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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DOM  

청바지

 

 

 

 

 

 

 

 

 

돔의 중심부는 두께가 얇았다. 바깥에서의 충돌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돔은 무너진다. 그리고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은 저곳이 될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돔의 몰락. 그건 멸망을 의미했다. 무언가,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장마였다. 빗방울이 돔에 부딪혀 무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비가 내린다! 누군가 외쳤다. 성우는 하던 일을 멈추고 천막을 걷어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빠르게 곳곳의 불을 껐다. 누군가는 선 자리에서 기도를 했다. 누군가는 뛰었다. 누군가는 뛰어가는 누군가를 붙잡았다. 비가 내릴 때의 규칙. 이곳의 규칙이 전부 이런 거라서. 이렇지 않으면 겨우 유지되는 생활의 균형이 무너져서별안간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 제발! 누군가 재빨리 다가가 누군가의 입을 막았다. 누군가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삼켜졌다삼키게 했다. 누군가 누군가를 끌어안았다.

성우는 언덕 위에 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는 모든 게 한눈에 보였다. 정말이지, 다 보였다. 성우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아무렇게나 자란 잔디 위에 앉아 무릎을 끌어 안았다. 비가 내려 밖은 검고, 검었다. 비가 내리는 걸 보고 있으니 비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습게도.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스스로가 우스워져서, 성우는 무릎 위로 고개를 묻었다. 눈을 감는다. 시각의 부재로 또렷해지는 빗소리. 비냄새. 비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 착각만으로도 성우를 멋대로 간지럽게 하는, 멀어지는 기억 속 축축해진 운동장. 그곳에 열 아홉의 성우가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맡아지는 젖은 흙 냄새가 있었다. 젖은 교복 셔츠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있었다. 차가워진 몸이 있었다. 차가워진 어깨를 건드리는 차가워진 손이 있었다. 애써 웃는 얼굴이 있었다. 빗방울 때문에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옹성우.

 

비가 내리면 또렷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돔은 순식간에 암전됐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빗소리를 뚫고, 간헐적으로 바깥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생사를, 생존을 빌었다. 성우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돔에서 맞는 세 번째 장마였다.  

 

 

 

1.

 

8. 수능이 100일도 채 남지 않았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고삼들의 마음과 달리, 학교 옆에서는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저것도 끝은 나는 구나. 아이스크림 포장을 벗기며 K가 말했다. 산을 깎아 만든 학교였다. 학교로 쓰일 부분만 깎았기 때문에 교문 너머는 산이었다. 맑은 공기, 싱그러운 잎사귀, 좋은 학교, 좋은 친구들. 학생 유치를 위해 학교가 내세운 문장들도 있었다. 다 지난 이야기지만몇 그루 남지 않은 나무 사이로 높게 솟은 크레인이 보였다. . 종 친다. 들어가자. K가 성우의 어깨를 툭 쳤다.

"."

성우가 말했다.

 

K는 학교 근처에 경기장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막연하게 기뻐했었던 때를 기억한다. 그게 작년 여름이었나, 성우의 어깨를 붙잡고, ! 수능 끝나면 축구보러 가자! 했던 것도, 그때즈음이면 성인일테니 축구 경기가 끝나면 술집에서 당당하게 술도 마시고 담배도 태워보자며 낄낄댔던 것도 뭐, . 그러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K는 과거의 자신에게 좋냐? 하고 입을 찰싹 때리는 상상을 하다가 국어 지문을 놓쳤다.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옆 분단에 앉아있던 성우가 펜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신경쓰여.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셌던 공사였다. 엄청난 수의 트럭과 건축자제들을 보며 어어어 하기 무섭게 수업을 방해할 정도의 소음이 매일 들리기 시작했다. 교무실은 곧 답답함을 호소하는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로 전쟁터가 되었다. 답답함을 호소하고 싶은 건 교사들도 마찬가지여서, 교장을 찾아가 말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시()에서 결정이 끝난 일이라는 것. 정부에서 직접 내려온 지시라는 것. 이 도시의 부흥을 위해서라는 것. 공사가 끝난 후에도 소음이 말썽이라면 학교를 새로 지어주겠다고 말이 나왔다는 것. 그러니까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봅시다. 조금만 참아봐요. 별다른 소득 없이 교무실로 돌아간 교사들이 교장에게 들은 말을 학부모들에게 전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항의 전화는 계속 울려댔고, 교사들의 스트레스는 쌓여갔고, 그건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수업을 하다가 우는 교사가 나오자 교장은 교무실의 모든 전화 선을 뽑게 했다. 좋은 대책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학부모들이 학교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일이 이정도로 커지자 학생들의 불안도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우리끼리라도 성명서 써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러다가 고삼 되면 진짜 망하는 거 아님? 우리 부모님도 난리셔. 급식실, K가 불고기를 먹으면서 우스개 소리로 말했다. 성우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대신 잔반이 남은 급식판을 들고, 어디 가? 동아리실. 미안. 먼저 들어 가

그리고 쉬는시간. K는 쉬는시간에 종이 한장을 건네받게 된다. 종이를 건넨 건 성우였다

-뭐야?

-성명서.

-뭔데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그럼 뭔데?

-다니엘이 시끄럽다고 해서.

. 이건 또 무슨 소리. 성우는 K의 책상에 성명서를 올려더니, 다른 반 좀 돌고 올게. 나가버렸다. K는 성우를 부르려다 말고 엥?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쳐다봤다. 공사 중단 성명서. 첫 번째 칸에 단정한 글씨체로 옹성우. 3학년. 같은 글씨체로 그 다음칸에 강다니엘. 2학년. 이게 뭐야. K는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아, 모르겠다. 펜을 들어 다음 칸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이게 작년의 일.

 

 

 

*

 

 

 

초등학생 때 부터 봐 왔던 사이다. 그러니까 성우랑은. K는 성우가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도, 그 애한테 공부를 빌미로 이별을 말했을 때도, 그게 초등학교 육학 년 때 였다는 것도, 성우가 그 사실을 은근히 부끄러워 하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성우보다 성우를 더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건 K에게 굉장한 자부심을 갖게 해서, 어떻게 성우 같은 애랑 친하냐는 학교 친구들의 물음에 우린 소꿉친구 거든! 하고 의기양양하게 굴 수 있게 했다잘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성우는 K를 포함한 요즘 애들같지 않게 모든 일에 근면성실 했고 그래서 공부도 잘 했고 체육도 잘했고 농구는 정말 잘 했고 담임이 시켜서지만 반장도 잘 했고 그러니까 분명 대학도 잘 갈 테고 대학생활도 잘 할 테고 사회에 나가면 한 자리를 할 테고…… 라는 K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글쎄, 요즘의 성우는 잘 모르겠다. 정확하게는 작년부터의 성우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성우의 미래는 잘 알겠는데, 잘 알다 못해 또렷하게 보이는데 성우 자체는 잘 모르겠다. 모르게 됐다. K는 문제를 풀다 말고 얼굴을 감싸고 있는 성우를 보면서 생각했다. 막연하지만 그렇게 막연하지도 않게. 이게 다 강다니엘 때문이다.

 

성우는 얼굴을 감싸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가방을 챙겼다. 가게? 속삭이는 K의 물음에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못하고 교실을 빠져 나가 계단을 향해 걸었다. 무언가를 부수고 세우고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소음. 고삼의 교실은 아슬하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텅 빈 복도 안으로 햇빛이 들어와, 먼지를 반짝이게 했다. 성우가 그 사이를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토요일. 나름대로 가득 찬 고삼 반과 달리 아래 학년들의 반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그래도 자습을 하겠다고 나온 애들을 모아놓은 반이 둘그 중 하나가 다니엘의 반. 성우가 창문 너머로 반 안을 훑는다. 다니엘. 다니엘은 없었다. 빈 자리가 많았지만, 성우는 다니엘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다니엘이 교실에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고 애초에 없었다는 것도. 아무 연락 없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 사실이 성우를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을 수 없게 했다. 성우는 애써 챙긴 가방을 복도에 떨어트리고 주저 앉았다. . 소음 만큼이나 예민해진 이 학년 교사가 복도에서 나는 소리에 무슨일이냐고 나와 물었지만 성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야 강다니엘

너 왜 없는데

네가 왜 없는데.

 

 

 

*

 

 

 

성우는 눈치가 빠르다. 언제부터 였는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하교길, 성우는 절친한 친구에게 전학을 가게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정말? 아마도.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성우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우는 인천으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K를 만나게 된다. 성우의 눈치는 그때부터 진가를 발휘해서, 하루는 숙제를 하지 않은 K의 책상에 성우가 자신의 공책을 올려 두게 된다. 내꺼 배껴. , 숙제 안 한 거 어떻게 알았어? 그냥.

보면 다 알지. 눈치가 빠르면 여러모로 편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에 대한 대처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의 범주에서 통하는 일이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를 벗어나는 일은 애초에 성우가 예측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경우일 뿐더러 학교와 학원, 집 그리고 시내 정도가 하루의 전부인 성우에게 일어날만한 특별한 일은 없었다. 성우는 편하다면 편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활 역시. 믿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성우의 눈치가 빠르다 못해 상대방이 아직 자각하지도 전의 일을 먼저 알아차린다는 것에 있었다

 

 

 

2.

 

"강다니엘입니다. 친구 따라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서 와.

 

3. 신입 부원들은 하나 같이 패기가 넘쳤다. 영화과 또는 연극영화과를 희망하는 부원이 넷, 한 명은 그냥 친구 따라서. 이틀간의 면접을 통해 뽑은 신입 부원들은 치열했던 면접의 결과인 만큼 보는 것 만으로도 성우를 든든하게 했다. 영화 동아리는 교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동아리였다. 나름대로 외부 상영도 몇 번 했고 축제 때는 강당을 빌려 그해에 제작한 단편 영화들을 상영했다작년에는 영화 동아리 출신 신인 배우가 말그대로 대박을 터트리는 바람에 얼떨결이지만 시()의 적극적인 지원까지 받게 되었다. 2학년이 된 성우는 부원들과 회장의 추천으로 별다른 이견 없이 회장이 되었다. 안그래도 바쁜데 회장까지 하냐며 K가 타박했지만, 성우는 좋았다. 영화가 좋았다. 연기하는 게 좋았다. 대학은 전혀 상관 없는 곳으로 가겠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딱히 져버릴 생각도 아니었고 영화를 하겠다는 생각을 말할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 만족하기로 했다. 게다가 회장이라니. 성우가 맞은편에 선 신입 부원들을 찬찬히 쳐다봤다. 하나같이 눈이 반짝거리는 게,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성우의 가슴이 기대로 부풀었다. 좋아! 피자 먹으러 가자, 환영회야 환영회. 성우가 주머니에서 성우가 카드를 꺼내 들었다. 내가 살게. 쌤 카드로. 긴장이 풀린 몇몇이 웃음을 터트렸고 성우도 웃었다. 어딘가 튀어보이는 신입생과 눈이 마주친 건 그때가 처음.

 

"형요, 맞제. 김우신이."

신입생 환영회를 빌미로 간 피자가게였다. 동아리 담당 교사와 통화를 마친 성우가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앞을 막고 서 있는 교복이 있었다. ?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보이는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귀걸이도 허용이 됐었나? 하고 보니 이번에는 어쩐지 긴장한 얼굴이 보였다눈도 못 마주치네. 성우가 생긋 웃었다.

"응 맞아. 영화 봤어?"

", 진짜 맞나."

1학년 7반 강다니엘인데요, 작년 축제 때 영화 봤거든, 형 나온

"연기 쫌 하드만."

"고마워. 이런데서 칭찬을 다 듣네, 쑥스럽다 야."

"내 살면서 배우 첨 본다."

"어우야 과찬이야."

"아니 뭐."

잘만 하드만.

"친구 따라서 온 애 맞지?"

"."

"누구?"

"그냥 저 중에."

성우가 물으니 다니엘이 투명한 문 너머, 옹기종기 앉아있는 신입 부원들을 사이를 대충 가르켰다. 누구? 성우가 곁에 서서 쳐다보자 눈이 마주친 신입 부원이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야 우리 들어가야겠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성우가 문을 열었다. 피자 냄새가 났다. 느끼한 냄새. 그런데 왜 나와있었어? 성우가 고개를 돌려 묻자,

"그냥요."

그제서야 마주치는 눈동자. 머쓱하게 올라가는 입꼬리그리고 불현듯 성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직감. 어라.

얘 나 좋아하겠다.

성우의 직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틀릴 거라면 직감하지도 않았으니까

 

 

 

*

 

 

 

", . 담배도 피나?"

". 너도 펴볼래?"

"."

성우가 교복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한대를 건네주자, 성스러운 것을 만지는 마냥 다니엘이 담배를 쥐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 내 실제로 처음 본다. 담배.

"안 펴봤어?"

"."

", 의외다."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나쁜 짓 많이하게 생겼다고. 나 안 그런데. 담배와 함께 건네준 라이터를 켜지 못해 칙칙 가스만 뿜는 모습을 보니 정말 그렇기도 한 거 같고. 성우가 다니엘의 손에서 라이터를 가져가 이리와봐, 불을 붙여줬다. 다니엘이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는데. 너 점있구나. 여기. 하고 성우가 눈가를 콕 누르자 다니엘이 화들짝 놀랐다.

"와 찌르는데요."

", 미안. 보이길래."

"깜짝 놀랐네."

 

학교 옆 골목길. 의외로 다니엘은 붙임성이 좋아서, 외식을 하자며 성우를 찾아왔다. 반 애들의 이목이 집중된 건 한순간이었다. 다니엘은 어딜가나 눈에 띄는 애였다. 바꿔 말하자면 다니엘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무슨 일을 벌일 것 같아 보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얘는 자기가 눈에 띈다는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낯선 억양으로 다가오는 신입생의 등장에 반짝거리는 반 아이들의 호기심이 행여나 날카로운 질문이 될까 성우가 그래! 다니엘을 데리고 교무실로 향했다덧붙여 성우도 곧잘 친근하게 구는 다니엘이 싫지는 않아서 촬영 장소를 섭외하러 간다는 명목하에 다니엘의 몫까지 외출증을 끊어 보여주자. , 쥑이네. 짝짝짝 다니엘이 박수를 쳤다

밖으로 나온 둘이 뭘 먹었냐면, 그냥 분식. 떡볶이, 김밥, 순대. 뭐 이런 거. 겨우 한두살 차이로 선후배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야무지게 잘 먹는 후배를 보자니 괜히 마음이 들떠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싹싹 긁어먹이다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기왕 늦은거 느긋하게 가자, 담임 누구야? 수학이요. 저런. 진짜 개빡셈. 괜찮아, 빌면 살려주실 거야.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마침 담배를 피우기 딱 좋은 골목이 보여서 들어온 게 조금 전. 붙임성 좋고 밥 잘먹은 후배는 담배연기를 한모금 마시더니 기침을 해댔다. , 못 피겠다. 그럼 나 줘. 성우가 다니엘의 손에서 담배를 빼 냈다. 침 묻었는데. 괜찮아. 성우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다니엘의 담배를 물었다. 동시에 다니엘의 시선 역시 성우의 손을 따라 입술로.

"술은 마셔봤어?"

"아뇨."

"형은요?"

"글쎄."

"나쁜 짓은 형이 더 많이하네."

"그러게 말이야."

, 억울해.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정말로 억울해해서 성우가 작게 웃었다. 성우가 웃자 말이 없어진 쪽은 다니엘이었는데, 말이 없어진 만큼 집중된 시선에 어쩐지 얼굴이 따가워진 성우가 다니엘을 쳐다봤다.

"?"

"형도 얼굴에 점있네요. 세 개."

". 매력점이야."

세 개나 있어서 세 배나 매력적이라구. 안 그래도 잘생겼는데. 장난이 섞인 한탄에 다니엘이 탄식했다

", 잘생긴 거 알고 있었나?"

"당연하지. 모를리가 있어?"

"뭔가 재수없는데 맞는 말이라 더 재수없어요."

"나는 맞는 말만 해."

", 내 이런 거 잘 못 받아주는 데."

머쓱하게 웃는 다니엘을 보며 성우가 안 받아줘도 돼, 받아주면 끝도 없어, . 하고 말했다.  

"그래도……."

내는 형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빨리 친해지면 좋잖아

얘는 자기가 하는 말이 얼마큼의 무게인 줄 알고 말하는 걸까.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는 다니엘을 보며 성우가 활짝 웃었다

 

웃음. 옹성우가 눈치와 함께 쓰는 최고의 무기.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기도, 밀어내기도 하는 타고난 무기. 그러니까 필살기 같은 거. 무슨 만화영화 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정말 그랬다. 성우가 그예 타고난 얼굴로 웃으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까지 성우가 원하는 것을 해줬고 물론 성우도 그만큼 베푸는 게 몸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반대의 경우, 성우의 웃음은 굳건한 방패같은 거라서. 누구도 뚫을 수가 없었다. 그건 오랜 친구라는 K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우의 웃음은 반사적인 것이지만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거라서.

"들어가자."

"."

성우가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먼저 걸어나갔다담배꽁초가 아스팔트에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

 

 

 

4. 부쩍 친해졌다 싶은 신입생 강다니엘을 둘러싼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모든 소문이 그렇듯 다니엘의 겉모습과 출생지에서 비롯된 소문들은 대부분 뜬구름처럼 추상적이고 막연했지만 나만 알고 있는 건데,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K가 성우에게 말해준 소문은 이전의 것들과 달리 구체적이고 사적인 것이라 성우는 K에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물었다.

"어떻게 알긴. P 체고 다니잖아."

걔가 말해줬지, 걔네 담임이 부산까지 가서 데려왔대. 안 오겠다는 거 겨우겨우 설득해서.

"종목이 뭐였는데?"

"육상."

맙소사.

 

"운동했었어?"

", 보면 몰라요?"

아침부터 시작한 영화 촬영은 저녁까지 계속됐다. 빈 교실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말에도 나온 학교였다. 주말 촬영의 여력이 컸는지 부원들은 빠르게 지쳐갔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 생각한 성우가 마실 것을 사오겠다며 편의점으로 갔다. 자기도 데려가라며 쫄래쫄래 따라나온 다니엘과 함께. 비닐봉지를 들고 학교 언덕을 오르는 길, 성우의 질문에 다니엘이 허벅지를 탁탁 치며 대답했다. 이거 보면 딱 답 나오잖아요.

"무슨 종목?"

"진짜 몰라서 묻나?"

우리 학년 애들은 다 아는데. 그말에 성우가 다니엘을 쳐다봤다. 가로등이 켜져 있지 않아 다니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성우가 침을 삼켰다. 이럴때는 솔직해지는 게 나았다.

"육상했다면서."

"했다 보다는, ."

어쩌다보니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다니엘이 비닐봉지에서 초코 우유를 꺼내들었다. 형은 뭐 마실 거가. 어 나도 초코. 초코 좋제, 달달하고. 성우가 초코 우유에 플라스틱 빨대를 꽂아 마셨다금세 입 안에서 단 맛이 났다. 초코향.

 

부산에서 꽤 알아줬대. 육상선수로. 체전 나가서 메달도 따고. 그런데 웃긴 건 얘가 전문적으로 육상을 막 배우던 애가 아니었나봐. 자기는 그냥 달리라고 해서 달렸는데 너무 잘 달리니까탐이 나는 거지. 알아주는 곳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정치질 좀 했다나? 이리저리 치이던 거 P네 담임이 입 털어서 낚아 챈 거지. , 돈 많이 벌게 해주겠다 이런 거로그런 거 아니면 연고도 없는 인천에 혼자 왜 오겠어. 나름 유명한 사건이었나봐. 부산 애들한테는 배신자 소리도 듣고. 여기서는 얘가 워낙 잘 하니까 텃세 부리고. 나같아도 짜증났을 듯. 그러다가 작년에 사고가 났대. 트렉에 홈이 있었나봐. , 이게 말이 되냐? 그래서 다리부상이 생겼는데 못 달린대. 달릴수야는 있는데 육상은 못 한대. 학교에서도 누가 그랬냐 찾아서 고소하겠다 어쩐다 떠들어댔는데 결과적으로 경기에 못 나가니까. 어쩔 수 있겠냐. 잘린 거지. 그리고 걔가 학교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나 봐

 

"형은 영화가 좋나."

다니엘이 걸을 때마다 비닐봉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

"?"

"그냥."

어쩌다보니까. 너 처럼. 하는 뱉지 않았다. 그새 초코 우유를 다 마신 다니엘이 우유팩을 구겨 쓰레기통쪽으로 던졌다. . 안 들어갔다. 다니엘이 쓰레기통 쪽으로 탁탁, 빠르게 걸었다. 가로등의 불이 켜지지 않아 검은 형체로 보이는, 검은 형체로만 보이는 뒷모습에 대고 성우가 나지막히 물었다. 다니엘.

"너는 영화가 좋아?"

"잘 모르겠는데."

그건 좋았다. 김우신이 나온 영화. 다니엘이 우유팩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

"배우가 잘생겼거든."

장난치지마, 하고 성우가 말하자 어둠속에서 장난 아인데,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김우신이 안 힘들어해서 좋았지."

다른 거 금방 찾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좋았지. 다니엘이 본관으로 들어가는 유리문을 밀었다. 힘들기만하면 너무 슬프잖아. 뭐하노, 들어가자. 다니엘이 성우를 재촉했다

"그래."

"오늘 촬영 와 이렇게 길어지는 건데?"

투덜거리는 다니엘은 딱 열일곱인데 이런 애가 연고도 없는 인천까지 와서는. 성우는 그동안 학교에서 마주친 다니엘을 떠올렸다

무리의 중심에 있었지만 편안해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학교에서의 다니엘이 왕이라면 왕이 앉아있는 자리 천장에는 얇은 실로 묶인 칼이 있었다. 원하지도 않은 상태로 앉혀진 자리에서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모습을. 다니엘에게 영화는 그저 잠시 쉴 곳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성우를 마주칠 때면 그제서야 웃으며 다가와, 담임이 야자나 하래요. 말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그래서 어쩌긴. 남은 기간 동안 학교 꾸역꾸역 다니고 졸업했지. 남들 뛰는 거 보면서. 중간에 그만두지는 않았대. 졸업하고 다들 부산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인지 우리 학교로 입학한 거고. 그것도 그런게, 걔네 집안 사정이 좋지는 않아서 못 돌아가고어찌어찌 인천 근처에 사는 먼 친척 집에 얹쳐 사는 거라잖아. 그런데 갑자기 영화가 좋다고 너네 동아리를 다 들어갔네? 이거 완전 영화 한편 아니냐. 클리셰 범벅.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성우의 꿈에 트렉을 달리는 다니엘이 나타났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뜨겁게 달궈진 주황색 트렉을. 그 사이로 바람이 불어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달릴 때마다 움직이는 다리 근육을. 이마에 맺혔다 떨어지는 땀방울을. 어쩐지 웃고있는 다니엘의 얼굴을. 흐르는 땀을 다 닦지도 않은 채로.

-

성우가 평생 보지 못할 모습을. 개인이 지게 된 사적인 무게를. 성우가 끝내 모르는 척 해야 하는 무게를. 그리고 그건

정말이지

영화로는 못 만들 클리셰였다.

 

5. 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다니엘이 성우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게 아마 그때 즈음.

 

 

 

 3.

 

성우에게는 여러 장의 카드가 있다. 모든 카드는 성우를 위한 것이다. 성우는 특유의 빠른 눈치로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한발 짝 떨어진 상태에서 지켜보다가, 적절한 때에 카드를 썼다. 말그대로 적재적소에 쓰이는 카드의 위력은 실로 대단해서, 카드를 쓸 때만 잘 맞추면 성우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성우가, 배려있는 성우가, 예의바른 성우가, 센스있는 성우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센스있는 성우가 될 순간이었다. 성우가 머뭇거리는 K대신 킬러들의 수다? 하고 대답했다. ! 맞아. , 역시 옹! K가 성우쪽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 깔끔한 하이파이브였다. 토요일 저녁이었다. 편집을 맡은 성우와 남아있겠다는 다니엘을 제외한 부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영화가 막바지를 향해있었다. 바꿔 말하면, ()에서 주최하는 여름 영화제가 코앞이었다. 신입 부원이 들어오자마자 시작 된 촬영으로 성우는 전보다 더 바빠졌고, 회장직 까지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일도 찾아서 처리 해야 했다. 확실히 벅찼지만 성우가 생각하는 회장은 그래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으니까 벅차도 하게 됐다. 반면 함께 하교하는 날이 점점 줄어드는 것에 불만이 생긴 K는 어느 날 부터 동아리 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 나 외롭다. 하는 말과 함께. 부원이 아닌 사람의 등장에 어색한 티를 감추지 못하던 부원들도 있었지만 점차 K 특유의 유쾌함에 매료되어 이제는 K가 없으면 어색하다는 둥 차라리 동아리를 들어오라는 둥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부원이 아닌 사람을 동아리 실로 들이는 데에 고민하던 성우도 일에 치여 말을 할 때를 잠시 늦추고 있던 터였다. 그래 나름대로 부원들한테 에너지도 주고-

"선배는 와 맨날 오는 건데요."

. 한 사람만 빼고

성우는 의자를 끌어 와, 등받이에 턱을 기댄 채 날카롭게 말하는 다니엘을 쳐다봤다. 동아리 부원도 아님서 맨날 와서 떠들고, 뭐 하자는 건데요. 다니엘, 그게 무슨 소리야. 성우가 조용히 말하자 다니엘이 고개를 들어 성우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다니엘이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다니엘의 말이 날카롭다고 느낀 건 성우 뿐인 건지, 아니면 K가 그냥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 그럴리는 절대 없고. K는 그냥 짜식! 선배 말에 토나 달고! 하더니 다니엘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아 놔요! 노라고! K의 팔을 뿌리친 다니엘이 K를 노려봤다. 알았어, 알았어. 안그래도 갈 거야 임마. K가 일어나서 가방을 챙겼다. , 나 먼저 간다. 끝나면 연락해. 그리고 야, 다니엘 넌 얼굴 좀 펴고. K가 성우의 어깨를 툭 치고 동아리 실을 나간다.

"."

다니엘이 다시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턱을 기댔다.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다. 덕분에 며칠 전, 무려 금발로 탈색을 했다가 교문 앞에서부터 혼이 났다는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보였다. 안그래도 눈에 띄는 애가성우가 하아. 한숨을 쉬더니 다니엘.

"."

"미안."

"니가 와 미안한데."

"그만 오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못 해서."

"됐다."

다니엘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부원들 불만사항 듣는 게 내 일이니까."

그말에 다니엘이 고개를 번쩍 들어 성우를 쳐다봤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쳐다봤다. 확실히 다니엘은 성우나 K를 포함한 그 나이대가 풍기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뭐랄까. 겨우 열 일곱이 벌써 무게의 범위에 가까운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비단 다니엘의 몸집이 크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이라서, 학교 애들은 다니엘이 저렇게 쳐다보기만 해도 금세 기가 죽거나 기가 죽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 뒤에서 욕을 하거나 했다. 그런 애였다. 다니엘은. 보기만 해도 자기 쪽으로 방향을 틀게 만드는 애였다. 그런 힘이 있는 애였다. 성우가 그동안 봐 온 다니엘은, 그런 애였다. 그렇지만 성우는 다니엘이 저렇게 쳐다보면

"그게 다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어서

"."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나쁜 카드만 자꾸 쓰게 되는데.

"알았다."

담담하게 대답한 다니엘이 씩 웃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웃는 다니엘의 얼굴은 그 나이대의 것이었다. 웃기지. 네가 내 앞에서만 조심스러워지는 게. 사람의 적응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것도 익숙해지는 게. 눈깜빡하고 넘어가줄까,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게

"그럼 니가 좋아하는 영화 말해도."

망설이게 되는 게.

 

"갈게."

노트북을 든 성우가 다니엘에게 말했다. 내도. 다니엘이 익숙하게 뒤따라 나왔다. 해가 진 학교는 어둡고, 그래서 운동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성우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럴싸한 잔디도, 트렉도 없이 흙먼지만 풀풀거리는 운동장을 다니엘이 걷는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괴로웠다. 어쩐지라는 말에 감춰둔 이유가 뚜렷해서 더더욱. 복잡해진 성우의 생각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학교를 둘러싼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다말고 별안간 다니엘이 멈춰 섰다.

"옹성우."

"?"

"K선배는 와 맨날 너랑 가는데."

집방향도 다르면서. 다니엘이 운동화 코를 산책로 바닥에 쿡쿡 찍었다. 그 소리가 앞장 서서 걷던 성우를 멈춰서게 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뒤를 돌아 물으니 보이는 다니엘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해가 졌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다니엘은 표정도 잘 감출 줄 알았는데 그게 또 성우를 괴롭게 하는 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내는 왜 같이도 못 가게 하는데."

오늘이 날이었나보다. 성우가 하아, 작게 한숨을 쉬더니 다니엘의 앞에 섰다. 수십가지의 카드와 그에 따른 선택지가 성우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성우가 선택한 카드는…… 

"서운했어? 진작 말하지."

다니엘의 어깨를 툭 치는 것. 회장과 친해지고 싶은 부원의 건의사항 즈음으로 취급하는 것. 다니엘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하게, 상처받을 일은 생기지도 않게, 방패를 내세우는 것. 그렇지만 다니엘도 보통 애는 아니어서굳건해보이는 방패의 틈 사이를 파고들 줄 알았다.

". 서운해." 

"?"

다니엘이 성우쪽으로 한발짝 다가왔다. 다니엘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뭐야, 너무 가까워-

"내 너 좋아하는데."

그건 성우가 들어본 가장 담백한 고백이었다.

멈춰 선 성우의 어깨를 마찬가지로 다니엘이 가볍게 건들였다. 뭐하노. 가자.

"가자, 아무것도 안 한다."

가볍게 말하며 걷는 다니엘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 건 성우의 착각. 성우가 그 뒤를 말없이 따라 걸었다. 무너지려는 표정을 애써 붙잡으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떠오르는 카드가 없어서. 복잡해진 머리로 하나하나. 다니엘아.

 

전에 네가 그랬잖아. 김우신이 좋다고. 나도 그래. 힘들어도 금세 잘 먹고 잘 살아서 그래. 어떻게 싫어하겠어. 그래서 생각이 많아져.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내가 너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할까봐. 무서워서. 이대로 나는 남고 너는 그때 그랬지, 하고 지나쳐줬으면 하는데

네가 끝까지 장난이라는 말은 하지 않아서.

 

성우가 내세운 건 방패가 맞았다. 방패의 또다른 이름이 문이었을 뿐.

 

8. 짧은 방학이 지났다. 방학 때 뭘 했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다니엘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성우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집에 찾아온 K가 무슨 일이 있냐 물었지만 아무 일도. 정말 아무 일도. 여름의 끝. 돌아간 학교에서 성우는 예비 고삼이라는 명목으로 동아리실을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성우는 와 안오는 데. 반에 찾아온 다니엘에게

"무슨 일이야?"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의 가장 잔인한 카드를 건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