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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마지막 여름을 건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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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다니엘은 튼튼하다. 그건 곧 잘 먹고 잘 자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다니엘은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데도, 관리하고 먹이고 재우는 데도 매우 능숙했다. 그건 타고난 재주였고, 몸 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경호학과 안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수준이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두고 잘 수 있을 때 자 두자가 강다니엘의 신조였다.  

옹성우는 체력이 좋지 않다. 잔병치레가 잦은 편은 아니지만 꽤 심한 저혈압에 바깥 활동을 오래 하면 급속도로 지친다. 먹성이 좋았지만 늘 잠을 설친다. 아무리 잠을 자도 축축 처지기만 하고 개운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매년 여름이 다가와 조금씩 날이 습해지고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면 곧바로 불면을 호소했다. 강다니엘은 그럼에도 늘 주위 사람들에게 다정한 제 연인의 모습을 사랑했다

 

사람들은 늘 센스있고 배려심 넘친다는 말로 옹성우를 칭찬했지만 그건 옹성우가 매우 예민하기 때문이었다. 옹성우는 싫은 것도 많고 불편한 것도 많았다. 타인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만큼, 딱 거기까지 남을 배려했다. 과했다. 세상은 온통 무신경함으로 가득했다. 아주 어릴 때 그 사실을 알아챈 옹성우는 근사한 미소와 다정한 말투를 익혔다. 남을 챙기고 그만큼 뭉툭한 위협에 공격받느라 집에 돌아오면 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집은 옹성우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아담한 투룸 오피스텔에는 커다란 침대와 붙박이 싱크대, 어울리지 않는 소형 냉장고 두 개와 팔걸이 부분의 천이 헤진 소파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팔걸이 위에 길쭉한 종아리를 걸친 채 비스듬히 누워 티비를 보던 연인이 달려나와 지친 성우를 꼭 안아주었다. 그 포옹은 늘 따뜻해서 간혹 집이 비어 있을 때도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

 

 

 

둘은 수면 습관만큼 사랑에 대한 태도도 달랐다. 연애 방식도 굳이 따지자면 정반대였다. 다니엘은 늘 태평했다. 옹성우는 그런 다니엘을 가리켜 '그렇게 조잘대는 걸 좋아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아서 상대방을 미치게 하는 타입'이라고 잘라 말했다

오늘 학식 A 메뉴였던 가츠동이 엄청 질척댔고 함께 나온 오뎅국에 납작오뎅이 딱 한 조각밖에 안 들었더라는 이야기는 하면서 대인 경호 수업을 받다가 왼팔 인대가 늘어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식이었다. 다니엘은 억울했다. 하나하나 말하지 않아도 우리 사이에는 문제될 게 없다고 믿었으니까. 맛없는 학식 이야기를 하면 웃으며 "그럼 저녁 때 엄청 맛있는 돈까스 먹으러 갈까?"라고 묻는 옹성우가 인대가 늘어난 이야기를 하면 대번에 울상을 지을 테니까. 아마 저보다 서럽고 안타까워하다가 진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니까.

상대방은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나란히 금요일 수업을 째고 드라이브 겸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신나서 이것저것 계획을 짜야 할 화요일 오후부터 목요일 오전까지 다니엘과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이것저것 맛집이니 펜션 후기 블로그를 읽고 링크를 보내봐도 대화창 왼쪽은 한참이나 잠잠했다. 뭐야, 내가 가자고 했어? 좋다 싫다 말은 해야지. 아무리 나는 형 좋은 거면 다 좋다, 하면서 순하게 웃는 얼굴에 녹았다지만 1은 꼬박꼬박 사라지는데 이모티콘 하나 보내오지 않는 시큰둥함에 슬슬 열이 올랐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평소 같으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함께 고른 컬러링을 들을 틈도 없이 전화를 받았을 텐데, 아니 그보다 늘 강다니엘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는데, 오늘은 노래의 일 절이 다 흘러가고서야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자느라 내 카톡 답장도 안 하고 전화도 늦게 받았어?

 

꾹꾹 눌러 참았던 짜증이 터져나왔다.

 

- 너 이럴 거면 여행 가자고는 왜 했어? 집에서 잠이나 자, 나도 바쁘거든?

 

- , 아 햄아 그게 아니라요. 아 내가 진짜 생각을 잘못했다. 미안해요 화 많이 났죠. 진짜 미안. 햄 화내지 말고, 우짜노. 내 지금 집으로 갈게요. 쫌만 기다리라

 

그렇게 깊이 잤던 목소리로, 눈은 제대로 뜨고 올 수 있겠어? 눈 감고 오다가 어디 막 전봇대에 박는 거 아냐? 끊긴 전화를 쥐고 한참을 씩씩대던 옹성우가 비척대며 일어섰다. 부엌 한켠에 쌓여 있는 생수통을 집어 냉동실에 넣고 에어컨 희망온도를 20도까지 낮췄다. 강다니엘은 더위를 많이 탔고, 지금쯤 앞을 가로막는 전봇대를 전부 뽑아낼 기세로 달려오고 있을 거였다.   

정확히 7분 뒤, 턱 밑으로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새빨개진 얼굴로 열심히 눈두덩이를 긁적이는 강다니엘이 현관 앞에 섰다. 여기까지는 다 예상 안의 일이었는데, 왼팔의 깁스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그림이었다. 등 뒤로 감추지도 내보이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달린 왼손이 어색했다. 팔의 주인은 그보다 더 어색하고 뻘쭘한 표정이었다

 

 

 

-

 

 

 

강다니엘의 하루는 아침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침대 위를 구르는 제 연인을 어르고 달래는 일로 시작되었다. 아이고, 일어나기 힘들지요. 아직 삼십 분은 더 누워있어도 된다. 천천히 잠 깨요. 여 물 있다. 어제 많이 더웠지. 누가 보면 곤히 자는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무슨 소리인가 했겠지만 다니엘은 옹성우가 자는지, 깼는지, 잠들려고 하는지, 깨어나려고 하는지, 악몽을 꾸고 있는지 다 알았다. 덥지 않았냐는 물음에 으응 인지 끼잉 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어 답한 옹성우가 그 증거다

몇 번이나 깼노. .. 두세 번? 그래도 좀 깊게 잔 것 같아. 머리는 안 아프네. 다행이다. 맨날 아침마다 고생하고 불쌍해 죽겠다. 살랑이는 부채바람이 띵한 머리를 조금씩 현실로 실어날랐다. 아주 약하고 꾸준한 움직임이었지만 성우는 한번도 그 바람이 그칠까 불안했던 적이 없었다.

 

습한 공기에 여름 냄새가 실리면 다니엘은 곧장 성우의 찡그린 미간과 얇게 바삭거리는 여름 이불에서 나는 체향, 힘없이 안겨드는 상체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한반도의 여름은 보통 장마와 함께였고 비구름은 저기압과 함께 몰려왔다. 다니엘은 성우를 만난 뒤로 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 '저기압'이라고 하는지 절절히 깨우쳤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 좋았다. 여간해서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형이 온몸을 기대오는 흔치 않은 시간이었다. 강다니엘은 여름마다 자신이 강해진다고 느꼈다. 꼭 붙어오는 시원한 피부가 좋았다

 

 

 

각자의 본가에서 맞이하는 이번 여름은 달랐다. 옹성우의 누나는 가을에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성우는 이번 여름을 집에서 다 함께 보내자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에 본가행을 결심했다.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니어도 제법 살가운 남매지간이었던 누나가 떠난다니 섭섭한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다니엘도 이 기회에 집에 내려가기로 했다. 명절 연휴나 방학 때 잠깐 집에 들렀다가도 계획한 날짜보다 하루 이틀은 일찍 서울로 돌아오곤 했던 것이 내심 죄송했던 참이었다

이번 여름방학 때는 내내 집에 있으면서 엄마랑 데이트도 하고 애교도 부릴 거다. 엄마도 좋제. 한껏 귀엽게 이야기해봤지만, 너 성우 형아야가 집에 가나 보네. 내리온다는 소릴 다 하고. 역시 엄마는 뭐든지 다 알고 있었다.

 

서울역 앞을 빙빙 돌다가 기차 시간을 이십 분 남겨놓고 겨우 차를 세웠다. 한껏 멋을 낸 운전자가 시동을 끄자마자 핸들을 부여잡고 우는 소리를 냈다.

 

- 근데에, 삼 주나 어떻게 떨어져 있지? 우리 그렇게 오래 안 본 적 없잖아. 그냥 확 가지 말아버릴까?

 

- 에이, 누님 결혼하시기 전에 이렇게 오래 시간 보낼 기회 없잖아요. 내랑은 앞으로 평생 같이 있을 건데 뭐가 걱정이예요. 통화도 자주 하고, 영상통화도 하고 그러자. 진짜 못 참겠으면 내 바로 인천으로 가께. 맨날 불러도 된다.

 

- 아니야... 너도 본가 오래 내려간 적 없잖아. 이번 기회에 부산 친구들도 실컷 만나구, 어머님이랑 데이트도 많이 하구, 일도 도와드리구 그래.

 

- 응 응 그래 알아따. 형 하라는 대로 하께.

 

듣고는 있는지, 작은 머리통을 붙들고 쉴새없이 키스하는 강다니엘의 눈썹도 한껏 처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실제로 옹성우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별식이 끝나자마자 플랫폼으로 달려내려온 다니엘이 가까스로 열차에 올라탔다.  

좌석을 찾아 앉자마자 잘빠진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예고된 그리움까지 기대됐다. 뻐근한 아래턱 안쪽으로 침이 고였다.   

 

 

자그마한 땅덩어리에 기후 차이가 이렇게나 심할 일인지, 쉴틈 없이 올라붙는 말풍선 사이로 날씨가 오락가락 했다. 오랜만에 내려온 본가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방학이 모자라겠다 싶을 만큼 빡빡한 계획을 짰던 다니엘은 정작 방 안에만 눌러붙었다. 본격적인 여름도 오기 전 밀어닥친 역대급 더위였다

반면 성우는 말 그대로 꽃놀이 중이었다. 엄마 차를 빌려 타다가 누나가 타던 차를 물려받았다며 신이 나서 영상통화를 걸어오더니, 매일같이 차를 몰고 어디론가 나갔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수도권 날씨란 이 정도면 한국도 살 만하네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옹성우는 드라이브와 꽃구경과 테라스가 있는 카페를 아주 좋아했다.

오늘은 누나와 예비 매형과 함께 브런치가 유명한 카페에 왔고, 오늘은 엄마 아빠와 조개구이를 먹으러 왔고, 또 오늘은 휴가를 나온 고등학교 친구들과 일박이일로 펜션을 잡았다며 조그마한 액정 안에 뿅 나타나는 얼굴이 조잘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잘난 얼굴이 어쩐지 점점 피어나는 듯 보여서 다니엘은 조금씩 불퉁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애써야 했다.

 

학기 중에는 학점을 신경쓰고 과 행사에 동아리까지 해내느라 스트레스가 많았다. 옹성우는 누가 봐도 잘난 데다 여유롭기까지 한 사람이었고, 다니엘은 성우가 그 여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애쓰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성우가 몇 년 만에 모든 부담과 의무에서 벗어나 맞이하는 휴가였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고, 걱정할 거 하나 없다고 웃는 얼굴이 조금 통통해진 듯도 했다. 마른 볼에 조금이라도 살을 올려보겠다고 그렇게도 안달을 했는데 역시 제 어설픈 요리보다는 집에서 편히 먹는 밥이 최고인가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부산 집의 에어컨이 고장나는 것까지는 참기 어려웠다.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었다. 얕게 잠들었다가도 물 속에 잠긴 듯 답답한 숨에 자꾸만 깨어났다. 가슴이 답답해서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새벽에 홀로 깨어나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면 갑자기 외로워졌다. 성우가 잘 자는지 걱정되었고 답 없는 메신저가 원망스러웠다. 그립다는 뜻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다니엘은 그리움이 뭔지 몰랐다. 처음 겪는 불면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 나 엄청 졸리고 피곤한데 잠이 안 와요. 너무 덥다.> 

 

<부산 갑자기 폭염이라고 에어컨 수리 기사님이 2주 뒤에야 오신단다. 나는 열흘 더 있어야 되는데... 그냥 내일 올라가까?>

 

<형 맨날 이렇게 힘들었나. 맨날 놀러가자 해서 미안해요, 개피곤하다 진짜루... >

 

다니엘이 반쯤 꿈결 속에서 끝없는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성우는 달달한 꽃향기에 취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다니엘은 이미 가혹한 여름을 맞이했고 성우는 아직 향긋한 봄에 살았다. 둘의 시간이 아직과 이미 사이에서 조금씩 미끄러졌다. 불면의 밤이 엇갈렸고, 수면 패턴이 달라지자 자연히 연락도 뜸해졌다

다니엘은 오전이 되어서야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꼬박꼬박 졸기 일쑤였다. 성우가 걸어오는 영상통화를 받지 못하는 횟수가 늘었다. 대신 메신저에는 한껏 귀엽게 찍은 성우의 셀카가 쌓였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밀린 답장을 보냈다. 기껏해야 두 세 시간, 통화를 하거나 짧은 메시지를 주고받을 시간이 겹쳐졌다. 지금까지는 (조금 일방적으로) 들러붙어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을 뿐, 인기인인 두 사람이 연애를 하는 건 원래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 나 이제 깼다. 뭐해요? >

 

성우의 마지막 연락은 오후 540, 다니엘이 답장을 보낸 시간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친구들과 엄청 큰 찜질방에 왔다며 언제적 양머리를 뒤집어쓰고 식혜 빨대를 문 채 찍어 보낸 셀카를 한참이나 들여다 보았다. 무려 세 시간 동안 대화창 안의 모든 셀카를 샅샅이 핥은 뒤에야 답장이 도착했다.

 

<나 술 마~~ 늦으니까 먼저 자!$##>

 

이모티콘은 뜬금없이 덜덜 떨고 있는 복숭아였다. 뽀뽀 이모티콘을 보내려다 옆에 있는 걸 잘못 누른 것 같았다. 은근한 짜증이 올라왔다. 아니, 나는 세 시간 동안 답장 기다렸는데 그동안 술 마시고 있었나. 이렇게 만취하기 전에 답장 하나 해주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한껏 투덜거리다가 전화를 걸었는데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이제는 헛웃음이 터졌다

다니엘은 조용히 선풍기를 ''으로 고정시키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눈 위에 팔을 걸치고 생각했다. 지금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왜 짜증이 날까? 성우 형이 나 없이 술을 마셔서? 핸드폰이 꺼져서? 날이 너무 더워서? 답장을 늦게 보내서? 다 제가 하던 짓이었다. 성우도 가끔. 다니엘은 단 한번 연락 문제로 싸웠던 때를 떠올렸다

 

 

 

 

- 왜냐하면 우리는 운명이니까, 서로에게 너무 딱 맞는 조각이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내가 아는 만큼 너도 알고 있을 테니까. 우리까지 남들 기준에 휘둘릴 필요는 없는 거니까. 나는 형이 제일 소중하고 중요한데 왜 형은 우리 밖에서 문제를 끌고 들어와요. 뭐 그렇게 생각이 많고 고민이 많아요. 그니까 잠을 못 잔다 안 해요

 

- 니 말대로 나는 늘 불안해.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인정할게. 그런데 나는 겁이 나. 니가 세워둔 벽이 너무 안락해서 평생 눈 감고 귀 닫고 살고 싶어질까 봐. 그리고,

 

옹성우가 얇은 입술을 깨물었다.

 

- 그리고 나도 알아. 너는 우리가 딱 맞는 조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네가 나를 너무 꼭 끌어안고 있어서 틈이 없는 것뿐이잖아. 내가 너를 찌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가진 구멍이 너무 커서 너를 다 쏟아부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싸워도 좋았다. 서로를 서로만큼 사랑한다는 사실을 둘 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이 외면할까봐 겁난다는 성우가 혼자 남을 미래는 꿈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아서, 다니엘은 그 순간에도 가슴이 벅찼었다.

 

 

게다가 매일 한나절씩을 꾸벅대느라 연락에 소홀했던 건 저였다. 말로는 잤다 하고 밖에 싸돌아 다녔을지 우찌 아는데. 나였으면 한번, 아니 솔직히 두 번쯤은 의심했을 거다. 다니엘은 새삼 옹성우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배려해주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너무 못나서 몸부림치다가 새삼 제 연인에게 다시 반하다니, 이쯤 되니 옹성우가 너무 잘난 건지 제가 세기의 팔불출인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둘 다겠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커다란 트렁크를 열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니엘이 강해지는 여름이었다

 

 

 

-

 

 

 

다니엘은 여름을 한껏 묻히고 서울로 돌아왔다. 다니엘이 둘의 집으로 돌아온 날, 거짓말처럼 서울에 기습적인 폭염이 들이닥쳤다. 커다란 트렁크, 제 덩치의 반 만한 박스, 분홍 보자기로 고이 묶은 아이스박스를 전부 끌고 올라올 날씨가 아니었다. 하나는 엄마한테 택배로 부쳐달라 할 걸. 후회해봤자 소용 없었다. 이 짐 다 중요하다고 떼를 썼던 게 반나절 전의 저였다. 두 번 정도 땀에 푹 절어서야 겨우 집 앞에 도착했다. 두 시간 쯤 전력 질주를 한 기분이었다

서둘러 찬물을 뒤집어쓴 뒤 집에서 챙겨온 반찬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돌아서기가 무섭게 에어컨 커버를 뜯어냈다. 좁은 욕실 바닥이 에어컨 필터와 선풍기 날개, 먼지가 앉은 방충망과 각종 솔, 세제로 꽉 찼다. 다니엘이 그 구석에 가뜩이나 큰 덩치를 접어넣고 다시 땀을 뻘뻘 흘렸다.

꼬박 두 시간 반이 걸리는 대청소를 마쳤지만 보기에는 별로 티가 안 났다. 반찬통을 담아온 아이스박스나 잔뜩 널어놓은 티셔츠와 수건이 넓지 않은 오피스텔을 더 좁아보이게 했다. 거기에 등짝을 십수 대나 맞아가면서도 꼭 품에 안고 돌아온 서큘레이터까지 한 자리를 차지했다. 집에 있을 땐 안 이랬는데 여기 두니까 왜 이렇게 커 보이노... 형한테 혼나겠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옹성우가 돌아왔다. 있지도 않은 꼬리를 붕붕 흔들며 성우를 번쩍 들어 소파에 내려놓고 시원한 주스를 따라 주겠다며 냉장고를 열어젖힌 순간부터 혼났다. 니엘아, 그 냉장고 안에 빽빽한 벽돌들은 뭐지? 내 눈엔 꼭 대형 김치통처럼 보이네?

 

- 우리 집에서 밥도 잘 안 해먹잖아. 무슨 김치를 5종 세트로 받아 왔어.

 

- 아니 나는 형이 저번에 울엄마 갓김치 맛있다캐서 가져왔지. 이거 열무김치도 이번에 엄청 맛있게 됐으요. 형 열무국수 해주려구 레시피도 다 적어왔다. 여름에 소화도 잘 안 되잖아요.

 

각종 반찬통부터 서큘레이터까지(제일 길게 혼났다) 골고루 집을 한 바퀴 돈 뒤에야 비로소 소파에 파묻힐 수 있었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잔소리 틈을 재주 좋게 파고들어 끈질기게 키스하는 통에 시간이 배로 걸렸다. 차가운 유리잔에 부어오른 입술을 대고 식히던 옹성우가 다니엘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 너어, 집 내려가서는 갑자기 잠을 못 잔다고 해서 걱정시키더니 아예 집을 통채로 뜯어왔어?

 

- , 너무 괴로워가. 나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솔직히 잠이 왜 삼대 욕구에 들어가는지 이해 못했거든요. 나머지 두 개는 알겠는데, 잠이 그렇게 중요한가 싶었단 말이에요. 이번에 제대로 알았다. 나 이제 형 잘 자는 거가 제일 중요하다. 그거 중심으로 살거예요

 

- 진짜? 그럼 이제 나 피곤하다고 하면 딱 포기하고 안 건드릴 거야

 

우다다 말을 쏟아내던 입이 꾹 다물렸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기껏 쥐어짠다는 변명이 식상했다.

 

- ... 근데 그런 거 있지 않아요? 적당한 운동을 하고 나믄 잠이 잘 온다는 얘기를 내 분명 들었던 거 같은데...

 

- 그게 적당한 운동이야? 너 전에 전공 실기보다 운동 효과 좋은 거 같다고 한 거 기억 안 나나보네.

 

빙글빙글 웃으면서 받아치는데, 역시 말로는 옹성우를 이길 수 없었다

 

- ... 알았다. 앞으로 형 힘들다고 하면 절대 안 건드릴게. 형이랑 하는 것도 엄청 좋지만 내는 형이 안 피곤하고 잘자고 건강한게 더 좋아요.

 

- 아휴, 우리 멍멍이가 며칠 힘들더니 다 커서 왔네에?

 

기특하다며 엉덩이를 팡팡 치던 손이 은근슬쩍 바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근데, 오늘은 쫌 안 피곤한 거 같기도 하구... 말 끝이 사륵 말려들었다.

 

강다니엘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튼튼하고 제 몸을 최대한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몸을 쓸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기껏해야 삼 주를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기어코 침대 헤드에 달린 둥근 나무 장식을 부쉈다. 옹성우는 망연한 표정으로 공 모양 장식을 손에 든 다니엘을 보고 까르륵대며 사진을 찍었다.

 

- , 장난감 망가트린 강아지 같아.

 

- 햄 웃을때가 아이다. 이거 어뜩하는데...

 

- 뭘 어떡해, 나중에 오른쪽 것도 뿌셔버려야지. 괜찮으니까 거기 두고 이리 와

 

다니엘의 품에 폭 안겨서 팔베개를 하고 누운 뒤에도 방금 찍은 사진을 넘겨보며 작은 머리통이 자꾸만 키들댔다

 

- 그만 웃어라. 나 진짜 놀랬다고... 

 

- 아니, 이렇게 덩치는 산 만한 애가 쪼끄만 공같은거 잡고 울상하고 있으니까 웃기고 귀여워서 그렇지. 다니엘 너는 나랑 키는 비슷한데 왜 이렇게 덩치가 큰 거야

 

- 글쎄요, 잘 자고 잘 묵어서 그른가... 근데 햄도 잠 못 잔 거 치고 키가 컸다. 원래 아들은 잘 때 큰다 안 해요.  

 

- 그러게, 어릴 땐 잘 잤으니까. 나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키 하나도 안 컸거든

 

- 그랬으요? 큰 애기였겠네 완전. 그때 사진 없나. 본가 가서 어릴 때 사진 찍어온다 했잖아요

 

- 있지, 또 왕창 찍어 왔지. 너 나 어릴 때 얼마나 잘나갔는지 모르지? 이것 봐 진짜 깜짝 놀란다구. 보는 사람마다 다들 연예인 하라구 아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랬다니까

 

한창 서로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웃다가, 아주 오랜만에 두 사람은 함께 잠에 빠졌다. 적당한 운동이 도움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

 

 

 

하지만 강다니엘의 유난스러운 노력에도 옹성우의 불면증은 점점 심해졌다. 수면검사까지 해보았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다.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면 다음날 하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마른 몸 곳곳에 간신히 붙어있던 살이 귀신같이 내렸다

 

요즘 왜 이렇게 모든 게 피곤한지 모르겠네. 잠을 못 자서 그런가?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곧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다니엘은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성우의 얼굴을 감쌌다.

 

그런가봐요. 일도 너무 많다이가. 다른 사람 좀 시켜요. 나도 많이 도와줄 수 있는데

 

아냐, 안 그래도 너한테 너무 많이 부탁하잖아. 과사 갔더니 조교 누나가 이건 니가 안다고, 경호과 강다니엘 불러오라고 했다던데

 

 

누구에게나 다정한 과대 옹성우가 요즘 까칠해졌다는 소문을, 다니엘은 각기 다른 세 사람에게 전해들었다. 조모임에 늦은 선배가 멋쩍게 웃으며 커피를 돌렸는데 그 앞에서 표정을 굳혔다고 했다. 이걸 사 오실 시간에 조금 더 일찍 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저한테 자료 조사 대신 해달라고 따로 연락도 하셔놓구 모임도 늦으실 줄은.. 솔직히 좀 놀랐네요. 라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고 떠드는 후배의 눈이 작아질 생각을 안 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밖에 다양하고 사소한 '옹성우 흑화설'이 돌았다. 단과대까지 다른 다니엘의 귀에 들어올 정도면 어지간히 힘든 것 같았다. 다니엘은 성우의 선택과 그 선택들로 쌓아올린 인생을 존중했다. 좀 놓을 필요가 있다고도, 휴학을 하고 치료를 받는 게 어떻겠냐고도 말할 수 없었다

 

 

졸지에 다니엘까지 끙끙 앓았다. 애인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경영학과 개강 총회에 난입했다가 절친이 된 재환이 다니엘을 걱정했다

 

, 아픈 건 성우 형이라며 왜 니가 다 죽어가냐

 

부부는 일심동체다. 차라리 내가 아프고 싶은데 나는 밤 되믄 막 잠이 쏟아진다. 형은 왜 잠이 안 오지

 

내가 알겠냐. 병원에서도 딱히 원인 없다고 했다며. 그리고 보통 불면증은 맘 편하게 먹고 그런 것밖에 답이 없다던데

 

근데 이상하게, 나는 꼭 원인이 있을 거 같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야 그러면... 점이라도 한번 봐 볼래? 왜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 같은 거 고치는 것도 있다잖냐.

 

내랑 성우 형 둘 다 기독교그든? 니도 성당 다닌다며 그런 거 추천해도 되나.

 

야야 괜찮아, 괜찮아. 우리 엄마 성가대 다니는데 매년 점보러 다녀. 단골집도 있을 걸? 내가 연락처 물어봐서 알려줄게. 니가 하도 답답해하니까 내가 이런 것까지 알려주잖냐. 감사히 생각해라 어?

 

 

 

성우가 기어코 코피를 쏟은 날, 다니엘은 재환과의 대화창을 열어 저 위로 떠밀려 올라간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그리고 다음날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문자에 적힌 주소 앞에 섰다

 

다니엘, 너 이런 거 싫다며. 나도 쪼금 무서운데.. 

 

내가 재환이한테 들었는데 요새는 다 컴퓨터로 한다드라. 무서운 거 아니래요. 혹시 아나, 원인 알아낼지. 모른다카면 궁합이나 봐 달라고 할 거다.

 

, 웃어보이며 다니엘이 초인종을 눌렀다

 

과연 번듯한 사무실 같은 내부에, 최신형 컴퓨터를 앞에 둔 남자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시원한 차를 내주는 손끝마저 프로페셔널해 보였다. 다니엘이 간단히 전화로 진행했던 상담에 살을 붙여 설명했다. 우리, 아니 이 형이 통 잠을 못 자는데 병원에서는 별 원인을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건 말이 안 되고 원인이 알고 싶다, 가 이야기의 요지였다.

두 사람의 생년월일을 묻고('근데 내 사주는 와 묻노, 서비스로 궁합 봐줄라카나') 컴퓨터에 무언가 쳐 넣은 남자가 잠시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눈을 뜬 남자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전생의 업보 때문이야. 자다 죽었네

 

전생이요? 그런 게 있다고요? 아니 그리고, 자다 죽으면 호상이라 한다 아니에요

 

그거는 자다가 숨이 멎는 거고. 여기는 자고 있는데 누가 죽였어.

 

... 우짜노 우리 형아. 그래서 잠 못 자는갑다. 불안해서

 

당장 누군가 죽이러 온다는 것도 아닌데, 다니엘은 주위를 둘러보며 양팔로 성우를 꼭 껴안았다. 둘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그 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무튼 그렇다는 거고, 불면증 고치는 데는 밥 잘 먹고 해 많이 쬐고 적당한 운동 꾸준히 하는 게 최고야. 알았으면 나가 봐. 복채는 삼만 원.

 

 

갑자기 서두르며 말을 쏘아대는 남자에게 말린 게 분명했다. 얼떨결에 지갑에서 지폐 세 장을 꺼내 공손히 내밀고 내쫓기듯 현관문 밖으로 나섰다. 멍하니 몇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햄아 근데 저 사람이 한 거는 네이버에 '잠 안 올 때'만 검색해도 다 나오는 말이다이가... 그거 알려주고 삼만원 너무했디.

 

그르니까. 괜히 전생이니 뭐니 무서운 얘기나 하구.

 

앞으로는 이런 거 하지 말자. 재환이가 추천한 거를 믿은 내가 바보다. 아무튼 나온 김에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자.

 

 

두 사람은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고, 파스타를 먹었다. 다니엘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성우의 잠자리를 챙겨준 뒤 혼곤한 잠에 빠졌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눅눅한 여름날의 저녁이었고 시장통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의 생소한 복식과 나지막한 가게들을 보고 요즘 사극도 안 보는데 와 이런 꿈을 꾸노, 중얼대던 참이었다. 다니엘은 문득 자신이 이 꿈 속에서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속삭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사실이 고스란히 머리속으로 들어왔다. 꿈이지만 현실을 걷고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왼손을 펼쳐 앞뒤를 살폈다. 알 수 없는 상처가 많고 기억보다 조금 더 거칠지만 제 것임이 분명한 그 손가락을, 다른 손이 불쑥 나타나 모아 잡았다

 

왜 갑자기 손은 들여다 봐? 막 손가락이 허전하구 그르나? 역시 아까 본 반지가 이쁘긴 했나부다, 그치?

 

고개를 돌리자 생소한 복장을 한 성우가 있었다. 어색할 법도 했으나 장난스레 코를 찡긋거리는 잘생긴 이목구비가 그대로라 안정감이 먼저였다

 

... 그건 아이고

 

아니야? ... 

 

얼굴 앞에서 갸웃대는 고개가 못 견디게 예뻤으나 왠지 꿈에서는 손을 뻗기 어려웠다. 아무튼 꿈 속에서도 제 연인인 성우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제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얼굴 옆으로 연등 불빛이 아룽거렸다. 다니엘은 이 꿈에서 깨어나면 옆 자리에 잠들어 있을 형에게 이 장면을 꼭 이야기하리라 결심했다. 어둑하고 소란한 여름밤에 동그란 눈동자만 빛나더라고, 외워두었다가 말해줘야지. 늘 금세 빠져나가버리는 꿈을 꾸지만 이렇게 외워둘 장면도 가끔은 있었다

 

 

제법 긴 꿈이었다. 다음 순간은 성우의 방 안이었다. 통 잠이 오지 않는다고 칭얼대는 얼굴이 현실과 꼭 같아서 저절로 행복이 차올랐다. 곁에 앉아 성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곧은 눈썹뼈와 미간을 쓸어낸 손이 콧대 옆으로 미끄러져 움푹 들어간 눈 위를 덮었다. 손등으로 볼 위에 박힌 점까지 쓰다듬었으나 검은 눈동자가 반짝 뜨였다. 야속할 만큼 말똥말똥했다.

다니엘은 한참 동안 성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 말이 많다며 저를 구박했던 형인데 꿈 속에서는 역할이 뒤바뀌어 있었다. 조잘대던 목소리가 조금씩 느려졌다. 쉬지 않고 얼굴과 귀, 머리와 목덜미께를 도닥이던 손도 속도를 늦췄다

 

근데 오늘 너무 덥지 않아? 문 쫌만 열어두고 자면 안 될까? 밖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던데

 

그럴까요

 

옹성우는 생채기가 가득한 손이 미닫이를 열어 바람이 들어올 틈을 내는 모습을 보고 미소지었다. 곧 약한 바람이 이마를 간질였다. 혹시 모를 침입자에 방비하기 위해 문틀에 달아놓은 작은 종이 바람에 흔들렸다. 종 소리가 맑지는 않네요. 잠시 고민하던 다니엘이 일어서 종을 떼어냈다. 만족스럽게 휘어진 눈이 얇은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빼곡한 속눈썹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다니엘도 앉은 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분명 얼마간 잠을 잔 것 같다. 그런데 꿈 안에서 또 잠을 잘 수가 있나? 문득 드는 의문과 함께 생소한 고통이 목덜미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한번도 죽어본 적은 없었지만 이 고통을 죽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박혀왔다. 목을 꿰뚫은 금속의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꿈은 계속되고 있었다

눈을 부릅뜨자 방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흐리게 보였다

옹성우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은 너무 많았으나 정작 그들의 손아귀에 맨몸의 성우를 던져준다 해도 그 목을 꺾을 수 있는 자는 없을 터였다. 옹성우의 가문은 온 나라의 증오와 질시, 우려를 한몸에 받았지만 그만큼 견고했고 아무도 가문의 외동아들을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집 지키는 개 한 마리 정도라면 적당히 신경을 거슬리게 할 경고가 될 수 있을 거였다. 꿈 속의 강다니엘은 아주 적합한 선물 같은 경고가 되어 죽어 나자빠지는 중이었다. 다니엘은 작은 종을 떼어낸 것을 잠깐 후회했다

 

온몸의 신경이 아귀처럼 금속 칼날에 들러붙어 고통을 핥았다. 제가 원하기도 전에 마음을 읽고 움직여주었던 손발이, 이제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기는 커녕 까맣게 점멸한 시야를 돌릴 수도 없었다. 눈을 뜨고 있는지 귀가 먹었는지 죽음의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불면과 반대되는 괴로움이 금속에게 찢기는 예리한 고통 아래로 뭉근히 깔렸다. 울컥울컥 피가 쏟아져 나올 때마다 고통이 극한에서 한 단계씩 더 올랐다. 매 순간 최고를 갱신하는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다니엘은 꿈 속에서 꿈틀대는 자신의 몸뚱이를 선명하게 느꼈다. 길게 누운 몸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간헐적인 경련이 지나자 고통도 멎었다

 

그때부터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차라리 다시 목이 찢겼으면 하고 바랐다. 옹성우가 눈을 뜨자마자 보아야 할 광경을 생각하니 다시 죽고 싶었다. 시간을 돌려 살아나고 싶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영원 같은 시간이 더디게 지났다. 그 와중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에도 깨지 않는 성우가 대견하다는 생각을 언뜻 했던 것 같다

길고 괴로운 시간이 지나 가장 바라지 않던 순간이 왔다. 가볍게 뒤척이던 옹성우가 눈을 비볐다. 찡그렸던 미간이 펴지고, 잘 잤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깜빡이는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왼쪽을 보았다. 눈이 커지고 턱이 파들 떨렸다. 그 눈을 본 순간 이미 멎은 심장이 너무 아파서 헉 하는 숨을 내뱉었다

 

 

 

숨을 내뱉으며 몸이 튕겨져 올라왔다. 악몽을 꾼 뒤 울면서 깨어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일어나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온 건 처음이다. 눈을 뜨면서 알았다. 꿈 속의 옹성우는 평생을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살았다. 밤마다 불면에 시달렸고 여름이 오면 매일 괴로워하며 울었다. 그 커다란 기억이 꿈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한번에 쏟아졌다. 죽은 것은 저인데 더 오래 아파한 옹성우가 안쓰러웠다. 그때도 지금도 강다니엘은 옹성우를 너무 많이 사랑했다

 

꿈에서 본 옹성우와 지금 제 옆에 누운 옹성우의 얼굴이 똑같이 겹쳐졌다. 아마 저도 지금의 제 나이 때 죽은 것 같았다. 이전의 자신이 건너지 못했던 마지막 여름을,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지나는 중이었다. 다니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름을 뛰어넘으리라 결심했다. 폭염과 장마, 습기와 숨 막히는 공기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고 자신을 해하지 못하게 하리라 다짐했다

두 사람의 냉장고에는 손맛 좋은 어머니가 담근 열무김치가 있었고, 다니엘이 받아온 레시피는 최고로 시원한 열무김치국수를 보장했다. 필터를 깨끗이 닦은 에어컨은 이번 여름 내내 튼튼할 거였다. 언제든 피서를 가도 좋은 부산 집이 있었다. 원한다면 오피스텔 옥상에 풀장을 만들어줄 수도 있었다.

약한 부채질로 성우의 앞머리를 살랑이게 하는 다니엘의 팔은 지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성우는 꿈결에 아주 약하고 꾸준한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언뜻 생각했다. 나는 한번도 이 바람이 그칠까 불안했던 적이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