급 창고로 가는 길은 특별히 위험하지 않았다. 때때로 몬스터가 출몰하긴 했지만.

 

 

",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

"내도 데려가요."

 

 

새로운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성우가 뒤로 돌아섰다. 언제 빠져 나왔는지 몇 걸음 앞에 다니엘이 서있었다. 뒤에 남겨진 이들이 성우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싫은데."

 

 

다니엘이 짧게 혀를 찼다. 어린애를 보는 눈빛이라 성우는 기분이 나빠졌다. 다니엘이 말했다.

 

 

"왜요."

"싫은 데 이유가 필요해?"

 

 

내가 알파라서 그렇죠. 다니엘이 정곡을 찔렀다. 성우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순순히 인정했다. 어차피 다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래."

 

 

쓸모없는 베타가 버림받는 게 당연한 사회. 다니엘은 그 사회에 반기를 든 유일한 알파였다. 처음 다니엘이 성벽을 나와 이 지역에 나타났을 때, 그는 스스로를 베타라고 소개했다. 진실은 이년 뒤, 대규모 습격이 있던 날에서야 밝혀졌다. 다니엘이 마법을 쓰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왜 안전한 도시를 떠나왔냐는 질문에 다니엘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건 옳지 않으니까요.

 

그 뒤로 다니엘은 베타들의 우상이 되었다. 성우를 제외하고.

 

 

"그럼 말죠, ."

 

 

다니엘은 두 번 권하지 않고 물러났다. 굳이 따라오겠다던 사람치고 포기가 빨랐다. 성우의 표정을 보더니 다니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조를 줄 알았나."

 

 

아니라고 하려다 말고 성우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것으로 대답을 짐작했는지 다니엘이 옅게 웃었다.

 

 

"됐다. 다음에 봐요."

 

 

그러더니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둘만 남게 되자 성우가 현호에게 인사했다.

 

 

"그러면 전 이제 가볼게요."

"그래."

 

 

현호는 다니엘과 성우를 번갈아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성우는 굳이 묻지 않았다.

 

 

*

 

 

자전거는 건물 안에 남겨두고 나왔다. 지금부터는 도보로 가는 편이 나았다. 길도 험했을 뿐더러 언제 몬스터가 덮쳐올지 몰랐다. 성우는 몸을 낮추고 뛰듯이 걸었다. 언젠가 다니엘이 가르쳐준 방법이었다.

 

 

'제발 좀.'

 

 

걔 생각 좀 하지 말자. 성우는 머리에서 다니엘을 지우려다 말고 포기했다. 둘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성우는 이년을 다니엘과 함께 살았다. 사람의 관계라는 게 신기해서, 이년 만에 생면부지의 남이 둘도 없는 친구로 바뀌기도 하고, 그 친구가 하루 만에 천하의 원수가 되기도 했다. 이년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지냈으니, 남아있는 흔적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성우는 애꿎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싶었다. 다니엘 때문에.

 

성우는 알파를 싫어했다. 물론 다니엘은 선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라면 삐뚤어진 세계를 바로잡을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근처에서 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우는 재빨리 총부터 빼들었다. 대여섯살 아이만한 몬스터가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몬스터가 성우를 덮치는 것보다 성우가 방아쇠를 당기는 게 더 빨랐다. 총알이 급소에 직격했는지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성우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몬스터가 비명을 듣고 몰려오기 전에.

 

창고에 도착한 성우가 인기척부터 살폈다. 시계 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감이 좋지 않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행여 배급관이 잘못되었더라도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성우는 등이 긴장으로 젖어드는 것을 느끼면서 문을 열었다.

 

 

이제 왔어?”

 

 

낮선 목소리였다. 성우는 바로 총을 겨누었으나 상대가 더 빨랐다. 눈 깜박할 사이에 몸이 창고 벽에 처박혔다. 미처 대응할 시간도 없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고통에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몸을 일으키려 해도 무형의 힘이 팔다리를 옥죄고 있었다.

 

 

뭐야, 반반하잖아?”

 

 

성우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노려봤다. 훤칠한 체격에 색이 옅은 머리, 하얀 피부. 갸름한 턱선과 길고 날카로운 눈매가 성우가 아는 누군가를 닮아있었다. 남자는 계속 혼자 떠들었다.

 

 

우리 동생이 끼고 있는 베타라길래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동생? 성우의 머릿속에 다니엘과 남자를 잇는 직선이 생겼다. 어느새 몇 걸음 앞에 선 남자가 성우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뭐라고 말 좀 해봐. 풀어달라든지.”

배급관은 어떻게 했어.”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바로 주먹이 날아왔다. 배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성우가 비명을 삼켰다. 남자가 빈정거렸다.

 

 

건방지게 어디서 반말이야. 그리고 지금 남 걱정할 땐가?”

 

 

차갑고 건조한 손이 성우의 턱을 쓸어내렸다. 목뒤로 소름이 돋았다. 성우는 남자의 눈에서 저열한 욕망을 읽었다. 난 베타야. 성우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남자가 턱을 만지던 손을 들어 성우의 뺨을 내리쳤다.

 

 

베타와 오메가 혼혈이지. 그리고 존댓말.”

 

 

일순간이지만 뺨의 고통을 잊을 정도로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성우의 어머니가 오메가라는 것은 세상에 단 세 사람 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중 두 명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성우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고 남자가 비웃었다.

 

 

우리가 모르는 건 없어. 그게 동생의 애인이라면 더더욱.”

 

 

우리, 라는 말을 성우는 허투루 듣지 않았다. 다니엘의 뒤에 생각보다 커다란 배경이 있는 모양이었다. 좀 더 찔러볼까. 하지만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남자가 성우의 셔츠에 손을 올렸다.

 

 

그럼 이제 좀 다른 대화를 해볼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치솟은 그림자가 가시 넝쿨로 변해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남자가 당황하자 성우를 묶고 있던 마법이 풀렸다. 그 틈에 성우가 열린 문으로 달음박질쳤다.

 

 

이 새끼가!”

 

 

알파의 영역에 발을 걸쳤지만 베타는 베타. 필사적으로 마법을 썼지만 남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충분히 거리를 벌리기도 전에 넝쿨에서 빠져나온 남자가 성우를 뒤쫓았다. 따라잡히는 것은 금방이었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을 마지막으로 성우는 정신을 잃었다.

 

 

*

 

 

계단참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혼자 건물을 지키던 현호가 위스키를 마시다 말고 시간을 확인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세시를 가리켰다. 강도인가. 현호가 벽에 걸린 기관총을 집어 드는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에요, .”

 

 

다니엘의 목소리였다. 현호는 총을 내려놓고 문으로 다가갔다. 잠금장치는 간밤의 추위로 차게 식어있었다. 현호가 걸쇠를 풀자 겨울의 찬바람이 안으로 밀려들었다다니엘은 텅 빈 복도를 등지고 서늘하게 서있었다.

 

 

"니엘아.“

 

 

다니엘이 웃음기 없이 대답했다. . 현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새벽 세시야, 인마. 난 또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 다니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는 시간에 맞춰 올 게요. 그건 그렇고…….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것을 현호는 직감했다. 다니엘이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걸어 한밤중에 찾아온 이유, 다니엘이 말했다.

 

 

성우 형 어디 있는지 알아요?”

"글쎄……." 

 

 

현호는 뜻밖의 말에 놀라 말꼬리를 흐렸다. 설마 다니엘이 성우의 행방을 물을 줄은 몰랐다. 다니엘이 알파인 게 밝혀진 순간부터 멀어진 두 사람이었다. 성우는 아예 다니엘을 무시했고, 다니엘도 마주칠 때나 인사를 했지 굳이 성우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배급창고로 간다던 성우한테서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라. 춥다."

"아니요. 어디 가볼 데가 있어서……. 실례합니다."

 

 

다니엘은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인사도 듣지 않고 위로 올라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현호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정말. 그나저나 성우 녀석, 어디 잘못된 건 아니겠지현호는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조급함에 온몸이 마비될 것 같았다. 다니엘은 마법의 힘으로 건물 사이를 순식간에 뛰어넘었다. 머리 한구석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통증이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강의헌.’ 같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유일한 형제기억 저편에 묻어둔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두통이 기승을 부렸다. 다니엘과 의헌은 단순히 피가 이어진 형제가 아니었다. 이란성 쌍둥이인 그들은 마법과 영혼의 일부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이를 악물고 의헌의 영혼에 강제로 접속했다. 고통이 폭죽처럼 터지면서 낯선 감정과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자아의 벽이 무너지는 느낌은 언제 겪어도 달갑지 않았다. 다니엘은 어지럽게 늘어진 환각 속을 파고들어 의헌의 생각을 읽었다. 환희, 흥분, 분노…….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순간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집중이 흩어지자 연결도 바로 끊어졌다. 다니엘은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외계 문명이 지구에 자리 잡으면서 마법은 많은 부분에서 전기를 대체했다. 다니엘이 들고 있는 핸드폰만 해도 그랬다.

 

 

"찾았어?"

"그게, ... 아니요. 도저히……."

 

 

역시나. 다니엘은 귀에 꽂고 있는 도청기를 만지작거렸다. 이쪽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가만히 대기하고 있어.”

"?"

 

 

다니엘은 통화를 끊고 아예 핸드폰의 전원까지 꺼버렸다. 옹성우. 아까부터 입안에 맴돌던 이름을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그것만으로도 통증의 일부를 잊을 수 있었다. 옹성우가 사라진 이후로 벌써 삼사일이 지났다. 때맞춰 의헌이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시기가 공교로웠다. 그리고 방금 확신을 얻었다. 성우의 실종에 의헌이 어떻게든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하는 수 없지. 다니엘은 저 멀리 보이는 성벽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직접 들어갈 수밖에. 세상에 완벽한 방어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니엘은 성벽의 허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만 그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제발 무사하기를. 다니엘은 눌러두었던 힘을 한꺼번에 풀어버렸다. 베타들 사이에 알려진 바와 다르게, 다니엘은 단순한 알파가 아니었다. 갈색의 눈이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알파들 사이에서 극성 알파라 불리는, 선택받은 이들의 상징이었다.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새 한마리가 다니엘이 있던 자리에 내려앉았다. 새는 잠시 주위를 살피고는 느긋하게 벌레를 찾아 돌아다녔다. 옥상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

 

 

몇 걸음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 남자인가. 성우를 이곳으로 납치해온 남자는 스스로를 의헌이라고 소개했다. 다니엘의 쌍둥이 형, 강의헌. 고작 하루 만에 성우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자 성우가 몸을 떨었다. 눈이 가려져 있는데도 얼굴을 찌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집 부리더니. 이럴까봐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곧이어 따뜻한 체온이 다가오더니 눈을 가린 안대를 떼어냈다. 성우는 얼빠진 얼굴로 부신 눈을 깜박거렸다. 다니엘?

 

 

뭘 잘했다고 이름을 불러요.”

 

 

다니엘은 투덜거리면서 성우를 묶고 있는 사슬을 화염으로 끊어냈다. 성우는 아직도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어 물었다. 정말 다니엘이야? 그렇다니까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성우가 자신을 부축하는 다니엘을 밀어냈다. 내가 걸을 수 있어.

 

 

그래요?”

 

 

다니엘이 손을 떼자마자 성우가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위에서 다니엘이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었다. 쓸데없는 자존심 부리지 말고 내 손 잡아요. 성우가 망설이자 다니엘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뒤돌아 앉았다. 안 되겠다. 그냥 업혀요. 성우는 널찍한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진짜 나 때문에 여기 온 거야?”

그럼 내가 여기 왜 와요. 어떻게 도망친 곳인데.”

 

 

성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다니엘에게 목숨을 빚지고 말았다. 나를 납치한 건 너네 형인데, 왜 네가 날 구하러 와? 묻지 못한 질문만 혀끝에 맴돌다 사라졌다.

 

다니엘은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 바로 성벽에서 몇 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이동했다. 안전지대까지는 아직 한참을 더 가야했다. 극성 알파인 다니엘은 강력한 마법사였지만, 성우까지 데리고 더 멀리 이동하는 것은 무리였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다니엘이 불꽃을 피워 올렸다. 다니엘과 성우에게 달려들던 사람들이 마법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 역시 대비를 해뒀나다니엘은 자신을 제일 잘 아는 이가 의헌이라는 점에 헛웃음을 흘렸다.

 

 

"죽어!"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사방에서 병사들이 튀어나왔다. 의헌이 날 죽이라고는 하지 않았을 텐데. 일이 귀찮게 됐다. 다니엘은 기절한 성우를 고쳐 업었다. 그때 난데없는 총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이 쏟아지자 병사들은 밖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재빨리 뒤로 물러난 다니엘이 지원군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현호와 방어대의 일부였다.

 

 

성우는 괜찮고?" 

.”

 

 

다니엘이 거리를 벌리자마자 현호가 수류탄의 핀을 뽑아 던졌다. 병사들이 황급히 흩어졌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역시 지원군이 있는 편이 좋다. 중간부터는 다니엘도 함께 거들었다.

 

 

빨리 이동하죠.”

 

 

시간을 끌다가 알파들까지 나오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다니엘은 서둘러 병사들을 정리하고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 역시 마법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다니엘이 주기적으로 충전해주곤 했다. 다행히 안전지대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린 현호가 지부에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주저앉았다.

 

 

감사합니다.”

성우 일인데 고맙기는 무슨.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하자.” 

.”

 

 

다니엘은 건물에 딸린 쪽방에 들어가 성우를 눕혔다. 마음을 놓자마자 머리가 핑 돌더니 코피가 쏟아졌다. 바로 지혈했는데도 검붉다 못해 새카만 피가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극성알파의 고유 능력을 무리하게 사용한 부작용이었다다니엘은 머리를 붙잡고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

 

 

여기는 어디지? 성우는 캄캄한 공간 한가운데 혼자 서있었다. 꿈인가? 마법을 쓰려고 해봐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깨야할지 알 수 없었다.

 

 

"성우야."

 

 

뭔가 온다성우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피하고 보니 몬스터의 정체는 거대한 회색빛의 촉수였다다행히 속도가 빠르지 않아 도망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안도하기는 일렀다. 이런 미친. 촉수의 몸통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성우는 필사적으로 꿈에서 깨려고 애썼다.

 

 

"옹성우."

 

 

처음에 나타난 촉수의 중심부에 구멍이 뚫렸다. 동시에 나머지 촉수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성우는 숨을 헐떡이면서 촉수에 난 구멍을 주시했다목소리가 재차 울렸다. 여기로 와벌어진 틈새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성우는 그제야 이 공간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의헌, 네가 이런 거지?”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아직 건방을 떠는구나.”

 

 

성우를 둘러싼 촉수들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주위를 둘러봐도 사방을 촉수가 막고 있어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속삭임에 불과했다. 혹시나 해서 촉수 너머를 응시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환청인가 싶었는데 다시 소리가 들렸다. 뭐지? 옆에서 의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게 보였다. 방해하지 마. 의헌이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그는 촉수 다발을 움직여 성우를 붙잡으려 했다. 꼼짝 없이 잡혀 들어가는가 싶었는데,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목소리가 공간을 뚫고 들어왔다.

 

 

옹성우!”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번져 나왔다. 밤이 끝나고 새벽이 찾아오듯이. 빛에 휩쓸려 조각난 공간은 더 이상 성우를 가둬둘 수 없었다. 하나씩 사라지는 촉수들을 바라보다가, 성우는 의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헌 역시 사방이 환해질수록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빛이 어둠을 모두 거둬냈을 때, 성우가 눈을 떴다.

 

 

귀 아파.”

 

 

다니엘은 옹, 까지 부르다 말고 다짜고짜 성우를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성우도 다니엘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새 핼쑥해진 얼굴을 올려다보니 코 아래로 핏자국이 선명했다. 어떻게 봐도 무리를 한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벌써 세 번째다. 다니엘에게 신세를 진 것이. 성우는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마워.”

 

 

다니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 나 숨 막혀. 성우가 발버둥 치는데도 다니엘은 성우를 놓지 않았다. 아직도 내가 싫어요? 알파라서? 다니엘이 성우의 귀에 대고 물었다. 모르겠다. 성우는 알파를 싫어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이라면. 그라면 옆에 있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마음을 완전히 주는 일은 없을 거라고, 성우는 다짐했다.

 

다니엘은 성우가 흔들리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고집 센 옹성우가 처음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시작이 반이라고, 한걸음 물러나면 두 걸음 물러나는 건 금방이다. 새벽이 밝기 시작하면 아침도 함께 오는 법이었다. 일단 의헌부터 치우고 나서. 그때 생각하자. 다니엘이 성우의 어깨 너머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느새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