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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너를 사랑한 기억만 남아

구원2021

 

 

 

 

 

 

 

 

성우의 눈앞은 그랬다. 늘 이곳에 있으면 날아다니는 작은 먼지 같은 톱밥들. 그리고 그 사이를 넘어 우직하게 나무를 톱질하는 넓은 어깨. 그리고 그 어깨를 타고 내려온 팔뚝에 새겨진 힘줄. 그렇게 그가 무심하게 뱉은 한 마디. '톱밥 날린다. 좀 저리 가 있어라.' 하지만 성우는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눈앞에서 좀 더 그를 보고 싶으니까. 이유가 있다면 있는 거겠지만 아직 그 이유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계속해서 밀어내기만 하는 그에게 굴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그가 톱질을 한다면 지금 성우는 그에게 도끼질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성우는 지긋이 미소를 남겨 그의 얼굴을 빤히 봤다.

 

 

이름도 어딘가 달라. 다니엘. 사실 그의 오래 전 이름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생긴 것도 잘생겼어. 그리고 무엇보다 성우가 그에게 한 말이 있었다. '나는 네가 톱질할 때가 가장 귀여워.' 멋진 것도 섹시한 것도 아니라 귀엽다는 게 무슨 말일까. 그냥 그런 거 있잖아. 커다란 생명체가 저렇게 작은 톱으로 작은 나무판자를 썰어대는 모습이 성우 눈에는 귀여웠다. 한 번씩 다니엘이 있는 공방을 누군가가 지나갈 때면 남자들의 감탄과 여자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것을 보아 귀여운 것 아닐 텐데. 성우는 그런 귀여움을 누군가 몰라줬으면 했다. 그건 자신만이 아는 특별한 감정이었으니까.

 

 

 

"톱밥 날린다니까. 말도 드럽게 안 들어요."

 

", 뭐가 어때서. 그 톱밥 마셔도 내가 마시지."

 

"그러니까 안 된다고요. 좀 저리 가."

 

"...그거 무슨 뜻이야?"

 

"뭐가?"

 

"방금 그 멘트는 내가 톱밥을 마시는 게 안 된다는 건... 나를 걱정한다는 거야?"

 

"지랄한다. 할머니한테 혼나니까 그러지!"

 

  

 

 

잘 걸어가다 어디서 넘어진 기분이었다. 성우는 다니엘 앞에 쪼그려 앉아있다 벌떡 일어나 멀리 의자로 도망가 듯 걸었다. 자기는 또 내심 걱정해줘서 기분 좋았구만. 결국은 또 성우의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니 올 때마다 그란다. 아 몸도 안 좋은데 톱밥 같은 거, 먼지 같은 거, 마시게 하지 말라고. 몸이 안 좋기는 그저 할머니의 과잉보호였다. 물론 사랑이며 애정이기도 했지만 성우는 그런 사랑을 너무 넘쳐흐를 듯 받아 이제 누구에게 주고 싶은데 줄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지라 계속해서 가득 차있는데도 받고 있는 중이다.

  

 

성우는 괜히 시무룩해진 얼굴로 훤히 비춰진 통유리에 밖을 살폈다. 어째 동네 오르막길에 공방을 열 생각을 한 건지. 덕분에 자동차의 매연이나 시끄러운 소음은 덜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 하나도 이상하게 뭔가 아늑한 분위기를 가진 동화책에 나올 법한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지팡이를 지고 무언가를 손에 들고 걸어가시는 할머니를 보는가 하면 귀여운 얘들과 그 뒤에 아기를 업고 가는 엄마도 보였다. 그리고... 이건 그렇게 좋은 장면은 아닌데. 어떻게 고등학생이 이 시간에 지나가? 쟤네들은 야자도 안 하나? 아니 내 때는 야자하고 막 그랬는데? 성우가 노발대발인 것은 지나가는 귀여운 10대 커플 때문이었다. 그런 성우의 반응에 다니엘은 피식 한 번 웃어주고 요즘은 야자 전부 자율이다아이가. 라며 답했다.

  

 

성우의 할머니는 성우를 끔찍이도 아끼는 만큼 집밖으로 잘 내보지 않았다. 다니엘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단다. 도심 속 넓은 기와집에 성우가 나무 대문을 열고 뛰쳐나오자 할머니가 그 뒤를 쫓아가는 모습을. 커서는 더 한 거 같았다. 그저 단지 살이 없는 것뿐인데 뼈밖에 없다며 몸이 아프다고 묻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커다란 가옥에서 갇혀 사는 공주가 된 느낌이기도 했다. 제 누나인 옹성하씨는 밤 12시가 다 되어 들어와도 아무 말 안 하시는데. 성우는 해가 져서 들어오면 혼이란 혼은 다 났다. 물론 성하는 부모님에게 혼나긴 했어도 할머니가 혼낸 적은 없었다. 그 정도로 거의 라푼젤처럼 머리를 길어가며 탑에 갇힌 듯 살아가다 간신히 숨 쉬는 공간이 다니엘의 공방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까 나도 야자 안 해도 되는 거였어."

 

"할머니가 학교 일찍 마쳐서 오면 무슨 일 있을까 싶어서 학교에 붙잡아뒀잖아."

 

"아니 앞뒤가 안 맞아. 걱정이 되면 얼른 집으로 오게 했어야지. 9시까지 학교에 있게 만들어?"

 

"네 덕분에 나도 야자한 거 기억 안 나나?"

 

"설마... 너 나 좋아하고 그래서 그런 거야?"

 

"옹성우. 미치도 적당히 미치라. 할머니가 부탁해서 한 거다."

 

 

 

또 할머니. 어떻게 뭐라고 할 말도 없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일이기에 성우는 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삐졌다는 표시였고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제 친구인지라 삐졌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달래줄 생각은 밖에 떠다니는 초미세먼지 만큼도 없었다. 유일하게 성우가 빠져나올 수 있는 것도 다니엘의 공방인 이유는 할머니는 유독 제 친구 중에 다니엘을 예뻐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성우를 잘 지켜줄 거 같다나 뭐라나. 그냥 듬직하다는 이유로 성우를 잘 보필해라는 듯 부탁한 것도 이제 10년이 넘었을 것이다. 그 이유로 지금 성우가 여기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이제 곧 있으면 해도 질 텐데. 성우는 이럴 때 아니면 또 기회가 없다며 작은 나무 도마를 사포질하는 다니엘의 앞에 마주했다.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 그저 지긋이 웃어 보이며 꽃받침까지 얼굴에다 만들어 기웃기웃 거리는 모습. 조금 넘어오려나 싶어도 다니엘은 익숙하다는 듯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었지 그 이상은 또 없었다. 다니엘. 너 그렇게 사포질만 할 거야? 나 곧 있으면 가는데. 애교를 부려도 소용없고 이거 진짜 뭐 어떻게야 하나 싶어 다니엘의 약점을 성우가 건드리기 시작했다.

 

 

 

 

 

 

"하아..."

 

"..."

 

"하아아아..."

 

"..."

 

"하아아아아아아..."

 

"..."

 

"하아아,"

 

"! ! 뭐가 문젠데! !"

 

 

      

 

성우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밖을 나가지도 못하고 그저 제 방에 앉아 열려있는 창문으로 바깥세상을 볼 때 다니엘은 그런 성우 옆에서 만화책만 보기 바빴다. 같이 놀자며 떼를 쓰고 옆에 붙어 온갖 난리를 쳐도 다니엘은 다니엘의 세상이 있던 것이다. 그런 성우가 시무룩해져 창문에 두 팔을 기대 한숨을 쉬고 있으면 그리고 한숨이 짧지도 않고 길고 오래가면 다니엘은 꼭 성우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어릴 때는 그런 모습이 참 귀여웠는데. 요즘 들어 버럭 화내는 모습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봐주는 건 나쁘지 않았다.

 

    

 

 

"나 너무 잘생긴 거 같아... 어떡하지?"

 

"..."

 

"다니엘?"

 

"니 요새 뭔 일 있나? 어디 아프나? 와 남의 직장까지 와가고 설치냐고!"

 

"너무 티나?"

 

". 존나 나니까 뭔데 빨리 말해라."

 

"내가 다니엘 너를 좋아해보려고."

    

 

 

 

 

    

 

 

 

 

 

 

 

너를 사랑한 기억만 남아

구원2021

 

 

    

 

 

 

 

 

 

 

 

 

 

 

 

 

[그래서 다니엘을 좋아해보겠다고?]

 

". 생각나는 사람이 다니엘 밖에 없는 걸 어떡해."

 

[진짜 같은 대학 다니면서 또라이인 건 익히 느꼈지만 진짜 또라이구나?]

 

". 뭐가 어때서. 이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아?"

 

[뭘 해볼 만 해. 아니 둘이 몇 년이냐? 태어날 때부터니까 26년 아니야?]

 

"그렇게나 됐네. 운명이다. 운명."

 

 

    

 

가만히 전화를 하고 있던 재환은 환멸이나 돌아버릴 지경이다. 아닌 밤중에 통화의 첫마디는 '나 다니엘을 좋아해보려고.' 재환은 들고 있던 오렌지 주스를 그래도 분사했고 전화하면서 물티슈로 바닥을 닦는 중이라 말했다. 이 와중에 말이 안 되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다니엘을 좋아하겠다란 말. 그리고 하나는 좋아해본다는 말은 무엇일까.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해본다는 말은 아직 안 좋아한다는 말인가 싶은 재환은 성우가 또라이란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 다니엘을 사랑이나 할 수 있겠냐?]

 

"사랑에 빠지면 할 수 있겠지. 그래서 좋아해보려고 한다잖아."

 

[...너 강다니엘 그 새끼랑.. 잘 수 있냐?]

 

".... 안 될 건 없잖아."

 

[미친새끼.]

 

    

 

 

갑자기 왜 그러냐고 성우에게 묻는다면 아마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우리 할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어.' 나이 스물여섯에 대학 동기들은 하나 둘 취직하고 전부 독립해서 살아가는데 제 혼자만 평생 발목을 묶여 있으니. 더군다나 취직도 하지 말라는 말에 그야말로 어른이 되서도 갇혀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밖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랑 놀아날까 겁난다 그러시더라. 성우는 늘 다른 사람에게 헤프다고 하면 헤프다고 하겠지만 그만큼 부드럽고 친절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성우는 고백을 받았다. 그것도 집앞에서. 아침에. 마당을 쓸고있는 할머니 앞에서. 더군다나 남자가. 그 광경을 본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빗자루를 들고 그 남학생을 패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고서 할머니는 더욱 성우를 가둬두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어디 감히 자기 손주에게 손을 대냐며 그것도 남자가. 그리고 또 화살은 성우에게 돌아왔다. 처신을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냐며 혼내기도 혼냈지만 더 큰 문제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다니엘에게까지 학교에서 성우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봤단다. '.. 다른 얘들한테 친절하고 뭐... 되게 잘해주고 배려심도 깊고 그래요.' 내심 좋게 포장해서 말한다는 게 조합해보면 성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헤프다는 말이었다. 그 날 그 소리를 듣고 성우에게 한 소리. 그리고 성우는 왜 그따구로 쳐 말하고 난리냐며 한 소리. 다니엘은 또 혼자서 어벙벙한 상태로 성우를 보기만 했었다.

 

 

    

 

[그래서 다니엘을 평생의 남자로 만들어보려고?]

 

". 우리 할머니 다니엘 좋아하시잖아."

 

[방법은? 무작정 어깨 한 쪽 내리고 유혹하려는 건 아니잖아.]

 

"...안 되려나?"

 

[또라이야.]

 

"나도 알아. 그걸로 안 넘어온다는 거. 대학 다닐 때도 유명했던 무성애자가 유혹한다고 넘어오겠냐?"

 

[그러면. 뭘로 하려고?]

 

"각인."

 

 

 

 

 

각인? 강다니엘이 각인을 한다고? 대학 다닐 때 그 유명했던 강다니엘. 그리고 그 유명했던 무성애자였다. 여자가 들이대도 남자가 들이대도 무조건 까고 본다는 이상하게 연애의 관심도 사랑도 없었던 지금까지의 다니엘은 생각해보면 사귀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성우도 그런 적은 없지만 할머니 때문이라고 쳐도 대학을 졸업하고 공방에서 일하고 있는 걸보면 왜 저 피지컬을 놔두고 맨날 시간과 정성을 그 얇은 나무 판때기 하나 자르는데 쏟아 붓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장인 정신으로 가장 투철한 사람을 꼽는다면 성우는 다니엘을 꼽을 것이다.

 

 

각인. 그리고 각인의 필요한 사람들마다의 기억. 쉽게 말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그 기억을 상대방에게 얘기를 하고 그 상대방의 기억 속에 각인이 되고 같은 감정을 공유할 때 일어나는 일. 옛날이나 뭐 사랑이란 감정보다 대대손손 번식을 중요시했던 때라 각인이란 것은 천대 받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각인만큼 사랑에서 중요한 것이 없었다. IQ보다 EQ가 더 중요해진 시대라 그런지 사람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서 느끼는 감정과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각인은 의학적으로도 일반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고 정신과 상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질문이었다.

 

 

 

    

[아무튼 잘해봐라. 어렵기야 하겠지만. 그나저나 스케치는 다 됐어?]

 

". 내일 찾아갈게."

 

[오기는 어딜 와. 내가 간다. 너 다니엘 공방 말고는 갈 수 있는 데도 없잖아.]

 

"괜찮아. 공방 간다고 하고 뻥치면 돼."

 

[난 나중에 혼나도 모른다.]

 

    

 

 

재환과 같은 패디과였던 성우는 재환이 옷을 만들며 디자이너로 나름 밑바닥부터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지금 가끔씩 자신이 스케치한 옷을 만들어 달라 부탁한다. 굳이 원단까지 하나하나 다 알려주며. 얘는 동대문도 안 돌아다닌 놈이 원단은 또 어떻게 많이 아는 건지. 할머니만 아니었으면 매일 새벽마다 동대문에서 날아다닐 얘였는데 이렇게 갇혀있는 게 재환도 불쌍하다 생각한다. 말이 안 되지. 과에서 디자인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던 성우였는데. 요즘 성우 어떻게 지내고 있어? 대학 졸업하고도 어디 취직도 못하고 집에 갇혀있다. 성우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대꾸하기도 부끄러웠다.

   

 

할머니는 성우가 헤픈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밖에 내보내지 못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자신의 평생의 한 사람을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각인을 했다고 하면 또 얼마나 다행이라 생각하실까. 가벼운 사랑보다는 진지한 사랑을 더 원하시는 분인 만큼 그렇게 각인을 하면 되겠다 했는데. 막상 상대는 없었다. 오는 사람마다 막아대는 통에 더군다나 갇혀있는 바람에 친구 하나 없는 성우에게 남은 것은 다니엘이었다. 그리고 한동안다니엘을 다시 봤고 좋아하려고 온갖 장점이란 장점은 다 찾아 말하고 애교도 부렸다.

 

    

 

 

"그래도 얘가 귀여운 면이 있긴 하다. 진짜 톱질할 때 귀여웠던 것 같기도 하고..."

    

 

 

 

다니엘을 그냥 택한 이유는 없었다. 사실 그 마음은 그저 오늘 하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니엘도 알아줬으면 한다. 그 마음이 결코 거짓이 아닌 오래 전부터 지켜온 진실된 마음이란 것을.

 

     

 

 

 

 

 

 

 

오늘도 역시 공방에 찾아온 성우는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다니엘 옆에 재환이 있기 때문에. 매일 공방에 박혀있는 다니엘을 보러 다니는 것도 그렇지만 간만에 재환의 작업실을 가보나 했더니 재환이 제 작업실이 아닌 여기에 있다는 말에 성우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공방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었지만 이곳도 이제 계속 붙어 있을만한 곳은 아니었다. 지하철 타고 좀 멀리 가보나 했는데. 같은 버스에 같은 정류장에 같은 길목에서 재환을 보니 성우가 기운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니 또 재환이 작업실 가 있는 거 알면 할머니 화내신다. 여서 해라. 다니엘도 나름 26년을 함께 보내며 터득한 것이 있다면 성우의 표정이나 행동만 봐도 어디가 어떻게 삐졌는지 다 알았다. 성우는 나름 자신의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하는 편이라 쉽게 캐치할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지금 상황을 무엇보다 잘 아는 것은 다니엘이었으니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오랜만에 콧바람 좀 쐬나 했는데! 성우는 징징 거리며 재환이 앉은 테이블에 자신도 가방을 풀었다. 다니엘은 냉장고를 열며 줄 건 없고 요구르트나 마셔라며 던져주었다. . 오랜만에 온 친구한테 대우가 이따구냐? 실실 거리며 웃는 표정에 미안하다 둘러댈 뿐이다.

 

 

 

 

 

"스케치한 건? 좀 보자."

 

"여기."

 

    

 

 

스케치한 디자인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남다른 감각이 돋보였다. 엣지한 라인을 살린 상의와 그 하의는 모던하면서도 깔끔하게 밑단이 처리되었다. 새겨진 무늬나 디자인들이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고 그저 밋밋한 느낌에 검은색 원단을 또 다시 너무 화려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쳐지지도 않게 만들어놓은 무늬를 보고 재환은 역시 과탑이라며 죽지 않았다란 말을 덧붙였다. 그 외에 신발이나 모자, 그리고 귀걸이나 반지, 팔찌까지 그야말로 이대로 내세워도 빠지는 것이 없었다. 간만에 몸 좀 풀었다며 이번 건 그렇게 좋은 게 안 나왔다 하지만 재환은 연신 감탄했었다. 본인은 독창성을 중요시하여 늘 화려함으로 대체했다면 성우는 그 독창성을 자연스럽게 풀어냈다는 것이다.

 

    

 

 

"그래 그리면 뭐하노. 만들지도 못하는 거."

 

"그러니까 말이다. 누가 내 마음만 받아주면 만들 수도 있을 텐데."

 

"누가 뭔 마음을 받아줘?"

 

    

 

 

같이 앉아있던 재환이 입까지 가려가며 웃음을 냈다. 딱봐도 둘만 아는 이야기에 다니엘이 손에 들고 있던 조각도를 놓고 성우에게 걸어왔다. 무슨 내 흉봤나? 뭔 얘긴데. 누가 무슨 마음을 받아준단 말이고? 그래. 네가 알턱이 있겠냐. 성우는 다니엘이 던진 요구르트를 마시며 안 가르쳐 준다 메롱할 뿐이었다.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사실 다니엘이 성우의 마음을 깎아내린 말을 해서일 수도 있다. 아무리 그려도 만들 수가 없는 자신의 현실을 누가 모르나. 굳이 그렇게 꼭 집어 말하는 다니엘이 미웠다. 그래서 한 방법이 결국 제 자신 좀 찔려 봐라란 식이었다.

    

내가 일단 만들어보고 연락 줄 게. 나 더는 웃겨서 여기 못 있겠다. 결국 성우의 디자인을 들고 밖에 나가면서까지 웃음을 토해내던 재환은 자신의 작업실을 다 도착하는 와중에도 웃었다. 재환이 나가고 성우도 갈까 싶어서 봤더니 오늘도 통유리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뿐이었다. 집에 가지 와 안가노? 너 같으면 감옥에 제 발로 들어가고 싶냐?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다니엘 때문인데. 성우는 애써 한숨을 쉬며 창밖만 봤다. 자신의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걸까. 할머니는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자신의 능력을 섞이는 것도 이렇게 자유롭지 못한 것도 그런 상황 하나, 하나가 거슬렸다. 자신도 모르게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던 걸까. 성우는 연신 한숨을 내고 있었다.

 

 

    

 

"! ! 와 자꾸 땅이 꺼져라 숨 쉬는데!"

 

".... 나 그렇게 한숨을 많이 쉬었나?"

 

"..."

 

"걱정이 많고 고민이 많다."

 

"뭔데."

 

"몰라도 돼."

 

"어릴 때는 알려준다고 지랄하더니. 다 크니까 입 다 물고 지랄이가?"

 

   

 

 

'다니엘 내 얘기 좀 들어봐 봐.' 늘 고민이 있을 때 다니엘을 보며 시작하던 말이었다. 제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이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오랫동안 봐왔으니까. 그런데 차마 지금은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결론은 모두 너 때문인데 내가 어떻게 얘기 하냐고. 성우는 또 연신 한숨을 내쉬었고 다니엘은 또 그 한숨이 짜증났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 한숨만 쉬면 달려들어 무슨 일이냐고 오지랖을 부리던 그 성격은 바뀌지를 않았다. 뒤쪽에서 째려보는 시선이 강렬해지는 걸 느꼈고 성우가 뒤돌아보니 다니엘이 짓궂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니엘."

 

"?"

 

"나랑 사귈래?"

 

 

    

 

짓궂게 째려보던 다니엘은 금세 얼굴을 풀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다. 성우가 오히려 다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 감정 속에 사랑이 담겨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진심은 진심이었다. 성우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편이었으니까. 먼 과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까웠던 시간 안에 다니엘을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고 그 감정을 미약하게나마 풀어내고 그렇게 다니엘에게 표현하는 것이니까. 이 모든 표현의 마지막이 되는 말을 지금 건네도 될 거란 생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대학 다닐 때도 종종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럴까. 알바를 하고 싶어도 할머니의 반대로 공부만 하던 성우는 늘 다니엘이 일하던 카페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너무 자주 와서 카페 사장님까지 그 얼굴을 기억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 전부터 다니엘을 좋아했던 것이고. 그렇게 일하던 중에도 갑자기 픽업 대에 얼굴을 올려놓고 꽃받침을 하지 않나. 일하고 있으면 달라붙어서 징징 거리기도 했고 가끔은 밤에 우울해져서 들어와 한숨을 쉬며 다니엘을 붙잡아두기도 했다. 그 모든 이유가 너를 좋아해서란 말은 늘 빠졌었고 그걸 알리가 없는 다니엘은 그저 성우를 달래기 바빴을 것이다.

 

    

 

 

"나랑 각인 할래?"

 

"내가 니 기억 듣고 각인이 될 거라 생각하는 건 또 뭔데?"

 

"다니엘 네가 들으면, 각인할 수밖에 없는 기억이니까."

 

"..."

 

"어떻게 할 거야? 사귈래?"

 

"미쳤냐? 싫어."

 

    

 

 

뭐야! ? 성우가 놀라 벌떡 일어나 다니엘에게 달려왔다. 그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싶은 다니엘은 성우를 또 다시 째려보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동방에서 조각도로 나무판 파댈 때 옆에 들러붙어 온갖 지랄을 다 받아냈고 그리고 그 중에 심심한 고백도 몇 번 섞여있었다. '다니엘, 나랑 연애할래?', '다니엘, 나랑 사귀면 되게 좋을 거 같지 않아?', '다니엘... 나는 네가 그렇게 좋다.' 무슨 고백을 밥 먹듯 한 건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아니면 지금도 그런 장난인 건지 다니엘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난이라 여기게 된 것은 이제까지 한 행동 덕분이지 않을까.

 

    

 

 

'다니엘! 다니엘! 다니엘! 그러지 말고 나 한 번만 데려가 줘!'

 

'장난하나! 밤에 그것도 여의도에 불꽃 축제를 보러가자 하면 우야란 말이고!'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부탁하잖아.. ? 도와줘! 도와달라고!!'

 

'아 좀! 시끄러워 못 살겠다.'

    

 

 

 

한때 여의도에서 하는 불꽃축제가 그렇게 보고 싶다며 다니엘에게 조르던 그 날 다니엘은 옆에서 징징대는 성우가 시끄러웠던 나머지 헤드락까지 걸며 조용히 시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성우는 다니엘의 품에 안겨 좋은 냄새가 난다며 좋아했다. 그런 놈을 어떻게 이기겠나 싶어 할 수 없이 데려다 준 그곳에서 뭐 사 달라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또 다시 난리의 연속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도 벚꽃을 보러가자 떼를 쓴 덕분에 한참 밀려있는 주문을 다 팽개치고 성우와 벚꽃을 보러 간 다니엘은 사실 대학 때까지만 해도 둘이 사귀냐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는데. 현실은 다니엘이 먼저 손사래를 치고 난 후였다.

 

    

 

 

"너 지금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나 장난 아니야. 진짜라고."

 

"..."

 

"진짜야! 진짜! 내가 그럼 이때까지 너한테 그냥 대충 고백한 건 줄 알아?"

 

"그럼."

 

"아니! 그거 아니란 말이야! 상황 구분 좀 해! 나이 스물 여섯이 그것도 구분 못하냐?"

 

"못하게 만든 게 누군데!"

 

    

 

 

진짜야! 진짜라니까! 다니엘은 손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내며 앞치마를 벗었다. 너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 집에 데려다 줄 게. 가자. 한손에 차키를 지고 공방에 불을 꺼뜨릴 때까지 성우는 다니엘에게 소리쳤다. 이번엔 진짜라고 너 좋아한다고 소리를 쳐도 다니엘은 묵묵부답이었다. 어떻게든 진심을 전하고 싶었는데. 가벼운 마음이 아닌 오랫동안 지켜온 진실된 마음을 알아주길 빌었는데. 내가 말해줄게. 내 기억. 진짜 너 내 기억 들으면 각인할 거라니까! 다니엘은 성우의 반응에 아무데서나 그런 기억 말하지 말라며 입술을 잡아당겼다.

 

 

 

    

"내가 진짜여도 안 사귈 거야?"

 

"..."

 

"나 진짜야. 정말이라고. 진짜라니까. 그래도 안 돼? 안 할 거야?"

 

". 안 해."

 

 

    

 

얼른 나와. 데려다 준다고. 대낮부터 불 다 꺼진 공방을 나와 유리문을 붙잡아 둔 다니엘은 성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이 상하는 당연한 거고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꽤 잘 건넸다 생각했던 진심이 사르르 부서져버렸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다니엘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고 애초에 당황한 표정도 생각해보면 '뭐야.. 얘가 왜 이래?' 이것이 아니라 '이 새끼가 미쳤나.'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대로 가방을 챙겨 동방에서 걸어 나오는 성우가 앞에 세워둔 다니엘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늘 타는 차였지만 기분은 나쁠 때로 나빴다. 이렇게 최악인 날 다니엘의 차를 타고 감옥에 들어가는 기분이라니.

 

 

 

    

"드라이브."

 

"?"

 

"드라이브 가자. 멀리. 바다 보이는 데로."

 

". 곧 있으면 해 진다."

 

"너랑 같이 있으면 아무 말씀 안 하시잖아."

    

 

 

 

제 발로 감옥으로 들어가기엔 성우의 오늘 하루가 너무나도 악운으로 가득했기에. 재환의 작업실까지 가지 못했던 것도 그랬고 다니엘이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도 그랬는데. 이렇게 일찍 그것도 해가 지기 전에 감옥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혼나면 혼나는 것이었다. 지금 성우의 기분으로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무작정 달리고 보는 것이었지. 성우의 표정이 안 좋다는 것을 알기에 다니엘은 군말 없이 엑셀을 밟았다. 뭐 어쩌겠나 싶은 표정으로 핸들을 잡는 모습까지 성우는 빤히 쳐다보며 잘생겼다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요즘 들어 자꾸 다니엘만 보고 있으니까 뭔가 더 새로운 느낌들이 자주 찾아들었다. 원래는 몰랐던 것들도 바뀐 것들도 조금씩 보였으니까.

 

 

 

바다 보러 간다는 말에 부산까지 갈 필요는 없으니. 그냥 인천이라도 가고 싶었던 마음이니까. 다니엘이 조금 속도를 높이자 성우가 창문을 내려 들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는다. 감기 걸려. 괜찮아. 이 정도로 안 걸려. 알바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성우가 운전면허라고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다니엘이 민증이 나오자마자 운전면허부터 시키고 그렇게 딴 운전면허는 늘 성우가 드라이브 하고 싶을 때마다 이용 되었다. 참 이렇게 보면 옹성우가 강다니엘을 잘 부려먹는다고 재환이 말한 적도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씻을 기억들을 골라내는 성우였던 반면 다니엘은 아까부터 시무룩했다 힘내자 라며 다시 활발해지는 성우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자 계속 싱글벙글 상태였다.

 

 

    

 

"뭐가 그렇게 웃겨."

 

"니 하는 짓이 웃기다."

 

"그래 웃기겠지. 남을 실컷 차놓고 웃음이 나오는 강다니엘씨. 그래요.."

 

"뭘 또 그렇게 얘기 하냐."

 

    

 

 

뭘 또 그렇게 얘기를 한다니. 빼박 어디 한 군데 틀린 부분이 없는 말인데. 도심을 빠져나와 한적한 도로가 나올 때 그리고 어느 순간 탁 트인 바다가 눈앞에 선명하게 들어올 때 성우는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도착해도 해가 지기 전인데. 오늘 만큼은 통금이란 것에서 벗어 나보자란 마음에 성우는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어 환한 금빛 모래들을 밟아 달리기 시작했다. 들어가면서 신발도 툭툭 벗어 들고는 바로 앞 파도가 치는 곳까지 달려 들어갔다. 아직은 차가운 느낌이 역력한 모양인지 표정이 일그러지기도 했다.

 

    

다니엘은 뒤에서 성우를 바라보다가도 옆으로 달려와 물까지 튕기며 때 아니는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너무 늦게 온 건지 해는 점차 기울어지고 있었고 노을바다 만큼 낭만적인 것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새 어두웠던 표정은 성우에게서 볼 수 없었다. 그저 해맑게 웃으며 뛰어 노는 모습에 다니엘도 마음이 편해진 건 사실이다. 한참을 뛰놀다 지쳐 모래사장에 턱하니 앉자 다니엘이 그 옆을 앉았다. 가만히 앉아있으니까 또 생각나는 것은 무슨 경우일까. 성우는 아까와 조금 다른 한숨을 내쉬며 다니엘을 쳐다봤다.

 

 

 

    

". 너 좋아하는 사람 있지?"

 

"? ,뭐라는 거고? 좋아하는 사람이 어데있노?"

 

"웃기지마. 너 방금 말 더듬었어.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를 찬 거겠지. 그래."

 

"아까부터 찼다 찼다. 그런 말 좀 하지마라. 내가 니를 진짜 찼나?"

 

"그럼 진짜 찼지 가짜로 찼냐? 왜 나랑 사귀어주게?"

 

"...됐다."

 

 

 

    

할머니한테 더 혼나기 전에 가자란 말이 다니엘에게서 나왔다. 지금 서울로 간다고 해도 이미 깜깜한 밤일 것이며 아주 호되게 혼나도 할 말은 없었다. 단 하루라도 그 감옥에 있지 않는다면. 성우는 그런 만약을 생각했었다. 절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옆에는 다니엘도 있었기에. '우리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 모래를 털며 일어나던 다니엘의 몸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지금 제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도대체 무얼 하자는 말인 건지. 여기서... 뭘 자고 가. 아무 짓도 안 해. 진짜... 하루만 밖에 있고 싶어서 그래. 할머니도 너랑 있다고 하면 괜찮으실 거 아니야.

 

 

진짜.. 잠만 자자. ? 아무 짓도 안 할 게. 잠결에 덮치거나 그러지 않을게. 다니엘을 덮치고 내 것으로 만들자보다는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컸으니. 다니엘은 역시나 못 이기는 척 할머니에게 연락을 했고 같이 있다라는 말과 밖에서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말에 의외로 흔쾌히 허락하셨다. 역시 다니엘이 있으니까 일사천리야. 성우는 다니엘이 전화를 마치자마자 뒤에서 와락 안았다. 다니엘도 오늘 같은 날 성우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것이겠지만 이 상태로 그 대궐 같은 집에 또 홀로 밤을 보낸 다는 것이 달갑지 많은 않으니까.

    

근처 차를 몰아 돌아다녀도 보이는 것은 전부 왜 모텔 뿐인 걸까. 괜히 얼굴 화끈 거려지게. 다니엘은 숙박이나 민박이란 글자를 찾아다니는 반면에 성우는 그냥 모텔이라도 들어가자라며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 잠만 자는 거니까. 그러겠지 싶은 다니엘은 바로 옆에 보였던 모텔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몰았다. 그리고 어느새 다니엘의 손에는 열쇠가 있었고 열쇠 끝에 매달린 번호의 객실의 문을 열고 있었다. 성우는 문이 열리자마자 침대에 풀썩 누웠다. 씻고 누워라. - 방금 그 말 되게 야했어? 이제 무슨 말도 못하겠다는 다니엘이 고개를 휘젓자 성우가 먼저 욕실에서 씻고 나왔다.

 

    

혹시나 씻은 모습에 흔들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떻게 그런 것이 1도 없는 건지. 다니엘도 이 상황의 본질을 깨닫고 그저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편하게 몸을 침대에 눕혔다. 사이즈도 커서 그런가 괜히 둘 사이에 거리는 더 멀었던 느낌이다. 이렇게 같이 자본 적이 얼마만이야? 우리 열여덟 살 때 수학여행에서 같은 방 되고 난 이후로 처음 아니야? 대학 때 우리 집와서 디비 잔 건 기억에 없나? 오랜만이라 느꼈는데. 성우는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다니엘의 집을 들락날락 거렸던 인물이었다. 그럼 어떡하냐. 나의 외박을 허락하는 곳이 너희 집 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좋았는데. 요새는 가기도 어렵고.

    

둘 사이에 고요함만이 흘렀다. 예상외로 잠잠했던 성우의 행동에 다니엘도 마음을 놓은 지 오래였고 하루 종일 서로 씨름을 했던지라 서로의 눈은 벌써 감길 따름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성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각인의 기억을 술술 불어서 시켜보기나 해볼까란 생각도 있었고 둘 다 씻었고 여긴 모텔이고 확 덮칠까도 했지만 어느 방법도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다. '다니엘이 나를 좋아해줬다라면 뭐든 할 수 있었을텐데.' 방금 전까지 싫다란 반응을 듣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마음에.. 성우는 그 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딱 한 가지 다니엘에게 부탁한 것 외에는.

 

    

 

 

"다니엘."

 

"?

 

"나 이름 한 번만 불러줘."

 

"갑자기?"

 

"그냥 좀 불러줘. 이상하게 난 네가 내 이름 불러줄 때가 좋아. 목소리도 그렇고.. 톤도 그렇고.. 적당하게 좋아 그냥. 그런 기분이야."

 

"..."

 

"불러줘. 고백은 못 받아줘도 이름 부르는 건 할 수 있잖아."

 

"옹성우."

 

"성 빼고.."

 

"성우야."

 

"...좋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나의 이름이 좋았다. 그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나의 이름이 좋았다. 나는 그가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했다. 그 목소리의 온도를 좋아했다. 성우는 한참동안 귀를 만지작거렸다. 다니엘의 목소리가 귀에 맴도는 거 같아서. '다니엘. 고마워.' 목이 메었지만 그래도 성우는 다니엘의 이름도 불러주었다. 성우가 그랬듯 다니엘도 그랬다. 성우가 제 이름을 불러줄 때 다니엘은 그때의 목소리와 그 온도를 좋아했다. 다니엘도 그저 성우에게 비어있는 마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서로를 그저 친구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었고 그렇게 성우는 마음을 잊어가겠다 말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아주 괴로워한 다음에야 추억 쯤 되지 않을까. 내일이 오면 많은 것이 바뀔 듯한 밤이었다.

 

     

 

 

 

 

 

 

    

 

 

 

"사실 그 놈 좋아하게 된 일이 있었단 말이에요.."

 

    

 

성우의 목소리였지만 어젯밤 다니엘의 이름을 불러주던 온도가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차가웠다면 차가웠고 뜨거웠다면 뜨거웠을 것이다. 알코올에 온도가 왔다갔다 거리는 목소리. 흐릿한 시야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 채 성우는 맑디맑은 소주를 한 모금 들이 키고 또 들이켰다. 누굴까 앞에 있는 사람은. 다니엘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정갈한 느낌이었다. 평소 캐주얼한 의상을 입고 다니는 다니엘과 달리 눈앞에 남자는 수트 차림에 무언가 되게 각이 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친한 사람들에게 한 마디도 못했던 그 기억을 지금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성우는 그저 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기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억을 조금씩 흘리고 말았다.

 

    

 

 

"제가... 고등학교 때 미술부를 했었거든요? 근데 내가 거기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거야. 나한테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딱 그렇더라고."

 

"..."

 

"진짜 내가 미술은 정말 잘했어요. 내가 지금 디자이너를 준비 중이라서 그렇지 옷을 만들어본 적이 없어서... 아무튼! 그래서 그랬는데.. 나한테 막 나쁜 짓을 했어요. 그냥.."

 

    

 

 

머리 위로 떨어지는 탁한 빛깔의 물. 뿌려지는 물감. 젖어 들어가는 교복.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듯 보이는 주변의 시선들과 눈앞에 그것들을 행하는 인물들. 일생의 가장 최악인 날이었을 것이다. 미술부에서 나름 경시대회에 나가 상도 타고 학교 내에서 알아주는 성우였다. 하지만 뭐가 문제여서 이 아이들을 화나게 한 걸까. 난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니까요. 성우는 그 수많은 이유 중 자신의 할머니 때문이라는 이유도 했었다. 할머니가 날 너무 과잉보호했었다. 그래서 미술부 오티도 못 갔고 어디 중요한 자리 참석도 못했는데 상은 내가 다 받았으니 그렇게 된 거다. 차가웠던 그 물감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매일 도화지에 칠하기만 칠했지 자신의 몸에 칠해지는 기분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었다. 아니 싫었다.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굳이... 이유를 알 필요가 있어요? 그런 것들이 그런 짓을 했던 이유를 알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 그냥 나한테 나쁜 짓한 거면 나쁜 짓한 거지. 그게 내 잘못이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어떤 일에도 폭력이란 건 정당화가 될 수 없으니까."

 

"...그러네요. 근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닌데."

 

"..."

 

"나랑 26년 동안 알고 지낸 놈이 하나 있는데. 내가 어제 그 놈한테 고백했다 차였어요... 근데 걔가 날 구해줬어요. 막 물감 뿌리다 못해 안 달란 녀석 중 하나가 조각도를 들고 막 얼굴에 상처 내겠다 달려오는 걸 걔가 손목을 딱! 잡아서 구해줬거든요."

 

 

    

 

어느 정도로 해야 분이 풀렸던 것일까. 눈앞에 그런 짓을 행하고 있던 인물 중 하나는 옆에 있던 조각도로 저 얼굴을 파내보자란 식으로 성우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아무런 움직임도 낼 수 없었던 성우는 다가오는 그 모습에도 뒷걸음치지도 못했다. 그렇게 팔이 올라가고 그 팔을 다른 손이 잡아냈을 때. 다니엘은 제 앞에 있는 놈을 주먹으로 내리 찍고 나서 성우를 챙겼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주고 젖어서 물들어버린 와이셔츠 위에 다니엘은 제 외투를 걸쳐주었다. 그렇게 미술실을 빠져나오자마자 혼절한 성우를 집까지 끌고 와서 눕히고 밤새 열이 나는 걸 간호해준 게 다니엘이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좋아했던 거겠지. 다니엘은 징계를 먹어가면서까지 성우를 해치려했던 놈의 얼굴을 때렸다.

 

 

    

 

"진짜 어릴 때는 나보다 키도 작았던 게... 나 신경도 안 썼거든요? 근데 이제보니 꽤 듬직하게 지켜주니까. 그리고 업은 상태에서 집까지 데려다주니까... 등도 넓어..... 굉장히 편했거든요... 근데.. 그걸.. 모르..."

 

"이봐요. 성우씨? 성우씨!... 나도 업어서 데려다주게 생겼네."

  

 

 

 

 

다니엘은 오늘 하루 성우가 공방에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눈을 떠보니 성우는 먼저 간다는 쪽지만 남기고 사라진 후였고 다니엘은 아침을 챙겨먹을 새도 없이 서울에 올라와 성우에게 전화를 했다. 그냥 일찍 왔다며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라 대충 둘러대는 목소리에 울음이나 슬픔은 없었다. 다니엘은 다행인 듯 전화를 끊었지만 오늘도 시끄럽게 하러 오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밤이 다 되고 공방에 불을 끄는 순간까지도 성우는 찾아오지 않았다. 당연히 찾아올 수 없겠지. 이 야밤에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다니엘이니까.

   

 

혹시 재환의 작업실에 있나 싶어 연락했지만 '무슨 소리야. 옹성우가 내 작업실에 어떻게 올 수 있을 거 같아?' 역시나... 집 가는 길에 그냥 가면 성우 생각만 날 거 같은 다니엘은 핸들을 붙잡으며 재환과의 통화를 이었다. 어제 니 가고 나서 바닷가 갔는데.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재환은 소리쳤다. 나도 데려가지! 성우가 둘이서 가고 싶다는데 어떡하냐. 재환은 그 말에 쿨하게 화를 풀었다. 화난 것 같지도 않았지만. 둘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흐리더니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따뜻한 조명이 차갑게 변질되는 순간이랄까?

    

 

 

 

"그냥 고백 받아주면 안 되냐?"

 

"."

 

"너 옹성우 좋아하잖아."

 

"그렇지."

 

"그럼 받아줘. 왜 자꾸 맴도는 건데."

 

"못 받아줘. 아직 옹성우 마음이 장난인데 어떡하라고. 나 진짜 좋아할 때 그때 할 거야."

 

". 너나 진짜 좋아할 때 해! 옹성우 마음 신경 쓰지 말고. 정신차려라. 여기서 옹성우가 진짠게 왜 중요해. 옹성우 짝사랑 상대가 너라면 모를까. 네가 좋아하는 거면 네가 진짜 좋아해야지!"

 

"..."

 

"으휴... 등신아. 등신아. 성우 그거 어떤 놈이 채가면 어쩔래?"

 

"걱정 마라. 집 밖으로도 못 댕기는 놈이 다른 놈 만날 틈은 있겠나. 지금 만나는 놈도 내하고 니가 전부일 걸."

 

 

 

    

다니엘도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그런 것인지. 성우가 너무나도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잡을 타이밍도 확인하지 못했고 그저 밀어내기만 바빴다. 언젠가 고백하겠다는 마음 하나였으니 성우는 기다리고 있어야만 할 인물이라 이 정도에 부정은 괜찮다 생각했다. 맞는 말이라 재환은 그 뒤로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도 질질 끌지 말고 성우가 좋아한다. 물으면 가끔씩은 좋아한다. 답해주라는 말로 통화가 끊겼고 다니엘도 제 집에 도착했다. 공방과 그리 멀지 않아서 좋았다. 차까지 끌고 나올 거리는 아니지만 아침에 인천에서 바로 공방으로 왔었던 덕분에 오늘은 차를 타고 도착했다.

 

 

집에 도착해보니 재환에게서 문자 한 통화가 와 있었다. [내일 나도 가는 거지?] 다니엘은 곰곰히 생각하다 무언가 떠오른 표정으로 답장을 보냈다. 내일은 주문 들어온 작은 가구가 다 만들어져 배송하는 날이었다. 재환은 왜인지 모르지만 따라 붙겠다고 말했다. 지난번에 한 번 무거운 걸 들어야했던 날 재환과 함께 동행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재환은 싫다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물건을 옮기며 주문하는 사람의 옷차림을 보자 재환은 느낌이 왔다며 그 자리에서 스케치 하나를 끝마치고 돌아갔다. 그때부터 다니엘의 손님은 자신의 영감을 주는 매개체라나 뭐라나. 뭐 같이 옮겨준다면 나야 고마운 일이라며 다니엘은 그러라고 했다.

    

5월이라 더울 줄 알았는데. 오늘은 많이 쌀쌀했다. 어제까지 틀었던 선풍기에 손이 가지 않았고 다니엘은 옷을 갈아입고 대충 손과 발을 닦고 이를 닦아냈다. 저녁도 그렇게 입맛이 있지 않아서 그런가 곧바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성우의 곁에는 다니엘 밖에 없었다. 누군가 성우에게 잠깐 들어가려 해도 이상하게 성우의 주위에는 사람이 쉽게 모이지 않았다. 재환은 그 중 특이케이스였고. 조금만 더 기다리란 마음에 지금은 밀어내고 있었던 다니엘은 자신이 고백할 그때까지 성우가 기다릴 줄로만 알았다. 근데...

 

    

 

"뭐야... 저거 옹성우 옆에 남자 아니야?"

 

 

  

 

 

하루를 그렇게 꼬박 새고 다음 날, 재환과 같이 배송하던 중에 눈앞에 있는 성우가 처음 보는 남자와 마주하길래 차를 급하게 세웠다. 재환도 놀란 기색이 훤하게 보였다. 이럴수가. 옹성우가 다른 남자랑 같이 있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가 허락은 하신 건지. 성우의 전적을 보면 다니엘의 공방으로 간다며 거짓말을 깔고 온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환은 옆에 남자를 유심하게 살펴보더니 잘생겼다. 훤칠하다. 멀리서 보면 모르겠는데 가까이서 보면 몸도 좋아 보인다. 기타 등등 여러 말을 남기고는 차에서 내렸다. 훤한 가로수길 서로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 흡사 연인처럼 보였다. 다니엘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 버린 지 오래다.

 

 

    

 

"! 옹성우!"

 

"뭐야? 김재환. 너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다니엘이 오늘 물품 배송한다고 따라 붙었지. 그러던 중에 너를 봤는.."

 

"봤는데."

 

"황팀장님?... 둘이 아는 사이에요?"

 

"민현씨랑... 아는 사이야?"

 

 

    

 

뒤에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다니엘은 짜증이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갑자기 어떤 남자랑 있는 것도 짜증나는데. 그 남자가 또 잘생겼고 자기보다 뭔가 더 뭐라 할까. 성우가 원하는 느낌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이 와중에 재환과 아는 사이였고 황팀장이라는 걸 보아하니 어디 회사 팀장 같은데.. 보니까 나이도 얼마 차이 안 나는 것 같았다. 거기다 '민현씨'라고 하는 성우를 보니 둘이 무슨 사이인지 아니 분명 어제 그렇게 가놓고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던 건지. 하루 만에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성우가 누구와 인연을 만들 사람은 아니었다.

 

 

 

    

"패션업계에서 유명한 회사 팀장님이셔. 너 잘해드려라."

 

"진짜? ..."

 

"아니에요. 성우씨. 성우씨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황팀장님 또 나온다. 저 겸손. 그나저나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그게... 어제 만났어. 어떻게 된 거냐면...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 그냥 사람 좋잖아. 민현씨... 되게 뭐라 할까. 아니 그냥 그런 게 있으니까 너희들은 빨리 배송이나 가."

 

 

    

 

때 아닌 성우의 쑥스러워 하는 표정을 보자 어이가 없다는 듯 다니엘이 비웃었다. 내심 그 비웃음을 성우가 봐줬으면 좋겠는데. 제 옆에 민현인지 황씨만을 보고 있으니 보일리가 없었다. 재환은 결국 성우가 가라는 통에 나중에 연락해라는 말을 남기고 차에 올라탔다. 차가 성우에게서 점점 멀어지자 분위기는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재환도 알고 있는 이유였고. ... 어제 둘이 바닷가 간 거 아니야? 옹성우 능력봐. 천하에 황민현하고 데이트를 다하고. 저 사람도 너 못지않게 무성애자거든. 근데 이제 보니 그건 아닌가보네. 다니엘은 무섭게 핸들만을 붙잡고 있었다. 기다려줄 줄 알았는데. 다니엘의 크나큰 오산이었다.

 

    

 

 

"아까 저 사람이 성우씨 구해줬다는 사람이에요."

 

"... 나를 찬 놈이기도 하죠."

 

"눈이 삐었네. 성우씨를 눈앞에 두고 말이야."

 

"오늘 두 번째 만남인데 너무 저돌적인 거 아니에요?"

 

"글쎄요. 아예 따지면 첫 번째 만남이죠."

 

 

 

    

어제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털어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민현이었고 성우에게는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 그런 민현이 꽐라가 된 만취상태에 성우의 집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결국 제 집에 데려다 놓은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뭐냐며 무슨 짓을 한 거냐며 소리치는 성우는 술에 쩔었던 기억이 돌아왔고 그제야 민현에게 간단한 사과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 와중에 또 제 발로 집에 들어가기 싫어 이왕 혼날 거 영화 한 편만 보자는 성우의 부탁에 민현은 흔쾌히 수락했다. 아마 어제 모든 것을 민현에게 털어놨을 것이니. 민현은 웃으며 성우를 차에 태웠고 영화관으로 향하는 길에 커피 한 잔을 손에 쥐어준 것인데. 그 모습을 다니엘과 재환에게 걸린 것이다.

 

 

    

 

"할머니한테는 뭐라고 말할 거예요?"

 

"...그러게요. 혼나고 말죠 뭐."

 

"혹시 증인 필요하면 말해요. 언제든지 가줄테니까."

 

"나중에 딴 소리하지 마요. 나 진짜 부를 거니까!"

    

    

 

 

 

 

 

 

 

 

 

 

 

 

 

 

늘 찾아오던 그림자가 요 며칠 새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공방에는 다니엘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거나 재환이 가끔 들릴 뿐이었다. 그 뒤로 둘이 잘 만나고 있던 거 같더라. 황팀장님이랑 만났는데 성우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고. 재환이 알려준 소식들만 받아듣고 그 자리에서 괜히 화풀이하다가 혼자 시무룩해져 공방 한켠에 쳐 박혀 고개만 떨구기도 했다. 그렇게 열흘 하고도 이틀이 지났다. 다니엘이 성우를 완벽하게 밀어낸 뒤로는 성우도 더 이상 어떤 말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장난이었어도 받아줄 걸 그랬나.

 

    

 

 

'다니엘. 나랑 사귈래?'

 

    

 

 

. 사귈래. 어릴 적부터 성우만을 따라다닌 이유는 그때 덩치가 조금 더 컸던 성우가 다니엘을 끌고 다닌 것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다닌 것은 아니다. 다니엘이 늘 성우의 곁을 지켰던 이유는 있었다. 26년 동안 성우의 옆에 제가 아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둘이 같이 영화도 봤다나봐. 우리 그때 봤던 날. 재환은 이럴 때만 우체국에 그려진 빨간 비둘기처럼 소식을 전하고 오갔다. 사실 그 영화 한 편이 얼마나 보기 힘든 건데. 할머니와의 동행 끝에 갈 수 있는 곳이 영화관이었다. 다니엘에게 그렇게 졸라도 가급적이면 영화관은 가지 말라는 할머니의 말에 다니엘은 늘 선을 그었는데. 조금 있으면 진짜 사랑하려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각인이든 영화관이든 뭐든 해주려고 했는데. 늘 앉아있던 성우의 의자가 오늘따라 차가워보인다. 아주 많이.

 

    

 

 

'영화관. 놀이공원. 여행...'

 

'?'

 

'내가 하고 싶은 거. 할머니 때문에 못 했던 거 생각하고 있어.'

 

'어떻게 할 건데. 그거 다.'

 

'네가 좀 해주면 안 되냐?'

 

    

 

 

다 해줄 수 있었는데. 테이블에 연달아 이마를 붙힐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 옹성우가 정말 그 사람이랑 사귀면 어떡해야 하는 걸까. 한참을 마주한 재환과 얘기했다. 하지만 마땅한 최선책이나 해결책은 내놓지 않고 재환은 공방에 주문 들어온 거 없냐며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해야 우울한 기분도 날아간다며 앉아있는 다니엘을 들춰냈다. 하지만 재환이 혼자서 들춰내기엔 역부족이었던 덩치라 그냥 포기하고 조용히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 황금 비율을 꺼내고 있었다. 이럴 때 카페인이 또 들어 가줘야 한다며 믹스 커피를 들이 밀었다. 다니엘은 컵에서 올라오는 뿌연 공기를 보고만 있었다.

 

 

    

 

"옹성우가 사귀자고 했다며."

 

"..."

 

"그때 왜 잡았어?"

 

"너무 놀라서."

 

"뭐가 놀라."

 

"갑자기 저서 내보면서 말하는데 안 놀래겠나. 근데 아차했지 옹성우 저게 진심일 리가 있나. 대학 댕길 때부터 저러고 댕기던 놈인데. 지금 와서 뭐라 달라진 게 있나 싶었지."

 

"...따지면 옹성우 걔. 대학 다니면서 너만 따라다녔어."

 

"그건 내랑 다닐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고."

 

"너랑 붙어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사랑이라고 못할까 봐."

 

 

    

 

재환은 곰곰히 생각을 해도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다니엘은 성우를 좋아했고 사랑했고 마음속에 품었었다. 그런 성우가 고백을 한다 해도 그 고백이 장난이라도 다니엘 본인이 고백할 수도 있는 것을 질질 끌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다니엘이 먼저 제대로 고백을 했더라면 성우도 진지하게 고민이라도 했겠지. 애초에 성우가 한 고백을 받아주었다면 지금 둘은 이미 갈 때까지 갔을 것이라 말했다. 다니엘이 머뭇거렸던 이유가 무엇일까. 고작 성우가 제 마음을 받아주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함 때문에 그랬던 걸까. 괜히 뻗쳐갔던 제 머리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한참 자책하다 또 미칠 듯 화를 내보려다가 그렇게 옹성우 생각에 멈추고 그렇게 오늘 하루를 꼬박 보냈다. 해가 다 졌다는 재환의 말을 듣고 밤이란 것을 알았다. 지금 쯤 성우는 집에 있으려나. 설마 황민현 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옹성우 생각 좀 그만하라는 뜻에 재환은 술 한 잔 하러 가자며 다니엘을 제 차 조수석에 태웠다. 카페인으로 안 되는 것은 알코올로 조금 칠해줘야지. 재환은 운전하는 와중에 다니엘의 표정을 살폈다. 너한테 말하면 네가 각인할 수밖에 없다는 기억 말이야. 성우가 얘기했잖아. 재환이 눈앞에 허공에다 말해도 다니엘은 입도 벌리지 않고 목의 울림만으로 대답했다. 정말 네가 각인할 수밖에 없는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를 좋아한단 뜻 아니야? 그렇겠지. 다니엘이 각인할 만큼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애초에 그런 뜻일 테니까.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도 오늘은 마음에 안 들었다. 누가 봐도 실연당한 얼굴이다. 따지면 원래 성우가 하고 있어야할 얼굴 인데. 왜 다니엘이 이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괜히 톱질하는 제 앞에서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모습만 기억난다. 말로는 톱밥 마신다며 저리가라 얘기했지만 그와 마주보고 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한다는 것. 매일 공방에 있으면서 그랬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눈앞에 옹성우가 없는 톱질은 이제 별 감흥도 없었다. 옹성우 생각 좀 하지 말라고 데리고 나왔는데. 재환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옹성우' 세 글자만 도돌이표처럼 중얼거렸다.

 

    

다니엘... 우리 다른 데 갈래? 나 삽겹살 말고 김치찌개 먹고 싶어. 갑자기 무슨 소리고 안 비키나? 여서 찌개까지 무면 된다 아이가. 차에서 다 내린 재환이 입구를 가로막자 그저 두 다리로 버티기 힘들었던 다니엘은 재환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탄식하며 따라 들어온 재환은 다니엘이 그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을 어떻게든 말려보려 했지만 이미 선하게 들어온 장면이 다니엘의 얼굴을 더 식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다니엘? 여기 어떻게 왔어? 부르지도 않았는데."

 

"재환씨도 왔네요. 두 분 같이 저녁 드시러 온 거예요?"

 

 

    

 

 

민현과 성우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둘 사이에 구워지는 고기를 보자니 짜증이나고 이 상황을 어쩌지도 못하는 게 미칠 것 같았다. 이 시간에 어떻게 성우가 여기 있는 건지. 그것도 민현과 함께. 다니엘은 한참을 바라보다 결국 젓가락을 들고 있던 성우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큰 체격에 성우는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밖으로 끌려 나갔다. , 뭐야! ! 지금 뭐해! 뭐하는 거야! 갑자기 잡혀 나가는 성우를 잡으러 민현이 일어서려다 그 뒤에 재환이 민현에 어깨를 살포시 짓눌렀다. 그러더니 옆에 수저통을 열어 젓가락 한 짝을 꺼내 성우 자리에서 고기를 한 점씩 주어먹다 소주까지 마신다. 민현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 듯 보였지만 재환에게 저 상황으로 모든 것이 판가름 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성우는 밖으로 나와 손목이 풀리자 인상을 잔뜩 찡그렸고 다니엘은 한껏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평소 같으면 둘 사이에 있어도 웃음을 흘리던 성우는 지금 만큼은 표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다니엘이 성우를 끌고 나왔다는 것은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성우는 그걸 알고 있었고 나지막이 '할 말 있으면 해'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니 뭔데. 진짜 저 황민현이란 놈하고 놀아먹나?"

 

"놀아.. 후우...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그래.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괜찮아. 나랑도 잘 맞고."

 

"니 그 날 내한테 고백하고 다음 날이었다. 하루 만에 둘이 뭔 짓을 했는데 여까지 오는데. 니 그리고 지금 이 시간까지 어떻게 여기 있는데. 할머니는 아나?"

 

"내 마음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는 것 때문인 거야. 아니면 할머니처럼 이 야밤에 술 먹고 있어서 그러는 거야?"

 

"."

 

"하루아침에 사람 마음 바뀌는 건 그럴 수도 있는 거고. 밤에 술 마시는 건... 너도 마시는 걸 왜 나는 못 마시는데. 내가 환자야? 어디 아픈 사람이야? 한 번 쯤 이렇게 마시는 것도 안 돼?"

 

"니 하는 행동이 이상하다 생각 안 하나? 뭐하는 긴데? 지금 내 찔러보고 안 되니까 다른 놈 찌르는 거가?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거고? 니가 이래 헤프게 실실 거리고 다니니까 할머니가 니를 가다놓지! 씨발!"

 

"..."

 

    

 

 

성우가 헤프다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니엘은 지금 단지 민현과 같이있는 성우가 싫어서였다. 그런데도 그 이유를 결국 성우가 헤프다라며 돌려버렸다. 어떻게든 표정 관리를 하려고 했던 성우의 표정이 그만 싸늘하게 차가워졌다. 성우가 지금 이렇게 갇힌 것도 혼자 마음 편히 그 커다란 집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도 제 자신이 헤프다는 이유였는데. 다니엘은 자신의 분을 풀기 위해 성우의 가장 큰 아픔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두 눈에 선명하다면 선명했다. 자신에게 거칠게 퍼붓는 모든 말에 직접적인 욕은 많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모든 것이 자신을 깎아버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헤펐냐? 내가 아무나한테 그렇게 헤펐어?"

 

"..."

 

"너한테는 헤펐을지 모르겠는데. 내 마음을 말하고 너한테 고백했던 것들 중에서 그저 헤픈 마음으로 한 것 없었어. 네가 잘못 봤거나. 내가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겠지."

 

"..."

 

"이제 와서 왜 이렇게 날카롭게 굴어?... 그래. 너 찔러서 다른 놈 찔렀다. 근데 그 놈이 더 좋아서 그렇다 왜! 안 받아준 건 너야! 내 진심 헤프다고 취급한 건 너라고! 싫다며! 안 하겠다며! 근데 뭐! 내가 다른 놈이랑 놀아먹든 이제 네가 무슨 상관인데!"

 

"..."

 

"이제 한 사람한테만 헤프게 굴어보려고 하니까. 그만 신경 써. 여기저기 헤프게 다닌 거 아니야. 네가 그렇게 본 거겠지... 그래서 그때도 그렇게 말했겠지. 난 살면서 그렇게 헤펐다고 생각 안 했는데. 어째 네가 나를 더 잘 아는 느낌이다."

 

"..."

 

"저 사람한테 내 기억 말했어. 각인의 기억. 그 기억 다 듣고도 나한테 잘해준 사람이야. 토닥거려준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

 

    

 

 

성우가 울분을 다 토해낸 듯 고기 냄새가 가득한 곳으로 들어가기 전 크게 숨을 내쉬더니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재환은 밖에 있는 다니엘이 거슬려 밖으로 나왔고 아까보다 사라진 고기를 보더니 재환에게 욕 한 마디하고서야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 깜짝이야- 밖에 나온 재환은 아까 몇 마디 성우랑 나누더니 그새 지친 건지 길바닥에 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옹성우하고 무슨 일이 있었어? 다니엘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백번이고 사귀자 외쳤다. 헤프게 굴며 건넨 고백이라도 다니엘은 늘 마음에서 그랬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적이 없었다. 성우를 먼 곳에 두려고 애썼던 행동들이었다. 그런 행동들은 곧 성우를 멀어지게 하고 있었는데. 그걸 똑바로 알기나 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다니엘은 가까이서 그저 쪼그려 앉아 저를 보는 성우가 좋았던 것이 다였는데. 한참을 밀어내어 끝에 더 이상 밀어낼 마음이 없어졌을 때. 모든 마음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을 때. 성우는 가만히 그 자리를 서성거리다 또 다른 마음을 만든 것일 뿐인데. 다니엘의 마음은 아플 따름이었다. 너를 사랑하면서도 네가 나에게 그 사랑하는 마음을 받았었음에도, 그저 가볍게 다가온 마음이라 부정하며 혼자 밀어내고 지켜보는 모습이 이렇게 돌아와 버렸다.

 

 

   

너를 부정한 만큼 나는 아팠다.

 

 

 

 

    

 

 

 

 

 

 

 

 

 

 

 

 

 

살아 있으면서도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탁 트인 하늘에 솟아난 건물들. 그리고 그 맨 아래 성우가 벽에 기대었다. 그렇게 다니엘과 헤어지고 난 뒤에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민현과 만나는 시간들이 익숙해지고 편해져갈 쯤이었다. 데리러 오겠다는 민현을 만류하고 성우는 앞에서 기다리겠다 말했다. 이런 곳에서 언제 또 기다려보겠나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랬던 그 마음이 지금 꽤나 무겁다. 많이 무거웠다. 설렘으로 가득찰 줄 알았던 마음이었는데. 꽤나 답답하고 아픔이 저렸다.

 

      

민현에게 말한 제 기억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그저 이런 관계까지 다니엘은 보기가 싫었던 걸까. 그저 제 자신이 싫다고하길래. 그래서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이 이제 영원히 다가갈 수 없게 되버린 것 같다. 비가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하늘이 그렇게 화창한 건 아니었다. 언제 비가 쏟아져도 모를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었다. 손에 우산을 들고 싶었는데. 마음까지 무거운데 손까지 무거울 수는 없다 놓고 나왔는데. 혹여나 비가 내리지는 않겠지. 그 날 뒤로 재환에게 연락을 해도 아무 일 없다며 잘 지낸다고 하긴 하지만 그렇게 화내고 돌아서는데 어떻게 잘 지내는 걸까. 괜히 고개만 바닥을 향해 떨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민현씨..."

 

"갈까요?"

 

"."

 

 

    

 

자연스레 올라탄 민현의 차도 익숙하고 그의 차향에도 코끝이 떨리지 않았다. 많이 익숙해졌다. 여전히 이렇게까지 자신의 끝을 붙잡는 다니엘이 미웠다. 그렇게 밀어내고 끝날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도 제 손끝을 잡는 다니엘이 미웠다. 계속 생각나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어서 싫었다. 끝까지 제 감정을 헤프다고 밀어붙이며 아니라는 식으로 돌렸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되게 밉다. 이 모든 일이 다 다니엘인 것 같아서. 그런 다니엘이 이제껏 제 곁에 있던 유일한 제 사람인 거 같아서 싫다.

 

 

 

    

"그 사람은 잘 들어갔어요?"

 

"그 사람이요?"

 

"성우씨 찼다던..."

 

". 들어보니까 잘 들어갔고, 잘 살고있고."

 

"근데 성우씨는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

 

"제가요?"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민현의 차에 내려 그가 예약해 둔 작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그와 함께 그 주변을 걷고 그렇게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그의 차에 올라타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 길을 거닐 때. 성우는 마음 편히 얼굴을 필 수가 없었다. 다니엘이 제 삶의 유일한 제 사람이라는 것이 짜증났지만 그래도 다니엘이 이대로 돌아서면 진짜 제 편이 없을까봐. 방금 전까지 곁에 있던 민현 조차 통과하지 못할 그 마음이 다니엘에게는 있었으니까. 이건 싸워서 그런 거야. 화해하려고 그런 거야. 결국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성우는 연락처가 가득 채워진 곳에 다니엘을 눌렀다. 편하게 마음먹었다. 그저 싸웠던 건 잊고 단순하게 화해만 하자. 성우는 일부러 걸음을 느리게 하여 다니엘이 전화를 받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긴 신호음이 끊어질 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성우를 찾았다.

 

    

 

 

"여보세요. 다니엘.."

 

[. 저기 지금 이 분이 많이 취하셔서 정신이 없으시거든요.]

 

"취했다구요?... 거기가 어디에요?"

 

[교차로에 백화점 뒤에 포장마차... 그 쪽인데.]

 

".. 저기 20분이면 가니까 죄송한데 그 사람 좀 잘 붙잡아주세요. 부탁드려요."

 

 

    

 

왜 또 취하고 난리야. 성우는 곧장 집으로 가는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가에 택시를 잡아 그 곳으로 향했다. 밤에 둘이서 택시 탄 건 몰라도 혼자 택시 탄 것도 처음이다. 요새 갑자기 너무나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던 성우였다. 하지만 그런 걸 일일히 챙길 틈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성우는 '잔돈은 됐어요.' 라며 뛰쳐나와 곧장 다니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테이블에 엎드려 고주망태가 된 다니엘은 보였다. 이 덩치야.. 여기서 뭐해! 진짜! 성우는 짜증을 내며 한쪽 팔을 제 어깨에 걸쳐 다니엘이 먹었던 술을 계산하고 그렇게 빠져나왔다. 길가로 나오는 동안에도 다니엘을 끌고 나온다고 한참 걸렸다. 얼마나 취했으면 술주정 하나 없이 잠에 든 걸까.

    

 

택시에 밀어 넣고 성우는 그제야 숨을 헐떡거리며 차가운 밤이었지만 창문을 내렸다. 여기서 저기까지 얼마 거리도 안 되는데. 다니엘 덕분에 평소 흘리지도 않던 땀을 바가지로 흘렸다. 나쁜 놈. 내가 나중에 복수하고 말 거야. 그냥 사과하려고. 너도 괜찮을 리 없으니. 우리 관계가 그저 서로에게 모진 말만 하고 다시는 보지 않았던 사이이고 싶지 않아서 전화했는데. 목소리는커녕 얼굴도 못 보고 잠이나 자는 놈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조용히 집까지 데려다놓고 내일 얘기하던가 해야 했다.

 

 

 

택시 문을 열고마저 계산을 마치고 다니엘을 끌어 내렸다. 그래도 정신이 조금 드는지 발에 보폭을 조금 잡아가더니 중심을 못 잡을 뿐 걷기는 걸었다. 다니엘이 조금은 잠에서 깨있는 상태인 걸 알았지만 성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니엘의 집앞 까지 올라갔다. 왜 이렇게 높은데 사는 거야... 시간이 얼만큼 지났지. 이러다 할머니한테 혼나는 거 아니야. 다니엘이 취했다고 그래서 늦게 왔다고 말할까. 온갖 생각이 섞여있다 결국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넘어졌다. 빌라 앞에 작은 계단에 다니엘을 팽개치고 그 뒤로 성우가 숨을 헐떡거렸다. 다니엘은 자세를 고쳐 잡더니 유리문에 자신의 커다란 몸을 기댔다.

 

    

 

 

"일어나. 집에 들어가서 자. 여기서 자면 입 돌아 가. 여름이어도 추워."

 

"..."

 

"들어가서 자지 좀?"

 

"성우야."

 

"."

 

"나한테 다시 말해주면... 안 되나?"

 

"."

 

"내한테 다시 한 번만 해도. 나랑 사귈래.. 그 말."

 

"그걸 왜 해줘 너한테."

 

 

    

 

성우가 계단을 내려와 길목에서 숨을 크게 쉬었다. 입고 있던 옷을 펄럭 거리며 땀을 식혔다. 저거 때문에 안 흘리던 땀을 다 흘리고. 다니엘은 작게 눈을 떠 제 앞에 있던 성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성우는 고개를 돌려 비몽사몽에 다니엘을 보고 저거를 집까지 데리고 가, 아님 말어. 이 생각만 했다. 고백을 다시 한다느니 그런 건 모르겠다만은 저 커다란 개가 밖에서 잠을 자다 감기라도 걸리는 거 아닐까. 혹시나 누가 주워가지는 않을까. 잡아가지는 않을까. 이상한 생각이 가득 찼었다. 성우는 지금 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작게 웃음을 토했다.

 

    

 

 

"성우야."

 

".."

 

"... 14살 때 술 존나 먹고 취했을 때. 그때 니 있다아이가."

 

". 그게 몇 년 전 이야긴데 그걸 지금하고 있어. 누가 그걸 몰라. 나 그때 사고 한 번 쳤다 할머니한테 엄청 혼난.."

 

"엄청 예뻤디."

 

"..."

 

"내 그때 친구들이랑 니한테 술 맥이고 니는 또 완전 취해가꼬 몸도 못 가눴제. 내가 니 그때 데리다줬잖아."

 

"."

 

"그때 술기운인지 모르겠는데. 진짜 내 미친놈인 거 같은데."

 

"..."

 

"니 덮치고 싶었다. 아나? 것도 14살 때."

 

"미친새끼."

    

 

 

 

가만히 잠들어 얼굴은 붉게 익어오른 성우가 다니엘의 품에 안겨 어떻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몸 이곳 저곳에서는 술냄새가 났고 이렇게 집에 들여보내다 성우가 혼날 게 뻔했다. 간신히 어영부영 근처 공원에서 자기만이라도 술 좀 깨고 가려는 다니엘의 허벅지에 성우는 제 머리를 뉘였다. 14. 무언가 아직은 확실히 어린 나이였지만 그래도 알 건 다 알았다. 요즘 중학생들이 모르는 게 어디있나. 옆에 딱 붙어 다니던 성우가 바로 아래로 고개를 숙이자 얼굴이 보였다. 그날따라 가로등이 한참 빛나 성우의 반들거리는 입술이 보석같이 빛났다. 순간 저 입술을 잠깐이라도 맛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다니엘은 그렇게 제 마음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들어왔지만 그래도 그때보다 12년을 더 곁에 있었으니.

 

    

 

 

"순간 존나 쪽팔리더라.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 게이다. 그게 아니라. 몇 년을 같이 지냈던 니한테 그 생각한 내가... 뭐 한심하더라."

 

"..."

 

"그때 딱 맘뭇지. 성우는 건들지 말고 가만히 둬야겠다. 혹여나 나쁜 맘 먹으면 안 되니까. 성우 니가 나한테 먼저 좋아한다 말하기 전에는 가만히 둬야지 했다."

 

"근데 내가 좋아한다 말했잖아."

 

"..."

 

"그때는 왜. 왜 안 받아줬는데."

 

"...너무 떨려가 말을 못 했다. 진짜 니가 눈앞에 떠다니는데 뭐 우야겠노. 맨날 대가리로 상상만 하고 잠결에 물만 빼고 그랬지. 니가 좋다고만 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이다."

 

"..."

 

"니 헤프고 그런 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가 바보맨키로 해가 그렇지.."

 

"..."

 

"니 마음 진짠 거 다 안다..."

 

"..."

 

"이거 니한테 고백할라고 준비했던 건데. 술에 쩔어가 말해뿟노. 이게 내 기억이다. 각인. 니는 뭔데?"

 

 

    

 

집에 들어가서 얼른 잠이나 자. 감기 걸려. 성우는 다니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덜터덜 길목을 내려갔다. 다니엘이 들어갔는지 아직도 그곳에 있는지 보지도 않고 어느새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큰길로 빠져나가는 길이 아닌 옆으로 살짝 빠져있는 길에 그 담장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거릴 만큼 힘든 것도 아니다. 그 정도로 울음이 터져 흘렀다. 슬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참해서도 아니다. 아닌 밤중에 하얀 가로등도 아닌 주황빛 가로등 아래. 가만히 있으면 쓰레기 냄새도 조금 나는 거 같기도 했다. 성우는 쪼그려 앉아 쌓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조금씩 나아지는 그 시간도 아팠다. 내가 헤펐던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이 가볍게 보였던 것이 아니라 그저 다니엘이, 다니엘 제 자신이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늘 가볍게 보였을까봐. 늘 자신이 헤프게 굴어 전하는 진심이나 마음이 하찮았을까봐. 무엇보다 진심을 전했던 다니엘이기에 그런 다니엘에게 전했던 마음이 결국 헤픈 것이 아니구나. 가볍지 않았구나. 다니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고마웠고 다행이었다. 제 마음이 너무나도 쉽게 보였을까 왜 이렇게 나는 바보같이 마음을 전하는 걸까. 그렇게 가슴을 친 게 몇 번인데. 제 마음이 인정 받은 기분이다. 이제껏 지켜왔던 마음이 물거품이 되지 않아서 좋았다.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던 하늘은 결국 비를 토하고야 말았다. 왠지 그 날 성우가 맞은 비는 따뜻하기도 했던 것 같다.

 

 

    

 

 

 

 

 

 

 

 

 

    

 

    

 

 

 

 

간밤에 비를 맞았던 것이 결국 이런 참사를 불러왔다. 바짝 열이 오른 이마는 좀처럼 쉽게 줄어들 줄 몰랐고 깊게 잠겨버린 목은 저리게 아팠다. 비를 쫄딱 맞아 대충 씻기는 씻었는데. 따뜻한 물에 씻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해가 들어오고 아침이 되니 결국 몸을 일으킬 수 조차 없었다. 죽을 먹고 약을 먹고 그렇게 또 다시 몸을 눕히고. 사실 그런데도 성우는 기분이 좋았다. 제 마음을 그 밤에, 그 비가 내리는 밤에 알아주는 이가 있었으니까. 새벽까지 내리던 비는 오후가 넘어서야 그쳤고 더 이상 잠에 들 수도 없을 만큼 잠을 잔 성우가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이 아프나.."

 

 

 

    

제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성우가 눈을 떴다. 다행이 빛이 그렇게 많이 들어오지 않아 눈은 쉽게 떠졌다. 흐릿한 시야가 깨끗해지자 보이는 얼굴에 성우는 손을 뻗어 볼을 어루만졌다. 다니엘이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아침에 눈을 떠 해장할 틈도 없이 왔더니 성우는 이 모양이었고 어제 그렇게 보낸 탓에 이렇게 된 거라며 성우의 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확인 받고 난 다음 날이라 그런 가 왠지 더 애틋하게만 보인다.

 

 

    

 

"왜 왔어."

 

"니 이라고 있을까 봐."

 

"..."

 

"어제 한 말, 내 무를 생각 없다."

 

"?"

 

"내가 한 말이랑 그거.. 뭐냐 그 각인의 기억인가 하는 그거까지. ."

 

"..."

 

"이제 옹성우 니가 답해라. 우얄래? 사귈래. 아님 말래?"

 

      

 

 

다니엘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잘 보면 눈동자 끝에 아리던 빛이 둥글게 구르는 것 같기도 하고. 성우는 괜히 한 번 더 다니엘의 볼끝을 건드리다 말았다. 말할 듯 말 듯, 입이 열릴 듯 말 듯. 그 와중에 다니엘의 목젖이 몇 번이나 움직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 건가. 서로가 기억의 각인을 하면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서로의 그 기억의 감정을 공유하게 되고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니까. 성우는 한참 입을 다 물다 꽤 시간이 지나서 입을 열었다.

 

 

    

 

"드라이브."

 

"...?"

 

"이번엔 넓은 초원이 있는데로. 드라이브 가자. 다니엘."

 

 

    

 

오늘 다니엘은 따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성우가 가고 싶다는 한 마디에 옷장 안에 있던 두꺼운 가디건을 성우 몸에 걸치고 대충 흐른 땀을 닦아 꼭 안아준 뒤에 살금 문을 열었다. 까치발로 조용히 마루를 지나 마당에 놓인 신발을 신는 것까지 할머니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왔다. 성우를 조심히 조수석에 태우고 다니엘은 차를 몰았다. 이번엔 바다가 아니라서 그런지 넓은 초원을 또 어떻게 알고 한 시간 채 되지 않아 차를 멈춰 세웠다. 성우는 다니엘이 차문을 열기 전에 내려 넓게 펼쳐진 풀밭으로 달려갔다. 다니엘은 차를 세워두고 금새 성우에게 따라 붙었다.

 

    

 

 

"좋다. 와아... 어떻게 이런 데가 있지? 여기 서울 아니지?"

 

"그럼 여가 서울로 보이나. 뭐 바다 보러 인천까지 가는 것도 아이고. ."

 

"다니엘."

 

"...."

 

"너 진짜 나랑 각인할까? 그냥 진짜 사귈까?"

 

"니는 어쩌고 싶은데. 내는 그래 하고 싶은데."

 

"..."

 

"간 보나. 여까지 와놓고."

 

"내가 여기까지 왜 왔겠냐? 간 볼려고 왔겠어?"

 

"..."

 

"사귀자. 나랑."

    

 

 

 

성우의 기억 속 가장 끝에 있던 다니엘의 각인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그때의 묘한 기분과 감정이. 성우의 입에서 사귀자란 말이 나오자마자 다니엘은 성우를 껴안았고 그리고 다니엘의 기억 속 다니엘이 느꼈던 모든 것들을 텔레파시처럼 받았다. 그때의 떨리는 감정, 그리고 묘하게 달아오르는 얼굴들. 꿈속에서 빛나는 느낌인 것 같았다. 그리고 끝에 남은 눈앞에 자신에 대한 자책감. 그렇게 지켜주겠다는 마음까지 다니엘의 기억이 성우의 머릿속에 각인된 채 남아버렸다.

      

 

 

 

"... 각인 한 거.."

 

"옹성우. 내 이름 좀 불러줄래?"

 

"...다니엘."

 

"..."

 

"다니엘. 나 너 진짜 좋아하나봐."

 

"옹성우. 이제 나도 해보자. 각인. 한 번 들려줘봐. 니 기억."

 

 

    

 

나지막하게 부른 이름에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서로가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했다. 서로의 목소리의 온도를 좋아했다.

      

 

그렇게 다니엘의 머릿속에 성우의 기억이 각인이 되어 가고 있을 때, 두 사람은 달콤한 입맞춤으로 서로의 사랑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