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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그대여, 내게 돌아와 줄 수 없다면 돌아봐도 안 돼요.

그대여, 나는 죽어도 안 되겠다면 차라리 날 숨 쉬게 하지도 마요.

 

희망고문

 

 

 

 

친구끼리 어때

르잔

 

 

 

 

 

 

 

01.

14학번의 핫한 비주얼 센터 옹성우의 마음을 들쑤시는 강다니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간단했다. 한 학번 아래의 사랑둥이, 대형견. 공대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 인사였다. 성우 또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안다'라고 표현한다면 서운할 정도의 가까운 사이였다. 친절하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둘의 첫 만남을 짚어보면, 그건 신입생 환영회였다. 맑게 웃는 낯으로 술 한 잔 빼지도 않고 쭉쭉 들이키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말려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 동기에게 면박을 주는 성우에게 괜찮다며 얘기하는 발음이 퍽 귀여웠다.

 

"너 얘가 누군지 알아?"

"닥치고 잠이나 자."

"14학번의 비주얼 센터 옹성우시다. 공대, 아니 우리 학교에서 얘 모르면 간첩이니까 잘 알아두라고, 멍멍."

"멍멍."

 

멍멍? 술 처먹더니 이것들이 쌍으로 미쳤나. 성우의 미간이 대놓고 찌푸려졌다.

 

"성우야."

"또 뭐. , "

"이 새끼 까칠한 거 봐. 멍멍아, 너도 얘 얼굴에 속으면 안 돼."

 

동기의 혀 꼬인 말에 하얀 얼굴이 순하게 웃었다. 그 얼굴이 꽤 곱다고 생각하는 성우였다. 내가 이 얼굴에 속아서... 웅얼웅얼하더니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동기를 지켜보던 성우는 싸늘한 표정과 다르게 다정한 손길로 겉옷을 덮어주었다.

 

"한 잔 받을래? 괜찮아?"

", . 저는 15학번 강다니엘입니다."

"나는 14학번 옹성우. , 말 편하게 해도 되죠?"

", 그럼요."

 

잔이 부딪치면서 튀어나온 소주가 테이블을 적셨다. 알코올은 금방 날아가, 괜찮아, 괜찮아. 다니엘이 휴지를 뽑으려고 하자 성우가 말리며 소주병을 흔들어 보였다. 이에 양손으로 잔을 들어 올린 다니엘의 행동이 여전히 빠릿빠릿했다.

 

"술이 센가 봐."

"조금, 합니다."

"힘들면 억지로 마시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게 해, 편하게."

". 괜찮아요, 아직은."

"말도 편하게 해."

"?"

"한 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

 

그럼, - 성우의 눈이 기분 좋게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를 마주하는 다니엘의 눈도 예쁘게 휘어졌다. 아무 이유 없는 웃음은 오히려 더 특별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다니엘의 웃음은 점점 많아져 넘치기 직전이었다. 성우 역시 눈 밑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입 위에 자리 잡은 보조개도 쉴 틈이 없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어찌나 할 이야기들이 많은지 대화와 술잔은 멈추지 않았다. 쟤네 미친 거 아니냐? 소울 메이트 만나셨단다, 우리 옹 군이. 아니, 우리 옹이가? 공대 '사포 남' 옹이가?! 과장된 동기들의 장난에 성우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저 미친놈들이..."

"저거 봐, 우리 옹 군은 딱 김 교수의 조교를 해야 하는 인재라니까!"

 

공대 필수과목인 '창의적 공학 설계' 담당인 전설의 김 교수는 싸가지로 교내 유명 인사였다. 학기 중 10번 정도는 가볍게 대나무 숲에 올라오는 김 교수가 유독 성우를 예뻐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잘난 얼굴 때문이라고 모두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튼, 성우는 교수님의 그러한 관심과 사랑을 불편했고, 그 사실을 아는 동기들에게 성우는 좋은 놀림감이라는 것이다. 까칠함과 까칠함의 완벽한 만남이라나, 뭐라나.

 

"지랄을 해요, 지랄을. 내가 그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옹 군, 진정하시오."

 

퍽 엄한 말투에 성우도, 주변 동기들도 다 웃음이 터졌다.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다니엘만 빈 술잔을 만지며 작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미소 또한 이야기가 재밌어서라기보다는, 분위기 흐름에 맞추기 위해서가 더 정확해 보였다. 제일 먼저 웃음을 멈추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성우와 두 눈이 마주했을 때, 그는 비로소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얀 피부에 순하게 휘어지는 눈, 시원한 입매가 부드럽고 예뻤다.

 

"짠할까요?"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눈을 세게 깜빡인 성우는 비어 있는 잔에 술을 채웠다. 어지간히 대화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는지 행동이 빨랐다. 술을 따르는 그 순간에 집중한 성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살짝 보이는 앞니에 다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앞니를 내밀었다. '' 튀어나왔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튀어나오는 앞니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터지는 성우의 웃음에 다니엘은 멋쩍은 듯 눈가를 긁적였다.

 

"너 되게 귀엽다."

 

입을 꾹 다물고 잔을 부딪치는 성우의 입꼬리가 더 귀엽다고 생각하는 다니엘이었다. 너는 눈 밑에 점도 있네, 귀엽다. 얼굴도 하얗고, 귀엽게. 마지막 잔이 성우의 한계치였는지 성우의 말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선배도 볼에 점이 있네요. 별자리같이."

". 예쁘지?"

". 예뻐요."

 

저 입매가 문제였다. 왜 저렇게 예쁘게 벌어져서는. 눈 밑에 점은 또 별 가루라도 묻었나. 빛나고 있다, 반짝반짝. 네가 내 별 가루 훔쳐 갔니? 실없는 제 생각에 성우는 히죽 웃었다. 다니엘이 따라 웃었다. 자랑했던 앞니가 성우에게 인사했다. 다니엘 앞니야, 안녕. 오뚝하지만 동그란 코끝이 성우에게 인사했다. 그래, 너도 안녕. 길게 뻗은 눈매가 인사했다. 예쁘다, 안녕. 마지막으로 눈 밑에 빛나고 있는 점이 인사했다. 넌 참 빛나는구나. 안녕.

 

그리고 그게 뭐라고, 대체 뭐라고, 작은 빛이 성우의 마음에 콕 박혀버렸다.

박혀버린 빛은 꽃을 피우고 도망쳤다.

 

 

 

 

02.

정신은 멀쩡했다. 몸이 조금 안 따라줄 뿐이지. 바람이 시원했다. 달도 밝고. 성우의 옆에서 걷고 있는 다니엘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요즘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들리는 노래였다. 듣기 좋은 목소리에 성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탔다. 이 밤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음료수라도 드실래요?"

"?"

"힘들어 보여서..."

"딱히... 아니다, 좀 힘든 것 같네."

 

나는 그냥 물 마실래. 성우의 손에는 물이, 다니엘의 손에는 이온 음료와 젤리 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어색하게 스치던 손이 부스러기들 덕분에 묘하게 편해진 분위기였지만 성우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 살짝살짝 스쳤던 온기는 생각보다 아주 간지러웠고, 생각보다 많이 설렜다. 딱 봐도 자신보다 커다란 손은 따뜻하기까지 했다. 참을 수 없는 아쉬움에 결국 물병을 오른손으로 옮겨 들었다. 술기운에서 나오는 용기였다.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가까이했다. 닿을락 말락. 심장이 뛰었다.

 

"선배."

아이고, 깜짝이야. 눈에 띄게 놀라는 성우에 다니엘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저 몰래 나쁜 일 하려고 했죠?"

"..."

"뭐야, 재미없게..."

 

. 나 사실 실수인 척 네 손 건드리려고 했어. 그런데 이게 나쁜 짓인가? 친구끼리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성우는 입을 꾹 다문 채 다니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입꼬리 위에 쏙 들어간 보조개가 눈에 들어왔다. 다니엘은 이 작은 얼굴에 눈, , 입 다 들어가 있는 것도 모자라서, 별자리 점에, 보조개까지 있는 게 신기했다. 시선과 신경이 모두 성우에게 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가 문제인 듯했다.

 

"왜 불렀어?"

"조금 쉬다 가자고요. 술도 좀 깰 겸."

 

너는 멀쩡한 것 같은데, 속으로만 삼켜지는 말이었다. 나란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둘의 거리는 넓은 벤치에 비해 지나치게 가까웠지만, 둘 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춥다..."

"추우세요?"

"술 먹어서 그런가, 으슬으슬하네."

 

말하고 난 뒤 아차 싶은 성우였다. 집에 가자고 일어날 것 같은 다니엘에 불안해진 성우는 괜히 눈을 깊게 깜빡였다.

 

"제 손 잡을래요, 그럼?"

 

성우의 자책을 비웃듯 예상을 벗어난 대답이 돌아왔다.

 

"?"

"제가 손이 따뜻하거든요. 추우시면 잡으셔도 돼요."

"갑자기, 뭐야."

"친구끼리 뭐 어때요."

 

다니엘의 말처럼 뭐 어떠냐 싶으면서도 입꼬리가 내려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친구'라는 말이 좋으면서도, 괜히 씁쓸하게 들렸다. 만난 지 약 5시간 만에 이어진 '친구'라는 관계. 꽤 괜찮은 거리임에도 하염없이 멀게 느껴져 자신을 바라보는 하얀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는 성우였다. 그 표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다니엘은 슬금슬금 웃고 있던 입매를 정돈하더니 눈두덩을 긁적였다.

 

"친구가 아닌가...?"

"..."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아니야, 친구, 친구지. 친구 좋지."

"저도 좋아요. 그럼 손!"

 

그렇다고 하자, 우선은. 나지막하게 흘린 말을 제대로 못 들었는지 다니엘은 성우의 손을 잡고선 만족스러운 듯 예쁘게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이 꼭 하얀 곰 같기도 하고, 하얀 강아지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동기들이 다니엘에게 '멍멍' 거리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멍멍."

"뭐예요."

"아니, 아까 그놈들이 너한테 그랬잖아."

"그놈들이요?"

"동기들."

"아아, 선배들이 강아지 닮았다고 하셔서 장난으로..."

"그런데 왜 나한테는 안 해줘?"

"뭐를요?"

"멍멍."

 

새벽 공기를 가르는 다니엘의 웃음소리가 청량했다. 아니, 왜 웃는 거야, 대체. 이어서 들려오는 동글동글한 목소리와 힘을 주는 차가운 손. 다니엘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눈가에 작게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다니엘."

", 죄송해요, 죄송해요."

"..."

"선배가 '멍멍' 하는 게 너무 귀여워서..."

 

웃어, 버렸네요... 눈치 보는 다니엘 앞에 성우는 잘 익은 사과였다. 다급하게 손부채질을 하려 했으나 다니엘의 손에 잡혀있는 자신의 손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니엘."

"."

"나에게 자유를 좀 줄래?"

"?"

"손 좀 놓아줘."

", 죄송해요!"

 

옆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성우의 옆에서 다니엘은 조용히 젤리 봉지를 깠다. 부스럭부스럭. 거슬릴 법한 그 소리는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성우는 홀로 느끼는 묘한 어색함에 입을 꾹 다물었다.

 

"선배도 드릴까요?"

"아니, 단 건 별로..."

"그러시구나."

 

이놈의 입이 마음대로 움직인다. 군것질이라면 절대 남에게 지지 않는 성우였다. 아마 동기들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입을 다물지 못했을 거다.

 

"그게 아니고, 지금은 별로라고."

"저는 단 거 진짜 좋아하거든요."

". 나도. 초콜릿도 좋아하고, 다 좋아해."

"그럼 다음에 맛있는 케이크 먹으러 가요. 제가 진짜 좋아하는 곳이 있거든요."

"그래? 맛집 좋아하는구나?"

 

제가 맛집 내비게이션이거든요. 남은 젤리를 입에 털어 넣은 다니엘은 웅얼거렸다. 큰 손으로 자그마한 빈 봉지를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는 행동이 왠지 모르게 그 다웠다. 별것 아닌 행동도 다니엘이 하니 다 귀여워 보이는 것 같았다. 별 가루가 마법을 부린 게 틀림없지.

 

"다니엘, 나 추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니엘의 큰 손이 내밀어졌다. 그 온기에 감싸지는 자신의 손이 낯설고 부끄러웠다. 너 손 진짜 따뜻하다. 선배 손은 진짜 차가워요. 손끝 빨간 거 봐요. 너도 빨개. 그건 선배 손을 너무 세게 잡아서 그런 거예요. 거짓말. 거짓말인 걸 어떻게 알아요?

 

그거야,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성우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금세 닫혔다.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눌러 담았다. 아니면, 선배 손이 차가워서 옮은 게 아닐까요? 가벼운 목소리에 내 손이 차가워서가 아니라 네가 세게 잡아서, 다니엘 너 때문에 내가 빨개진 거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눈앞에 저 멍멍이가 물들인 것이 분명한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자신을 의심하는 귀여운 얼굴이 꽤 얄미웠다.

 

"선배."

"멍멍아, 형이라고 해 봐."

"그럴까요?"

"선배라고 부르는 거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

", ."

 

하긴, 친구끼리 선배, 후배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할 것 같네요. 얘는 잘 나가다 끝이 영 좋지 않다. 성우는 말없이 입꼬리만 억지로 올려보았다. 친구라는 말, 참 좋아하네.

 

"그런데 왜 불렀어?"

"... 별거 아니에요."

"뭐야, 궁금하게."

 

그렇게 멍석 깔아주시니까 부끄러워서 말 못 하겠어요. 그런 게 어디 있냐? 진짜예요, 부끄러워요. 별말 아닌데 그냥 넘어가면 안 돼요? 안 돼요. 너무해. 너무해도 어쩔 수 없어. 나 궁금한 거 못 참는단 말이야.

 

"선배, 아니, 형 손 작다고요."

"뭐야, 그게."

"별거 없다고 그랬잖아요."

"진짜 별거 없네. 나 손 안 작은데."

"작아요. 얼굴도 작고... 발도 작죠?"

 

. 신발끼리 부딪치는 소리였다. 곧이어 다니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진짜 발도 작네요. 성우의 손을 잠시 놓은 다니엘은 그의 팔목을 살짝 쥐었다. 다시 잡힌 손보다 팔목이 유난히도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저랑 맛집 많이 다녀요, ."

"그래. 케이크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 맛있는 거 많이 먹으러 다녀요."

 

형아, 너무 말랐다... 중얼중얼하는 다니엘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들은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소 지었다. 잘 먹고 다닌다고 설명해줘야 하나 고민했지만 핑계 삼아 다니엘과 이곳, 저곳 다니자는 생각에 입을 합 다물어버렸다.

 

"나야 좋지. 이제 너만 믿고 다녀야겠다."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의기양양한 강아지 같은 모습이 귀여워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차, 싶을 때는 이미 눈이 마주친 후였다.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이미 침묵이 내려 앉아버렸다. 아니, 스킨십 많은 것 같은 놈이 왜 갑자기 정색하는 거야. 성우는 아까 붙잡혔던 팔목이 다시 화끈거렸다.

 

"귀여워서..."

"..."

"친구끼리 뭐 어떠냐?"

 

최악이었다. 듣기 싫은 말을 제 입으로 내뱉다니. 치미는 짜증에 발끝으로 땅을 툭 차버렸다.

 

"그냥, 기분 좋아서요."

"?"

"친구끼리 왜 부끄러워해요."

"..."

"부끄러워하는 형이 더 귀엽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한쪽 손은 다니엘에게 붙잡힌 상태였지만. 성우의 손끝,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 입 베어 물면 빨간 과즙이 톡 터질 것 같을 정도였다. 다행스러운 건 어두운 밤이 잘 숨겨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갈까요?"

 

성우의 손을 놓고 짐을 챙기는 다니엘의 손은 얄미울 정도로 하얗고 단정했다. 손을 잡고 있는 동안 옮긴 게 확실해졌다. 손끝, 그리고 귀 끝까지도. 슬그머니 주먹을 쥐어 다니엘이 피운 빨간 꽃을 몰래 숨기는 성우였다.

 

 

 

 

03.

다니엘은 정말로 작정한 듯 성우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점심에는 학교 앞 샌드위치 가게, 저녁에는 번화가 뒷골목에 위치한 한식집. 살찌워서 잡아먹을 생각이야? 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때 다니엘이 뭐라고 그랬더라. '그러려면 너무 먼 것 같은데요. 보기보다 제가 성격이 급해요.'라며 변죽 좋게 웃었던 것 같다.

 

"다니엘, 나를 가지려면 그 정도는 기다려야 해."

"저는 좀 봐주시면 안 돼요?"

"안 돼, 안 돼."

"치사하다."

 

딱 실없는 농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워 보일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성우의 마음은 불편했다. 어젯밤 살짝 일어나 자신을 괴롭히던 손톱 옆에 살처럼 신경 쓰이게 하는 그 마음은 쉽게 떼어낼 수 없었다. 그 작은 티끌을 떼어내는 순간 피를 볼 자신을 알고 있었으니까.

 

", 친구한테 너무 야박한 거 아니에요?"

"다니엘 너라서 그러는 거야."

"형한테 이제 젤리 안 줄 거예요."

 

사랑이 식었다며 밥을 크게 뜨는 다니엘에 성우는 웃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표정의 성우를 본 다니엘의 눈썹이 살짝 내려갔다. 성우 형, 내가 젤리 안 준다 그래서 삐졌구나. 잘못했어요. 오늘도 준비되어있으니까 표정 풀어요. , 옹이 혀엉! 성우의 손 위로 다니엘이 손이 겹쳐졌다.

 

"속았지?"

"뭐예요, 놀랐잖아요."

"내가 누구냐, 옹 배우님 아니냐. 할 때마다 계속 속네."

 

타이밍. 타이밍이 중요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딱 적당한 선. 성우는 눈앞에서 툴툴거리는 다니엘 몰래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계속 심각했다면 순한 강아지는 분명 잘못했다며 꼬리를 내리고 달라붙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힘들어지는 건 성우 자신이었다. 은근슬쩍 손을 빼는 성우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해가 떨어지니 쌀쌀했다. 입고 있던 후드 집업 지퍼를 대충 올린 성우는 서둘러 다니엘의 뒤를 쫓았다.

 

"과제는 어때요? 팀원들 괜찮아요?"

"그냥,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저는 저번 학기에 혼자 고생해서 팀플은 생각만 해도 욕 나와요."

 

과장이 아닌 듯 다니엘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고생했겠네, 나지막한 목소리는 괜히 더 어리광 부리고 싶게 만들었다. 공기가 동글동글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다니엘은 멀쩡한 가방끈을 고쳐 맸다.

 

"형 여기서 버스 타죠?"

". 먼저 가, 피곤할 텐데. 버스 오려면 좀 남은 것 같아."

". 조심히 들어가요, ."

 

살짝 내려가 있는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워준 다니엘은 성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니엘의 손이 성우의 어깨에 닿기 전 작은 망설임은 다니엘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천성이 순하고 살가운 성격인 다니엘은 또래 친구들보다 유난히 스킨십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 그를 망설이게 만드는 성우는 조금 특별한 존재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급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갑자기 친해진 관계였지만 다니엘은 보통의 관계들보다 훨씬 허물없이 성우를 대했다. 그만큼 다니엘은 성우가 좋았다. 그는 자신과 다르게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의 손이 닿을 때마다 한 박자 느리게 흠칫 놀라곤 했는데, 그렇다고 자신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이 묘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하게 받아들였다. 그게 문제였을까? 그와 마주할 때 느껴지는 묘함을 인식한 뒤부터 이상하게도 예전만큼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기 힘들었다. 그러나 성우는 여전히 자신의 좋은 친구였고, 편안한 형이었다. 다니엘은 작게 벌어진 틈을 무시하고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니에요, 기다릴래요. 제 마음인데요.'라며 버텼을 놈이 미련 없이 뒤도는 모습에 괜히 서러워 코를 훌쩍이는 성우였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버스는 전 정류장에 도착했고, 다니엘이 기다려주길 바랐다. 성우는 가만히 다니엘의 등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절대 기댈 수 없는 그 넓은 등이 오늘따라 더 커 보였다.

 

"돌아보지 마, 제발"

 

하얀 얼굴에 성우가 제일 좋아하는 예쁜 입매가 돌아서서 성우에게 인사를 했다. 눈 밑에 점 또한 보이지 않지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것이다. 거짓말쟁이에게 벌을 주는 듯한 다니엘에 성우는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마음속에 살짝 일어난 조그만 부분을 누르는 일에 제법 능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 마음을 숨기며 좋은 친구로 다니엘의 옆에 서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성우를 덮쳐왔다.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발아래에 몸을, 자신의 심장을 얼어 붙일 차가운 물이 있음을 알고 있다. 빠지지 말아야 하는데, 금이 가고 있음을 성우는 알고 있었다.

 

 

 

 

04.

안녕, 다니엘. 너는 지금 자고 있겠지? 젤리 먹으면서 인터넷 하고 있으려나, 너 그러다 이 썩어서 치과 간다. 이거 되게 어색하구나. 손이 다 떨리네. , 어차피 전송도 못할 텐데 편하게 해도 되겠지.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계속 같이 다녀서인지 사진이 진짜 많더라. 갤러리에 온통 네 사진인 거 있지? 친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안 그랬으면 네 주위만 맴돌고 있었겠지.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바보 같았겠다. 그날 너와 같은 테이블이 아니었다면 너를 안 좋아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언제라도 너를 만나는 순간부터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이렇게 얘기하니까 진짜 멍청이네.

 

, 내가 버스 늦게 온다고 그랬으면 알아서 같이 기다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입에 달고 사는 '친구'라면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문자 한 통도 없고. 뒤돌아서 인사만 하면 다야? 그것도 내가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그리고 아침에 전화하지 마. 일어나자마자 네 목소리 듣는 거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헐레벌떡 헛기침도 해야 하고, 눈곱도 떼어야 한다고. 강의실 뒤에서 기다리지 마. 내 동기들이 '멍멍'이라고 부르며 너한테 친한 척하는 거 보기 싫어. 네가 그때마다 너무 예쁘게 웃어서 심술 나. 추워 보인다고 지퍼 올려주지 마. 나는 네 손이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사실 다 거짓말이야, 지금 괜히 투정 부리는 거야. 정말 괜히 그러는 거야.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핸드폰이 뜨겁다, 하하.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너 좋아한다고. 그것도 아주 많이, 못 참고 이런 바보 같은 짓 할 정도로 많이... 많이 좋아해. 1분 전에도, 지금도, 1분 후에도 네가 보고 싶어. 낮에도, 밤에도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우리 친구인 것도 알고, 나 혼자 정리해야 하는 것도 알아. 한심하고 답답해도 네가 좋은 걸 어떡해.

 

조용히 무너지는 성우의 등이 초라했다. 어두운 방에서 혼자 들썩이는 어깨가 작아 보였다. 홀로 빛나는 핸드폰에서 나오는 음성만 성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녹음되었습니다. 취소하시려면 0번을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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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소되었습니다. 음성녹음은 1, 호출번호를 남기시려면 2...'

 

핸드폰과 함께 침대에 엎어졌다. 음성녹음 화면이 사라지자마자 뜨는 갤러리 속 사진에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다니엘의 볼을 쓰다듬는 손가락이 애처로웠다.

 

[, 내일도 일교차 크대요. 잘 자고 내일 봐요.]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움직임이 바빴다. 이렇게 써도, 저렇게 써도 어색하고 이상한 것 같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 문장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도 휘두르는 건지.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에 성우는 베개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사라진 '1'표시와 움직이는 커서가 성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05.

고백을 받았다. 결과는 뻔했다. 다만,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던 거절의 말이 오늘은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상대가 부럽기도 했다. 그게 비록 술기운일지라도 떳떳하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차곡차곡 눌러 담아 더 이상 자리가 없어 터져 나온 애정들을 외쳐본 지난밤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어제 그 음성 메시지가 다니엘에게 갔더라면... 아마 자신도 거절당했겠지.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다정한 거절로. '만약'으로 시작한 생각을 이어가며 소주잔을 가득 채우는 성우의 앞에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 여기서 뭐 해요."

"늦게 왔네?"

". 프로젝트 팀원들이랑 회의가 있어서... 많이 마셨어요?"

"아니, 아직 괜찮아. 네 동기는?"

"인사하고 왔어요. 안주 더 시켜도 되나?"

 

사장님, 여기 라면이랑 치킨 한 마리 주세요.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는 내내 동그란 정수리만 보여주는 성우가 야속했다. 메시지에 답장도 없더니, 얼굴도 안 보여준다. 살짝 마주친 눈 밑이 발간 모양과 테이블 위에 비어있는 술병이 성우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 성우 형. 아무리 불러도 눈을 안 보여주는 성우에 다니엘은 눈두덩을 긁적였다. 우리 형, 무슨 일이라도 있나. 연락도 안 되고, 내 얼굴도 안 봐주네.

 

"무슨 일 있어요?"

"술 취한다..."

"그거 말고."

"뭐가?"

"고민이 많은데?"

"어떻게 알았어?"

"비밀."

 

벌떡 일어나 앉은 성우는 다니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볼캡에 그늘진 다니엘의 얼굴이 오늘따라 서늘해 보였다. 신기하네, 어떻게 알았지? 웅얼거릴 때마다 살짝 튀어나오는 성우의 얇은 입술이 귀여웠다.

 

"술 그만 마셔요."

"술 남으면 안 돼. 아까워."

"내가 다 마시면 되지."

 

내 핑계 대고 많이 마시려고 하는 거지? , 들켰네. 성우를 가리키는 기다란 손가락과 웃고 있는 표정이 장난스러웠다.

 

"오늘 바빴나 봐요. 연락도 없고."

"아니, 딱히... ? 무슨 일 있었어?"

"아니에요, 그냥. 연락이 없길래."

"..."

 

다니엘은 멍한 얼굴로 답하는 성우에게 차마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었다. '사람이 연락이 안 될 수도 있지.'라며 동기에게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무엇보다 성우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굉장히 서운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 솔직히 정말 서럽고 섭섭할 것 같았다. 밀려서 떠내려간 메시지들 가운데 언제나 제일 위에 위치했던 성우와의 메시지 창이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아랫입술을 툭 내민 다니엘은 숟가락으로 술잔 바닥을 가볍게 쳤다.

 

 

술이 깨는지 머리가 아팠다. 많이 마시지 않았지만,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던 게 문제였다. 술기운에 으슬으슬 떨려오는 몸과 찌릿찌릿한 머리가 힘들었다. 그리고 제일 힘든 건 다니엘과 계속 함께하는 것이었다.

 

"다니엘, 나 오늘 먼저 일어날게."

"어디 아파요? 얼굴 안 좋은데..."

"감기 기운인지, 술이 깨려는 건지. 조금 춥네."

"같이 가요. 데려다줄게요."

"뭘 데려다줘. 더 놀다 가지."

 

열은 없는 것 같고. 성우의 작은 얼굴을 덮는 다니엘의 손이 더 뜨거웠다. 그래서인지, 가게를 나와 걷는 내내 붙잡혀 있는 팔목이 뜨겁다 못해 불에 덴 것 같이 느껴졌다. 걸을 때마다 나풀거리는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다 풀려있는 신발 끈을 밟아버렸다. 중심을 잡지 못했다면 꼴사납게 넘어졌을 게 뻔했다. 괜찮아요? 낮은 목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 괜찮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급하게 걸었나 봐요."

"아니야, 내가 정신이 없어서."

"누가 형 보고 싶어 하나보다."

"?"

"그 얘기 몰라요? 신발 끈 풀리면 누군가 나를 그리워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러다 넘어져서 무릎 까지면 어떡해요. 그리운 사람 다치게 하는 거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기꺼이 무릎을 내주며 성우의 신발 끈을 묶는 다니엘의 손이 느리지만 야무졌다. 얼마나 정성 들여 묶는지 넓은 등이 한참을 꼼지락거렸다.

 

"다 묶었다. 리본 잘 묶었죠? 이렇게 하면 잘 안 풀려요."

"고마워. 내가 해도 되는데."

"뭐 어때요?"

"친구끼리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 , 그렇죠."

"아무튼, 고마워. 이제 안 풀리겠네."

"그래야죠. 누가 묶은 건데. 그러면 내가 이제 형 그만 보고 싶어 해야겠다. 그렇죠? 형 다치면 안 돼."

"뭐야, 그게."

 

다니엘, 나는 내가 넘어지고, 넘어져서 딱지 앉은 데에 또 상처가 나 엉망이 되더라도 네가 날 계속 보고 싶어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을 삼키며 웃어야 하는데 힘들었다. 굳어진 입꼬리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자신이 들어도 어색한 목소리가 다니엘에게 어떻게 전해졌을지 생각하니 아찔했다. 가벼운 장난도 받아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한심했다. 혼자 앞서갔던 감정을 '친구'라는 이름으로 돌아가는 11초가 아팠다.

 

어딘가 무거워진 분위기에 성우의 눈치를 보는 다니엘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잘생긴 얼굴이 투명해질 때면 다니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헤맸다. 사실 다니엘은 가게에 도착했을 때부터 벽을 쌓은 듯한 서늘한 얼굴에 허둥거렸다. 아까부터 얼굴도 제대로 안 보여주고, 몸 안 좋다고 사람 신경 쓰이게 해놓고는 더 놀다 가라며 차갑게 굴고, 정성 들여 신발 끈을 묶어줬더니 '친구끼리'라며 정 없는 목소리로 냉정하게 거리를 둔다. 다니엘은 언제부터인지 성우의 입에서 나오는 '친구'라는 소리가 불편해졌다. 여전히 좋고, 편안하고,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이였지만 어느 순간 툭 튀어나오는 그 단어가 묘하게 신경을 거슬렸다. 다니엘은 예감하고 있었다. 의심하는 순간부터 시작된 감정을 그는 알아차렸다. 그래서였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없이 자기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눈앞에 사람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은.

 

"다니엘, 나 오늘 고백 받았다."

"?"

"그래서 신발 끈이 풀렸나?"

 

어색한 웃음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멍멍아, 형이 고백을 받았다고.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신의 욕심으로 더는 다니엘과 자신의 관계를 해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누르다 보면 무뎌질 수 있지 않을까. 숨을 고른 성우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부럽지?"

"언제요? 아니, 그래서요?"

"아까, 너 오기 전에. 술기운에 용기가 난 건지 얘기해주더라고."

"별로다."

"뭐가?"

"술 취해서 그랬다면서요. 별로라고요."

"뭘 정색하고 그러냐?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네."

", 아니..."

"아무튼, 거절했어. 친구 연애상담 좀 친절하게 받아줘라."

 

자신이 보고 싶어 한다고 할 때는 정색하더니 고백 받았다고 얘기할 때는 예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얄미웠다. ‘친구되게 좋아하네. 눈앞에 작은 돌멩이가 있다면 발로 뻥 차버렸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 사람 말고 제가 범인이에요."

"?"

"아니, 그게, 아이씨..."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제가 형 보고 싶어 해서 형 신발 끈 풀린 거라고요."

 

눈두덩을 벅벅 긁는 손가락이 그의 민망함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급기야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성우의 손이 그를 막지 않았다면 손톱 옆에 엉망이 되었을 게 뻔했다.

 

"너랑 나는 계속 이렇게 보고 있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

"그리고 손톱 뜯지 마. 버릇 고치겠다며."

"맞다, 맞다. 그랬지... 아니, 그게 다예요?"

"얘가 자꾸 왜 이래. 친구끼리 낯간지럽게..."

"진짜예요. 범인 나 아니면 그거 다 미신이다!"

 

지금 최고 유치했지? 어이없다고 생각하겠지? 이상하게 보겠지?

다니엘의 귀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

 

"나 이제 형이랑 친구 안 할래요."

 

에라, 모르겠다. 붉은 꽃이 앉은 다니엘의 귀는 밤조차도 숨겨주지 못했다.

 

 

 

 

06.

다크서클이 짙었다. 쌓이고 쌓여 무거워진 생각들에 눌려 뒤척이느라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청천벽력 같은 다니엘의 선언에 성우는 바보같이 한마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애초에 성우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는지 다니엘은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실소를 자아내는 것은 그러는 와중에도 다니엘은 성우를 데려다주었다는 것이다. 아픈 사람을 두고 갈 수 없다는 핑계였다. 다니엘의 그런 다정함은 성우에게 독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성우를 낫게 할 약은 없었다. 심지어 더 이상 친구조차 하지 않겠다는 말은 불치병 판정과도 같았다.

 

오늘도 잠이 부족해 뻐근한 눈과 늘어지는 몸과 달리 정신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취소 버튼 누르지 말걸. 밀려오는 후회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용기가 없었던 지난날을 후회하다가, 다니엘을 미워하다가, 또다시 자신을 원망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니엘을 향한 마음은 제일 우위에 있었다. 친구도 못 되는 나는 무슨 자격으로 네 옆에 남아야 하는 걸까. 아니, 네 옆에 남을 수 있는 걸까. 습관과도 같은 미련이 여전히 함께했다.

 

 

다니엘이라고 상황이 다른 건 아니었다. 99%의 자책과 1%의 후회가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동안 쌓아놓았던 생각들과 며칠 동안 정리를 한 말들이 자신과의 메시지 함에 길게 쌓여있었다. 성우에게 닿지 못하는 마음들이었다.

 

'나 이제 형이랑 친구 안 할래요.'

 

이 말을 들은 성우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강의 칠판에도, 눈을 감아도 성우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얼마나 이상한 놈으로 보였을까.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고, 나쁜 놈인데 그 말을 들은 성우의 심정은 어땠을까. 다니엘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다니엘, 손톱 뜯지 마.' 환청까지 들려왔다.

 

"성우야, 학식 말고 다른 거 먹으러 나갈까?"

"상관없는데..."

"안 그래도 작은 얼굴 더 작아지겠다.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오자."

 

익숙한 이름과 귀에 쏙 들어오는 동그란 목소리. 다니엘은 본능과도 같이 반응했다. 동기와 나누는 그 다정한 어투에 마음이 꼬였다. 저 옆에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나와 같이 밥 먹어야 하는데 하는 질투였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다니엘은 세수라도 해야겠다며 화장실로 향했다. 얼빠진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자신이 봐도 미워죽겠는데 성우가 반겨줄 리가 없었다. 다니엘의 어깨가 축 처졌다.

 

몰래카메라였다고, 장난이었다고, 친구끼리 칠 수 있는 장난 아니냐고 연락해볼까?

 

"최악이다, 강다니엘."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렇게 싫어하는 '친구끼리'라는 말까지 생각하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고작 생각해낸다는 핑계가 그것밖에 안 되는 자신이 한심했다. 땅굴 1210m까지 파고들어 갈 기세였다.

 

성우와 함께 찍었던 사진, 자신이 찍어줬던 성우의 사진을 넘겨보는 일상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화면 속 얼굴보다 화면 너머가 훨씬 멋있는 성우가 너무 보고 싶었으나 자신은 자격이 없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할까? 형이 날 더 싫어하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마음과 다르게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클래식에 초조해지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성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차피 부재중 남았을 테니 끝까지 가보자. 한 번 물꼬를 트니 번지듯 커지는 용기였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성우의 컬러링은 금방 끊어졌다.

 

"여보세요? ? 끊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

"성우 형,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형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그런데 그게 실언이 아니라, 그렇다고 형이랑 아예 모르는 사이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아이씨, 친구 그만하고 다른 거 하자고, 그 얘기였는데 제가 멍청해서."

"..."

"그러니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니요, 좋아해요. 친구로서가 아니라 연인의 감정으로. 낮에도 보고, 밤에도 보고 계속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

"전화로 이러는 거 진짜 최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한 번만 봐주세요."

"..."

"성우 형?"

"다니엘. 우리 친구 아니었어?"

"이제 안 할래요, 그런 건. 죄송해요. 전 못하겠어요, 더 이상."

"우리 헤어지면 친구도 못할 텐데?"

"그런 걱정하지 마요. 헤어지지도 않을 거니까 더는 친구 할 일 없어요."

"..."

"물론! 형이 절 받아준다는 조건이 있지만..."

"다니엘, 니엘아."

"?"

"우리 지금 만날까?"

"..."

"보고 싶어."

 

 

집 앞이야. 방금 했던 말들, 다시 해줘. 또 듣고 싶다.

 

네 말대로 계속 만나자, 우리.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