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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천사인 줄 알았다.

 

그해 겨울은 진짜 추웠거든? 부모는커녕 버림받아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 어린 아가 일주일을 쫄쫄 굶었다. 나중엔 추위 때문인지, 배고픔 때문인지, 몸도 안 움직이더라. 그렇게 센트럴의 빈민가 골목에 쓰러져 있는데 골목 사이로 쨍한 빛이 한번 새어 들어오더니 점점 희미해지면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라? 그 순간 어디서 힘이 난 건지 아래로 처지는 눈꺼풀을 붙잡아 올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누군지 확인했는데, 딱 내 또래 어린 아더라고. 뭔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경계를 했더니, 고개를 재빨리 내저으며 되레 겁먹은 얼굴로 이리 말하데? 해치거나 나쁜 짓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고. 그 목소리는 태어난 이후 들은 것 중 가장 상냥했고 따스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니까, 안심한 듯 내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 짓는 얼굴이, 왼쪽 뺨에 수를 놓은 듯 나 있는 세 개의 점이 눈 안에 들어오더라. 품에 안고 있던 담요를 내 몸 위에 덮어주더니,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여 주데? 가는 누가 봐도 센트럴 상류층 도련님이었고, 난 빈민가 거지였으니 근처에 오는 것도 싫었을 텐데 금화를 쥐여 주며 내 손을 감싸곤 이래 말했다. 죽지 마. 그러면서 눈을 마주하곤 다시 한번 다정히 웃는데, 그 얼굴이 어찌나 따스했는지 십여 년이 지나......어른이 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진짜, 천산 줄 알았다.

 

 

  

 

 

 

[ Insomnia ]

 

 Zippo

 

 

 

 

 

 

 

 

 

이제 곧 국경이니까 잠시 눈 좀 붙여요. 트럭 운전대를 잡고 있는,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와 말할 때 살짝 보이는 덧니를 가진 소년의 말투엔 센트럴 내에선 흔히 들을 수 없는 방언이 짙게 배어있었다. 천막으로 가려놓은 트럭의 짐칸 끄트머리에 앉아 긴 다리를 쭉 뻗고 있는 금발 머리 남자의 말투와 소년의 말투는 흡사했기에 그들이 꽤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왔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혹은 그게 아닌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다였다. 잠시 눈 좀 붙이라는 말에 나는 순순히 덜컹거리는 짐칸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에게 일어난 일들은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고 복잡했고, 하나같이 불행하고 비극적이었다. 그로 인해 극도의 불안장애와 불면이 함께 찾아왔기에 일주일 내내 10분 혹은 20분 정도 선잠이 들었다가 깨어나길 반복하며, 4시간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눈을 감기 전, 대각선 방향......그러니까 짐칸의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쪽을 쳐다볼 생각 따윈 없어 보이는 옆얼굴은 조그맣게 나 있는 천막의 틈에 눈을 대고선 달빛도 구름에 가려 어두컴컴하기만 한 밖의 풍경을 살피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난 그에게 두서없는 질문을 했다.

 

왜야?”

 

눈을 감고선 잠을 청하고 있을 줄 알았던 내 입에서 저를 향한 게 분명한 뜬금없는 질문이 나오자 그제서야 밖을 보고 있던 얼굴이 천천히 움직이며 눈을 마주해온다.

 

왜냐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심드렁한 목소릴 내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난 왜야? 라는 말을 좀 더 알기 쉽게 풀어서 다시 질문했다.

 

왜 나를 도와주는 거야?”

 

말했다시피 난 이제 돈도, 지위도, 권력도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왜야? 내 말에 살짝 처진 눈을 휘둥그레 떠 보인 남자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며 뒷머릴 긁적였다.

 

또 그 소리가? 안다, 니 개털인 거. 쿠데타가 성공하는 바람에 센트럴의 상류층이 붕괴했고, 쿠데타 과정에서 살해당한 전 수상 아들이 개털인 건 내뿐만 아니라 센트럴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걸?”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도 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하지 않는 게 어쩐지 애가 탄다. 집요하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다시 한번 더 물으려는데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트럭이 덜컹였다. 남자......아니, 강다니엘은 아이고! 죽는소리를 한번 내고선 운전석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우진아, 형 멀미하긋다. 살살 좀 몰아라. 말투가 다정하진 않았지만, 빈민가에서 여태껏 살아온 사람이란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나긋나긋했다. 그에 비해 운전석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거칠고 퉁명스럽다.

 

천천히 가다가 잡히면 셋 다 끝장인 거 알아요? 몰라요?”

 

그러니까 뭐든 단단히 붙잡아요. 계속 흔들릴 거니까. 그 말에 혼잣말로 짧게 투덜거린 다니엘은 여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숨을 내쉬곤 어깨를 으쓱였다.

 

왜 돕냐고? 처음 만났을 때 대답했잖아.”

 

장난치지 말고. 날 두둔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현 센트럴에선 중죄야. 말만으로도 감옥에 가는데, 국경 밖으로 도망칠 수 있게 나를 도왔다는 걸 들키면 어떻게 되겠어? 재판은커녕 그 즉시 사살하거나 공개적으로 처형할걸?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거야? 물론......도와주는 네 입장에선 내 질문이 어이없고 기가 막히겠지만......”

 

이해가 되질 않아. 꺼질 듯 심각하게 가라앉는 내 목소리와는 달리 돌아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경쾌했기에 자꾸만 다니엘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군부 세력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평온한 그 표정을 자꾸만 살피게 되는 것이었다.

 

뭐가 그리 이해가 안 되노? 그라믄 지금이라도 트럭 돌려서 니를 군부에 넘길까? 군부 입장에선 니만 잡으면 모든 후환이 없어지는 거라 포상금도 부르는 대로 줄 텐데......”

 

“......그 편이 훨씬 이해하기 쉽겠다.”

 

매가리라곤 없는 내 목소리에 허, 허탈한 소리가 다니엘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세상에는 무조건적인 도움이라는 것도 있거든요? 상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센트럴에서? 그것도 센트럴의 빈민가에서?”

 

말이 된다고 생각해? 삭막한 센트럴과 그보다 더욱 삭막하고 비정한 빈민가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조소를 띤다. 무조건적인 도움. 그래, 세상엔 무조건적인 도움이 존재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센트럴......특히 센트럴의 빈민가에서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조소가 섞인 내 목소리에 다니엘은 삐죽한 표정을 한번 지어 보이곤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럼 처음 했던 대답을 믿어라.”

 

“......나보고 지금 내가 네 첫사랑이랑 닮아서 돕는다는 말을 믿으라는 거야?”

 

못 믿을 건 또 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한층 더 싸늘해진 내 목소리에 다니엘은 진심 억울하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곤 구시렁거리기 시작한다.

 

왜 말이 안 되는데? 진짜라니까? 내가 와 그쪽한테 거짓말을 하겠노?”

 

“......됐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또다시 답을 얻지 못한 난 체념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리자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몸 위를 사람의 체온이 머금어진 따스한 무언가가 덮었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방금까지 다니엘이 걸치고 있던 청지 야상이 몸을 덮고 있는 게 보인다. 깨끗이 세탁한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지저분하단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묻지도 않은 말이 들려온다. 딱히 답할 말이 없어 떴던 눈을 천천히 감는데, 어딘가 모르게 먹먹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도 안 믿었는데......있더라. 무조건적인 도움이라는 게.”

 

그럴 리가. 다니엘의 말에 바로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는다. 모두가 나에게서 등을 돌린 지금 이 상황에선 그가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므로,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계속 삐딱하게 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저 입술 사이로 기력 없는 한숨이 새어 나온다.

 

강다니엘, 군사도시 센트럴의 유일한 오점이자 돈줄이기도 한 빈민가를 비합법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남자. 센트럴의 왕이 수상이라면 빈민가의 왕은 그였다. 빈민가의 실세가 내 또래의 젊은 청년이라는 게 의아할 법도 했지만, 나 또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몇 년 뒤엔 수상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썩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빈민가의 왕, 강다니엘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을 그저 센트럴 윗선들 뒷돈이나 대어주는 장사치일 뿐이라 소개했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적어도 센트럴 내에선 아무도 없었다. 그를 통해서라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구할 수 있었고, 그 어떠한 것이라도 팔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돈이 되는 건 도시 자체가 완벽히 통제되어 특정 계급의 사람들만 오고 갈 수 있는 센트럴을 자유자재로 들락거릴 수 있는 불법 통행권이었다. 불법 통행권의 존재를 센트럴의 상층이 모를 리 없었지만, 오랫동안 이어져 온 빈민가와의 결탁......그러니까 뒷돈을 받고선 묵인해주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손을 빌리면 그 어떠한 것도, 그 어떠한 사람도, 센트럴 안으로 들일 수 있었고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쿠데타로 정권이 뒤엎어지는 바람에 잡히면 그 즉시 죽임을 당할 전 수상의 아들인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수없이 많은 희생을 딛고 홀로 살아남은 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빈민가로 향했고, 어렵사리 만난 그에게 센트럴 밖으로 나갈 수 있게끔 도와 달라 간절히 부탁했다. 부탁은 했지만 그가 나를 돕겠다고 나설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사실 내가 빈민가에 나타난 그 즉시 나를 사로잡아 군부 세력에게 넘길 확률이 더 높았고,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어마어마한 돈이라도 요구할 줄 알았다. 그는 장사꾼이니까. 그런데 센트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줄 뿐만 아니라 국경까지 데려다주겠다니 내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아무렇지도 않게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나를 도와주는 거야? 그의 입장에선 황당할법한 질문이었지만, 어떻게 묻지 않겠는가?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나를 바라보며 그는 고개를 한번 갸우뚱하더니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대답을 했다. 니가 내 첫사랑이랑 닮아서. 그리곤 일어나 당장 출발하자고 말하는데, 어안이 벙벙한 건 당연했다. 쿠데타로 인해 정권이 180도로 바뀌었다 한들 사실 강다니엘, 그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군부 또한 빈민가의 뒷돈이 절실할 것이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뒷돈을 바쳐 제 자리를 유지하면 될 일이었다. 뒷돈의 액수는 어마어마했지만, 제 자릴 지키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모든 걸 다 잃은 전 수상의 아들을 도와 국경으로 향하는 것보단 그편이 수백 배는 더 메리트가 있었다.

 

, 이제 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들 뭐하겠는가? 이미 나를 태운 트럭은 국경을 향해 출발했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대처할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듯 복잡했다. 하지만 일단은 우진의 말대로 조금이라도 좋으니 눈을 붙이기로 했다. 천천히 눈을 감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덜 아파왔고, 점점 의식이 희미해진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자질 못 했기에 이대로라면 곧 잠이 들것이다. 그러나 잠드는 것이 썩 내키진 않는다. 짧은 기간 안에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고, 잠이 들면 잃은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부모님을 꿈속에서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역시 가장 괴로운 건 나를 도망치게 하려고 센트럴 중심부와 주변부를 잇는 다리를 자폭으로 끊은 누나의 희생이었다. 그 마지막 순간, 누나의 얼굴도 보질 못했다. 그저 눈 안 가득 들어온 것이라곤 불길이 일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무너지는 다리와 그 아래로 추락하는 차량의 잔해였고, 매번 그 모습을 꿈속에서 보며 난 그때와 마찬가지로 누나를 외쳐 부르기만 하다가 잠에서 깨어나는 걸 반복했다.

 

, 옹성우,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력을 가진 수상 아들의 꼴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나는 이 나라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군사도시 센트럴의 수상 아들로 유력한 차기 수상 후보......였었다. 그러나 군부의 쿠데타로 부모님은 살해당했고, 함께 도망치던 누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딱 일주일이 걸렸다. 이 모든 일이 나에게 일어나기까지 딱 일주일. 괴로움에 한숨만 자꾸 나왔기에 흐려져 가는 의식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또다시 그 꿈이다. 불길이 일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무너지는 다리와 그 아래로 추락하는 차량의 잔해, 울며 누나를 외쳐 부르는 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스러운 꿈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깨고 싶었던 와중, 나를 부르는 목소리와 내 어깨를 잡고 조심스레 흔드는 손길은 구원과도 같았다. 나는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천천히 떴고, 내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사람을 확인했다. 다니엘의 얼굴과 어깨를 붙잡고 있는 크고 길쭉한 손을 확인했다.

 

잠든 지 얼마 안 됐는데 깨워서 미안하네. 근데 상황이 심상찮다. 국경이 코앞인데 트럭으로 저길 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으니 여기서부턴 내려서 걸어야겠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 어깨를 흔들던 조심스러운 손길과는 달리 다니엘의 목소리엔 긴장감이 서려 있었고, 다소 여유롭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다급함이 묻어났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말에 흐릿하던 의식이 선명해져 난 황급히 몸을 일으키곤 고개를 끄덕였다.

 

트럭에서 내려 저 멀리 보이는 국경을 보고 있자니 다니엘이 수많은 부하 중 트럭을 운전할 사람, 그의 최측근으로 보이는 우진이라는 소년만 데리고 온 것이 이해가 되었다. 국경선을 따라 촘촘히 배치되어 있는 센트럴 군인들의 눈을 피해 국경을 넘으려면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이는 게 좋다는 판단은 정확했다. 우진은 다니엘 못지않게 행동이 재빨랐고, 체력이 좋았으며, 몸으로 하는 대부분을 잘했다. 우리 셋은 최대한 낮게 몸을 굽히곤 높은 벽과 철조망으로 이루어진 국경에 접근했고,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는 건물 중 보초가 적고 가장 방어가 허술해 보이는 곳으로 다가갔다. 다니엘과 우진은 몇 차례 눈빛을 주고받았고, 기척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놀라울 만큼 빠르고 완벽하게 그곳에 있던 자들을 제압했다. 그 솜씨에 놀랄 시간도 주지 않고선 잽싸게 움직이는 둘이었다. 다니엘이 건물 내벽에 설치되어 있는 전력판을 열어 그 안을 살피는 동안, 가방 안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 건물 안 컴퓨터와 연결한 뒤, 해킹을 시도하는 우진이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우진은 다니엘을 바라보며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 즉시 다니엘은 전력판에 있는 스위치를 전부 다 내려버렸다. 검은 하늘 아래 한 줄로 밝게 빛나고 있던 국경선이 단숨에 어둠으로 물든다. 저 멀리서부터 당황으로 물든 웅성거림이 들려왔고, 다니엘은 멍하니 있던 내 팔을 잡고선 끌어당기며 단호히 말했다.

 

지금이다, 가자!”

 

 

 

 

국경의 모든 전력이 끊겨 어두워진 틈을 타 철조망이 쳐져 있는 국경의 벽을 넘은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렸다. 국경을 지키고 있던 센트럴의 군인들은 전력이 일순간 나가버린 상황에 우왕좌왕 대처하느라 국경을 넘어 도망치는 우리의 존재를 꽤 늦게 눈치챘지만, 생각보다 대응이 느리진 않았다. 제 예상보다 군인들이 몰려오는 속도가 빠르다 판단한 다니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허벅지에 차고 있던 총을 뽑아 우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우진아, 옹성우 데리고 이대로 쭉 가라. 이러다 셋 다 잡히겠다. 내가 시간을 벌게.”

 

잠깐만!”

 

당장이라도 군인들이 몰려오고 있는 방향으로 뛰어가려는 다니엘의 팔을 붙잡고선, 왜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냐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물었던 질문을 되풀이하려는데, 예상했다는 듯 그는 재빨리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옷 밖으로 꺼내 그것을 두어 번 흔들었다. 적당한 굵기의 체인엔 특이하게도 펜던트 대신 윗부분에 구멍이 뚫려있는 금화가 매달려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 있는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다니엘은 최대한 빠르게 말을 내뱉는다.

 

이거, 안 쓰려고 얼마나 필사적으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쓰레기를 주워 먹는 한이 있어도 니가 준 이 금화는 안 썼다. 보고 있으면 니 생각이 나서, 이걸 건네며 웃던 니 얼굴이 떠올라서, 그때 그 미소와 금화를 건네던 체온이 내를 지금까지 살아남게끔 만들어 준 거다.”

 

“......”

 

힘들 때마다 이걸 보면서 니가 내 희망이 되었듯이 언젠간 내가 니한테 희망이 되는 날이 왔으면 싶었고, 그게 이러는 이유의 전부다. 그러니까 가라. 국경을 넘어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제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를 꽉 붙잡아 쥐곤 앞으로 세게 당기자, 체인이 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진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니엘은 끊어진 목걸이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빈민가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이 스르르 풀어지며 미소를 짓는데, 무표정일 때와 차이가 상당했기에 지금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허스키하게 깔리는 목소리엔 누가 들어도 느낄 수 있는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잠도 좀 자고, 알겠나?”

 

얼굴이 이게 뭐고? 퀭해가지고......길고 큰 손으로 얼굴을 한번 매만지는데, 그 손의 온기가 목을 메이게 만든다.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엉망인 머릿속으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청히 서 있는 나를 기다려줄 시간 따윈 없었기에 다니엘은 다시금 얼굴을 굳히며 허리에 차고 있던 총을 꺼내어 안전장치를 풀고선 옆에 서 있던 우진에게 말했다.

 

우진아, 미안하다. 부탁 좀 할게.”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말하지 마요.”

 

햄은 목숨 하난 질기니까, 잘 도망쳐서 나중에 또 봐요. 그게 언제가 됐든 간에. 덤덤하고 무뚝뚝한 목소리완 다르게 조금 전 다니엘이 건네던 총을 받아들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비정하고 살벌한 빈민가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달라도 어딘가가 달랐다. 그 또한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총의 안전장치를 자연스럽게 풀었고, 우진이 내 팔을 잡고선 어서 가자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다니엘을 뒤돌아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달리고 달려 국경에서 얼마나 멀어졌을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총성과 드문드문 붉게 튀는 불꽃에 정신이 팔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나에게 우진은 큰소리로 외쳤다. 뭐 하는 거고? 돌아보지 말고 계속 달려요! 개죽음으로 만들고 싶나! 그러면서 내 팔을 잡아끄는데, 나중에 또 보자고 말한 건 자신이었으면서 개죽음으로 만들고 싶냐며 외치는 목소리엔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 목소리에 왠지 눈물이 나 그렁그렁 흐려지는 눈을 비벼 닦고선 나는 죽을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다니엘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나에게 건넨 이 목걸이가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우리 둘 사이엔 그 혼자만 기억하고 있는 모종의 일이 있었으리라.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게 답답해서 가슴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내가 기억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가 내 손에 쥐여 준 목걸이에 달려있는 금화가 뜀박질을 할 때마다 짤랑짤랑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잠도 좀 자라며 다니엘은 다정히 말했지만, 살아남는다 한들 평생을 불면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눈이 가늘어질 만큼 환히 웃으며 목걸이를 쥐여 주던 그 얼굴이 무너져 내리는 다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내 꿈에 나올 것이다. 꿈에서 그는 조금 전과 같이 환한 얼굴로 웃어줄 게 분명했고, 목걸이를 건네는 그 손의 체온 또한 따뜻할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국경을 넘어 도망치는 이 길이 자꾸만 눈물로 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