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월간녤옹

 

 

 

 

 

 

낮은 분명 따뜻했는데 저녁 때의 날은 약간 싸늘했다. 개강 첫 달, 어김없이 술 약속이 잡힌 성우는 가디건과 저지를 두고 고민 중이었다. 성우의 (나름 철두철미한) 패션 철학에 따르자면, 가디건은 예쁜 옷에 속했고 저지는 편한 옷에 속했다. 간단하게 술 마시는 건데 굳이 예쁜 옷을 입고 갈 필요는 없겠지. 이 가디건은 예쁘긴 하지만 별로 따뜻하지도 않고, 술이나 안주를 흘리면 빨기도 귀찮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성우가 저지를 막 걸쳤을 때였다.

 

책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또 한 번 징징 울렸다. 아까부터 간헐적으로 울리던 카톡 알림을 옷 고른다고 몇 번 씹었더니 이젠 아주 전화를 건 모양이다. 보나마나 민성이겠지, 참을성 없는 놈. 성우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폰을 집었다가 발신인을 확인하곤 곧장 울상이 되었다.

 

, 얘는 왜 맨날.”

 

다행스럽게도 성우가 망연자실한 동안 전화는 곧 끊어졌다. 대신 카톡이 와다다 쏟아졌다. 성우는 잠금 화면에서만 스크롤을 내려 카톡 무더기를 확인했다. 맨 위에는 [저 지금 나가요!] 하는 말이, 맨 아래에는 [형 민성이 형이랑 술 마신다면서요] 하는 카톡이 숨어 있었다. 성우는 한숨을 쉬고 카톡을 열었다. 성우가 뭘 입력하기도 전에 [저 민성이 형 만나서 들어왔어요! 먼저 시킬게요! ㅋㅋ] 하는 말이 도착했다. 성우는 기계적으로 [~ 나 좀 늦어] 하고 답장하고는, 저지를 벗고 아까 넣어 둔 가디건을 꺼냈다. 서랍 안에서는 드라이기랑 동그란 롤빗도 함께 나왔다. 성우는 예쁜 옷을 입고 울상이 된 채 머리를 쉼표 모양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원래 짝사랑이란 그런 거였다.

 

 

 

 

 

 

 

어느 동상이몽의 밤

익명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다듬고 말끔해진 성우가 약속 장소였던 술집에 도착했을 땐 약속 시간보다도 한 시간이 넘은 시점이었다. 뭘 퍼마신 건지 벌써부터 벌겋게 취한 민성 외에도, 지나가다 붙들렸을 게 분명한 동기 두어 명과 빙글빙글 웃고 있는 강다니엘. 다니엘은 성우가 술집 문을 연 그 순간부터 팔을 붕붕대고 있었다.

 

! 여 앉아요.”

 

탁탁 두들긴 옆 자리에 성우가 착석하자마자 다니엘이 부산을 떨며 수저며 술잔을 챙겨 줬다.

 

넌 무슨. 소개팅 하러 왔냐?”

 

민성이 술을 따르며 핀잔을 줬다. 성우는 대충 넘기려고 했지만 정말 민성의 말마따나 훌륭한 소개팅 차림이었던 탓에 술이 오른 동기들이 번갈아 한 마디씩을 얹었다. 이참에 진짜 소개 좀 받으라고 핀잔을 준다거나, 지난번에 소개받았던 걔랑은 어떻게 됐냐고 묻거나, 형 마음에 든다던 애도 주변에서 술 마시고 있는데 부를까요? 하는 등 진담 반 농담 반의 얘기들.

 

됐어, 하고 말하면서 성우는 흘긋 옆 자리 다니엘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걔는 다섯 명 치 소맥을 새로 만드는 데 집중하느라 성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둔하기 짝이 없는 놈. 성우는 한숨을 내쉬며 다니엘표 소맥 잔을 받아들었다.

 

술이 들어갈수록 흥이 올라야 했는데 성우의 기분만 한도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사실 원래 이 자리는, 성우가 다니엘을 향한 제 짝사랑을 민성에게 고백하기 위한 자리였다. 민성은 재수학원 때부터 친하게 지낸 동기였고, 드물게 제 친구들 중에서는 다니엘과도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으니까. 다니엘을 좋아한다고 털어놓았을 때 과연 민성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 수 없었으나 어떤 식으로든 속은 후련할 것 같았다. 성우의 운이 좋다면 민성이 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가령 이 눈치 없고 둔한 스무 살 애를 몰래 붙들고 성우에 대한 마음을 떠본다거나. 등등.

 

그러나 다니엘은 정말 눈치라고는 개나 줘 버렸고 술은 또 어마무시하게 좋아해서. 성우가 민성을 불러내 술이나 마실까 하면 귀신같이 알고는 애교를 부려대며 술자리에 합석하는 거다.

 

처음엔 하도 제 술자리마다 찾아와 끼어들길래 얘가 나를 좋아해서 이러나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의 오해를 지나고 과 애들의 숙덕거림을 다 엿들은 후에 성우는 알게 되었다. 강다니엘은 그냥 술을 존나 좋아하는 놈일 뿐이었음을. 강다니엘은 자기 별명을 당당하게 강고기라고 소개하곤 했지만 실상 뒤에서 다니엘을 부르는 말은 잭다였다. 잭다니엘의 줄임말이었다.

 

성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술잔을 들었다. 다니엘은 술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소맥은 왜 이렇게 못 말지? 반쯤 비운 잔을 내려놓고 얼굴을 찌푸리자 옆자리 다니엘의 다정한 손이 뺨에 닿았다 떨어진다.

 

왜요, 맛없나?”

 

그럴 리가 없는데. 혼잣말로 그러더니 제 남은 잔을 가져가 홀랑 비우고는 입맛을 쩍쩍 다신다.

 

괘않은데.”

 

뺨에 닿았던 손이 이번에는 성우의 허벅지로 내려앉는다. 가볍게 떨고 있던 다리가 긴장으로 굳고, 군데군데가 찢어진 청바지 위로 손의 뜨끈한 온기가 느껴진다.

 

얘는 진짜 왜 이럴까. 성우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

 

웃기게도 그 다음부터는 술이 급속도로 맛있어졌다. 속이 상해서인지 아니면 소맥을 민성이 말기 시작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민성은 어디 회사의 영업부 신입인 제 형이 배워왔다는 비율로 소맥을 말아주었는데, 뒤늦게야 이게 사실은 거래처 죽이고 집에 빨리 가고 싶을 때 쓰는 비율이랬다는 걸 털어놓았다.

 

덕분에 테이블의 거의 대부분이 (심지어 한 놈은 기숙사 통금을 핑계로 도망쳤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성우는 제가 다니엘에게 반쯤 기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다니엘의 손이 계속 제 허벅지 위에 있었다. 민성은 정체가 모호한 소맥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었고, 민성 옆의 동기는 헤실헤실 웃으며 오징어튀김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긴장과 술 때문에 성우는 다소 피곤해져서, 눈이 간헐적으로 끔뻑여졌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다.

 

아주우. 연애를 해라, 둘이.”

 

연애라는 말에 반짝 정신이 든 성우가 실눈을 뜨자 걔가 오징어 튀김으로 저와 다니엘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징어 다리가 시계추처럼 저와 다니엘을 번갈아 왔다갔다 했다.

 

뭐라카노. 니 벌써 취했나.”

 

실상 이 테이블에선 다니엘만 취하지 않은 꼴이었지만 성우는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저런 말에 대답해 줄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다니엘이 뭐라고 대꾸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성우는 다시 눈을 감고, 취했다는 핑계로 기대볼 수 있는 다니엘의 너른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댔다. 다니엘이 제 머리를 만져주는 게 느껴졌다.

 

니때매 성우형 깼다아이가.”

 

잔 적 없는데. 성우가 속으로만 생각했다. 제가 눈을 감은 지 20분이나 지난 건 알지도 못했다. 성우는 다만 다니엘의 손이 제 머리를 지나 어깨를 토닥거리는 게 좋았다.

 

지랄 났다. 어차피 갈라면 깨워야 되거든? 둘이 맨날 그러고 붙어있으니까 둘 다 연애도 못하고 맨날 술이나 퍼먹지. 얼굴이 아깝다 등신아.”

 

이 건방진 새끼가 어디 우리 니엘이한테 등신이라고 하는 거야?

 

이게 미칫나. 술이나 무라.”

아니이, 내가 진짜 아까워서 그런다니까? 형이야 내가 안 친해서 잘 모르지만, 너 그때 걔 고백도 씹고 이번에 과팅도 안 나간다 그랬대매. , 니 나이가 아깝지도 않냐?”

 

그때 걔가 누구야? 과팅은 무슨 소리고? 그리고 나이가 아깝긴 뭐가 아까워? 쪼꼬만 게. 누가 들으면 지는 서른 살인 줄 알겠네. 성우가 (여전히) 속으로 궁시렁댔다.

 

아깝기야 아깝지.”

 

?

 

그럼 소개라도 받을래? 너 맨날 형이랑 이러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너네 둘 사귀는 줄 알어, 인마.”

됐다, . 술이나 마시라. 어디 가서 이상한 소리 하고 다니지 말고. 우리는 거의 형제다, 형제.”

 

형제는 씨발. 아무 것도 안 했는데 혼자 차인 기분을 느끼며 성우가 눈을 떴다. 다니엘은 여전히 제 어깨를 쓸어내리는 중이었고, 제 앞의 동기는 오징어다리를 흔드는 중이었다. 동기랑 먼저 눈을 마주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더니 다니엘이 호들갑을 떨며 아이고 형 깼어요?’ 하는 소리를 했다.

 

나 안 잤어.”

아이고, 맞나. 그냥 눈 감고 있었나.”

.”

삼십 분 동안?”

 

삼십 분? 성우가 아연하여 핸드폰을 켰다. 시계는 거의 1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성우가 으아아 하는 소리를 내는 걸 보며 다니엘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가요, . 늦었다. 그리고 니는 민성이 형 쫌 깨워라.”

나 더 마실 수 있는데.”

형은 더 마실 수 있어도 민성이 형이 완전 맛 갔어요. 민성이 형 보내야죠.”

 

다니엘이 테이블에 엎드린 민성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쟨 언제 저렇게 된 거지? 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성우의 눌린 머리를 만져 주고, 성우를 일으켜 옷매무새도 정리해 주었다. 우리는 거의 형제다, 형제.’ 다니엘의 말이 성우의 머릿속을 좀 이상하게 맴돌았다. 그러니까 지가, 형 포지션이라는 건가?

 

안 가요?”

 

잠깐 멍해진 얼굴의 성우 앞에서 다니엘이 손으로 딱 소리를 냈다. 아냐, 형도 아니고 애완동물 주인 포지션이네. 성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테이블을 와장창 엎고 넘어졌다.

 

/

 

다섯, 어쩌면 넷이 마신 게 소주병만 열댓 병이 넘어갔다. 단순 나누기로 계산해도 인당 세 병은 되는데 자리를 차지한다고 치운 맥주병들까지 대면 얼마나 될지 몰랐다. 성우의 주량은 한 병 반에서 두 병을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었으므로 다리가 풀리는 게 당연했다. 성우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다니엘이 제 몸에 묻은 술이며 물이며 유리컵의 깨진 잔해들을 털어주는 손길을 받고 있었다. 아까 그 동기 애는 잠깐 우왕좌왕하다가 민성을 업고 먼저 가버린 뒤였다.

 

다니엘.”

?”

미안.”

 

성우는 미안했다. 테이블을 엎어 다니엘이 뒷처리를 하게 한 것도, 형이 되어서는 동생한테 이런저런 보살핌을 받는 것도 쪽팔리고 미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니엘을 좋아하는 게 미안했다. 이렇게 착하고 잘 해주는 동생한테 무슨 이상한 흑심을 품고 다니는 건지. 나랑 완전 형제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사심 없고 눈치 없고 술 좋아하는 강다니엘. 예쁜 제 가디건은 맥주와 소주와 물로 엉망이었다. 다니엘은 가디건의 자락을 잡고 물티슈를 박박 문대고 있었다. 얼룩이 소매를 타고 번졌다.

 

이상한 소리를 하노. 별게 다 미안하다. 미안하면 담에 또 나랑 술 먹어요.”

 

이 꼴을 보고도 나랑 또 술을 마시고 싶니?

 

너 진짜 술 좋아한다.”

 

그러자 다니엘이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술에 하나도 취하지 않은 하얗고 말랑말랑한 얼굴이었다. 성우는 취한 몸으로 다니엘의 볼을 꼬집었다. 미안한데 얄밉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아얏 하고 칭얼대다가,

 

, 이건 안 되겠다. 내가 빨아다 줄게요.”

 

하고 가디건을 포기했다. 그리고는 쪼그린 자세 그대로 등을 돌렸다.

 

업혀요.”

?”

넘어지는 거 보니까 안 되겠다. 업혀요. 무릎 갈려가꼬 병원 가기 싫으면.”

 

성우는 여전히 미안해하면서 다니엘의 등에 폴싹 업혔다. 미안하고 쪽팔리고 또 미안하고 그런데, 그래도 얘를 안 좋아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니엘이 뭐라 말하는 걸 듣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

 

 

형 자요?”

 

한참 헛소리를 하던 성우가 갑자기 조용해지자, 다니엘이 조심조심 물었다.

 

안 자.”

 

목이랑 귀 사이 어디쯤에서 성우가 웅얼댔다. 자는가보네, 혼자 픽 웃은 다니엘은 곧 제 등에 얼굴을 부비작대며 꼼질거리고 있는 성우를 느끼고 몸이 우뚝 굳었다. , 왜 또 이러노, 진짜.

 

미치겠다.

왜 이렇게 사람이 무방비하지.

 

옹성우는 맨날 그랬다. 아무 데나 기대고, 손을 잘 타고, 잠깐이라도 눈을 뗄 수가 없게 맹하고. 지금도 저니까 다행이지 민성이 형이나 원재였으면 어쩔라고 이러는 거냐고. 성우를 업고 있는 건 자기가 분명한데 온갖 경우의 수를 헤아리다 보면 절로 입이 바짝 말랐다.

 

다니엘은, 처음엔 성우 형이 저를 좋아해서 이러나 싶었다. 예쁘게 말하고, 밤에 불쑥 전화를 걸고, 취해서 제 어깨에 기대 잠들고 하는 것들. 이 형이 내를 좋아하나?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성우 형은 원래 이쁘게 말했고, 카톡보다 전화를 편하게 생각했고, 술에 취하면 늘 졸려했다. 지하철에서도 구석 자리에 앉으면 기어코 손잡이에 기대 잠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걸 알자마자 실망스러웠다. 성우 형이 저한테만 이쁘게 말하고, 저한테만 전화를 하고, 저한테만 기대서 잤으면 싶었다. 망했네, 우예 그러지.

 

그건 진짜 어려운 일이었다. 성우는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친구 많기야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제 주변의 사람들과 성우 형 주변의 사람들은 뭔가 결이 달랐다. 그러니까 다 성우한테 흑심이 있어 보였다. 성우랑 재수학원을 같이 다녔다는 민성이 형과 예진이 누나, 성우 형 웃기다고 따라다니는 동기들, 우리 동아리 들어오라고 밥 사주는 선배들, 심지어 강의 끝나고 굳이 커피 한 잔 하는 교수님들까지 모조리 다니엘의 경계 대상이었다.

 

어떻게 하면 성우 형이 나만좋아해주지? 다니엘은 엄청나게 고민했지만 그는 원래도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다. 살면서 유일하게 가져본 운과 눈치는 대입 때 다 써먹은 뒤였다. 다니엘은 도저히 성우 형이 저를 좋아하게 만들 방법, 저만 좋아하게 만들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성우 형 옆에 맨날 찰싹 붙어 있기를 택했다. 안 그러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성우의 술자리를 따라다니느라 술이 늘었다. 하도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 옹성우 술자리를 다 따라다니려면 일주일에 칠일도 모자랐다. 원체도 무방비한 사람이 술까지 들어가면 아주 흐물흐물 워터젤리가 따로 없었다. 취하기는 왜 그렇게 잘 취하고, 아무데서나 잠은 왜 그렇게 잘 자고, 왜 그렇게 스스럼없이 굴고 그러는 거냐고.

 

형 자요?”

안 잔다니깐.”

 

팔이 다니엘의 목을 더 깊숙이 감았다.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다니엘은 제가 아니었으면 원재가 성우 형을 업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자 대상 없는 화가 났다. 씨발, 걘 눈치도 없이 오란다고 진짜 오냐고. 성우 형 온대서 그런 게 틀림없었다. 다시는 끼워주나 봐라.

 

형은 그래도 내랑 제일 친하죠?”

으응.”

내밖에 없다, 맞제.”

알겠다궁.”

 

뿌듯함을 느끼며 다니엘도 성우를 들쳐 업은 손에 힘을 줬다. 원재는 우리가 불렀으니까 그렇다 치고, 민성이 형은 뭐 할라고 성우 형이랑 단둘이 만날라 한 거지? 진짜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다니엘은 언제나 민성을 싫어했다. 오직 그가 성우와 같은 재수학원을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하굣길에 민성이 성우와 통화를 하는 걸 듣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위해 두 시간동안 민성 근처를 서성이며 술 마시고 싶다는 소리를 흘렸던 것이다. 제가 이러지 않았으면 성우 형이랑 민성이 형 둘이서만 술을 마셨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근데 성우 형 오늘 왜 이렇게 이쁘게 하고 나온 거지? 진짜 소개팅이라도 갔다 온 거 아이가? 늦게 온 것도 그렇고 쉼표머리에 잘 안 입던 옷들 다 꺼내 입고 나오고. 아무래도 담에 물어봐야겠다.

 

, 형네 집 머니까 그냥 우리 집 갈게요?”

으응.”

 

이미 자기 집 쪽으로 반이나 왔으면서 다니엘이 괜히 물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살자고 하고 싶었다. 원래 같이 살던 룸메가 나가게 되면서 방은 혼자 살기에 불필요할 정도로 넓어졌다. 거기에 옹성우만 갖다 놓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성우 형 집은 학교에서도 멀고 비싼 거 치고는 좋지도 않고. 우리 집이 우리집이면 진짜 좋겠는데. 다니엘은 괜히 같이 살자고 했다가 제 새까만 흑심을 들킬까봐 성우에게 같이 살자고 말해 본 적도 없으면서 혹시나 같이 살게 되는 일이 생길까봐 다른 룸메를 들이지도 못했다. 공연히 월세만 배로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성우가 등에다 대고 또 뭐라 중얼거렸으나 다니엘은 사색에 잠겨 걷느라 알아채지 못한 상태였다. 성우 형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지. 성우 형을 독점하기는 왜 이렇게 힘들지. 너무 아무나한테 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또 열린 사람이라, 오히려 반대로 좋아한다는 얘기를 하면 곧장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좋아하는 티를 안 낸다고 생각했는데 눈치 빠른 애들은 따로 다니엘을 추궁하기도 했다. 아까의 김원재처럼. 제 대답은 구차하기 그지없었다. , 형제?

 

형제는 씨발.

 

우리집이었으면 하는 제 집 현관에서 다니엘은 성우를 잠깐 내려놓았다. 성우가 졸린 눈을 비볐다. 잠만 기다려요, 하고 주머니를 뒤져 빌라 카드 키를 꺼내는데 나오지가 않아 바지 주머니며 외투 주머니를 다 뒤집어야 했다. 고생 끝에 문을 여는 뒤로는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 뭐 해요?”

, 하늘이 예뻐서.”

 

쪼그려 앉은 성우가 키득대며 밤하늘을 찍고 있었다. 사진이 취미인 건 알고 있었지만 취해서 이러는 건 처음 봤다. 귀여워, 생각하면서 동시에 다니엘은 성우를 업고 집에 온 게 자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또 했다. 씨발, 만약에 성우 형을 데꼬 온 게 민성이 형이었으면. 이 귀여운 걸.

 

너도 찍었당.”

내를 왜 찍어요.”

 

귀여워.

 

다니엘이 이를 악물고 다시 등을 내밀었다. 성우가 핸드폰을 든 손을 쭉 뻗은 채로 업혔다. 빌라 현관에서 다니엘의 집까지는 금방이다. 금방 수준도 아니고 그냥 엘리베이터 한 번 타고 내려서 네 걸음 정도 걸으면 된다. 그래도 그 쪼끔을 더 붙어 있겠답시고 다니엘은 성우를 업었다. 성우가 자기를 믿고 이렇게 막 업히는 게 좋았다.

 

담에 술 먹을 때도 나 꼭 불러야 돼요.”

알겠다구 했잖아. 니엘이 너 진짜 술 좋아하네. 그러다 간 아파진다?”

 

술 아니고 형 좋아하는 건데요. 그리고 아픈 건 간 아니고 마음이라고요. 다니엘이 생각했다.

 

/

 

방에 들어와서는 불도 안 켜고 성우부터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 나서야 뒤늦게 성우의 가디건이 더럽다는 게 생각났다. 침대가 더러워질 게 걱정이 아니라 성우가 더럽게 자게 될 까봐 걱정이었다. , 씻고 잘래요? 성우는 싫은 표정을 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조심 가디건을 벗기는데 소매에서 손을 빼낼 때 데구르르 침대 아래로 뭔가 떨어졌다. 성우는 다니엘이 챙겨 준 옷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고, 다니엘은 떨어진 걸 주우려고 몸을 구부렸다.

 

어라? 성우의 핸드폰이었다.

 

아까 사진 찍고 그냥 계속 쥐고 있었나보네.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줍던 다니엘은 갑자기 아주 조금, 그가 찍었다는 제 사진이 궁금해졌다. 뭘 찍은 건지, 왜 찍은 건지, 어떻게 찍혔는지. 물론 남의 핸드폰을 보는 건 나쁜 일이었지만 내 사진만 몰래 보고 다른 건 하나도 안 건드릴 거니까. 다니엘은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성우의 핸드폰을 켜 갤러리 어플 아이콘을 눌렀다.

 

그러니까 성우는 무방비했고 되게 숨기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핸드폰에조차 비밀번호 하나 안 걸어뒀고, 다니엘은 성우의 자취방 비밀번호며 본가 현관의 비밀번호까지 다 알았다. 통장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려고 하기에 형 아무데서나 이러면 안 돼요 하고 넘긴 적도 있었다.

 

그런데.

 

갤러리 자체엔 별 게 없었다. 카메라 롤, 사진 필터 앱 폴더, 다운로드 폴더 정도. 다니엘은 필터 앱에서 밤하늘과 조명 받은 학교 본관을 배경으로 한 제 사진을 발견했다. 뭐 이런 걸 다 찍노, 했지만 필름 카메라로 찍은 옛날 사진 느낌도 났고 구름 낀 밤하늘이 퍽 멋있긴 했다. 내일 이 사진 보내달라고 해야지. 이렇게 생각할 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괜찮았다. 그런데.

 

그런데 딱 하나, 하트 모양 이모티콘으로 이름이 지정된 폴더가 있었던 거다. 썸네일이 까만 색이었다. 다니엘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나쁜 걸 알면서도 그 폴더를 눌렀다. [비밀번호 입력]이 뜬 갤러리 폴더를 보자 뭔가 또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더니 아주 순식간에 쿵쾅쿵쾅하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건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는 형이 처음으로 숨긴 것이었다.

 

? 다니엘은 술에 취해 놓고 간 성우의 핸드폰을 몇 번 갖다 준 일이 있었다. 성우는 카톡에조차 비밀번호를 안 걸어 두어서, 카톡 내용이 다니엘에게까지 다 보였다. 형은 폰에 비밀번호도 안 걸어요? 했더니 볼 것도 없는데 뭘, 했던 게 지난 주였다. ? 이게 뭔데 잠가 둔 거지? 뭘 숨기는 거지? 왜 숨기는 거지?

 

나쁘다, 생각하면서도 다니엘은 손을 벌벌 떨면서 성우의 집 비밀번호를 눌러 보았다. 틀렸다는 메시지가 떴다. 다니엘은 성우의 본가 비밀번호도 눌러 보았다. 역시 아니었다. 심장이 계속 쿵쾅거렸다. 성우 형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제가 그걸 보려고 이렇게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충격이었다. 내 진짜 나쁘다, 생각하면서 다니엘은 정말정말 마지막으로 성우 형의 생일도 눌러 보았다. 여전히 잠금은 해제되지 않았다. 마침 화장실의 물소리도 끊겨, 다니엘은 그의 핸드폰을 얌전히 침대 머리맡에 돌려놓았다.

 

보송하게 씻고 나온 성우 형에게 이불까지 잘 덮어 재우고는 다니엘은 바닥에 누워서 한참동안 잠이 들지 못했다. 형에게 숨기는 게 있다는 충격이랑 그걸 헤쳐 보려고 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사실 별 게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쨌거나 그건 하트 모양 이모티콘으로 정리해 둘 만큼 중요한 것이었고 성우가 좋아하는 것이었고 저는 모르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괴로움으로 몸을 뒤척였다. 내가 나빠, 하는 생각이 반이었고 그래도 궁금하다, 하는 생각이 반이었다. 그러나 원래 짝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

 

 

씻고 나와 조금 정신이 든 성우는 다니엘이 침대 아래 누운 것을 확인하고는 이불 안에 폭 숨었다. 다니엘은 바닥에서 아무 말도 없이 고요하게 숨만 내뱉고 있었다. , 쪽팔려. 미치겠네. 술을 쏟고 다니엘에게 업혔던 건 기억이 났는데 다니엘의 집까지 온 과정이 희미했다. 민성이랑 원재는 잘 들어갔나? 머리맡을 더듬었더니 다행스럽게도 핸드폰이 있었다. 핸드폰을 잃어버리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성우가 홈 버튼을 눌렀다.

 

, 이게 뭐야.

 

홈 버튼을 누르자 제일 먼저 뜬 게 갤러리였다. 왜지? 했는데 기억이 안 나는 사진이 카메라 롤 제일 앞에 있어서 성우는 입을 틀어막고 기겁했다. 아마 장소는 다니엘의 집 앞, 문을 열고 있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몰래 찍은 거였다. 오늘 다니엘의 착장은 하필이면 성우의 취향에 딱 맞게 예뻤고, 내심 저 예쁜 모습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이렇게 몰래 찍을 생각은 없었는데. 도대체 이건 언제 찍은 거지? 다니엘은 모르겠지? 성우는 혀를 깨물었다.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동시에 칭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울고 싶은 마음으로 성우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을 꾹 눌러서 폴더로 이동시켰다. 다니엘이 환하게 웃으며 저한테 브이를 하거나, 술자리에서 어쩌다 둘만 찍힌 사진들이 대여섯 장 모여 있는 폴더였다. 몰래 남의 사진을 모으고 있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며, 민성에게 연락하려던 건 까맣게 잊은 성우가 핸드폰을 껐다. 뿌듯함과 죄책감이 동시에 드는 건 나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도로 머리맡에 두고 성우는 슬쩍 침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니엘은 침대를 향해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바닥 불편할 텐데. 성우는 다니엘이 누운 편을 바라보고 이불을 껴안았다.

 

곧 방은 조용한 숨소리로 가득 찼다. 사실은 둘 다 잠들지 못했고, 방의 공기는 짝사랑 중인 각자의 자책으로 한없이 무거웠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사랑받고 싶은 두 명 분의 마음이 끝도 모르게 복잡했다. 원래 짝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아마, 짝사랑이 끝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짝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