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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기억의 밤]

다론

 

 

 

 

 

 

 

 

 

 

'옹성우, 일어났어?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야. 침대 옆 하얀 서랍 두 번째 칸에 선물이 들어있으니까, 어머니 출근하기 전에 생신 축하드린다고 전해드려. 그리고 민현이가 베이킹 수업에서 만들었다는 머랭 쿠키는 상하기 전에 꼭 먹고, 잘 먹었다는 인사 남기는 거 잊지 말고, 지금 내가 너무 잠이 와서 길게 영상은 못 남기겠다. 어제 있었던 일들은 책상 위에 일기장 꼭 확인하기. 오늘도 옹성우, 파이팅이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맞은편 책상 위쪽 벽, A4용지에 큼지막하게 써져있는 글.

 

 

<매일 아침, 캠코더 확인하기>

 

 

그리고 다가간 책상에 끼워져 있는 사진과 이름들. 엄마, 아빠, 누나, 단짝 친구 민현, 그 외의 주변 사람들의 사진을 보는 것,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에 놓인 푸른빛 일기장의 가장 최근에 쓴 일기를 읽는 것이 성우의 하루의 시작이다.

 

 

"아들~ 일어났니?"

 

문밖에서 울리는 어머니로 추정되는 사람의 목소리에, 서랍을 열고 선물을 꺼내 방문 밖으로 나선다.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뭘 이런 걸 준비했어, 아들. 엄마는 성우 네가 엄마 생일을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선물을 받은 거 같은걸, 고마워."

 

 

 

해년마다 달력에 큼지막하게 표시해두는 가족들의, 주변 사람들의 생일. 친구들의 생일은 잊어버릴 수 있다고 하지만 성우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생일 조차 스스로 기억할 수 없어서 늘 달력의 힘을 빌린다.

 

 

 

 

 

 

단기 기억상실증.

 

그의 세상은 매일 아침 리셋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에 드는 순간, 그 전의 기억들이 사라진다.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와 언제 약속을 잡았는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리는 성우는 어릴 적 매일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울었다고 했다. 어린 성우의 입장에서 볼 땐, 자고 일어나면 늘 낯선 사람이 자신의 옆에 자리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라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적응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자신의 하루를 일기장에 기록하고,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일들은 잠들기 전에 캠코더에 녹화한다. 그게 그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었고 이제는 몸에 배어버린 습관 중 하나였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방으로 돌아와 어젯밤 작성한 일기장을 천천히 읽는다. 어제는 야구를 봤고, 강아지와 산책하는 민현이와 함께 공원을 걸었고, 거기서 어떤 남자분이 번호를 물었지만 주지 않았고, 그런데 얼굴은 참 잘생겼었고. 민현의 베이킹 수업이 끝나는 오후 4시에 또 그 공원에서 강아지 산책을 위해 같이 걷기로 했고.

 

어제의 일기를 읽다 보니 그 옆 장에 그제의 일기에도 번호를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앞장에도, 그 앞의 앞장에도. 설마 같은 사람이겠어,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일기를 천천히 살펴보고 책상 위에 올려둔 작은 플라스틱 컵 속에 들어있는 머랭 쿠키를 하나 집어 든다. 입속에서 사르르 녹아 없어지며 달달함을 남기는 그것이 성우의 기분을 한층 나아지게 만든다.

 

 

- 민현아, 머랭 쿠키 잘 먹었어. 고마워

 

- 그래 성우야, 4시에 만나는 거 잊지 않았지?

 

- 당연하지.

 

 

 

문자를 남기고, 밖에 나가기 위해 몸을 씻으러 욕실을 향한다. 씻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샴푸와 린스, 바디워시의 사용법도 매일 다시 읽는다. 가끔 헷갈려서 샴푸로 몸을 씻을 때도 있기 때문에 머리에 사용하는 것과 몸에 사용하는 것을 따로 구분하여 성우의 어머니께서 라벨링을 해두셨다. 씻고 나와서는 옷을 입는다. 건조대에 걸려있는 양말을 걷어서 신는데 뭔가 작은 것 같기도 하고, 기분 탓인가. 싶었는데 막 거실로 나온 성우의 누나가 그의 발을 보고 한숨을 내쉰다.

 

"옹성우, 그거 내 양말이거든."

 

", 누나 미안해."

 

 

양말을 고쳐 신고 누나의 도움으로 머리까지 단정하게 해결하고 나면 성우의 외출 준비는 끝이 난다. 비밀번호조차 잊어버리기 때문에 현관문 옆에 걸려있는 열쇠를 챙기고, 지도를 켜고 그 길을 따라 걷는다. 가까스로 공원에 도착하면 그곳에는 작은 강아지와 함께 서있는 자신의 친구가 있다.

 

 

"성우야, 여기."

 

"안녕, 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오늘도 물어보네, 만두야 만두. 내 사진만 가져가지 말고 이왕이면 매일 보는 만두 사진도 찍어서 네 방에 걸어두는 건 어때."

 

 

 

민현의 말에 멋쩍게 웃으며 강아지에게 인사한다. 만두야, 안녕.

 

 

 

"나 오늘은 초콜릿 쿠키 만들었어. 이거 먹을래?"

 

", 모양 예쁘다."

 

 

 

"저기요."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분홍빛이 도는 머리의 남자가 성우에게 말을 건다. ? 누구세요? .. 며칠째 봤는데.. 오늘도 번호 안 알려주실 거예요? 간절한 표정으로 성우를 바라보며 휴대폰을 건네는데 그 얼굴이 잘생겨서 한참을 바라보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시선을 거둔다.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죄송해요. 안 될 것 같아요."

 

"혹시 매일 이분이랑 오시던데 옆에 있는 분이 애인이세요..?"

 

"아뇨, 친구예요 친구."

 

 

 

 

 

그러면 번호 한 번만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쪽이 너무 제 스타일이라서 며칠째 번호 물어보는 거예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간절히 부탁하는 남자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성우는 단호하게 거절해버린다. 어깨가 축 처진채로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본다. 저 사람이 며칠 전부터 내게 번호를 물었다는 사람일까.

 

 

"저 사람 지금 일주일째 번호 물어보고 있는 건 알아?"

 

"... 누가 번호 물어본 건 적어뒀는데 저 사람인 건 나도 모르겠다."

 

"계속 거절해도 매일 묻는 걸 보면 완전 순정파 같은데? 연락이라도 해봐."

 

 

"민현아, 너는 내가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만약에 저 사람이 내 사정을 알게 된다고 생각해봐. 그래도 나를 마음에 들어해 줄까?"

 

"성우야, 세상에 만약이라는 건 없어. 뭐가됐든 겪어봐야 알지."

 

 

 

집에 돌아온 성우는 누나에게 공원의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누나, 며칠째 같은 사람이 공원에서 내 연락처를 물어봐. 내가 마음에 든대. 그 말을 찬찬히 듣고 있던 성우의 누나가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떤데?"

 

"잘 모르겠어.."

 

"성우 네가 마음 가는 대로 해. 한 번뿐인 인생에, 기억이 없어진다고 연애 한번 못해보고 죽을 수는 없잖아."

 

 

 

 

여차해서 안 좋게 끝나더라도 그 기억들도 사라지는 거 아니야? 누나의 말을 들은 성우는 그날 밤 잠을 설쳤다.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 성우는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상대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관계 속에서 자라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뜬 눈으로 지새운 밤, 창문밖에 빛이 새어 들어올 즈음 누워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잠을 자지 못했어도, 일기는 써야지.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고 흰 종이 속에 작은 글자들을 빼곡히 적어 내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피곤해서 계속해서 하품을 해내지만 잠에 들지는 못했다. 민현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 그 직전까지도 성우는 눈을 붙이지 못했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씻고, 열쇠를 챙겨 나간다. 밤을 새워 지워지지 않은 기억에 공원까지 지도 없이 찾아갔고, 민현의 강아지 만두에게도 인사를 잘 해냈다. 성우야, 무슨 일로 만두 이름도 기억해? 일기에라도 적어뒀어? 아니, 나 오늘 잠 못 잤어. 그래서 어제 일은 다 기억나. 피식 웃으며 하얀 강아지를 한 두 번 쓰다듬는다.

 

 

"저기요."

 

 

쪼그려 앉아서 강아지를 쓰다듬던 성우를 누군가 뒤에서 부른다. 돌아보니 연한 분홍빛 머리의 어제 그 남자. 성우를 잠 못 이루게 했던, 태어나서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는 일들로 성우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 그 사람이 성우를 바라보고 활짝 웃었다. 그때, 얌전히 앉아있던 만두가 일어나 그 남자에게 향했는데 쪼그려 앉아있다가 몸을 일으키던 성우가 만두의 목줄에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물론, 바닥을 향해서 넘어진 것이 아닌, 그 분홍빛 머리의 웃는 게 예쁜 그 남자의 품에.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안긴 꼴이 되었다. 귓가에 울리는 쿵쿵대는 소리는 그의 심장소리일까 아니면 성우 자신의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머릿속이 하얘져 안겨있는 품 안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대로 고개만 가만히 들어 남자를 바라보니, 눈이 마주쳤고 그와 동시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 ..."

 

"오늘도 번호, 안될까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품에서 벗어난 성우가, 그의 말에 자신의 휴대전화를 건넸다. 그쪽이 주세요. 밤새워했던 고민들은, 그의 품에 안겼던 그 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가슴이 뛰었다. 분명히 쿵쿵거리던 그 소리는 성우 자신의 것이 분명했다. 휴대폰을 건네받은 남성은 얼굴에 꽃이 피었다. 감사합니다. 내리 감사인사를 하고는 휴대폰을 톡톡 두드리다가 자신의 휴대폰에 전화를 거는 듯했다. 제 이름은 강다니엘로 저장해 두었고요. 혹시 이름이...

 

 

"제 이름이요...? 옹성우요."

 

 

 

 

-

 

 

 

성우의 번호를 얻어낸 다니엘이라는 남자는 연락하겠다며 총총 뛰어갔으며 그 모습이 꼭 민현의 강아지 만두가 꼬리를 흔드는 모습과 같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옆에 앉아있던 민현이 성우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성우야, 너 얼굴 완전 빨개. 너도 저 사람이 마음에 들었구나? 꼭 잘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성우는 아직도 쿵쿵대는 것 같은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한번 했다. 오자마자 그에게 달려와 오늘도 그 사람 만났냐고 물어오는 누나에게 강다니엘 씨래. 라며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잠들 시간은 한참 멀었지만 방에 들어와서 일기장을 열어 다니엘에 대한 두근거리는 마음을 써내린다. 최소한, 지금은 그 사람이 좋은 게 맞는 거 같아. 다니엘, 강다니엘. 몇 번이고 다니엘의 이름을 반복해서 써내리는 데, 휴대전화에 진동이 울렸다.

 

 

- 안녕하세요

 

- , . 안녕하세요!

 

 

 

다니엘. 성우보다 한 살 어린 그는 자주 운동을 나왔던 공원에서 본 성우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혹시 내일 시간 있으면 만날래요?라고 묻는 다니엘의 메시지에 한치의 고민도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오후 1시에 공원에서 만나요. 그 한 줄의 문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제도 밤을 새웠으니 오늘은 자야겠다, 라며 침대에 누운 성우의 시선의 끝, 흰 천장에 다니엘의 얼굴이 그려졌다. 내가 지금 자면 내일 그 사람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안돼, 그건 싫어. 벌떡 일어나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오늘도 잠자긴 글렀다.

 

 

 

이틀이나 밤을 새우고 나니 거뭇해진 눈가, 다크서클이 생겼다. 가뜩이나 흰 편인 피부인데 그늘이 생기니 초췌한 사람처럼 보였다. , 예뻐 보이고 싶은데. 속상한 마음에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는 성우에게 그의 누나가 화장품을 들고 다가왔다. 다크서클 가려줄게. 앉아봐.

 

 

푸석해진 피부를 정돈하고 건조한 입술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원래도 예쁜 얼굴이었는데, 화장을 조금 하고 나니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깔끔하게 흰 티에 연청바지를 챙겨 입고, 1240분에 집에서 나섰다. 분명 잠을 자지 못해서 무거운 몸이었지만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성우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여기요!"

 

 

 

약속시간보다 10분이나 먼저 도착했는데, 저만치에서 먼저 온 다니엘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 더 예쁜 것 같네요 성우 씨. 흔들림 없이 곧은 다니엘의 시선이 붉게 열이 오른 성우의 뺨에 머물렀다. 그를 마주한 성우는 이 간질거리는 마음이,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영원히 제게 남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시인데 점심식사는 했어요? 안 하셨으면 밥 먹으러 갈래요?"

 

", 밥 먹으러 가요."

 

 

작은 파스타집에 들어가 마주 앉아 메뉴를 각자 하나씩 시키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원래 운동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공원에서 성우를 보고 몽글몽글 거리는 마음이, 마구 뛰는 심장이 처음엔 어딘가 몸이 아픈 줄 알았다고 했다. 며칠 오가면서 성우의 얼굴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고, 웃는 것을 보고 혼자 설레 하고, 옆에 있는 남자가 애인인 걸까 하고 질투도 했다고. 그리고 겨우 용기 내어 번호를 물었으나 대차게 까인 그날은 집에 돌아가서 저녁시간 내내 멍하니 앉아있었다고 했다. 성우와 함께 다니던 남자가 애인이 아니라 그냥 친구라는 것을 알았을 때 혼자 신났었고, 그다음 날의 얼떨결에 안아버린 성우를 보고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혼났다고.

 

 

"그땐 저도 가슴이 뛰고 그랬던걸요. 그래서 휴대폰 건네드린 거예요."

 

"어쩐지.. 저는 그때 심장이 그렇게 심하게 뛰면 심장마비에 걸려서 죽는 게 아닐까. 싶었다니까요, 성우 씨 심장소리도 같이 들렸던 거구나.."

 

 

그리고는 서로 얼굴을 붉혔다. 푸하하, 하며 크게 웃어버리는 것이 아닌, 예쁘게 미소만 띠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함께 있으니 시간이 훅하고 지나가버렸다. 식사도 하고, 영화도 보고, 카페에서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해가 다 지고 세상에 어둠이 깔렸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기에 함께 길을 걷는데, 사람이 없는 거리에서 다니엘이 살며시 성우의 손을 잡았다. 성우 씨. 아니,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성우 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먼 사람 같아서. 말을 놓아도 되냐고 묻는 동시에 눈이 휘어지게 웃는데, 어떻게 그 웃음을 보고도 거절을 할 수 있을까. 그래 다니엘, 대답과 함께 맞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누우니 3일 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무거운 눈꺼풀에 금세라도 잠이 들 것 같았지만, 미적거리며 일어나 일기장을 펼친다. 다니엘, 강다니엘. 오늘은 만나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봤다. 좋다. 정말 좋아. 너무너무 좋아. 좋다는 말들로 일기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데, 다니엘에게 연락이 왔는지 또 휴대전화가 울린다.

 

 

 

- 성우형, 나 집 왔어요. 우리 내일도 볼까요?

 

- , 좋아 또 1시에?

 

- 응응 1시에. 여기, 씻고 나와서 뽀득뽀득해진 내 사진ㅎㅎ 이거보고 내 꿈 꿔요!

 

- 다니엘도 잘 자ㅎㅎ

 

 

 

 

 

다니엘이 보내준 셀카.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말 잠에 들 것만 같은데, 하고 휴대폰을 컴퓨터에 연결하고 그 사진을 인화한다. 다니엘. 이름을 옆에 대문짝만 하게 써두고 사진들이 끼워져 있는 책상에 다니엘의 사진도 끼워둔다. 사진만 봐도 웃음이 났다.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 기분 좋게 캠코더를 집어 든다. 오늘 하루는 모든 일들이 중요한데, 뭐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까.

 

 

 

'옹성우, 일어났어? 다니엘하고 어제 데이트는 잘했지? 오늘도 1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잘 챙겨 입고. 다니엘이랑 말 놓기로 했으니까 실수하지 말고, 너무 떨려도 좀 참자.. 얼굴이 너무 자주 빨개지잖아.. 나가기 전에 일기장 꼭꼭 확인하고! 오늘도 옹성우. 파이팅하자!'

 

 

 

 

 

-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캠코더에 녹화된 영상을 보았고, 일기장도 꼼꼼히 정독했다. 다니엘. 그 전의 기억들은 없었지만 책상 사이 끼워진 다니엘이라는 사람의 사진만 보아도 웃음이 났다. 야무지게 나갈 준비를 하고 공원에 도착하니 사진과 똑 닮은 분홍빛 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성우형, 오늘 날씨 진짜 좋다. 그죠?"

 

"그러네, 좋다."

 

 

 

다니엘이 성우를 향해 흔들던 손을 자연스레 내려 가느다란 성우의 손을 꼭 붙잡았다. 또 심장이 뛴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손만 붙잡아도 웃음이 났다.

 

 

원래 일기장에 하루를 빼곡 적어내는 성우이지만, 그때 느낀 그 감정마저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어떤 느낌인지, 지금 맞잡은 손 사이 느껴지는 온기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성우는, 가끔은 다니엘을 잊지 않기 위해 밤을 새기도 하고, 최대한 그와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기억하기 위해 모든 것을 기록하려고 노력했다. 두 사람이 만난 지 한 달쯤 되던 날, 성우 집 앞 주황빛 가로등 아래에서 다니엘이 성우에게 입을 맞춰왔다.

 

 

", 우리 사귈까요? 내가 정말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더 잘할게요."

 

 

 

그 입맞춤이 기분 좋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눈 속에 진심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대답 대신 다니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성우의 지금 기분을 대신 설명해주었다. 정말, 너무나도 행복하다.

 

 

 

 

 

그렇게 잘 만났다. 아직 다니엘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하지 못했지만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처음으로 다니엘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조금만 마시고 집에 가야지, 싶었던 마음이 분위기에 휩쓸렸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 분위기에, 진한 다니엘의 눈빛에 취했다. 성우의 집도 아닌, 다니엘의 집도 아닌 동네 어딘가의 모텔에서 두 사람은 수없이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았다.

 

 

 

 

".."

 

 

눈을 떴다. 낯선 무게감에 고개를 돌리니 어떤 남자가 자고 있었다. 그 남자는 성우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었고, 성우는 그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낑낑거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남자가 눈을 떴다. 성우를 보고 씩 웃었다.

 

 

", 일어났어요?"

 

 

"누구세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보니 몸에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이곳은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저 남자는 누구인가. 냅다 달려 나가려는 찰나 다니엘이 성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형 지금 다 벗고 나가려고요? 자신 또한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으면서도 성우의 옷가지를 챙겨주었다. 다니엘은 바들바들 떠는 성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보고 누구세요라고 묻는 것 또한. 성우에게 옷을 입히는데 뒤집혀 있던 후드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툭하고 떨어졌다. 무음이라서 몰랐는데, 전화가 오고 있었다.

 

 

", 여기 전화 왔는데?"

 

 

"?"

 

 

 

 

 

자신의 전화기를 처음 보는 물건인 듯 대하는 성우를 보고 뭐지,라고 혼자 생각하던 찰나 전화가 끊겼고, 화면에 뜨는 수많은 부재중 전화와 문자들을 다니엘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 성우야 어디니. 왜 집에 안와 _어머니

 

- 성우야, 무슨 일 있니? _어머니

 

- 옹성우 너 어디야 어머니가 걱정하셔 _민현

 

- , 너 미쳤어? 어디야 _누나

 

 

 

애타게 성우를 찾는 사람들. 다니엘은 뭔가 이상함을 직감하고 낯익은 이름인 민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도 채 가기 전에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성우야 너 어디야?"

 

 

"... 성우형 남자 친구인데요.. 강다니엘이라고.."

 

"지금 어디세요?"

 

"여기 그 동네 외곽에 있는 모텔인데.."

 

"성우 지금 상태가 어때요?"

 

"지금 그냥 잠에 덜 깬 거 같은데... 술에 덜 깼거나.."

 

 

"거기로 갈 테니까, 애 어디 못 가게 붙들고 있어줘요."

 

 

 

 

 

여전히 성우는 다니엘을 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젠 말도 없었다. 일단 침대에 걸터앉게 하고 성우의 손을 꼭 잡았다. ,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병원 갈까 우리? 조곤조곤 차분하게 울리는 다니엘의 목소리에 성우가 그의 눈을 한번 마주하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떨리는 몸은 진정될 줄을 몰랐다. 추운 건가, 헛다리를 짚은 다니엘이 성우를 품속에 꽉 안았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몸은 기억했다. 다니엘의 품에 안기는 순간 성우의 떨림이 멈추었다.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오래 본 사람 같았다. 성우는 다니엘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며 불규칙했던 호흡을 골랐다. 괜찮은 건가. 다니엘은 그를 품에 안은 채로 내내 등을 토닥였다.

 

 

 

"옹성우!!"

 

 

 

"누구?"

 

 

 

자주 보았던 성우의 친구 민현과 여자 둘이 룸 안으로 달려들어왔다. 아마 저 두 사람이 성우형의 어머니와 누나인가.. 하고 성우를 품에서 놓아주니 이내 다시 불안한 듯 눈동자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성우야 가자.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그의 손목을 잡자 성우가 그 손을 뿌리쳤다.

 

 

 

어머, 얘가 왜 이래? 성우야. 엄마야 엄마. 집에 가자니까? 물론 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성우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할 턱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다니엘이 일어나 성우를 품 안에 넣은 채로 성우의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제가 좀 안고 있으면 떨리는 게 덜한 것 같아서요.. 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그쪽은 누구예요?"

 

"강다니엘입니다. 성우형이랑 만난지 3개월 좀 넘었습니다. 성우형 어머니 맞으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옆에 서있던 성우의 누나는 그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성우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성우를 집에 데려가야 하니 그의 말에 수긍했다. 성우의 집으로 가는 길, 그 차 안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니엘은 어머니의 안내에 따라 성우를 침대에 얌전히 눕혔다. 그리고 성우의 어머니가 캠코더를 들고 오더니 성우에게 그 속에 담긴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성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향했고, 푸른빛이 도는 공책을 집어 들어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책상을 한번 훑어보고, 안정을 찾은 듯. 뒤돌아 자신에게 걱정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미안해요. 엄마, 누나, 민현이, 다니엘도.

 

 

 

그때까지만 해도 다니엘은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자신의 옆에서 한숨 돌렸다는 표정을 짓는 민현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성우형 어디 아파요?

 

 

"성우는,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 못 해요."

 

 

 

 

 

"다니엘, 나 봤어?"

 

 

 

민현의 말을 끝으로 성우의 물음에도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다니엘은 벙쪄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면 성우형은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전의 기억을 위해 남긴 영상을 돌려보고 지인들의 사진을 훑어보고, 일기장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는 건가. 나는 그 사실조차 몰랐다는 건가.

 

 

"다니엘 빼고 다 나가줬으면 좋겠어요"

 

 

 

성우의 말에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모두가 나가고, 멍한 다니엘을 향해 성우가 다가가 그의 앞에 마주 섰다. .. 낮게 깔린 다니엘의 목소리, 그리고 갑작스레 터지는 성우의 눈물.

 

 

 

 

 

 

미안해. 다니엘. 말해주려 했는데, 그러면 네가 나를 떠날까 봐. 기억을 잃어버리는 사람이랑 연애하는걸 네가 싫어할까 봐. 계속 미뤘어. 너를 잊지 않으려고 밤을 새운 적도 많았고, 우리 하루 있었던 일을 몇 번이고 적었어. 그렇게 해봐도, 나는 기억을 못 하거든? 잠을 자고 나면 머리가 모든 것들을 지워버리는데, 몸이 너를 기억해. 다니엘, 네가 아까 안아줬을 때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어. 편안해졌어.

 

 

그리고 나는 매일 너한테 반했어. 매일의 너에게 두근거렸고, 너를 향한 두근거림은 기억할 수 있어.

 

이런 나를 떠나도 괜찮아. 어차피 내일이 되면 우리가 만났던 것조차 모두 잊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의 눈빛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아침의 바들바들 떨던 성우의 모습이 지금 울고 있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손대면 부서질 것 같아. 그렇다고 해서 잡아주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아. 그래서 조용히 그를 꽉 안았다. 성우의 염려와는 다르게 다니엘은 변함이 없었다. 그를 품에 안은 가슴이 여전히 두근거렸다. , 나는 형이 어떻든, 그냥 형이라는 사람을 사랑해요. 나는 안 변해. 형의 머릿속이 매일 아무것도 없는 흰 도화지처럼 변해도, 나는 그대로 있을게요. 울지 마. .

 

 

 

 

 

 

-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맞은편 책상 위쪽 벽, A4용지에 큼지막하게 써져있는 글.

 

 

<매일 아침, 캠코더 확인하기>

 

 

 

 

'옹쓰. 옹옹쓰. 성우형. 일어났어요? , 형 남자 친구, 다니엘. 오늘은 우리 벌써 200일이야. 오늘도 데이트 잘할 준비됐죠? 오늘 3시에 형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요. 오늘 우리 그때 처음 간 파스타집 가서 밥 먹어요. 그냥 나와도 예쁜데 꾸미면 나 심장 떨어지니까 너무 꾸미진 말고, 선물 필요 없으니까 몸만 얼른, 나올 준비 해요. 오늘도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