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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월간 4월호와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너를 기억해 2

Sukina

 

 

 

 

 

 

 

 

 

*

 

 

 

 

 

성우는 의건에게 들었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너니까, 너라서, 너 때문에 지옥에 있었지.’라는 말 속에 무어라도 큰 의미가 담겨 있던 건 아니었을까 싶었다. 가만히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내 책도 읽어보고, 집의 뒷마당에 나가 수많은 나무와 꽃들을 보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바쁘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은 2018년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성우가 있는 경성에서는 2018년과 달리 다니엘이 없었고,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없었다.

 

 

아마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다니엘과 똑같이 생긴 강의건이라는 사람이 던지던 의미심장한 말들, 그 말들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에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쏠쏠한 재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 같다.

 

 

? 그러고 보니...”

 

 

성우는 의건에게 제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의건도 굳이 성우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늦은 여덟시에 블루 노트 뒤 가로등 아래로 나가면 그가 이름을 물어줄까.

 

 

창가에 앉아 어둑해지던 바깥을 바라보던 성우는 나갈 채비를 했다. 늦은 여덟시에 만나자던 의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 언젠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2018년의 다니엘을 만나러 가던 날처럼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외모를 단장했다. 단정하게 가르마를 타고, 옷장 안에 가득히 들어 찬 옷들 중 한 벌을 골라 몸에 대어본다. 누가 보면 정말 다니엘을 만나러 간다고 착각이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방에서 나와 나무로 된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니 나무들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성우의 아버지를 보좌하면서도 집에서 항상 성우의 바깥출입을 신경 쓰는 사람. 경성역 앞에서 성우를 차에 태워 데리고 들어 온 남자다. 누가 보아도 성우보다 연배가 한참 높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꼬박꼬박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뒤를 따랐다.

 

 

... 잠깐 밖에 산책 좀 하러 나가려구요.”

이제 곧 어르신께서 오실 텐데요.”

그런...가요? 오래 안 걸려요. 금방 올게요.”

 

 

성우는 저를 붙잡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집을 빠져 나왔다. 제법 규모가 크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저택을 나오면, 마당에 온통 예쁜 꽃과 푸른 나무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싱그러운 풀냄새와 상큼한 꽃향기가 가득했어도 자꾸만 그 냄새와 향기가 외부와 벽을 쌓는 기분이었다.

 

 

어제 블루 노트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길을 잃지 않으려 주변을 몇 번이고 두리번거렸다. 가는 길에 늘어선 나무들, 수줍게 제 존재를 드러내는 이름 모를 꽃들, 허름한 건물과 서양식 건물이 뒤섞인 혼잡함은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던보이나 모던걸이라고 불리는 있는 자들의 표정이 밝았다. 잔뜩 때가 타 보이는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은 한없이 암울하고 처절했다. 어제 의건의 말처럼, 독립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참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블루 노트는 화려한 조명을 덕지덕지 달고 저어기 머나먼 곳에서도 보일만큼 휘황찬란하게 번쩍였다. 출입문에 가까워질수록 흥겨운 재즈의 선율이 춤을 추듯 흘러나왔다. 오늘은 선뜻 어제처럼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니엘과 똑 닮은 의건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욱 들어갈 수 없었다.

 

 

마주하자마자 다니엘을 만난 것처럼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그를 껴안아버릴 것만 같았다.

 

 

...”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블루 노트의 외관을 뒤로한 채 성우는 걸음을 옮겼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아직 여덟시가 되기 전이었다.

 

 

블루 노트의 뒤로 걸음을 옮기며 들어서자, 화려한 조명이 뿜어내던 빛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어둑하기만 했다. 나무에 수북하게 매달린 나뭇잎이 밤바람에 흔들거렸다. 어둑한 거리를 지나면 마치 다른 세계로 이어질 것처럼 너무도 다른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가 이질감을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어색한 기분은 감출 수 없었다.

 

 

어둡고 휑한 건물 뒤에는 가로등 하나만 우두커니 서있었다. 가로등 아래에 멈춰 선 성우의 얼굴에 긴 속눈썹이 만들어 낸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곳에 서있으면, 정말 그가 오는 걸까. 성우의 마음에는 어느새 조바심이 가득 들어찼다.

 

 

가로등 아래에서 괜히 바닥의 흙먼지를 발로 차보기도 하고, 가로등을 툭툭 건드려보기도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 있다가 밤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이 신경 쓰여 고개를 두어 번 저어보기도 했다. 강의건, 그 사람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조마조마한지 모르겠다. 그저 외모가 다니엘과 똑같았고,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아 궁금증을 만든다는 이유 때문일까.

 

 

일찍 왔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손목을 잡아채 당기는 힘에 성우는 그대로 끌려가 벽에 밀쳐졌다.

 

 

성우를 벽에 밀쳐대고 입을 틀어막은 사내가 시선을 돌려 눈을 맞추었다. 돌아가 있던 고개가 성우를 향하자,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의건이었다. 의건은 성우의 입을 틀어막은 채 몇 번이고 두리번거리다 주변이 잠잠한 것을 느꼈는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도 가졌네요.”

이런 재주라도 있어야지.”

 

 

어제보다 오늘의 미소가 더욱 밝아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의건의 미소를 보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훗날 2018년으로 돌아갔을 때, 다니엘의 미소를 보며 의건을 떠올릴까 걱정될 정도였다.

 

 

당신을 가까이 둬봐야 내게는 해가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그런데 왜...”

오늘까지는 괜찮을 테니까.”

 

 

의건은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 말이 그저 기분 나쁘고 듣기 싫었다면 가까이 하지 않아야 했지만, 저도 모르게 이끌리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데 어떻게 의건을 밀어낼 수 있을까. 더욱이 너무나도 보고 싶은 다니엘과 똑 닮아 있어서 자꾸만 시선이 가고 마음이 울렁거렸다.

 

 

달빛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

그렇죠. 달빛... 예쁘죠.”

 

 

의건은 한 손으로 벽을 짚어 그 안에 성우를 가두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주고받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부풀려진 의미가 담겨 있는 듯 했다. 둘의 얼굴 사이에 던져진 거리는 너무도 짧았고, 금방이라도 스치며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강의건씨는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성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건은 다시 한 번 제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급하게 주변을 살피며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자 성우의 입에서 손을 떼어냈다.

 

 

참으로 조심성이 없네.”

?”

그런 이야기는 이런 곳에서 쉽게 꺼내서는 안 돼.”

...?”

지나가던 일본 순사 칼에 찔려 죽고 싶지 않다면.”

 

 

물음표를 얼굴에 잔뜩 띄운 성우를 보며 의건은 큰 소리로 웃었다. 독립은 입에 담지 말아야 하지만, 저렇게 크게 소리 내어 웃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강의건씨는 왜 제 이름 안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그걸 알아야 하나?”

뭐 어쨌든 아예 모르는 사이인 건 아니니까 통성명이라도 하면 좋겠죠.”

통성명이라...”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이라도, 성우는 의건에게 제 이름을 불리고 싶었다. 부를 일이 몇이나 될까 싶었지만 적어도 그쪽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오늘 이후로 나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이유가 그, ... 무튼 그런 거면...”

이유가 어찌 됐든 나를 피하는 게 좋을 거야.”

피하지 않으면요?”

어차피 그대가 피하지 않는대도 내가 물러날 참이야.”

왜죠?”

난 할 일이 많거든.”

 

 

의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우를 바라보았다. 이름도 묻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볼뿐이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어떻게 그대일 수 있을까.”

?”

 

 

의건은 굳은 얼굴로 성우를 살폈다. 제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의건 때문에 성우는 온몸까지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의건은 성우에게 나라의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국민들은 매일 피눈물을 흘리며 살고 있는데, 정작 일본의 천황을 모시듯 떠 받들며 일본인이 되지 못해 억울해하는 사람이 제법 많다는 것이다. 그들과 달리, 모던걸과 모던보이로서 유흥을 즐기는 젊은이들까지 생겨버리자 독립에 대한 열망의 불씨가 서서히 꺼져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참 이상한 게,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때문인지 의건의 눈은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블루 노트 안에 있는 바에서 화려한 조명 아래 술잔을 건네던 때와 달리, 어둠 속에서 하나 뿐인 가로등 아래 선 채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는 희망에 가득 찬 채 행복한 모습이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기...”

“......”

제 이름은 성우예요. 옹성우요.”

성우...”

.”

 

 

의건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습관인 건지 뭔지, 얼굴을 빤히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주 부르지는 못해도, 잊지 않을게.”

 

 

어제도 그랬지만, 의건은 성우에게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것 같았다. 대화가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툭툭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잠깐만.”

 

 

의건은 품속에서 작은 종이 뭉치와 성냥갑을 꺼냈다. 흙바닥에 종이 뭉치를 던져놓고 성냥 하나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성냥불이 켜지자 주변이 환해지며 의건의 얼굴이 보였다. 성우는 의건을 마주보며 쪼그려 앉았다.

 

 

의건은 성냥불을 종이 뭉치 위에 올려두었다. 불이 옮겨 붙자 의건은 성우를 데리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불이 붙은 종이 뭉치에서 붉은 불꽃이 반짝였다.

 

 

... 뭐예요, 이거?”

작지만 나름 불꽃놀이.”

불꽃놀이요?”

 

 

성우의 물음에 의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바짝 붙어 앉은 채 작은 종이 뭉치에서 터져 나오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불꽃놀이라고 하기에 너무 작고 볼품없었지만, 그 빛은 가로등 하나만으로 어둑했던 주변을 밝히기 충분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둘이서 작은 불꽃을 보며 불꽃놀이랍시고 웃고 있으니 참 우스워 보일 것 같았지만 꽤 낭만적이었다. 소소한 것 하나에도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의 감정에 공감한다는 이야기 아닐까.

 

 

준비한 거예요? 오늘 저랑 만나니까?”

준비... 준비까지는 아닌데 뭐, 만나면 할 말 없을까 봐.”

왜 당신을 피해야 하는지 말해준다고 했잖아요.”

 

 

성우의 말에 의건은 다시 한 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성우의 귓가로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본인은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밝혀도 되는지 오히려 성우가 물었다.

 

 

나와 가까이 지내면 위험해 질 거야.”

친구로 지내도 안 돼요?”

친구... 친구하기에는 당신과 나의 차이가 너무 큰데.”

 

 

사실 그랬다. 의건과 성우는 옷차림부터 차이가 났다. 고가의 원단으로 전문가를 통해 제작한 클래식 수트를 차려입고, 최고급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은 성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흘렀다. 누가 보아도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부잣집 도련님. 수려한 외모에 구김살 없는 성격, 막대한 재력을 가진 부모를 가졌던 성우는 혼란이 가득한 경성에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부모 잘 만난 덕으로 성우는 특별히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이 없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원하는 것은 다 가지며 살 수 있었다.

 

 

반면 의건은 블루 노트에서 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좋은 옷 하나 입기 힘들었던, 말 그대로 남루하고 비루했던 못 사는 처지의 한국인일 뿐이었다. 성우와 같은 한국인이어도 일상은 너무도 큰 차이가 났다. 의건은 잘 차려입은 일본인과 거리에서 시비라도 붙으면 조센징이라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고, 한국어를 쓰는 주제에 겁도 없이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다닌다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의건은 독립만을 바라보며 참았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 국민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막상 만나서 마주하며 대화를 나눌 때에는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성우는 생각했다. 옷차림만 다를 뿐이지, 툭툭 끊기는 것 같아도 나름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소를 지은 의건을 보며 함께 웃을 때에는 마음이 참 따뜻해졌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 독립운동 하는 사람이랑 친구라고 하면... 누가 믿어줄 것 같아?”

 

 

어느 날 갑자기 경성 바닥에 나타나버린,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이곳에 내던져진 성우는 자신이 곱게 자란 도련님인지도 제 집을 통해서 알았다. 저를 태우러 차를 몰고 온 중년의 집사와, 2층에 위치한 제 방, 집의 앞뒤로 마련 된 정원과 집에서 일해주시는 어머님들. 이러한 상황들이라면, 2018년에서 겪었더라도 제 집안이 꽤나 잘 나가는 집안이구나 싶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로 잘 나가는 집안인지는 사실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성우는 고작 경성에 내던져진 지 이틀 째였으니까.

 

 

친구는 될 수 없어.”

그럼 우리는 뭐가 될 수 있는데요?”

“......우리?”

 

 

성우의 질문에 의건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작게 타오르던 눈앞의 불꽃도 어느새 사그라지었다. 까맣게 타고 남은 재와, 옅게 솟아오르는 가느다란 줄기의 연기만 남았다.

 

 

꼭 뭐가 되어야만 하나?”

아니, ...”

 

 

의건은 바지에 흙쯤이야 묻어도 상관없다는 듯 쪼그려 앉은 성우에게 가까이 다가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수트를 잘 차려입고 쪼그려 앉은 채 제 무릎에 두 팔을 포개어 올려놓은 성우의 모습이 보였다. 입가에는 슬쩍 미소를 띠운 채 눈을 깜빡이며 조곤조곤하게 할 말을 늘어놓는 모습이 참 순수하고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자신은 너무도 때가 묻어서, 성우를 가까이 했다가는 그가 더럽혀지거나 탁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를 우리나라라고 부르지 못하는 처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안간힘을 쓰는 자신에게 언제 어디서 일본인의 총칼이 날아들지 모른다. 매일이 불안한 일상 속에 살면서 독립을 위해 불철주야로 뛰어다니는데 친구를 곁에 둘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동료들만이 의건의 곁에 있을 뿐이었다. 그 관계에 틈을 만들어 성우가 들어온다면, 그래서 성우를 제 곁으로 들인다면 괜찮을까 싶은 생각은 처음 만나 기분이 이상했던 날부터 일찍 접어버렸다.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된 것에 감사하며 그저 열심히나 살아.”

 

 

의건은 다시금 제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성우는 그를 보며 또 한 번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해주려나 싶어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의건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손바닥을 펼쳐 내밀어 의건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든 성우는 말없이 살펴보았다.

 

 

생기가 가득한 빨갛고 하늘하늘한 꽃잎이 겹겹이 꽃술에 들러붙어 풍성하고도 화려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뭐예요, 이게?”

.”

그건 저도 아는데...”

 

 

의건은 옆에 쪼그려 앉아 꽃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는 성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성우의 손바닥 위에 올려 진 붉은 꽃 한 송이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뽀얀 손바닥 위에 살포시 얹혀 진 붉은 꽃은 성우가 새하얗게 맑고 밝으며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임을 더욱 강조하는 것 같았다.

 

 

성우의 얼굴을 향해 의건이 다가가자 두 사람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다. 쌔근쌔근 숨을 내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바짝 가까워져 있었다. 의건에게 다시금 무언가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성우가, 어느새 제 앞에 다가 온 모습에 놀라서 주저앉으려 했다. 성우가 뒤로 넘어가려던 순간, 의건은 그의 허리를 감싸 붙잡았다. 잔뜩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성우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

 

 

백일홍.”

...”

백일 간 붉은 빛을 낸다고 해서 백일홍.”

 

 

의건의 설명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등허리에 닿아있는 의건의 손도, 제 손바닥 위에 올려 진 백일홍도, 어둑한 주변 속 하나뿐인 가로등까지도. 두 사람과 둘의 기억에 장면의 조각을 더하는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일부터 우리가 만날 일이 없다면, 정신 나간 짓 한 번쯤은 해도 괜찮을까?”

?”

 

 

고작 이틀을 만났지만, 실제 성우와 이야기를 나눈 시간을 따져보자면 48시간도 되지 않지만 의건은 그답지 않게 상당히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의건의 두 눈은 성우의 머리칼에서 이마로, 이마에서 눈가와 콧잔등을 지나 입술에 멈추었다.

 

 

성우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과 앞으로 만날 일이 없다면...”

“......”

내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한 가지 일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성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성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의건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제 시선을 내리깔며 성우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둘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 아래, 두 개로 나뉘어져 있던 그림자는 하나가 되었다. 가만히 입술만 맞대고 있다가 숨을 뱉어내려 입술 사이에 틈이 생기자 둘의 입맞춤은 더욱 깊고 짙어졌다. 엇갈리게 포개어진 두 사람의 고개는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꾸었지만, 딱 달라붙은 채로 말캉한 촉감에 머릿속을 새하얗게 칠해버린 서로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의건은 성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있고, 성우는 다니엘의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둘의 몸을 더욱 가까워지게 만든 것은 결국 성우의 허리에 감겨진 의건의 팔이었고, 성우는 손에 백일홍을 담은 채 움켜쥐지도 못하고 있었다.

 

 

의건과의 입맞춤은, 마치 다니엘과 나누던 입맞춤 같았다. 시간을 거꾸로 건너 이리로 날아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성우를 위해 다니엘이 함께 날아와 준 것 같았다. 혼자 헤매고 있을 성우가 안쓰러워서, 갑자기 이렇게 다른 세상에 내던져져 혼자 견뎌내야 하는 것이 마음 쓰여서 의건의 모습으로 다니엘이 함께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2018년으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건너기 전까지 곁에 있어주기 위해. 물론 의건은 내일 이후로 볼 수 없다고 했지만, 지금 성우에게는 의건이 다니엘과 같았다. 저를 감싸 안고 입술을 맞대며 말없이 감정을 나누는 이 순간이, 제 연인인 다니엘과 함께 보내던 시간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아까 가장 하고 싶었던 한 가지 일을 했는데...”

“......”

괜찮았나 보네, 성우씨도.”

?”

 

 

의건의 입에서 제 이름이 성우씨라고 불리자, 성우는 당황스러웠던 것인지 놀랐던 것인지 커다래진 눈으로 굳어 있었다. 두 뺨은 붉게 달아올랐고, 입은 쉽게 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린다는 건 참 익숙할 법한 일임에도, 성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름보다는 별명이나 직함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았고, 그 덕분에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참으로 어색했다. 그나마 다니엘이 가끔 장난스럽게 성우형이나 옹성우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 제 앞에서 이름을 부르는 건 다니엘과 똑 닮은 강의건이지 강다니엘은 아니니까 성우가 어색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더욱이 다니엘에게서는 성우씨라고 불려 본 적이 없었다.

 

 

참 잘도 놀라네.”

아니...”

왜 이름 안 물어보냐고 대뜸 따져 물을 때는 언제고, 이름 불러주니 놀라기나 하고...”

 

 

의건은 시선을 내리깔고 성우의 손바닥에 담긴 백일홍을 바라보았다.

 

 

잘 어울린다.”

뭐가요?”

그냥, 지금 이 순간과 시간이.”

 

 

그 말에 성우가 무어라 받아 치려는데 의건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 옷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툭툭 털어내고는 성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성우는 백일홍을 손에 꼭 쥔 채 다른 손으로 의건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건이 고개를 숙인 채 발로 바닥을 괜히 툭툭 찍어가며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내일부터는... 만날 수 없는 건가요?”

 

 

아까는 단호하게 만날 수 없다고, 만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던 의건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일 늦은 여덟 시에 다시 이곳으로 오더라도 당신을 만날 수 없는 건가요?”

 

 

재차 물어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의건 덕에 성우는 답답해졌다. 고개를 끄덕이든, 가로로 저어대든 무엇이든 뜻을 알 수 있게 보여주면 좋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 독립운동 때문에요?”

“......”

잠깐이면 되는데, 잠깐도 만날 수 없나요?”

성우씨가 나를 봐야 할 연유라도 있는 건가?”

. 있어요.”

그 연유가 무엇이기에?”

 

 

성우는 의건의 손가락을 향해 조심스레 제 손을 뻗었다. 느릿하게 손가락 끝이 스치며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성우의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이며 의건의 손가락을 제 손으로 잡아 쥐었다. 힘주어 꽉 잡을 수도, 손가락으로 깍지를 껴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조심스럽게 의건의 오른손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손가락을 감싸 쥔 채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싶어요.”

그대가... 나를 돕는다?”

. 뭐라도 좋으니까, 저도 돕게 해주세요.”

당신이 나를 돕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 도와서는 안 돼.”

왜요? 무엇 때문에?”

 

 

의건은 제 손가락을 붙잡은 성우의 손등을 두어 번 쓰다듬은 뒤 제 손가락을 빼내었다. 그리고 먼저 성우에게서 멀어지려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냥 나는, 내가 이름을 불러주니 놀란 얼굴로 서있는 옹성우를 두 번이나 만났으니 충분해.”

 

 

의건은 몸을 돌려 성우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성우는 그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둘은 어둑한 거리를 마주보며 걷고 있었다. 주고받는 이야기는 참으로 속상했지만, 함께 있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왜 두 번으로 충분해요?”

한 번이면 아쉽고, 세 번이면 욕심이 생길 것 같았거든.”

두 번이면... 욕심이 안 생겨요?”

그러게. 안 생기네.”

 

 

성우가 아쉬워서 의건에게 손을 뻗으니, 의건은 더욱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나는 생길 것 같아요, 그 욕심.”

일단 나를 돕고 싶다는 생각부터 버려.”

그래서, 또 만날 수 있어요?”

 

 

성우가 제게 가까워지자 의건은 손바닥을 내밀어보이며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성우가 그대로 멈춰 섰다. 이미 다니엘은 가로등의 불빛이 비추지 못하는 어둠 속에 들어가 버렸고, 성우는 희미하게나마 가로등의 불빛이 내닿는 곳에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하나의 그림자로 바짝 붙어 입맞춤을 나누던 두 사람은 지금 각자가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한 배경 속에 놓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가로등, 하나의 그림자 속에 함께 머무르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가로등 아래에 절반의 그림자만 머무르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의 그림자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어둠 속으로 숨어버려 보이지 않았다. 성우는 하나뿐인 가로등과 가까이 멈춰선 덕에 제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의건은 아무리 둘러봐도 빛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 덕에 커다란 하나의 그림자를 이루던 두 사람은 그 그림자의 절반을 도려내어 안타까운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내가 욕심이 생기면 만나러 갈게.”

 

 

그 말을 끝으로 의건은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로등 불빛 끝에 붉은 백일홍을 손에 쥔 채 서있는 성우를 남겨두고 모습을 감춰버렸다.

 

 

 

 

 

*

 

 

 

 

 

그 날 이후로 의건은 욕심이 생기지 않았던 것인지 성우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블루 노트의 앞에서 그를 기다려도, 블루 노트 건물의 뒤편에서 그를 기다려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마지막 말이 참 이상했다. 의건은 자신에게 욕심이 생기면 성우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 그 말에 성우는 무어라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었고, 의건은 뒤이어 말을 하지 않은 채 사라졌었다. 어디에 사는 지도 모르고, 독립운동을 어디에서 하고 있는 지도 모르니 찾아 갈 방법도 없었다. 매일 혼자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성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오늘도 역시나 성우는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며 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려 애썼다. 날이 저물고 있는 하늘, 푸릇한 나뭇잎을 잔뜩 달고 있는 나무, 색색의 꽃송이가 잔뜩 수놓인 마당, 어둠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건물들. 익숙하지 않은 저녁 풍경을 보며 성우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2018년에서 다니엘과 함께 살고 있던 자신이 독립조차 이루지 못한 일제강점기의 경성(京城)’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분명 자신은 다니엘을 만나러 가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경성에서 낯선 환경이 제 것이었던 것 마냥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생각지도 못한 곳에 혼자 덩그러니 던져진 채 어떻게 2018년으로 돌아가야 하나 막막한 상황에서 다니엘을 찾고 있으니 나타난 강의건이라는 사람. 경성에서 옹성우로 살아가는 시간동안 그나마 버티게 해 줄 끄나풀로 손에 꽉 쥔 채 살아가게 만든 그 사람. 머나 먼 시간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있을 다니엘. 갖가지 혼란이 성우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 때, 성우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잠시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들어오세요.”

 

 

문의 열리고 중년의 집사가 서 있었다. 그는 성우를 보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어르신께서 찾으십니다.”

... 그래요?”

 

 

성우는 창가 앞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중년의 집사를 따라 나섰다. 나무로 된 계단을 내려가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무로 된 바닥을 걸어가며 은은한 나무의 냄새를 맡았다. 코끝을 스치는 그 냄새가 성우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맑고, 향긋한 나무의 냄새가 참 좋았다.

 

 

좋았던 것도 잠시, 성우는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은 채 인상을 잔뜩 쓰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라는 사람. 그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건지 오늘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성우는 문 앞에 선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난번에는 갑작스럽게 오기도 했고, 낯선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탓에 지나치게 긴장을 해서 구석구석을 훑어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이 되어서야 그나마 제 정신으로 하나하나 둘러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일본의 국기와, 그 옆에 나란하게 걸린 천황의 사진. 한 쪽 벽을 가득 채운 책들의 제목은 대부분 일본어로 쓰여 있었다. 고가의 화려한 장식품들도 많았고, 내부를 채운 가구들 또한 제법 값이 나가 보였다.

 

 

, 요즘 무얼 하고 돌아다니는 게냐?”

 

 

낮게 깔린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르게 화가 느껴졌다. 뾰족한 가시가 잔뜩 돋혀 금방이라도 성우를 찔러댈 것 같았다.

 

 

쓸데없는 부랑배 같은 놈과 어울려 다닌다던데... 사실이냐?”

? ... 아니, 그게...”

저런저런, 제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저것도 사내라고...”

 

 

성우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성우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한심하게 생각하는 듯 기분 나쁜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보기도 했다. 2018년에 자신의 아버지는 존경할 수 있고, 사람에 대한 배려가 넘치며, 누구를 만나도 절대 낮춰보지 않았다. 그래서 성우는 항상 자신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지금 성우가 와 있는 경성에서의 아버지는 일본의 천황을 떠받드는 듯, 서재의 곳곳에 그에 대한 흔적이 보였다. 일본어로 쓰인 책들, 일본어로 쓰인 명언 같은 글귀, 천황의 사진과 일본 국기. 거들먹거리듯 소파에 앉아서 아들인 자신을 하대하는 듯한 행동. 지나치게 낯설고, 넘치도록 부대끼는 느낌이었다.

 

 

요즘 밖에서 대체 무얼 하고 돌아다니는 게냐?”

“......”

블루 노트에 있는 강의건이 같은 놈이랑 어울려 다니는 게야?”

 

 

제 아버지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의건의 이름에 왠지 성우는 반가웠다.

 

 

강의건씨를... 알고 계세요?”

, ...”

 

 

성우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의건을 알고 있는지 물으니 성우의 아버지라는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어울릴 놈이 없어서 그런 천하의 몹쓸 놈과 어울려 다녀?”

?”

애비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 그렇게 일렀거늘, 아직도 철모르고...”

 

 

잠시나마 자신의 아버지가 의건을 안다는 사이에 반가워했지만, 뒤이어 들은 말들은 기분이 나쁠 법했다. 그래서 성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아버지는 잔뜩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혔고, 말끝마다 의건을 비난하는 말이 이어졌다.

 

 

경성 바닥에 강의건이 모르는 자도 있더냐? 그 놈이 천하의 몹쓸 놈인 걸 모르는 자도 있어?”

천하의... 몹쓸 놈이요?”

우리가 누구 덕에 이렇게 먹고 살고 있는데.”

“......”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부랑배 같은 놈이 독립이니 뭐니 하며 싸돌아다니기나 하고...”

 

 

성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고 서있자니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내 이번까지는 그냥 넘어가겠다만, 한 번 더 강의건이 같은 놈이랑 어울려 다녔다가는...”

“......”

너도 그놈도 가만 두지 않을 거라는 것만 알고 있어라.”

...”

나가 봐. 꼴도 보기 싫으니까.”

 

 

성우는 허리를 숙여 제 아버지에게 인사를 한 뒤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빠져나온 후, 성우는 갑자기 어지러워 휘청거리며 겨우 벽을 짚고 섰다. 이제야 의건이 했던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대 자신과 가까이 지내서는 안 되며, 성우가 자신을 돕는 일도 불가능했다는 말. 성우를 바라보며 내질렀던 탄식. 친구가 될 수 없다며 선을 그어대던 단호함까지. 이제야 의건의 모든 행동이 이해될 것 같았다.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의건이, 친일파인 자신의 아버지와 절대 가까워질 수 없었다. 서로를 제거하려 안간힘을 쓰는 관계였지, 절대로 상생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의건은 친일파를 제거한 후 독립을 위해 제 목숨까지 내놓을 기세였고, 성우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해 곳곳에 모이는 사람들을 제거한 후 일본에 만세를 부르는 입장이었다.

 

 

벽을 짚으며 겨우 제 방으로 걸어 올라간 성우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창가 앞에 끌어다 놓았던 의자에 주저앉은 채 축 늘어졌다.

 

 

이 무슨 일제강점기 판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제 아버지와 의건이 철천지원수를 진 사이인 건지. 그리고 제 아버지는 어떻게 자신이 의건과 만났던 것을 알고 있었는지. 고작 두 번 만났을 뿐인데, 그걸 알고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며 쓴 소리를 해대는 것인지. 의건도 무언가 알고 그랬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마주쳤던 적이 있는 것인지, 의건이 그 정도로 경성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온통 성우에게는 물음표가 되어 다가 올 뿐이었다.

 

 

성우가 창가에 앉아 턱을 괸 채 밖을 내다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도 알지 못하는 의건과 다시는 어울려 다니지 말라는 말을 들으니 참 기분이 이상했다. 다니엘을 생각하듯, 의건을 사랑하기에 자꾸만 떠올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다니엘과 너무 닮아서 너무 똑같아서 자꾸 생각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고작 두 번을 만났음에도 블루 노트 주변을 서성이게 되고, 안에 있는지 들어가 보게 되었다. 그가 경성바닥에서 제법 유명한 줄 알았다면 차라리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볼 걸 그랬다. 강의건을 알고 있는지, 그를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성우의 생각에 누가 화답이라도 하듯, 창문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우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데 어둑해진 뒷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을 닫고 다시 의자에 앉으려는데 또 두어 번 창문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성우는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뒷마당을 살펴보았다. 누군가 서 있다가 금방 빛이 비추지 않는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거기 누구예요?”

 

 

성우가 물어도 대답은 없었다. 괜히 기분이 나빠서 창문을 닫고 앉으려는데 어둠 속에 숨어있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헌팅캡을 쓴 남자가 성우의 눈에 잘 보이는 자리에 선 채 모자의 챙을 살짝 들고 고개를 들었다.

 

 

강의건씨?”

 

 

의건은 성우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성우는 제가 알고 있던 다니엘이 떠올랐고, 빨리 내려가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성우는 창문을 닫고 거울 앞에 선 채 제 모습을 확인했다. 그대로 내려가도 될 것 같아서, 머리만 대충 쓱쓱 손으로 빗어 정리를 하고 책상 위에 올려 둔 책 속에 고이 접어두었던 쪽지를 가지고 제 방을 빠져나갔다.

 

 

성우의 걸음에 조급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나무계단을 내려 온 성우는 곧바로 제 아버지가 있던 서재와 반대 방향에 있는 뒷마당으로 향해 달려갔다. 뒷마당과 연결 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의건을 찾았다. 집 안에도 어둑한 마당을 밝히기 위해 전등을 곳곳에 설치해뒀었는데, 전등이 밝히고 있는 곳곳을 둘러보아도 의건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세요?”

 

 

성우는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의건이 서있었던 것 같은 자리였는데, 그 자리를 몇 번이고 서성여 봐도 보이지 않았다. 2층의 제 방에서 이곳까지 내려오는 사이에 가버린 건지 걱정도 되었다. 가버렸다면, 또 언제 올 수 있는 것인지 괜히 애가 탔다.

 

 

순간, 두리번거리는 성우의 손목을 잡아채어 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성우는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끌려갔다. 그곳은 마당에 설치해놓은 전등의 빛이 닿지 않았는지 꽤나 어두웠다. 놀라서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떴을 때, 성우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고 주변에는 어둠뿐이었다.

 

 

오랜만이네.”

 

 

가슴팍에 닿아 있던 고개를 든 성우는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제 앞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의건이 확실했다. 분명히 강의건, 그 사람이었다.

 

 

잘 지냈나?”

어떻게... 알고 왔어요?”

성우씨는 경성 바닥에서 본인의 아버지가 얼마나 유명한지 몰랐나 봐?”

...”

유명하잖아. 야마시타 히데키.”

야마시타... 히데키요?”

그래. 당신 아버지가 야마시타 히데키잖아. 설마... 몰랐던 건가?”

 

 

의건은 덤덤하면서도 조용히 속삭이듯 제 말을 이어갔다.

 

 

성우는 아버지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의건을 통해 들었다. 일본이 지배하는 땅에서 살면서, 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앞장서서 일본군들에게 허리를 굽혔던 사람이 성우의 아버지였다고 했다. 특이한 성으로 인해 동네에서도 제법 유명했는데, 그는 자진해서 일본식의 이름으로 바꾸고 천황을 섬기겠다며 제 무릎을 쉽게 꿇었다고 했다. 덕분에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사업 또한 성공할 수 있었고, 일본군에게 자금을 대는 것도 모자라 독립운동을 위해 곳곳에서 모여 비밀리에 작전을 짜는 독립군들을 소탕하는데도 앞장섰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 아버지도, 나도 서로 존재는 알고 있는 거지.”

그럼... 여기 오는 게 위험한 거잖아요.”

 

 

의건은 성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어둠 속에서도 느껴져서, 은은하게 내려오는 달빛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성우는 일부러 더 많이 깜빡이며 제 눈에 담으려 애썼다.

 

 

욕심이 생겨서 만나러 왔어.”

 

 

성우는 의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의건의 손을 찾아 제 손에 있던 쪽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나중에 가서 읽어 봐요.”

지금은?”

어차피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데...”

... 연서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맞을 지도 몰라요.”

 

 

성우가 의건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기다리는 동안, 시집을 가까이 두고 틈이 날 때마다 읽었다. 참 많은 시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시들을 읽으며 성우는 의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니엘과 닮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러다 정말 영영 이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다니엘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의건의 품에서 광복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했다.

 

 

그리고 2018년의 한국에서 살던 기억이 남아있는 부분까지, 수도 없이 떠올리고 잊지 않으려 애썼다. 일기를 쓰듯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일들을 적어두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적으며, 다니엘에게 기념일이랍시고 축하카드를 적어 건네주었을 때 적었던 글귀 또한 겨우 떠올렸다. 그 글귀를 의건에게도 적어 건넸다.

 

 

성우가 이 시대에서 살면서 다니엘과 의건을 동시에 떠올리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성우는 2018년을 살아봤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던 도중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이 시대로 와버린 것이니까. 정말 자신이 일제강점기에 살았다면 의건 같은 사람과 연을 맺으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8년에서는 다니엘에게 충실했고,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2018년이 아니었으니까. 아직 돌아가지 못한 그 시간 속에 남겨진 다니엘이 그립고 미안했지만, 이 시간에서는 다니엘을 볼 수 없으니 그처럼 자신을 끌어당기는 의건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왜 블루 노트에 없었어요?”

내가 없는 시간에 왔던 건 아닐까?”

내가 갔을 때 일부러 피한 건 아니구요?”

 

 

의건은 대답하지 않은 채 성우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성우는 어둑한 곳에 있으면서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그저 눈동자를 굴리고만 있었다.

 

 

바빴어.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

...”

그래도 왔잖아. 당신 보러.”

 

 

그리고 더 이상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이 없었다. 어둑한 뒷마당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있었다. 오랜만이라는 이야기를 건넨 후, 우선은 그저 서로를 온전히 느끼는 데에만 집중했다.

 

 

한참 의건과 성우가 부둥켜안은 채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내고 있을 때, 성우의 눈에 저 멀리서 작은 빛이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집사가 순찰 차원에서 한 번 돌아보려는 것인지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 작은 불빛은 가까워질수록 그 크기가 커지고 있었다.

 

 

불빛을 본 성우가 의건을 제게서 떼어냈다.

 

 

의건씨. 그만 돌아가요. 여기 더 있으면 위험해.”

지금?”

. 저기서 누가 오는 것 같으니까 빨리 저 쪽으로 빠져나가요. 빨리!”

 

 

성우의 말에 의건도 조심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멀리서 다가오는 작은 불빛을 보았다.

 

 

다시 올게. 다시 와서 창문을 두드릴 테니, 나라고 생각하고 나와 줘.”

 

 

성우는 의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의건은 성우의 손을 잡은 채 멀리서 다가오는 불빛과 번갈아보며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을 손끝으로 표현했다. 맞닿은 손가락이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고, 몇 번이고 손을 잡았다가 놓으며 둘은 입술을 깨물었다.

 

 

갈게. 반가웠어, 옹성우씨.”

 

 

다니엘은 성우에게서 멀어지며 끝까지 미소를 지었고, 성우는 한참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

 

 

 

 

 

성우네 집의 담장은 생각보다 높지 않아서 의건은 요령껏 뛰어넘어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담을 넘어 성우의 집에서 벗어나면서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성우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성우가 살고 있는 저택이 점점 멀어지고, 성우의 방에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본 의건은 빠른 걸음으로 더욱 더 저택과의 거리를 멀리 떨어뜨렸다.

 

 

의건의 눈에 성우네 집에 보이지 않을 때 쯤, 서서히 걸음을 늦추며 제 손에 꼭 쥐어져있던 쪽지를 열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성우는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제 손으로 직접 쪽지를 쥐어주는 순간까지 붉어진 두 뺨으로 수줍게 웃었으리라. 하얗고 곧게 뻗은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며 의건의 손을 찾아 더듬거리고, 그 순간에도 실수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굳은 얼굴로 움직였으리라. 어두운 곳에 있어 잘 보이지 않아도, 의건은 성우의 행동과 표정이 제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백일홍이라도 꺾어다 줄 걸.”

 

의건은 성우에게 받은 쪽지를 펼쳐 보았다. 그 쪽지에는 제법 반듯한 글씨로 적힌 글귀가 있었다.

 

 

<나는 그가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했다.

그 목소리의 온도를 좋아했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지금 당장 듣고 싶었다.

세월 따위 아무 소용없었다.

 

- 에쿠니 가오리 냉정과 열정사이>

 

 

에쿠니 가오리? 일본의 신인 작가인가...”

 

 

성우의 글씨로 적힌 글귀를 보니 의건은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떻게 그대일 수 있을까.”

 

 

이 어지럽고 무서운 세상 속에 나타나 자신이 직접 손을 잡고 싶도록 만들어버린 한 사람이.

 

 

약속해. 자주 부르지는 못해도, 잊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