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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화상(華相)

류옹

 

 

 

 

 

 

 

 

 

 

1.

 

존재하는 것조차 죄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 본인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대체 신에게 무슨 미움을 샀는지 제 인생은 불행을 빼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쌍둥이 누나와 함께 버려져 부모의 얼굴은커녕 생사조차 몰랐다. 다니엘이 15살이 되던 해, 부잣집에 입양해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던 누나가 고아원에 있던 다니엘을 찾아와 말했다. 다니엘, 도망가자. 앙상하게 마른 누나의 몸엔 상처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고, 자신을 붙잡고 있는 손마저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다니엘은 누나 손에 이끌려 그렇게 고아원을 나오게 되었다.

 

 

고아원을 떠나 누나와 도망간 곳은 재개발이 얼마 남지 않은 판자촌이었다. 폐허가 다 되어버린 집에선 비가 오는 날마다 물이 샜고, 바람을 제대로 이기지 못해 문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일수였다. 그렇지만 행복했다. 누나와 함께 단 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아마 그 순간이 자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항상 생각하곤 했다.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반년이 채 안 돼서 누나가 갑자기 쓰러졌다. 백혈병이란다. 왜 이 지경이 될 때 까지 병원에 오지 않았냐고 의사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올 수 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의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들었다. 누나는 결국 입원을 했다. 누나가 입원을 하자 돈이 필요했다. 누나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알바는 다 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제 손을 꼭 잡고 학교는 졸업해야지, 라고 힘없이 말하는 누나 때문에 그만둘 수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8시까지 카페 알바를 했고, 8시부터는 고깃집 알바를 했다. 집에 들어오면 새벽 2시가 되었다. 엉망이 된 몸을 이끌고 들어간 집에는 사람이 사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누나가 그리웠다. 가만히 방바닥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행복해져서 다시 불행이 찾아온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나는 불행해야만 했다. 나의 행복을 위해.

 

 

 

 

 

2.

 

고등학교에 올라가게 되었다. 중학교 졸업한 것만 봐도 충분하지 않냐며 누나에게 말했지만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니엘. 나는 네가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

 

나 때문에 네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병실을 나왔다. 바보 같은 우리 누나. 다니엘이 병실 앞에서 눈물을 훔치다 이내 병원 밖으로 빠져 나왔다. 나는 행복할 수 없다. 나는 불행이니까.

 

 

 

 

 

3.

 

고등학교에 올라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알바에 지친 몸은 수업을 듣기엔 너무 피곤해 매일 수업시간에 잠을 자기 일쑤였고 선생님들은 그런 다니엘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점심시간에도 다니엘은 미동도 없이 잠을 잤다. 급식비를 낼 돈으로 누나의 병원비를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끔 급식이 맛없는 날에 투덜거리며 반에 들어와 급식 투정을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너네는 음식을 맛으로 느낄 수 있구나. 그렇게 다니엘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4.

 

저기, 다니엘.”

 

………….”

 

다니엘?”

 

……….”

 

너 급식 안 먹어도 돼?”

 

……별로.”

 

?”

 

별로 배 안 고파.”

 

, 그래?”

 

 

알겠어. 자는 데 깨워서 미안해. 성우는 다니엘에게 사과를 하며 앞문으로 몸을 돌려 나갔다. 다니엘은 그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옹성우. 같은 반 반장이었다. 얼굴은 물론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서 전교생들과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듣기로는 집안마저 좋다고 하던데. 별일이네, 쟤가 나한테 말도 다 걸고.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엎드려 잠을 청했다.

 

 

 

 

 

 

5.

 

눈을 뜨니 어느새 종례가 끝났다. 어수선하게 교실을 빠져나가는 아이들 속에 다니엘은 머리를 긁적이며 하품을 했다. 기지개를 피며 책상에 눈을 돌리자 그제야 책상 위에 놓인 빵과 우유가 눈에 보였다. 어라, 요새 인기가 많은 초코롤빵과 흰 우유였다. 나한테 이걸 줄 사람이 없는데. 헷갈린 게 아닌가.

 

 

그거 내가 갖다놨어.”

 

……….”

 

너 오늘 점심 안 먹었잖아. 혹시 나중에 배고플까봐.”

 

…………고마워.”

 

 

다니엘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작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호의가 처음이어서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할지 몰라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쑥스럽게 고맙다고 인사하자 성우가 웃어보였다. 괜찮아, 내일 보자. 성우가 작게 인사를 하며 교실을 나섰다. 또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 성우가 보이지 않을 때 쯤, 가방에 빵과 우유를 주섬주섬 챙겼다.

 

 

 

 

 

6.

 

오늘은 유난히 진상 손님이 많은 날이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선 왜 이렇게 뜨겁냐고 소리치던 아줌마, 고깃집에서 술 맛이 왜 이러냐며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던 아저씨, 알바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어디서 어른 앞에서 다리를 꼬냐며 꼰대 짓을 하던 할아버지까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자신을 지치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너무 지쳤다. 다 그만두고 싶었다.

 

 

이불도 깔지 않은 방바닥에 풀썩 드러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아까 성우에게 받은 빵과 우유가 생각났다. 무거운 몸을 다시 일으켜 가방을 열자 좀 찌그러진 초코롤빵과 흰 우유팩이 보였다. 가만히 빵을 만지작거리던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빵과 우유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었다. 차마 아까워서 먹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까 성우가 자신을 향해 웃어보이던 미소가 생각났다. 가만히 책상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고는 이부자리를 펼쳤다. 그리고 꾸물꾸물 그 안에 들어가 곰팡이가 가득한 천장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감았다. 오늘은 왠지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7.

 

처음 다니엘을 봤을 땐 그냥 날라리라고 생각했다. 수업도 제대로 참여 안하고 맨날 잠만 잤으니까. 그런데 항상 점심시간마다 엎드려 자고 있는 게 눈에 걸렸다. 처음엔 점심시간이 되어도 미동도 없이 자는 저 아이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입맛이 없다는 게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다. 대신 점심시간에 매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빵과 우유를 사다 다니엘의 책상 옆에 올려놓았다. 선물이야. 다니엘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엎드려 자고 있는 모습마저 귀여웠다.

 

 

종례가 끝나자 다니엘이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가방을 정리하다 뒤늦게 제 선물을 알아챈 건지 다니엘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빵과 우유를 쳐다봤다. 그거 내가 갖다놨어. 그 말에 다니엘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 오늘 점심 안 먹었잖아. 혹시 나중에 배고플까봐. 그제야 다니엘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작게 고마워, 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선물의 보상 치고는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8.

 

며칠 째 성우는 점심시간마다 다니엘을 깨웠다. 다니엘, 오늘도 입맛이 없어? 그 때마다 다니엘은 고개를 들어 성우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퉁퉁 부은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이 웃겼는지 성우가 피식 웃으며 다니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겠어, 더 자. 그리고 항상 종례가 끝나고 일어나보면 책상 위에는 흰 우유와 초코롤빵이 놓여 있었다. 사실 두 번째 성우가 빵과 우유를 줬을 땐 미안한 마음에 거절도 해봤다. 고맙지만 마음만 받겠다고. 그러나 성우는 자신이 거절하자 웃으며 말했다. 너 맨날 밥 안 먹잖아. 반장으로써 걱정 되서 그래. 안 챙겨줘도 된다고 손사래를 치자 이번에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있잖아, 다니엘. 나는 네가 이 빵을 먹어주지 않으면 정말 속상할 거야. 그래도 안 먹어줄 거야? 슈렉에 나오는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불쌍한 눈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성우의 태도에 다니엘은 한숨을 쉬며 알았다고 했다. 그제야 성우는 처음 만난 날처럼 자신을 향해 웃어보였다.

 

 

 

 

 

9.

 

그 날도 평소와 똑같았다. 다니엘은 점심시간에 조용한 교실 안에서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고, 평소처럼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과 함께 성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니엘, 오늘도 밥 안 먹을 거야?”

 

………, 잘래.”

 

다니엘. 밥 먹으러 가자.”

 

아냐……. 너 먼저 먹어.”

 

 

손을 휘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냥 이 시간에 조용히 잠이나 더 자는 게 편했다. 엎드린 채 먼저 가라고 손을 들자 성우가 그 손을 잡았다. 저도 모르게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따뜻한 성우의 온기가 느껴졌다. , 고개를 들어 잡힌 손을 바라보다 이내 성우를 바라봤다. 다니엘.

 

 

, 먹자.”

 

………….”

 

선생님이 너 밥 좀 먹이래.”

 

선생님이 그러실 리가 없다. 거짓말 그만하고 너도 밥 먹으러 가.”

 

다니엘.”

 

나 졸리다. 성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엎드렸다. 손을 빼내고 싶었는데 성우가 손에 힘을 주고 있어서 빼내지는 못했다. 결국 왼쪽 팔로 머리를 베고 오른쪽 팔은 밖을 삐죽 내놓은 이상한 자세로 책상에 엎드렸다. 아니, 근데 얘는 언제까지 손을 잡고 있을 생각이지. 그 생각을 하자 성우가 하, 하고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앞자리 의자를 빼서 앉았다.

 

 

너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래.”

 

?”

 

너 밥 안 먹으면 나도 안 먹는다고.”

 

……….”

 

 

기가 찼다. 자기가 뭐라고 같이 가지 않으면 밥을 안 먹겠다는 건지. 도통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다니엘과 성우는 서로 접점이 없는 사이였다. 상극. 딱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관계인데 대체 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성우를 바라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치는 눈빛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부끄러워서 말을 더듬거리자 성우가 귀엽다는 듯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결국 백기를 올린 쪽은 다니엘이었다. 얼른 고개를 내려 다시 팔에 얼굴을 파묻자 머리 위로 성우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쪽팔려. 거기서 말은 왜 더듬어서. 귓가가 붉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짧은 머리로 숨겨지지 못한 다니엘의 귓가가 붉어지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성우는 결국 함박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귀엽다.

 

 

다니엘.”

 

……….”

 

밥 먹으러 가자.”

 

………

 

점심시간까지 10분 남았어.”

 

……….”

 

? 다니.”

 

, 알겠어! 가자. 가자고!”

 

 

결국 다니엘이 성우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앞장서. 다니엘이 불만 가득한 말투로 성우에게 말했다. 그래, 가자. 성우가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까 다시 누웠을 때 끈질기게 문질러대던 제 손목 안 쪽이 간질거려서 미치는 줄 알았다. 다니엘이 자신의 손을 잡고 앞장서 걸어가는 성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아직까지도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화들짝 놀래며 손을 빼냈다. , . 또 당황해 더듬거리며 말하자 성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끄응, 성우가 잡고 있던 손을 매만졌다.

 

 

아직도 손목 안 쪽 성우가 문지르던 자리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10.

 

점심시간이 꽤 지난 급식실엔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야무지게 소세지를 집어먹던 다니엘이 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입에 음식을 한가득 물고 앞을 쳐다봤다. 앞에 앉아있는 성우가 턱을 괴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 또다. 말을 튼 지 시간은 꽤 지났지만 왠지 저 웃음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맛있어?”

 

………?”

 

맨날 밥 맛 없다고 밥 안 먹더니 그건 아니었나보네.”

 

……….”

 

소세지 더 먹을래?”

 

 

성우가 웃으면서 자신의 급식판에 있던 소세지를 다니엘에게 넘겨줬다. 많이 먹어, 나 지금 배불러. 다니엘이 성우의 급식판을 바라봤다. 얼마 먹지도 않은 급식은 아직 한가득 남아있었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더 숙여 밥을 먹었다. 그러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왼쪽 손에 느껴지는 온기에 또 흠칫-하고 놀라서 성우를 쳐다봤다. 너 손, 예뻐서. 성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니엘의 왼손을 꼭 쥐었다.

 

 

굳이 손을 잡아야 해?”

 

.”

 

?”

 

좋으니까.”

 

 

화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니엘은 결국 성우가 건네준 소세지는 반도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가자. 다니엘이 식판을 잡고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안돼.”

 

?”

 

이거 다 먹고 가.”

 

뭐야. 나 배불러.”

 

그래도 안 돼.”

 

아니, 나 배부르다니까?”

 

그래도 먹고 가.”

 

 

빨리, 다 안 먹으면 나 손 안 놔준다? 성우는 반 협박 식으로 다니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저게 무슨 개소리야. 화를 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눈이 일자로 접히도록 웃으면서 자신을 보는 저 얼굴에 무슨 수로 화를 내겠다고. 이번에도 백기를 드는 쪽은 다니엘이었다. 그래, 빨리 먹고 끝내자. 억지로 입 안에 쑤셔 넣으며 식판을 다 비우고 성우를 쳐다보자 성우는 아쉽다는 듯 웃어 보이며 두 손을 들었다.

 

 

맛있게 먹었어?”

 

…….”

 

그런데 왜 맨날 입맛 없다고 그랬어.”

 

………….”

 

내일도 같이 급식 먹으러 올 거지?”

 

 

웃는 모습이 꼭 아이 같아서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같이 웃음이 나왔다. , 웃었다! 성우가 활짝 웃으며 다니엘을 가리켰다. , 나 웃고 있었나. 다니엘이 급하게 입을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너 웃는 거 예쁜데 왜 안 웃어! 좀 웃고 다녀. 성우가 다니엘의 말랑한 볼을 콕 찔렀다. 다니엘은 또 귓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 나 먼저 간다! 결국 성우를 혼자 남겨두고 급식실을 도망쳐 나왔다. 귓가에 성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11.

 

아버지의 비서에게 부탁해 다니엘의 뒷조사를 좀 했다. 고아원에서 쌍둥이 누나와 함께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가 백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게 다니엘의 인생의 전부였다. 여태까지 다니엘이 일했던 알바경력이 A4용지 반절도 채우지 못하는 인생 얘기보다 더 많았다. 급식을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것이었다. 급식비를 낼 돈으로 병원비를 갚아야하니까. 다음 날, 학교 교무실로 찾아가 다니엘의 급식비를 대신 지불했다. 선생님껜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니엘에겐 거짓말을 했다. 그냥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12.

 

다니엘.”

 

…….”

 

종례 끝났어. 집에 가자.”

 

나 기다린 거야?”

 

. 너 기다렸어.”

 

……. 미안.”

 

미안하라고 그런 거 아니니까 괜찮아.”

 

 

성우가 다니엘 옆 책상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렸다. 밤마다 뭘 하는데 학교에서 이렇게 자는 거야? 야동이라도 보는 거야? 성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니엘을 놀리자 다니엘의 귀가 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그런 거 아니다. 알바 때문에……. 알바? 너 알바도 해? , 좀 늦게 끝나서 피곤한 거다. 다니엘의 대답을 듣자 성우는 흐음, 하며 콧소리를 냈다. 가자. 다니엘이 준비를 마치자 성우가 책상에서 내려와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또 왜 잡는데.”

 

좋아서 그렇다니까? 너 손 되게 따듯해.”

 

 

거짓말. 다니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손보다 성우의 손이 더 따듯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다니엘은 성우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손을 빼내지 않았다.

 

 

 

 

 

13.

 

얼떨결에 잡아버린 다니엘의 손은 따듯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귀가 새빨개지는 모습이 귀여웠다.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모습도, 머리를 긁적이며 고마워하는 모습도 전부 눈에 들어왔다. 그냥 그 아이만 보면 왠지 심장이 간질간질하고 속이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계속 보고 싶었고, 잡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했나보다.

 

 

 

 

 

14.

 

, 피곤해.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딸랑-하고 카페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

 

안녕, 다니엘.”

 

네가 여기 어떻게……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너 얼굴 보여서. 여기서 알바해?”

 

, .”

 

 

, 커피도 네가 만드는 거야? 성우가 꽤 의외라는 듯 다니엘을 쳐다봤다. , 그렇지. 다니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나 네가 만드는 커피 마실 수 있는 거야?”

 

. 뭘로 주문할래?”

 

나는…….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

 

사이즈는?”

 

라지로. 카라멜 시럽 많이 뿌려주라.”

 

 

뭐야, 생긴 건 아메리카노를 마실 것처럼 생겨선. 완전 애 입맛이네. 다니엘이 속으로 생각했다. 앉아서 기다리면 금방 만들어줄게.

 

 

나 여기서 너 커피 만드는 거 구경하면 안 돼?”

 

안 돼. 카운터 앞이잖아.”

 

손님 들어오면 비킬게, ?”

 

 

그래도 안 돼. 다니엘이 단호하게 말하자 성우가 치, 하더니 다니엘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니엘은 성우가 자리에 앉는 것까지 보고서야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왠지 성우가 쳐다보고 있으면 실수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럽을 듬뿍 뿌려달라는 주문에 장난삼아 혀가 아릴 정도로 많이 넣어 주었다.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 나왔습니다.”

 

, 원래 이렇게 가져다주는 거야?”

 

아니. 원래는 카운터에서 픽업.”

 

나는 특별해서 가져다 준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

 

 

마셔봐. 시럽 많이 넣어달라고 해서 엄청 넣었어. 저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고 난 후 반응이 궁금했다. 인상을 찌푸릴까, 아니면 웃으면서 이게 뭐냐고 다시 만들어 달라고 그럴까. 성우는 컵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비주얼은 합격! 하면서 카라멜 마끼아또를 쭉- 빨아 마셨다.

 

 

………….”

 

? 맛없어?”

 

……달아.”

 

멀뚱히 컵을 쳐다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아싸, 한방 먹였다. 여태까지 나만 당했는데 한방 먹였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실실 나왔다. 시럽 많이 넣어달라고 그래서 듬뿍 넣었는데 이상해? 성우는 아무 말 없이 멀뚱히 나를 쳐다봤다. 옹성우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그런데 그 뒤의 대답이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좋아해.”

 

……?”

 

좋아한다고.”

 

………….”

 

 

훅 치고 들어오는 어퍼컷에 한 대 맞은 복서처럼 K.O당한 기분이었다. , 그러니까……. 어쩔 줄을 몰라서 당황하며 아무런 말이나 내뱉자 갑자기 성우가 입을 틀어막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달달한 거, 좋아한다고.”

 

…….”

 

다니엘 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박수까지 치며 웃는 성우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었다. 약간 솜주먹으로 살짝 때렸더니 핵폭탄으로 돌려받은 거 같은데. 쪽팔려 죽을 거 같았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으으,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자 성우가 또 손을 잡아왔다.

 

 

물론,”

 

………?”

 

너도 좋아.”

 

………….”

 

 

-.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건 진심이다. 방금 성우는 진심으로 다니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여전히 다니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 , 나 일하러 가야해! 부랴부랴 손을 빼내고선 소리를 빽 지르고 후다닥 ‘STAFF ONLY’가 적혀 있는 문 뒤로 도망갔다. -. 문이 닫히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바닥에 주르륵 내려앉았다.

 

 

……-.”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니까, 나 방금, 고백 받은 거지? 머리에 나사가 하나라도 빠진 듯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아악-! 다니엘이 머리를 박박 긁으며 소리를 질렀다. 다니엘은 당황스러웠다. 옹성우가 고백해서, 남자가 고백해서 당황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당황스러운 부분은, 100m 달리기라도 한 마냥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제 심장이었다.

 

 

 

 

 

15.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는지 모르겠다. 괜찮아, 뻔뻔하게 모르는 척 하고 지내면 되겠지. 그게 생각보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니엘이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후- 하고 내뱉고는 비장하게 문을 열었다. , 다니엘. 지금 손님 왔으니까 손님 좀 받아줘. 같이 알바하는 형이 커피를 만들면서 부탁을 했다.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네, 하고 대답한 다음 카운터로 향했다. , 쟤는 왜 하필 자리도 카운터에서 딱 보이는 자리에 앉은 거야.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선 성우의 옆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공부라도 하는 모양인지 책을 펴 놓고 꼬물꼬물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주문을 받으면서도 계속 신경이 쓰여서 슬쩍슬쩍 쳐다봤다. 그 날 결국 주문실수를 해버렸다.

 

 

 

 

 

16.

 

다니엘, 수고했어.”

 

, . 내일 봬요.”

 

 

드디어 알바가 끝났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자 아직까지도 열심히 공책에 무언가를 꾸물거리며 적고 있는 성우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속으로 염불을 외우며 성우의 어깨를 툭 쳤다.

 

 

, 안 가냐?”

 

? 다니엘. 알바 이제 끝난 거야?”

 

. 뭐 하는데 이렇게 늦게까지 카페에 있냐.”

 

, 나 숙제 좀 하느라. 이제 집 가는 거야?”

 

아니. 나 알바 하나 더 있는데.”

 

 

집에 같이 가고 싶었던 모양이었는지 알바가 하나 더 남았다는 말에 성우의 입술이 툭 튀어 나왔다. 그거 때문에 여태까지 기다린 건가. 괜히 미안한 마음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 어떻게 해야 하지. 다음 알바까지 30분 정도 있기는 한데…….

 

 

.”

 

?”

 

너 집 어디야.”

 

ㅁㅁ동 쪽인데.”

 

가자. 데려다 줄게.”

 

 

그 말에 성우가 두 눈을 꿈벅였다. , 싫어? 아무렇지 않은 척 싫냐고 물어보자 성우 아니! 하고 소리 지르면서 가방을 후다닥 쌌다. 문을 여니까 훅 들어오는 따듯한 기운에 이제 곧 여름이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옆에 붙어서 같이 걸었다. 저기, 너 다음 알바 있는데 늦는 거 아니야?

 

 

괜찮아.”

 

알바하는 건 어느 쪽인데?”

 

너희 집 방향이랑 비슷해.”

 

 

거짓말이었다. 옹성우네 집 방향은 내가 알바하는 곳을 지나쳐 걸어야 했다. 그래도 꽤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 줬는데 혼자 보내기는 미안하니까. 고마워, 작게 얘기하는 목소리를 듣자 별 것도 아닌데 괜히 머쓱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 나 여기 살아.”

 

, 다 왔네.”

 

. 오늘 데려다 줘서 고마워!”

 

 

몇 마디 얘기를 나누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성우네 집에 도착했다. 손을 흔들며 오늘 데려다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성우를 향해 손을 몇 번 흔들어 줬다. 현관으로 들어가는 것 까지는 보고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성우가 현관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있는데 별안간 옹성우가 훽 돌아서더니 대뜸 소리를 질렀다.

 

 

다니엘!”

 

?”

 

내일도 카페 놀러가도 되지!”

 

…….”

 

 

굳이 말릴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손님이 오면 나야 좋지.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히 들어가야 해! 하고 소리를 지르고선 현관으로 쏙 사라졌다. 성우의 동글동글하고 까만 뒤통수가 보이지 않자 다니엘은 그제야 몸을 돌려 알바하는 가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게로 걸어가는 걸음마다 성우와 제가 같이 걸었던 길이라는 걸 생각하자 입꼬리가 저절로 씰룩씰룩 올라갔다.

 

 

 

 

 

16.

 

그 뒤로 성우는 종종 다니엘의 카페에 놀러 갔다. 안녕, 다니엘. 성우가 앉는 자리는 항상 한결같았다. 카운터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앉아서 다니엘의 알바가 끝날 때까지 공부를 하거나 다니엘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손님이 덜 없는 시간대에는 조각 케이크를 사서 다니엘에게 먹여주기도 했다. 다니엘은 그 일상이 나쁘지 않았다. 이젠 그가 오지 않는 날이 허전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성우가 카페에 놀러온 날이면 다니엘은 성우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때마다 성우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해줬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귓가가 발개지고 심장이 간질거렸다.

 

 

여름이 왔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더운 느낌이었다. 다니엘은 더운 걸 굉장히 싫어했다. 다니엘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곧 성우가 올 시간이었다.

 

 

다니엘. 밥 먹으러 가자.”

 

조금만 있다가 가자. 너무 덥다.”

 

너 더위 많이 타?”

 

으응…….”

 

 

다니엘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 미치겠다. 밥이고 뭐고 푹 쉬고 싶다. 에어컨 온도 조금만 더 낮췄으면. 얼굴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뭐꼬, 실눈을 뜨고 앞을 보니 성우의 미니 선풍기가 눈앞에 보였다. 시원해? 으응. 시원한 바람에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 좋다.

 

 

다니엘.”

 

오야.”

 

손잡아도 돼?”

 

……마음대로 해라.”

 

 

자신의 손에 뜨끈한 성우의 손이 닿았다. 체온이 높아서 그런지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에 땀이 차는 게 느껴졌다. 다니엘은 더운 게 싫었다. 땀이 나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성우의 손을 놓지 않았다.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눈을 떠 성우를 바라보니 눈이 마주쳤다. 성우가 아이처럼 웃어 보였다. , 다니엘은 인정해야만 했다. 성우만 보면 가슴이 울렁이던 이유도, 더위를 싫어하면서도 그의 손을 놓고 싶지 않는 것도, 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까지. 전부 사랑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성우야.”

 

, 이제 갈까?”

 

나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줘라.”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 지금 너무 덥다.”

 

 

차가운 게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를 잡고 있는 손바닥에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17.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성우는 추가로 학원을 세 개나 더 다니게 되어 아마 방학동안은 얼굴을 보기 힘들 거라고 얘기했다. 아쉬운 표정을 한 채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징징대던 성우에게 한 달만 참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한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개학식 날 보자고 등을 토닥이며 돌려보냈지만 정작 괜찮지 않은 건 다니엘이었다. 방학이 벌써 반이나 지나갔는데 성우는커녕 성우의 그림자 하나 못 봤다. 매번 카운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생각보다 많이 허전했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을 때면 무의식적으로 성우가 앉던 자리를 보게 되었다. , 근데.

 

 

…….”

 

주문 안 받을 거야?”

 

……옹성우?”

 

잘 지냈어?”

 

 

, 너 왜……. 분명히 학원 때문에 바빠서 못 온다던 애가 눈앞에 서 있었다. 꿈인가, 싶어 볼을 살짝 꼬집어 봤지만 얼얼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빨리 마끼아또 한 잔만, 진짜 피곤해서 죽을 거 같아.

 

 

학원은 어쩌고 여길 찾아와.”

 

오늘 영어 그냥 쨌어. 하루 정도는 괜찮아.”

 

앉아서 기다려라. 곧 만들어 줄게.”

 

!”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살이 좀 빠진 느낌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 성우의 시선이 느껴지자 귓가에 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 카라멜 시럽 많이 넣어 줘야지. 학원이 많이 빡센가, 아닌 척 하고 있지만 다른 날보다 유난히 더 피곤해 보여서 사장님 몰래 작은 쿠키 하나도 서비스로 챙겨줬다.

 

 

, 마끼아또. 시럽 많이 넣었어.”

 

으어. 고마워! 근데 나 쿠키 안 시켰는데?”

 

서비스. 너 힘들어 보여서 사장님 몰래 주는 거야.”

 

. 어떻게 알았어?”

 

너 얼굴에 다 써 있다.”

 

 

맞아, 나 어제 영어학원에서 엄청 혼났거든. 힝구, 성우는 입술을 댓발 내민 채 카라멜 마끼아또를 쭉쭉 빨아먹고선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왜 혼났는데.

 

 

아니, 어제 문장 해석하는데 평소에 안 하던 실수를 했거든.”

 

…….”

 

쌤이 너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런 식으로 할 거냐고…….”

 

 

아니, 내가 맨날 틀리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 한 번 실수한 거 가지고 엄청 사람을 괴롭히는 거 있지. 사람이 실수 좀 하고 살 수도 있지! 성우는 꽤나 억울했는지 테이블까지 쾅 치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래, 맞다. 쌤이 잘못했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뭐.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자 많이 피곤한 지 테이블에 머리를 기대로 엎드렸다. 마음 같아선 하루 종일 투정을 들어주고 싶었는데 계속 손님이 들어와서 그러지 못했다. 쉬고 있어. 엎드려 뻗어 있는 성우를 놔두고 카운터로 다시 들어왔다. 주문을 받으면서 몰래 훔쳐보자 엎드려 있던 성우랑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아이고, 많이 피곤했나 보네.”

 

 

어느 정도 손님이 빠지자 여유가 생겨 성우를 보러 갔더니 피곤했는지 엎드려 자고 있었다. 에어컨 바로 앞 자리여서 추운건지 몸을 살짝 떠는 게 보여서 주섬주섬 창고에서 담요를 찾아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새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미간에 손가락을 살짝 갖다 대니 움찔 거리다 인상을 풀었다. 뭐가 그렇게 힘든 걸까. 마냥 순탄해 보이던 성우도 힘든 순간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18.

 

성우야, 일어나자.”

 

좀만 더.”

 

시간 다 됐다. 집에 가야지.”

 

…….”

 

가자, 바래다 줄게.”

 

아니야. 나 또 학원가야 해.”

 

 

집에 안 가고? 놀란 목소리로 물어보자 뒤에 논술학원이 하나 더 있다고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 피곤해. 아직 피로가 덜 풀렸는지 눈을 꿈벅대며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괜히 속상했다. 내가 뭐라도 해줘야 할 텐데 항상 받기만 하고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너 얼굴 보니까 힘난다.”

 

?”

 

너 얼굴 보니까 좋다고.”

 

 

고마워, 바빴을 텐데 오늘 나 챙겨줘서.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넌 왜 항상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걸까. 다니엘은 밖으로 나가는 성우를 불렀다. 성우야, 이리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니엘 앞으로 걸어간 성우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자 성우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다니엘의 등을 토닥였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고맙다.”

 

? 뭐가?”

 

그냥 다. 그러니까 성우야.”

 

, 다니엘.”

 

너도 무슨 일 있으면 오늘처럼 다 말해줘라.”

 

알았어, 알았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거 밖에 없어서.”

 

 

축 쳐진 목소리로 말하자 성우가 힘을 주어 등을 끌어안았다. 아니야, 다니엘. 나는 그냥 너랑 이러고만 있어도 저절로 힘이 나. 너한테는 별 것도 아니겠지만 나한테는 네가 하는 이 모든 게 위로야.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지. 위로를 해주려고 한 말인데 되려 제가 위로를 받고 있었다. , 알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꼭 안아주고 팔을 풀었다.

 

 

학원 늦겠다. 어여 가라.”

 

! 이제 방학 얼마 안 남았으니까 우리 힘내자.”

 

그래, 너도 공부 열심히 하고. 넌 다 잘 할 거야.”

 

고마워! 다니엘, 나 이제 갈게!”

 

 

성우가 손을 흔들며 횡단보도 저 너머로 사라졌다. 늦여름의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너의 향기가 넘어오는 것 같아 괜히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어쩌면 여름을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19.

 

개학을 했다. 아침에 담임이 공지하기로는 수능원서를 다음 주부터 신청 받는다고 한다. 나눠준 통신문을 보니 원서비용이 최소 37천원이었다. 하이고, 비싸기도 해라. 택도 없는 소리였다. 어차피 대학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반 아이들 중 그 누구도 수능원서비용을 걱정하지는 않을 테니까.

 

 

다니엘.”

 

.”

 

방학 잘 보냈어?”

 

나는 알바하고 지냈지. 너는 그 뒤에 어땠나. 선생님한테 또 혼났어?”

 

당연히 아니지! 그 날은 그냥 실수였다니까?”

 

 

다니엘 너 마저 내 실력을 못 믿는 거야? 똑땅해. 성우가 힝구 표정을 지으며 삐진 척을 했다. 미안하다, 너 열심히 하는 거 다 알지. 말로 살살 달래주자 이번 한 번만 봐준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

 

 

, 너는 이번에 사탐 선택 어떤 걸로 할 거야? 결정했어?”

 

…….”

 

나는 아마 법정이랑 생윤 할 거 같은데.”

 

……….”

 

너는 아직도 결정 못 했어? 우리 다음 주부터 원서 접수래!”

 

 

난감했다. 어떻게 설명 해줘야 하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를 다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치기도 싫었다. 굳은 표정으로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하나 생각하고 있다가 그냥 수능만 안 본다고 말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이번에 수능 안 본다.”

 

?”

 

수능 안 본다고.”

 

 

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성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니엘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꼭 나를 꿰뚫어 보는 느낌이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 혹시 왜 안 보는지 물어봐도 돼?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성우의 물음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성우가 날 싫어할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몰라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데 성우가 손을 잡았다.

 

 

말하기 싫으면 안 말해도 돼.”

 

…….”

 

대신에 나중에라도 좋으니까 나한테 꼭 말해줘야 해.”

 

…….”

 

그럼 다니엘 너 수능 날 나 응원하러 와주면 안 돼?”

 

?”

 

나 수능 때 너무 떨릴 거 같은데, 네가 나 응원 와주면 안 돼?”

 

 

? 부탁이야.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부탁이야, 하는 성우의 말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그 날 하는 일도 없고, 진짜 응원이나 갈까 생각했다. 막 거기 사람 많고 심장은 터질 거 같은데 딱 널 보면 다 괜찮아 질 거 같아! 소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쳐다보는 성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알겠어. 응원 갈게.

 

 

진짜?”

 

진짜. 선물도 사 갈게.”

 

, 벌써 좋아. 약속해줘! 약속!”

 

, 약속.”

 

너 이거 무르면 안 된다! 진짜 응원 와줘야 해!”

 

 

성우는 호들갑을 떨며 새끼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어린애 같은 행동에 피식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자 도장! 하면서 엄지까지 꾸욱- 눌렀다. 됐지? 이제 너 공부해.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공부에 집중하라고 말하자 성우가 눈을 마주쳤다.

 

 

다니엘.”

 

?”

 

기다리고 있을게.”

 

알겠으니까 빨리 공부해라.”

 

너도, 네 이야기도.”

 

………….”

 

그러니까 그 때까지 어디 가면 안 돼.”

 

……알았어.”

 

 

나른한 목소리로 고백처럼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달콤해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게 꿈이라면 영영 깨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행복하고 황홀한 꿈이었다.

 

 

 

 

 

20.

 

수능응원 선물로 뭐가 적당할지 생각하는 동안 시간은 훌쩍 흘렀다. 이제 수능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아직까지도 뭘 선물해줄지 정하지 못해서 발만 동동 굴리는 다니엘이었다. , 알바를 하나 더 구해야하나. 그래도 제대로 된 선물을 주고 싶어서 하루 종일 고민하는데 국어 선생님이 사용하시는 만년필이 생각났다. , 만년필 좋은 거 같은데.

 

 

학교가 끝나자마자 성우에게는 따로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라고 말한 뒤 백화점으로 뛰어갔다. 만년필 파는 곳이 어디 있지, 한참을 찾던 중 마침 각인 이벤트를 하는 브랜드를 발견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주춤거리며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자 점원이 그 모습을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찾으시는 제품 있으신가요?”

 

……. 그 만년필 좀 보려고 하는데.”

 

마침 지금 수능응원 이벤트로 할인행사 하는 중이에요. 무료로 각인도 해드리고 있습니다.”

 

. 제가 친구한테 선물로 주려고 하는데.”

 

친구 분 혹시 수능생이신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점원이 이 제품이 수능생들에게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이라며 몇 가지를 추천해 줬다. 이 제품은 외관이 심플하고, 이 제품은 펜촉이 다른 만년필과는 좀 다르고. 대충 고개만 끄덕거리면서 중간에 아, 하고 감탄사를 섞어줬다. , 저기.

 

 

저 까만 만년필은 어때요?”

 

, 저거요? 저것도 요새 굉장히 인기 있는 제품인데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혹시 저것도 각인 가능한가요?”

 

, 그럼요~ 이건 리필용 잉크 포함해서 24만원이에요.”

 

 

, 무슨 만년필이 이렇게 비싸냐. 신난 점원은 옆에서 계속 만년필 설명을 했지만 이미 귀에 안 들어 온 지는 오래였다. 외관은 심플한 검은색에 깔끔하게 금색으로 포인트만 칠해져 있는 만년필은 성우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비싸서 그만둘까 싶다가도 여태까지 챙겨준 게 있는데 그래도 제대로 응원해주고 싶었다. 어쩔 수 없지, 알바 하나 더 구해야겠다.

 

 

 

 

 

21.

 

백화점을 나오는데 밖에서 목도리를 팔고 있는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겨울용품을 판매하시는 건지 할머니 앞에는 목도리와 장갑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잠깐 구경만 하려고 살짝 둘러보던 다니엘은 파란색 털실 목도리가 눈에 띄었다. 생각해보니 수능 날 엄청 추울 텐데. 목도리도 하나 같이 선물할까.

 

 

할머니, 저 목도리 얼마에요?”

 

파란 목도리? 하나에 만원, 두 개 사면 만 오천원.”

 

, 그러면 파란색으로 두 개 주세요.”

 

 

두 개에 만 오천원이라는 말에 충동적으로 두 개를 구매했다. , 커플 목도리라고 둘러대면 좋겠네. 목도리를 매고 있는 성우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미리 주지 말고 수능 날 응원하러 가서 직접 매줘야겠다.

 

 

 

22.

 

새벽에 신문배달 알바를 하나 더 구했다. 한 달에 30만원 밖에 벌지 못하지만 급한 마음에 시작하게 되었다. 새벽에 알바를 뛰고 집에 오면 바로 교복을 입고 학교로 출발해야 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또 알바를 뛰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2. 씻고 잘 준비를 하면 빨라봐야 230분 정도였고, 신문배달 알바를 하려면 늦어도 430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죽을 듯 힘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렇게라도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23.

 

 

수능이 2주도 채 안 남은 어느 날, 학교를 통해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누나가 많이 위급한 상황이라고. 성우에게 제대로 말도 못한 채 병원으로 뛰어갔다. 헉헉 거리며 도착한 병실 안에는 발작을 일으키며 몸부림 치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진정제 투여해!”

 

김 간호사, 거기 팔 잡아!”

 

여기 좀 잡아주세요!”

 

 

양 팔과 다리에 간호사들이 매달려 발버둥치는 몸을 붙잡고 있었다. 차마 더 볼 용기가 없어서 도망치듯 병실을 뛰쳐나왔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벌벌 떨리는 손으로 변기 커버를 올려 구역질을 했다. 먹은 게 없어서 시큼한 위액만 넘어왔다. , 이게 현실이었지. 그동안 너랑 함께 있어서 현실을 잊고 있었다. 너무 행복해서, 너와 함께라면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나보다. 아픈 누나가 있고, 누나의 병원비가 부족해 매일 알바를 해야만 하고, 먹은 것조차 없어서 누런 위액만 넘어오는 지금 이 상황이 나의 현실이었다.

 

 

의사는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기지 않으면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병실도 몸이 부셔져라 일해서 겨우 맞추는 정도인데, 중환자실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제야 좀 행복해지겠다 싶었는데 왜 자꾸 불행이 내 발목을 잡고 놔주질 않는 걸까. 애초에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가. 나는 왜 불행해야만 하는 걸까. 집 앞에 맘춰서서 대문을 바라보았다. , 맞다. 나는 불행이었지. 다시 또 지옥이었다.

 

 

 

 

 

24.

 

모든 알바 사장님들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알바비를 가불받았다. 성우의 만년필을 사려고 했던 돈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다 모아봤자 이제껏 지불하던 비용의 두 배도 채 되지 않았다. 일단 급한 대로 불부터 꺼야 한다고 생각하고 돈 봉투를 쥐고서 병원으로 갔다. 수납 번호표를 기다리는 순간조차도 초조해서 무릎을 달달 떨었다. 78번 고객님. 번호가 호명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 201호 강윤주 환자 보호자인데 진료비 수납 때문에요.”

 

, 강윤주 환자 분 진료비 전부 수납 되셨는데요?”

 

?”

 

오늘 아침 쯤에 어떤 남자 분이 중환자실로 변경하시면서 전부 지불 하셨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병원비를 지불한 기억은 없다. 손에 들고 있는 돈 봉투가 그 증거였다. 혼란스러웠다. 누가 대신 진료비를 내줬지? 내 줄만한 사람이 없는데……. 한참 눈알을 굴리던 다니엘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간호사에게 물었다.

 

 

저 혹시, 저 대신 진료비 지불하신 분 혹시 키가 저만했나요?”

 

, 네네. 키는 좀 크셨고 이목구비가 되게 뚜렷하신 분이셨어요.”

 

, 감사합니다.”

 

 

얘기를 들은 다니엘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돈 봉투를 들고 있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그걸 여태까지 숨기고 자신에게 행동한 성우가 미웠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키는 일은 생각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성우가 제 손을 잡고 지금이 아니어도 좋으니 나중에라도 비밀을 꼭 말해달라고 말하는 그 눈빛이 너무 다정해서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다 거짓이었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을 했고, 나를 속였어. 그것도 모르고 성우를 믿은 제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25.

 

무작정 성우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성우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화가 났다. 대체 왜 날 속였냐고,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모르는 척 했냐고 묻고 싶었다. 성우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지옥 불을 내딛는 기분이었다.

 

 

저 멀리서 성우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닥을 보며 힘없이 걷던 성우와 눈이 마주치자 저를 향해 웃어 보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니엘! 해맑게 제 이름을 외치며 달려오는 성우가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니엘! 무슨 일…….”

 

.”

 

……다니엘?”

 

너 내가 불쌍해?”

 

 

성우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성우를 향해 쥐고 있던 돈 봉투를 던졌다. -. 던진 돈 봉투는 성우의 가슴께를 맞고 바닥에 볼품없이 흩어졌다. 성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바닥에 흩어진 돈을 바라보다 떨리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다니엘.”

 

누가 너한테 도와달래?”

 

일단 진정 좀 하고.”

 

누가 이딴 거 대신 해달라고 했냐고.”

 

다니엘, 그런 게 아니라.”

 

돈 없는 거지새끼 누나가 죽어가는 게 불쌍해서 돈 대신 내줬어?”

 

다니엘!”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하기 힘들었겠네. 고생했네. 옹성우.”

 

 

아니야, 다니엘. 그런 게 아니야. 결국 성우가 울음을 터트렸다. 미간을 구긴 채 아니라고 울면서 제 손을 붙잡았다. 알고 있었다. 저를 연민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성우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이 꼭 열등감 같아서, 나를 좋아하고 날 위해 이렇게까지 해 준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겨우 이것 밖에 되지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모질게 말을 내뱉었다.

 

 

진짜 최악이다.”

 

 

여태까지 참고 있던 모든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성우 앞에서만은 울지 않겠다고 다짐 했는데 그 다짐이 무색하게 눈물이 힘없이 떨어졌다. 눈물을 흘리자 성우는 곧바로 달려가 저에게 안겼다. 성우를 안아줄 자신이 없어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성우는 제 어깨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다니엘, 정말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성우가 옷깃을 꼭 잡고 오열했다.

 

 

다니엘, 좋아해. 좋아해 다니엘.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랬어.”

 

………….”

 

네가 불쌍해서, 너를 동정해서 그러는 게 아니었어…….”

 

………….”

 

내가 너한테,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으니까.”

 

………….”

 

내가,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제발 싫다고, 싫다고 피하지만 말아줘.”

 

 

 

미안해, 미안해.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하염없이 바닥을 향해 울고 있는 성우를 차마 달래줄 수 없었다.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제발 피하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너에게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너는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데 나는 걸귀 같은 굶주린 사랑을 하고 있었다. 내 손을 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너를,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했던 너를, 나는 고작 울리는 정도 밖에 하지 못했다.

 

 

성우야, 성우야. 너의 사랑은 너무 다정하다. 그래서 결국 나를 울리고, 나를 무너지게 만들어. 너는 겨우 집에 바래다주는 걸 고맙다고 얘기하면서 나에겐 너무 많은 사랑을 줘. 성우야, 내가 너를 사랑해서, 네가 나를 사랑해서, 그래서 우린 아프다. 내 손을 잡고 있는 너의 손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너의 목소리가, 네가 흘리고 있는 그 눈물이 너무 뜨거워서. 이토록 뜨거운 사랑을 해서 아픈가 보다. 조금만 더 가벼운 사랑을 할 걸. 더 미지근한 사랑을 할 걸. 그냥, 그냥 사랑하지 말 걸.

 

 

미안해.”

 

다니엘, 다니엘…….”

 

미안해,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흐으, 제발, 제발 피하지만 말아줘.”

 

 

아이처럼 우는 성우를 품에서 떼어내자 가지 말라며 손을 잡아왔다. 부들부들 떨면서 동앗줄 마냥 꼭 잡고 있는 손의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차라리 이 온도에 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처럼 예쁜 사랑을 줄 자신이 없다. 나의 삶은 언제나 불행했고, 불행하고, 앞으로도 불행할 테니까. 눈물조차 닦아주지 못하는 나를 너는 왜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걸까. 놓고 싶지 않았던 성우의 손을 놓았다.

 

 

미안해, 성우야.”

 

흐으, 다니엘. 미안해. 허으, 미안해.”

 

춥다. 내일보자.”

 

 

성우를 그 자리에 놔두고 뒤를 돌았다.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 돌아보지는 않았다. 집에 가는 내내 고개조차 들지 못할 정도로 울었다. 예전에 본 글귀가 생각이 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일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나에게는 그저 희망고문일 뿐이었다. 사랑조차 하지 못할 만큼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26.

 

다니엘의 누나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서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다니엘은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비서삼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다니엘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아버지에게 사정을 말한 뒤 다니엘 대신 병원비를 수납했다. 이게 내가 다니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7.

 

다니엘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어제 일 때문에 다니엘이 혹시 자기를 피할까봐 한참을 교실 앞에서 고민했는데, 그 고민이 무색하게 다니엘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아픈 걸까, 아니면 자신이 불편해서 그런 걸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교실에 들어온 담임이 다니엘의 소식을 전했다. 개인사정으로 인해 학교를 나오지 못했다고. 누나가 아파서 그런 걸까. 차라리 그게 이유였으면 좋겠다는 나쁜 생각을 했다.

 

 

 

 

 

28.

 

선생님께 다니엘이 왜 안 왔는지 알 수 있냐고 묻자 선생님은 다니엘이 말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셨다. 성우야, 다니엘 걱정은 너무 하지 말고. 이번 주 목요일이 수능이니까 공부에 집중하자.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다니엘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수능 전 날이었다.

 

 

 

 

 

29.

 

이번 년 수능 날은 작년보다 더 추웠다. 롱패딩을 입고 수능장에 도착하자 여기저기서 수능을 잘 보라며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 다니엘이 올 때까지 좀 기다려 보기로 했다. 10, 20, 1시간이 지나도 다니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젠 시간이 없어서 교실로 들어가야만 했다. 다니엘을 주려고 준비했던 초콜릿은 결국 주머니 안에서 다 녹아버리고 말았다.

 

 

 

 

 

30.

 

수능이 끝나자 긴장이 탁 풀렸다. , 드디어 끝이다. 지난 수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가 오긴 하는구나.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다니엘이 생각났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서 못 온 건 아닐까, 그래서 지금 밖에서 날 기다리는 건 아닐까. 그 생각에 재빨리 짐을 싸 수능 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응원하러 와 준다고 약속 했으니까,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학부모와 친구들, 선생님들이 가득한 저 사람들 사이에 다니엘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니엘, 다니엘. 어디 있어.

 

 

아무리 찾아봐도 다니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다시 10, 20, 1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그래도 다니엘은 나타나지 않았다. 얼어붙은 손에 입김을 불어 넣어도 손은 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니엘의 따듯한 손이 그리웠다. 내가 그렇게 싫었나, 바보. 그러니까 왜 그런 짓을 했지. 이미 사람들은 다 빠져 나가고 남은 사람은 저 밖에 없었다. 그래도 좀 더 기다려 보자고 바보 같이 한 시간을 더 서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다니엘은 오지 않았다. 매번 다니엘과 걷던 길을 혼자 걸었다. 울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생각했다. 내일 다니엘이 학교에 온다면 제대로 사과해야겠다.

 

 

 

 

 

31.

 

다음 날, 다니엘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대신 담임은 다니엘이 개인 사정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얘기를 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다니엘이 학교를 그만뒀다니. 조례가 끝나자마자 선생님을 붙잡고 다니엘의 집주소를 알려달라고 사정했고, 선생님은 마지못해 집주소를 건네 주셨다. 1교시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학교를 나왔다. 생애 첫 무단조퇴였다.

 

 

 

 

 

32.

 

무작정 다니엘의 집을 찾아갔다. 집에 없다면 한참이라도 기다려서 그 애에게 따질 생각이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내가 얼마나 꼴 보기 싫은지, 네가 왜 학교를 그만두어야만 했는지. 다니엘의 집을 찾아가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억울하다 못해 화가 났다.

 

 

다니엘의 집은 재개발을 위해 철거중인 달동네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숨이 차 헉헉 거리며 올라가자 녹이 다 슬어버린 대문이 눈앞에 보였다. , 강다니엘. 주먹으로 문을 한 번 쾅- 내리쳤다. 문 열어.

 

 

문 열라고.”

 

강다니엘, 문 열어!”

 

!”

 

 

몇 번 주먹으로 대문을 쾅쾅 내려치니 삐걱 소리를 내면서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주인이 없는 집은 들어가지 않는 게 예의라고 배웠지만 지금은 예의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열린 대문을 발로 차고선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바로 앞에 보이는 문이 다니엘의 방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 챘다. 벌컥- 화가 난 마음에 방문을 열었다.

 

 

………뭐야.”

 

 

다니엘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다니엘의 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좁은 방 한 가운데에 놓인 선물상자 하나였다. 방이라곤 여기 밖에 없어서 지내는 곳은 분명 여기일 텐데. 누나가 있는 병원에 간 건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려던 참이었다. 선물상자 위에 놓인 편지봉투에 제 이름을 발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눈을 뜨고 선물상자를 바라봤다. 봉투 위 삐뚤한 글씨체는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다니엘의 글씨체가 맞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뜯었다. , 새하얀 종인에 몇 자 적히지도 않은 편지의 발신인은 다니엘이 맞았다.

 

 

안녕.

편지를 쓰려니까 많이 떨린다. 글씨체가 못생겨도 좀 봐줘.

사실 너한테는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언제나 나를 챙겨주고 나 심심하지 않게 놀아주기도 하고. 여태까지 진 빚은 내가 꼭 갚을게.

 

성우야. 너는 언제든지 잘 하는 사람이니까 이번 수능도 잘 볼 수 있을 거야. 나도 이번 수능 꼭 잘 볼게. 이건 수능선물.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이거 밖에 없지만 감기 걸리지 말라고.

 

수능 끝나고 할 말 있으니까 정문에서 기다릴게. 내가 너한테 하지 못했던 얘기들, 그리고 내가 꼭 말해주고 싶은 것들 전부 다 말할게. 추운데 감기 조심하고, 수능 망치지 말고, 넌 어디서든 잘 할 거야.’

 

 

 

편지를 다 읽은 성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얇은 종이가 구겨지고, 그 위에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종이 끝자락에는 급하게 갈긴 글씨체로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미안해. 안녕.]

 

 

그 마지막 문장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다니엘은 이제 더 이상 여기 없다. 혹시나 자기가 찾아올까 아예 모르는 곳으로 떠났다. 어디로 갔는지 힌트조차 남기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 네가 떠나면 혼자 남은 나는 어떻게 견디라고 이러는 건지. 이를 악 물고 편지 뒤에 있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 상자 속 내용물을 확인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이상한 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 아으…….”

 

 

참고 있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상자 안에는 가지런히 접혀 있는 목도리가 보였다. 코발트블루색의 털실 목도리.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나쁜 새끼, 할 말 있다며. 개새끼야. 말도 안하고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내가 어떻게 찾아. 미안하다고 말해줘야지, 응원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목도리에서 미약하게 다니엘의 체향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서럽게 울었다. 이 방엔 아직도 너의 향이 가득한데 너는 없었다. 차라리 네 향에 숨이 막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3.

 

매일 학교가 끝나면 성우는 다니엘의 집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가 버린 그를 그리워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보일러조차 되지 않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 한참을 곰팡이가 가득한 천장을 날이 저물 때까지 바라봤다. 이젠 서서히 너의 향도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게 또 서러워 한참을 울었다.

 

 

 

 

 

34.

 

대학에 합격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축하한다며 등을 다독여줬다.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대학 합격하면 축하주 사주겠다고 큰소리치던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조퇴를 하고 하루 종일 다니엘의 방에 누워 있었다.

 

 

다니엘. 나 대학 합격했어.”

 

그래도 넌 나 보러 와주지 않을 거지?”

 

다니엘, 나 미워해도 좋으니까.”

 

 

한 번만, 한 번만 나 보러 와주면 안 돼? 나 대학도 합격했고, 네 선물도 찾았어. 매일 너 생각도 하는데 그냥 한 번만 나 찾아와주면 안 돼?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손 한 번만 잡아보면 안될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온 얼굴을 다 적셨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애타게 돌아오지 않는 그 이름을 하염없이 불렀다. 다니엘, 다니엘.

 

 

 

 

 

35.

 

다니엘은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 자신의 고향인 부산으로 다시 내려왔다. 병세가 악화되어 누워있는 누나도, 자신에게 울면서 고백하던 성우도 다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도망쳐 나왔다. 울고 있던 성우도, 병실에 누워 있는 누나도 다 버린 채.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 싶을 정도로 자신은 이미 바닥이었다.

 

 

부산의 겨울 바다는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고, 생각보다 죽기 좋은 날이었다. 바닷물이 점점 차오를수록 성우가 보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한마디도 해주지 못한 채 도망쳐서 미안해. 모든 걸 바다에 다 내던졌다. 몸도, 마음도. 발버둥 칠 힘조차 없어서 가만히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눈을 뜨니 물 아래로 부서지는 빛이 보였다. 그냥 사람답게 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빛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왠지 모르게 빛이 닿는 손목 안 쪽이 뜨겁다고 느껴졌다. , 맨 처음에 성우가 만졌던 그 부분이었다. 온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와중에 그 부분만 화상을 입은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성우가 생각이 났다. 이대로 죽으면 그리워 할 수조차 없잖아.

 

 

성우가 보고 싶었다. 그 아이의 온도가 그리웠다. 살고 싶어졌다.

 

 

 

 

 

36.

 

성우를 버리고 도망친 지 꼬박 3년이 지났다. 잘 지내고 있을까. 항상 생각하지만 이 맘 때쯤 되면 유난히 성우가 그리웠다. 여름을 닮은 아이여서 그런가. 청량한 여름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뒤에서 성우가 자신의 손을 잡으며 나타나줄 것만 같았다.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도망쳐 버린 사람치고는 과분한 상상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이 예전에 살던 고아원에 찾아갔다. 다니엘을 보고 놀란 원장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있을 만큼 지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뒤 다니엘은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했고, 밖에서 함께 놀아주기도 했다. 낮잠을 잘 시간이면 고아원 선생님들을 따라 청소와 뒷정리를 도왔고, 저녁엔 커피숍에서 알바를 해 고아원에 조금이라도 돈을 보태었다. 커피숍 알바를 하면서 다니엘은 항상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를 만들어 놓았다. 그저 습관이었다.

 

 

 

 

 

37.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다. 아이들과 밖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평소에 저를 잘 따르던 아이 한 명이 다니엘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 밖에서 누가 형 찾고 있어요.”

 

? ?”

 

. 형이요.”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다니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를 뒤 쫒아 가다 걸음을 멈췄다.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매일같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더운 여름에도 목에 둘둘 말려진 파란 목도리를 잊을 수 없었다. 혹시 꿈일까,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가 화를 내며 다가왔다.

 

 

. 이 개새끼야.”

 

?”

 

네가 뻔뻔하게 왜 울어? 울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왜 네가 울려고 그러냐고!”

 

…….”

 

내일 보자며! 내일 보자고 한 새끼가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져? 나한테 할 얘기도 있다며!”

 

……성우야.”

 

중요한 얘기라며, 중요한 얘기라면서 너 그것도 나한테 얘기 안했잖아. 수능 때 응원 와준다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가슴팍을 때리며 울부짖는 성우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 성우를 바라보는 두 눈이 떨렸다. 보고만 있어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성우야, 수없이 그리워하던 이름을 내뱉자 눈물이 흘렀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나. 하루에 수 천 번도 넘게 허공에 그리던 얼굴이 제 눈앞에 서 있었다.

 

 

내 부탁이 그렇게 어려웠어?”

 

성우야

 

피하지만 말아달라고,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한 게 그렇게 싫었어?”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성우는 자신을 파먹었다. 아니, 아니야. 성우야. 그런 게 아니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해, 미안해. 그 말에 성우가 피식 웃더니 저를 안아왔다. 다니엘.

 

 

나 아직 그 대답 못 들었어.”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오늘은 그 대답 들으러 왔어.”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너를 불안하게 했구나, 내가 너를 또 울리게 만들었구나. 그렇지만 성우야. 내가 조금만 더 이기적이어도 되는 걸까. 너한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내가 널 가져도 되는 걸까. 대답을 머뭇거리자 성우가 저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대답 똑바로 못하면 죽어. , 그제야 다니엘이 성우를 부서지도록 안았다. 성우야.

 

 

성우야.”

 

, 다니엘.”

 

성우야.”

 

나 여기 있어.”

 

성우야.”

 

나도 사랑해.”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그 말에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성우야, 미안해. 미안해.”

 

나는 사랑해.”

 

, 끄윽. 성우야.”

 

다니엘,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해.”

 

흐으, 나도, 나도. 사랑, 사랑해. 성우야. 사랑해.”

 

 

성우야, 너의 다정함은 언제나 나를 질식하게 만든다. 그러면 어떠한가. 너의 다정함의 온도가 나에게 화상을 입힌다면, 나는 그것마저도 사랑할 것이다. 우리는 함께 있으니 더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