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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너를 기억해 4

Sukina

 

 

 

 

 

 

 

 

 

*

 

 

 

 

 

매일 같이 성우의 병실을 찾아갔던 다니엘. 역시나 오늘도 빼놓지 않고 병실을 방문해 성우를 만났다. 깨어나지 않는 그를 보며 제 그리움을 털어놓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병실의 문이 열렸다.

 

 

자네가 강다니엘인가?”

 

 

놀란 얼굴의 다니엘의 눈에 수트를 차려 입은 중년의 신사가 들어왔다. 다니엘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부터 숙였다.

 

 

성우 만나러 매일 온다던데...”

...”

이제 그만 와도 되지 않겠나?”

?”

자네가 온다고... 성우가 깨어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성우가 다니엘과 교제하면서 집에서 제안하는 선 자리를 마다했고 부모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일이 잦았다. 성우는 애초에 결혼 생각이 없다며 제 의사를 부모에게 밝혔으나, 그게 그리 쉽게 받아들여질 일은 아니었다. 오랜 고민 끝에 성우는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다니엘임을 밝혔다.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것 역시 부모는 다니엘이 남자라는 이유로 교제를 허락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라며 성우는 다니엘 앞에서 멋쩍게 웃어 보이기도 했다.

 

 

다니엘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어떤 외모를 가졌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성우의 아버지는 병실에서 마주한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이제 그만 와주면 좋겠네. 자네 얼굴 보기도 불편하고...”

아니, 그게...”

성우는 언젠가 깨어날 걸세. 그렇지만 나는 성우가 자네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라네.”

너무하시잖아요...”

녀석의 부모로서 당연히 바랄 수 있는 거라 생각하네.”

 

 

성우의 아버지는 점잖은 말투로 다니엘에게 다시는 병원에 와주지 않았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다. 성우의 어머니 또한 불편해 한다면서 말이다. 오죽하면 자신의 아들이 기억을 잃었으면 좋겠다고 하겠는가. 고개 숙인 다니엘의 가슴에 비수가 몇 번이나 꽂혔다.

 

 

나는 성우가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네.”

“......”

평범한 여자와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그런 거 말이네.”

...”

그런데 자네와는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만 오게. 다시는 자네가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하네.”

 

 

다니엘은 성우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눈앞이 흐려지는데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매일 오지 않겠습니다. 가끔 와서 얼굴만 보고 가겠습니다.”

“......”

형에게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겠습니다. 얼굴만 보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미안하지만 부탁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네.”

부탁드립니다. 가끔 와서 얼굴만 보고 가겠습니다. 제발...”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자네가 병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네.”

아버님...”

얼른 나가주게. 더 이상 병실에 머무르는 것 또한 반갑지 않으니.”

 

 

병실의 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보안팀 직원 두 명이 들어와 다니엘의 양 팔을 붙들고 일으켰다. 다니엘은 저항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성우의 아버지에게 목례를 한 뒤 고개를 돌려 성우를 바라보았다. 제가 끌려 나가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제 연인, 그 연인에게 작별을 고하며 다니엘은 병실에 빠져나갔다.

 

 

병실 앞 의자에 앉은 다니엘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깨어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깨어나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며 함께 부둥켜안고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연인과 재회하며 앞으로 이어질 행복을 그려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현실의 벽이 높아도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충분히 뛰어넘고 싶었지. 하지만 역시나 벽은 높았고 다니엘은 현재 혼자였다. 혼자였으니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성우가 없었으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옹성우, 나쁜 새끼...”

 

 

 

 

 

*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마지막이 아닐 거라 생각했던 성우는 블루 노트를 찾았다. 영업시간이 되기 훨씬 전인 대낮에. 몇 번이고 문 앞에서 망설이다 들어가니 나무 냄새가 났다. 나무로 만든 가구들, 악기들이 가득 채워진 탓인 것 같았다. 성우는 들어서자마자 항상 의건이 서 있던 바(Bar) 앞으로 다가가 유리잔의 물기를 마른 천으로 닦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강의건씨... 나왔나요?”

의건이 그만 뒀는데요.”

? 그만 둬요?”

. 개인적인 사정이라면서 그만 뒀어요.”

혹시...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아세요?”

글쎄요. 모르겠네요.”

 

 

블루 노트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붙잡고 의건의 소재를 물었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가야 만날 수 있는지 물었지만 아무도 속 시원히 답해주지 않았다.

 

 

사람을 찾는다며 경찰에 도움을 청해봐야 소용없었다. 이미 그들도 의건을 찾고 있었다. 독립 운동에 열과 성을 다 하는 그를 찾아 제거하면 독립도 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여기저기에 그의 사진을 붙이고 현상금까지 걸기도 했다. 차라리 이럴 때에는 자신이 아버지의 돈으로 더 많은 현상금을 걸고 그를 찾거나, 일본 경찰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그를 잡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가지 들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말이다.

 

 

진짜 마지막인 건가...”

 

 

블루 노트를 나온 성우는 건물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둑한 밤, 의건과 둘이 바닥에 주저앉아 나누었던 시간이 그대로 남아있던 곳이었다. 가보면, 그래서 기다리면 그곳에 의건이 나타날 것 같았다. 언제나 그랬듯 갑작스럽게. 나타나준다면, 그래서 다시 한 번 마주보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의건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자신은 2018년이라는 먼 미래에서 왔기에 조금 더 기다리면 당신이 원하는 독립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블루 노트의 건물 뒤에는 아무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공기만이 주변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성우는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손에 쥐어주던 백일홍의 꽃송이가 떠올랐다. 마주치던 눈빛, 안아주던 품, 닿았다 떨어지던 입술이 그대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괜히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주변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를 주워 흙바닥에 이런저런 낙서도 해보고 이름도 적어보았다. 다니엘. 그리고 의건. 두 이름을 썼다가 슬며시 다니엘을 지웠다. 의건의 이름만 남았다. 갑작스럽게 자신이 2018년에서 경성으로 와버린 것처럼, 의건은 생각지도 못했던 때 성우의 앞에 나타났다. 마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첫 만남부터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던 의건. 지금 성우에게는 의건만이 남았다. 흙바닥에 의건이라는 글자만 남은 것처럼.

 

 

 

 

 

오셨습니까.”

.”

어르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요?”

.”

 

 

집사는 성우를 아버지의 서재로 안내했다. 문 앞부터 괜스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어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해댔던 것 같다. 집사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가 허리부터 숙였다. 부자(父子) 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서먹했고 거리감이 꽤 컸다.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 게냐?”

... 잠깐...”

내일은 오전부터 서둘러야 하니까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있거라.”

내일이요?”

그래. 군경 고위 관계자들이 모두 오는 자리에 너를 소개할 예정이다.”

저를...?”

 

 

성우는 어리둥절했다. 일본의 군경 관계자가 참석한 자리에서 왜 자신을 소개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숨어 지내면 되는 것 아니었나. 그러기만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자신이 그런 자리에 참석한 것을 알면 의건은 크게 실망할 것이다. 자신은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데 연이 닿았던 자가, 손가락에 붉은 실까지 걸어주었던 자가 일본군의 행사에 참석해 천황에 대한 만세를 부르다니.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워낙 강경하게 이야기하는 데다, 성우는 강제로 참석을 당해야만 했다. 자신이 참석 여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억지로 집사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참석할 것이 뻔했으니까.

 

 

가서 좋은 분들 만나 뵙고 정신 차리면 좋겠다.”

... .”

올라가 보거라.”

 

 

오늘도 역시나 살가운 대화는 없었다. 제 아버지는 잔뜩 인상을 쓴 채 강압적인 말투로 명령했다. 한 번도 생활하는 것이 어떤지, 힘들거나 고민거리는 없는지 물어 준 적이 없었다.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기도 했다.

 

 

물론 경성으로 갑자기 넘어오게 되면서 아버지로 여기게 된 사람이지만, 그의 태도는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투도, 항상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도, 의건을 잡아들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도. 일본 군경에 납작 엎드려 끊임없는 아부와 아첨을 해대며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달가울 수 있겠는가.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성우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블루 노트에서는 의건을 만나지 못했고, 정말 사라지기로 한 건지 흔적 하나 남은 게 없었다. 뒷마당으로 나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저 막연한 기대도 생겼다. 금방 그 기대가 꺾여버렸지만 말이다.

 

 

성우는 책상 앞에 앉아 제 일기장을 펼쳤다. 경성에서의 시간과 의건과의 기억을 기록해 둔 노트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의건과의 마지막 만남도 쓰여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절대 좋을 리 없어서, 그래서 성우는 쓰면서도 입을 몇 번이나 틀어막았다. 마지막 만남을 기록한 페이지의 마지막 구절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돌아선 뒷모습에서도 사랑은 시작된다.]

 

 

언젠가, 성우가 다니엘을 만나며 사랑을 할 때 보았던 글귀였다. 그리 달갑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되었던 사랑이었고, 사랑임을 확신했을 때 눈앞에 보이던 모습이 그의 뒷모습이었기 때문에. 성우는 우연히 보게 된 그 글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글귀를 보고 느꼈던 기분이 최근 의건을 통해서도 느껴졌다. 의건의 마지막이 뒷모습이었지만 어쩌면 그를 향한 마음 또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오늘도 쉬이 잡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을 고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고해버린 의건이 원망스럽고, 그를 잡아두지 못한 제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말이다.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그를 붙잡으려 했다면 조금은 더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가 그렇게 돌아서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강의건, 나쁜 새끼...”

 

 

 

 

 

침대에 누워 창밖의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늦게 잠들었던 성우는 유독 오늘 아침 눈 뜨기가 힘들었다. 사실 눈 뜨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제 아버지를 따라 일본 군경의 관계자들을 만나러 가야 할 생각에 잠이 깨고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 내내 일본을 치켜세우는 이야기를 들으며 몹시 속이 불편했다.

 

 

식사 후 나갈 채비를 하며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데 집사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준비 끝나셨으면 출발하시죠. 어르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알겠습니다.”

 

 

집사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간 성우는 안내를 받아 대문 앞에 세워져 있는 차에 올라탔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와 한 차를 타고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늘은 참 중요한 행사입니다.”

,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도 기대가 크시니 가서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뭐 달리 할 게 있나요. 인사만 하겠죠...”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집사는 조수석에서 끊임없이 성우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집사도 적잖이 자신의 아버지 마냥 일본 측에 충성심을 보여 왔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제 힘이 닿는 데까지는 성우도 신경 썼어야 했고, 성우가 일본 군경 측에 잘 보인다면 정말 큰 자리를 차지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작 성우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행사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니 눈에 펼쳐진 광경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누구 하나 대충 입고 온 이가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한껏 차려 입고 얼굴에는 밝은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각자 샴페인이 담긴 잔을 들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정말 영화에서만 보던 파티인 것 같았다. 짙은 와인색의 벽에 금빛 무늬가 화려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흰색 테이블보가 씌워진 테이블 위에는 형형색색의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속에 쉽게 섞일 수 없었던 성우는 그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정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사내들도 있었고,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성들도 있었다. 저마다 흔히 말하는 교양이 있는 사람들 같았다. 벽에는 일본 국기와 당시 천황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우리나라 한 복판에서 이렇게 일본 천황을 드높이며 일본인들이 행복해하는 것도, 그들 속에 일본인인 척하는 한국인이 섞여있는 것도 꽤 볼썽사나운 일이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에게 억지로 인사를 하러 다녔다. 인사를 받고 어깨를 토닥이는 이도 있었고, 악수를 건네는 이도 있었다. 저마다 굉장히 점잖은 투로 말하는 듯 했고, 제 아버지는 그들에게 연신 굽신거렸다. 성우는 아버지를 따라 허리를 숙였으나 게 중에 반가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저 그 모두가 의건의 적이자 자신의 적이고, 우리의 적이구나 싶은 생각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억지로 인사를 위해 끌려 다니다 구석에 혼자 남은 성우는 잔에 담긴 샴페인을 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성우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단정한 수트를 차려 입은 사내는 멀끔하다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왜 혼자 계세요?”

아니, 뭐 굳이...”

야마시타 히데키의 아드님... 맞으시죠?”

... ...”

 

 

몇 번을 들어도 정이 붙지 않는 이름이었다. 야마시타 히데키. 일본인이 아닌데 왜 굳이 일본인처럼 살고 싶은 걸까. 자신의 아버지이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제게 그의 아들인지 정중한 태도로 물어오던 사내 또한 힘을 빌리고자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반갑네요. 여기서 뵙는 한국분이라니.”

아시다시피... 여기 한국인 많지 않나요?”

글쎄요... 한국인보다는 일본인이고 싶은 사람이 더 많지 않겠습니까?”

... 그렇겠죠?”

 

 

낯선 남자는 성우에게 시답잖은 말들을 물어댔다. 날씨가 좋다느니, 여기 와 있는 한국인은 꼴불견이 많다느니, 음식이 맛없다느니 등. 성우는 그 물음에 성의 없게 대답했고, 그 모습에도 남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대화가 지루했는지 자꾸만 손목시계를 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끝내려 하지 않았다. 대화에는 특별한 주제도 없었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답할 이유도 없었다. 딱 보기에도 성우는 대화에 흥미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남자는 그럴수록 더욱 살갑게 말을 붙였다.

 

 

강의건... 아시죠?”

 

 

성우의 눈이 번뜩였다. 낯선 남자의 입에서 의건의 이름이 나왔다. 마치 둘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물어오는데 오히려 당황한 쪽은 성우였다.

 

 

하긴, 모르실 리 없죠? 경성에서 그 사람 모르면 간첩일 수준인데.”

왜 제게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건지...”

혹시나 해서요. 야마시타 히데키의 아들인데, 강의건과 친분 있는 이유가 궁금해서.”

그게 상관이 있나요?”

재밌는 상황 아닙니까?”

 

 

순진한 얼굴로 미소까지 지어가며 성우를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성우는 참 기분 나빴다.

 

 

제 국적을 버리고 일본에 충성하는 아버지.”

“......”

아버지와 달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남자와 눈이 맞은 아들.”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제가 들은 그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들은.. 그대로요?”

. 강의건에게 들은 그대로요.”

 

 

성우는 떨리는 손으로 샴페인이 담긴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의건에게서 들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낯선 남자가, 혹시 그의 소재를 알고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모두 없던 걸로 하고 싶었다.

 

 

어디 있어요?”

의건이요?”

.”

글쎄요...”

 

 

남자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아니,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았다.

 

 

그가 그랬나요? 저와 눈이 맞았다고?”

.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 얼마나 소름이 돋았으면 아직도 잊히질 않네.”

 

 

남자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의건이 제게 전했다던 말을 읊었다. 너무도 정확히.

 

 

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것인 줄은 몰랐다.”

 

 

그 말에 성우는 굳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걸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듣다니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차라리 마지막이라고 말하기 전에 낭만이 가득 담긴 말을 해주었다면, 성우도 조금은 괜찮지 않았을까 싶었다. 의건에게 직접 들었다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그랬으면서 도망치듯 떠난 이유는 뭐라던가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던데요.”

그래요...”

 

 

남자는 다시금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시계를 두어 번 톡톡 두드리더니 다시금 성우를 보았다.

 

 

찾고 계신다던데요.”

. 그렇죠...”

아버님은 알고 계세요?”

모르시죠. 알면 가만히 두셨을까요?”

... 하긴, 그렇네요.”

 

 

남자는 성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가시죠.”

?”

찾고 계신다면서요.”

 

 

남자는 성우에게 의건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이곳에서 거리가 좀 있으니 차를 타고 가야 한다면서 말이다. 참 이상하게도 성우는 경계심을 완전히 풀었다. 단순히 강의건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의건이 읊어댔다는 말도 그럴 법 했고, 이미 많은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제게 접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왠지 남자를 따라가면 의건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가시죠.”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그런 성우를 붙잡고 장내를 빠져나갔다.

 

 

아버지나 집사에게 전하지도 않았다. 그저 의건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남자를 따라 빠져 나갔다. 너무도 순순히 차를 함께 타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의건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도착하면 나타날 것 같았으니까. 그때에는 그동안 찾아다니며 쌓아놓은 원망을 한꺼번에 토로해야 할 것 같았다. 그의 품에 안겨서 투정을 부리듯이 말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성우 또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지만 둘의 공통분모라고 해봐야 의건 밖에 없었다. 의건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서로 대화 할 일이 있었을까 싶었다. 의건이 아니었다면 낯선 남자의 차를 타고 목적지도 모른 채 무작정 움직일 일이 있었을까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가는 길이 너무도 익숙했다. 본 적이 있는 집과 건물들, 익숙한 나무들. 왠지 기분이 이상해서 성우가 먼저 어색함을 깨버렸다.

 

 

혹시 지금...”

눈치 채셨어요?”

“......”

. 그쪽 집으로 가는 거예요.”

강의건씨... 어디 있어요?”

글쎄요.”

뭐예요, 당신?”

나중에 알게 되실 거예요.”

 

 

남자는 성우의 집을 조금 지나쳐 차를 세웠다.

 

 

기분 나쁘셨을 겁니다. 이해해요.”

“......”

그런데 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뭐예요? 이게 대체 무슨...”

의건이 부탁이에요.”

그가 무슨 부탁을...”

 

 

의건은 남자에게 성우를 부탁했다고 한다. 분명히 싫은 자리에 억지로 가게 될 테니, 그것을 참지 못할 테니 그를 빼내어 달라고 했단다. 이유는 단지 성우가 그 자리를 싫어한다는 것. 이미 마지막을 고했기에 자신이 앞에 나타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단다.

 

 

기가 막혀...”

저는 그저 의건이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니까요. 저를 원망하지 마시고 집에 들어가 계세요.”

그럼... 그가 온다고 했나요?”

글쎄요.”

 

 

성우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렸다. 그저 모든 상황이 불쾌했다. 억지로 끌려 간 행사장부터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남자와 핑계가 참 기분 나빴던 의건의 부탁까지. 집으로 들어가는 걸음도 가볍지 않았다.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들어서니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여럿 달려 나와 당황스러운 얼굴로 맞이했다. 성우는 그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건넨 뒤 2층으로 올라갔다.

 

 

결국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의건의 부탁이었다고 했지만 불만이 커지기만 했다. 그런 자리를 싫어하는 걸 알았다면 나타나 주던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낯선 남자에게 하지 말 것이지. 등장부터 당황스러웠던 의건은 마지막까지도 아니, 떠난 뒤에도 이렇게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앞으로는 다시 만나지 못할 텐데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가면 덧나려나.

 

 

...”

 

 

성우는 재킷을 대충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넥타이도 풀어 헤친 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침대에 누워버렸다.

 

 

꼭 이렇게 의건이 들어 간 하루는 어지럽기만 하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의건이 들어 있는 시간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예전의 다니엘이 그랬듯이 말이다.

 

 

오래 막역한 사이를 유지했던 여자 아이의 남자 친구로 성우의 앞에 나타났던 다니엘은 시간마다 자신의 존재를 집어넣으려 애를 썼다. 하루를 보내며 빈틈을 주고 싶지 않다는 말까지 했었다. 다른 생각을 할라치면 귀신같이 알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기어이 제 존재를 욱여넣었다. 그런 다니엘이 점점 채워지고, 습관과 일상을 만드니 사랑이 되었다. 한 순간에 옷을 젖게 만드는 소나기나 폭우가 아닌, 서서히 젖게 만드는 가랑비 같아서 더욱 무서운 사랑이었다. 그 사랑 덕에 오랜 친구를 잃었지만 다니엘을 얻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추억인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 때도 그랬다. 다니엘이 들어 있는 시간은 혼란스러웠고 어지러웠으며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애가 탔었다.

 

 

지금 의건이 딱 그랬다. 다니엘처럼 일상이 되어주었지만 곁에 없다는 것이 달랐다.

 

 

의건의 이름에 울렁대던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지금 자신이 무언가 할 일은 없었다. 성우는 모든 의욕을 상실했고 힘없이 축 늘어져버렸다. 왼손을 쫙 펼쳐 허공에 띄운 뒤 손가락을 살폈다. 왼손의 새끼손가락에 빨간 실로 만들어진 실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의건이 묶어준 이후로 한 번도 빼 본 적이 없었다. 빼자니 끊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묶어 줄 그가 없었으니까. 아마 실로 인한 자국이 깊게 새겨져 있을 것 같았다.

 

 

 

 

 

*

 

 

 

 

 

다니엘의 일상은 엉망이 되었다. 마치 누가 머릿속으로 들어와 잔뜩 구겨놓은 것 같았다. 밝은 색은 하나도 없었다. 맑은 날도 없었다. 모두가 행복하고, 날씨가 좋다고 해도 다니엘에게만은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제 연인은 생사를 오가며 깨어나지 못한 채 병원에 갇혀 있다. 자신은 그런 연인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구겨진 일상을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시간이 가는 게 야속하면서도 다행이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기분은 혼자가 되어 버린 다니엘의 시간을 새카맣게 물들여버렸다.

 

 

성우가 마음대로 가져다 놓은 물건이 가득한 자신의 집을 둘러보며 다니엘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 꼬박꼬박 먹어야 한다며 챙겨 준 영양제들, 가끔 입어줬으면 좋겠다며 사준 값비싼 수트, 직접 해 먹기 싫으면 데워먹기라도 하라며 냉동실에 잔뜩 사다 놓은 인스턴트 냉동식품들. 성우가 다니엘의 집에 사다 놓은 것들은 전부 일상에 허투루 소비 될 일 없던 것들뿐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괴로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게 재미만 보고 만났던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어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럴싸한 말로 성우의 일상에 스며들려 노력했지만, 사실 성우가 먼저 다니엘에게 물을 들였다. 성우는 모르고 있겠지만, 다니엘에게는 그랬다.

 

 

일부러 습관을 들이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연락을 했었다. 성우가 그 시간만 되면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자신이 그 시간만 되면 성우를 떠올렸다. 성우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오늘은 어떤 답을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익숙해지고, 그런 자신이 신기해졌다. 자신답지 않았던 일상을 성우 덕에 누리게 되면서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익숙함이 가져다 준 변화는 단순한 호기심과 호감을 사랑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 성우에게 갈 수 있었다. 정말 그랬었다.

 

 

다 시들었겠다. 나 아니면 물 줄 사람도 없을 건데.”

 

 

침대에 널브러져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다니엘은 문득 떠올렸다. 성우의 병실에 가져다 놓은 화분을. 의식을 잃고 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붙잡고 있는 성우에게 건넸던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던 그 화분은 항상 다니엘이 물을 주었다. 성우가 좋아할 것 같아서 가져다 놓았는데 정작 그는 보지 못했다. 가지 못했던 시간 동안 그 화분은 다니엘의 이야기를 궁금해 했을 것이고, 성우를 바라보며 갈증을 호소했을 것이다.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성우와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보고 있던 다니엘의 눈에 반갑지 않은 이름이 들어왔다. ‘김지연이라는 이름. 받을까 말까 하다 쓴 소리나 듣고 말지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 그렇지. 어쩐 일인데?”

[성우 말이야... 아프다며?]

그게 누나랑 무슨 상관이야?”

[, 누나... 다니엘이 나한테 누나 소리를 다 하는 구나.]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아니, 그냥...’이라는 말로 그녀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저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성우를 핑계 삼아 전화했거나, 정말 성우의 상태가 궁금해서 전화했거나. 어떤 이유라도 반갑지 않았다. 이미 끝난 관계에 구질구질하게 핑계를 끌어다 놓는 건 너무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굳이 이렇게 전화해서 형 이름 들먹이면서 속 긁어야 되나?”

[니엘아, 나는 그냥...]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용건 없으면 끊을게.”

[... 저기...!]

 

 

수화부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우 사고 나던 날... 전화했었는데 안 받더라고...]

 

 

지연의 입에서 성우가 사고를 당하던 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다니엘은 뒤통수를 거하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냥 친구니까... 그래서 잘 지내는지 묻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지연은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흐느꼈다. 그 흐느낌이 왜 다니엘에게는 웃음소리로 들렸는지 모르겠다. 성우가 이렇게 된 것은 둘이서 자초한 일이며, 너 대신 성우가 벌을 받았다는 걸 다니엘에게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굳이 이제 와서 꽤 시간이 지난 성우의 사고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래서?”

[미안하다고...]

미안? 미안하다는 말이 나와?”

[괜히 나 때문에 성우가 사고 난 게 아닐까 해서...]

오히려 좋은 일 아냐? 너한테 나쁘게 굴었던 벌 받는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니엘아...]

더 들어주고 싶지 않으니까 끊을게. 미안하다고 해서 형한테 사과 할 생각하지 마.”

[......]

사과든 뭐든 내가 다 할 테니까 하지 말라고, 너는. 형 인생에서 빠져.”

 

 

멋대로 전화를 끊은 다니엘은 휴대전화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그래, 사실 다니엘도 지연을 두고 성우를 만날 생각을 할 때에는 많이 미안하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많이 좋아하고 사랑해 준 여자였으니까. 헌신하려 했고, 자신에게 쩔쩔 매며 잘 하려 했던 그녀를 매몰차게 내팽개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우가 없었더라면 말이다. 오로지 성우가 있었으니까, 그를 바라보고 연인 관계를 끝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으니까.

 

 

내심 쿨하지 않았지만 성우 앞에서는 항상 그런 척 했었다. 받아주면 고마운 거고, 받아주지 않으면 받아주게 만들면 되는 거고. 그 말을 성우에게도 늘 했었다. 관심의 표현을 가장한 세뇌였으니까. 결국 성우의 눈동자가 자신을 보며 흔들린 것을 확인하고 다니엘은 제 뜻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성우는 다니엘을 사랑했고, 다니엘은 그것을 알아챘었다.

 

 

옹성우, 나쁜 새끼...”

 

 

 

 

 

*

 

 

 

 

 

성우가 일본 군경의 행사에 다녀온 뒤 아버지는 집에 붙어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집사에게 듣자 하니 그 날 제법 큰 사고가 있었단다. 행사 중 일본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노래를 함께 합창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가지는 와중에 행사장 내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로 인해 참석한 인원 중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다행히도 성우의 아버지는 집사와 함께 도망치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 성우의 아버지는 더욱 더 일본군에 적극 협조하며 제 존재를 확고히 하려 밤낮없이 드나들었다고 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물론 그에 대해 성우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성우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상세히 알리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리려 했던 것인지, 성우가 미덥지 못해 그랬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의건이 낯선 남자에게 부탁해 성우를 데리고 나온 덕에, 성우는 아무런 피해 없이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신기했다. 집사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치 의건은 모든 것을 알고 그랬던 것 같았다.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요?”

.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던 성우의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집사는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누구인지 물으니 집사도 간곡히 성우를 만나기를 원하는 것만 들었을 뿐,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고 했다.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라는 말 외에는. 자신을 찾아 올 손님이, 더욱이 여성은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저를 찾아왔다니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 앞에 서서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문을 열었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장미꽃이 달린 화려한 머리장식을 얹은 여자가 돌아보았다. 그녀는 성우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를 건넸다. 응접실로 들어선 성우가 문을 닫고 테이블 앞에 가서 앉자 그녀도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려는 어색한 공기를 그녀가 인사말로 내쫓았다.

 

 

하루코 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제 얘기를요?”

. 의건씨에게서요.”

... 그런데 무슨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의건씨에 대해서.”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을 든 그녀는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으며 뚫어져라 성우를 바라보았다.

 

 

의건씨 말대로 참 눈이 맑으신 분이네요. 정말 때 묻지 않으셨네.”

그게 무슨...”

의건씨가 성우씨 얘기를 많이 했어요.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낯선 남자에 이어 제 앞에 마주 앉은 여성의 입에서도 의건의 이름이 나왔다.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이름은 왜 자꾸 자신의 주변을 돌고 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한 번 나타나주는 게 좋을 텐데 말이다.

 

 

의건씨... 찾고 계시죠?”

“......”

이거.”

 

 

그녀는 자신의 옆에 놓아 둔 작은 토트백에서 쪽지 하나를 건넸다.

 

 

이따 제가 가고 나면 읽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성우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는 몇 번이고 말을 시작하려다 뜸을 들였다. 그리고 한참 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의건씨는 이제 당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경성에서...”

 

 

커피 잔을 집으려던 성우의 손이 강하게 떨렸다. 그 덕에 성우는 커피 잔에서 손을 떼었다. 손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그 무엇도 성우의 떨림을 멎게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의건의 죽음을 전하는 그녀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이상하지 않으셨나요? 아버지를 따라 참석한 행사장에서 갑자기 다가 온 낯선 남자가 다짜고짜 의건씨를 거론하며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 준 것. 마치 그곳에 성우씨가 올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죠. 분명히 그 낯선 남자는 의건씨와 성우씨의 관계를 알고 있는 듯 이야기 했겠죠. 그렇죠?”

 

 

그녀의 입에서는 성우가 믿기 힘들었던 일들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줄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낯선 남자도, 저도 의건씨와 함께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의건씨가 죽기 전까지는요.”

 

 

그녀는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의건이 죽었다는 것을 말이다. 믿을 수 없어 손을 떨고 있는 성우를 진정시키려는 의도도 아니었고, 더욱 흥분하게 하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성우에게 사실만을 전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 행사에 성우씨의 아버지가 참석하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 쪽 정보원이 미리 참석자 리스트를 전해주었고, 그것을 확인한 의건씨는 많이 놀란 얼굴로 한참을 있다가 제게 부탁했습니다. ‘야마시타 히데키가 아들과 함께 참석 할 예정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그의 아들을 빼내야 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의건씨는 털어놓았습니다. 자신과 성우씨의 관계를 말이죠.”

 

 

의건은 이미 자신의 마지막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것을 성우에게는 알릴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독립을 위해 일본 군경에 경고를 해야 했고, 그것을 하려면 희생이 필요했다. 의건은 자신이 기꺼이 희생에 동참하겠다며 대신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단다. 그 부탁은, 그 행사에 참석한 성우를 무사히 데리고 나와 집에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의건은 그 행사장에 일본군복을 입고 온몸에 사제 폭탄을 두른 채 들어서서 폭발을 일으킬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에 성우가 포함되어 있으면 안 됐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하루코와 낯선 남자는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의건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지금껏 의건씨는 눈빛 한 번 흔들린 적 없었어요. 항상 굳건했고, 독립을 위해서라면 제 한 몸 희생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다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사람의 눈빛이 흔들렸던 건 성우씨가 자신 덕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 할 때였어요. 그 행사장에서 무사히 데리고 나와 주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 부탁할 때,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릎도 꿇었어요.“

 

 

성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의건씨는 성우씨에 대한 마음이 너무도 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고 했어요. 그저 너무도 먼 미래에나 가능할 소망만 전했다고 했죠. 독립한 우리나라에서 성우씨와 함께 마음 편히 산책하는 것. 그것이 그의 소망이었어요. 독립 다음으로 간절했던. 독립을 바라는 이유에 성우씨도 더해졌습니다.”

 

 

성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의건씨는 성우씨를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품고 있었어요.”

“......”

평생을 매일같이 전해도 전할 수 없을 만큼.”

그런데 왜...”

당신을 독립한 우리나라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죠.”

 

 

의건은 하루라도 빨리 성우를 독립한 나라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단다. 그것이 그녀가 들었던 그의 소망이자 꿈이었다고 했다. 하늘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의건씨는 겁내지 않았어요. 오로지 당신을 지키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그게 무슨...”

 

 

할 말을 모두 한 것인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제가 드린 쪽지는 꼭 제가 가고 난 뒤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의건씨를 너무 원망하지 말아주세요.”

“......”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으니까요.”

 

 

그 말에 성우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의건씨가 많이 기다릴 거예요.”

 

 

하루코는 너무도 침착했고, 제 동료이자 친구를 잃은 사람이라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성우는 괜히 더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가보겠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드려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만...”

아닙니다. 감사해요.”

그럼, 이만.”

 

 

그녀는 가슴 앞을 손으로 가리며 허리를 숙였다. 성우도 덩달아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먼저 응접실을 빠져나가고, 성우는 다시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에게 건네받았던 쪽지를 확인해보았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주소가 쓰여 있었다. 이곳에 가면 의건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주소지로 가면 피투성이가 된 의건을 만날 수 있는 것인지, 한줌의 재로 변해버린 그가 맞아주는 것인지.

 

 

강의건, 그는 성우를 어떤 모습으로 맞아줄지.

 

 

 

 

 

의건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성우는 며칠 간 말을 잃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식사도 하지 않았고 의욕 없이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거나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집사나 집안일을 돕는 이들이 몇 번이고 상태를 확인했지만 그때마다 괜찮다며 손사래를 할 뿐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성우의 방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쪽지에 적힌 주소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책상 위에 올려둔 백일홍의 꽃송이를 보았다. 붉은 기를 잃고 시들어버린 꽃송이가 힘을 잃었다.

 

 

사실 갈 수 없었다. 주소지로 찾아가면 의건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인정해야 한다면 정말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경성으로 와버리는 바람에 제 연인인 다니엘을 잃었는데, 이곳에서 만난 의건까지 잃게 된다면 정말 제 주변에는 아무도 없게 될 것 같았다.

 

 

의건씨가 많이 기다릴 거예요.’

 

 

몇 번이고 하루코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의건이 성우를 기다릴 거라고 했던 그 말. 그렇다면 성우는 의건의 죽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가보아야 하는가 싶었다. 가서 웃는 얼굴을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성우는 고개를 수차례 저어대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며칠 간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는 성우의 모습이 예전과는 많이 달랐지만 집사는 차라리 다행이지 싶었다. 예전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이 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려는 것 같았으니까.

 

 

어디 가십니까?”

잠깐 어디 좀 다녀와야 해서요.”

오래 걸리십니까?”

아니에요.”

모셔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짐도 있으신데...”

괜찮아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채비를 끝내고 방을 나서는 성우를 붙잡았던 집사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 서려 있었다. 성우는 애써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고, 한 손에는 커다란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주소가 적힌 쪽지를 꼭 쥐고 1층으로 내려가는 모습에는 힘도 생기도 없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발길을 옮기는 모습 같았다. 그래서 더욱 집사는 제가 데려다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 같다.

 

 

대문 밖을 나선 성우는 밝게 내리쬐는 햇빛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쪽지를 쥔 손으로 눈앞에 그늘을 만들었다. 참자, 참고 견디자. 성우는 그 말을 되뇌며 조금씩 걸음을 떼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주소지가 적힌 쪽지를 보여주었다. 주소를 확인한 기사는 바로 출발을 했고 성우는 차창을 조금 열어 밖을 보았다. 스쳐가는 풍경들은 그저 아름답고 반짝거렸다. 밝은 표정의 사람들도, 푸른 잎을 잔뜩 매달고 서있는 나무들도, 햇빛을 잔뜩 머금은 건물들도. 흔히 이별한 사람들이 느끼는,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밝고 아름다운 그 풍경. 그 풍경 속에 어두운 그늘이 되어 자리 잡은 성우는 참 슬프고 가련했다.

 

 

도착했습니다.”

 

 

택시가 멈춰서고 요금을 지불한 성우는 내리자마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낮은 언덕과 그곳에 우뚝 솟은 나무 한 그루. 성우는 손에 든 종이가방을 다시 한 번 챙겨들고 언덕을 올랐다. 나무와 가까워질수록 성우의 눈앞이 흐려졌다. 수트를 차려입고 언덕을 오른 탓에 땀이 흐른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나무 아래에 도착했을 때, 나뭇잎들이 만들어 준 그늘이 성우를 맞이했다. 그리고 성우의 발 앞에 작은 봉분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크기보다는 훨씬 작은 봉분이었다. 그토록 부정하고 싶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저만치 앞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오지 말라 손사래를 쳐도 다가오고 있다.

 

 

성우는 제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봉분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의건씨...”

 

 

봉분을 천천히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의건의 뺨을 쓰다듬듯, 어깨를 토닥이듯, 가슴팍을 다독이듯. 정말 이 안에 그가 있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왠지 있는 것만 같아서 속이 상했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보니 봉분 위에 꽂힌 무언가가 보였다.

 

 

두어 번 접힌 종이를 봉분에 꽂아놓은 붉은 꽃가지. 익숙한 꽃송이를 달고 있었다. 성우는 꽃가지를 빼어내 흰 종이를 집어 들어 펼쳤다.

 

 

[왔어? 오랜만이지? 내 말이 맞지? 다시 만났잖아.

 

백일홍은 마음에 들어? 성우씨 온다고 제일 예쁜 걸로 꺾어 왔는데.

 

, 나무에게는 사과했어. 기꺼이 내어 주더라고.]

 

 

글귀를 읽어 내려가는 성우의 눈앞이 잔뜩 흐려졌다.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백일홍의 꽃말은 인연이라더라. 행복이라는 뜻도 있다더군.]

 

 

떠나간 임을 그리워함이라는 뜻도 있지...”

 

 

[손가락에 묶어 둔 붉은 실은 이제 끊어내도 돼.

 

그래도 가기 전에 당신 얼굴은 봤어.

 

아버지 옆에 서서 멋쩍게 웃는 모습도, 잔뜩 굳어 있던 모습도.

 

보니까 좋더라. 그 덕에 잠시 살고 싶어 졌었어. 아주, 잠깐.]

 

 

편지 위로 성우의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 태어나면 찾아갈 테니 만나줘.

 

읽으면서 그게 말이 되느냐며 웃고 있지?

 

말이 되게 할게. 내가.

 

그러니 울지 말고 웃으며 지내고 있어줘.

 

나를 잊지 말고, 나를 놓지 말고, 밉더라도 가슴에 품고 살아줘.

 

- 의건. ]

 

 

성우는 제 가슴에 편지를 품었다. 읽을수록 의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옆에서 한껏 미소를 지으며 읊조리는 것 같아서. 봉문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제 가슴팍을 쳐대며 소리 내어 울었다. 태어나 이렇게 큰 소리를 내며, 얼굴을 눈물로 적셔가며 원망을 토해냈다. 봉분 안에 잠들어 있다면 우는 소리도 분명히 들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건은 성우를 다독이지 않았다. 달래주지 않았다.

 

 

백일홍을 손에 쥐어 준 의미는 단순히 예뻐서가 아니었나 보다. 처음에는 백일 간 붉은 빛을 낸다고 해서 백일홍이라 불린다며 뜻을 설명해주더니, 그걸 핑계로 정신 나간 짓 한 번 해도 괜찮지 않겠냐며 입을 맞춰왔다. 그 입맞춤이 마치 다니엘과 나누던 것과 같아서 온몸이 저릿해질 정도로 떨렸었다. 그 다음은 욕심이 가라앉지 않는다며 백일홍을 주었었다. 언제나 그랬듯 깜짝 놀라게 만들며 나타났던 의건은 성우에게 큰 재미이자 경성 생활을 이어 나가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었었다.

 

 

또 한 번 백일홍을 주던 때, 의건은 볼 때마다 자신을 떠올려달라며 성우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을 묶어주었다. 그렇게 의건은 성우에게 제 인상을 깊게 새겼다. 백일홍과 함께. 붉은 백일홍의 꽃잎처럼, 붉고 강렬하게 생을 살았던 의건이었다. 오래 알지는 못했어도 성우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삶과 생이 백일홍을 닮아 있었음을. 그래서 저를 대신해 백일홍을 성우의 곁에 두었음을.

 

 

당신을 떠올리라며 백일홍을 줬으면, 시들기 전에 새 꽃을 주거나 앞에 나타나거나 했어야지.”

 

 

다시 마주한 꼴이 결국 이거라니. 한참을 울던 성우가 울음을 그치고 기가 찼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사람 뭐가 그리워서, 뭐가 대단해서 나는 여기까지 왔어.”

 

 

성우는 내려놓았던 종이가방 속에서 검은 옷가지를 꺼냈다.

 

 

그렇게 독립을 원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에 일본군복을 입고 가요?”

 

 

일본이라면 치가 떨린다며 몸서리를 치기도 했던 의건이다. 독립을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일본을 멸하게 하는 짓이라면 기꺼이 돕겠다고 자랑스럽게 외치던 그였다. 그런 그는 자신이 지독히도 싫어하던 일본군의 옷을 입고 목숨을 내던졌다. 목적이 있었지만 그것을 위해 일본군의 옷을 입는 것조차 치욕스러워도 참았을 것이다.

 

 

미리 얘기라도 해주지. 그럼 좋은 옷 입혀서 보내주지. 내가 아무리 말려도 갔을 거잖아요, 어차피.”

 

 

원망 섞인 성우의 목소리에 의건의 답은 없었다.

 

 

사실 나는 엄청 먼 미래에서 살다가 왔어요. 당신과 닮은 연인도 있었어.”

 

 

너무도 똑같아서 첫 만남 당시 성우는 다니엘이 함께 이곳에 와준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그 사람은 어떨까? 나를 찾고 있겠죠?”

 

 

성우는 현재 다니엘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고 싶다고 해서 2018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 어떻게 그곳으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성우는 지금 당장 의건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는 당신을 찾고 있어.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해요.”

 

 

마치 의건이 다니엘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성우가 있어야 할 곳은 다니엘의 옆이라며 제 자리를 찾아주려 하는 것처럼.

 

 

어차피 독립은 하게 돼요. 나는 그걸 알고 있으니까 당신만은 힘을 보태지 않기를 바랐어요.”

 

 

의건이 그렇게 소망하던 독립은 끝내 이루어진다. 의건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래서 독립을 이뤄 낸 나라에서 행복을 만끽하며 의건의 꿈대로 손을 마주잡고 편한 마음으로 산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독립은 당신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겠죠. 그랬을 거야.”

 

 

나 하나쯤이야가 아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나부터라도라는 생각을 가졌던 의건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독립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 끓는 청춘을 독립을 위해 바치고, 기꺼이 나라를 위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었던 용기. 의건 또한 강한 용기를 가졌던 청년이었고, 그 덕에 사랑을 나누었던 성우에게는 아픔을 주었지만 먼 훗날 나라에는 독립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입어줘요.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고 했으니까 멋진 옷 차려 입고 나타나요.”

 

 

성우는 봉문을 쓰다듬다가 제 새끼손가락에 묶여 있던 붉은 실을 빼어냈다. 묶어준 이후로 빼지 않고 생활했던 탓에 조금 닳아 있었지만 겨우 빼내어 입으로 한 번 후 불어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봉분 위에 자라난 풀에 붉은 실을 조심스레 걸어두었다.

 

 

잊지 않고 놓지 않고 가슴 속에 품고 살아 갈 테니까... 나타나요.”

 

 

성우는 봉분 위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고는 다시 한 번 토닥였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도 좋아요. 기다리고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