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월간녤옹

 

 

 

 

 

Décalcomanie ː 불완전 

피치인더문

 

    

    

 

 

 

 

 

타올랐던 사랑이 남긴 건 재가 되어 까맣게 변해버린 감정뿐이었다. 벌써 3달이 지났는데도 익숙해지지 않은 이 뭣 같은 감정은 시도때도없이 찾아와 내 삶을 망가트렸다. 강의실, 동아리방 그리고 집 주변에서까지 너와 마주쳐야 했다. 애초에 널 만나는 게 아니었어-. 서로 처참히 짓밟으며 뱉은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니깐. 우린 만나는 게 아니었으니깐.

 

 

 

 

 

 

원래 서울 사람이 아니었던 터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운 좋게 입학하고 나서도 고민이 많았다. 소위 아싸라도 되면 어쩌지.친구를 두루두루 잘 사귀는 편이긴 했으나, 먼저 다가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통학하기엔 본가와 학교 사이의 거리가 무려 왕복 6시간이 넘어 어쩔 수 없이 학교 주변에 저렴한 원룸 하나를 잡았다. 처음 해보는 이사, 그리고 독립. 처음 와 보는 동네. 모든 것이 낯설어 정리하지도 않은 짐 덩이들 사이에서 가만히 앉아있다가 동네 길이라도 익힐 겸 집을 나섰다.

 

 

 

 

 

 

이사 오셨어요? “

 

 

 

 

 

 

낯선 목소리에 흠칫 놀라 급히 뒤를 돌았다. 저보다 훨씬 단단해 보이는 체구에 헝클어진 머리, 대충 걸친 츄리닝 세트에선 복숭아 향이 날 것 같았다.

 

 

 

 

 

 

? .. “

 

여기 주변 학교 다녀요? “

 

아 올해! 입학이요.. “

 

“ OO? “

 

네네.. 맞아요.. “

 

대박! 나도 이번에 거기 들어가는데. 전 컴공인데 그쪽은? “

 

.. 저는 경영.. “

 

공부 잘하시나 보다, 반가워요- 전 강다니엘 이라고 해요

 

이름..신기하네요.. “

 

그쪽은..? "

 

아 저는 옹성우요. ! ! ! “

 

그쪽이 더 이름 특이한데요 "

 

 

 

 

 

 

뭐가 그리 반갑고 즐거운지 아까부터 헤실헤실 거리는 모습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한두 마디 더 주고받다 보니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된 느낌이 들었다. 강다니엘, 나이 20살 동갑, 컴공과, 자취생, 같은 빌라, 옆집. 그렇게 한참을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던 남자 아니, 다니엘은 내게 어디 가는 길이였냐 물었다. 바람 쐬러 간다는 말에 저도 비록 한 달밖에 안 살았지만 그래도 길 눈이 밝아 벌써 다 외웠다며 같이 가도 되냐며 물었고 그 어린 강아지 같은 얼굴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낯선 남자와 낯선 길을 걷게 되었다.

 

 

 

 

 

 

 

그렇게 너는 점점 내게 낯선 사람에서 아는 사람, 아는 사람에서 친구, 그리고 친구에서 연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다, 11월의 중순쯤 차마 사온 거라고 의심할 수조차 없을 만큼 엉망인 빼빼로를 한가득 들고 말했다.

 

 

 

 

 

 

태어나서 이런 거 처음 만들어본다. 만들 줄도 몰라서 재환이랑 둘이 동영상 보면서 6시간 동안 만들었어, 맛없어도 정성을 생각해서 맛있는 척해

 

, 열심히 맛있는 척해볼게.- “

 

 

 

 

 

 

장난기 섞인 말들이 오가다 벤치에 앉아 빼빼로 한 봉지를 뜯었다. 얼추 빼빼로라고 칭할만한 맛은 나네- 살풋 웃으며 건넨 말인데 조금 전부터 계속 우물쭈물 거리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네 모습에 왜 그러냐 물었다.

 

 

 

 

 

 

11월 중순, 늦가을과 초겨울이 어중간하게 귓가를 간지럽히던 그날. 서툴렀던 첫 키스와 고백. 그렇게 2년을 달렸다. 너만 있으면 모든 게 좋았다, 모든 날이 행복했고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처럼 암묵적으로 평생을 바쳤던 사랑은 너무도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더 크게 더 밝게 타오르려 노력했고, 결국 우린 지쳤다. 그게 이유였다. 권태기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에겐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헤어지자

 

그래

 

그렇게 쉽게 대답이 나와? “

 

헤어지자며, 알겠다고. “

 

옹성우, 넌 나 왜 만났냐. “

 

? “

 

결국 이럴 거면 왜 만났을까. 차라리 널 만나는 게 아니었어

 

내가 널 왜 만났냐고? “

 

됐다, 그냥 헤어지자 "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돌아선 다니엘은 금세 눈앞에서 사라졌다. 첫 키스의 추억이 담겨있던 그 벤치에 혼자 남아 그렇게 2시간을 넘게 울었다. 처음에는 내 곁에 더는 네가 없다는 허전함에. 그리고는 헤어지자고 말해버린 너에 대한 미움에, 마지막으로는 자존심에 덜컥 대답해버린 나 자신에 대한 후회에.

 

 

 

 

 

 

집에서 나오지도 않았고, 밥도 잘 챙겨 먹지 않았다. 곧 있으면 새 학기인데-. 헤어지고 나서부터 늘어진 몸은 몇 주가 지나도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이러다간 집에서 고독사라도 할까 싶어 겨우 몸을 일으켜 집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도시락과 우유 하나를 사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여기도 너랑 많이 왔었는데.. 또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급히 눌러담고는 혹시라도 알바생이 볼까 싶어 하품하는 척을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억지로 밥을 밀어 넣고 있을 때 창 밖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강다니엘, 그리고 그 옆에 낯선 여자. 둘 사이가 그저 친구나 지인이 아니라는 것은 꽉 붙잡은 두 손에서 알 수 있었다.

 

 

 

 

 

 

 

헤어진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만났던 2년의 시간을 넌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으로 지우고, 다른 사람으로 채운 걸까. 더는 밥을 먹을 수 없을 만큼 올라오는 역겨운 토기에 급히 먹던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넣고 집으로 뛰어갔다. 변기를 붙잡고 30분은 주저앉아 나오지도 않는 토를 억지로 뱉고 눈물을 쏟았다.

 

 

 

 

 

 

강다니엘하고 옹성우가 헤어지고 강다니엘이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 라는 소문은 새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퍼졌다. 어쩌면 난 너를 증오했고, 넌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나를 미워하고 피하면서, 그렇게라도 나에게 일말의 감정이 남아있길 바랐다.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옹성우는 강다니엘을 못 잊은 눈치더라' 라는 말이 듣기 싫어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을 했다. 아직도 너를 마주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았다. 광대가 아려올 정도로 웃었고, 너와 자주 가던 학생 식당에서 너의 반대편에 앉아 밥을 먹었다. 집에 가선 미친 듯이 눈물이 흘러나와 저녁이면 얼음 주머니로 부은 눈을 가라앉혀야 했으며, 억지로 쑤셔 넣는 밥 탓에 체하는 건 일상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얹힌 속을 두드리며 책상 위에 소화제를 찾았다. 체하는 게 일상이 된 만큼 매일같이 챙겨 먹던 소화제에 내성이라도 생긴 것인지 이제는 한 알로는 속이 내려가지 않았다. 다 먹었네- 너덜너덜해진 약 껍데기를 버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간단히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집을 나섰다.

 

 

 

 

 

 

" 어디가냐

 

 

 

 

 

 

 

생각보다 차가운 바람에 놀랄 겨를도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4개월 만에 들리는 목소리가 그리워서일까 아니면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네가 미워서일까. 아직 널 잊지 못한 탓에 눈물이 밀려올 것 같아 대답 없이 다니엘을 지나쳐갔다. 이기적인 새끼- 빌라 옆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울며 주어도 없이 누군가를 욕하는 모습은 겨울의 길고양이같이 처량했다. 멈추지 않는 눈물에 3시간이 넘게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밖에 앉아있다가 보니 머리가 아파졌다. 소화제가 아니라 감기약을 먹어야겠네, 약국에 들려 감기약과 쌍화탕을 사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열이 오르는 게 아무래도 감기가 길어질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일어나 내린 결론은 자체 휴강이었다. 도저히 이 몸 상태로는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해 겨우 핸드폰을 들어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다니엘 다음으로 친한 친구 희준에게 '아파서 못 갈 것 같다' 라는 짧은 문자만 보낸 뒤 다시 잠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는 동안 계속 자다 겨우 오후 6시가 돼서야 일어났다. 부재중 전화 15. 아까 문자를 보내놨던 친구였다. 아프다니깐 왜 자꾸 전화야- ,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 ! 너 뭔 일 있어? "

 

" 아프다니깐- "

 

" 그럼, 말을 해줬어야지! 난 너 납치 된 줄 알았다 "

 

" 문자 보냈잖아- "

 

" 뭔 문자? 문자 안 왔는데? 언제 보냈어 "

 

" 아까 9시쯤에 보냈는데? "

 

" 안 왔어! "

 

 

 

 

 

 

'설마' 는 틀린 적이 없었다. 분명 희준에게 보낸 걸로 기억하던 문자가 왜 다니엘에게 갔을까. 다행히 답장은 와있지 않은 문자창을 보며 푹푹 한숨만 내쉬었다. 창피함에 겨우 떨어지던 열이 다시 오르는 기분이 들 때쯤 좀 전에 통화했던 희준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 여보세요? "

 

" 아 아까 하려던 말 있었는데 까먹고 말을 못했네 "

 

" 뭔데? "

 

" 내일 애들이 술 먹자는데 나올래? 술 못 마시겠으면 그냥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 "

 

" 귀찮은데.. "

 

" 아 그러냐, 하긴 몸도 아프고 안 그래도 강다니엘 온다고 해서 너 불편할까 봐 걱정했거든 "

 

" ? "

 

" 뭐가 "

 

" 다니엘 내일 온다고? "

 

" , 온다더라 걔 원래 그런 거 안 빠지잖아 "

 

" 내일 어디서 하는데? "

 

" 그 학교 뒤에 새로 생긴 술집, 거기 단체룸 있다고 거기서 먹자고 하던데 "

 

" 일단 알겠어 "

 

" 응 푹 쉬어

 

 

 

 

 

 

 

괜한 자격지심이었다. 내가 아프다는 걸 아니깐 충분히 빠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자존심에 결정한 일이다. 강다니엘이 나에 대해 떠들까 봐? 아니면 거기 있는 친구들이 내가 자리를 피하는 거라고 생각할까 봐? 이불을 덮고 몇 시간을 생각 속에 헤엄을 쳐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내 생각 속에서 길을 잃다가 잠이 들었다.

 

 

 

 

 

 

' 딩동- '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봤다.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이 시간에 누굴까 하고 아직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겼다.

 

 

 

 

 

 

" 누구세요? "

 

" ... "

 

" 누구세요? "

 

" "

 

 

 

 

 

 

다니엘이었다. 이 시간에 왜, 아니 그 전에 네가 왜 나를 찾아온 걸까. 술기운에 그저 생각이 난 걸까. 술김에 찾아온 거길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내가 보고 싶어 찾아와 준거 길 빌었다. 문을 여는 그 몇 초가 너무도 느리게 느껴졌다. 예상외로 넌 취해있지 않았고 사귈 때처럼 혹은 그보다도 훨씬 전 친구 사이일 때의 그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명 같은 정적이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날 쳐다보던 넌 내게 그저 작은 검정 봉투 하나만을 건네고 뒤돌아 너의 집으로 들어갔다.

 

 

 

 

 

 

감기약을 먹고 잔 탓에 몽롱해져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침대에 앉아 봉투를 열어보니 편의점에서 사온 전복죽과 감기약 그리고 빼빼로가 들어가 있었다. 몇 시간을 침대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소리가 날까 손등을 깨문 탓에 눈물이 닿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수많은 생각들이 들어갔다 나오는 탓에 머리가 무거워 침대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내가 너를 만났던 이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학교로 발을 옮겼다. 울고 잤더니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진 듯했지만 아픈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수업들을 겨우 마치고 희준과 흡연구역에서 만났다. 희준은 몇 번이나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내리며 열이 아직 안 떨어진 것 같은데 들어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냐 물었고, 난 괜찮다며 거절했다. 아직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1시간이나 남았으니 근처 카페에서 있다 가자는 말에 알겠다고 답했다.

 

 

 

 

 

 

" 아 대박 나 오늘 진짜 정신없나 봐 "

 

" 왜 또 "

 

" 아침에 동방 갔다가 지갑 두고 오고 강의실에 가방 두고 왔다. "

 

" 진짜 너도 가지가지다 "

 

"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갔다 올게! "

 

" 강의실 갔다 와 동아리방 내가 갖다올테니깐 "

 

" 오오 땡큐 전화해! "

 

 

 

 

 

 

어째 환자보다 더 정신이 없냐 쟨- 투덜거리면 발걸음을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입학하고 얼마 안 돼 아르바이트를 할 예정이라 동아리에 들지 않았지만, 희준이는 같은 과 선배 중에 잘생긴 사람이 있다며 관심도 없던 고전음악감상부에 들어갔다. 하는 일이라고는 다 같이 가끔가다 동방에 들려서 도대체 몇 기수 위인지도 모르는 선배들이 사뒀던 LP판 틀어놓기 같은 진부한 짓들이 전부이기에 어쩌다 보니 동방이라기보단 성우와 다니엘 그리고 희준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다니엘과 헤어지고는 들린 적이 없기에 오랜만에 가는 곳이기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와 같이 느릿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고작 몇 개월이지만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창가로 들어오는 노을에 비치는 먼지들이 반짝였다. 제일 끝쪽에 있는 책상으로 가 이곳저곳에 지갑을 찾아봤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 어디다 둔 거야- "

 

 

 

 

 

 

-

 

 

 

 

 

 

앞으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지갑이었다. 그제야 지갑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니엘이었다. 나란히 진열된 LP판들 앞에 삐딱하게 서서 의도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새벽의 집 문앞에 서 있는 네 모습과 비슷해 데자부 같이 느껴졌다.

 

 

 

 

 

 

" 그거 찾는 거 아니였냐 "

 

" .. 맞아.. "

 

" 오늘 온다며 "

 

" 뭐가? "

 

" 술 마시러 온다며 "

 

" .. "

 

" 아프다면서 왜 나와 "

 

" 신경 쓰지 마 "

 

" ? "

 

" 신경 쓰지 말라고 "

 

" 너 같으면 신경이 안 쓰이겠냐? "

 

" 왜 신경 쓰여? 불쌍해서? 뭐가? 헤어지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 남들 앞에선 다 잊은 척하면서 정작 네 앞에서는 눈도 못 마주치는 거? 아니면 뭐, 밤마다 미친 듯이 우는 게? 너는 네 멋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좋아하면 사귀자 하고 헤어지고 싶으니깐 헤어지자 하고 그래서 헤어졌으면 좀 놔주지 왜 자꾸 사람 미치게 그래. 여자친구 있으면 그냥 좀 잘 사귀면서 조용히 지내줄래? 나한테 말도 걸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

 

" ... "

 

 

 

 

 

 

처음엔 행복이었다가 그다음은 분노였고 마지막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다니엘을 지나쳐 동아리방을 빠져나왔다. 이젠 눈물도 나지 않는다. 화가 나는 걸까, 왜 사람을 헷갈리게 해. 난 아직도 네 빈자리를 겨우 소화제 두 알로 채우고 있는데. 그렇게 보란 듯이 다른 사람하고 만날 거면서 왜 그렇게 억울한 표정을 지어, 결국 아무 대답도 못할 거면서 왜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을 하게 만들어. 네가 걱정해주길 기다렸고 네가 신경 써주길 바랐어, 예전처럼 돌아가길 빌었어. 근데 그럴 수 없잖아. 그러니깐 차라리 내가 좀 더 아프고 힘들어도 어쩔 수 없어.

 

 

 

 

 

 

야 너 어디가! “

 

 

 

 

 

 

 

정신없이 걷다가 양어깨를 쥐는 희준의 손길에 놀라 정신이 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약속시각까지 얼마 남지 않아 바로 술집으로 향했다. 약속 시각까지 10분 정도 남아 일찍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단체방안은 친구들로 북적북적했다.

 

 

 

 

 

 

" !! 옹성우랑 이희준 왔다! "

 

" 옹성우 어제 왜 학교 안왔냐 "

 

" 아 어제 늦잠잤어 "

 

 

 

 

 

 

심심한 안부들이 오가다 앉을 자리를 찾았다. 희준은 이미 친구들에게 신신당부해 비워두었던 짝사랑하는 선배 옆에 앉았고 나는 몇 번 두리번거리다 중간쯤 빈자리가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앉았다.그리고는 앞에 놓인 물컵에 물 한잔을 따라 마시는데 동기들이 전부 날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마시던 컵을 내리고 옆자리 친구에게 물었다. 다들 왜 그래?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던 친구가 겨우 입꼬리만 올리며 눈짓으로 내 앞을 가리키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강다니엘이 내 앞에 앉아있었다. 방금 전까지 신경 쓰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소리치던 놈이 앞에 앉은 모양새가 얼마나 초라할지 상상이 가 속으로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 자리 바꿀래? 아니면 내가 바꿀까? "

 

" 됐어, 그냥 먹어

 

 

 

 

 

 

 

불편해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친구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이 상황에 나도 너처럼 잘사는 척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무르익어서 다들 한두 잔씩 술이 걸치자 속에 있던 얘기들이 나왔다.

 

 

 

 

 

 

" 근데 다니엘 너 여자친구 있다며- 왜 한 번도 안 보여 주냐 "

 

" 맞아 맞아- "

 

" 예뻐? "

 

 

 

 

 

 

다들 술잔에 눈치를 같이 말아 마신 모양인지, 좀 전에 앉은자리를 걱정해주던 배려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래, 여자친구. 저놈은 또 눈치 없이 여자친구 칭찬만 할 놈이다. 사귀었을 때도 팔불출처럼 어딜 가나 내 자랑만 하던 놈이니깐. 다니엘과 둘이 술을 먹다 다니엘이 화장실 간 사이에 옆 테이블 남자들이 자기들이 남자를 좋아한다며 번호를 달라 한 적이 있다. 차마 나랑 다니엘이 연인 사이일 거란 생각도 못 했던 거겠지. 그 자리에서 거절했으나 계속해서 번호를 요구했고 그걸 화장실에서 나오던 다니엘이 보게 되어 싸움이 났었다. 결국, 경찰서까지 갔으나, 강다니엘은 그 심각한 상황 속에도 " 성우가 심각하게 잘생긴 건 맞는데, 왜 찝쩍대냐구요 싫다고 했으면 가지 " 라는 말들을 뱉으며 내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그렇게 제 연인을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하던 너니깐, 그런 너의 새로운 연인이 누굴까 궁금해 불편한 표정으로 이야기에 집중했다.

 

 

 

 

 

 

 

" 헤어졌어 "

 

" ? 벌써? "

 

 

 

 

 

 

잘 사귀고 있다는 대답이 두려워 넘기려던 술잔이 멈칫했다. 당황스러움일까 기쁨일까 기대일까, 한가지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찰랑거리는 소주 대신 소주잔을 채워 내 얼굴을 비췄다. 그리 썩 마음의 드는 모습이 아니라 급하게 소주잔을 비웠다. 헤실 거리며 그냥 성격차이로 헤어졌다고 하곤 말을 아끼는 다니엘 때문에 쉽게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넘겼던 소주가 목구멍을 막고 버티는 갑갑함에 담배나 태울 겸 가게 앞으로 나갔다. 한두 모금 빨고 나니 조금씩 숨이 트이는 것 같아. 심심한 손으로 재를 털었다.

 

 

 

 

 

 

불 좀

 

 

 

 

 

 

다니엘이었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생각에 잠겨있던 탓일까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몸을 웅크렸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라이터를 건네자 넌 익숙한 듯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웠다. 밖은 사람들로 시끄러운데 너와 나만 다른 차원에 있는 듯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겨우 해열제로 진정시킨 열이 다시 오르는 듯했다.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라

 

 

 

 

 

 

반절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고는 다시 가게로 들어가며 네가 말했다. 넌 참 끝까지 날 힘들게 해. 이상한 생각들이 자꾸 겹쳤으나 이내 내가 소주잔에 채워넣은 감정들이 기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면, 네가 자꾸 날 신경 쓴다면, 자꾸 나를 걱정한다면. 우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 걸까? 그러다가도 확신이나 정답 하나 없는 상황에 네가 자꾸 나를 흔드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필터 앞까지 타들어 가던 담배를 똑같이 지져 끄고 뒤따라 들어갔다.

 

 

 

 

 

 

 

야야 성우 왔다. 빨리하자! “

 

뭔데? “

 

진실 게임 하자

 

초등학생이냐 무슨 진실 게임이야

 

하자 하자 야야 그릇 좀 옆으로 치우고 소주병 돌려

 

 

 

 

 

 

그렇게 시작된 내 의사 따위는 반영되지 않은 진실 게임은 벌써 5턴을 훌쩍 지났다. 이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 커플에게는 애인과의 잠자리가 만족스러운가 등의 짓궂은 농담들이 주를 이뤘다. 별 관심이 없는 척을 했지만, 소주병을 돌릴 때면 내가 걸릴까 걱정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가슴을 졸였다. 그렇게 6번째 소주병이 돌아가다 멈춘 곳은 다니엘이었다. 깔깔대며 웃는 친구들 사이에서 내 자리만 조명이 꺼진 듯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직 어떤 질문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옹성ㅇ.. “

 

야야 그건 너무 노골적이다. “

 

, 그런가 그럼 난 전 애인을 아직 잊지 못했다! “

 

 

 

 

 

 

굳어가는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으나 그것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소주를 들이켜면 왠지 내가 지는 느낌이 들어 괜히 테이블 아래로 손톱 주위의 살만 뜯었다. 뜯긴 굳은살 아래서 피가 나는지 아렸다. 차라리 네가 대답하지 말고 술을 마셨으면, 그러면서도 네가 대답했으면 이질적인 감정이 몰아쳤다. 한참을 고민하던 너는 결국, 모르겠다- 라는 애매한 대답만을 남긴 뒤 벌주가 담긴 술잔을 들이켰다.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모르겠는 건 또 뭐야. 화가 나 꾹 참고 넘기지 않았던 소주잔을 넘겼다. 애매한 대답에 흥미를 잃은 친구놈들은 다른 게임이 없는지 찾았고 그러다 끝에 있던 희준이 왕게임을 제안하자 다들 좋다며 카운터에서 나무젓가락 몇 개를 얻어와 번호를 적었다.

 

 

 

 

 

 

“ 8명이니깐 7번까지 있는 거다. - 뽑아! “

 

 

 

 

 

 

제일 마지막에 남은 젓가락을 뽑았다. 3. 왕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왕이라 해도 시키고 싶은 것도 없었기에. 술을 마신 탓에 약발이 금방 떨어지는지 아까부터 차갑게 느껴지던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머리가 지끈거려 한 손으로 이마를 잡았다. 열이 다시 오르는 것 같기도 한 게 아무래도 내일은 정말 꼼짝없이 죽어있을 게 뻔했다. 한쪽에서는 왕을 뽑았는지 신이나 젓가락을 흔드는 친구가 보였다. 설마 나일까 싶어 웃으며 분위기를 맞췄다.

 

 

 

 

 

 

우선 제가 처음으로 왕이니깐 1번 하고... 그리고 오늘이 13일이니깐 3! “

 

 

 

 

 

 

마치 오늘이 7일이니 7번이 일어나서 책을 읽어보라던 국어선생 같았다. 차라리 대놓고 내가 3번이라고 얘기를 했으면 안걸렸을려나.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걸린 거 얼른 끝내고 넘기자는 생각에 1번이 누군지 물었다. 어차피 다니엘만 아니면 됐다. 어차피, 어차피.

 

 

 

 

 

 

오오 대박대박

 

“ 1번 다니엘! “

 

 

 

 

 

 

어차ㅍ.. 명령어를 듣기도 전에 술잔을 집고 싶었다. 그 어떤 사소한 거라도 하기 싫었다. 아니, 티 내기 싫었다. 내가 지금 머리에 열이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의 중심에 네가 있다는 것도. 티 나지 않게 슬쩍 네 표정을 봤다. 역시나 좀 전과 다를 것 없이 아무렇지 않다는 그 표정이 자꾸 나를 힘들게 했다.

 

 

 

 

 

 

“ 1번하고 3.. , 그냥 처음이니깐 간단하게 3턴 지날 때까지 손잡고 있기! “

 

 

 

 

 

 

넌 눈치가 없냐, 야 그건 좀 약하다 등의 말들이 오갔다. 약하긴 뭐가 약해. 너랑 같은 공간에서 숨을 공유하는 것조차도 난 이렇게 힘든데. 슬쩍 웃던 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네 손을 내치고 술을 마신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된다. 그렇게 열심히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시간도 내가 삼켰던 수많은 소화제도. 끓어오르는 열의 원인이 너라는 것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넌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널 잊지 못한 건 나니깐, 나를 있었냐는 질문에 대답이 모르겠다. 인 것만으로도 넌 네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 모르겠다는 대답이 밤낮 상관없이 나를 괴롭힐 거고 나를 수많은 망상과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을 테니. 더는 무리였다. 그냥 난 너를 못 잊은 추억에 사는 사람으로 남는 게 더 속 편한 일이다. 아직도 네가 쓰는 향수 냄새만 맡아도 눈물이 고이고, 집 앞 분리수거함에 네가 버리고 간 자주 마시던 맥주 캔만 봐도 함께 했던 시간이 떠올라 애꿎은 담배만 몇 대 태운다는 걸 모두가 알아버리면 차라리 그래 버리면 이렇게 불편한 자리에 억지로 너와 마주칠 일도, 시답잖은 농담을 받을 필요도 없을 테니깐.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널 잊을 수 있겠지. 더 이상 날 파고드는 역겨운 향수병이 낫겠지.

 

 

 

 

 

 

날 향해 내밀고 있는 네 손을 지나, 소주만 가득 찬 500cc 맥주잔을 들어 마셨다.. 대답을 회피하지 못하게끔 말도 안 되는 벌주를 만들어야 한다며 맥주잔에 소주만 따랐던 친구들도, 놀란 모습으로 아직 손을 내밀고 있는 너도. 모두 당황스러운 상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안에서 소주가 넘어올 것만 같았지만, 꾹 참고 웃으며 다음- 이라고 얘기하며 똑같이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비어가는 소주병처럼 내 마음도 비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몇 턴이 더 지나 뽑은 젓가락에 자랑스럽게 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말했듯 별 관심도 없는 터라 그저 생각나는 숫자를 읇었다.

 

 

 

 

 

 

“ 45번 그냥 뽀뽀해 짧게 3

 

 

 

 

 

 

이미 수위는 높아질 대로 높아진 탓에 뽀뽀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4번이 누구냐는 말에 희준의 앞에 앉아있던 여자인 친구가 재수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뒤이어 5번이 누구냐는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앞에 앉은 다니엘이 젓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벌주 잔을 들어 마셨다.. 다니엘의 젓가락에는 숫자 5가 적혀있었다. 허탈하게 손을 들었던 친구는 내심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웃으며 박수를 쳤다. 불편해, 모든 게 불편했다. 어차피 이렇게 들킬 거면 그냥 나오지 말걸. 그렇게 몇 잔의 술잔이 더 오가고 술자리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하자 다들 2차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약기운은 다 떨어져 열은 오를 대로 올랐고. 주량에 가깝게 마신 탓에 머리도 어지러워 자연스레 집에 간다고 얘기했다. 다들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아까의 행동들을 생각하자 그럴만하다는 듯 조심히 가라는 인사만 건넸다.

 

 

 

 

 

 

같이 가자

 

 

 

 

 

 

정적을 깨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항상 너였다. 아직 그렇게 많이 취해 보이지도 않은데 왜 집에 가는 것인지 물어볼까 하다가도 그냥 아무 말 않고 걸었다. 그렇게 10분이 지나도록 어색한 정적이 바람과 함께 불었다. 그러다 또 화가 났다. 혼란스러운 저녁에 시도때도없이 감정이 바뀌는 건 일도 아니었다.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내가 다시 물어봐도 돼? “

 

? “

 

진짜 대답, 모르겠다는 거 말고. 진짜, 네 마음

 

“ ... “

 

 

분위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냥 지금 아니라고 얘기해. 나 다 잊었다고. 내 생각 안 난다고

 

넌 어떤데? “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그렇게 정적이 한 번 더 우리 사이를 휘감고 갈 때쯤 처음과 끝을 마주했던 공원 앞에 도착했다. 누가 먼저 앉았다 가자는 말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때 그 벤치에 앉았다. 조금 달라진 공기와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의 개수. 그리고 서로의 감정. 벤치에 앉자마자 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나에게 건넸다. 입으라는 단순한 말과 함께.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기어코 내 어깨에 외투를 올려 목 부분의 단추까지 채웠다.

 

 

 

 

 

감기 걸렸잖아. “

 

약 먹어서 괜찮아

 

- 이마 뜨거운 거 보니깐 또 열오르잖아. 밖에 추우니깐 들어가서 얘기할래? “

 

신경 쓰지 말라니깐

 

신경이 안쓰이겠냐고 했지

 

네가 자꾸 이러면, 자꾸 나 혼란스럽게 하면.. “

 

“ ... “

 

그래, 말 나온 김에 얘기하자. 그리고 다 끝내자. 나 아직 너 못 잊었어. 근데, 쪽팔려서 나만 너 못 잊은 게 창피해서 너 잊은 척하려고 일부러 너 있는 학생식당가서 밥도 먹고 허구한 날 체해서 밤마다 소화제 먹고 자는 게 일상이고. 너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눈물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허벅지 꼬집으면서 참는 것도 일상이야. 밤마다 울어서 눈 팅팅 붓고 그것도 들킬까 봐 매일 같이 얼음찜질하고 자고. 분리수거함에 있는 네가 먹고 버린 맥주 캔들 보면 너랑 함께했던 시간이 생각나서 쓰레기 버리다 말고 또 울어. 나는 이만큼 힘들거든? 나는 네가 또 이렇게 여지를 남겨주면 몇 날 아니 몇 달을 망상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현실로 돌아와서 또 미친 듯이 울어. 너도 그래? 넌 아니잖아. 넌 나랑 있었던 시간 다 잊고 그냥 다른 사람 만날 수 있잖아. 그러니깐 그냥 우리, 아니, . 이제 더 이상 너한테 미련 안 가질 테니까 그러니깐, 네가 좀 도와줘. 그냥 나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신경 쓰인다는 그런 소리도 하지 말고 마주쳐도 그냥 지나가 줘 그러면 나도 당장은 힘들겠지만 너 어떻게든 잊어볼게. “

 

나도.. “

 

그래, 너도 그렇게. 우리 서로 모른 척 살자

 

나도 힘들어. “

 

“ ... “

 

너 잊겠다고 다른 사람도 만나봤는데 네 생각만 나고. 네가 나랑 같이 학생식당에서 밥 먹는 거 보고 어떻게든 너 한 번 더 마주치고 싶어서 매일 같이 맛없는 학생식당에서 밥도 먹고. 너랑 함께했던 시간이 미친 듯이 그리워서 괜히 너랑 같이 밤마다 마셨던 맥주들도 마셔보고. 사람도 잘 안 오는 동아리방에서 너를 기다려. 네가 아프다는 문자보고 아무 생각도 안 들어서 온 동네 죽 집을 다 돌았는데 너무 늦게 봐서 고작 해줄 수 있는 게 편의점에 파는 죽이랑 감기약, 그리고 네가 좋아하던 과자뿐인 게 너무 속상해서 집에 와서 밤새 후회했고, 그날 너한테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는데 아픈 네 모습 보니깐 아무 말도 안 나왔어. 그러니깐 우리 둘 다 이렇게 힘들 거면. 그럼 그냥 우리 둘 다 잊지 말고.. “

 

“ ... “

 

그냥 다시 시작하면 안 돼? “

 

그러다가.. 결국, 다시 똑같으면.. “

 

그땐, 내가 너 잡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잡을게

 

나 다시 너랑 헤어지면 그땐 정말 못 버틸 것 같아. 그러니깐 자신 없으면 그런 얘기하지 말고 그냥 깨끗하게 ㅇ.. “

 

 

 

 

 

언젠가 네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처음 봤던 키스 장면이 영화에서였다고.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갑작스럽게 키스를 하는 게 너무 멋있어 보였다고. 그래서 그런가 넌 이렇게 준비 없는 키스를 좋아했다. 제멋대로 인 게 꼭 너와 닮았어. 너는 그렇게 네 멋대로 나에게 다가왔고, 나에게 스며들었고, 내가 되었어. 너 없이는 내가 나 일 수 없게 만들었어. 너는 왜 나를 파고들까. 그 해답을 얻기도 전에 끝나버린 줄다리기는 나 혼자서만 당겼다 놓았다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반대편엔 네가 있었어. 그저 우리에겐 잠시 쉬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인데 그걸 몰랐다. 너와 나 둘 다 처음 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우리는 그저 남들이 말하던 사랑의 정의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이 뛰니 사랑을 하고,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으니 이별을 하고.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아련했으며, 그 속에 너와 나뿐이라는 걸 잊었다.

 

 

 

 

 

 

 

짧았는지 길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키스의 뒤엔 작은 분노를 감싼 눈물이 차올랐다. 왜 나한테 헤어지자 그랬어-, 한 번만 더 물어보지, 진짜냐고 한 번만 더 물어봐 주지 왜 그냥 갔어, 왜 내 대답 안 들어줬어. 눈물이 앞을 막아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떠 외투 하나 없는 네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물었다. 너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하며 날 감싸 안았다. 너로 차올랐던 내가, 너를 잃고 힘들어했고, 또다시 너로 차오르고 있다. 이별은 처음이었으나 사랑은 처음이 아니기에 그저 차오르는 이 감정을 가만히 느꼈다.

 

 

 

 

 

 

 

" 다 울었어? "

 

" 으응.. "

 

" 울고 나니깐 열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얼른 들어가자.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 "

 

" 싫어.. "

 

" 왜 싫어 "

 

" 빨리 말해 "

 

" ? ? "

 

" 다시 사귀자고 말해 "

 

 

 

 

 

나름 진지하게 뱉은 말인데, 말을 들은 너는 크게 웃었다.

 

 

 

 

 

 

 

" 꼭 그걸 말해야 해? "

 

" 말하지 않으면 애매하잖아.. "

 

" , 그러면 "

 

" ... "

 

" 그거 알려줘 "

 

" 어떤 거? "

 

" 우리 헤어지던 날, 내가 듣지 않았던 그 대답. "

 

" ... "

 

" 나랑 왜 만났어? "

 

" 빼빼로.. "

 

" ? "

 

" 네가 고백하던 날 줬던 빼빼로가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

 

" ? “

 

꼭 나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

 

니가 선물해줬던 그 엉망진창인 빼빼로가 꼭 너랑 나 같아서. 잘하는 거 하나 없이 모든 게 모자란 데 그래도 아등바등 얼추 빼빼로 맛은 난다고 자랑하는 게. 너랑 있으면 내가 모자르다는 걸 못 느꼈어. 그냥 넌 날 항상 채워줬고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어줬거든

 

“ ... “

 

넌 나랑 너무 닮아서. 헤어지고도 걱정했어. 너도 나처럼 힘들어하면 어쩌지. 너도 나만큼 울면 어쩌지 그러다가 네가 여자친구랑 지나가는 걸 봤을 땐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널 잘 몰랐구나 싶었고. “

 

미안.. “

 

됐어, 미안하다는 말 말고.. “

 

사귀자. 이번엔 너 절대 안 놓칠게, 내가 더 깊게 파고들어서 다시는 너도 나 못 놓치게 노력할게. 그러니깐 우리 다시 사귀자

 

 

 

 

 

 

 

눈물과 아픔으로 비어가던 마음이 다시 사랑으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지독히도 내 마음을 파고들었던 네가 싫었으나 널 떼어내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그날 밤은 내 마음을 너로 채우고 내 육체까지 너로 채웠다. 머릿속으로 너를 다시 잃을까 걱정할 때마다 넌 내 생각이라도 읽은 듯 지긋이 웃으며 날 꽉 끌어안았다. 미안해-, 헤어졌던 그때가 미안한 것인지. 조금 전에 밤을 태웠던 행위가 미안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네가 내 침대 위에 같은 이불을 덮고 한 공간에서 숨을 공유한다는 것만을 느끼고 싶었다.

 

    

 

 

 

 

사랑해

 

 

    

    

지금의 감정이 서로를 파고들어 영원히 묶어도 좋다. 평생 너만을 보고 살아야한대도 좋다. 그냥 우리가 영원하길 빌었다. 제발 불완전한 나를 채워줘, 너로 인해 완벽할 수 있게 해 줘.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수 없이 다짐하다 너를 끌어안았다. 창을 가린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었지만 우리의 밤은 계속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