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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월간 2017년 9월호와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진짜 잘한다.”

 

성우는 모니터 가까이 기울였던 상체를 의자에 푹 기대며 중얼거렸다. 타투 컨벤션에서 알게 된 한국계 미국인인 22살의 W는 성우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아직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성우 스스로 실력에 대한 자부심은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W의 작업물을 보고난 후로 성우는 묘하게 자신감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타투가 좋아서 낙서처럼 타투를 받다가 직접 타투이스트가 됐다는 W의 작업물은, 색감이나 디자인 적으로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움이 있었다. 성우는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어릴 때부터 미국과 일본 등을 오가며 자라온 W는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에 넓은 시야까지 갖추고 있었고, 실력 또한 뛰어났다.

 

W 작업물 보다가 내 거 보니까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성우는 W의 도안 이미지를 모니터 가득 띄우곤 턱을 괸 채 연필로 입술을 꾸욱 눌렀다. 그리고 손이 움직이는 대로 드로잉 북에 스케치를 시작했다. 완성도 하지 못한 스케치를 내려 보던 성우는, 그대로 드로잉 북의 페이지를 뜯어 공처럼 구겨 뒤로 던졌다. 그새 영향을 받았나, W 도안 따라가고 있잖아. 성우는 속상한 마음에 인중에 연필을 걸치곤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방이 없어, 한방이.

 

성우는 울상을 지은 채 양쪽 팔을 앞으로 쭉 내밀어 기지개를 켰다. 힘없이 뚝 떨군 양팔이 의자 위로 올린 무릎 위에 걸쳐졌다. 성우의 스타일은 굉장히 섬세한 디테일이 장점이었다. 얇은 선은 일정하고 탄탄하게 그림을 이루었고, 수채화로 그린 듯한 색감은 성우의 전매특허였다. 그런 성우와는 정반대로 W의 스타일은 펜으로 낙서를 한 것처럼 일정하지 않은 것이 매력이었다. 성우와는 달리 은은하지 않고 강렬하며 톡톡 튀는 색감 또한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도 늙었나. 감이 떨어졌나.

 

성우는 한숨을 내쉬며 연필을 책상 위에 툭 던지곤 무릎을 세운 다리를 끌어안으며 그 위에 턱을 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W의 도안 이미지를 저장하여 보고 있는 것이 어딘가 진 것 같고,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이 들어왔다. 남이랑 비교하는 거 싫은데. 나는 나대로 잘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W한테는 질투가 나고, 부럽고 그럴까. 자격지심 같은 건 안 느끼고 살 줄 알았는데.

 

 

 

성우씨, 아직 안자요?”

? 자야지. 다 끝냈어?”

오늘은 더 안 쓰려고. ? 성우씨, 새로운 도안이에요?”

?”

스타일 바꿨어요? 이거 되게 느낌 좋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연인의 말에 성우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옆까지 다가온 연인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한손으론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한손으로 키보드의 방향키를 눌러가며 모니터에 비춰지는 W의 도안을 보고 있는 연인의 표정은,

 

이야. 이거 진짜 좋은데요.

 

놀라움과 흥미가 뒤섞인 즐거운 표정이었다.

 

 

 

 

 

 

 

 

Hands on me. 08.

내가 너에게 길들여지고, 네가 나에게 길들여지는 새벽의 온도.

w.겟어거스트.

 

 

 

 

 

 

 

 

 

다니엘, 이거 내 그림 아닌데.”

, 그래요? 어쩐지 스타일이 많이 다르더라.”

다니엘, 내 그림도 못 알아보고.”

에이, 아이다. 성우씨가 남의 도안 이렇게 본 적 없어가, 내는 성우씨 그림인줄,”

나 샤워하고 다시 작업할 거야. 먼저 자요.”

 

다니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선 성우는, 다니엘의 말을 끊어내고 빠르게 말을 뱉은 뒤 방을 나갔다. 남겨진 다니엘은 당황한 표정으로 열린 문을 바라봤다. 뭐지, 성우씨 화났나. 평소랑 좀 다른데. 내가 뭐 실수했나. 다니엘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지 창을 최소화하니, 낯선 사람의 SNS가 열린 브라우저가 보였다. SNS에는 방금 전까지 성우가 보고 있던 이미지들이 업로드 되어 있었다.

 

뭐꼬. W가 눈데.

 

다니엘은 코를 찡긋거리며 WSNS를 대충 훑어봤다. 다른 타투이스트구나. 접때 그 아저씨 타투이스트 그림도 이래 열심히 보진 않았던 거 같은데. 다니엘은 브라우저를 아래로 내리다 W란 타투이스트의 셀카로 보이는 썸네일을 클릭했다. 화려한 머리색과 앳된 얼굴의 동양인 남자. 가만히 W의 사진을 바라보던 다니엘은, 브라우저를 아예 꺼버리곤 모니터의 전원 역시 꺼버렸다. 뭐 저렇게 귀엽게 생겼어, 질투 나게. 다니엘은 그대로 욕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성우씨, 내 드가도 돼요?”

안 돼.”

, 왜요. 같이 씻자.”

다니엘 다 씻었잖아.”

그러지 말고 문 좀 열어도. ?”

싫어.”

 

다니엘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욕실 문에 이마를 기댔다. 왜 저렇게 찬바람이 불지. 내 진짜 뭐 실수했나. 욕실 안에선 물소리가 들렸다. 다니엘은 그대로 욕실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 팔짱을 꼈다. 아까 그 W란 사람 되게 귀엽게 생겼던데. 성우씨가 원래 그런 스타일을 좋아했었나. 성우의 엑스라곤 제로밖에 모르니 원래 성우의 이상형을 알아내기도 어려웠다. 자신과 제로도 확연히 다른 스타일이니, 저렇게 귀여운 스타일을 좋아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이상하게 질투 나네. 다니엘은 꽉 닫힌 욕실 문을 바라보며 아까 봤던 W의 그림을 떠올렸다.

 

그래, 금마가 아이라 금마 그림이 좋은 거다.

 

나도 참, 별 걱정을 다하네. 다니엘은 새삼 부끄러운 마음에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긁적이며 헛웃음을 뱉었다.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성우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다니엘의 모습에 놀라 주춤거렸다. 다니엘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자, 성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니엘의 손을 잡으며 몸을 낮췄다.

 

 

 

작업 더 하지 말고 내랑 자요.”

아까 그 도안 있잖아.”

W란 사람 그림?”

.. 다니엘, 어땠어?”

좋던데요. 되게 특이하고, 톡톡 튀고. 예쁘더라.”

그렇구나.”

그래도 내는 이게 세상에서 젤로 좋은데.”

 

다니엘은 성우의 얼굴 앞으로 자신의 손등을 들어보였다. 그게 뭐야. 다니엘의 손을 양손으로 잡아 내리며 중얼거리는 성우의 목소리에, 다니엘은 성우를 품에 끌어안곤 젖은 성우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진짜로. 내는 성우씨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다니엘의 다정한 목소리에 성우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감았다. 내 그림인 줄 알고 그렇게 칭찬했으면서. 성우는 치졸한 자신의 질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을 놓치지 않은 다니엘은 말없이 성우의 등을 쓸어내리며 성우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같이 자요, 성우씨.

 

다니엘의 낮은 목소리에 성우는 다니엘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이유를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차갑게 구는 자신임에도, 연인은 다정하게 자신을 끌어안아주는 다정함을 보였다. 성우는 갑자기 어릴 때 봤던 동화책이 떠올랐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서, 자신이 구해줬다고도 말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왕자를 보란 듯이 뺏기는 그런 주인공. 결국 물거품이 됐었지.

 

 

 

또 혼자 딴 세상 가있다, 우리 성우씨.”

아니야. 자자, 다니엘. 자러 가요.”

내 어디 안 가요. 성우씨도 어디 몬간다. 내 이렇게 꽉 붙들고 있을 거예요.”

 

일부러 힘을 주어 자신을 끌어안는 다니엘에게 갇힌 성우는, 다니엘, 너무 숨 막혀. 괜히 맘에도 없는 말을 뱉으며 작게 웃었다. 그래, 쓸데없는 생각이야. 무슨 인어공주까지 끌어들여, 생각이 과했어. 성우는 먼저 몸을 일으켜선 양손으로 다니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자신을 일으키느라 휘청거리자, 다니엘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성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사랑해요.

 

다니엘의 속삭임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니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함께 침실로 가는 동안에도,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몸을 맞대는 동안에도, 성우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니엘의 말대로 항상 생각이 너무 과해서 문제라고는 알고 있지만, W의 도안을 보고 좋아하던 연인의 표정은 역시나 성우로썬 꽤나 속상했다.

 

 

 

*

 

 

 

역시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성우는 자신의 몸 위에 놓인 다니엘의 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두곤 침대에서 벗어났다. 침대 아래 뒹구는 옷을 하나씩 입은 성우는, 다니엘을 바라보며 뒷걸음질로 조심조심 침실을 나왔다. 문소리가 나지 않게 겨우 문을 닫은 성우는, 잔뜩 긴장했던 몸을 축 늘어뜨리며 자신의 작업 방으로 향했다. 모니터를 켜고, 다시 브라우저를 열어 WSNS로 들어갔다. 주방으로 나와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하나 꺼내 다시 작업 방으로 돌아왔을 때, WSNS에는 새로운 작업물이 업로드 되어 있었다.

 

우연히 자신이 어릴 때 크레용으로 그렸던 그림을 찾았다고, 무지개색의 갈기와 뿔을 가진 유니콘인데, 너무 귀여워서 직접 새겼다고. 허벅지에 새겨진 새로운 타투를 찍어 올린 W,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셀카까지 함께 올렸다. 성우는 의자 위에 양쪽 다리를 올려 끌어안은 채 맥주를 홀짝이며 W의 유니콘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삐뚤삐뚤한 선은 어디는 두껍고, 어디는 얇고, 심지어 띄엄띄엄 끊어져있기도 했다. 크레용의 거친 질감을 그대로 살려낸 W의 타투는 그럼에도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다. 어릴 때 내가 저런 그림을 그렸었나. 기껏해야 나무나 산, , 자동차나 그렸던 것 같은데. 유니콘이 뭔지도 몰랐을걸.

 

부러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성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편협하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같은 걸 보더라도 나만의 시선으로 보고 해석하여, 그걸 전부 그리거나 글로 남겨뒀다.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허투루 넘긴 적은 없었다. 다양한 전시와 예술작품을 꾸준히 보며 항상 새로운 관점을 터득하려 애써왔다. 그럼에도 타고난 재능에서 오는 차이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건가.

 

성우는 어릴 때 동네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착한 아이였다. 부모님을 걱정시키지 않으려 여기서 기다리라면 멀뚱히 그곳에 선 채 부모님을 기다리던, 그런 착한 아이였다. 조금 더 멋대로 굴걸. 발길이 닿는 대로 가보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부딪쳐볼걸. 착한 유년시절은 지금의 자신에겐 역시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안 살려고 연도 끊은 못난 아들인데, 어릴 때 괜히 어설프게 착해서 부모님의 기대감을 높이고, 자신 역시 재미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성우는 또다시 깊은 자신의 생각 안으로 빠져들었다.

 

성우는 조용히 드로잉 북을 펼쳐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크로키를 하듯 일부러 선을 정리하지 않은 채,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려대면서도, 습관적으로 깔끔하게만 그리려는 손에 성우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왔다.

 

그냥 좀 맘대로 해봐.

 

자신의 손에게 다그치듯 조용히 말을 건 성우는 오른손을 펼쳐 그 위에 이마를 기댔다. 착하지도 않으면서 착한 척은 다 하고.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잔뜩 겁먹고 아등바등 착한 척을 하며 사냐고. 좀 맘대로 살아보자, 옹성우. 어차피 그럴 거잖아. 그럼 그만큼 그림도 맘대로 그려보라고. 벌써 손이 굳었어? 머리도 굳었어?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 중얼중얼, 쌓인 불만을 토로해 봐도 오른손은 묵묵부답이었다. 애초에 오른손이 무슨 대답을 해, 만화도 아니고. 그 와중에 쓸데없는 현실감각. 진짜 싫다.. 성우는 자꾸만 답답해지는 마음에 왼손으로 연필을 잡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편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인해 그림은 맘처럼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차라리 이게 낫네.

 

성우는 일그러진 듯한 자화상에 허탈한 웃음을 뱉으며 남은 맥주를 전부 들이키곤 맥주 캔을 구겨 책상 위로 툭 던졌다. 자신이 그렸던 어색한 자화상을 쥔 성우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위에 드로잉 북을 올린 성우는, 재미없어- 말꼬리를 늘리며 울적한 목소리를 냈다.

 

 

 

성우씨. 내 이럴 줄 알았다.”

다니엘, 왜 깼어.”

이야, 혼자 술도 마시고. 얼른 이리온나.”

으응.”

 

갑작스레 들려온 연인의 목소리에 성우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바로 했다. 덕분에 얼굴에 올려뒀던 드로잉 북이 요란하게도 바닥에 처박히자, 다니엘은 그걸 주워 책상에 올려두곤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성우는 의자에서 내려와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양팔을 벌리고 있던 다니엘은, 그대로 성우를 품에 끌어안곤 토닥토닥, 성우의 등을 다독였다. 잠 안 와요? 다니엘의 속삭임에 성우는 다니엘의 허리를 끌어안곤 고개를 끄덕이며 다니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럼 우리 얘기하면서 놀까요?

다니엘, 안 졸려요?

. 내 잠 다 깼다.

미안..

내는 좀 덜 자도 돼요. 너무 많이 자서.

 

다정한 목소리, 다정한 손길, 다정한 품, 그리고 다정한 온도. 성우는 다니엘의 가슴팍에 턱을 기댄 채 고개를 올려 다니엘을 올려봤다. 연인은 고개를 숙여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 그러면 우리 얘기하다가 자요. 성우의 조금 밝아진 목소리에 다니엘은 웃었다. 따뜻함이 가득 둘을 감쌌다. 어쩐지 서늘하게 푸르기만 했던 새벽녘이 조금은 따뜻한 푸른빛으로 바뀐 것 같았다.

 

 

 

*

 

 

 

나 너무 재미없는 사람인 것 같아.”

누가요. 성우씨가요?”

.”

아닌데. 성우씨만큼 재밌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그럼요.”

어떤 면이 재밌는데요? 나 단조롭잖아.”

 

따뜻한 허브티가 담긴 머그컵을 양손으로 쥔 채 호오- 불어대며 마시던 성우가 물었다. 다니엘은 들고 있던 캔 맥주를 테이블에 내리곤 성우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소파 등받이에 팔을 세워 머리를 받친 다니엘은, 다른 쪽 손을 둥글게 말아 망원경처럼 오른쪽 눈으로 가져갔다. 으음, 어디보자- 다니엘의 장난스런 목소리에 성우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성우씨는 예상이 안 돼서 재밌어요.

나만큼 뻔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말 하시네. 당신이 얼마나 재밌는데.

 

연인의 말이 성우는 자신을 놀리는 거라 느껴졌다. 아랫입술을 오물거리듯 씹어대며 머그컵을 내려두자, 다니엘은 성우의 손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다니엘의 힘에 의해 상체가 숙여진 성우는, 자신을 다정하게 내려 보는 눈빛에 녹아들 듯 다니엘의 다리를 베고 몸을 눕혔다. 다니엘은 성우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팔걸이에 걸쳐둔 블랑켓을 집어 성우에게 덮어주었다.

 

다 계획을 세워두고 움직이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엔 즉흥적이에요. 그런 게 재밌어. 원하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요구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미뤄두지 않아요. 당신만의 세상이 있어요. 가끔 궁금하다니까. 내가 성우씨 눈으로 보면 글 잘 써질 것 같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연인의 말에, 성우는 눈을 깜박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봐봐, 이런 게 재밌어요. 당신이 얼마나 특별한지, 재밌는지 스스로 모르는 게 귀여워. 다니엘이 성우의 코끝을 검지로 톡 건드리며 말하자, 성우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다니엘의 복부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사실은 다니엘, 나 말이야.. 성우의 한숨 같은 목소리에, 다니엘은 천천히 성우의 손을 잡아 손가락을 겹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투 컨벤션에서 W라는 타투이스트를 만났는데.. 진짜 너무 잘하는 거야.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도안이 너무 유니크하고, 자유롭고. 그게 너무 부러운 거야. 나는 다른 사람이 어떻든 내 길만 열심히 걸으면 된다고 생각해왔는데.. 부럽고, 질투 나고. 그런 내가 또 싫고..”

거기다 내가 기름도 붓고. 맞죠?”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실 속상하긴 했어. 내 눈에도 잘하는데, 당신도 잘한다고 칭찬하니까.. 실력을 떠나서 괜히 더 질투 나고.”

아이고야, 내 큰 실수했다. 내 애인 속상한 줄도 모르고.”

 

자신을 달래는 다니엘의 목소리에 성우는 고개를 저으며 다니엘의 복부에 얼굴을 묻었다. 양팔로 다니엘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자신다운 응석을 부리자, 다니엘은 바로 그걸 알아채곤 성우를 끌어올려 자신의 품에 기대게끔 안았다. 다니엘의 다리 위에 앉은 성우는, 다니엘의 어깨에 볼을 기대곤 눈을 뜬 채 멍하니 다니엘의 입술을 바라봤다. 다니엘은 성우 쪽으로 고개를 돌려 성우의 눈가에 입을 맞추곤, 단단한 두 팔로 성우를 끌어안은 채 손길이 닿는 모든 곳을 토닥였다.

 

 

 

다른 사람이 어떻던 성우씨는 내 세상이잖아요. 그쵸?”

.”

내보다 잘하는 사람 보면 질투하고, 부럽고. 내도 그래요.”

진짜?”

그럼, 내도 사람인데. 그냥 에이, 그런갑다- 하고 넘기는 거지.”

다니엘은 안 그럴 줄 알았어.”

누구나 그래요. 나한테 없는 건 더 좋아 보이고, 커 보이고.”

너무 부러워. 솔직히 그래. 그래서 창피하고, 내가 싫고..”

근데요, 성우씨.”

?”

그 사람도 그럴 끼다. 성우씨가 가진 걸 보고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그럴 거예요.”

어떻게 알아.”

안 그러면 그게 사람이가. 이렇게 잘난 옹성우 보고 질투 안 하면.”

 

말을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성우는 다니엘의 목덜미를 장난스럽게 살짝 물었다 놓으며 중얼거렸다. 컨벤션 이후로 서로 DM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저는 형 스타일 너무 부럽던데, 멋있어요! 라고 했던 W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왜 이제야 그게 또렷하게 떠오를까. 성우는 고개를 들어 다니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 다니엘한테 길들여졌나 봐.

그걸 이제 알았나. 내도 그래요.

다니엘도 나한테 길들여졌어?

당연하죠. 서로가 서로한테 길들여진 거다. 어린왕자의 장미나 여우처럼.

 

성우는 괜스레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몸을 돌려 가슴팍을 맞댄 채 다니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성우의 귓가와 볼에 입을 맞췄다. 지금도 그래요. 이런 응석부리는 옹성우,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짓궂은 연인의 목소리에 성우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에 두 눈을 질끈 감곤 다니엘의 목을 끌어안은 제 팔에 이마를 묻었다. 서로에게 길들여졌다는 건, 그만큼 서로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마음을 받기도 한 것이며, 그 주고받음은 웃음과 눈물을 동반한다는 것이었다. 성우는 다니엘의 품에 안긴 채, 조금은 서럽게 울었다. 응석마저도 사랑받을 거라는 확신에서 흐른 자책의 찌꺼기였다.

 

 

 

*

 

 

 

성우의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성우는 다니엘의 품에 안긴 채 하품을 뱉었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의 하품에 웃음을 터트리며, 조심스럽게 성우를 안아든 채 침실로 향했다. 성우는 아직 남은 훌쩍임을 다니엘 몰래 뱉어내다 딸꾹질을 뱉었다. 성우의 딸꾹질 소리에 다니엘은 성우의 볼에 이마를 맞댄 채 마구 비벼대며 큰소리로 웃었다.

 

다니엘은 왜 항상 따뜻할까.

36.5도의 법칙 알아요?

그게 뭔데요?

사람의 적정 온도래요. 36.5. 그리고 그 온도에서 가장 안정감을 느낀대.

그럼 다니엘은 항상 36.5도인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요. 성우씨가 내 품에서 항상 안정감을 느끼도록.

 

다니엘은 성우를 더욱 품에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다니엘의 품에 안기던 성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다니엘의 입술부터 코, 눈가, 이마, 그리고 턱을 쓰다듬었다. 고작 36.5도로는 다니엘의 온도를 정립할 순 없었다. 안정감만을 느끼는 온도가 아닌걸. 더 뜨겁게 타올라서, 모든 감각을 태워주는 그런 강렬한 온도인걸. 성우는 다니엘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 맞대고 있는 입술로, 손끝으로 전해지는 다니엘의 피부로, 무언가 타오르는 것 같은 뜨거움이 느껴졌다. 이건 분명 내 간절함과 욕망이 불을 지핀 거라고 성우는 생각했다.

 

 

 

나는 다니엘이 더 뜨거웠으면 좋겠어.”

지금 성우씨처럼요?”

이것보다 더요.”

그럼 아무것도 안 남고 타버릴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가 없잖아.”

 

성우의 대답에 다니엘은 성우의 위로 올라타며 짙은 숨을 뱉었다. 자신의 속에서 무언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래에 누운 채, 자신을 올려 보는 성우의 눈빛 속에서도 분명 무언가 타오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우리의 온도는 36.5도로는 부족하다고, 다니엘과 성우는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생각했다.

 

성우씨, 뜨거워요.

다니엘도 그래. 녹을 것 같아.

 

서로의 입술 사이로 주고받는 숨과 말들이 전부 뜨거웠다. 서로의 피부를 스치는 손끝도, 맞닿은 피부도, 그리고 하나가 되기 위해 달아오르는 곳도, 어느 한 곳도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성우는 자신의 심장 부근에 입을 맞추는 다니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네 입술과 손끝이 닿는 모든 곳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린다고. 그 타오르는 화끈거림도 전부 나를 뒤흔들어서, 네가 닿는 모든 곳이 녹아버릴 것만 같다고.

 

사랑해, 다니엘.

사랑해요, 성우씨.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맞잡은 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른 맞닿은 곳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정함의 따스함도, 욕망의 뜨거움도, 그리고 잠시나마 잠들지 못해 너와 떨어져있던 새벽녘의 차가움도, 전부 나에게 스며들었다고, 성우는 다니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니엘은 성우를 더 안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성우의 속삭임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고,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푸른빛의 새벽녘은 36.5도로 훌쩍 넘어선 온기로 휩싸이고 있었다.

 

 

 

*

 

 

 

주말이라 다행이야. 온몸이 뻐근해요.”

괘안나. 주물러 줄까요?”

아니, 괜찮아. 다니엘, 나 다니엘이 만들어주는 샌드위치 먹고 싶은데.”

조금만 기다려요, 바로 만들어올게.”

 

다니엘은 성우의 볼에 입을 맞춘 뒤 쏜살같이 주방으로 내달렸다. 그 모습을 키득거리며 바라보던 성우는, 자신의 맥북을 다리 위에 올린 뒤 여유롭게 WDM에 답을 보냈다. 오전부터 W로부터 DM이 와있었다. 일본에 와있다고, 한국에 가게 되면 볼 수 있겠냐고, 언제나처럼 밝게 묻는 W가 성우는 내심 귀여웠다. W를 향한 질투를 덜어내니, 확실히 W는 성우가 좋아할만한 요소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럼. 언제든 와. 오면 내 샵도 보여줄게.]

[나 형한테 타투 받고 싶어요! 도안도 형이 직접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 좋다. , 열심히 그려볼게.]

[! 우리 잠깐 페이스타임 해요!]

 

W의 갑작스런 제안에 성우는 황급히 앞머리를 정돈했다. 갑자기? 너무 후줄근한데. W에게 답을 보내는 도중에 걸려온 페이스타임에, 성우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 ! , ! 뭐가 그렇게도 신나는지, W는 화면으로 보이는 성우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성우 역시 어색하지만 충실히 손을 흔들었고, W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이 있는 곳 주변을 비춰보였다.

 

 

 

일본엔 얼마나 있어?”

- 계획은 한 1주일? 나 진짜 한국가면 만나줄 거야? 타투도 해줄 거야?

당연하지. 대신 오기 전에 꼭 말해줘. 마중 갈게.”

- 진짜? 나 너무 신나요!

성우씨, 뭐해요?”

, 다니엘. 인사해, W. W, 여기가 내 애인.”

 

샌드위치가 든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두며 성우의 옆에 바짝 앉은 다니엘은, 성우의 맥북 안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W를 향해 묘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사진보다 훨씬 귀엽게 생겼네. 아까부터 둘이서 꽁냥, 꽁냥하더니. 다니엘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성우는 W에게 정말 자신에게 타투를 받을 생각이냐며 도안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W는 성우에게 원하는 도안의 분위기를 전달하면서도 성우 옆에 앉은 다니엘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팽팽한 기 싸움에서 먼저 말을 튼 건 W였다.

 

 

 

- 형의 애인 멋있어요!

그래? 고마워. 다니엘, 고맙다고 해요.”

아인데. 옹성우가 더 멋있는데.”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매너였어. 형이 아까워!

 

당돌한 W의 말에 성우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다니엘은 W를 향해, 내도 알그든! 하며 멋쩍은 표정으로 큰소리를 쳤다. 성우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웃는 동안, 다니엘과 W는 성우를 두고 유치한 전쟁을 펼쳤다. 결국 참지 못한 다니엘이 웃고 있는 성우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아 입을 맞추자, W는 소리를 지르곤 페이스타임을 종료해버렸다.

 

다니엘! W 놀랐겠다.

그러라고. 어딜 넘봐, 성우씨 내 거예요.

 

장난으로 시작한 게 이렇게 진지해질 줄이야. 성우는 아예 자신을 눕히며 위로 올라타는 다니엘의 벌을 살짝 꼬집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애잖아, 애한테 유치하게 뭐하는 거예요. 성우의 웃음어린 말에도 다니엘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애고, 어른이고 내는 그런 거 몰라요.

 

 

 

, 그래. 나 확실히 W한텐 없는 게 있어. 그것도 엄청 좋은 거.”

그게 뭔데요?”

강다니엘이요.”

그래도 안 봐줘요.”

“W 놀러오면 자랑해야지. 너는 강다니엘 없지? 이렇게.”

, 이런 사람이 무슨 재미없다는 신세한탄을 해요.”

 

다니엘은 성우의 쇄골에 이마를 기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성우는 다니엘의 머리칼을 양손으로 쓰다듬다 다니엘의 얼굴을 감싸 쥐어 들어올렸다. 마주한 시선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딱 알맞은 온도. 36.5도의 온기가 다정하게 서로의 입술을 녹여주었다.

 

다니엘 말이 맞아. 나에게도 W에겐 없는 좋은 것들이 많은데. 괜히 조바심 냈어. 고마워, 나 못났다고 하지 않고, 힘내라고 해줘서.

 

성우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다니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성우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머리 위에 턱하니 얹었다. 칭찬해줘요. 연인의 당당한 요구사항에, 성우는 다니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칭찬해- 제법 애교스런 표정과 목소리를 전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게 있고, 좋은 사람이 있어도 내한텐 성우씨가 최고에요.”

나도 그래. 나는 다니엘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사랑하는 거 알죠?”

모르면 큰일이지. 사랑해, 다니엘.”

 

다니엘과 성우의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서로 맞닿은 입술과 맞잡은 손으로 오고가는 온도는, 다정함과 애정을 기반으로 한 따스함이었다. 다니엘은 성우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 뒤 코끝을 비벼대며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은 채, 다니엘의 입술에 연신 입을 맞춰대며,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여름이 바로 다가온 주말의 오후, 다니엘과 성우는 서로에게 좀 더 길들여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