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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기억의 조각들

좀비

 

 

 

 

 

 

 

 

 

 

 

 

  고생 많았어, 너 밖에 안 보이더라ㅋㅋ
  뒷풀이 못 가서 미안. 오늘 과제 때문에 밤 새야할 듯ㅜㅜ

 

  축제 공연을 마무리 짓고 뒷풀이 장소를 지키다 보니 어느 새 날이 바뀌어 있었다. 괜히 한 테이블에 있어 봤자 말만 나올 것 같아 꾸준히 자리를 옮겨 다녔다. 거의 모든 사람과 대작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파할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 때까지도 애인에게선 새 메시지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꽤 먼 거리에서 있었는지 옷차림 정도로 나를 분간하여 줌을 당겨 찍은 사진과 함께 도착한 마지막 메시지가 거의 여섯 시간 전이라는 의미였다.

 

  과 내의 인사이더를 맡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둔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제 앞에 처한 상황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사람. 그 사이를 비집고 어찌저찌 관계를 발전시키는데는 성공했는데,

그는 계속 맹숭하게 굴었다. 일정한 용무가 있을 때는 연락 텀이 현저히 줄었다. 카톡보단 전화, 전화보다는 대면이 좋았다. 연락을 덜해도 자주 만나고 찾아가면되니까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와의 연애에서는 자꾸만 애가 탔다.

 

  편의점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 그와 연애를 시작하며 담배를 끊었고, 이미 넘치게 배부른 터라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잠금 화면에 뜬 시간은 세 시가 넘었다. 그에게선 여전히 연락이 없다. 관계를 더 보채는 건 아무래도 나였다. 그러니 내가 움직일 수 밖에. 가방을 챙기며 인사를 마치고 학교 쪽으로 향했다.

 

 

 

  초여름의 밤은 아직도 봄의 기온을 담고 있었다. 공연 후 갈아 입은 긴팔 긴바지의 이지웨어 틈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아직도 그에게선 연락이 없다. 의미 없이 채팅창을 위아래로 갖고 놀다가 프로필 사진을 눌러봤다. 저번 주에 발표가 있다며 찍은 세미 정장 차림과 이마를 깐 머리 모양이 정갈하고 반듯했다. 힣. 누구 애인인지 잘생겼노. 마치 내 앞에 있는 현현해 있는 것처럼 그의 볼 쯤을 투박한 손으로 몇 번 만지다가 톡톡 메시지를 보냈다.

 

  형. 공부 안 힘들어요? 나 지금 도서관 앞인데. 끝나면 나와요. 델다줄게.

 

  그가 좋아하는 주전부리 몇 개를 담은 봉투를 의미 없이 펄럭였다. 기다림은 내게 익숙한 일이었다. 노곤한 얼굴로 나올 그에게 달콤한 몇 마디와 따뜻한 위로를 줄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면.

 

 

 

  이제 봤네. 미안. 바로 나갈게.
  제가 말도 없이 온 건데 왜 미안해요. 나 이제 술 다 깼다, 기다릴게요.

 

  한참만의 푸시 알림에 바로 답하곤 발을 동동 굴렀다. 한참 앉아 있느라 남아 있는

돌계단의 찬 기운을 털어내고 문 앞을 서성거렸다. 볼캡을 눌러 쓰고 밖으로 나온 그를 덥썩 껴안았다. 에어컨의 찬 기운이 그의 체취와 함께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른 등을 두어번 쓸고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 말라고 핀잔을 줄 법도 한데, 오늘따라 잠잠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그런가.

 

  이거 무요.

 

  편의점 봉투를 그의 손에 쥐어주고, 서늘한 여름바람이 걱정스러워 트랙탑을 입혔다. 평소와 달리 봉투의 내용물도 확인하지 않는 그가 조금 섭섭하지만 그의 피곤 탓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과제는 다했어요?
  응. 많이 기다렸지.
  아이다. 괜찮아요.
  안 와도 됐는데.
  어차피 막차도 끊긴 김에... 걱정 마요.
  응.

 

  단답의 문장들이 오갔다. 진짜 피곤한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손을 꽉 잡았는데, 내 시선을 피한다. 정문을 지났다. 도서관이 정문에서 멀지 않았다. 학교에서 5분 컷인 그의 집은 수시로 가기엔 편했지만, 이런 짧은 데이트 순간에는 원망스러워지곤 했다.

 

  니엘아.
  네?
  이제 그만 데리러 와도 돼.

 

  이제야 깨달았다. 짧은 대화도, 의식적인 시선을 피하는 순간도, 내가 그에게 보내는만큼 돌아오지 않는 대화의 교류 같은 것의 의미를. 근래의 그의 어색한 미소나 연락 텀 따위가 그의 피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끝을 말하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잡았던 그의 손을 단단하게 옭아맸다. 압박감에 약간 인상을 쓴 그가 손을 빠져나간다. 손바닥에 찼던 식은 땀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금시에 허전해진다. 아직 셋팅이 되어있을 머리카락 사이를 애써 손으로 헤집었다.

 

  아.. 그럼 앞으로 안 데리러 올게요. 금 되나.
  …그런 거 말하는 거 아닌 거 알잖아.
  …
  그만하자.

 

  어렴풋이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의 어둠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그의 표정을, 이제는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불면의 밤이었다. 아니, 취침 시도도 하지 않았다. 남향의 창문을 투과하는 빛이 점점 밝아오는 것을 보며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어느 순간 눈물이 톡 떨어졌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는 항상 내 경계 안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분명한 선이 존재했고, 자기가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게 맞나.

 

  이대로 있으면 그대로 그가 나를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의 집을 다시 찾았다. 열한 시에 그의 첫 수업이 있고, 원체 성실한 그는 삼십 분 전쯤에 넉넉하게 출발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집이 정확히 몇 호인지도 알고, 도어락 비밀번호도 알면서 현관 앞에서 멀뚱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간 전의 그의 표정과 말이 아른거렸다.

 

  여기서 뭐해.

 

  애꿎은 신발만 땅에 긁으며 괴롭히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새벽과 같은 모자를 쓰고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조금 퀭한 것 같은 얼굴은 내 기분 탓이다.

 

  좀 잤어요?
  응.
  다행이구로.
  왜 왔어.
  내.. 어제 취했던 것 같다. 기억이 안 나는데. 다시 말해도요.

 

  그를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찾은 그의 집인데, 이 말도 내겐 후회로 남았다. 이거 너무.. 질척대지 않나.

 

  다시 말할 거 없어.
  …
  너 다 기억하고 있잖아.

 

  그는 아무 말 없이 빤히 나를 쳐다보다가, 잠시만. 이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현관으로 들어갔다. 잠시만, 기다려, 내게는 익숙한 말이었다. 바로 나온 그의 손에는 어제 입었던 내 트랙탑이 들려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다. 몇 시간 전부터. 대체 왜냐고. 왜 헤어지려고 하는 거냐고. 내가 부족한 게 있다면 더 노력하겠다고. 그런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내 옷가지를 보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미 마음의 정리를 마친 잔인한 그에게 파고들 힘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평범한 씨씨의 연애를 했다. 그에게 시간을 맞춰 만나고, 며칠 여행도 가보고, 비슷한 옷을 입고 기뻐하는 그런 평범한 연애. 그 끝이 절절한 건 어쩌면 나 혼자만인 듯 했다.

 

 

 

  평범한 연애의 평범한 끝이었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야했다. 보편적인 날이었다. 그의 성실만큼 나도 성실하고자 애썼고, 그러다보니 내 앞에 놓인 일들이 많았다. 끊었던 공연을 위하여 벌여놓은 온갖 잡일을 정리하고, 과제를 하고, 시험 공부를 했다. 저녁 약속이 사흘에 한 번 꼴로 잡히면 거부하지 않고 나갔다. 무슨 일 있냐고 묻는 동기의 말에 그저 웃었다.

 

  평범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경영대 방향으로 길을 걷다 이 곳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 간다거나, 도서관 공용 공간의 자리를 두 자리를 맡았다가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앉아도 되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그 자리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가 그랬다.

 

  또, 오늘 밤이 그랬다. 그가 유일하게 애착을 가지고 있는 그의 동아리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가도 그가 연락하는 시간에 맞춰서 학교 앞 술집 거리로 나왔다. 과제를 마무리 짓고 학생증을 찍고 도서관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다. 내가 굳이 그의 모임 장소 근처에서 그를 기다려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근처 피씨방에 자리를 잡았다. 해야할 과제는 끝냈고, 오랜만에 게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합리화와 함께.

 

  세 게임을 연달아 패전했다. 존망이노. 망했다. 한 판만 더 할 심산으로 서버가 꾸려질 동안 흡연실로 가 담배 하나를 물었다. 메신저창에 쌓인 몇십 개의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 핸드폰을 다시 뒷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진동이 울렸다. 알림 설정을 해둔 사람은 둘 밖에 없었다. 엄마. 그리고 옹성우.

 

  나 취ㅎㅐ써. 나 보러 와.

 

  미칫나……. 무심한 척 자음 ㅇㅇ 두 개를 보냈다. 아직 한참 남은 담배를 버리고 컴퓨터를 종료시켰다. 데리러 와도 아니고 나 보러 와는 또 뭐고. 진짜 호구다, 호구. 자조하며 술집으로 향했다. 내 앞에 있으니까 밖으로 나와요. 평소 같으면 안으로 들어갔겠지만, 헤어진 상황에 안으로 들어갈 자존심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녜리다, 녜리.

 

  이마를 시원하게 까서 위로 올린 모양을 한 그가 밖으로 나왔다. 아씨, 잘생깃노.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그의 표정이 이미 주량을 넘게 마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덥썩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한 그의 온도가 간만이라 가슴이 철렁했다. 마음 정리는 무슨. 평범한 일상은 무슨. 다 좆까는 소리다.

 

  집 가자.

  우응. 그래에.

 

  팔랑팔랑 걸음새가 당장이라도 어딘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 어깨를 두르고 단단히 중심을 잡았다. 헤어졌음 주사도 이제 바뀌어야하는 거 아닌가. 변하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니 내 기억 마지막의 그가 낯설게 느껴져 그가 미웠다.

 

  이제 가요.

 

  오늘도 그의 집은 가깝다. 장정의 몸을 이끌고 집으로 데려가니 절로 등에 땀이 찼다. 밤공기마저 후덥지근한 여름 밤이다. 냉랭한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다음에, 이렇게 흐물하게 풀린 그의 얼굴을 보는 일이 힘겨웠다.

 

  싫어. 우리 아직 안 한 거 있잖아.

 

  변하지 않은 그의 주사가 하나 더 있었다. 진짜요? 지금이요. 내 싫은데. 한숨을 푹 쉬었지만 그는 굳건히 내 손을 다시 잡고 옆 골목으로 나를 이끈다. 그의 미약한 악력을 거부할 힘 따위 내게 없었다.

 

  깜깜하지. 이제 하자.

 

  먼저 그가 내게 입술을 붙여온다. 뜨겁고 부드러운 혀가 입 안을 침범하자, 못된 심보와 음심 같은 게 울컥 솟아올랐다. 그의 혀를 강하게 옭아 매며 파고 들었다. 그의 얇은 목과 머리께를 한 손으로 쥐었다. 셋팅된 머리가 들쑥날쑥 튀었다. 그를 헤집어 놓는 쾌감에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을 파고 들었다.

 

  담배 냄새 나….

 

  키스의 열기를 그대로 담은 채 내 목과 어깨에 고개를 묻는 것까지, 그의 취중 주사의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의 체취와 온기가 닿는 것이 소름 끼칠 정도로 좋아 그를 다시 한 번 꽈악 안았다.

 

  따뜻해…….

 

  품 안긴 그가 정말 따뜻해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취중의 비밀들. 파편처럼 쌓인 그 기억의 조각들에 하나가 더해진다. 나만의 파편들이 와르르 무너졌다가 다시 한 데로 모인다.

 

  기억 못할 거잖아요. 오늘 밤.
  아니야. 기억할 거야.

 

  그리고 이 일련의 기억이 그는 기억하지 못할 나만의 기억으로 남을 것을 안다. 이 밤의 키스가 일방적으로 휘발된 것도 수십 번이었으니.

 

  나 들어갈게에.. 손을 잡고 방방 흔들다가 미련 없이 집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니, 울컥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길들여졌을 때는 좀 울게 될 염려가 있는 것이었다.

 

  취중의 무용이나마 제게 남아 있어, 오히려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