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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세상의 끝을 그대에게

- w. Bluming

 

 

 

 

 

 

 

 

 

“K, 이번 임무 끝나면 중앙 센터로 복귀해. 지성이형이 찾아.”

 

라져

 

하늘이 파랗다. 히어로센터 소속의 센티넬 강다니엘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눈으로 좇았다. 큰 사건사고 없이 잘 돌아가는 세상을 알고 있는지 구름도 함께 천천히 움직였다. 5년 전 발생했던 히어로와 빌런의 큰 충돌 이후, 결과적으로 히어로들이 승리하여 빌런들은 그 종적을 완전히 감추었다. 다니엘의 연인과 함께.

다니엘의 연인, 옹성우는 빌런이었다. 본래의 부드러운 성정으로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해 직접 전투 현장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는 빌런 조직 내에서도 꽤 높은 등급의 치유계열 능력자로, 현장에서 한 발 물러서 지휘와 서포트를 주로 맡았다. 저들로 인해 깊게 상처 입은 센티넬을 몰래 치유해주기도 했다. 물론 치료할 수 있는 건 육안으로 보이는 외상뿐이었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센티넬들에게는 되려 외상 치유가 더욱 도움이 되었다.

다니엘과 성우의 만남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반 시민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던 악질 빌런을 제압하기 위해 신체강화 및 괴력 능력의 강다니엘과 순간이동 능력의 김재환이 투입되었다. 무고한 시민의 생명에 위협이 가해졌기 때문에 다니엘과 재환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 둘을 대신하여 인질극을 끝낸 사람은 바로 성우였다.

 

미안해요.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어제 가이딩을 충분히 못 받았더니 정신이 없었나봐요. 이번 한 번은 조용히 넘어가는게 어때요?”

 

히어로센터 소속 센티넬 K입니다. 신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는 없으며, 현재 빌런과 접촉한 상태인 이상 정해진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면 센터로 즉시 이송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미안해요, 이 친구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다음번에 또 만날 수 있을거에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성우의 말을 끝으로 다니엘과 재환이 목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제길, 뒤를 돌아볼 생각을 못했군.

 

다니엘이 정신을 차리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회복실의 천장이었다. 머리가 아파 눈을 찌푸리며 뜨자 하얀 가운을 입은 민현과 대휘가 보였다.

 

다니엘형, 괜찮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시민들이 신고했어. 비상 호출기도 사용 안한 것 같던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시민은 안전하나

 

안그래도 방금 센터에서 조사를 끝냈어. 인질로 붙잡혔던 시민이 당시 기억이 하나도 없대. 빌런 쪽에서 정신조종으로 기억을 삭제한 것 같아. 아니아니, 이거말구. 형은 어떻게 된거냐구. 능력을 쓴 것도 아니고, 맞아서 쓰러진 거면 외상이 있어야 하는데 흔적도 전혀 없구. 정신계열 쪽 능력하고 접촉한 흔적도 없어. 설마 피곤해서 그냥 잔거야?”

 

아이다. 내도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는데. 김재화이는?”

 

재환이는 지성이형한테 불려갔어. 너보다 한 시간 정도 먼저 정신 차렸는데, 눈 뜨자마자 지성이형이 데려가서 아직까지 안왔고. 너도 지성이형한테 가봐. 일어나면 자기 사무실로 보내달라고 하더라.”

 

자리에서 일어나 수트를 가볍게 정리하고 지성의 사무실 앞에 선 다니엘은 무의식적으로 목 뒤를 쓸었다. 쓰러진 후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시원한 소나무 향이 약하지만 코끝에 남아있었다. 이기 어떻게 된기가.

 

노크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가 재환의 옆에 앉았다.

 

재환이한테서 상황은 대충 들었어. 인질로 잡혔던 시민은 당시 기억을 전혀 못하고. 정신계열 센티넬 보내서 분석해봤는데, 정신조작 흔적이 느껴진다고 하더라. 어떻게 된건지 기억 나는거 있니?”

 

목 뒤쪽을 가격당해서 쓰러졌다는 것 뒤로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너희도 임무 많이 나가봤으니까 알지? 목 뒤를 쳐서 기절시키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고, 보통 타격당한 부위에 타박상이 남는 편이지. 그런데 너희 둘 목 뒤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어. 가능성은 두 가지야. 첫 번째, 정신계열 능력을 가진 빌런이 너희의 기억을 조작한 경우. 하지만 너희 둘 중 누구에게도 기억조작의 흔적은 없어. 두 번째, 치유계열의 빌런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센티넬들을 치유한 경우. 너희를 반죽여놔도 모자란데, 거기에다가 치유까지? 말이 안되기는 하지만, 지금 유일한 가능성은 이거밖에 없는 것 같은데. 너희 생각은 어때?”

 

“...면목 없습니다.”

 

다니엘과 재환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괜찮아. 회복하자마자 와서 피곤할텐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뭔가 알아내면 민현이나 대휘 통해서 알려줄게. 고생했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지성의 사무실을 뒤로 한 다니엘과 재환은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놈의 호출기가 붉은 빛을 깜빡거리며 울리기 전까지는.

 

비상사태 발생. 비상사태 발생.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비상사태 발생. 센터 내 모든 센티넬 및 가이드들은 모두 센터베이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하이고.. 오늘 무슨 날이가...”

 

침대에서 기절한 듯 잠들은 다니엘이 부스스해진 머리를 겨우 정리하며 센터베이스로 향했다. 다니엘이 거의 마지막으로 도착한 듯 이미 센터베이스는 센티넬과 가이드로 가득했다.

 

안녕하십니까. 히어로센터 부센터장 윤지성입니다. 현재 A구역에 빌런 무리가 대거 침입하였습니다. 센터 내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시다시피 A구역은 국가의 중요인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며, 밀집되어 있는 일반 시민의 수도 상당합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빌런의 수는 약 100명 정도이며, 현장 밖에서 서포트하고 있는 가이드들과 빌런측 연구원들의 수를 합치면 얼마가 될지는 예상 불가능합니다. 빌런들은 대부분 공격 계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요주의 인물들은 현재 배부해 드린 프로파일 목록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앞쪽에 위치한 스크린에 올라오는 이름을 선두 그룹으로 하여 특별 대응팀을 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해당하는 센티넬과 가이드들은 즉시 준비해주시고...”

 

안그래도 뒷목을 강타당한 충격으로 머리가 울리는데, 여기에 심각한 빌런 이야기까지 더해지니 다니엘의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갈피를 잃고 휘청거리는 몸을 뒤늦게 센터베이스에 도착한 재환이 잡았다.

 

야야, 강다. 우리 가야돼. 우리 이름도 있어. 너 대응팀 리드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준비하고 나와.”

 

웅웅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제복을 갖춰 입고 나오자 가장 선두에서 전투를 진행할 제1대응팀이 모여있었다.

 

“S급 신체강화 및 괴력 능력의 센티넬 K입니다. 오늘 제1대응팀의 리드를 맡게 되었으며,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센티넬 여러분들의 협조 부탁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소지하고 계신 통신기와 호출기는 임무가 완벽하게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탈착하실 수 없으며, 아주 작은 사항이라도 제게 즉각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헬기에서 내려 불바다가 된 A구역의 이질적인 모습을 마주했을 때에는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다니엘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는 본인의 약한 모습에 팀은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니엘을 선두로 걸어 나오는 센티넬군에 빌런들의 기세는 잠시 사그라드는 듯 했다.

 

히어로센터 소속 센티넬 K. 너희는 지금 무고한 시민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고 있으며, 이에 자동적으로 우리 히어로들은 더 심각한 상황을 막기 위해 즉시 사살까지의 대응을 할 수 있다. 너희가 여기서 멈춘다면 강압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더 지속된다면 너희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도 여기 오기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멈출 생각은 없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싸운다.”

 

빌런의 수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니엘의 말을 끊었다. 수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전보다 더 날뛰기 시작하는 빌런들의 능력이 보였다.

 

“...1대응팀, 공격 개시.”

 

주변이 불바다가 된 채로 센티넬과 빌런이 충돌했다. 이미 수많은 시뮬레이션 전투로 위급 상황에 능숙한 센티넬들은 각자의 능력으로 최대한의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빌런을 찾아 빠르게 전투에 임했다. 오직 다니엘만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게 멈춰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 숨을 쉴 수 없어 컥컥대는 기침소리. 찢긴 살덩어리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피. 일반 사람이라면 차마 눈을 뜨고 있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다니엘은 무표정으로 한 곳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없이 처참한 장면들 속에서도 곧게 서있는 한 남자. 직접 뛰어들어 싸우지 않고 비통한 표정으로 전투 중인 센티넬과 빌런을 바라보고 있던 성우와 다니엘의 눈이 마주쳤다. 성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니엘은 뒷목을 강타당해 기절한 날 이후부터 끊임없이 코끝에서 맴도는 소나무 향이 한층 짙어졌음을 느꼈다.

 

“...그쪽입니까?”

 

“...”

 

인질극이 벌어졌던 날, 나와 내 동료에게 치유 능력을 사용한게 당신이냐고 묻고 있잖아.”

 

“...그렇다면?”

 

왜 그런건지 이유나 들어보게. 너희 입장에서는 센티넬이 한 명이라도 더 죽어야 이득 아닌가?”

 

물리적인 해를 가하지 않고 있는 빌런을 자극하는 것은 센티넬의 금기 사항 중 하나였다. 다니엘은 국가 소속 센티넬에게 있어서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금기를 어기고 성우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네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면 어떨 것 같아?”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국가 소속 히어로센터 신체강화 및 괴력 S급 센티넬 강다니엘,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정부가 너희에게 내리는 명령이 모두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왜 항상 사람들은 센티넬은 선량한 시민들의 편이고, 빌런은 해악을 끼치는 존재라고만 생각하는거지? 너희들은 센티넬이 될 수 있는 우리가 어째서 빌런이 되었는지 알지 못하잖아. 센티넬과 빌런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데? 너희가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 있는 국가는 너희에게 숨기는 것들이 너무 많아. 너희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패는 드러내지 않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국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면서 평생을 보내고 싶은게 아니라면, 나를 찾아. 기억해. 내 이름은 성우, 옹성우야.”

 

그게 무슨...!”

 

다니엘이 반문하려는 순간 성우가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볼펜의 버튼을 누르고, 딸깍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전투 현장 곳곳에 숨겨져 있던 연막탄이 터졌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안개는 다니엘을 무장해제 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미 누적된 피로로 인해 무릎이 꺾이며 쓰러진 다니엘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나아가지도 않지만 물러서지도 않아. 우리의 처음에서 기다릴게. 다시 널 볼 수 있기를 바라.”

 

다시 눈을 뜬 다니엘이 가장 먼저 본 것은 회복실의 천장이었다. 꽤 오랜 시간 기절해 있었던 듯 몸이 한결 가벼웠다. 갑작스러운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니 텔레비전 뉴스 채널이 눈에 띄었다. 뉴스 화면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대 옆 간이의자에는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니엘이 회복실을 나서기 위해 문 가까이에 다가섰을 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반대편으로부터 들려왔다.

 

“...강다니엘 요원 상태는 어떤가.”

 

지속적인 임무로 인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현재 3일 째 기절 중입니다만, 심박수를 포함한 내부 기관들은 조금씩 제 기능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이번 전투에서 유일하게 강다니엘 요원만 멀쩡히 돌아왔다고 들었네. 설마 빌런측과 내통하고 있는 것은 아니길 바라네. 혹시라도 그런 낌새가 보이면 바로 보고해주었으면 좋겠군.”

 

센터장님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강다니엘 요원은 오랜 시간동안 최정예 센티넬로 활동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 혹시 이번 전투에서 정신조작을 당한 B급 센티넬을 기억하십니까? 일전에 센터장님께서 직접 판단하시겠다고 해서 본부로 넘겼었는데요.”

 

전기 계열 센티넬을 말하는 것인가? 그 친구,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더군. 고치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 상태가 엉망이 되었어. 오늘 안으로 처리할 계획이네.”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분명 정신 분석만 하고 다시 이쪽으로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제 동의도 없이 처리라뇨! 약간의 휴식 기간을 주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이미 끝났네. 일단 정신계열 능력과 접촉하게 되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어. 그럴 바에는 그냥 싹부터 잘라내는 것이 맞아. 센터 내 요원들에게는 해당 센티넬이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고 공지하게. 센터 안에서의 내분은 치명적이라는 거, 지성군도 알고 있지 않나.”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센터장님! 이건 사람이 할 짓이..!”

 

.. 내가 결정한 일이 아니네! 국가에 보고했더니 모든 조사 결과를 영구 폐기하고 즉각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른 것뿐이야! 나도 조사 결과를 열람할 수조차 없었네!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게나.”

 

센터장과 지성의 대화를 듣던 다니엘은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저게 다 무슨 소리고. 국가가.. 국가 소속의 센티넬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니.

 

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기고 나서 다니엘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임무에서 복귀한 후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목욕을 하고 제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다니엘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센터를 나왔다. 혼란스러웠다. 세상이 완전히 뒤집혀, 그 안에서 다니엘은 끊임없이 곤두박질치고 있을 뿐이었다.

 

너희가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 있는 국가는 너희에게 숨기는 것들이 너무 많아. 너희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패는 드러내지 않지.

 

“.....성우

 

성우가 떠올랐다. 자신의 적에게 치유 능력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다니엘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던 그 빌런. 성우를 찾으면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니엘이 미처 자각하기도 전에 두 다리는 3일 전 센티넬과 빌런의 충돌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A구역은 평소와 같았다. 아니, 전에는 없었던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많은 부상자를 냈던 센티넬과 빌런 사이의 치열했던 전투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다니엘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한 번도 주의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센티넬과 빌런이 충돌한 장소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상황에 없었더라면 사건이 발생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문득 회복실에서 본 텔레비전 뉴스 보도가 생각났다. 한 구역을 황폐화시킬 정도로 강력했던 사고가 발생한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뉴스에서는 그 사건과 관련된 일말의 언급도 없었다. 다니엘이 국가 소속 히어로센터 센티넬로 활동하면서, 지금까지 뉴스에는 센티넬과 빌런이 충돌한 사건사고가 나왔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왜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걸까.

 

‘...빌런과 관련된 모든 사건을 국민들에게 노출시키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결국은 국가인 거가.’

 

순간 다니엘의 걸음이 멈췄다. 성우와 대치했던 자리였다. 연막탄이 터지고 다니엘이 쓰러졌을 때 성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의 처음에서 기다릴게. 다니엘은 망설임없이 인질극이 벌어져 성우와 처음 마주했던 장소로 향했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몰랐으나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장소는 한 공원의 분수대 앞이었다. 많은 시민들이 가족들과 함께 산책을 위해 찾는 장소였다. 땅거미가 내리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걷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인질극을 벌였던 빌런과 성우는 애초에 인질을 죽일 생각이 아예 없었던 듯 했다. 성우가 데려간 빌런은 아무런 흉기를 들고 있지 않았으며, 다니엘과 재환이 현장에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모습을 보인 성우의 등장이 의도성을 띄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인질을 잡아 센티넬을 협박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를 택했을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다니엘과 접촉하기 위한 성우의 잔꾀였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분수대 주변에서 성우는 고사하고 성우와 비슷한 체격의 남성조차 찾지 못한 다니엘은 센터로 복귀하기 전에 해 지는 것을 보기 위해 분수대 뒤 쪽의 탁 트인 잔디밭으로 걸어갔다. 평소 일출과 일몰을 보는 것을 즐기는 다니엘이었다. 잔디밭의 중앙에 자리를 잡은 다니엘은 그대로 드러누웠다. 눈앞에 펼쳐진 주홍색의 노을이 아름다웠다. 풀잎 향을 가득 머금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안녕?”

 

히익, 뭐고!”

 

눈을 감자마자 귀 바로 옆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다니엘은 귀를 부여잡고 그대로 자리에서 튀어올랐다.

 

다니엘 사투리 쓰네? 저번에 서울말 쓸 때 억양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부산 사람이었구나? 내가 아는 동생 중에 우진이라고 있는데. 우진이도 부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구. 사투리 쓰는 거 보니까 멋있어 보여서 열심히 배워봤는데, 너무 어렵더라. 결국은 실패했어.”

 

성우였다. 자연스럽게 다니엘의 옆에 앉아 노을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조잘대는 성우는 빌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예뻤다. 센터에서 교육받았던 대로 빌런에 대한 온갖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다니엘이었다. 빌런들은 일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날 때부터 폭력적인 성격을 띤다는 사회적인 통념을 일정 부분 인정했던 다니엘에게 있어서 성우는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였다. 검은 색의 바지와 티셔츠 한 장에 머리를 차분하게 내린 일상적인 모습이었지만, 환하게 웃으며 다니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성우의 모습에 다니엘은 귀로 열이 오름을 느꼈다. 분명히 빨개졌을 터였다.

 

그래서 다니엘은 나 찾으러 여기까지 온거야?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네? 너무 기뻐!”

 

“...할 말이 뭐가.”

 

에이, 왜 이렇게 급해. 어차피 일도 없잖아. 다니엘, 배 안고파? 우리 맛있는거 먹으러 갈까?”

 

배 안고픈데.”

 

그러면 카페? 난 카라멜 마키아토 좋아해! 아메리카노는 써서 못마시겠더라구. 다니엘은 어떤...”

 

!! 할 말이 뭐가!!”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성우 탓에 다니엘의 마음이 점점 편해지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성우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었다. 다니엘을 한 인격체로서 대해주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자신은 빌런으로부터 국가를 지켜야하는 센티넬이었기 때문에. 감히 성우를 궁금해 할 수도, 마음을 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람으로서 대해준 성우에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절없이 빠져들 것만 같았다. 다니엘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성우의 표정은 서글퍼졌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깊은 정적이었다.

 

“...다니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벌어졌던 인질극 기억나지? 그 후로 인질이었던 시민 찾아가봤니?”

 

“...”

 

많이 바쁘더라도 꼭 한번 찾아가봐.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알게 될 거야. 미안, 너무 쓸데없는 얘기밖에 안했네. 다음에 만날 때에는 이렇게 평화롭지 않겠지만, 그 때까지 다치지 말고 잘 있어. 안녕.”

 

그리고 성우는 사라졌다. 아니, 사실 지고 있는 붉은 해를 등지고 천천히 걸어갔으니 사라졌다는 표현과는 맞지 않았지만, 적어도 다니엘은 성우가 자신으로부터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성우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그나마 남아있던 어스름도 걷어지고 적막한 어둠만이 다니엘의 곁을 맴돌았다. 쏟아져 내리듯 흐르던 햇빛 대신에 성우를 닮아 잔잔한 달빛을 바라보며 다니엘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성우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그러면 어지러운 자신의 마음도 정리되지 않을까, 하고 다니엘이 생각했다.

 

, 민현이형, 내다. 저번에 인질극, 그때 인질로 잡혔던 시민 주소 좀 문자로 찍어도.”

 

무슨 일이야, 다니엘?

 

그냥.. 내 좀 확인해보고 싶은게 생깄다. 부탁 좀 하께.”

 

평소 큰 전투 후에 다니엘은 매일같이 발작을 일으키며 잠에서 깼다. 자신으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의 절규 소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잠에 쉽게 들지 못해 매일을 뜬 눈으로 지새우던 다니엘의 옆에 있어줬던 사람이 바로 재환과 민현이었다. 두 사람 때문에 센터에 남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니엘이 두 사람에게 의지하는 정도는 매우 컸다.

 

A구역 ○○아파트 121210. 재환이랑 치킨 시켜놓고 기다릴게. 다녀와서 보자.

 

민현의 문자를 확인하고, 다니엘은 공원 옆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로 걸음을 옮겼다. 12층을 향하는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를 들으니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감이 좋은 다니엘의 예상은 빗나갔던 적이 없었다. 분명히 자신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똑똑.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히어로센터 소속 센티넬 K입니다. 잠시 여쭤볼 게 있는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무엇인가가 교묘하게 어긋난 느낌이었다. 애초에 센티넬이 일반 시민의 집에 방문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사건 조사를 위해 센티넬이 집을 찾아오게 되면 인터폰 너머로도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을 생각해 볼 때, 이 집도 비슷한 반응이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다니엘에게 잠시 기다리라 말한 집주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마치 언젠가는 올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왔다는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다니엘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니엘을 맞이한 것은,

 

짜악-

 

귀를 울리는 파열음이었다. 신체강화 능력을 소지한 다니엘이었기에 고통은 없었지만, 일순간 다니엘의 정신이 멍해졌다. 뭐지, 맞은건가. 왜 맞았지. 뭘 잘못했나. 소속도 밝혔고 얼굴도 보였는데.

 

너네가 어디라고 여길 찾아와!!!”

 

돌아간 고개로 인해 드러난 귀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혔다. 좋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다니엘이 상황 파악을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여자는 현관을 지나지도 못한 채 오열하며 다니엘을 때렸다. 자신들을 보호하는 센티넬을 이렇게 대하는 시민은 본 적이 없었다. 필시 사연이 있을 터였다. 인내심이 그렇게 강하지 못한 다니엘은 무력을 써서라도 이 짜증나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눈앞의 사람을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옹성우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야만 했기 때문에.

 

잠깐..잠시만요. 일단 진정하세요.”

 

손에 약간의 힘을 실어 여자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괴력 능력 특유의 힘이 자신의 손목에 닿자, 여자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제발 놓으란 말이야!!”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여자가 쓰러졌다. 순식간이었다. S급 센티넬로써 능력을 제어하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던 다니엘이었다. 그런 자신이 힘을 조절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여기에서 더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일단은 시민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다니엘은 호출기를 꺼냈다.

 

여기는 K. 들리면 응답하라.”

 

, 다니엘. 어디야? 치킨 다 식겠다.”

 

햄아. 여기 문제가 좀 생깄는데. 와줄 수 있나. 김재환도 같이.”

 

“..아까 보내준 주소로 가면 되는거지? 재환이 순간이동 사용할게.”

 

호출기를 통해 들려온 목소리가 끊기자마자 재환과 민현이 눈앞에 나타났다.

 

, 치킨 다 식었어. 우리가 특별히 니 좋아하는 허니멜로 시켜놨... 이건 무슨 상황임...?”

 

다니엘의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며 재환은 딸꾹질을 했고 민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혼자 울다 쓰러졌다. 내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가..”

 

일단 들어가자. 여기 있다간 다른 시민들 눈에 띄겠어.”

 

다니엘이 쓰러진 여자를 안아들고, 민현이 앞장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리된 일반적인 집이었다. 눈을 돌리면 보이는 액자 속 사진이 꽤나 오래된 듯 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거실의 소파에 여자를 내려두고 다니엘은 재환에게 말했다.

 

니 이 남자 기억나나.”

 

다니엘은 소파 옆 한 남자와 여자가 환하게 웃고있는 사진을 가르켰다.

 

? 이 남자 그 사람 아니야? 우리 인질극 때 인질로 잡혔던 사람! 너 쓰러져 있을 때 조사받다가 너 일어나고 나서 귀가조치 시켰었는데. 근데 왜 집에 안 계심?”

 

이상한데. 다니엘이 민현을 바라봤고, 민현 역시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일단 돌아가자. 나머지는 가서 얘기하고.”

 

재환의 능력으로 센터 내 민현의 사무실에 도착한 세 사람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치킨을 테이블의 한 구석에 밀어두었다,

 

“..미안한데 사실 난 뭐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거든..? 누구 나한테 설명 좀 해줄 사람...?”

 

재환의 말에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사진. 보고 이상한 생각 안들었나.”

 

, 사진이 왜? 사진 속에서도 그냥 엄청 화목해보였는데?”

 

도통 이해를 하지 못하고 되묻는 재환에게 민현이 대답했다.

 

사진이 많았어, 재환아. 아주 많았어. 이렇게 많은 액자들에 둘러싸여서 살다가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액자들로 가득했어. 우리가 보통 말하는 것처럼 사진은 추억이지. 그 추억이 나쁜 추억이든, 기쁜 추억이든 그 당시를 회상하게 해주는 힘이 있어. 주변의 소중한 사람이 어딘가로 장시간 출장을 간다고 생각해보자. 너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 없어. 그러다가 생각하겠지. ,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둘걸. 그러면 보면서 그리워할 수라도 있는데. 정신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주변에 사진을 많이 두고 산다는 건, 잃어버린 사람을 그리워하기 때문이야. 사진이 당시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추억을 되살려 주니까. 이제 좀 이해가 되니?”

 

그럼 남자가 오랜 시간 집을 비웠다거나 그런건가?”

 

“..죽었을 수도 있고.”

 

다니엘의 나직한 마지막 말에 민현과 재환이 다니엘을 돌아봤다.

 

왜 그렇게 생각해, 다니엘?”

 

딱히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자신 역시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입구의 신발장부터 시작하여 눈을 어지럽게 할 정도로 늘어져있던 액자들이 이상했다. 사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집 안에 들어서면서부터 관찰한 내부에는 그 어디에도 남자의 흔적은 없었다. 신발장에도 여성용 신발뿐이었고, 실내화도 한 켤레만 놓여있었으며, 무엇보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던 식탁용 의자가 단 하나였다. 사진 속의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 남아 그 흔적을 쫓고 있는 것이었다.

 

인질극 당시에는 죽지 않았던 거 확실하지?”

 

당연하죠, . 그 사람 마지막으로 본 게 센터장님 사무실이었어요.”

 

민현의 물음에 재환이 대답했다. 순간 다니엘의 머릿속으로 자신이 쓰러졌을 당시 문 밖에서 들려오던 센터장과 지성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 궁금한게 있는데, 좀 알아봐 줄 수 있나. 인질이었던 사람 신상하고 지금은 뭐하고 있는지 필요하다. 혹시 저번에 센터 왔을 때 정신계열 센티넬하고 접촉한 적 있는지도 같이.”

 

잠시만 기댜려.”

 

민현이 노트북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재환은 피곤한 듯한 얼굴로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근데 너 갑자기 거기는 왜 갔냐? 갑자기 센터 비운 것도 이상하고, 그 집은 또 왜 찾아가? 센티넬이 갑작스럽게 찾아가면 시민들 당황하는거 알면서.”

 

“..옹성우가 찾아가라 카든데.”

 

“..? 옹성우? 내가 아는 그 옹성우? 빌런? 인질극 벌인 그 새끼?”

 

새끼 아이다! 언제 만났다고 말 함부로 하노?”

 

오케오케, 새끼 아니라고 하자. 도대체 언제 만났는데? 빌런하고 접촉하면 무조건 센터에 알려야 되는거 몰라? 너 요즘에 일 많이 하더니 드디어 돌았냐?”

 

그런거 아이다..”

 

다니엘의 머릿속이 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환은 다니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짜피 숨겨봤자 금방 들통날 터였다.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나중에 처참한 모습으로 들킬 바에야 지금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만난지 오래된 거는 아이고... 아까 공원에서 만났다. 내 혼자 해지는거 보는거 좋다 안했나. 공원 언덕 쪽에서 해지는 거만 보고가려고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옆에 목소리가 들리맹키로.. 놀래서 봤더니 옹성우였디.”

 

“.... 진짜 대박. 그 정도면 옹성우가 너 기다린거 아님? 이야, 강다니엘 이새끼. 얘도 위험하네. 너 숨겨진 빌런이라던가, 그딴거 아니지?”

 

아이다! 내 진짜 오늘 처음 봤다 안카나! 그리고 옹성우는...”

 

노트북을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민현으로 인해 다니엘의 말이 멈췄다. 매사에 차분하고 감정을 억누르는 능력이 탁월한 민현에게서 처음 보는 굳은 얼굴이었다. 다니엘과 재환이 있는 쪽으로 노트북을 밀어주며 민현이 말했다.

 

다니엘이 부탁한 대로 검색을 좀 해봤어. 그런데.. 뭔가가 이상해. 검색 결과가 없어. 출생신고, 혼인신고, 의료기록, 하다못해 보험까지. 국가 기반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시민이 죽었더라도 사망신고 기록이 남아있어야 되는데, 정말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 너무 깨끗해.”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해요...?”

 

민현의 말에 혈색이 없어진 재환이 물었다. 옆에 앉은 다니엘의 표정 또한 혼란스러워졌다.

 

이렇게 되면 다니엘의 가설이 맞았다고 밖에 할 수 없어. 이 정도로 정보가 없다는 건.. 존재 자체를 지운거야. 그리고 국가 기반 데이터를 지울 수 있는건...”

 

“..국가밖에 없지.”

 

끊어진 민현의 말을 다니엘이 완성시켰다. 그 문장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알고 있는 세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울리며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다니엘의 상태를 눈치 챈 민현이 말했다.

 

우선은 각자 방으로 가자. 쉬면서 생각 좀 정리하고 다시 만나는게 좋을 것 같아. 너희 둘 스케줄 조정해서 한동안 쉴 수 있도록 할게. 절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돼. 국가 소속 센티넬이 반국가적 성향을 가지게 되면, 상관에 의해 즉시 사살이야. 기억해.”

 

사무실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다니엘은 걸음을 멈췄다. 존재 자체가 지워졌다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어째서 그랬던 것인지, 그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지금 다니엘이 가지고 있는 국가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니엘은 걸음을 돌려 재환의 방으로 향했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니엘은 익숙하게 재환의 방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불도 켜지 않고 어둠 속에 앉아있기를 몇 분. 문이 열리며 틈새로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왁 씨!! 깜짝이야!! 강다? 뭐하냐, 거기서? 안그래도 니 덕분에 머리가 복잡해서 일찍 죽을 거 같은데, 계속 이렇게 생명 단축시킬래?”

 

우리 다시 가보자.”

 

? 어딜 가? 나 힘들어, 난 쉴래. 너 혼자 가. 안녕~”

 

다시 가봐야겠다. 좀 도와도. 이대로는 확실한 증거가 없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에휴, 내가 친구를 잘못 둔 탓이다. 가자, . 어디가 가고 싶은데?”

 

아까 거기. 인질로 잡혔던 시민 집.”

 

결국은 다니엘에게 져줄 수밖에 없는 재환이었다. 서로가 하는 일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곧 다니엘과 재환을 둘러싼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재환의 순간이동 능력이 발동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깜빡임 후에 다니엘과 재환은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사진이 담겨있는 액자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사람을 천천히 올려보았다. 다시 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한 눈빛이었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여자가 말을 시작했다.

 

제 남편이 인질로 잡혔던 다음 날, 아침에 멀쩡히 출근했던 남편이 퇴근시간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회사 동료에게 전화를 해봤는데 오늘 점심시간 이후부터 보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경찰서에 신고도 해보고, 아는 지인들에게도 모두 연락해봤지만 아무도 모른다고 했고, 그렇게 행방이 묘연한 채로 3일이 흘렀어요. 집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도 지쳐서 직접 남편 회사로 찾아갔죠. 제가 도착했을 때 남편 책상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어요. 그 순간 너무 무서워서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어요. 몇 분 동안 울면서 멍하니 앉아있으니 남편의 상사가 저에게 말하더군요. 회장님께서 뵙고 싶어 한다고. 지금 회장실로 올라가보라고. 회장님을 독대하고 앉으니 우선 저를 위로하셨어요. 상심이 클거라고, 자기도 다 이해한다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동안 울었던 탓에 목이 잠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가만히 듣는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죠.”

 

목이 잠기는지 쇳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던 재환이 탁자 위에 올려져있던 물컵을 건넸다. 겉으로 봐도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겨우 물을 마신 여자가 말을 이었다.

 

“..오랜 시간 취조를 당했대요. 빌런과 내통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정부에서 남편을 잡아갔어요. 제 남편이 원래 심장병이 있어요. 정신 고문을 당하던 중에 갑자기 심장발작이 찾아왔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제 남편의 기록을 지워버렸어요.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회사로도 정부측 고위급 간부가 찾아와 제 남편의 자리를 신속히 비우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타 지부로 발령받았다고 공지하라고 했다고... 원래는 제게도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고 했대요. 국가에서 알아서 사고사로 처리하겠다고.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는지 모르겠어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앨범에 있던 제 남편의 사진을 전부 꺼내놓았어요. 이제 제가 남편을 기억하지 않으면, 정말 그는 없던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니까요. 그러기에는.. 그 사람이 너무 열심히 살았으니까... 그래서...”

 

겨우 말을 이어가던 여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알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더 말하려는 여자를 저지시킨 다니엘과 재환은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센터로 돌아왔다.

 

“...우리 너무 엄청난 걸 들어버린 것 같지 않니, 친구야?”

 

재환의 물음에 다니엘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재환에게 쉬고 싶다고 말한 다니엘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자신은 국가를 위해 일했다. 이른 나이에 센티넬로 발현된 다니엘은 유아 시절을 모두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자라왔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의구심은 가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이 수업시간에 배웠던 국가는 항상 정의로웠고, 빌런은 항상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이 처음 배웠던 것은 빌런이 나쁘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빌런이 나쁜 것인지는 배운 기억이 없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성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목소리가 떠오르니, 지는 해를 등지며 환하게 웃던 성우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뺨에 예쁘게 박혀있던 별자리를 연상시키는 세 개의 점이 그리웠다. 답답함을 느끼던 다니엘의 눈이 감겼고,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호출기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붉은 빛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뜬 다니엘이 호출기를 집어 올렸다. 위태롭게 깜빡거리는 모습이 자신과 닮은 것 같다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센터베이스는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조용했다. 단상 위에 서있는 지성 옆에 위치한 스크린에서는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다. 프레임을 보아하니 교통정보수집용 카메라인 듯 했다. 원래대로라면 평화로운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이 보여야 했지만, 지금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불바다가 된 도시의 모습이었다.

 

지금부터 국가 비상 체제 모드로 돌입합니다. 여러 빌런 무리가 연합하여 도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파악된 세력 규모는 저희 히어로센터와 맞먹으며, 현재 빌런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이곳. 히어로센터입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어떻게 빌런 따위가 센티넬 센터를,,,

 

따라서 저희는 저번 빌런 공격에 대응했던 방식과 동일하게 대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최전방 공격팀 리드, S급 센티넬 강다니엘 요원을 중심으로 신속히 출정 준비를 해주시기 바라며 국가와 사회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출정 준비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검은색의 쓰리피스 제복을 걸치고 검은색 가죽장갑을 끼며 헬기에 오른 다니엘은 불바다가 된 도시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제 익숙해져버린 토기를 애써 삼키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를 헤집어놓고 있는 빌런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니엘은 헬기 위의 센티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지만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해질 것 같다 예상되면 최대한 빨리 안정적인 루트를 파악하고 대피하십시오. 다음 만남이 센터에서의 만남이기를 기약합니다. 최전방 공격팀, 공격 개시.”

 

헬기가 착륙함과 동시에 땅이 흔들리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사이를 뚫고 걸어나오는 장신의 남성 모습이 빌런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금색의 머리를 넘기고 검은색의 제복을 입은 다니엘의 모습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너희는 국가의 보호를 받고있는 지역을 무단 침입한 것도 모자라 무고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이에 우리 국가 소속 센티넬은 빌런을 제압할 의무가 있으며, 지금부터 발생하는 모든 사고는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겨 그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을 것을 미리 알린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지금이라도 투항하고 돌아간다면 의미없는 살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의 말에 빌런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빌런측 리드의 결정을 기다리는 듯 했다.

 

“...애초에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싸움이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우리는 계속해서 싸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구슬이 굴러가듯 청아하지만 힘 있게 퍼져나가는 목소리. 직접 전투 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수많은 빌런들의 뒤에 서 있는 사람. 성우였다.

 

“...옹성우

 

“..안녕, 다니엘. 우리 결국은 이렇게 만나네.”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다. 센티넬과 빌런이 맞붙어 피가 웅덩이를 이루었고, 타는 냄새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 싸움터의 중앙에서 다니엘은 고고히 서있는 성우를 바라보았다. 싸움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빌런들을 리드하는 성우는 직접 능력을 펼치지 않아도 그 위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느껴지는 기운부터가 일반 빌런들과는 달랐다. 순간 전쟁터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자신이,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싸움에서 한 발 멀어져 있는 성우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때, 다니엘? 네가 바라던 끝은 이런 거였니?”

 

“...원하는기 뭐가.”

 

나와 함께 가자. 너에게 세상의 끝을 보여줄게.”

 

대가는?”

 

지금 이 의미없고 희생만이 가득한 싸움의 종결.”

 

성우가 다니엘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피를 뒤집어쓴 다니엘과는 다르게 피 한 방울 튀기지 않은 하얀 셔츠를 입은 성우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 무엇보다도 간절하게. 지금의 다니엘에게는, 해답을 알려줄 이가 필요했다.

성우를 향해 홀린 듯이 걸어가는 다니엘의 주변으로 푸른색의 막이 씌어졌다. 성우를 닮은 청량한 소나무 향이 다니엘의 몸에 퍼졌다. 온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다니엘은 성우의 손을 잡았다.

 

잘 왔어, 다니엘. 이제 함께하자.”

 

귓가에 느껴지는 성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니엘의 정신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주 깊게,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