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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너를 기억해 3

Sukina

 

 

 

 

 

 

 

 

 

 

 

 

큰 교통사고를 당한 성우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산소호흡기와 각종 의료기기를 몸에 덕지덕지 붙인 채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생을 이어간다고 하기 보다는, 억지로 생을 붙들고 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커다란 1인실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고, 그 위에 성우가 누워있었다. 두 눈을 깜빡이지도,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용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여러 기기들은 저마다 깜빡이며 돌아가고 있고, 성우의 입에 붙은 호흡기는 그에게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병실에는 성우 혼자 있었다. 가끔 간호사들이 한 번씩 들어와 성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의식 없이 누워만 있으니 식사가 오지도 않았고, 절대 안정이 필요하기에 사전에 허락받은 가족이 아니고서는 병문안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성우가 사고를 당한 날 이후 그를 볼 수 없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저 복도에서 서성일 뿐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성우의 병실을 향해 다가오려 치면 모르는 척 지나가며 열린 문틈으로 성우의 상태를 보려 애썼다.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의식불명의 환자가 있다 보니 문을 활짝 열거나 열어두지 않았다. 출입 자체가 조심스럽다 보니, 다니엘이 보고 싶다고 해서 무작정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

 

 

오늘도 다니엘은 병실 출입문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깨어났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사고 이후 성우의 휴대전화는 전원이 꺼져있어서 연락이 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연락이 닿는다고 하더라도 성우는 아닐 것이다. 톡을 보내도 숫자 1은 사라지지 않고, 답도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봐야 전원이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라는 멘트만 수십 번째 듣고 있다.

 

 

저기... 성우랑 아는 사이세요?”

 

 

병실 앞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문만 바라보던 다니엘에게 새하얀 원피스에 옅은 분홍빛 카디건을 걸친 긴 머리의 여성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옅은 화장에 수수한 차림새의 그녀는 굵은 웨이브의 긴 머리가 참 잘 어울리는 듯 했다.

 

 

... . 성우형이랑...”

성우 후배인가... , 저 성우 누나예요.”

안녕하세요.”

 

 

다니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부터 숙였다. 그녀는 웃으며 그만하고 앉으라며 다니엘을 다시금 앉혔다.

 

 

성우의 누나라던 여자는 성우처럼 눈이 참 맑았다. 단정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녀를 통한다면 성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건네는 인사에 답을 들을 수는 없어도, 보고 싶었다며 절절하게 그리움을 내뱉으면 듣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할 수 없어도 그저 성우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보고 싶었다.

 

 

성우 보러 올 때마다 보이시기에... 성우랑 아는 사이인가 했거든요.”

... 들어가서 보고 싶었는데, 좀처럼 엄두도 안 나고...”

그렇죠? 저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성우가... 성우 같지 않아서...”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성우가 성우 같지 않다는 말이 다니엘에게는 참 슬프게 와 닿았다.

 

 

성우... 보고 싶으면 들어가서 보세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성우는 보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럴까요...?”

부모님은 오실 때마다 울기만 하시고, 저도 들어가서 볼 때마다 울기만 하거든요.”

...”

그래도 성우랑 꽤 친한 사이인 것 같은데, 들어가서 이런저런 얘기 해주면 성우도 좋아할 거예요.”

 

 

성우의 누나는 다니엘보다 먼저 일어섰다. 간호사실에 성우의 친구로 등록해두고 출입을 허락받아 놓겠다며 다니엘의 이름을 물어갔다.

 

 

다음에 오면 성우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다니엘은 오늘에서야 들뜬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문 앞에 앉아 성우에게 조용히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 나 내일 다시 올게. 성우는 답이 없었지만 다니엘은 마치 답을 들은 사람처럼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병실 앞을 떠났다.

 

 

 

 

 

*

 

 

 

 

 

성우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면의 밤을 보내며 창문 앞을 지키고 앉아 작은 돌멩이가 자신의 창을 두드려주길 바라고 또 원했다. 기다리는 내내 소식 한 자 들을 수 없어 원망스러우면서도, 불면의 밤을 보내는 내내 둘만의 불꽃놀이와, 달큰했던 입맞춤과, 든든했던 품은 잊히지 않았다. 급작스러우면서도 뜨겁게 다가왔던 그 사내를, 성우는 쉬이 의건을 제게서 떨쳐낼 수 없었다.

 

 

요 며칠 블루노트에 가도 의건을 만날 수 없었다. 술잔을 건네던 바에서도 의건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지 알 방도가 없으니 찾아낼 수도 없었다. 아는 거라고는 생김새, 차림새,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 만남을 돌이켜볼수록 그저 놀라운 사람이라는 것. 정말 딱 그 정도였다. 모든 것이 그를 찾아내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밤하늘의 한 가운데 떠오른 달은 유난히 밝았고, 달 주변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말끔했다. 밝다 푸른빛을 내는 달빛이 저리도 환한데, 달빛이 비추는 거리에 왜 그 자가 없는지. 왜 의건이 없는지.

 

 

성우는 한창 창가에 앉아 달빛을 보다 방을 나섰다. 담담하고 탁해진 마음을 씻어내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널따란 뒷마당을 산책이라도 할 겸 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무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향긋한 풀의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고요한 밤공기가 성우의 온몸을 감싸며, 성우가 걸음을 뗄 때마다 묘한 기운을 몰고 왔다. 정원에 일정 간격을 두고 늘어선 전등들이 발하는 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스며들어 멋들어진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실수일까.”

 

 

혼란스러움에 정신을 놓아 실수로 흔들린 것인지.

 

 

나의 실수일까.”

 

 

그저 나의 다니엘이라고 생각하며 의건에게 손을 내밀었던 나의 실수일까.

 

 

실수...”

 

 

실수로 치부해버리기에 의건은 성우에게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비를 만나 온몸이 흠뻑 젖듯이 그저 제게 스며들었던 그 언젠가의 다니엘처럼, 의건도 그랬다. 이러다 2018년으로 돌아가더라도 다니엘을 잊고 의건을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슴없이 다가오던 첫 만남부터 너무도 닮아서, 외모나 말투도 너무 다니엘 같아서 단순한 착각이 빚어낸 실수가 아닐까 싶었다.

 

 

잦은 불면을 선사한 치명적인 실수.

 

 

 

 

 

그대여, 달빛은 이미 충분한데 누구를 기다리는가.”

 

 

정원 곳곳에 세워진 전등을 벗 삼아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느릿한 걸음으로 걷고 있던 성우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내뱉어지는 목소리.

 

 

달빛 아래서 속삭이면 그대에게 닿을 수 있는가.”

 

 

그 목소리에 성우의 걸음은 멈추었다.

 

 

어리석게도 나를 기다리는 실수를 범하는가.”

 

 

멈춰선 성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살피는데, 정원에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분명히 목소리가 들렸지만, 모습을 드러내야 할 의건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의건의 목소리였는데 말이다.

 

 

나타난 거예요?”

 

 

대답은 없었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의건씨?”

.”

 

 

성우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옅게 헐떡이는 숨소리만 정원을 맴돌고 있던 그때, 담장 밖으로 시끄러운 소리가 한바탕 지나간다. 주변을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 정신없는 발소리들, 누군가를 찾는 듯 앙칼지게 부르는 목소리들. 성우는 정원에 멈춰 선 채 담장 밖에서 나름 숨 막히는 추격전을 진행 중인 일본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긴 칼을 손에 든 채 이리저리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숨어버린 건지 보이지 않는 의건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성우는 우두커니 혼자 선 채 제 눈에는 제법 신기한 광경을 구경거리 삼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 검은 옷을 입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사내가 담장 앞에 멈춰 선 채 성우를 바라보았다. 성우의 아래를 힐끔거리듯 시선을 아래로 깔아 내렸는데, 시선의 끝에는 그저 어둠뿐이었다. 다시 시선을 치켜 올려 성우를 바라보더니 무언가 물어보았지만 일본어라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바짝 붙어 서있던 남자가 성우에게 말을 걸었다.

 

 

수상한 자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수상한... 자요?”

.”

수상한 자가... 누구죠?”

 

 

정말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하는 성우를 보던 남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는 성우에게 간단히 목례를 건넨 뒤 자리를 떠났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수상한 듯 계속 성우의 주변을 힐끔거리는 것 같았지만 담장에 더욱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시끌벅적하게 담장 앞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일본군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성우는 조심스럽게 혼잣말 하듯 입을 열었다.

 

 

어리석게도 당신을 기다리는 실수를 범했으니.”

 

 

성우의 목소리가 듣기 좋게 공기 속을 헤집었다.

 

 

달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내주오.”

 

 

성우의 앞에 낯익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달빛 아래서 속삭일 테니 내게 닿아주오.”

 

 

그림자는 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우의 앞에 의건의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성우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사람이다. 성우를 손으로 쥐고 세차게 흔들어대던 그, 강의건이다.

 

 

어떻게 왔어요?”

여기는 안전하니까.”

안전... 해요?”

그쪽 아버지가 살고 있는데, 위험할 리가 있나.”

 

 

의건은 어둑한 담벼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성우는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얼굴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묻어 있는 검은 자국. 땀에 젖어 이마에 눌러 붙은 머리칼,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두 눈, 의건의 모습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성우가 생각하던 모습에 차림새까지 그대로였다.

 

 

, 받아.”

 

 

의건이 살포시 움켜 쥔 주먹을 내밀었다. 그를 본 성우가 손바닥을 의건에게 내밀었다. 성우의 손바닥 위에서 의건의 주먹이 조심스럽게 벌어졌다. 펼쳐 진 의건의 손바닥에서 수줍게 붉은 꽃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제 색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꽃송이가 올려 진 손바닥을 치켜들어 달빛에 비추어 보니 불그스름한 꽃잎의 결이 생생히 눈에 들어왔다.

 

 

백일홍? 맞죠?”

기억하고 있네.”

 

 

성우는 의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벼락에 기댄 채 옅은 한숨을 내쉬어 본다. 한 손에는 백일홍을 쥐고, 손을 치켜들어 달빛에 백일홍을 비춰 본다. 커다란 달 속에 백일홍의 꽃송이를 담아보기도 했다.

 

 

그런 성우를 바라보며 의건은 한참 말이 없었다. 꺾어진 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달빛에 비춰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는 모습도, 반짝이는 눈동자도, 수줍게 앙 다물었다 이내 미소로 번지는 입술도 너무나도 성우다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의건은 성우를 향해 제 고개를 가져다 대었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숨이 그대로 성우의 뺨에 가 닿았다.

 

 

이놈의 욕심은 가라앉지 않네.”

 

 

의건은 성우의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 덕에 놀란 성우의 눈이 커졌다. 성우의 고개가 천천히 의건을 향해 움직였다.

 

 

만나고 싶었어.”

왜 블루노트에 없었어요?”

왔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래요?”

봤어. 들어와서 날 찾는 것도.”

 

 

의건은 성우와 눈을 마주치며 한쪽 뺨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들어와서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꼭 날 찾는 것 같더라.”

 

 

의건의 입술이 성우의 입술에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를 찾더라.”

 

 

둘의 입술이 닿았다. 성우의 한 손은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의건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의건의 한 손은 성우의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서로에게 바짝 들러붙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반짝이는 은색의 달빛이 내려앉았다. 하나의 그림자를 만든 두 사람은 입맞춤을 나누며 서로에게 가지고 있던 그리움을 토해냈다. 만나고 싶어 애가 타는 심정을 내뱉었다. 서로를 원하고 있음을 말없이 전하고 있었다.

 

 

동시에 성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의건을 만나 입을 맞추고 있지만, 다니엘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똑같을 정도이지만 정작 다니엘은 아니니까. 2018,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던 다니엘을 여기서 다시 만났다고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이 시대에 와 있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왔다고 해서 다니엘까지 함께 왔다는 건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함께 왔다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의건은 다니엘의 전생인 걸까? 아니면, 일생에 한 번 만날까말까 한 다니엘의 도플갱어쯤 되는 걸까.

 

 

두 사람의 입맞춤이 달빛아래 촉촉하게 물들고, 마주보는 시선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보며 의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꿈이 뭐야?”

꿈이요?”

그래. . 나중에 되고 싶은 게 있다거나,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거나.”

글쎄요? 의건씨는요?”

나야... 독립이지.”

 

 

성우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예전에는 독립까지였는데, 조금 더 늘었지.”

꿈이 늘었어요?”

그렇게 됐어.”

뭔데요?”

 

 

의건은 성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독립한 우리나라에서 너와 함께 마음 편히 산책하는 것.”

 

 

의건의 말에 성우가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성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의건은 그를 따라 웃었다.

 

 

혹시... 전생을 믿어?”

전생이라... 글쎄요?”

그럼,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

사실... 그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참 추상적인 질문이었다. 전생을 믿는지,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런 것들은 그저 꿈이나 환상 속에서 가능한 생각이라 여겨졌다. 2018년의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오직 생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지, 달콤한 환상에 젖어 전생과 후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사실 성우는 자신이 경성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전생과 후생은 믿지 않았다. 한 번 태어나서 죽으면 끝이지, 그 생의 앞뒤로 또 다른 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2018년을 살아가던 자신이 이 시대에 떨어져서 낯선 환경이 자신의 것임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은 사실 너무도 낯선 일이었다. 죽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었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을 거슬러 책 속에서나 보던 시대에서 멀쩡히 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살아있는데 이 시대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저 평범하게 연애하며 살고 있었을 뿐인데 전생과 후생을 오간다? 이게 가당키나 할까.

 

 

전생도 후생도... 다시 태어나는 것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성우의 말에 다니엘이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 인연이라면 전생에서도 후생에서도 만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럴 리가...”

만난다면 어떨 것 같아?”

새롭거나, 놀랍거나?”

좋은 의미였으면 좋겠네.”

 

 

의건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왜인지 모르게 그랬다. 성우는 그런 의건을 바라보며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여 기대었다.

 

 

독립운동 하는 거... 위험할 텐데...”

위험하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저 작은 힘이나마 보탤 뿐.”

위험하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있지 않아요?”

독립을 꿈꾸는 것부터 위험한 것 아니겠어?”

그런가?”

 

 

그리고 다시금 둘 사이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다니엘씨.”

뭐라고?”

 

 

자신도 모르게 성우의 입에서 다니엘의 이름이 나왔다. 그러자 의건은 놀란 듯 성우를 내려다보았다.

 

 

, 미안...”

 

 

성우가 자신의 입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의건에게 몇 번이나 사과를 건넸다.

 

 

나도 모르게 나와 버렸어요. 미안해요.”

다니엘... 아는 사람인가?”

... 제게 특별하다면, 특별한 사람이에요.”

특별한...”

.”

나는 어떤가? 어떤 사람이지?”

 

 

의건의 말에 성우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환히 빛나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의건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다지도 궁금하고 애가 탈까.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떠올렸다. 낯선 시대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말을 섞어 본 낯선 사람. 첫인상부터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그저 멍하니 말하는 대로 듣고,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옮기게 만들었던 사람. 언제 오는지 기다려지는,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이 좋을까.

 

 

머릿속을 한참 맴돌던 수많은 단어 중에 하나가 성우의 입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매순간 안녕한지 궁금한 사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별 탈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궁금하고, 끼니는 거르지 않았는지 궁금하고, 위험에 처한 건 아닌지 궁금한 사람. 언제나, 항상, 매순간 안녕한지 궁금한 사람. 그런 사람이 의건이었다.

 

 

독립운동 한다니까 더 걱정돼요.”

그런가?”

특히 오늘처럼 일본군을 피해서 몸을 숨기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싶고...”

이런 일이야 뭐 익숙하지.”

오늘은 나를 보러 와주려나, 블루노트로 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궁금한...”

그래?”

 

 

의건은 성우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고 손등을 입술로 지긋하게 누른다.

 

 

의건씨?”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

“......”

내일도 여기서 만나.”

내일?”

그래, 내일. 오늘과 비슷한 시간에 불현 듯 찾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나와 주겠지. 매순간 안녕한지 궁금한 사람이니까 궁금해서라도 나오겠지.”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건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야 무엇이 문제일까.

 

 

내일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의건은 또 성우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러니 매순간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생각해보니 의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몇 없었다. 꼭 의건은 성우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능숙하고 여유로운 태도인데, 성우는 의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정확하게 그의 행동을 예측해낼 수도 허점을 탁 짚지도 못했다. 참 속상하고도 화가 나는 일이기도 했지만, 궁금해 하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이상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꾸만 다니엘을 만나서 알아가던 시기가 떠올랐다.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를 붙잡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 때. 그때는 자신보다 어린 다니엘이 손바닥 안에 자신을 담아 놓고 이리저리 기울이며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었다. 그런 느낌을 의건에게서도 느끼고 있다. 참 우스운 생각이지만, 그런 외모로는 하는 행동이 다 똑같은가 싶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내일 만나러 올게.”

정말?”

그래.”

늦지 않게 올 테니 날 만나러 나와 주겠어?”

 

 

성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전해야 할 말이 있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성우는 의건을 손을 잡고 일어났고,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성우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다니엘이 내려다보는 눈빛은 달빛보다 밝았고, 햇볕보다 따스했다.

 

 

갈게. 잘 자, 성우씨.”

 

 

의건은 성우의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미세한 입술의 떨림은 서로의 설렘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거칠지도, 급하지도 않았다. 느릿하게, 여유롭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맞닿은 입술로 서로의 체온이 온전히 전해지는 듯 따뜻하고 포근했다. 입술을 맞댄 채 서있기만 해도 온몸이 떨려 힘이 빠질 듯 한 아찔함이 느껴졌다. 몸이 스칠 때마다 다리가 풀릴 듯 한 달콤함도 느껴졌다. 서로의 분위기와 기운이 엉켜 묘한 빛을 내뿜는 것 같았다.

 

 

내일 다시 올게.”

 

 

성우를 둔 채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난 의건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낮은 높이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빠르게 제 모습을 감추었다.

 

 

 

 

 

*

 

 

 

 

 

다니엘은 오늘도 성우의 병원을 찾았다. 성우의 누나를 만난 덕에 면회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오기 전까지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성우의 환하고 예쁜 미소는 볼 수 없겠지만, 그저 버티고 있는 걸 보기만 해도 버텨주는 것에 감사할 것 같았다.

 

 

간호사를 통해 확인한 후 허락을 받아 문 앞에 선 다니엘은 손잡이를 잡고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병실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돌아서니 삭막한 공기가 뺨에 닿았다. 커다란 침대에 복잡한 여러 기기들을 몸에 붙이고 누워 있는 성우가 보였다. 다가가는 걸음이 그저 무거웠다. 다리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눈앞에 성우가 있는데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이 다가가고 있는데 성우는 기척조차 없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다니엘은 침대 주변을 살폈다. 침대 옆에 놓인 서랍장 위에 자신이 들고 온 화분을 올려두었다.

 

 

나 왔어.”

 

 

다니엘은 침대 옆에 있는 보호자용 의자를 끌어다 성우 옆에 앉았다. 침대 위에 얹힌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다 살포시 손을 잡았다.

 

 

잘 지냈어?”

 

 

성우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저 병실 안을 가득 채우는 건 다니엘의 목소리, 차가운 공기, 성우를 감싸고 있는 수많은 기기들의 듣기 싫은 전자음들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성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하나, 구석구석 전부 다 성우답지 않았다. 성우스럽지 않아서 너무도 낯설고, 어색했다. 얼굴만 보면 좋아서 웃기만 하던 사람이, 지금은 아는 척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눈만 감고 있다. 이렇게 야속할 수가 없다. 인사조차 기분 좋게 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참 뭣 같아서 욕이 나올 것 같았다.

 

 

보고 싶었어.”

 

 

다니엘은 제가 잡은 성우의 손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어루만졌다.

 

 

선물도 가져왔어. 형이 좋아할 것 같아서.”

 

 

다니엘이 사 온 선물이라면 성우는 작은 사탕 하나라도 좋아했으니.

 

 

너무 늦었지? 늦어서 미안해.”

“......”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자신이 없었어.”

“......”

욕심은 여전하니 만나러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

이런 형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거든.”

 

 

성우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두 눈을 감은 채, 여러 의료기기에 의지해 숨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그저 다니엘은 안타깝기만 했다.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나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기를 바랐다. 왜 이제야 왔는지 원망이라도 늘어놓으면 그것이 행복일 것 같았다. 그것이 축복일 것 같았다. 무슨 말을 건네도 답이 없는 것보다, 잔뜩 심술을 늘어놓는 게 좋았다. 그게 당연했다.

 

 

그러나 성우는 다니엘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길들여졌을 때는 좀 울게 될 염려가 있는 것이다.”

 

 

다니엘은 나지막이 성우를 향해 내뱉었다.

 

 

어린왕자에 나왔다면서 형이 해줬던 말인데... 기억해?”

“......”

내가 먼저 형 좋아한다고 했었잖아. 지연이 누나를 떠나서라도 형에게 가고 싶다고...”

 

 

다니엘은 자신의 여자 친구를 통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성우를 소개받아 알게 됐었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자마자 이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성우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처음에는 그저 좋은 사람 같아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것을 이유로 들면서 말이다.

 

 

그때 형이 그랬지? 천벌 받을 게 무서워서 지연이 누나에게 상처주기 싫다고,”

 

 

다니엘은 그런 성우의 말에 기가 찬 듯 웃으며 대답했었다. 천벌 받을 게 무서워서 자신의 사랑을 잃고 상처를 떠안겠느냐고 하면서. 왜 멀쩡하게 생겨서는 혼자 어리석은 짓을 다 하고 다니느냐며 화를 내고 싫은 소리를 늘어놓았었다.

 

 

형도 나를 좋아하지만 포기하겠다고 했었지. 그때 되게 바보 같았어, .”

 

 

굉장히 굳은 다짐을 혼자만 했던 성우를, 다니엘은 재차 흔들어 댔다. 좋아하지만 왜 포기를 하느냐고, 자신의 감정을 속여가면서 꾹 참고 살아봐야 얻는 게 무엇이냐고.

 

 

연락하고 만나서 데이트하면서 내게 길들여져서 무섭지만 형이 혼자 아프고 말겠다고 했었잖아.”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논리였다. 길들여졌으면서 왜 혼자 아프고 말겠다고 한 건지 다니엘의 상식선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성우는 참 성우다웠다. 자신의 오랜 친구와 교제 중이었던 다니엘과 어쩌다 보니 서로 호감을 갖게 되었다. 절친한 친구의 남자 친구이기에 함부로 자신의 마음이 앞서가면 안 된다며 억지로 다니엘의 연락을 피하기도 하고, 지연의 제안으로 셋이 만나게 될 때면 애써 시선을 피하며 외면하려 애썼다. 그럴수록 제게 달려드는 다니엘을 밀어내지 못하고, 밀어내지 못해서 지연의 눈을 피해 은밀하고 스릴 있는 만남을 지속해왔다. 그러다 셋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다니엘이 성우와의 관계를 폭로해버리는 바람에, 다니엘과 성우는 지연을 잃고 서로를 잃었지만 지연은 모두를 잃었다.

 

 

그렇게 아찔한 만남을 이어오고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위해, 서로를 향해 살았다.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곁에 있음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며 늘 똑같은 고백을 주고받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야?”

 

 

그래서 아프고 힘든 것은 혼자 다 하겠다는 듯 끔찍한 몰골로 침대에 누워 있는 건지.

 

 

내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해줘?”

 

 

다니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형이 이렇게 된 거지?”

 

 

아니라고 대답해줘야 할 성우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호흡기로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서 사랑하게 된 건 운명이 저지른 큰 실수겠지?”

 

 

다니엘은 성우의 옆에 놓아 둔 화분을 바라보았다.

 

 

내가 형을 붙잡은 건 실수가 맞겠지?”

 

 

자신이 잡고 있는 차가운 성우의 손에 화분이 내뿜는 붉은 빛을 비추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따뜻하던 성우의 손이 이렇게 식어버리면 금방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버릴 것 같아 두렵기 까지 했다.

 

 

성우야.”

“......”

옹성우.”

“......”

이제 매일 보러 올게.”

“......”

네가 나 싫다고 해도 난 올 거야. 날 보여줘야지. 나 잊지 말라고.”

 

 

다니엘은 성우의 손을 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우의 머리칼을 몇 번 쓸어 넘기더니 이마와 두 뺨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형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어.”

“......”

이놈의 욕심은 가라앉지 않네.”

 

 

다니엘은 자신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성우를 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꾸 성우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멈춰 서서 성우를 바라보는데 행여나 깨어났을 때 자신을 잊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성우를 향한 마음이 변함없지만, 성우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면 모른 척 해야 할지 아니면 기억하도록 옆에서 극성을 부려야 할지부터 고민이었다. 아니, 그 전에 성우가 깨어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컸다. 어떤 고민을 하더라도 결국 성우가 깨어나지 못하면 헛수고일 테니까.

 

 

그때, 병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너무 오래 계시면 환자분께 안 좋으니까 빨리 나와 주세요.”

 

 

성우의 병실을 오가며 그를 돌보는 간호사였던 것 같다.

 

 

다니엘은 짧게 대답을 건넨 뒤, 다시 성우에게 다가가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출입문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몇 번을 돌아봤다. 성우의 움직임이나 인사는 없었다. 목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다니엘은 내일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병실을 빠져나갔다.

 

 

 

 

 

*

 

 

 

 

 

날이 어두워져 곧 의건이 찾아올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성우는 책상 앞에 앉아 시집을 읽으며 좋은 구절을 일기장에 옮겨 적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허전하니 입이 심심해서 주방으로 내려가 간식거리라도 가지고 올라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을 빠져나가 나무로 된 바닥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데 손님이 온 건지 아버지의 서재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주방으로 가는 길에 성우는 제 아버지의 서재 앞에 멈춰 서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는지 귀를 기울였다.

 

 

뜻을 알 수 없는 일본어가 마구잡이로 뒤섞이고 있었다. 제 아버지 또한 일본어로 무어라 말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경성시대로 넘어오면서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은 갖추지 못한 것 같았다. 성우는 그저 듣고만 있는데, 그 중에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하나였다. ‘강의건이라는 이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그 이름뿐이었다.

 

 

의건을 두고 어떤 의견을 나누고 있는 것인지, 어떤 이야기가 오가며 그의 목을 조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 아버지를 찾아왔다면 분명 일본군 중에서도 한 자리 하는 사람들일 텐데, 그들이 의건을 자꾸 거론한다는 것은 무언가 일을 꾸미는 게 분명했다. 다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려 줄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고, 제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통역해달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들은 성우를 그저 성우로 알고 있겠지만, 현재 자신의 앞에 서있는 성우가 2018년에서 온 사람이라고는 상상하지 못 할 테니까.

 

 

대체 무슨...”

 

 

성우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계속 듣고 있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으로 향하는 길에 누군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서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제 집에서 일을 봐주는 집사였다.

 

 

어디 가십니까?”

주방에 잠깐... 뭐라도 먹을 게 있나 해서요.”

방에 올라가 계시면 가져다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이 정도는 제가 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 큰일도 아닌데요, .”

알겠습니다.”

 

 

집사가 다시 성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성우가 조금 비켜서자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우는 이 때다 싶어 집사를 불러 세웠다.

 

 

저기...”

.”

 

 

집사가 멈춰 서서 성우를 바라보았다.

 

 

손님들이 오셨나 봐요?”

, .”

일본분들이세요?”

... , 어르신과 친분이 두터우신 분들께서 오셨습니다.”

 

 

집사의 설명을 듣자 하니 조선총독부 법무국장과 경무국장이 찾아왔다고 했다. 조선주둔군 측 고위관계자도 오려 했으나 현재 수행 할 작전이 있어 그 준비로 인해 오지 못했다고 했다. 성우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과 직함을 들으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제 아버지가 한국인이나 친일파였고, 야마시타 히데키로 지내며 일본 천황을 드높이고 사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일본군 관계자들을 집에까지 데려와 이야기를 나누는 막역한 사이인 줄은 몰랐다. 그저 아버지가 편하게 살기 위해 일본군에 기생하며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조심스레 움직이는 사람을 곁에 두고 있어서인지, 그들을 막으려는데 힘을 보태는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성우는 대충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간식거리 두어 개를 들고 제 방으로 올라왔다. 책상 앞에 앉아 손에 쥐고 있던 간식거리를 보니, 하필 또 예쁘게 빚어진 화과자였다. 그 중 하나를 집어 살펴보니 보드랍고 통통하며 둥그스름한 모양새에 옅은 분홍빛이 물들어 있는 것을 보니 꼭 복숭아 같았다. 잘 익은 복숭아. 화과자를 먹으며 창밖을 살피니 날이 어둑해져 금방이라도 의건이 찾아올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그러나 기대감이 드는 것도 잠시였다. 의건을 두고 뜻을 알 수 없던 이야기를 나누는 일본인이 득실거리는 자신의 집에 의건이 온다면, 그래서 성우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건이 이 집에 있는 걸 걸리기라도 한다면, 그의 일생일대 최대의 위기가 될 것 같았다. 만일 이곳으로 오고 있다면 오지 말라는 뜻을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에게 전할 수 있을까.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뜻을 전할 텐데, 과연 그는 어디에 있을까.

 

 

강다니엘이나 강의건이나, 사람 속 긁는 건 똑같네.”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우스웠다.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하고 웃으니 더욱 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다니엘도, 의건도. 다니엘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 의건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여러모로 궁금한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성우는 책상 앞에 앉아 의건이 던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했다. 전생을 믿는지,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지. 현실에 치여 살 때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저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꿈으로 갖고 있다고 여기저기 이야기하고 다녔던 적은 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전생이 있었다면 그 전생 중 일부에 다니엘은 있었을까. 다시 태어난다면, 그 생의 일부에 다니엘은 있을까. 전생도 환생도 모든 생각의 끝에는 다니엘이 있었다. 의건도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다니엘의 전생이 정말 의건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 오려나...”

 

 

성우는 뒷마당으로 언제 나가야 할지 점점 초조해졌다. 나가더라도 자신의 집에 방문한 일본 측 관계자들이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의건을 기다리며 슬슬 옷을 챙겨 입고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니 검은색 차량들이 대문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현관문을 통해 일본 측 관계자들과 자신의 아버지가 함께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낯선 차가 집 앞에서 사라지고 제 아버지 또한 시야에서 모습을 감춘 것을 본 뒤, 성우는 조심스럽게 제 방을 빠져나갔다. 나무로 된 계단을 내려가 뒷문을 빠져나갈 때까지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뒷문으로 향하던 도중, 주방에서 일을 봐주시는 분과 마주쳤지만 산책이라도 하러 가야겠다고 하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성우가 어둑해진 시간에 집을 나가든 말든.

 

 

뒷마당으로 들어선 성우는 의건과 함께 기대어 앉아 있던 담벼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정원에 설치 된 전등의 빛이 온전히 닿지 않아 어스름한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 또한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앉아서 흙바닥에 오른손 검지로 쓸데없는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다니엘의 이름을 썼다가 지우고, 의건의 이름을 썼다가 지워본다.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에게 더 기울어 있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자꾸만 결론이 제 눈앞에 나타나는 의건에게 기우는 것 같아 걱정스러우면서도 다니엘에게 미안했다.

 

 

성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는데 발 앞에 작은 돌멩이가 떨어졌다. 돌멩이라고 하기에 너무도 작았던 조각. 정원의 전등이 토해내는 어스름한 빛에 비추어 보니 동글동글한 조각이었다. 성우가 조각 하나를 집어들자 연거푸 두어 개가 떨어졌다. 성우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돌조각들을 줍고 있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그리고 곧 제 옆에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나며 의건이 나타났다.

 

 

나와 있었네? 부르려고 했는데.”

어떻게요?”

방금 그 돌조각들. 그걸 던지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 전에도 그랬으니까.”

...”

 

 

성우가 고개를 들어보니 의건은 아무렇지 않은 듯 기지개를 켜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의 행동에 성우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함께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이 참 따스해서.

 

 

기다렸어요.”

정말?”

. 조금 더 일찍 왔으면 큰일이 날 뻔했거든요.”

왜지?”

집에... 경무국장? 뭐 이런 분들이 왔었대요.”

...”

 

 

성우의 말에 의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의건에게 그들은 철천지원수, 평생을 두고두고 갚아도 복수할 것이 남아 있는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조국을 빼앗긴 아픔도 모자라 그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아픔이 더해지며 매일을 고통 속에서 살게 만든 요주인물들이었다. 의건이 반드시 제거해야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제 눈으로 봐야만 편하게 눈을 감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우에게는 그저 낯선 일본인이었겠지만, 의건에게는 듣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차오르게 만드는 인물들이었다.

 

 

야마시타를 만나러 왔나 보네.”

그런데... 그들이 당신 얘기를 했어요.”

그래?”

당신 이름을 얘기했어, 내가 들었어... 괜찮은 거예요?”

...”

 

 

의건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더니 고개를 들어 성우를 바라보았다.

 

 

잠깐, 손 좀 주겠어?”

 

 

의건의 말에 성우는 왼손을 내밀었다. 성우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춘 의건은, 제 주머니에서 빨간색 실을 꺼내어 새끼손가락에 묶어주고는 백일홍의 꽃송이를 손에 쥐어주었다.

 

 

백일홍은 알겠는데... 뭐예요, 이게?”

실이지, 붉은 실.”

그건 나도 알죠...”

큰 의미는 없어. 볼 때마다 나를 떠올려달라는 정도의 의미?”

그게 큰 의미 아닌가...”

, 그렇겠다.”

 

 

성우는 제 새끼손가락에 묶인 붉은 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을 치켜들어 이리저리 비춰보는데, 손가락에 묶여 있는 붉은 실이 참 신기하고도 예뻤다.

 

 

저기...”

“......”

다시 만날 때까지, 나를 기억해주겠어?”

 

 

뜬금없이 의건은 굳은 얼굴로 성우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니, 마치 성우가 이 시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성우는 의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물었죠? 전생을 믿느냐고.”

그랬었지.”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은 지도 물었죠?”

그랬지.”

 

 

성우는 의건을 마주보며 손을 꼭 붙잡았다. 붉은 실이 묶인 새끼손가락이 의건의 손바닥 위에 얹혀졌다.

 

 

전생을 믿지 않지만 있을 것 같아요. 그저 내가 모르는 것뿐.”

그런가?”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

먼 훗날, 독립한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성우의 고백에 의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건 또한 성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애가 탔었다. 독립을 위해 매일을 보내고 있고, 성우를 만난 이후로 더욱 더 독립을 위해 힘써야 할 이유와 명분이 생긴 것이다. 그게 성우여서, 나약하게 굴 수 없었다. 힘들고 지쳐서 독립을 향한 열망을 내려놓고 싶을 때에는 어김없이 성우를 찾아와 만났고, 아프지 않은 나라에서 행복하게 마주보며 웃을 날을 꿈꾸며 더욱 힘을 냈다.

 

 

그 날을 내가 만들어 줄게.”

 

 

의건은 성우를 제 품에 당겨 안았다.

 

 

그 날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당분간... 아니, 앞으로 만나러 오지 않을 생각이야.”

그게 무슨...”

사실 오늘,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어.”

 

 

마지막이라는 말에 성우가 의건의 품을 벗어나려 했지만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성우가 벗어나려 의건의 등을 툭툭 두드렸지만 의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성우씨에게 좋은 날을 만들어 주고 싶어.”

“......”

좋은 세상을 안겨주고 싶어.”

의건씨...”

다시 태어나면 독립한 우리나라에서 함께 하고 싶다고 했지?”

“......”

나도 그래. 그러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줘.”

 

 

성우를 한가득 품은 의건의 몸이 미묘한 떨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좋은 날, 좋은 세상을 만들어서 성우씨를 찾아갈게.”

의건씨...”

이름 자주 불러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도 마찬가지였죠, ...”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부르려고 할 때마다 턱 밑에서 꽉 막히더라.”

그랬어요?”

그래서 자주 부를 수가 없었어.”

 

 

성우는 제 손바닥으로 의건의 등을 토닥이며 천천히 쓰다듬었다.

 

 

자주 부르지는 못해도, 잊지 않을게.”

정말 마지막이에요?”

그래. 마지막이야.”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할 수는 없어요?”

 

 

의건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는 성우는 오늘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뒷마당에서 기다리면 올 것 같았고, 블루노트에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이 시대로 내던져진 성우의 버팀목이었고, 다니엘을 향한 그리움을 덜어주던 사람이었던 의건이 오늘을 끝으로 제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왜 미리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어요?”

미안해.”

매순간 당신의 안녕을 걱정하고 궁금해 한다고 말했는데 왜 마지막을 이렇게 갑자기...”

당신에게 마지막이라는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어.”

“......”

마지막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

그럼 만들지 말아요. 언제든 올 거라 생각할 테니까 돌아와요.”

 

 

이번에도 의건은 성우의 말에 답을 주지 않았다. 제게서 성우를 떼어낸 뒤 눈을 마주했다. 흔들리는 눈동자 속 자신의 모습이 서글퍼서, 의건은 더욱 속이 상했다.

 

 

정말 당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멋대로네요.”

제멋대로라 참 나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줘.”

너무하네요, 진짜.”

다시 태어나면 찾아갈 테니 만나줘.”

그게 말이 돼요?”

말이 되게 할게, 내가.”

 

 

의건은 성우의 두 뺨을 제 손으로 감싸 쥔 뒤 입을 맞추었다. 시작을 단정했던 것은 아니지만 끝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끝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했지만 결국 만들어야 했고, 의건은 그 끝을 그나마 아름답게 맺기 위해 성우와의 입맞춤을 선택했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다잡으며, 성우를 만나 그나마 숨통을 트일 수 있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제 앞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또르르 흘릴 듯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목소리로 꿋꿋하게 제 할 말을 이어가는 성우를 보며, ‘마지막이라는 말을 내뱉은 자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꼭 다시 만나자, 우리.”

 

 

의건은 성우를 둔 채 뒷걸음질 치더니 붙잡을 새도 없이 담장을 뛰어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성우의 누나에게 허락을 받은 후, 다니엘은 매일 그의 병실에 찾아가 짧게나마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깨어나지 않는 성우를 보며 속상함에 울컥할 때도 많았지만, 매일 이야기를 건네다 보면 언젠가는 성우가 깨어나 잘 들었다며 웃어 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도 다니엘은 성우의 병실에 찾아왔다.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성우는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몸에 붙은 의료기기들은 여전했고, 호흡기 또한 뗄 수 없었다. 언제쯤 성우의 의식이 돌아올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나왔어. 잘 잤어?”

 

 

다니엘에게 성우는 그저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래야 언젠가는 깨어날 테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성우의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아서 천천히 상태를 살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실내에만 있었던 탓에 생기 없이 축 가라앉은 낯빛도, 마냥 차갑기만 한 손도 그저 안타까웠다. 지난번에 와서 놓아두고 간 화분은 매일 누가 물을 주기라도 하는 건지 아직 생기가 넘치고 있어 다행이었다.

 

 

화분은 마음에 들어?”

 

 

다니엘은 자신의 물음에 대답 없는 성우에게 서슴없이 제 이야기를 건넸다. 이제 익숙해진 것 같았다.

 

 

어제 집에 가서 형이 써줬던 편지를 다시 읽었어. 좋더라. 좋은 말, 예쁜 말만 잔뜩 있더라.”

“......”

근데 나는 한 번도 써준 적이 없는 것 같았어. 그래서 너무 미안했어.”

 

 

다니엘은 제 가방에서 분홍빛 편지를 꺼내어 성우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읽어봐. 미리 많이 못 써줘서 미안해.”

“......”

. 성우야. 목소리 듣고 싶다.”

“......”

웃음소리도 듣고 싶고, 잔소리 하는 것도 듣고 싶어.”

 

 

다니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성우를 보지 못했다.

 

 

나한테 화를 내고 짜증을 내도 좋으니까 뭐라고 말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

내가 진짜 못됐더라. 통화를 그렇게 했으면서 녹음해 둔 것도 없고, 동영상도 찍어놓은 게 없어.”

“......”

그래서 너 깨어나기 전까지는 목소리를 못 들어.”

 

 

성우는 다니엘과 만나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사진이나 동영상을 많이 찍어두었다. 둘의 만남을 많이 기록해둬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핑계 삼아 다니엘의 여러 모습을 찍었었다. 반면, 다니엘은 성우가 먼저 사진을 찍자고 말하지 않는 이상 찍는 법이 없었다. 성우의 모습을 찍어두지도 않았다. 그래서 휴대전화에는 성우가 억지로 저장해 둔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성우의 휴대전화를 뒤져보면 이런저런 동영상도 많아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성우의 휴대전화를 자신이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빨리 일어나. 너 그러다가 나 잊어버리면 어쩔래?”

“......”

내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하면 어쩔래?”

“......”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도 잊으면... 어쩔래?”

 

 

다니엘의 몸도, 마음도 축 처져 있었다. 성우를 앞에 두고도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는 어떡해?”

 

 

성우를 붙들고 원망 아닌 원망을 쏟아내며 다니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고 또 봐도 믿기지 않는 성우의 모습.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 있는 건지, 나아서 깨어날 수 있는 건지, 그래서 예전처럼 함께할 수 있는 건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걱정과 염려에 마침표는 찍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병실의 문이 열렸다.

 

 

자네가 강다니엘인가?”

 

 

놀란 얼굴의 다니엘의 눈에 수트를 차려 입은 중년의 신사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