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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소주 대여섯 병이 주량이라 말하고 다닐 만큼 술이 센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먹이려드는 정도가 심하다. 더군다나 오늘은 특히 취해선 안 되는 날이었기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대충 핑계를 대고선 술집 밖 좁은 골목으로 피신한 다니엘은 곧바로 자신의 이러한 판단을 후회해야만 했다. 후미진 골목엔 다른 사람도 아닌, 검은색 티셔츠와 티셔츠만큼 어두운색 청바지를 입은 옹성우가 벽에 기대어 서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사람 좋은 웃음을 무기로 아무에게나 편하고 친근히 다가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건 다니엘의 장점 중 하나였지만, 그런 그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만큼 어색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돈다. 어찌나 어색한지 숨이 막혀올 지경이었다. 하긴 어느 여름날, 크게 싸운 뒤 그대로 이별한 애인과 4년 만에 다시 마주한 상황에선 그 누구라 하더라도 숨이 턱하고 막혀왔을 것이다.

 

 

 

 

 

 

[한여름 밤의 꿈]

Zippo

 

 

 

 

 

 

김재환, 이걸 그냥......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모여 앉아 있는 친구들을 무심코 둘러본 다니엘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굳는다. 자신의 죄를 알긴 아는 모양인지 저에게 곧바로 내리꽂히는 다니엘의 살벌한 시선을 필사적으로 회피하는 재환이었다. 따가울 만큼 강렬한 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테이블 정중앙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고 있는 재환의 모습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가깝게 지냈던 친구 놈들만 모이는 술자리라고, 누구도 오고 또 누구도 온다며, 편한 마음으로 와서 술이나 한잔하자는 재환의 말에 자다 말고 일어난 다니엘은 정말 편한 마음으로 대충 샤워만 한 다음 머리도 말리지 않고 나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김재환이 편히 오라 지껄인 술자리에 떡하니 4년 전 헤어졌던 전애인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의 전애인이 모임에 나올 거라는 걸 김재환이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저를 부른 게 첫 번째 죄, 편하게 하고 나오라는 말로 머리 손질도 안 하곤 찢어진 청바지에 흰 티셔츠만 입고 터덜터덜 나오게 만든 것이 두 번째 죄, 변명도 없이 눈만 피하고 있는 게 세 번째 죄였다. 그러나 마냥 얼굴을 굳히곤 당황한 티를 팍팍 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다니엘은 황급히 밝게 웃으며 의연한 듯 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곁눈질을 해 전애인과 최대한 떨어져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물색하고선 재빨리 그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것이었다. 다행히 모임에 참가한 사람의 수가 스무 명이 넘었기에, 굳이 구석 자리를 골라 앉는다 한들 이상하게 보일 건 없었다. 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그 순간, 모두가 다니엘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흔들며 그를 반겼던 그 순간, 아주 잠시 검고 큰 무쌍눈과 제 눈이 마주쳤지만 찰나였다. 그 뒤로 다니엘의 전애인......그러니까 옹성우가 그에게 재차 눈길을 주는 일은 없었으니까. 다니엘이 저를 죽일 듯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선 필사적으로 눈길을 피하고 있던 재환이 팔을 뻗어 감자튀김을 집으려다 무심결에 다니엘과 눈이 마주친다. 그 즉시 크게 입을 벌리고 오므리며 입모양만으로 재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다니엘이었다.

 

...? ...’

 

그러자 파드득 고개를 돌리며 옆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와 어색하게 대화를 하는데, 뒤통수에서 땀방울이 솟아나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지경이라 크게 한숨을 내쉬곤 잔에 소주를 채우는 다니엘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별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술자리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예전에도 몇 번이나 했던 이야기들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똑같은 대목에서 다 같이 웃어댄다. 친구들이 옛날에 있었던 일화를 과하게 포장해서 말할 때마다 저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성우의 큰 눈이 가늘어지고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퍼졌다. 그 모습을 남들 몰래 흘끔흘끔 쳐다보며 다니엘은 생각했다. 옹성우는 진짜 변한 게 없네. 저와 비슷한 시기에 군대를 다녀와 비슷한 시기에 복학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4년 전이나 지금이나 깎아놓은 듯 잘생긴 얼굴은 여전했고, 숯처럼 검고 윤기가 나는 머리카락 또한 여전했다. 예나 지금이나 배려 없이 잘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카락에 물이라도 묻히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와 연거푸 잔을 비우는 다니엘이었다. 하긴 재환이 미리 말을 안 했다뿐이지, 성우가 이 모임에 나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저 때문이라면 모를까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제 친구들이기도 했지만, 성우의 친구들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부터 사귀었던 커플이란 그런 것이다. 게다가 여기 있는 사람 중 강다니엘과 옹성우가 사귀었고 그러다 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건 김재환 단 한 명뿐이었기에 이 자리는 그저 어디든 있는 동창 모임이었다. 성우를 잔뜩 의식하고 있는 저와는 달리, 성우는 그저 동창 모임에 온 것일 뿐이라 단순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갑자기 속이 쓰려와 소주를 또 한잔 비우고선 다니엘은 앞에 놓여있는 과일 화채를 제 그릇에 덜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시다가 권하는 대로 다 받아 마시면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잠시 피한 다니엘이었다. 그러나 술집 밖 좁은 골목으로 피신한 이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선택이 될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골목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성우와 마주할 때까진 제법 괜찮은 선택이란 생각까지 했었다. 골목 안으로 두어 발자국 걸어 들어와 놓고선, 성우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등을 돌려 나간다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그를 피한다 광고를 하는 꼴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다니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황도 잠시, 다니엘은 침착한 얼굴로 성우와 조금 떨어진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곤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그리곤 액정을 들여다보며 새로 온 메시지가 있나......확인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확인하는 척을 했다. 어떻게 해야 이 어색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뇌를 회전시키고 있는 다니엘의 귀에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외모만큼 변함이 없는 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학생 같지 않네.”

 

“......?”

 

복학생은 좀 아저씨 티가 나야 되는 거 아니야? ,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고.”

 

제가 그를 보며 하던 생각과 똑같은 말을 하는 성우 덕분에 다니엘의 눈이 커진다. 다니엘을 쳐다보며 다 태운 담배를 버린 성우가 말을 이었다. , 몸은 더 좋아진 건가? 예전에도 좋았는데.....부럽다. 정말 편안한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거는 성우의 모습이 어쩐지 저와 비교되어 다니엘의 얼굴 위로 속상함이 아주 잠시 비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우는 새 담배를 꺼내 물고선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냈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그 모습을 곁눈으로 살피는 다니엘이었다. 어쩌다가 우리 둘이 이렇게 된 걸까? 심지어 무슨 이유로 헤어졌는지조차 모를 일이었다. 오래 사귀다 보니 만남이 뜸해졌던 기간이 있었고, 하필 보름 만에 만난 그날은 무척이나 더웠다. , 날씨 진짜 덥네. 내리쬐는 햇빛에 다니엘의 입에서 조금은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나온 게 시작이었다. 언제나처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투닥이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흐지부지 마무리될 줄만 알았던 말싸움은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꽤 길어졌고 두 사람답지 않게 큰소리도 오고 갔다. 그러다가 성우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한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참말이가? 묻는 말에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 다니엘이 질질 끌지 않고 알겠다 대답한 뒤 돌아선 게 마지막이었다. 오늘 이렇게,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 전까진.

 

여기까지만 들으면 두 사람 다 쿨한 이별을 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성우는 몰라도 다니엘은 그와 헤어진 뒤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매일같이 술을 달고 살면서 온갖 종류의 삽질을 혼자 다 하다가 재환에게 욕을 먹은 게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지겨워 죽겠으니 이젠 그만 좀 잊으라는 말을 재환에게서 골백번 들은 뒤에야 이대로 가다간 폐인이 된다는 생각에 후다닥 도망치듯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잊혀지겠지,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믿었는데 웬걸......더 힘들었다. 여전히 옹성우가 생각났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또 보내고 나서야 성우를 잊을 수 있었다. 깨끗하게 잊었다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성우를 마주하고 보니 다시 불안해진다. 다 잡았던 마음이 다시 흔들릴까 봐. 다시 아플까 봐.

 

그만큼 옹성우를 사랑했다. 쨍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목소리, 웃을 땐 더없이 행복해지는 표정, 가늘면서도 힘이 있는 몸, 조막만한 얼굴에 조화롭게 자리 잡은 무쌍의 커다란 눈과 코 그리고 얇은 입술, 볼에 나 있는 별자리와도 같은 점, 그리고 말을 하거나 웃을 때 보이는 고르지 못한 치열까지. 재치 있고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 그와 헤어질 이유를 도통 찾지 못할 만큼 사랑했다. 그렇기에 이별을 더 받아들일 수 없던 것일지도 몰랐다. 뿌연 연기를 입술 사이로 내뿜는 성우를 바라보며, 그러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어도 무심결에 방어하듯 시큰둥한 목소리가 다니엘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담배는 언제부터 피우기 시작한 건데? 4년 전엔 안 피웠었잖아.”

 

? 한 대 줘?”

 

담배 안 한다.”

 

여전히 성실하네.”

 

생긴 건 골초처럼 생겨가지고. 그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데, 애매모호한 성우의 말이 이어진다.

 

“......너랑 헤어지고부터 피우기 시작했어.”

 

별다른 뜻은 없을 것이다.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겠지. 성우 또한 저만큼 힘들어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만으로도 괴로워지니까. 옹성우가 제 곁에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얼마던가?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의미부여도 웃긴 일이었다. 분명 성우는 저만큼 괴로워하진 않았으리라. 고백을 먼저 한 것도, 첫 데이트 약속도, 손을 잡은 것도, 입술을 겹친 것도......언제나 다니엘이 먼저 했었다. 어쩌면 자신의 일방통행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절로 낮은 한숨이 나온다. 자연스럽게 가게 안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은 애초에 망했고, 여기 더 있으면 실수라도 할까 싶은 마음에 마저 피우고 오라고 말한 뒤 골목 밖으로 나가려던 다니엘이었다. 그때, 어딘가 모르게 기력이라곤 없는 목소리가 다니엘의 발을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기념일이네.”

 

“......기념일?”

 

너랑 헤어진 기념일.”

 

우리 82일에 헤어졌었잖아. 기억 안 나? 저조차 기억하지 않고 있던, 헤어진 날의 날짜가 성우의 입에서 나오자 조금은 당황스러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는 다니엘이었다. 그런 다니엘을 보고선 웃으며 성우는 말을 이었다.

 

“82일만 되면 네가 자꾸 떠올라 괴로워서 그냥 기념일이라 생각하곤 즐기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축하 겸 술을 마시러 나온 건데 네가 들어오잖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네 모습을 본 그 순간, 마음이 괴로운 건지 아니면 기쁜 건지......도통 알 수가 없더라. 세상 태평한 목소리에 이쯤 되자 어색하고 답답한 걸 넘어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기에, 얼굴을 슬며시 구기고선 지금 누구 놀리냐고 따지기 위해 그제서야 성우를 똑바로 쳐다본 다니엘이었다. 그러나 따지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왜 곁눈으로 흘끔흘끔 보았을 땐 눈치채지 못했을까? 담배를 끼우고 있는 검지와 중지가 떨리고 있는 것을, 입술이 자꾸만 마르는지 혀를 내어 핥고 있는 것을, 마른침을 삼켜대는 목울대를, 긴장해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어쩐지 붉은 눈가를......그 모습을 똑바로 마주하고서야 다니엘은 자신이 크나큰 착각을 했던 것이 아닌가 되물어야만 했다. 저만 옹성우를 못 잊었다는 착각. 저만 옹성우를 미치도록 사랑했다는 착각. 옹성우는 저와의 이별을 쉽게 받아들였을 거란 착각.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성우와 떨어진 곳에 서서 애꿎은 폰만 만지작거리던 걸 멈추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는 다니엘이었다.

 

내랑 관련된 기념일이면 같이 챙겨야 되는 거 아니가?”

 

“......그러고 보니 그러네.”

 

어떻게 챙길 건데?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주제에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묻곤, 성우는 손가락을 튕겨 담뱃불을 껐다. 손을 벗어난 담배꽁초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슬며시 손을 들어 세 개의 점이 나 있는 왼쪽 뺨을 건드리곤 얼굴을 감싸는 다니엘이었다. 제 큰 손에 감싸인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4년 전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일렁였다. 자그마한 얼굴을 감싼 뒤, 자연스럽게 이어진 입맞춤은 짙은 담배 향이 난다는 것만 다를 뿐, 그 외엔 감동스러울 만큼 전과 똑같았다. 4년 만의 만남 그리고 4년 만의 입맞춤, 그야말로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