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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가뭄

녤라운더

 

 

 

 

 

 

 

 

 

 

가뭄.

 

아리엘은 원래 1년 내내 맑은 날씨와 좋은 경치가 자랑거리인 작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제국으로 향하는 샛길 말고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한 때는 아름다운 산으로 이름을 날렸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산에 몬스터들이 터를 잡으면서, 이 마을은 여러 던전으로 가는 길목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가뭄.

 

아리엘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온 다니엘에게는 가뭄이라는 단어가 마냥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울적한 마음에 마을회관으로 가는 길에도 간간이 눈으로 산허리를 훑었다.

 

이 촌구석이 몬스터로 먹고 사는 동네였는데...뭔 일이고 대체.’

 

마음 속으로 툴툴대봤지만 산은 여전히 고요했고 우울함만 더해져 애꿎은 길가의 돌멩이만 걷어찼다.

득실대던 주변 던전의 몬스터들이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눈에 띄게 줄었다.

물론 반 년쯤 전부터 던전에서 돌아온 사냥꾼들 사이에 몬스터 수가 예전같지 않다는 소문은 있었다. 하지만 이 동네 몬스터로 말하자면, 매년 제국에서 꽤 큰 규모의 소탕 작전을 벌일 정도로 수가 넘쳐났다. 소탕기간이 끝나고 기진맥진한 군대가 돌아가고 나면 비웃기라도 하듯 일주일만에 우글바글 불어나 헌터들을 괴롭히고는 했다.

그런데 몬스터 수들이 줄고 있다니, 처음 소문이 들렸을 때는 그저 어느 초보헌터의 서투른 변명 정도로 치부됐다. 그러나 제국 소탕 작전 때마다 유명세를 떨치던 점잖은 용병의 말은 그 힘이 달랐다.

다니엘은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가 이룬 팀이 한 달째 여기저기 허탕을 치고 나서야 비로소 이 곳 몬스터들이 씨가 말랐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날 밤, 아리엘의 가장 붐비는 여관 트리플은 대체 누가 선수쳤냐며 안도가 섞인 허세와 다음 사냥지 정보로 밤새도록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헌터들에게 더이상 볼 일이 없어진 이 마을은 오랜만에 낯선 고요함을 얻었다.

마을 손님 대부분이 소문으로 먹고사는 인간들이라 일주일도 채 안되어 마을 출입부 명단이 공란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에서는 이런 날을 가뭄이라 칭했다.

 

뜨내기들을 상대로 한 장사가 주 수입원이었던 마을에서는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몬스터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장로조차 처음 보는 일이라며 당황하여 땀을 훔쳤다.

매번 무슨 꿍꿍이인지 한 마리씩 마을 어귀까지 내려와 골칫머리를 썩게 만들던 고블린 녀석들조차 사라져서 지금 당장 눈에 뜨인다면 환영인사라도 해줄 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동네 사람들끼리 푸념을 나누다가 아무런 성과없이 회의는 끝났다.

 

터덜터덜 여관으로 돌아온 다니엘은 텅빈 가게 내부를 둘러보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청소를 도와주던 이모님한테는 드디어 자유를 드린다며 웃으며 인사를 드렸다. 이 가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퇴직금을 두둑하게 챙겨드렸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항상 왁자지껄 용병들로 붐비던 트리플 여관은 지내온 세월만큼 낡았지만 깨끗했고 음식도 맛이 좋아 인기가 있었다.

게다가 주인이 장사 수완도 좋고 괴짜 손님과도 잘 어울려 이 마을에서 용병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관으로 이름을 날린 게 엊그제 같은데 요 며칠 파리만 날리는 현실이 기가 찼다.

멍하니 가게 탁자에 앉아 창문 너머를 바라보니 밖은 어느 새 밤이 되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저 천직이라 여겼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니 입맛이 썼다.

물려주신 부모님께도 볼 낯이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점점 기분은 한없이 내려갔다.

몬스터가 이리 귀해질 줄 누가 알았으랴.

 

바람이 점점 거세지는지 창문 너머 나무가 크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점점 나무 흔들리는 폭이 커지더니 그 순간 검은 물체가 빠르게 스쳐갔다.

 

으아악!”

 

다니엘은 본 즉시 소리를 지르다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쿠당탕 넘어진 채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만한 생물체가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마을에서 가장 초입에 위치한 다니엘의 여관은 길 잃은 고블린이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마을 건물이었다.

그 너머로 가는 도중에 고블린들의 대부분은 기민하게 눈치챈 다니엘에게, 또는 흥청망청 여관에서 놀던 헌터들에게 사냥 당했다. , 다니엘은 마을의 파수꾼을 담당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제껏 다니엘이 못 느낄 정도로 여관 가까이 접근한 몬스터는 처음이라 더욱 손에 땀이 배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와 마을을 향한 움직임이 몬스터라 짐작되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한동안 몬스터 가뭄으로 인해 꺼내놓았던 무기들을 모두 창고에 가져다 놓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급한대로 옆 벽에 걸려있던 장식용 장칼을 투둑 떼어내 손에 쥐고 놀란 숨을 가다듬었다. 저 정도로 빠른 적에게 통할 지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나았다.

급한 것은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일이었다.

평소의 마을이라면 몬스터를 막아줄 장정들이 널렸었겠지만 지금은 가뭄으로 인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초조한 마음에 발걸음을 서두르는데 문에서,

똑똑.

 

순간 잘못 들었나 멈칫하고 기다리자 다시 똑똑. 분명한 노크 소리였다.

이 밤에 찾아올 마을 사람이 있나 싶어 문을 열려다가 전투 자세를 취했다.

 

여관 출입문을 누가 노크하고 들어오누.’

 

마을 사람들, 스쳐가던 용병들, 그 누구도 노크한 적 없는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기가 찼지만 상대는 침입자가 분명했다. 문 바로 앞까지 슬금슬금 다가간 다니엘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문고리를 잡았을 때 쯤 다시 들리는 약간 더 힘을 준듯한 노크 소리와,

 

“...계세요?”

 

미성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들렸다.

순간, 다니엘은 말을 하는 몬스터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고위 마물급이 아닌 이상 몬스터와의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던 술취한 노병의 말이 기억났다.

이 동네 몬스터는 하급 뿐이라며 다 잡아주겠노라고 떵떵거리며 웃었었다.

 

그 다음 해인가 소탕 작전에서 죽었었지. 그 아저씨.’

 

농담을 주고받았던 단골의 마지막을 잠시 기리고는 문 너머의 이방인에 집중했다.

 

말하는 거 보면 사람... 아니면 인간형 몬스터인데.’

 

인간형 몬스터면 지능도 높아 상황이 안좋아질 가능성이 높았다. 우선 상대방이 말을 걸었으니 수상함을 참고 덤덤한 체 대답했다.

 

. 있는데요... 누구시죠?”

 

긴장했는지 목소리 끝이 떨려서 큼큼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다니엘로서는 낯가리는 듯한 대화가 어색해서 속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곧이어 안심하라는 듯이 살짝 웃음기가 밴 대답이 들렸다.

 

잠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아 이상한 사람이 아니시구나... 그런데 어디서 오시는 건가요?”

 

묘하게 친근하게 구는 목소리에 다니엘은 저도모르게 문을 열려다가 자신의 질문이 슬쩍 돌려진 것을 눈치채고는 다시 몸을 굳혔다. 이번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이어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에서 방금 내려왔어요.”

 

?! 산에서요? 올라가는 걸 못 본 거 같은데 언제 올라갔는데요?”

 

내내 궁금했던 질문이 급하게 터져나왔다.

산은 분명히 몬스터 씨가 말랐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로?

그리고 정상적인 루트라면 이 마을을 거쳐가야 하는데 한달 가까이 산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문고리를 꽉 잡은 채 문 너머 수상한 자에게 취조하듯 다시 따져물었다.

 

이 마을 안통하고 들어가셨나, 산 들어가는 사람 못 본지 한참 됐는데 언제 들어가셨으요?”

 

화를 낼 법도 한데 취조를 당하건말건 변함없이 느긋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그 때가...마을 천년목에 꽃이 피었던 날인데...정확하게는 기억이 안나요.”

 

천년목. 천년목이면근데 던전 출입부 기록에는 안 나온 사람은 딱히 없었는데

 

극악의 난이도는 아니라서 죽어서라도 나오는 곳이 이 동네 던전이었다.

 

날아서 들어갔어요.”

 

날아서요?”

 

.”

 

당당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다니엘은 이방인이 사람이 맞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제국에서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는 천년을 살았다는 천년목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나무는 한달 전쯤 단 하루동안 꽃을 피워서 꽤 화제가 되었다.

다니엘도 처음 보는 아름다운 꽃이었다.

그 날 몇몇 제국의 부유한 귀족들이 꽃구경을 위해 마법사를 대동하고 이 마을을 날거나 순간이동 마법으로 방문했다고 장로의 자랑스러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게다가 한 달 전이라면 아직 근근이 잡은 몬스터 부산물이 거래될 때였고 사람들도 꽤 많이 돌아다닐 때여서 마을은 오랜만에 축제 분위기였었다.

 

그 때 들어왔다가 지금껏 산에서 지냈나.’

 

던전에 들르는 자들은 대부분이 용병이었지만 간혹 마법사도 있었기 때문에 마법사나 소환사라면 날아서 들어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도 여관에 들러서 식사를 하거나 숙소를 해결하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 다니엘이 거는 살가운 대화를 거부하고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할 뿐이어서 아는 바가 없었다.

마법사라면 한달 정도는 그들만의 생존 루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다니엘은 빠르게 납득했다.

그렇다면 아까 빠른 몸놀림도 신속마법 비스무리한 것을 걸었으리라.

무엇보다 산에서 천년목이 있는 곳까지 넘어간 마물은 없었다.

긴장감이 확 풀렸다. 몬스터가 아닌 것에 내심 안도하며 일부러 문을 활짝 열었다.

 

세상이 흉흉해가지고 확인차 물어봤으요! 어서오십...”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천년목의 꽃을 보고 밀려들던 감동이 떠올랐다.

다니엘도 분명 뭇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던 사람들을 몇몇 본 적이 있었다.

제국에 잠깐 다녀올 때도 멀리서 황제의 반듯한 얼굴을 보고는 여성 팬이 많은 이유에 대해 즉각 인정했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있는 자는 이목구비의 뚜렷함이 반듯함을 넘어서 인간이 아닌 느낌을 주었다.

그의 칠흙같은 눈동자에 왠지 모를 반가움이 서려있었다.

 

사람 아닌거 아니가.’

 

잠깐의 의심은 천년목을 생각해내고는 바로 지워냈다.

묘하게 낯이 익은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사람 얼굴 외우는데 타고난 다니엘에게 그는 초면의 미남자였다.

그는 입을 헤 벌린 다니엘을 보고 싱긋 웃었다.

 

찾았다.”

 

다니엘은 그의 미소에 흠칫 놀란 나머지 그의 나직한 읖조림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잠깐이나마 넋을 놓은게 민망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손님이 들어올 수 있도록 얼른 입구를 터주었다.

 

아이고야, 손님을 밖에 세워뒀네. 얼른 들어오세요.”

 

네에 하며 그가 사뿐 들어서자 왠지 가게도 밝아진 것 같았다.

자꾸만 그에게 향하는 눈을 어쩔 수가 없어 과일가게 누님이 덤을 부른다며 칭찬해줬던 웃음을 지으며 제일 최근에 구입했던 식탁으로 안내했다.

성큼성큼 움직이는 다니엘과는 달리 따라오는 그의 몸가짐은 귀족의 그것과 비슷했는데 이것은 그가 마법사라는 추측에 힘을 실어줬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손님을 위해 다니엘은 바쁘게 부엌을 오갔다.

한동안은 손님이 없을 것 같아서 부엌에는 혼자 먹을 소박한 음식 재료들 뿐이었다.

 

요새 손님이 없어가, 식사할 수 있는게 별게 없어요. 빵 괜찮아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여전히 나긋한 목소리에 험한 산생활을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옷도 깨끗했다. . 마법인가.

대체 산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간단한 요깃거리로 빵을 꺼내어 테이블 세팅을 한 다니엘은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범한 귀족 마법사라면 불쾌해했을지도 모르는 무례였지만 이 남자는 태연하게 다니엘을 바라봤다.

그는 또렷한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눈길은 줄곧 음식을 준비하는 다니엘을 향했다.

다니엘은 그의 맞은 편에 앉아 그 눈을 마주하며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드세요. 내 특별히 식사비는 이야기로 받을게요.”

 

그 말에 싱긋 미소를 지은 그가 다정함이 배인 얼굴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낯선 이와 가만히 마주앉은 채 불편한 고요함이 이어졌다.

잠시의 미동도 없이 눈을 마주쳐오는 미남자로 인해 다니엘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느 순간 눈동자에서 살짝 푸른 기운이 스쳐간 것조차 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의 일부분으로 보였다.

그와 마주한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욱 거세지는 심장 소리와 땀 배인 손바닥, 그리고 이제는 불타는 듯 뜨거운 얼굴에 다니엘은 5년 전 장로 딸이었던 안나에게 얼떨결에 고백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때도 지금 같은 기분이었던가. 아니지. 지금이 더 심하게 긴장되는 것 같은데?!’

 

사실 그때는 쪽팔리다는 감정도 차지하고 있어서 정확히는 지금과 달랐다.

대체 왜 이 사람 앞에서 이렇게 고백이라도 할 것처럼 떨고 있는지 다니엘 자신도 도통 영문을 모를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새 그의 표정이 묘하게 뾰로통해져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 불편한 거 있으세요?”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그가 얼른 표정을 풀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야기를 원한다고 하셔서. 뭘 얘기해드려야할지 생각해보고 있었어요. 딱히 해드릴 수 있는 얘기가 많지 않아서

 

말을 흐리던 그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 저는 성우에요.”

 

민망했는지 머쓱하게 웃는 그가 귀여워서 덩달아 헤헤 웃음이 나왔다.

 

성우! 멋진 이름이네요. 이국적인 이름인데 여기 제국 사람은 아닌가봐요.”

 

다니엘은 그제야 자신의 차례라는 사실을 깨닫고 허둥지둥 살짝 떨며 자기소개를 했다.

 

아이고, 생각해보니까 저도 소개를 안했네요. 저는 다니엘입니다. 여기 여관 주인이고요.”

 

다니엘...이군요.”

 

곱씹듯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성우의 목소리에 괜스레 설렜다.

 

여 여관이 이 마을에서 제일 유명할건데 요새는 몬스터가 없어서 조용해요. 성우씨 묵을 거면 여기서 편안하게 있어요. VIP로 대접해드릴게요.”

 

허허 웃으며 고객유치를 위해 흔히 쓰던 영업멘트를 장난스럽게 건네자 성우가 따라서 개구지게 웃었다.

 

좋죠. 기대할게요.”

 

하핳. 기대까진 안되는데. 요새 물건도 잘 안들어와서대신 요새 여관 테마를 힐링으로 바꿔볼라구요. 몬스터 없는 아름다운 산을 안전하게 구경하세요! 어떻습니까?”

 

괜히 부끄러워져서 자조적으로 말했는데, 이 잘생긴 남자는 이해를 못했는지 순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힐링 좋아하는데. 그동안 몬스터가 너무 시끄러웠죠? 이제는 조용하니 괜찮아요.”

 

왠지 뿌듯해보이는 성우가 앞에 놓인 빵을 하나 집어 조그맣게 뜯었다.

다니엘은 성우의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면서 잘생기면 다 큰 남자가 먹는 모습도 귀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제국 다녀온 기념품으로 사온 뒤 아끼느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유리컵에 물을 따르며 말을 거들었다.

 

? 뭐 몬스터보다야 사람이 시끄러웠지요. 헌터니 용병이니 온갖 사람들 다 모여들어서 시끌벅적한 게 사람사는 맛이 있었는데... 이제 적어도 한동안은 못볼 광경인지라.”

 

느리지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다니엘도 출출해져 남은 빵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입으로 뜯어 우걱우걱 씹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성우는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어디갔는데요?”

 

다른 사냥터로 갔겠지요. 이제 여기는 몬스터가 없으니까 여기 있을 의미가 없긴 하죠 뭐.”

 

여상하게 대꾸하며 웃어보이자 성우가 다시 다니엘의 표정을 살펴보다가 긴장한 듯 물었다.

 

“...사람들이, 이제는 몬스터를 좋아하나요?”

 

이제는? 좋아한다기보다 먹고 살려면 잡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찾는 거죠 뭐.”

 

대답을 하다보니 다니엘 자신을 우울하게 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저도 장사하는 사람인지라. 요새 비상이거든요.”

 

왜요?”

 

사람들이 안오니 돈이 안되니까요.”

 

심각한 상황은 맞지만 걱정해주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더 눈꼬리를 내려보였다.

 

먹고 살려면 사람 많은 제국 땅으로 옮겨야 하나 싶기도 하고...”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다니엘은 방금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감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사과를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제국을 엄청나게 싫어하나.’

 

제국에 거부감을 지닌 사람들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성우는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울먹이고 있었다.

방금전까지의 나른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서 다니엘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울어요 왜. 아이고, 잘생긴 얼굴 사라진다.”

 

“...나 잘생겼어요?”

 

칭찬하면 되는구나.

울먹이는 와중에 잘생겼다는 말에 살짝 표정이 풀어졌다.

귀여워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내 이렇게 잘생긴 사람 본 적이 없어요. 최고 잘생겼어요, 성우씨.”

 

고마워요.”

 

기분이 좋아지는 듯 하더니 홍조를 살짝 띈 채 다시 울먹이며 물어온다.

 

어디로 가요? 다니엘. 정말 여기 떠날 거에요?”

 

아니 뭐, 지금 당장 가는 건 아니에요.성우씨는 묵고 싶은 만큼 있어도 돼요. 내 손님 버리고 갈 정도로 급하지는 않다.”

 

당황해서 반말이 나갔지만 성우는 개의치 않아보였다.

신경 쓸 겨를이 없어보일 정도로 풀이 죽어보여서 다니엘은 이 마을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싶어 사람들이 안오더라도 좀더 오래 머물러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니 나는, 사람들은 몬스터 무서워하는 줄 알아가지구너 원래...아니다! 방금은 못 들은 걸로 해요!”

 

울먹이다가 우물쭈물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해가 어려웠지만 다니엘은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

 

두근두근.

설렜다.

 

‘...설레다니. 니 이 남자한테 반한 거가.’

 

저도모르게 생각한 단어에 다니엘은 찬찬히 성우의 얼굴을 살폈다.

수심이 가득한 듯한 표정에는 왠지 미안함이 섞여있었지만 여전히 귀엽고 설레게 하는 얼굴이었다.

 

와 이 얼빠! ’

 

얼굴만 예쁘면 오래된 우정이고 이웃이고 상관안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성별도 상관없을 줄은 몰랐다.

 

손님한테 이래도 되는거가.’

 

다니엘?”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기분이 좋았다.

 

. 성우씨.”

 

다니엘은 계속 이 마을에 있었나요?”

 

그가 좀 진정된 듯 해보여서 코코아를 타주려고 일어서는데 질문이 들어왔다.

 

. 뭐 여행으로 겸사겸사 제국에도 다녀오기는 했는데, 그 외에는 계속 이 마을에 있었어요.”

 

, 그렇구나.”

 

토박이처럼 안보여요? 우리 가족들은 뭐 좋다고 제국가서 산다고 내만 놓고 나갔다.”

 

다행히 코코아 몇 잔은 탈 수 있을만큼 가루가 남아있었다.

머그잔이 대부분 조금씩 이가 빠져있어서 컵 사러 나가는 걸 미뤄왔던 자신을 조용히 타박했다.

 

같이 안갔네요?”

 

여관은 지켜야죠. 마을도 지키고. 제가 이래뵈도 마을 문지기에요.”

 

힛 웃으며 성우를 바라봤는데 성우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쁜건지 안타까운건지 도통 무슨 생각인지 모를 표정에 괜히 머쓱해졌다.

우유를 끓이며 더 말을 이어나갔다.

 

저 없으면 몬스터 잡으러 온 사람들 우째 먹고 살겠어요. 그리고...”

 

너무 말이 많았나 싶어 살짝 뜸을 들이며 성우와 눈을 마주쳤는데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요?”

 

...중요한 문제가 있어갖고.”

 

문제요?”

 

, 이건 비밀이에요.”

 

티 나게 시무룩해지는 모습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른 코코아를 내밀었다.

 

여기 코코아 드세요.”

 

, . 고맙습니다. 저 코코아 좋아해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풀죽은 표정이라 별 것 아닌데 괜히 숨겼나 싶어 말을 이어나갔다.

 

집 떠나면 이상하게 다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다들 그런 마음이 들기야 하겠지만 저는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해지고, 아이다. 그냥 제가 집돌이에요. 허헣.”

 

다니엘도 아리엘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제국에서 자리를 잡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마을을 떠나있는 내내 무언가를 놓고 온 듯 불편한 기분으로 지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몇 년을 제국에서 자리잡고 지내도 똑같았다.

그래서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대로 물려오는 여관을 운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냥 이 마을에서 평생 조용히 살아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것은 다니엘의 최대 컴플렉스였는데 주변에 고민을 털어놓아봤자 가벼운 놀림거리가 될 뿐,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앉아 코코아를 한 모금 후룩 마셨다.

성우는 코코아를 양 손으로 감싼 채 진지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괜히 귀가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어 애꿎은 코코아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이에요.”

 

귀티가 흐르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근데 뭐가 다행인거지?’

 

불쑥 드는 의문에 고개를 들자 그가 대답하듯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덕분에 다니엘을 만났잖아요.”

 

, 그쵸. 제국으로 갔으면 못 만났을 수도 있겠네요.”

 

제국을 싫어하는 듯한 사람이니 제국에서 일했다면 못 봤을 수도 있겠다.

이 사람을 만나려고 이 곳에 계속 있었나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에 푸훗 웃음이 나왔다.

 

진짜 다행이네요.”

 

마주보고 웃었다.

그러다 문득 눈을 휘며 기쁜 듯한 웃음이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저 웃는 얼굴을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본 듯이 머릿속에 본 적 없는 기억이 스쳐갔다.

 

성우씨 혹시 나 알아요?”

 

?”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랐는지 눈이 커졌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사실 다니엘은 둘이 만난 적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어떻게 잊나. 말도 안되지. 너무 좋으면 상상이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되네.’

 

민망해서 급하게 말을 흐렸다.

 

아니,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아서요. 내가 착각했나보다, 미안해요.”

 

순간, 자신이 한 말이 전형적인 촌스러운 집적 멘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 같아서는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고 싶어졌다.

다니엘은 성우의 코코아 잔이 비어있는 걸 힐끔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만 붉어진 채 말 없던 성우도 얼떨결에 따라 일어섰다.

 

방은 2층에 있어요. 내 지금 안내할테니 짐...은 없고, 바로 따라오세요.”

 

성우는 다니엘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서도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마음 속으로는 안절부절 못했지만 차마 변명할 거리가 없어서 잠자코 방으로 향했다.

다니엘은 주저없이 성우를 가장 크고 깨끗한 침실로 안내했다.

 

여가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방이다.”

 

뿌듯한 표정으로 소개하자 성우가 푸흐흐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러네. 고마워요.”

 

굳어있던 표정이 풀리자 다니엘도 한시름 놓였다.

환하게 웃으며 방을 둘러보는 성우를 보며 괜히 따라서 여기저기 점검하는 척 방 안을 따라 돌아다녔다.

방안을 다 둘러본 그의 다정한 눈을 마주치자 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여독에 피곤할 손님 방에서 나가지 않는 진상 주인이라니.

평소라면 손님한테 열쇠랑 방 호수 알려주고 그대로 올려보내고 끝이었을 테지만 지금만은 모른척 엉덩이를 침대에 걸쳐 앉아 노닥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여관 역사에 남을 마지막 손님일지도 모르는 저 잘생긴 손님을 위해,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옮겨 문고리를 잡았다.

성우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게 귀여워 살풋 웃으며 말했다.

 

내는 1층 부엌 옆에 있는 방에서 살고 있으니 언제든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성우는 머뭇머뭇 할 말이 있어보였지만 곧이어 네에 하고 힘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성우씨, 뭐 할 말 있어요?”

 

, 아니요...”

 

불편한 거 있으면 꼭 말해줘요. 나 바로바로 반영할 테니까.”

 

여전히 입을 뗄 생각을 안하는 성우를 보며 다시 말했다.

 

저는 성우씨가여기 있는 동안 푹 쉬고 만족했으면 좋겠어요.”

 

떠날 때까지.’

 

뒷 말은 왠지 하고 싶지 않아 속으로 삼켰다.

문을 살짝 닫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문득 그 동안 여관을 지나쳐 갔던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중에 다니엘과 애정의 기류가 흘렀던 사람도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이 마을이 그저 지나가는 길목일 뿐이라서, 딱 거기까지였다.

그 곳에 살고 있는 다니엘은,

 

문득 정신이 들어 눈을 떴다.

 

그냥 눈만 감았다가 뜬 것 같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다니엘을 감쌌다.

성우가 여관에 머문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고 다니엘은 내내 잠을 설쳤다.

그 원인은 성우였다.

첫 날 아침에 내려오자마자 쭈뼛쭈뼛 보석을 내밀어서 다니엘의 심장을 쿵쿵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게 나가겠다는 뜻이 아닌 것을 알고는 마지막 날에 나가기 전에 내면 된다고 알려주면서 철렁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이거 보석 품질이 엄청 좋네요. 이거 하나면 한달은, 아니 1년은 여기 있어도 되겠다.”

 

퉁 하고 말을 던지고서는 계속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이 전해졌을까 곁눈질했지만, 그는 그저 도로 돌려받은 보석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괴짜 손님들은 여러 종류의 물건으로 값을 치루는 터라 물건의 가치에 꽤나 정확한 편이었다.

그래서 성우가 내놓은 보석은 산전수전 다 겪어온 다니엘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누가봐도 훌륭한 세공이 되어 있었고 간혹 푸르스름한 기운이 일렁였다.

다니엘은 말로만 들었던 마법석이었다.

 

귀족같기는 했다만

 

마법석으로 숙박비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다니엘이 들어본 흔한 마법석의 가치로는 1년은 거뜬히 값을 치룰 정도였다.

게다가 요새처럼 비수기에는 몇 년은 더 있어도 되는 가치일텐데 더 길게 불러볼걸 그랬다.

후회가 한숨으로 새어나오는 바람에 보석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며 시무룩해진 성우를 눈치채지 못했다.

 

성우의 일주일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성우는 아침 식사를 하고 다니엘과 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다.

여관으로 돌아와서는 점심식사를 하고 다니엘이 가르쳐주는 공놀이를 좀 하다가 돌아와 낮잠을 잤다.

그 후로는 저녁을 무엇을 먹을지 다니엘과 토론을 한 후, 저녁 준비를 도왔다.

, 일주일 내내 다니엘 옆에 꼭 붙어 지냈다.

 

그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주로 다니엘에 대한 것이었다.

다니엘의 과거에 대해서 또는 현재에 대해서도 자주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럴 때마다 다니엘은 자신에 대해 숨김없이 풀어보였다.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성우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 언제나 끝은 분노였다.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얼간이.

다니엘은 자신을 조소했다.

그럴 때마다 성우는 다니엘이 화를 삭히고 다른 화제를 꺼낼 때까지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다니엘도 성우만큼 궁금한 것이 많았고 그 때마다 물어봤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웃고 넘어가거나 뭉뚱그려 엉뚱한 대답으로 넘어갔다.

성우는 대신 지금의 자신이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것,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는 순수할 정도로 솔직하게 표현해왔다.

일주일이 흐르고 밤이 되어 평소처럼 다니엘이 이부자리를 봐준 후 나가려는데 갑자기 손목이 잡혔다.

 

...왜요?”

 

“...다니엘.”

 

잠시 잡았던 손목을 힘없이 놓아버리고는 지그시 눈을 맞춰왔다.

다니엘은 평소답지 않은 성우의 조용한 모습에 당황했다.

 

성우형, 왜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요.”

 

머뭇거리는 모습에 왠지 들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을 때쯤 성우가 무겁게 입을 뗐다.

 

“..., 내일 떠나려구.”

 

 

갑작스러웠다.

 

일주일이었구나.’

 

그 동안 내내 붙어있던 순간들이 너무 짧게만 느껴졌다.

이곳에서 보낼 시간이 일주일 뿐이라고 진작에 알려줬으면 이렇게 마음주지 않았을텐데.

울컥하는 마음에 성우를 노려봤다.

너무 아쉽다고, 다음에 언제 올거냐고, 마음은 올곧게 표현 못해도 평소 손님들한테 하듯이 영업멘트에 마음 한자락 담아 보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우는 울고 있었다.

 

다니엘.”

 

“...왜 울어요 대체.”

 

다니엘.”

 

그만 울어요. 사람 마음 심란하다.”

 

다니엘. 미안해.”

 

“...미안할 거 없다. 또 보면 되는 거지. 다시 안 올 사람처럼 그러지 마요.”

 

눈물만 뚝뚝 흘리는 성우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속없이 말을 꺼내고서는 더 옆에 있다가는 같이 울어버릴 것 같아 방으로 내려와 누웠다.

성우의 눈물이 점점이 찍혔던 나무바닥이 생각났다.

살짝 빨개진 코 끝조차 예쁜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질끈 감아버렸다.

미안하다는 것은 내가 호감을 가진 걸 눈치채서였을까.

결국 고백도 못하고 차인건가.

성우는 다시 다니엘의 여관을 찾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다고 할 때 태연한 척 웃었어야 했는데...너무 티를 내서 그런거야.’

 

자책하며 눈물을 흘리던 성우를 떠올렸다.

우는 모습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자꾸만 또다른 성우의 우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처음 성우를 봤을 때 느꼈던 기시감이 반복됐다.

옷이나 공간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으나 성우만이 처연하게 우는 모습만 그대로였다.

심지어 그런 성우를 낯선 모습을 한 자신이 안아서 달래고 있었다.

다니엘 자신이 보인 적은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성우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에, 나는 그대로인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떡해?”

 

다니엘은 그게 무슨 말이냐 묻고 싶어 입을 움직였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달랐다.

 

그럴 리가. 지금도 계속 반하고 있어.”

 

입에서 나온 상냥한 목소리는 다니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게 나라면 성우한테 반하지 않을 리가 없어. 날 믿어줘.”

 

성우가 가볍게 입술을 댔다.

응답하듯 다니엘은 여느 연인이 하듯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조금 진정이 된 듯 걱정스러운 말투로 성우가 중얼거렸다.

 

, 널 찾을 수 있을까.”

 

그러게. 빨리 찾아야 더 오래 사랑할 수 있을텐데.”

 

만약에시간이 다 되기 전에 널 못 찾으면 어떡하지?”

 

성우의 울먹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곧 다시 확신에 찬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성우야.”

 

?”

 

그럼 내가 항상 같은 장소에서 널 기다릴게.”

 

그 말에 성우가 푸스스 웃었다.

 

말도 안돼. ‘지만 더이상 니

너의 의지를 잇는 사람이 아니야.”

 

아니야. 할 수 있어. 니가 바로 찾을 수 있도록 그 곳에서 기다릴게.”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난 기다릴거야. 그 곳에서.”

 

다니엘은 몇 번이고 다른 모습으로 성우를 만났다.

그 때마다 성우는 미래를 기약하며 떠났다.

 

눈을 떴다.

이번에는 무언가 크게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다니엘은 여전히 성우에게 반했지만 성우와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다.

성우는 어제 수많은 다니엘에게 하지 않았던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다니엘은 빠르게 몸을 일으켜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급하게 방문을 열었다.

방에는 첫날 성우가 내밀었던 보석만 덩그러니 탁자 위에 올려져 있고 성우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작정 보석을 집어들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밖에서도 성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성우의 존재가 꿈처럼 느껴지는 게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처음에 성우가 천년목이 꽃을 피웠을 때 산으로 갔다고 했었다.

천년목을 향해 뛰었다.

뛰어서 숨이 차오르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자꾸만 얼굴이 젖어오는 게 느껴졌다.

천년목은 꽃 없이 푸르른 거대한 나무 그대로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성우가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쥐었던 주먹을 펴 보니 성우가 남긴 보석이 처음보다 더 강하게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보석을 감싼 빛무리가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다니엘은 바로 짐을 간단하게 꾸려서 여관을 나섰다.

보석의 빛은 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니엘은 미련없이 산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