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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유언은 주체보다 오래 숨 쉬는 문장이다, 처음 상복을 입으며 생각했고, 인간이 순리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반항적인 행위다, 두 번의 장례 후에는 이렇게 갈무리했다. 닳도록 만지던 손끝이 정말 닳아버렸을 때, 이름을 두 번씩 불러주던 목소리 대신 열심히 살아달라는 말이 오래도록 맴돌 때, 그때마다 확신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이 유언일 수는 없을까. 성우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감당해야만 하는 지긋함은 한숨으로 울음처럼 샜다. 그래도 사람은 사람이었고 순리는 흘렀다. 그때가 가장 살기 싫었다. 사람이 유언이 되지는 않았다. 살 수 없었다. 그런데 살았다. 살아서 열아홉이었다.

 

 

 

 

 

 

 

 

계절은 누군가의 유언이었다.

도피

 

 

 

 

 

 

 

 

열심히 살아야 돼, 성우야. 평생 열심히 살았던 사람은 마지막까지도 열심이었다. 쉬려고 몸 좀 뉘이고 눈 좀 감으면 바늘처럼 도사리는 그 열심. 그때는 그럴게요, 했었는데 지금 들으면 그러면은 얼마가 열심이에요, 물어보고 싶어졌다. 열심에는 끝이 없어 해도 해도 열심히 살 수밖에 없어서. 그러니까, 열심히 살란 게 아니라 행복하게 살라고 해줬어야 됐다. 불행하지 않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니까. 생각이 구역질처럼 쏠렸다. 요즘 들어 자주 있는 일이다. 괜찮았다.

 

사춘기는 없이 잘 지냈다. 괜한 치기가 생기면 다른 사람을 웃겼고, 그릇된 훈계 앞에서는 그냥 웃었다. 사소한 걸로 싸우던 친구들은 말렸으며 공부는 군말 없이 했다. 덕분에 성실, 배려, 성숙, 이런 단어들로 수식됐다. 별거 없었다. 열심히만 살았다. 열넷,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전부 그랬다.

 

그래서 시내버스 대신 고속버스 티켓을 끊고 좌석에 앉아 가는 내내 현실감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 손이고, 내 다리고, 내 의지였는데 옷은 교복이고 몸은 버스고 영혼만 학교였다. 처음으로 열심 없는 충동이었다. 이상하게 몸이 자꾸 떨렸다. 에어컨이 센 것 같아 손을 올려 옆자리로 바람을 틀었지만 여전했다. 눈을 감아보는 대신 끝까지 잠긴 단추 하나를 풀었다. 살 것 같았다.

 

몸을 의자 깊숙이 밀어넣고 버스를 따라 덜컹거리는 창문에 이마를 댔다. 데워지는 이마는 따갑고 정수리는 차가웠지만 아무렴 좋다는 생각으로 이어폰을 꼽고 노래를 틀었다. 날씨 맞춰 나온 노래는 틀지 않았다. 눈을 감지도 않았다. 여름에 온 사춘기, 그렇게 정의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후덥한 공기가 꽉 찼다. 아는 곳도 사람도 없지만 걱정하려고 온 게 아니라 발 가는 대로 걸었다. 걷다가 사람 없는 도로에서는 손을 곧게 펴 그림자지게 했다. 문학을 흉내 낸 생에서 낮 열두시 땅에 진 그늘만큼 정직한 건 없었다. 내 손바닥과 내 자리만큼의 그림자, 그게 다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더 짧아진 것 같아 억울해졌다. 해를 째리다 결국 속눈썹을 내렸다. 부산은 서울보다 더웠다.

 

목적 없이 걷다 나온 카페에 들려 휘핑 올린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를 쥐고 나오니 땅에 발이 녹았다. 다시 들어갈지 일 초 정도 고민하다가 멋없을 것 같아 관두고 근처 버스 정류장에나 걸터앉았다. 해는 아직 높아 눈이 부셨다. 입술로 빨대를 물고 가만히 지나치는 사람 구경을 했다. 녹아서 달라붙을 것 같은 날씨에도 붙어 다니는 커플이라던가 (참사랑이구나 싶었다)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돌아다니는 꼬마들, 평소라면 글씨를 들여다 볼 시간이라 사소하게 즐거웠다.

 

그 중 교복을 입은 연갈색 머리의 남자애도 눈에 띄었는데, 첫 번째로는 염색할 생각도 해보지 않은 머리가 생각나 앞머리를 매만졌고, 두 번째로는 들고 있는 곰젤리에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생각보다 컸는지 시선이 닿아 급하게 입술을 다물며 헛숨을 삼켰다. 무안해져 빨대를 질겅질겅 씹다가 눈을 들었을 때는 사라져 다행이라 생각했건만, 잠깐 움츠렸던 몸을 다시 피며 안심했을 땐 곰젤리 한 마리가 눈앞에 있었다.

 

장염에 걸린 것 같다며 막 선생님께 조퇴증을 끊고 나온 다니엘은 젤리를 한 봉지 사서 걷고 있었다. 잠깐 멈춰서 봉지를 뜯고 있던 중 누가 웃길래 땡볕에 누가 왜 웃나 싶어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향한 곳에서 말쑥한 남자애가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하길래 저를 보고 웃은 걸 눈치채 왜 웃었나 고민했더니 손에는 햇볕에 익혀진 곰젤리 봉지가 있었다. 이거구나 싶은 동시에 이런 걸로 웃나 해서 맞은 편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별 의도 없이 못 보던 교복이라 간 것뿐이었는데 가까이서 본 사람이 이렇게 잘생긴 건 처음이라 손이 먼저 나갔다.

 

니도 학교 쨌나? 교복 여서 못 보던 긴데

 

다니엘은 내민 초록색 곰돌이를 먹으라는 듯 손짓했고,

 

여기 안 다니니까는 그러지.”

 

성우는 그걸 손으로 집어 쏙 먹었다.

 

그럼 어데?”

 

다니엘은 하얀색 젤리를 입에 넣으며 버스정류장에 엉덩이를 붙였다. 더워 디지그따. 신이 인간을 굽기에 좋은 온도였다.

 

근데 너 나 알아?”

 

아니요

 

그럼 몰라도 돼

 

여기서 다니엘은 헛웃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고. 몰라서 몰라도 된다니? 얼척 없어서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되도 않는 억지를 댔다.

내 젤리 줬잖아

 

난 달라구 말 안 했지

 

맞는 답이었다. 달라고 한 적 없고, 자신이 손으로 먹으라는 듯 굴었으니까. 다니엘은 조금 더 유치해졌다.

 

니 내 보고 웃었다 아이가.”

 

말도 안 섞은 초면에 먼저 비웃음과 흡사한 웃음이 터진 성우는 할 말이 없었다. 안 웃었다기엔 눈이 마주쳤고, 웃었다기엔 그것도 좋아보이진 않았다. 변명할 것도 없었다.

 

야 그거는

 

그거는?”

 

서울

 

서울서 여까지 왔다고? 더워 디질라고 환장했나...”

 

아무리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더위에 다니엘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셔츠를 잡고 펄럭였다. 바람이 일어도 전부 온풍기 수준밖에 안됐다.

 

거기두 여기랑 별로 차이 안 나거든. 그냥 멀리 오고 싶어서 부산까지 온 거지.”

 

한 번쯤 멀리 와보고 싶었단 소리는 칠칠맞은 것 같아 관뒀다. 하루는 덜 열심이어도 되지. 그럼에도 한켠에선 열심히 살아야 돼, 성우야 그 소리가 자꾸 맴돌았다.

 

뭐 연락은 하고 온 기가

 

말하고 나서야 다니엘은 아차, 싶었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너무 나갔다. 와 이러노 진짜.

 

너 별 걱정을 다 한다. 내 이름도 모르면서.”

 

성우는 마끼아또 마지막 한 모금을 쭉 빨았다. 한 잔 더 먹기는 빠듯한데, 그래도 해 지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마지막으로 입술을 훑었다.

 

다니엘.”

 

다니엘은 이름만 알면 물어도 될까 싶어 다짜고짜 제 이름부터 들이댔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 지 평소 나오지도 않던 조급함이 늘었다.

 

내는 강다니엘인데

 

자신의 이름으로 말을 맺고 더 물어보지 않은 다니엘에 성우는 저게 이름을 묻는 건가 싶어졌다. 지금 자기 이름 알려줬으니까 내 이름도 말하라는 건가? 말똥말똥 뜨는 눈을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지금 내 이름 묻는 거 맞지, 다니엘?”

 

대답 대신 다니엘은 끄덕였다.

 

옹성우

 

옹성우라구, .”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가 조곤했다. 순간 덥기보다는 따듯하다고, 오늘 비가 내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오후 두 시였다.

 

아 맞나, 성우. 그래서 연락은 하고 온 거 맞제

 

아니

 

니 그러면 혼 안나나.”

 

글쎄. 안 날 걸? 집엔 쪽지 써놓긴 했는데 아마 신경 안 쓰실 거야.”

 

걱정할 이모와 별 거 아니라고 넘길 이모부가 생각나 성우는 입 안이 썼다. 어쩌면 학교에는 아프다고 해주셨을 지도 모른다. 쪽지에는 잠깐 다녀오겠다는 말이 전부였을 텐데도.

 

그런 부모가 어딨나.”

 

어렵지 않게 살아온 사람은 일상에서도 그게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딱 다니엘 같은 사람. 당연하게 하는 말 한 문장에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걱정 받았구나 하는 것쯤을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나한테 당연하다고 남한테도 당연한 건 없어. 그것 또한 익숙함에서 나오는 그것이라 성우는 겨우 웃었다.

 

있지, 다니엘.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많거든.”

 

컵에 있던 얼음이 쨍하게 녹았다. 더 이상 먹을 것도 없고 차갑지도 않아 손으로 돌리던 컵을 옆에 내려놨다. 다양한 사람은 자신이란 걸, 성우는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잊혀져가는 기억을 다시 떠먹고 싶지 않았고, 아무렇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써도 동정어린 시선을 받았던 기억부터 입을 다물게 된 것도 있었다. 말 뿐인 동정은 존재만 흐리게 했다.

 

그렇다구.”

 

웃는다는 게 티가 났다. 그러니까, 웃고 있음을 나타내려 하는 게 티가 나서 어둑해진 기류를 바꿔야 했다. 방금 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내가 괜히 그랬지,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다니엘은 무안하게 웃으며 하얀색 젤리를 건넸다. 짧은 시간 동안 고른, 그나마 덜 어색한 방식이었다.

 

내 더 안 물을게. 더 안 물을게요, 알았지?”

 

큰 강아지가 꼬리를 내리고 올려다보는 듯한 모습에 성우는 웃었다.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 반나절도 안돼서 유별난 그림이 여러 장면 생겼다.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으니까, 나쁠 것도 없었다. 유별난 사춘기보다 더 유별난 건 없다고 생각하며 성우가 다니엘을 마주봤다.

 

됐구 다니엘, 여기 우동 맛있는 집은 어디야?”

 

젤리를 집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성우는 마치 여러 번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니엘을 끌었다. 너무 다른 곳에 와서 본 사람인데 뭐가 다 익숙했다. 분명한 처음이란 게 어느새 더위에 다 녹아 자취를 감췄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우동을 먹은 다음에는 바다를 보고 싶다는 성우의 말에 바다를 찾았다. 한참은 길어진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말없이 고요히 걸었다. 단지 내리쬐던 태양은 허리를 굽혔고 아직은 열 있는 바람이 귀밑을 스쳤다. 더 없는 여름, 바다 앞의 둘은 은은한 소금내조차 기분 좋은 날로 기억될 것을 직감했다. 이름만 아는 사람과 함께인 낯설지 않은 오늘을.

 

저거 안 하고 싶나?”

 

고요를 깬 건 다니엘이었다. 스파클라를 쥐불놀이처럼 빙빙 돌리고 있는 옆의 무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저게 저런 용도였나 싶었지만 타닥, 소리를 내며 나는 불꽃에 혹해 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던 길에 있던 슈퍼가 생각나 성우가 발을 틀었다.

 

사올 테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뭐고, 섭하게. 누가 들음 애한테 하는 줄 안다. 됐고, 같이 가자.”

 

번거롭게 뭐하러 둘이나 가.”

 

여 혼자 있으믄 번거로운 게 아니라 청승맞다 한다. 후딱 다녀오자.”

 

먼저 내딛은 성우보다 한 발 더 앞선 다니엘이 성우의 팔목을 끌었다. 알겠다며 성우가 팔을 빼내 걷자 다니엘은 어쩐지 손바닥에 배어나올 땀이 도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더운 공기가 꽤 얄궂다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 딛었고 덕분에 생각보다 가까웠던 슈퍼에 들어가 스파클라를 사오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한 사람당 두 개, 총 네 개를 사 양 손에 쥔 둘은 성냥을 켤 손이 없다는 걸 깨닫고 크게 웃었다. 바보 같이 이게 뭐냐며 핀잔 아닌 핀잔을 늘어놓은 성우가 제 몫의 스파클라를 다니엘에게 쥐어주고서야 불을 붙였다.

 

전부 불을 붙이고 양손에 쥔 스파클라로 다니엘은 별을 그렸고, 성우는 작은 원을 그렸다. 노란 낮에 노란 불꽃, 감히 어둡지 않은 장면이었다. 거의 다 타들어간 스파클라는 생일초도, 유성우도 아니었지만 성우는 그게 꼭 별 같아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눈을 감은 성우를 본 다니엘은 그리던 별의 크기를 키웠다. 이유는 없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단지 감이었다.

 

소원이라도 빌었나?”

 

다니엘은 끝내 다 탄 스파클라를 내리며 곧 눈을 뜬 성우에게 물었다. 성우는 대답 대신 다니엘을 오래 봤다. 곧이어 성우의 스파클라에도 불이 꺼져 손목을 두 번 털었다. 시선이 빗겨나간 것도 그때였다.

 

아니.”

 

무슨 소원 빌었는데?”

 

소원은 말하면 안 이루어진다는 거 모르지.”

 

아는데, 내 똑같이 빌어줄 테니까 알리도.”

 

웃겨, 다니엘

 

정말로 웃지는 않았지만 성우는 웃기다고 했고, 다니엘은 옅게 웃었지만 대꾸하지는 않았다.

 

행복하라고.”

 

행복하라고 빌었어.”

 

누가 행복하길 바라는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더 캐물을 수 없었다. 캐물었다가는 허물어버릴 것 같아 다니엘은 또 한 번 어색하지 않음을 추구했다. 실은 캐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 행복 빌어준 거가?”“

 

뭐래

 

아님 말고, 니 말해줬으니까는 이젠 내가 빌어주께.”

 

그 말을 한 다니엘은 정말로 눈을 꾹 감고 손을 꽉 모아서, 성우는 정말로 웃었다. 기도 처음 해보는 것 같은 자세로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꼴이 웃겼다. 그거 나한테 한 건데. 나보고 행복하게 살라는 말 해달라고 빈 건데. 꽉 모은 손에 울컥해 성우는 더 크게 웃었다.

 

그만해도 돼. 촛불도 없는데 하면은 진짜 웃겨.”

 

성우의 말에 다니엘은 해맑게도 웃으며 모은 손을 풀며 눈을 떴다. 웃음을 보는게 행복하다고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익숙하지 않았는데, 익숙해질까 싶어 성우는 괜히 틱틱댔다.

 

뭐가 좋다구 웃어.”

 

그러는 성우도 웃었고, 웃는 성우를 보는 다니엘도 웃었다. 웃게 됐다.

 

웃으면서도 왜 웃냐는 주제로 한참을 투닥대던 일은 손목시계를 확인한 성우에 의해 깨졌다. 끊은 버스표를 계산해 생각해둔 시간이 곧이었다. 해가 채 지지 않았으나 마지막 표였다. 하지만 바로 발을 뗄 수는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말이 없어진 성우를 따라 다니엘도 말이 없어졌다. 정적이었다.

 

다니엘,”

 

가야 되는 거 맞제?”

 

 

그럼 가야제. 부모님이 걱정, 아이지 내일은 학교 가야된다 아이가.”

 

그렇지.”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이 아쉬워 성우는 더 말하지 못했다. 가야 하는데, 차마 가겠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쉬운 건 다니엘도 마찬가지였지만 붙잡을 수도 없었다. 붙잡는다고 해줄 수 있는게 없어서, 지키지 못할 말을 무작정 뱉을 나이가 지난 탓이었다.

 

내도 들어가 봐야 한다. 학교 째면 집 가서 청소, 설거지 싹 해야 돼서.”

 

그래?”

 

안 하믄 내 디진다. 진짜다.”

 

그럼 잘 들어가구. 다음에, 다음에 보자.”

 

그래, 니도 빨랑 드가라. 조심하고.”

 

다음이란 게 있을 리 없단 걸 알면서도 둘은 다음을 위해 번호를 적는다거나 주소를 적는다던가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음을 느꼈다. 다시 만나긴 어렵고, 다음에 볼 만큼 친하지도 않았다. 다만 친밀했다. 그때문에 기약만 남았다. 지킬 수 없을 확률이 더 큰 기약.

 

다니엘이 먼저 등을 보였고, 성우는 뒤에서 손을 흔들다 급하게 뛰었다. 터미널까지 가는 버스가 운좋게 와 곧장 탔다. 더운 날씨에 오히려 에어컨이 찼다. 부산에서의 기억은 그 버스가 끝이다. 겨우 터미널에 도착했고, 서울 가는 버스를 탔고, 집에 도착했고, 다니엘이 생각났다는 것. 그 다음날에는 하던대로 학교에 가 예상했던 대로 선생님께 어제 괜찮았냐는 소리를 듣고, 진단서를 가져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또 다니엘이 생각났다. 이름만 아는 강다니엘.

 

그 다니엘은 걸어서 집을 갔고, 어머니께 아무거나 주워먹지 말라는 잔소리를 들었고, 삼일 동안 흰 죽을 먹으라는 벌을 받았고, 성우의 감은 눈이 생각났다는 것. 다음날 아침으로 죽을 먹고, 교복을 아무렇게나 입고 간 학교에서도 괜히 우동 먹던 옹성우 생각이 나 학교를 째지 않았다. 학교를 째고 교문 밖에 나가 젤리를 들고 있으면 또 성우가 웃을 것 같았지만 아닐 것을 알았다. 너무 알아서, 자꾸 앞에 있을 것 같아서 다니엘은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어제가 자꾸 맴돌았다.

 

여전한 옹성우는 부산에 간 날이 생각날 때마다 여전하지 못했다. 툭하면 곰젤리와 우동, 스파클라, 바다 냄새, 그날의 그늘까지도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성우가 펜을 흘긴 자리엔 강다니엘 네 글자가 남았다. 여름 끝무렵까지 그랬다. 잊을만 하면 이름이 튀어나왔고, 사진을 남기지 않은 걸 후회했으며 곰젤리 생각이 날 땐 번호라도 받지 않은 게 아쉬웠다. 쌀쌀해질 가을이 오기 전까지 내내 앓았다. 가을에는 생각나지 않는게 아쉬워서 초등학교 이후로 꺼내지 않은 일기장을 꺼내 그날을 적었다. 오로지 기억만 나열하던 성우는 줄을 한참 띄어 샤프 끝으로 한 문장을 긁었다.

 

 

 

 

공책에는 더위에 대한 감상 대신 너의 이름이 빼곡했던 것, 그건 한 계절의 팔할을 네가 가졌다는 뜻으로 적힌다.

 

이 문장의 마침표를 기점으로 세계의 계절이 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