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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새벽이 시작되는 시간, 굳게 닫혀있던 문으로부터 패스워드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커덩하는 소리가 이어지고, 슬그머니 문이 열렸다. 조금씩 벌어지는 틈 사이로 검고 매끈한 구두의 앞코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채 다 열리지 않고서도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온 마른 몸은, 현관의 조명등이 자동으로 켜지는 것에 놀라 파르르 떨렸다. 가지런히 벗어둔 구두를 신발장에 넣은 마른 몸은, 비로소 집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긴장을 풀었다. 살짝 열린 방문의 앞에 머물렀던 발걸음은 드레스 룸으로 돌아섰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마른 몸은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고단한 몸을 스스로 씻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마른 몸이 샤워를 끝내고 겨우 몸에 옷을 걸치고 나오자, 욕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그림자가 마른 몸을 끌어안았다.

 

 

 

 

 

 

 

“이제 들어와요?”

 

“다니엘, 안 잤어?”

 

“책 읽고 있었지. 고생 했어요. 이리 와.”

 

“내가 깨운 건가.”

 

“그거 좀 깨우면 어떻다고. 그리고 깨운 거 아니야. 이리 좀 와요.”

 

“보고 싶었어.”

 

 

 

솔직한 성우의 말에 다니엘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성우에게서, 자신과 같은 향이 풍겨옴에 다니엘은 안정감을 느꼈다. 가뜩이나 마른 몸이 요새 들어 더욱 살이 내려가, 다니엘은 성우를 끌어안은 양팔에 더욱 힘을 주어 품에 가득 성우를 안았다. 다니엘, 나 숨 막혀.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며 속삭이는 성우의 목소리에, 다니엘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성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다니엘로부터 전해지는 무게감에 성우는 가쁜 숨을 내쉬곤, 양손으로 다니엘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우리 이제 들어가서 자자.”

 

“잠만 잘 거야?”

 

“다니엘….”

 

“알았어요, 알았어. 자자.”

 

 

 

다니엘의 키득거리는 소리 사이로 성우의 낮은 한숨소리가 겹쳐졌다. 듣고도 모른 척, 다니엘은 성우의 몸을 돌려 마른 허리를 감싸 안았다. 침실로 들어가자 방금 전까지 피워놨던 바닐라 향이 성우의 코끝을 간질였다. 나른하고 무거운 몸을 침대에 눕히자, 곧바로 다니엘이 따라 누워 성우의 목 뒤로 팔을 끼워 넣었다. 마른 가슴팍을 토닥이며, 잘 자요. 속삭이는 다니엘의 목소리에 성우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다니엘은 언제나 성우의 곁을 지켜왔다. 성우는 그런 연인의 묵묵한 다정함이 기쁘면서도 두려워, 자신도 모르게 다니엘의 손을 양손으로 쥐었다. 몸을 돌려 다니엘과 마주한 성우는, 다니엘의 입술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곤 아주 작게 속삭였다.

 

 

 

 

 

 

 

“사랑한다는 말이 야속할 만큼 널 사랑해. 네가 떠날까봐 두려워.”

 

“나는 떠나지 않아요. 마음 놓고 쉬어요. 사랑해요.”

 

 

 

곧바로 속삭여진 다니엘의 목소리에도 성우는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겠지만, 나 또한 언제나 너를 사랑하겠지만, 우리의 끝이 다가온다면 우리는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성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다니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본능이 먼저 저지르듯 맞춰진 입술, 다니엘은 말없이 성우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내주었다.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 하늘을 꽁꽁 숨긴 커튼이 살짝 열어둔 창문 틈 사이에서 불어온 바람으로 일순간 펄럭였다. 다니엘은 그 한기에 성우가 떨지 않도록 더욱 강하게 연인을 끌어안았다.

 

 

 

 

 

 

 

 

 

 

 

 

Hands on me. 01.

 

불안이 머문 그대의 손가락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w.겟어거스트

 

 

 

 

 

 

 

 

 

 

 

 

다니엘은 습관적으로 눈을 뜬 뒤 핸드폰을 확인했다. 언제나 그렇듯 다니엘이 눈을 뜬 시간은 어제와 같은 시간이었고,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을 끈 다니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성우씨. 다니엘의 잠긴 목소리가 공중에 흩어졌고, 되돌아오는 소리는 적막뿐이었다. 다니엘은 침대에 앉은 채 커튼을 쳤고, 밝은 아침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침잠도 많은 사람이 어딜 간 거야. 다니엘은 침대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켜며 침실 문을 열었다. 한기가 도는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오니, 소파에 누워 잠든 성우의 등이 시야에 잡혔다. 다니엘은 벽에 기댄 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부쩍 불안해하는 연인의 모습은, 아무리 다니엘이어도 견디기 힘든 모습이었다. 자신이 건네는 사랑이 부족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일이 있는 걸까. 첫눈에 반해 육체적으로 먼저 맺어진 관계인지라, 다니엘은 더더욱 성우를 조심스럽게 대해왔었다. 집을 합치는 순간부턴 다니엘의 모든 생활의 중심은 성우였다. 첫 만남으로부터 반년이 채 되지 않은 지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시간동안 도대체 성우의 마음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다니엘은 당최 알아낼 수 없는 연인의 불안의 시작이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성우씨. . 왜 여기서 자요.”

 

“…아, 잠 설쳐서 너 깰까봐. 잘 잤어?”

 

“나는 잘 잤어요. 성우씨, 안으로 들어가서 편하게 자.”

 

“응. 그래야겠다. 넌 작업실 갈 거야?”

 

“네. 성우씨는?”

 

“난 오후에 예약 있어서 그때 맞춰 나가려고.”

 

“이따 데리러 갈까?”

 

“응. 10시쯤 와.”

 

“알았어요. 얼른 들어가, 감기 걸려.”

 

 

 

다니엘, 뽀뽀. 잠에 취해 눈도 뜨지 못하면서도 아이처럼 웃는 성우의 얼굴에, 다니엘은 졌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며 성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성우가 침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니엘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이젠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습관적으로 차가운 물로 몸을 적신 다니엘은 앓는 소리를 내며 물의 온도를 뜨거운 쪽으로 맞췄다. 적절한 온도를 맞춘 다니엘은, 뒤늦게 느긋한 표정으로 몸을 적시며 눈을 감았다.

 

 

 

혹시 나와 함께하는 미래가 불안한 걸까. 내 사랑이 그에게 부담이 되고 있는 걸까.

 

 

 

문득 들어온 생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니엘을 잠식했다. 한두 번 해온 생각은 아니란 것을, 다니엘의 평온한 표정이 대변했다. 불안해하는 성우를 지켜보는 다니엘이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유와 목적이 없는 불안은, 이제 막 쌓이기 시작한 사랑에 들러붙었다. 다니엘은 물에 쓸려가는 거품을 멍하니 내려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불안이든 그를 잠식하고 있다면, 거기서 내가 구해내면 돼. 그리고 내가 불안에 잠식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해. 몸에 남아있는 거품을 닦아내는 손길이 빨라졌다. 그 거품이 자신과 연인 사이에 끼어든 불안이라도 되는 양, 다니엘은 더욱 빠른 손길로 몸을 닦아냈다.

 

 

 

 

 

 

 

*

 

 

 

 

 

 

 

“성우씨. . 나 다녀올게요.”

 

“응, 다니엘. 이따가 나갈 때 전화할게.”

 

“토스트라도 꼭 챙겨먹고 나가요. 약속.”

 

“알았어요. 얼른 가, 늦겠어.”

 

“이따 봐요. 사랑해.”

 

“나도 사랑해.”

 

 

 

성우는 막 잠들 뻔한 순간에 들려온 다니엘의 목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일상적이지만 다정한 대화에 성우는 미소를 지었고, 다니엘은 사랑을 고백했다.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다니엘의 셔츠 소맷자락이 닿아오는 느낌에, 성우는 눈을 다시 감고 양손으로 다니엘의 손을 맞잡았다. 자신의 소맷자락에 볼을 부비는 성우의 행동에, 다니엘은 웃음을 터트렸다. 성우씨가 그러면 내가 나갈 수가 없잖아. 다니엘의 듣기 좋은 핀잔에 성우 역시 미소를 띠었다. 작업 끝나고 전화할게. 10시까지 안 와도 돼. 아직 잠에 취한 성우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갈라졌고, 다니엘은 그 목소리에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성우씨가 10시에 데리러 오라고 했잖아. 그럼 10시까지 가는 거예요.”

 

“네가 노는 사람도 아니고, 무리하지 말라는 뜻이야.”

 

“무리 안 해. 내가 당신한테 하는 모든 건 무리가 아니에요. 다녀올게.”

 

“…알았어. 이따 봐요.”

 

 

 

사랑해요. 다시금 속삭여지는 다니엘의 목소리와, 자신의 이마와 입술을 스치고 간 다니엘의 입술에 성우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한쪽에 걸터앉아있던 다니엘이 일어서자, 자연스럽게 무게감이 자신에게 쏠리는 느낌에 성우는 몸을 뒤척였다. 방문이 닫히고 얼마 후, 현관문의 도어락이 열렸다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우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떠, 텅 비어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바라봤다. 손을 올려 다니엘의 베개를 쓸어내린 성우는, 그대로 베개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다니엘의 체취가 느껴짐에 성우는 더욱 몸을 웅크리며 베개에 코를 묻었다. 사랑해, 다니엘. 성우의 더욱 잠긴 목소리가 다니엘의 베개에 스며들었다.

 

 

 

 

 

 

 

*

 

 

 

 

 

 

 

다니엘의 친구가 우연히도 성우에게 타투를 하게 됐던 그날. 다니엘과 성우는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을 육체적으로 먼저 확인했다. 그렇게 서로의 작업실을 오가며 애정을 쌓아가다가, 먼저 같이 살자고 말을 꺼낸 건 의외로 성우였다. 여느 때처럼 다니엘의 작업실에서 사랑을 나누고 가쁜 숨을 가다듬던 순간이었다. 다니엘은 성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자고 가요. 성우씨랑 아침에 같이 눈 뜨면 좋겠어요. 속삭였었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너만 괜찮다면 같이 살자, 다니엘.

 

 

 

그렇게 함께 잠들었던 다니엘과 성우는, 바로 살고 있는 집을 정리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두 사람의 공간은 하나로 합쳐졌다. 첫 만남으로부터 계절이 바뀔 만큼의 시간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던 순간의 만남은, 가을이 시작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랑의 무게가 시간에 비례하여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너무 빨라서 불안한 걸까.”

 

 

 

성우는 멍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어내며 일어난 성우는 냉장고까지 느릿하게 걸어갔다. 식사를 챙길 정도로 자신에게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었지만, 자신의 불규칙한 생활 패턴에 다니엘이 화를 내고 난 후로, 식사 정돈 억지로라도 챙기기 시작한 성우였다. 다니엘이 미리 내려둔 차가운 커피가 담긴 유리병을 꺼낸 성우는, 항상 쓰는 컵에 커피를 따른 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타투이스트란 직업을 갖게 된 이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한 곳을 집중하여 오래 바라보다 보니, 만성적으로 시달리는 안구건조증 덕에 생긴 버릇은 성우에겐 치부에 가까웠다. 항상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그 순간이 싫었다.

 

 

 

‘난 성우씨 그 표정 너무 귀여워요.’

 

 

 

성우는 눈을 비비려 손을 들었다가 언젠가 다니엘이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바람 빠지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을 비비려던 손으로 대신 컵을 쥐고 커피를 마셨다. 맛있다. 성우의 입술 사이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귀찮았던 행동들에 의미가 부여되자, 성우는 제법 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계란을 꺼내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었다. 치즈를 꺼내 바삭하게 구워진 식빵에 바른 성우는, 그 위에 몽글몽글한 스크램블 에그를 올려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성우는 그 순간을 서툴게 셀카로 찍어 다니엘에게 전송했다.

 

 

 

 

 

 

 

[성우씨, 나 지금 갈까요?]

 

[아니 아니. 다니엘 식사 했어요?]

 

[그럼요. , 성우씨. 식사 챙겨줘서 고마워요.]

 

[별게 다 고맙대. 나야말로 고마워요. 그냥 다. 이제 답장 하지 마. 이따 봐요.]

 

 

 

성우는 다니엘과의 짧은 대화를 곱씹으며 토스트를 올린 접시를 들고 소파로 향했다. 오디오의 리모컨을 들어 항상 듣는 오래된 재즈를 틀자, 핸드폰에 짧게 진동이 일었다. 성우는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벌써 보고 싶은데 어떡해요? 성우씨, 사랑해요.]

 

 

 

성우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다니엘의 메시지를 바라봤다. 내가 이상한 거야. 이렇게나 직관적인 애정을 주는 다니엘인데. 불안해하는 내가 이상한 거야. 언제나 그렇듯 문제의 시작이자 원인은 나다. 그리고 끝을 내는 건 내가 아닌, 이런 나에게 질린 다니엘이겠지. 성우는 느릿하게 엄지를 움직였다. [사랑해, 다니엘.] 다른 말은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지금 성우의 입술과 손가락은, 사랑한다는 말을 제외하곤 다른 말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만든 토스트를 해치우는 데에만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사랑한다는 성우의 메시지에 빠르게 답장을 보냈던 다니엘은, 확인하지 않고 있는 성우를 배려한 것인지 다시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성우는 조용해진 핸드폰을 뒤로한 채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검은색 긴팔 티셔츠를 입은 성우는, V넥 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쇄골을 손끝으로 훑었다. 살이 또 빠졌네. 성우는 미동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가장 자주 입는 바지에 다리를 끼웠다.

 

 

 

집을 나선 성우는 흘러내리는 선글라스를 치켜 올렸다. 집 건물 앞에 대기하고 있던 콜택시에 오른 성우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잊고 있었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나 이제 나가. 다니엘, 저녁 꼭 챙겨요.] 메시지를 보낸 성우는 가만히 사라지지 않는 1표시를 바라보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니엘로부터 되돌아오는 연락이 없는 건, 성우에겐 섭섭한 부분이 아닌 오히려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다니엘의 부재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 누구보다 다니엘의 글을 사랑하는 성우에게 다니엘의 부재는, 자신이 사랑하는 문장들을 기대하게 하는 즐거운 기다림인 것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문장으로 가장 힘든 시기를 버텨낸 성우로선, 아직도 연인 강다니엘과 작가 강다니엘의 간극에 적응하지 못하곤 했다. 수줍은 소녀 팬이 된 것처럼, 자신의 연인을 마주할 때 얼굴을 붉히곤 하는 성우를 다니엘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다니엘은 성우의 귓가에 자신이 쓴 문장들을 속삭였고, 성우는 다니엘의 손을 양손으로 꼭 그러쥔 채 눈을 감고 속삭임에 녹아들곤 했다. 성우의 마음에 불안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전까진 그러했다.

 

 

 

 

 

 

 

*

 

 

 

 

 

 

 

다니엘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한쪽에 툭 내던졌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손끝으로 감은 눈 위를 꾹꾹 누르고 있으니, 그나마 뻑뻑하던 눈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꽤 한참을 그 상태로 있던 다니엘은 천천히 양손을 내리며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8 40분이 다 되어가는 시곗바늘에, 다니엘은 핸드폰부터 찾아 밀린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나 이제 나가. 다니엘, 저녁 꼭 챙겨요.]

 

 

 

성우로부터 왔던 메시지를 확인한 다니엘은, 가만히 그 메시지를 바라보다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양손을 바쁘게 움직여 작성 중이던 문서파일을 저장하고 컴퓨터를 끈 다니엘은, 곧장 일어나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못내 촉박한 시간에 쫓기는지, 다니엘의 손은 자꾸만 들고 있던 소지품을 놓치거나, 필요 없는 물건들을 집어냈다.

 

 

 

 

 

 

 

“말 좀 들어라. 와 이라는데.”

 

 

 

습관처럼 툭 튀어나온 사투리에 다니엘은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으며 코를 찡그렸다. 표준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까지 꽤나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시에 튀어나오는 습관은 다니엘을 당황시키곤 했다. 그리고 그 툭 튀어나오는 사투리에 성우는 소리 내 웃곤 했다. 다니엘은 책상 맞은편 안락의자에 앉아 소리 내 웃는 성우를 상상했다. 한참을 선 채 텅 비어있는 안락의자를 바라보던 다니엘은, 빠르게 소지품을 가방에 넣곤 성큼성큼 현관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검수용 원고 보냈어요. 이틀 정도는 전화기 꺼놓을 생각이에요. . 고마워요, .”

 

 

 

시동을 켜고 핸들에 턱을 기댄 다니엘의 시선이 분주하게 주변을 살폈다. 통화를 마친 다니엘이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다니엘은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안개에 쌓여있던 무언가가 이제 확실하게 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안개는 언제가 됐든 걷히기 마련이다. 그 안개 속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절대로 안개 속에 숨겨진 무언가를 얻을 수 없음을 다니엘은 잘 알고 있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다니엘은 느긋한 표정으로 흐르는 음악을 흥얼거렸다. 그에게 향하는 길에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자신은 여유를 두고 천천히 그 장애물을 넘어서면 된다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지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다니엘은 다시금 흔들리던 자신의 마음을 붙잡았다. 그의 불안도 스스로 먼저 다가가 감싸 안으면, 언젠간 눈이 녹듯 그 불안도 사라질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

 

 

 

 

 

 

 

“연고 드릴게요. 이거 꼭 챙겨서 바르시고, 너무 두껍지 않게 하루에 세 번 정도만 발라주시면 돼요. 그리고 오늘은 물 안 닿게 조심하세요. 한 달 후에 꼭 리터칭 받으러 오시고요.”

 

“네. 다른 타투도 꼭 여기서 받을게요.”

 

“그래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성우는 방금 자신이 타투를 새긴 고객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고객이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서자, 성우는 방금 전까지 사용했던 기계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옴에 성우는 그제야 긴장을 풀며 베드 위로 올라갔다. 요새 들어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잠이 좀 들라치면 밀려드는 불안이 성우를 뒤척이게 했다. 성우는 생각보다 일찍 끝난 작업 덕에 생긴 여유를 잠에 쏟아 붓기로 했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사용했던 잉크냄새가 느껴졌다. 오른손엔 아직도 기계의 진동이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성우는 눈을 감은 채 오른 손을 가슴으로 올려 꼭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내가 주물러 줄게요.”

 

“…다니엘?”

 

“얼마나 피곤하면 내가 온 줄도 몰라요.”

 

“언제 왔어?”

 

“성우씨 고객 나갈 때 들어왔어요. 사람 가는데 배웅도 안 해줘?”

 

“한달 후에 볼 사람인데 뭐하러.”

 

“나는 배웅해줬었잖아.”

 

“너랑 고객은 다르잖아. 그나저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보고 싶어서요.”

 

 

 

성우는 자신의 손을 잡는 손길에 놀라 눈을 떴다. 스툴에 앉아 자신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주물러주는 다니엘의 다정한 목소리에, 성우는 작게 웃으며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손을 뻗어 다니엘의 얼굴을 쓰다듬자, 다니엘은 성우의 오른손을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살짝 돌려 성우의 손에 입을 맞춰주었다. 다니엘. 나 좀 봐요. 성우의 작고 떨리는 목소리에 다니엘의 시선이 움직였다.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니엘과 시선을 마주한 성우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숨겨왔던 이야기를 꺼내도 될 타이밍이라고, 성우는 생각했다.

 

 

 

 

 

 

 

“오랜 연인이 있었어.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많았고, 나에게 타투를 가르쳐준 사람이었어.”

 

“나 괜찮아요.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얘기해도 돼.”

 

 

 

나름 각오를 하고 운을 뗐음에도, 예전 연인에 대해 말을 꺼내기 시작한 성우는 다니엘의 눈치를 살폈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를 향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다정한 말들을 속삭였다. 성우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다니엘은 성우의 오른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잡은 뒤, 눈을 반짝이며 성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사람은 조금 집착이 심한 사람이었고, 나는 지금처럼 조용한 성격은 아니었어.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아했고, 잘 웃고, 잘 떠드는, 그냥 그 나이에 맞는 평범하고 밝은 사람이었어. 미대를 졸업하고 개인작품 활동을 하던 때였고, 그 사람은 내 대학 선배였을 거야. 졸업은 하지 않았다고 들었어. 그래서 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만나게 됐어. 동기의 생일파티에 그 사람이 왔고, 나는 조금 무서운 그 사람 인상에 겁을 먹었던 것 같아.

 

 

 

성우가 자신을 바라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자, 다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다는 걸 내비쳤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고,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에게 힘이 되어줄 요량인 듯, 맞잡은 성우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췄다.

 

 

 

술도 조금 취했고, 머리가 아파서 잠깐 밖에 나와 있었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때 재떨이를 보며 고민했어. 나도 한 번 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술을 깨고 있는데, 그 사람이 옆에 앉았어. 나는 도망갈 타이밍을 노렸고, 그 사람은 내가 없다는 듯이 담배를 꺼내 물었어. 그리고 나에게 담배를 한 가치 주더라고. 그렇게 그 사람 앞에서 생애 첫 담배를 피워봤지. 죽겠더라고. 목도 아프고, 어지럽고. 내가 콜록거리니까 그 사람이 웃었어. 근데 그 웃는 얼굴이 너무 순진해보여서,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어. 그날부터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붙어 다녔고, 자연스럽게 사귀는 사이가 됐어.

 

 

 

 

 

 

 

“그 사람이 나에겐 전부 처음이었어.”

 

 

 

성우는 마지막 말을 뱉은 뒤 한숨을 내쉬었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를 보채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성우의 손가락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에게, 간지러워. 부서지는 듯 웃으며 속삭였다. 다니엘은 그럼에도 진중한 표정으로 성우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의 입술이 멈출 때까지, 가만히 다니엘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성우의 새끼손가락 끝에 다니엘의 입술이 잠시 머물고 떨어지자, 성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 사람은 집착이 심했어. 내가 친구와 만나는 걸 싫어했고, 나는 그 사람이 싫어하는 걸 하는 날 싫어했어. 그렇게 주변과 조금씩 단절되었고, 가족과도 어느 순간 멀어졌어. 그래도 난 그 사람만 내 곁에 있어주면 충분했어. 많이 어리석었고, 소유욕을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런 어린 시절의 나였어. 그 사람은 자신만 남은 나에게서 흥미를 잃어갔고, 나는 유일하게 남은 그 사람에게 매달리기 시작했어. 몇 시간 이어지지 않았던 연락이 하루가 되었고, 이틀이 되고, 길게는 1주일동안 연락이 되지 않기도 했어.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던 내 집엔 내가 내는 소리만 가득해졌고, 결국 나는 불안에 못 이겨 그 사람을 찾아 나섰어.

 

 

 

 

 

 

 

“그 사람은 내가 아닌 사람과 키스를 하고 있었어. 항상 함께 가던 작은 술집, 항상 함께 앉던 그 자리, 내가 앉아있던 그 곳엔, 나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사람이 앉아 그 사람과 키스를 하고 있었어.”

 

“…개새끼네요.”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까 한 번에 정리가 되더라고. 따지고 싶지도 않았고, 화도 나지 않았어. 어차피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거든.”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 거 아냐.”

 

“…응. 많이 아팠어. 그래도 그냥 흘려보내고 싶었어. 그래서 그냥 집으로 와서 짐을 챙겼고, 나는 그 집을 나와 아예 다른 곳으로 옮겼어.”

 

“그 사람이 성우씨 찾진 않았어요?”

 

“글쎄다. 과연 찾았을까? 그 집을 나오면서 나는 연락처도 전부 바꿨고, 예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과도 완전히 연락을 끊었거든. 그렇게 혼자가 되었지. 그래도 모아둔 돈에, 학원이나 과외를 하며 돈을 벌었어. 그렇게 지금 이 작업실을 차렸고, 나 혼자 살기 좋은 방도 얻었어. 그리고 널 만나게 된 거야.”

 

 

 

다니엘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성우를 바라봤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상체를 일으켜 다니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농밀하진 않은, 그저 맞대고만 있는 입맞춤이어도, 서로를 향한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그렇게 서로의 입술에서 전해지는 마음과 온기만을 느끼던 둘은, 성우가 몸을 일으키며 떨어졌다.

 

 

 

베드에 걸터앉은 성우의 양쪽 발목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준 다니엘은, 손을 뻗어 성우의 얼굴과 팔을 쓰다듬었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은 가만히 내려 보다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성우의 눈이 다시금 떠져 다니엘을 바라본 순간엔, 성우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의 눈가를 엄지로 매만지며, 애틋한 표정으로 성우를 올려봤다.

 

 

 

 

 

 

 

“그 사람은 날 사랑하는 동안엔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었어. 숨 쉬는 것처럼 사랑을 고백했고, 혼자가 된 나를 위해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줬어. 사랑할 땐, 정말 진심으로 날 사랑해주었어.”

 

“…성우씨.”

 

“그래서 불안했던 것 같아. 네가 나에게 주는 사랑에 내가 너무 행복해서, 혹시 너도 그 사람처럼 날 떠나진 않을까. 그렇게 겁을 먹었나봐. 근데 나는 그때처럼 너에게 자꾸 의지하게 되고, 내 모든 생활을 너에게 맞추게 되고.. 그래서 무서웠어. 네가 이런 나를 부담스러워 할까봐. 그리고 날떠나게 될까봐.”

 

 

 

성우의 서러운 미소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니엘은 스툴을 박차고 일어나 성우를 끌어안았다. 성우는 말없이 다니엘의 품에 안겼고, 다니엘은 성우를 더욱 끌어안으며 성우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성우에게서 흘러내린 눈물이 다니엘의 어깨를 적셨고, 다니엘의 거친 숨이 성우의 귓가에서 흩어졌다. 한참을 말없이 성우를 안고 있던 다니엘은, 힘을 주었던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며 성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성우씨가 없으면 내가 못 살 것 같아요. 지금 하는 이 말도 당신의 불안을 잠재워줄 말은 아니란 걸 알아요.”

 

“…나는 네가 날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하지 않아. 넌 정말 진심으로 날 사랑해주고 있어. 그건 나도 잘 알고, 전부 느끼고 있어.”

 

“계속 보여줄게요. 계속 느끼게 해줄게요. 내가 당신의 곁에서 계속 사랑할게요. 시간이 얼마나 흐르건, 나는 성우씨의 연인으로 계속 곁에 있을게. 당신이 불안해하면, 내가 이렇게 안아줄게요. 그러니 성우씨, 당신은 제발 행복하길 바라요.”

 

“…다니엘?”

 

“행복해줘요, 성우씨. 내 옆에서 내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줘. 불안해해도 좋아, 형이 나에게 화를 내도 좋고, 어떠한 짓을 해도 좋아. 그냥 아주 잠깐이라도, 나와 함께해서 행복하다고, 그렇게 생각해줘요. 느껴줘요. 그럼 그 잠깐이 모여서 언젠간 성우씨의 불안이 사라지지 않을까? 나는 다른 거 안 바라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성우씨가, 형이. 나와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다니엘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연하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어른스럽고,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던 다니엘이, 몸을 떨어가며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성우는 팔을 들어 다니엘의 등을 감싸 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다니엘. 내 과거로 인해 널 울게 해서 미안해.

 

 

 

처연한 사과였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되레 미안하다며 울먹이는 성우를 다시금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니에요, 라는 말 한마디를 꺼내지 않았지만, 다니엘은 그저 성우를 꽉 끌어안는 것으로 자신의 대답을 전했다. 성우는 다니엘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고, 다니엘은 그런 성우를 끌어안은 채, 성우와 자신의 울음이 멎을 때까지 그저 성우의 마른 등을 다독였다.

 

 

 

우리 이제 진짜 연인 같아.

 

 

 

울음이 거의 멎어갈 즈음, 성우가 웃음을 터트리며 뱉은 말에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

 

 

 

 

 

 

 

“성우씨, 안 자요?”

 

“응. 다니엘 일어나지 말고 자.”

 

“어디 가려고요.”

 

“도안 작업 좀 하려고.”

 

“그럼 나도 같이,”

 

“아니야. 자요. 다니엘 지금 엄청 졸린 얼굴이야.”

 

“…혼자 두기 싫어요.”

 

“왜 내가 혼자야. 나 다니엘 자는 거 구경하면서 그릴 거야.”

 

“…치사한 거 아냐?”

 

“나보다 잠이 많은 건 다니엘 탓이지. 얼른 자.”

 

“알았어요.”

 

 

 

다니엘은 잔뜩 졸린 표정으로 성우를 올려보며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시야엔, 자신의 셔츠를 걸친 성우의 옆모습이 보였다. 빛바랜 가죽표지의 두꺼운 드로잉 북의 중간을 펼친 성우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한쪽 무릎을 세운 뒤 그 위에 턱을 기댔다.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에 닿아 울리는 소리가 기분 좋아 다니엘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당장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 같아, 다니엘은 억지로 눈을 뜬 채 성우를 바라봤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주 오랜만에 서로의 몸을 탐했던 밤이었다. 씻으러 들어간 성우를 따라 들어가, 거기서도 성우를 탐한 다니엘은, 결국 침대로 돌아와선 성우에게 자신이 입었던 셔츠를 입혀주었다. 대충 걸친 셔츠가 벌어진 틈으로 자신이 남긴 붉은 자국들이 드러나자, 다니엘은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과 귀를 붉혔다.

 

 

 

 

 

 

 

“다니엘, 계속 그렇게 안 자면 나 나갈 거야.”

 

“누가 안 자요? 강다니엘 완전 잠들었어요.”

 

“능글거리는 것 좀 봐.”

 

“내 아님 누가 햄한테 능글거리는데.”

 

 

 

일부러 사투리를 툭 내던진 다니엘은, 드로잉 북에 이마를 묻고 키득거리는 성우의 반응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슬금슬금 다가가 성우의 허리를 양팔로 끌어안은 다니엘은, 성우의 세워진 허벅지에 입술을 묻었다. 나 이렇게 잘게요.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그려요. 그 소리 듣기 좋아. 다니엘의 살짝 잠긴 목소리에 성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우의 왼손이 내려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다니엘은 그제야 눈을 감으며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잘 자, 다니엘. 사랑해. 성우의 듣기 좋은 미성에 다니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랑해요.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을 하고 있던 성우는, 드로잉 북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장을 바라보다 건조해진 눈을 질끈 감고선 천천히 뜨며, 연필을 쥐고 있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뻐근함을 달래던 성우는, 여전히 자신의 허리를 감은 채 잠든 다니엘을 내려 보았다.

 

 

 

 

 

 

 

“아이라고, 거가 아이라고. 아이라꼬! 털린다, 털려뿐다.”

 

“…뭐라는 거야.”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잠꼬대를 해대는 다니엘의 모습에, 성우는 입을 가리며 터지는 웃음을 겨우 삼켜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20대 중반이라니까.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연인을 내려 보는 성우의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로잉 북과 연필을 오른 편에 내려두고, 성우는 자신의 왼쪽에서 잠든 다니엘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잠든 다니엘의 눈가와 코, 입술에 입을 맞춘 성우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다니엘의 양팔을 풀었다. 잠귀가 어둡고, 잠꼬대가 심한 다니엘은, 성우가 침대 밑으로 내려가 앉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여전히 미간을 찡그린 채 알아듣지 못할 잠꼬대를 뱉고 있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을 가만히 바라보며, 자신의 양쪽 무릎을 세워 팔로 끌어안았다.

 

 

 

 

 

 

 

“애기다, 애기. 귀여워.”

 

 

 

성우는 잠든 다니엘의 손을 잡아,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손가락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길게 뻗은 다니엘의 손가락은 성우가 다니엘의 몸 중 가장 사랑하는 곳이었다. 다니엘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던 성우는,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어 다니엘의 잠든 얼굴을 살폈다. 연필과 각종 필기구를 넣어둔 작은 파우치를 뒤적이던 성우는, 검은색 제도용 팬을 꺼내들었다.

 

 

 

길게 뻗은 다니엘의 손가락 곳곳에 제법 거친 모양의 나뭇가지를 그려 넣었다. 다니엘의 손등엔 두꺼운 나무기둥과 뿌리를 그려 넣었고, 손가락으로 퍼져나가는 나뭇가지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선을 더해나갔다. 커다란 다니엘의 손엔 금세 강인한 나무가 그려졌다. 다른 쪽 손에도 똑같이 나무를 그려 넣은 성우는, 붉은색 제도용 팬으로 바꿔든 뒤 다니엘의 얼굴을 살폈다. 세상모르고 깊게 잠든 다니엘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춘 뒤,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상체를 숙여 다니엘의 손가락에 무언가 그려 넣기 시작했다. 창을 가린 커튼의 밖으론, 이미 검은 새벽이 푸른 새벽으로 바뀌고 있었다.

 

 

 

 

 

 

 

*

 

 

 

 

 

 

 

“…아, 알람.”

 

 

 

다니엘은 평소보다 깊게 잠든 탓에, 귓가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에 놀라 눈을 떴다. 부스스한 채로 몸을 일으킨 다니엘은,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핸드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성우는 보이질 않았다. 또 새벽에 거실로 나가서 자는 건가. 다니엘은 멍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비어있는 옆자리를 바라봤다. 그러다 다시 쥐고 있던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기자, 울긋불긋한 자신의 손가락이 보였다. 뭐꼬! 놀란 나머지 사투리를 뱉어댄 다니엘은, 사이드 테이블에 놓아둔 안경을 집어 쓴 뒤 자신의 손을 내려 봤다.

 

 

 

 

 

 

 

“…동백꽃?”

 

 

 

다니엘은 자신의 손등과 손가락에 가득 들어찬 나무와,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탐스럽게 피어있는 수많은 동백꽃을 알아챘다. 양쪽 손등이 보이도록 얼굴 가까이 양손을 들어 올린 다니엘은, 자신의 탄생화인 동백꽃이 잔뜩 피어있는 자신의 손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쪽 손목부터 팔까지 길게 적혀있는 문구를 발견했다.

 

 

 

그 사람 손가락 마디마디 꽃 피우고 도망친 새벽.

 

 

 

서툰 글씨체로 적혀져있는 문구는 자신도 알고 있는 시인의 새벽꽃이란 시의 한 구절이었다. 다니엘은 연인의 글씨체를 몇 번이고 곱씹어 읽다가 쓰러지듯 침대에 풀썩 누웠다. , 너무 사랑스러워. 미치겠다. 다니엘의 목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졌고, 다니엘은 한참을 자신의 팔과 손등에 남겨진 성우의 흔적을 바라봤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이걸 그려냈을 성우의 모습이 상상됐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연인의 표정이 떠올라, 다니엘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그려놓고 거실로 도망치다니, 진짜 치사한 거지. 다니엘은 빠르게 침실에서 나와 거실로 향해 내달렸다.

 

 

 

 

 

 

 

“…뭐야. 어디 있어.”

 

 

 

예상대로라면 소파 위에서 쪽잠을 자고 있는 성우의 등이 보여야 하는데, 정작 다니엘의 시선에 비춰진 소파는 텅 비어있었다. 다니엘은 그때부터 미친 듯이 온방을 뒤지듯 문을 열었고, 그때마다 텅 비어있는 공간에 점점 울상을 지었다. 결국 마지막 방에서도 성우를 찾지 못한 다니엘은 다시 침실로 내달렸고,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핸드폰을 찾아 성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 , 다니엘. 일어났어?

 

“아니, 어디 있어요? 성우씨! 진짜 도망갔어요?”

 

- 나 작업실이야. 도안이 생각보다 잘 나와서 그래픽 작업해두려고.

 

“말을 하고 나가야죠, 놀랐잖아.”

 

- 다니엘 팔에 써놨는데..

 

“진짜 내가 미치겠다. 거기 있어요. 지금 갈게.”

 

- 다니엘은 오늘 작업실 안 가?

 

“나 이틀은 쉬어요. 딱 기다려요, 성우씨.”

 

- 알았어, 알았어. 다니엘.

 

“왜요!”

 

- 사랑해.

 

“하, 내 미친다. 내도 사랑해요. 바로 갈게요.”

 

 

 

다니엘은 핸드폰을 침대에 던지곤 욕실로 달려갔다.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었다가, 자신의 양쪽 손등에 그려진 동백나무를 바라보곤 울상을 지었다. 이래가 씻지도 몬하고. 내 미친다. 다니엘은 칫솔에 치약을 듬뿍 올리곤 입으로 넣으며 중얼중얼 거렸다. 그럼에도 다니엘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

 

 

 

결국 양치질과 어설픈 세안만 하고 나온 다니엘은, 곧장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골랐다. 편안한 반팔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후드 집업을 걸친 다니엘은, 성우가 자주 입는 바지와 똑같은 자신의 바지를 꺼내 입었다. 핸드폰과 지갑을 후드 주머니에 넣고, 모자를 푹 눌러쓴 다니엘은, 차키를 손에 쥔 채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신발을 대충 신고 나온 다니엘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신발을 제대로 고쳐 신었다. 내가 진짜 살다 살다, 씻지도 않고 애인 만나러 가다니. 다니엘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내뱉다가도, 자신의 손등에 자라난 동백나무를 내려 보며 또다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지구 끝까지 도망쳐 봐라. 내가 어디든 쫓아가서 안아줄 테니까.”

 

 

 

다니엘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중얼거렸다. 지하주차장 버튼을 누른 다니엘은, 손등과 팔이 드러나도록 후드 집업의 양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빠르게 내려가는 숫자만큼 다니엘의 심장도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자신의 차로 달려가는 다니엘에게선, 평소엔 뿌리지 않는 동백향의 향수가 풍겨졌다.

 

 

 

 

 

 

 

*

 

 

 

 

 

 

 

성우는 듀얼 모니터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래픽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태블릿 펜으로 자신이 스케치해온 도안을 그려내던 성우는, 습관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인공눈물을 집어 들었다. 양쪽 눈에 넉넉한 양의 인공눈물을 넣은 성우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건조한 안구가 촉촉해지길 기다렸다. 그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성우는 문 쪽으로 빙글 의자를 돌리며 고개를 바로 했다. 평소보다 편한 차림으로 급하게 안으로 들어온 다니엘이 바로 자신을 발견하여 가까이 다가오자, 성우는 미소를 지으며 양쪽 팔을 다니엘에게 뻗었다.

 

 

 

 

 

 

 

“아니, 와 우는데!! 햄 진짜 뭔 일 있나!”

 

‘…어? 나 안 우는데.“

 

“안 울긴 뭐 안 운다 카는데, 이래 눈물을 흘려대믄서!”

 

“인공눈물이야, 다니엘. 진정해.”

 

“…맞나. 성우씨, . - 그래요.”

 

“그게 뭐야, 다니엘.”

 

 

 

성우는 자신의 어깨를 양손으로 쥐고 흔들며 다급하게 떠들어대던 다니엘이, 점점 멋쩍은 얼굴로 바뀌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내려치며 웃어대는 성우의 모습에, 다니엘은 귀까지 붉게 물들인 채 괜히 모자를 고쳐 쓰곤 성우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성우씨, . 나 봐요. 다니엘이 성우의 허벅지 위에 양쪽 팔을 올리며 말하자, 성우는 양손 끝으로 눈가를 닦은 뒤 다니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응, 다니엘. 봤어.”

 

“오늘 바빠요?”

 

“아니. 오늘은 예약 없어.”

 

“그럼 나한테 써요.”

 

“뭐할까, 다니엘.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이거. 타투로 새겨줘요.”

 

“어?”

 

“이 동백나무. 나 안 지우고 싶어요.”

 

 

 

성우는 진지한 표정의 다니엘을 당황스런 눈빛으로 내려 봤다. 다니엘은 웃음기라곤 없는 표정으로 성우를 올려봤고, 성우는 그제야 다니엘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 쪽으로 올려 그려진 동백나무를 살폈다. 이거 타투로 새기려면 그래픽 작업도 해야 하고, 대충 그린 거라 드로잉도 다시 잡고 싶고. 오늘 바로 하기엔 좀 무리인데. 다니엘, 차라리 내가 다른 도안도 그릴 테니까, 오늘은 하지 말자. ? 성우의 현실적인 대답에도 다니엘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고개만 가로 저었다.

 

 

 

 

 

 

 

“다니엘, 내가 네 몸에 새겨주고 싶어서 몇 달을 도안 작업 중인데..”

 

“난 꼭 이거였으면 좋겠어요.”

 

“그거 알아? 손등이랑 손가락 정말 아파. 너 아픈 거 싫어하잖아.”

 

“참을 수 있어요. 성우씨가 새겨주는 거잖아.”

 

“…다니엘, 우리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난 그런 거 몰라요. 성우씨만 알아. 그러니까 성우씨 얼른 그래픽 작업부터 해요.”

 

“이거 평생 가는 거야, 후회 안할 자신 있어?”

 

“무슨 소리에요. 난 평생 성우씨 옆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 어디 도망칠 생각 하지 마. 특히 오늘처럼 말없이 이런 시 구절이나 써놓고 가버리고. 잘 때 손목을 하나로 묶어놓든가 해야지.”

 

 

 

말없이 작업실로 나온 성우가 못내 서운했는지, 손목을 묶어놓겠다는 다니엘의 표정이 어린 아이처럼 일그러졌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을 가만히 내려 보다 다니엘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서운한 마음을 토해내던 다니엘은 성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고, 성우는 다니엘을 꼭 끌어안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 아프다, 다니엘. 지금이라도 도망쳐.”

 

“앞으로 우리 둘 사이에서 도망이란 말은 금지에요.”

 

“알았어. 나 바로 그래픽 작업부터 할게. 다니엘은 손 씻고 와.”

 

“안 찍어놔도 돼요?”

 

“내가 그린 그림이야. 전부 머릿속에 있어.”

 

“와, 새삼 반했다. 성우씨, 지금 진짜 형 같았어요.”

 

“…더 아프게 새겨버릴 거야.”

 

 

 

에이, 왜 그래요. 능글거리는 다니엘의 목소리에 성우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다니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입술에 입을 맞추자, 성우는 다니엘의 손을 꼭 잡으며 눈을 감았다. 긴 입맞춤의 끝, 다니엘이 샤워실로 들어가자 성우는 뒤늦게 붉어진 얼굴로 의자를 다시 돌렸다. 작업 중이던 파일을 저장한 성우는, 새로운 파일을 열어 거침없이 다니엘에게 새겨줄 동백나무 두 그루를 그리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손에 그린 것보다 더욱 디테일하게 잡아가며 성우가 집중을 하는 동안, 샤워를 마친 다니엘이 상체를 드러낸 채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나왔다. 옷 똑바로 안 입어? 놀란 성우가 소리를 지르며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다니엘은 키득거리며 성우에게 다가갔다.

 

 

 

 

 

 

 

“이래야 타투 새기기 쉽잖아요.”

 

“아니야, 더 방해야. 반팔티라도 입어.”

 

“왜 방핸데요?”

 

“…섹시해서 나 손떨면 어떡해.”

 

“성우씨.”

 

“왜.”

 

“사랑해요. 나 지금 성우씨 때문에 심장 엄청 뛰어요.”

 

“알았으니까 제발 옷 좀 입어줘, 다니엘.”

 

“에이, 아쉽다. 알았어요.”

 

 

 

정말 아쉬운 표정의 다니엘이 다시 샤워실로 들어가자, 성우는 양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곤 고개를 숙였다. 32살의 성우에게 26살의 다니엘은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자신과 다니엘의 사이에 쌓인 6년이란 시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다니엘은 언제나 성우가 예상치 못한 행동과 말들을 거침없이 내비쳤다. 그 거침없는 애정표현에 완전히 넘어간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건가, 성우는 결국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래픽 작업에 속도를 올렸다. 오늘 정말로 다니엘에게 직접 동백꽃을 피워주게 된다면, 자신의 마음에 싹을 틔운 불안이 눈 녹듯 사리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왔다. 평생 다니엘의 손등에 피어있는 동백꽃이라면, 자신 역시도 다니엘의 곁에 함께 머물 수 있을 거라고, 성우는 드디어 불안의 싹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

 

 

 

 

 

 

 

“다니엘.”

 

“네.”

 

“진짜 아프다. 나 경고했어.”

 

“진짜 괜찮다. 나 말했어요.”

 

“울어도 모른 척 해줄게.”

 

“성우씨나 울지 말아요. 나 소리도 안 낼 거니까.”

 

“움직이면 안 돼. 알았지?”

 

“빨리 시작해요. 나 지금 엄청 두근거려요.”

 

“…난 분명히 아프다고 했다. 사랑해, 다니엘.”

 

“나도 사랑해요.”

 

 

 

성우는 누워있는 다니엘의 입술에 입을 맞춘 뒤, 스툴에 앉아 쿠션 위에 놓인 다니엘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다니엘의 손을 놓은 성우는, 손등에 그려진 선을 따라 니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등부터 전해지는 짜릿한 통증에 다니엘은 눈을 크게 뜨며 성우를 내려 봤고, 성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니엘의 손등만을 바라보며 손을 움직였다. 설마 했는데 이렇게까지 아플 줄이야. 다니엘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으악! 비명을 질러댔고, 성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키득거리면서도 움직이는 니들을 멈추지 않았다. , 성우씨. 뭐 이래 독한데! 다니엘의 외침은 크게 진동하는 니들의 기계음에 묻혀 공중으로 흩어졌다.

 

 

 

 

 

 

 

“조금 쉬었다 할까?”

 

“…네. 그래주세요.”

 

“이제 나무 다 그렸어. 그것도 한쪽.”

 

“…아이고야, 내 디지그따.”

 

“한쪽만 할래?”

 

“아니요. 그래도 양쪽 다 할래요.”

 

“진짜 후회 안 해?”

 

“그런 거 할 줄 모르고, 배운 적도 없어요. 특히 성우씨 관해서는 더더욱.”

 

“…작가 아니랄까봐 말 잘하는 것 봐.”

 

“사랑하니까 그런 거예요. 작가라서가 아니라.”

 

“다니엘, 아프지 말라고 상 줄게.”

 

“뭔데요?”

 

 

 

상체를 비스듬히 세운 다니엘의 위로 성우의 몸이 포개졌다. 다니엘을 사이에 두고 양쪽을 손으로 짚은 성우가, 고양이처럼 엎드린 채 다니엘의 입술을 핥기 시작하자, 다니엘은 성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눈을 감았다. 다니엘 손 움직이면 안 돼. 알았지? 어느새 귓가로 옮겨진 성우의 입술 사이에서 나른한 미성이 새어나왔다. 다니엘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베드에 누웠고, 성우는 그런 다니엘의 위에 함께 누우며 다니엘의 목선에 입을 맞췄다.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다니엘이 사랑스러운 듯, 성우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다니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마주한 시선, 성우는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 다니엘.”

 

“성우씨, 내가 정말 성우씨 엄청 사랑해요. 내 마음이 그래.”

 

“오늘 잘 참으면, 이따가 밤에 집에서 상 더 줄게.”

 

“…성우씨, 우리 서두릅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다니엘의 행동에 성우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스툴에 앉은 성우가 기계를 작동시키자, 진동음에 다니엘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입술을 꾹 닫곤 성우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숙여 다니엘의 다른 쪽 손등에 나무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양쪽 손등에 동백나무가 새겨질 동안, 성우는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고, 다니엘 역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니엘은 다짐했다. 불안이 머문 연인의 손가락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언제까지고 동백이 피어난 자신의 손으로 연인의 손을 꼭 잡아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