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월간녤옹

 

 

 

 

 

 

 

 

 

세상에는 참 착한 신들이 많다. 늘 바빠서 시간도 못내던 우리들이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을 만들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세상 그 분들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아니 그 전 날 밤부터 같이 있었던 우리 둘은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진정 이 순간 느끼는 행복이 내 것 같지 않은, 그렇다고 그 누구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기분이었으니까. '다니엘..', '?' 그의 귀에 여리게 속삭이면 그도 마찬가지로 내 귀에 답했다.

 

 

 

가볍게 입을 맞추자 두터운 마카롱 아래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좋냐고 묻자 말없이 웃는 그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한없이 예뻤다. 커다란 손이 나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품으로 당겼다. 하루종일 집에서 그것도 추운 겨울날에 커다란 담요 하나를 같이 덮고 눈앞에 반짝 거리는 화면 속 영화. 최고의 휴식이자 쉽게 가질 수 없는 시간이며 스치다 찾을 수 없는 행복이었다.

 

 

 

 

 

 

 

"크리스마슨데... 대형 트리 앞에서 사진이라도 찍고 올 걸 그랬나?"

 

"됐다. 그래 찍어가 뭐할라고. 카톡 프사도 내 사진만 해라. 같이 찍은 사진 하지 말고."

 

"? 내 얼굴이 그렇게 못 생겼어?"

 

"미칬나? 내 눈깔 두 쪽 다 있다. 어디 안 팔아 뭇다. 잘생긴 얼굴 세상에 다 보여줘가 누가 채갈가 싶어서 그러지."

 

"내가 채간다고 채가질 사람이야? 나 옹성우야."

 

", 니는 너무 튕겼다. 내 진짜 햄한테 사귀자 말할 때 그때가 딱 마지막이었다."

 

"나도 마지막이어서 좋다고 한 거야."

 

"..."

 

"사랑해."

 

"사랑하면 뽀뽀."

 

 

 

 

 

 

 

이번에는 조금 더 깊은 입맞춤이었다. 얼마 전 그의 생일에 선물한 귀걸이가 끝에서 반짝 거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이었나? 거울 앞에서 '누가 사줬는지 기깔난다. 사준 사람이 이뻐가 그런가?' 라고 다들리게 소리친 다니엘이었다. 눈앞에 아른 거리는 빛을 거쳐 나오는 영화는 이제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더 눈에 담고 있었다. 5년이란 시간이 그리 짧은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잊고 말고 할 정신 없이 그저 눈에 담긴다.

 

 

 

그러니까 그 날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추운 날이었다. 크리스마스라서 너무나도 추웠기에 우리는 서로의 손길이 없어서는 안 됐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그리 화려하지 않은 공간에서 밝은 것보다는 어둡게, 시끄러운 것보다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조용한 것이 더 좋았다. 처음 지나가듯 스친 우연은 어느새 우리를 사랑으로 채웠고 그렇게 영원히 사랑 하기를 바랬다. 이 순간이 좋았다.

 

 

 

 

 

 

 

"조금 있으면 여름이네. 우리 니엘이 또 난리 나겠다."

 

"몇 달 남았다, 아직."

 

"시간 금방이야. 여름에 연습실 에어컨 켜놓는 거 잊지 말고. 밤에도 그렇고. 되도록이면 밖에서 농구도 하지 말고."

 

"에이-, 그래봤자 우리 햄이 다 챙기주는데 뭘."

 

"누가보면 평생 챙겨준다고 한 줄 알겠다."

 

"평생 이래 있을 건데. -."

 

 

 

 

 

다니엘의 미소가 꽤나 크게 번지며 제 팔을 나에게 감싸 그의 품으로 들이켰다. 좋아. 나도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 평생 사랑 하고 싶어. 너의 옆에서 말이야.

 

 

 

여름을 아프고 힘들게 보내던 다니엘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처럼 거창한 말은 몰랐지만 우리의 사랑이 짧은 순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일은 아닐 것이라며 우리의 사랑을 이어갔다. 우리는 사랑했다. 맞아, 우리는 사랑했어.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을 때,

 

 

 

나는 다니엘과 헤어졌다.

 

 

 

 

 

 

 

 

 

 

 

여름까지만 남겨진 발자국

: 결코 그 발자국을 이을 또 다른 걸음이 나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구원2021

 

 

 

 

 

 

 

 

 

 

 

 

 

아침부터 회의실로 모이라는 선팀장의 말에 움직여 급히 서류를 챙긴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출근하자마자 시작해서 그런지 정신줄이 반만 연결된 것 같았다. 아침부터 지각할까 싶어 급히 나왔긴 한데. 문단속은 제대로 한 건지. 가스벨브는 잠갔는지 생각하다 오늘 저녁 메뉴를 또 다시 생각했다.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대로 삼켰다. 일단 입꼬리 단속부터 하자는 마음에 왼손으로 입을 어루만졌다.

 

 

 

 

 

 

 

"성우씨. 천연 식탁, 3차 고객 만족도 조사랑 설문 조사 정리한 서류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순간 서류를 달라며 손짓 하는 팀장님의 시선을 무시할 뻔 했다. 다행이 어제 밤까지 정리한 서류가 다행히도 잘 사용이 되는 것 같아 뿌듯하긴 했지만 떨리는 긴장감 덕분에 잠은 모두 달아난 것 같다. 시간은 무더운 여름이 되어버렸고 어느새 회의실에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가득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가구 회사지만 그래도 나름 내 실력을 뽐낼 수 있고 월급도 괜찮은 직장이었기에 불만도, 후회도 없었다. 마치 다니엘과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별을 한 순간까지 불만도, 후회도 없었던 것처럼.

 

 

 

 

 

 

 

"회의는 이쯤하고 오후에 매장조사는 누구?"

 

"제가 맡았습니다."

 

"성우씨가 잘 해주시고, 썸머 시즌 가구 박람회에 출품할 아이템은 컨펌 후에 계속 진행하도록 하죠."

 

 

 

 

 

 

 

, 알겠습니다. 아이템을 생각해야 할 팀원들은 팀장님이 나가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몇 안 되는 기업이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시민들에게 우리 회사의 아이템이며 특징을 알리는 자리이니 만큼 그리 쉬운 마음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나와는 그렇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기에 한숨으로 회의실을 가득 채우든 담당 팀원들에게 응원 한 마디를 남기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점심 먹고 나가면 되겠지. 그 전까지 매출 보고서를 끝내겠다 마음을 먹었다.

 

 

 

7월이 된 서울은 아스팔트 여기저기가 지글지글 끓고 밤이 되면 한강에 사람들이 득실거리며 에어컨은 선택이 아닌 절대적인 필수였다. 봄이 되었을 때 막상 생각은 나지 않았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를 잊었다고 생각했었다. 여름이 되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우리의 이야기에 여름이란 페이지가 더 많아서 그런 걸까. 문득 머릿속이 비워지면 찾아오는 이름이 다니엘이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이름을 되뇌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뭐에 쪼들렸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급하게 해치운 보고서를 재쳐보니 점심 시간이었다. 식판에 늘상 보이던 반찬과 밥, . 여름만 되면 입맛이 없었던 나인지라 조금 깨작거리다 국에 밥을 말아버렸다. 팀원들과의 대화로 머릿속을 정리했고 그러다 또 다시 머릿속이 조용해지면 찾아오기도 했다. 다니엘이란 이름은 잊어버릴 일도 없겠지. 평생을 살면서 절대 지워지지 않는 이름일 것이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이름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모습의 그를 말이다.

 

 

 

 

 

 

 

"성우씨 바로 매장으로 가는 거야?"

 

". 금방 갔다 다시 돌아와야죠."

 

"올 때 메로나~."

 

"갔다 올게요."

 

 

 

 

 

 

 

어정정한 김대리의 인사에 눈을 찡그리며 받아쳤다. 로비를 지나쳐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정말 이 날씨에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더운 것도 더운 것이지만 숨막히는 공기는 너무나도 답답했다. 매번 경험하는 여름이지만 늘 이 더위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사계절이라 아름다운 모습을 여럿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단점은 어느 한 날씨에 적응하기 힘든 것이다. 아무래도 고정되지 않은 날씨이기도 하니까. 열대 아마존은 1365일 더워 쪄죽을 텐데. 그곳에 사는 사람 역시 적응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와의 여름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여름은 힘들긴 했지만 꽤 여러 이야기들이 많았다. 다니엘을 처음 만난 것도 여름이었고 사귄 것도 그 해 여름이었다. 5년의 추억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라질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나의 기억이었다. 아마 오늘은 나와 그의 첫만남이 더 생각날 것 같다. 걸어가면 분명 타 죽었을 거리인 매장을 그냥 버스를 타고 왔다. 정류장에서 몇 걸음 채 되지 않았던지라 다행이었다.

 

 

 

 

 

 

 

"? 옹대리님, 어떻게 오신 거예요?"

 

"안녕하세요. 저 매장 조사 나왔어요."

 

 

 

 

 

 

 

이곳에 대리님을 따라 나왔던 꼬꼬마 막내 인턴 옹성우가 처음으로 쇼파를 사러왔던 다니엘을 만났다. 말하자면 우리의 첫만남을 만들어 준 공간이었다. 5년 전, 여름에 갓 입사했을 때 처음으로 매장조사를 따라 나왔던 적이 있었다. 한 달 조금 넘게 일을 배우고 그렇게 사무적인 일에 적응할 때 나오게 된 외근이었다. 서류철을 잔뜩 품에 쥐고 멀뚱 거리다 나는 적장 다니엘을 볼 정신이 없었다. 물론 목소리는 들렸지만.

 

 

 

 

 

 

 

'소파, 햄이 사요. 내 돈 없다.'

 

'무슨 소리야. 너는 연습실 안 쓰냐?'

 

'햄이 뿔라 문 걸 왜 내한테 덮어씌워요.'

 

'내가 일부러 부러트렸냐? 실수로 그런 거 아니야.'

 

'실수는 무슨.'

 

 

 

 

 

 

 

처음 매장 조사를 나와서 맞은 손님은 다니엘이었다. 그때 정신도 없이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한 옹성우를 다니엘이 제일 먼저 본 것이다. 춤을 추며 버스킹처럼 공연을 하고 다니던 다니엘은 그 더운 여름 날에 연습실 소파를 부순 댄스팀 형과 함께 가구점에 들린 것이었고 정신이 없던 그 와중에 나는 멀리서 피부가 새빨간 다니엘을 봤었다. 피부가 탈려고 그러는지 몰라도 얼굴부터 팔, 다리가 정신없이 빨갰었다. 그와중에 분홍색 머리가 너무나도 돋보였던 게 아직까지 기억난다. 많이 더웠나 싶었던 나는 그저 눈길을 돌렸고 숙지할 내용들만 빠르게 익히고 있었다.

 

 

 

 

 

 

 

'성우씨 먼저 회사로 돌아갈 수 있겠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공장 직원하고 미팅 있어서 바로 가려고 하는데. 괜찮겠어요? 회사에 다시 들렀다 가기에는 시간이 조금 빠듯해서.'

 

'괜찮습니다. 그럼 전 먼저 들어가면 되는 거죠?'

 

'.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차도 없이 허겁지겁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 갔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자비 없이 더웠다. 누군가 나의 어디라도 손을 댄다면 당장 짜증이라도 쏟아 낼 수 있을 만큼의 더위였다. 그늘에서라도 뜨거운 태양을 피해보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기요!'

 

 

 

 

 

 

 

멀리서 부른 것도 아니고 다름 아닌 어깨를 붙잡고 불러 세운 사람은 얼굴이 화끈 거리게 달아오른 다니엘이었다. 더운 숨을 몰아 쉬면서 달려온 그에게 눈을 맞췄고 가까이서 봤던 첫인상은 분홍색 머리에다 붉은 빛으로 물들인 얼굴 때문인지 영락없는 복숭아였다. 땡그랗게 뜬 두 눈을 하고서 대충 숨을 고르고 나에게 한 말은 그 순간 내가 아닌 누구였어도 당황할 말이었다.

 

 

 

 

 

 

 

'내랑 연애 안 할래요?'

 

'...'

 

'내 딱 지금 반했는데.'

 

'...아니요. 저기 지금 그러니까 제가..'

 

 

 

 

 

 

 

순간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여자한테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남자에게 눈길이 간다는 그 사실을. 당황한 채 말을 계속해서 이을 수가 없었다. 그때 정말 든 생각은 뭘까 하면서도 오히려 다니엘에게 눈길이 갔다. 가까이서 펼쳐진 그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얼굴에 멀리서 봤을 때도 훤칠한 기럭지까지 어디에 내놔도 빠지는 것 하나 없었다. 민소매를 입은 그의 팔은 이미 여름에 최적화가 된 바디였다.

 

 

 

 

 

 

 

'죄송한데.. 저기... ,뭐가..'

 

'지금 말 안 해도 돼요. ... . 그니까 저 건물 보이죠. 저기... 아이다. 이름 뭐예요?'

 

', 이름, 이름이요? 이름은 옹성우고..'

 

'옹성우? 보니까 저 가구회사 다니는 거 맞죠? 내 나중에 만나면 그때 말해요. 지금 말 해도 내 상관없다. 일단 생각만 해봐요.'

 

 

 

 

 

 

 

그때 다니엘을 보고 알았다. 정말 사랑은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것이구나. 이렇게까지 사람이 사람에게 빠질 수 있는 것이구나. 나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회사로 가는 길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빠지는 노선인 버스를 잡아 타고 갔다. 버스가 다시 출발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모습이 창문으로 보였다. 순간 숨을 돌리다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그 순간 얼버무리며 이름은 그대로 다 말했다.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다 다시 든 생각이 방금 다니엘이 한 행동이 헌팅이지 않을까란 생각이었다.

 

 

 

살면서 남자를 좋아하는 내가 여자라면 모를까 남자에게 헌팅을 당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해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정말 내 사랑을 찾으려면 앱이라도 깔아야 하나 속으로 생각하다 지금 하는 짓이 무슨 짓인가도 싶었다. 그 날 오후 회사에서 일이라도 제대로 했을까. 머릿속에 그때 그 얼굴과 귀여운 사투리가 섞인, 어떻게서든 나를 잡으려고 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편으로는 좋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뭐라고 거절해야 되는 거지?'

 

 

 

 

 

 

 

다니엘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그에 대해 몰랐고 그는 나의 이름을 알았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을 때였다. 더군다나 무작정 풍덩 빠진 사랑에서 헤어나올 수도 없다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난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나에게 그런 순간이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고맙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난 내 눈에 조금 더 많이 담긴 사람을 잡아도 잡고 싶었다. 그랬는데...

 

 

 

 

 

 

 

'내 딱 맞췄네. 여 다니는 거 맞죠?'

 

'어떻게 여기 있어요?'

 

'서울에 이 회사 여 뿐인데 뭘.'

 

'...'

 

'생각 해봤어요? 내랑 안 사귈래요? 내 그래도 인기 좀 많은...'

 

'미안해요. 난 연애 할 생각 없어요.'

 

'...'

 

'아닌 건 아니라서...'

 

'원나잇... 그런 것만 해요? 연애는 안 하고? 내가 원나잇 하자고 하면 할래요?'

 

'원나.. 그게 아니잖아요! 사람을 뭘로 보고! 그게 아니라 난 그쪽을 모른다고! 무슨 일 하는지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데! 뭘 믿고 뭘 알고 내가 그쪽이랑 연애를 해요!'

 

'...남자라도 상관은 없는 거네요.'

 

'...?'

 

'그것만 알아도 됐다. 내 나중에 또 올테니까 계속 잘 생각해봐요.'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다니엘은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고 했다. 무작정 첫눈에 반해 버스 정류장에서 한 말이 걸려서 재차 확인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그 생각에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직설적으로 묻기 그래서 그랬다며 되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놨다 얘기했다. 나는 그때의 다니엘이 조금 저돌적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면이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 내 마음이 더 끌린 것 같았다.

 

 

 

그 후로 처음 만났던 매장이나 아니면 회사 로비에서 자주 다니엘을 만났다. 거의 하루에 두 번씩. 그것도 같은 질문. '내랑 사귈래요?' 그러면서 늘 물어보면서 자신의 대해 말했다. 이름은 강다니엘이고 나이는 스물 넷이라고. 나보다 한 살 어렸다. 가끔씩 팀 내에서 다니엘과 내가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갓 입사한 인턴한테 손님이 너무 자주 오는 것이 아니냐며 장난식으로 놀리던 것이 기억난다. 다니엘은 나에 대해 묻기 전 오히려 나에게 제 자신을 다 털어놓았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춤을 잘 추고 생일은 1210일이고 외동 아들이라 작은 것 하나까지도 나에게 말했다.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이름 석자일텐데. 어느 순간 내가 다니엘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이제 핑계 거리 하나가 없어지고 말았다. 다니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한 순간 뱉은 모든 말들이 귀에 들어와 나가지를 않았다. 오히려 계속 맴돌고만 있었지. 그렇게 처음부터 풍덩 빠진 사랑이 언제까지 이어지기나 할까... 놀랐었다. 다니엘의 마음을 받아 준 그 날은 3주가 지난 뒤였고 그 날도 역시 회사 로비에서 마주쳤으니까.

 

 

 

 

 

 

 

'아까도 봤는데. 또 보네.'

 

'... 커피 사러 온 거예요.'

 

'커피 뭐 좋아해요? 아메리카노? 라떼? 내는 아메리카노 묵는데.'

 

'...'

 

'생각 너무 오래하는 거 아이가. 그라다 머리에 불나요.'

 

'카라멜 마끼아또 좋아해요.'

 

'... 카라멜 마끼아또는 좋겠네. 옹성우가 좋아도 해주고...'

 

'나이는 내가 한 살 더 많아요. 스물 다섯.'

 

'?'

 

'인천에서 태어났고 그렇게 잘하는 건 없지만... 생일은 825. 얼마 안 남았어요. 외동은 아니고 누나가 한 명 있어요.'

 

'...'

 

'나에 대해 대충은 알았죠?'

 

'그렇네요. 나보다 햄이었네... 내랑 안 사귈래요?'

 

'아직도 좋아해요?'

 

'. 계속 좋아하고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도 좋아하는데. 사귀어도 되나?'

 

'내야 좋죠.'

 

 

 

 

 

 

 

다니엘을 보면 사랑은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다니엘을 두고두고 오래 봐왔던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몰랐다. 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것인 줄은 몰랐다. 누가 알았을까. 나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다니엘에게 점점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 꼼짝없이 그의 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거. 그 날부터 나는 다니엘과 같이 걸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알 수 있게, 발자국을 내면서.

 

 

 

 

 

 

 

"벌써 가시게요?"

 

". 오후에도 회의가 있어서 빨리 들어가봐야 돼요."

 

"조심히 가세요."

 

 

 

 

 

 

 

짧은 인사를 건네고 매장을 나왔다. 회사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도 태양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에 이런 저런 생각이 기어나오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다. 묘하게 마음이 거슬렸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사이에 아직까지 이런 저런 생각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내가 끝내지 못했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끝내지 못한다 해도 이미 끝나버린 것은 끝나버렸다. 괜한 미련과 생각은 오히려 나의 발목을 붙잡는 것 그 이상이었다.

 

 

 

 

 

 

 

".. 어떻게. 오늘 파데만 바르고 나왔는데. 피부 다 타겠다."

 

"얼굴은 둘째치고 다리도 미치겠다. 지금 화끈 거려."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은 연신 덥다며 탄식을 뱉었다. 피부가 탈까 만지는 손길에서부터 걱정이 느껴진다. 이런 날씨에 뭐가 안 탈까. 나는 괜히 팔을 한 번 어루만졌다. 반팔 셔츠라 왠지 모르게 팔에 화끈 거림이 느껴졌다. 그래도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날씨에 그 애만큼 할까.

 

 

 

 

 

 

 

'왜 자꾸 반팔 입어. 긴팔 입으라니까.'

 

', 이 날씨에 긴팔 입으면 내 진짜 뒤진다.'

 

'. 또 살 다 탔잖아. 농구 할 거면 체육관 같은데서 해. 땀만 나도 땀띠 생기는 애가 왜 이러냐?'

 

'됐다. 괘안타.'

 

'내가 안 괜찮다고. 여름만 되면 긁고 피나고 또 그러다 아프다 할 거 잖아.'

 

'내가 뭐 아프다고 징징대나 뭘 하나. 그냥 아프다만 하는 거지.'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소리만 들어도 좋겠다? 그지?'

 

'...'

 

 

 

 

 

 

 

다니엘은 여름 내내 마주치면 똑같았다. 그러니까 얼굴이고 팔이고 뭐든. 매번 어디서 광합성이라도 한다는 심정으로 계속 쬐는 것인지 모르지만 어떻게 볼 때마다 여기저기 빨갛고 에어컨 밑에서도 가라 앉지가 않았다. 다니엘의 피부는 약했다. 어릴 때부터 뙤약볕 밑에 오래 있으면 쉽게 피부가 타버린다 말했고 땀이 오랫동안 나면 땀띠도 생긴다 말했다.

 

 

 

 

 

 

 

'너 얼굴 봐. 지금 완전 홍당무야.'

 

'글나? 내 이상하나?'

 

'너 처음 봤을 때, 얼굴도 빨갛지 머리는 핑크색이지. 나 진짜 너 복숭아 처럼 보이더라. 복숭아 인간이 여기 있구나 했다고.'

 

'...많이 이상하나?'

 

'아니. 귀여웠다고.'

 

 

 

 

 

 

 

더위도 끔찍하게 타는 아이여서 그런지 긴팔은 절대 못 입겠다 말했다. 긴팔만이라도 입으면 피부가 타는 것만이라도 어떻게 할 텐데. 껍질은 또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가렵다 긁으면 이미 처리하는 것은 그 뒤에 일이었다. 햐얗고 뽀얀 피부는 오히려 여름에는 꽤나 약하고 여렸다. 그렇다고 해서 어디 아픈 얘는 또 아니었다. 연습실에서 춤만 몇 번 추고 오면 펌핑이 되어 돌아오는 놈인데. 이런 걸 외유내강이라고 해야하나.

 

 

 

 

 

 

 

'나 진짜 햄 만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 발랐다.'

 

'?'

 

'귀찮다아이가. 또 뭐 우예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팔 줘봐...'

 

'햄아.'

 

'?'

 

'햄이 우리 엄마보다 더 많이 챙기주는 거 같다.'

 

'...뽀뽀.'

 

 

 

 

 

 

 

내 이제 햄 없음 맨날 홍당무 아님 복숭아 맨키로 살아야 한다. 우야노. 어쩌기는 뭘 어째 내가 이렇게 해주면 되는 거지. 다니엘은 늘 더위에 약했던 것 같다. 자기는 여름이 싫다 말했지만 한편으로 나의 생일이 있는 여름이 오히려 더 좋다 말할 때도 있었다. 단지 내가 태어난 날이 지독하게 무더운 날이라서. 그래서 그의 곁을 벗어나지 못했었나. 아니다. 그냥 내가 챙겨주고 싶었다. 단순한 연민과 동정은 1도 없었다. 그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챙겨주면 내가 싫을 거 같았으니까. 그렇게 여기저기 걸어가며 발자국을 남겼다. 우리가 이만큼 걸어왔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또 누군가에게 절대 이 길을 혼자 걷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회사로 돌아와서 급하게 탕비실로 들어가 시원하게 커피를 탔다. 미리 내려진 커피를 컵에다 쏟아 붓고 얼음을 동동 띄웠다. 한 모금 마시며 들어오는 얼음이 입안을 굴러다니며 혀를 적셨다. 계속 얼음을 굴리다 이제 다니엘의 팔에 얼음을 올려 문지른 것도 하다 하다 생각이 다 난다. 그때가 딱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될 쯤이었는데.

 

 

 

 

 

 

 

'이제 한 시름 놓겠다. 그래도 가을이라 덜 할 거 아니야.'

 

'.'

 

'? ? 얼음 입에 넣어줘?'

 

'아니. 그거 말고.'

 

'뭐 어떤 거? 커피 타줘? 우유? 설마... 야 지금 12시 넘어서 배달음식 시키려고 해도 못 시켜.'

 

'누가 묵을 거 말했나.'

 

'그럼.'

 

'이거.'

 

 

 

 

 

 

 

나의 무릎을 베고 누웠던 다니엘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곤 나의 입술을 삼켰다. 입안에 오물 거리던 얼음이 차갑다가도 다니엘의 뜨거운 숨들에 금세 녹아 시원함이 불었다. 서로의 입술 사이로 얼음이 녹아 흐른 물들이 입가 주위로 흘렀다. 어느새 다니엘의 목에 감겨진 나의 팔이 그의 몸을 놓았을 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가까이서 다니엘을 보자 붉어진 얼굴이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긴장되어 보였고 뜨거운 태양에 탔을 때보다 더 뜨거움을 느꼈다.

 

 

 

 

 

 

 

', 우리...'

 

'갑자기?'

 

'? 싫나?'

 

'너 피부 어떻게 다 나아야 되는 거 아니야?'

 

', 내 껍데기 일라고 뭐해도 하는 건 잘한다. 우리 처음 본 날 해도 상관없었을 걸?'

 

'...키스해줘.'

 

 

 

 

 

 

 

키스를 원하는 한 마디에 다니엘이 성큼 다가왔다. 아까보다 더 빠르게 더 강렬하게. 다가온 인영이 그의 것이라 마음이 포근했다. 스치는 입술 사이로 그가 들어와 헤집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더 강렬하게 원한 적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강렬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토록이나 다니엘을 원했다. 서서히 우리는 그 날을 물들였다. 더 세차게 아주 깊숙이.

 

 

 

서로가 서로의 몸을 스치는 손길부터 뜨겁게 새어 나오는 숨결까지 뭐 하나 흥분되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다니엘은 처음부터 풍덩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하면 나는 계속해서 다니엘에게 물들고 말 것이다. 계속 물들고 물들어 절대 뺄 수 없는 다니엘의 색깔이 몸에 새겨질 것만 같았다. 에어컨을 틀어도 어느새 차가운 공기보다 우리들의 숨에서 불어나온 열기가 가득 차고 있었다. 또 다시 자국을 남겼다. 이번에는 서로의 몸에 말이다. 누구도 이 사람을 열어볼 수 없게. 계속 내 것이라는 자국을. 그때만큼 소유욕이 강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뺏기기 싫은 사람이었으니까.

 

 

 

 

 

 

 

"성우씨. 우리 회의 들어가죠."

 

"."

 

 

 

 

 

 

 

정신을 깜빡 팔아버렸다. 진짜 여름이라 그런가. 연애 5년 반이란 시간을 깨끗이 치우고 우리 둘은 정말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가끔이나마 들려오는 소문도 없었던 것 같다. 헤어지고 난 뒤에 연인의 소식 정도는 뜬구름처럼 다가온다던데.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은 이야기였나보다. 아침에 말했던 썸머 시즌 가구 박람회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누군가는 이 회의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물론 나로서는 아이디어 제공 수준까지만 하면 됐었으니 그리 자세하게 듣지는 않았다.

 

 

 

오후가 조금 깊어지는 시간이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파랬다. 해가 길고 밤은 짧으니 퇴근할 시간이 되어도 환한 창가를 바라봤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지금 이 시간 쯤 새까맣게 변해버렸을 텐데. 겨울은 또 다시 해는 짧고 밤은 길었으니. 여름에 그리 고생했던 다니엘은 겨울에 가장 예쁜 아이였다. 하얀 피부가 내리던 눈보다 더 하얗고 반짝 거렸다. 언제 한 번 길가에 우두커니 선 다니엘을 봤을 때, 그리고 그 날 하루종일 붙어다닐 때 수도 없이 설렘을 느꼈다. 이 또한 내가 사랑한 사람이기에.

 

 

 

 

 

 

 

'우리도 저래 커플티나 함 입을까?'

 

'애도 아니고. 무슨 커플티야...'

 

'창피하나?'

 

'꼭 그런 건 아니구. 그냥 뭔가 좀... 그래.'

 

'뭐가 그런데? 부끄럽나?'

 

'...그럼 뭐 뿌듯할까?'

 

'내는 뿌듯할 거 같은데. 천하의 옹성우를 내가 잡았다고.'

 

'뭐라는 거야. 누가보면 너한테 철벽친 줄 알겠어.'

 

'그럼 그 전까지 나한테 친 건 거미줄이었나?'

 

 

 

 

 

 

 

지나가던 커플이 입었던 똑같은 문양에 다른 색깔 옷. 나는 그저 쑥스러워 넘겼지만 다니엘은 언제 우리 집에 왔다간 건지 테이블 한 켠에 상자를 놓고는 제 집으로 돌아갔나보다. 크지 않은 상자에 담겨진 파란색 후드티는 왠지 모르게 계속 입고 싶을 거 같았다. 너는 무슨 색깔이야? 내는 핑크-. 자신있게 분홍색을 골라잡은 다니엘은 역시 잘 어울렸다. 겨울은 여름보다 더 따뜻했었다. 다니엘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여름만 되면 난리가 나는 피부가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겨울이 더 좋았다. 겨울도 그저 사계절 중 하나라 생각했던 나조차 겨울이 좋아져버렸으니까.

 

 

 

 

 

 

 

'뜨끈한 어묵 먹고 싶다.'

 

'내 사올까?'

 

'아니. 어묵은 원래 서서 먹어야 하거든? 집에 들고 오면 맛 없어.'

 

'뭐가 그래 까다롭노.'

 

'우리 밖에 나가서 먹을까? 바람도 쐴 겸.'

 

'그래도 되고.'

 

'잠시만 나 옷 갈아입고.'

 

'뭔 옷.. 그냥 코트만 걸치면 되겠는데?'

 

'니가 사준 옷 입을 건데?'

 

'... 언제는 부끄럽다 해놓고.'

 

'...예뻐서 입는 거야. 예뻐서.'

 

'...'

 

'우리 다니엘이 너무- 예뻐서.'

 

 

 

 

 

 

 

옷이 무진장 예뻤다. 색깔도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었다. 단지 그 옷을 사고 포장해서 우리 집에 두는 다니엘이 더 귀여웠을 뿐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기도 했고 다니엘과 같이 다니지 않더라도 늘상 입고 다녔던 옷이었다. 올봄에 당장 헤어지고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직까지 옷장에 남아있을 것이다. 겨울 옷이라 생각하고 깊숙이 넣어놓고 어떻게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생각난 김에 정리해야 겠다.

 

 

 

어릴 때부터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늘 이어폰을 쥐고 노래를 듣는 것이 전부였다. 인턴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아침에는 힘내자며 즐거운 가요를 듣다가도 퇴근하고 저녁이 다 되서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히고자 발라드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 뒤로 다니엘을 만나고부터 버스에서 늘상 퇴근만 하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있었던 일부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며. 귀찮게 느껴질 법한 말들도 다니엘은 좋았다고 말했다.

 

 

 

 

 

 

 

[잠 안 오나? 아침에 그래 일찍 나가놓고.]

 

'내가 피곤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햄아... 그건.]

 

'됐어. 거기까지 해.'

 

[...]

 

'보고 싶어.'

 

[내 햄 집으로 갈까?]

 

'. 맛있는 거 사들고 와.'

 

[뭐 맛있는 거?]

 

'그냥 이거 사가면 좋아하겠다 싶은 거. 손에 아무것도 없으면 문 안 열어 줄 거야.'

 

[알았다. 알았다. 햄이 좋아하는 걸로 사갈게요.]

 

'얼른 와. 보고 싶어.'

 

 

 

 

 

 

 

어제까지 보다 하루 잠깐 안 봤는데 보고 싶어서 연락하고 그리고 징징 거리다 결국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것은 다니엘이었다. 양손에 맛있는 거 가득 들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잠이 들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자다가 다니엘이 왔다는 걸 알고 일어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행복한 날은 다니엘이 와서 함께 있는 순간을 주고 받는 다는 것이었다.

 

 

 

 

 

 

 

"아휴, 그 소리 들었어?"

 

"뭐 말이야?"

 

"그 왜 우리 빌라 옆 건물에 세워놓은 나무 말이야. 그거 베어버린 다잖아."

 

"그걸 왜 벤데?"

 

"몰라. 거기다가 뭘 또 만든다고 하던데?"

 

"봄에 심심할 때 꽃구경 하고 좋다 생각했더만."

 

"그러니까 말이야."

 

 

 

 

 

 

 

시내 버스에서 마을 버스로 환승하자 동네 아주머니들의 작은 말소리가 오갔다. 우리 집으로 가는 길 옆에 있는 놀이터에 나무를 말하는 것 같다. 아주머니의 말대로 정말 봄에 꽃구경 하기도 좋은 나무였다. 예쁘게 피는 벚꽃이 보기 좋았는데. 지나가다 몇 번 보는 게 다여서 그랬는지 실감이 나지 않다가 베어버린 다는 소리에 살짝 흠칫했다. 가끔씩 봄에 나를 데려다 주던 다니엘도 그 나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잠깐 멈춰서 한참 보고 사진을 찍다 가기도 했으니까.

 

 

 

 

 

 

 

'햄 와서 같이 찍자.'

 

'여기 놀이터야. 옆에 애들 놀고 있는데?'

 

'괘안타. 와서 찍고 가면 되는 거지.'

 

'예쁘게 찍어야 돼.'

 

'햄은 어떻게 찍어도 예뻐가 괘안타.'

 

'무슨 소리야. 예쁘게 찍어라고.'

 

 

 

 

 

 

 

, ! 하면서 찍은 사진은 한동안 앨범 정리를 하지 않은 나의 폰에 그대로 찍혀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진만 지워대다 결국 남아버린 사진들이었다. 한참을 삭제 버튼 위에 엄지 손가락이 닿았지만 굳이 누르지 않았다. 괜히 다 잊으려고 지우는 것 같기도 했고 이 정도 사진은 추억으로 남기면 그만이었으니까.

 

 

 

버스에서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지금은 다니엘과 통화를 하지 못했다. 내가 퇴근했다고 통화할 사이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다시 노래를 들으려고 해도 점점 녹초가 된 몸은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버스 소리로 만족했다. 간혹 틀어져 있는 라디오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그립기도 한 것 같았다. 아주 잠깐... 조금 정도...

 

 

 

 

 

 

 

"예쁘게 찍으라니까. 말을 안 들어..."

 

 

 

 

 

 

 

5년의 연애는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것 같다. 길다 생각한 연애의 끝에는 후련함이 남았고 짧다 생각한 연애의 끝에는 아쉬움이 붙어있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다면 한 며칠은 힘들 거라며 주변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심하면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하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하지만 관계를 끊은 쪽이 나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다니엘과 헤어지고 울었던 적은 두 번이었다. 한 번은 헤어지고 난 뒤에 의외로 괜찮았던 나를 보고 다니엘에게 미안해서였다. 그렇게 사랑했다 믿었던 다니엘과 막상 이별하고 잘 지내는 내 모습이 다니엘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서 그랬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언제 한 번 갑자기 생각난 다니엘 때문이었다. 이것도 역시 내가 너무 미안해서 그랬다. 우리의 관계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으며 우리가 걸어온 발자국이 모두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을 내 입으로 말했다.

 

 

 

 

 

 

 

'다니엘 있잖아.'

 

'?'

 

'우리 언제까지 연애할 수 있을까?'

 

'뭐라하노. 이상한 소리 한다, .'

 

 

 

 

 

 

 

불안함이 생겼다. 우리에게 영원이란 단어는 너무나도 크고 부담스러워서 늘 언제나 평생을 약속하기 보다는 당장의 내일을 약속했었다. 불안함은 나의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다니엘과 평생을 함께할 것 같다는 미래를 상상한 적도 없었고 되지도 않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행복하게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도 했었지만 이 관계를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해야하고 어떤 식으로 서로를 대해야 하며 같이 살아야하는 건지. 평생을 약속한다면 어떻게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 5년 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들의 시선까지도 내게 커다란 문제로 다가왔었다. 눈앞에 다니엘을 보면 사랑을 더 말했지만 뒤이어 나오는 불안을 숨기느라 바빴다. 우리가 언제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한다고 해서 계속 사랑해도 되는 걸까. 뭐가 문제가 될까. 모든 게 문제이지 않을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저 찰나의 아름다움으로 생각하고 끝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예쁘네. 꽃은 안 피어도."

 

 

 

 

 

 

 

휴대폰 속에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서 활짝 웃는 다니엘을 보고 지금은 어느 누구도 없는 나무의 아래를 번갈아 바라봤다. 지울까 말까를 고민한 사진은 결국 앨범 중간 사이에 꽂혀지고 말았다. 수많은 사진들 중 과거일 뿐이었다. 벚꽃이 피는 그 시간처럼. 잠깐의 바람으로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의 찰나의 순간처럼 말이다. 언제 한 번 걸어가던 가로수 길에서 나는 다니엘의 손을 꽉잡았다. 다니엘의 손이 너무나도 좋았다. 모든 것을 감싸줄 것만 같아서. 받혀줄 것만 같아서 말이다. 비록 더위에는 약했지만 오히려 그 더위에서 내가 다니엘을 지켜줄 수 있었다.

 

 

 

 

 

 

 

'나 그만하고 싶어.'

 

'...'

 

'너무 오래했다. 그만해야 될 거 같아서... 이제.'

 

 

 

 

 

 

 

더 이상 불안감을 느끼기 싫었다. 정해지지 않은 모든 것들을 놔두고 그저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 때문에 버텨온 사랑이 힘들었고 어떻게 해야할 지 머리만 아픈 그런 것들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내가 없이도 잘 살 거 같아서. 충분하게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처음 만나고 우리가 우리가 아니었던 적이 없던 시간들이지만 그래도 잘 이겨낼 거 같아서. 속은 강하고 강해서 절대 다치지 않을 거 같아서. 다니엘은 나 없이도 잘 지낼 거 같아서.

 

 

 

다니엘과 함께 걷던 길에서 나는 손을 놓았다. 그리고 뒤돌아 걸으며 그동안 남기고 새겼던 발자국들을 바라보며 멀어졌다. 일부러 그 자국들을 지우거나 없애지 않았다. 다시 되돌아가다 또 생각나고 그러다 내가 힘들어질까봐. 다니엘은 힘들지 않은데 나 혼자서 눈물을 흘리고 말까봐. 분명 내가 그만하고 싶다 말했는데 그러지 않은 것처럼 보일 거 같아서 그랬다. 그저 다른 길로 달렸다. 기억도 안 나게. 나를 잊은 그대는, 그대를 잊은 나는 모두가 잘 살기를.

 

 

 

 

 

 

 

"다니엘... 근데 넌 지금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거지?"

 

 

 

 

 

 

 

7월이었다. 여름이었고 무지막지하게 더웠다. 더위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아파해야 했던 그가 떠올랐다. 헤어지고 난 4, 5. 그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랬는데 여름만 되면 이럴 거 같다. 앞으로 그럴 거 같다. 그저 불안하고 싶지 않아 그랬는데. 더 불안해지고 말았다. 혹시나 나 없다고 아프지 않을까. 제대로 약도 안 바르고 그냥 여기저기 껍질만 일어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름이라서 생각나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고 아프게 만들었다.

 

 

 

다니엘을 걱정했는데. 다니엘이 생각나는데. 오늘따라 생각나는 것이 아니었다. 여름이 되었다고 알리는 TV광고부터 에어컨 바람에서 나오는 공기까지. 누가 여름이라 말하지도 않아도 내가 여름이라 느끼면 떠올랐다. 뜨거운 태양 아래 서있다가 화끈 거리면 생각났고 사실은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에도 훨씬 전부터 이상하게 너와의 추억이 어떻게 다 기억나는 건지.

 

 

 

까만 밤하늘을 올려보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그네를 보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야 알았다. 나 지금 울고 있구나. 왜 우는 거야.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그랬는데. 내가 다 망가뜨려 버린 건데. 왜 내가 울고 있는 걸까. 결국은 내가 불안해서 그만하고 싶다 망쳐버리고 그렇게 가만히 있다 눈앞에 사라진 그대를 보고도 버틴다 생각했는데.

 

 

 

여름이라 그런 것도 핑계였다. 그냥 버틴 거다. 다니엘이 없는 지금도 버티고 있는 거고 난 괜찮지 않았고 그때의 내가 너무나도 밉고 마음같지 않아서. 속으로는 다니엘이 상처받고 아파할 것을 다 알았을텐데. 왜 그렇게 말하고 왜 그렇게 끝내고 말았는지. 그리고 지금 난 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픈 건지. 세상이 까매지고 돌아버리고 사라지고...

 

 

 

 

 

 

 

"정신 차려요! 왜 이래요! 저기요! 저기요!"

 

 

 

 

 

 

 

 

 

 

 

 

 

 

 

 

 

 

 

 

 

 

 

 

 

 

 

 

 

 

 

 

 

 

 

 

 

 

 

코가 찡했다. 찡하고 마음이 무거워서 일어설 수도 없을 거 같아 주저 앉고 쓰러졌다. 이제와서... 이제는 내가 바닥까지 내려가 붙잡을 수도 없을 만큼 와버려서. 이러고 말았다. 너무 물들었나봐 나. 너는 풍덩 빠져버려 금세 헤엄치고 나갔겠지? 나는 물들여진 너를 씻고 또 씻어도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데. 나는 너를 잊을 수나 있을까. 그걸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못했는데.

 

 

 

 

 

 

 

"일어나셨어요?"

 

"."

 

"놀이터에서 쓰러진 거 기억나세요?"

 

"."

 

"엑스레이나 CT결과도 모두 정상이고 보호자 오시면 같이 퇴원 수속하세요."

 

"보호자요?"

 

". 환자 분 휴대폰에 비상 연락망이 있길래."

 

 

 

 

 

 

 

휴대폰을 잃어버리거나 그걸 누가 습득하게 될 때 잠금화면에 띄워둔 번호를 보고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너 왜 네 전화번호를 적었어?'

 

'햄이 폰 잃어버리면 내한테 전화달라고 한 거지.'

 

'나 폰 같은 거 안 잃어버려.'

 

'나중에 적어줘서 고맙다고나 하지 마라.'

 

 

 

 

 

 

 

눈가에 옅은 눈물이 맺혔다가 차올랐다.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이 눈물로 버진 눈으로도 누군지 다 알겠어서. 마음이 아팠다. 너와 그렇게 헤어지고 잘 지내야 했는데.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실로 실려오는 내가 창피하고 짜증났다. 그래서 막상 내야 할 화도 많았는데 낼 수가 없었다. 팔은 온통 껍질이 일어나 전쟁이 난 것처럼 빨갛고 얼굴은 검은 마스크에 가려 못봤지만 딱봐도 붉게 상기가 되고 말았다.

 

 

 

 

 

 

 

"괘안나? 집에 갈 수 있겠나?"

 

"..."

 

"더 누워 있을래?"

 

"아니. 괜찮아. 갈 수 있어."

 

"일라라. 가자 그럼."

 

 

 

 

 

 

 

다니엘은 나보다 먼저, 그렇다고 너무 앞서 가지는 않았다. 정확히 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저 걸어갔다. 나는 그런 다니엘의 뒤를 천천히 걸었다. 걸어가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봤지만 오랜만이라 하지 않았고 반갑다며 시시하게 영혼없이 받아치는 말들도 없었다. 다니엘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먼저 끝내자고 말해 놓고 계속 생각나서 힘들었어. 지금 내 꼴이 되게 우스워보일텐데 말이야. 그게 너무 짜증나긴 하지만 지금 너를 보니까 너무 좋아.

 

 

 

괜히 걸어가는 뒷모습에다 쏘아붙혔다. 적장 소리는 내지 못했다. 먼저 그렇게 가버리면 대화는 커녕 얼굴도 못 보는데. 그래도 우리 다니엘 뒷태도 무진장 잘생겼다. 돌아선 뒷모습에서도 사랑은 시작된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오죽할까. 이미 헤어졌어도 그의 뒷모습은 내가 그를 여전히 사랑하게 만든다. 미안하고 너무 미안해서. 나는 붙잡을 수도 없는데. 너는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나 좀 붙잡아달라 얘기할 수도 없는데... 한참을 그의 넓은 뒷모습을 보고만 걸었다.

 

 

 

 

 

 

 

". 내 안 데려다 줘도 되겠제?"

 

". 혼자 갈 수 있어."

 

"그럼 내 가요."

 

 

 

 

 

 

 

한참 먼저가다 뒤돌아서 하는 말이 안 데려줘도 괜찮다니. 괜히 씁쓸한 것도 아니고 그냥 진짜 너무나도 씁쓸했다. 우리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구나. 다니엘 너에게 이제 나는 정말 그냥 형이었구나. 그 이상으로 대해지지는 않겠구나.

 

 

 

 

 

 

 

"... 내는 햄 네한테 좋아한다 말했을 때, 그때는 햄이 싫다캐도 내 계속 매달릴라캤다... 근데 내랑 햄이랑 사귀고 나서. 햄이 내 싫다 하면 그때는 내 매달리는 거 할라카지도 않았다. 그냥 햄 보내주겠다 했다. 햄이 내 싫다 한 건 내가 문제 있고 별로라서 하는 말이라니까 싶었다."

 

"..."

 

"근데... 내 햄 안 붙잡은 거 후회한다. 그냥 그때 한 번은 매달려볼 걸. 그 생각만 했다."

 

"..."

 

"아프지 좀 마라. 내보고 맨날 긴팔 입어라 뭐하라고 챙겨대던 사람이 픽픽 쓰러지기나 하고. 단디 살아라. 알겠나?"

 

 

 

 

 

 

 

다니엘, 근데 말이야. 나도 지금 안 매달리면 후회할 거 같아.

 

이미 다 끊겨서 엉망이 되버린 걸음이지만, 더 이상 내가 남길 발자국이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마저 놓쳐버리면 정말 후회할 거 같아서

 

매달려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