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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녤옹

 

 

 

 

 

 

 

 

날이 좋았다. 지하철역에서 계단을 올라와 회사 건물 앞까지 걷는 짧은 걸음에 몇 번을 뛰고 싶었을 만큼. 공원이나 한강 둔치에서 맥주 한 캔 따고 싶은 날씨. 하지만 사수가 참석하는 길고 짧은 미팅이 벌써 네 건이었고, 그 중엔 직접 참여해야 하는 미팅도 있었다. 회의실 세팅부터컨퍼런스 콜 어레인지, 중간중간 치고 들어오는 짧은 번역 업무까지 하면 몸이 네 개라도 모자란 날이었다. 다행히도 성우는 그런 혼잡이 싫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과대표에 동아리 회장까지 도맡아 하고, 신입사원 연수에서도 에이스 소리를 듣곤 했던. 시간을 쪼개 살지 않으면 그 자리에 멈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성우는 한 번도 멈춰 본 적이 없었다.

 

 

 

 

 

"과장님, 컨퍼런스 콜 10시 그대로죠?"

 

". 세팅 좀 부탁해."

 

", 그럼 잠깐 4층 좀 갔다 올게요."

 

 

 

 

 

그렇게 쉼 없이 달려 온 성우의 삶에, 아주 느리게 지난 한 순간이 있었다. 깜박이는 엘리베이터 표시등 앞, 품에 안은 노트북과 마우스패드. 제법 묵직한 무게. 버튼을 누를 때 느껴지던 기묘한 차가움. 갖춰 입은 셔츠 소매에 마우스 전선이 걸려서, 잠시 멈칫 하고 손목을 털어 냈던 움직임. 머리에 빼곡한 오늘의 업무 일정과 그에 필요한 준비 사항들, 숫자를 미리 외워 두지 않으면 미팅에 들어가서 애 먹을 수도 있겠다, 따위의 조바심.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 올라탈 때의 작은 울렁임. 순간 주머니에서 울리던 진동. 메신저 창을 열자마자 흰 바탕에 검은 글자가 박힌 이미지가, 순간 좀 불길했던 예감 같은 것들.

 

 

 

 

 

"대박."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직전, 그 몇 초. 그게 성우가 알던 삶의 종말이어서 그랬다.

 

 

 

 

 

"이게 뭔데?"

 

"게시판에 올라온 거라는데."

 

"이응 시옷 이응이 누구야? 이씨인가?"

 

 

 

 

 

ㅁㅁ상사ㅇㅅㅇ씨, 제 남친이랑 붙어 먹으니 기분 좋던가요?

 

 

 

머리로 뭘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여 바로 아래층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층은 한 층 내려가는데 허리께부터 뒷목까지 찌릿한 느낌이 아주 천천히 통증 비슷하게 올라왔다. 순식간에 손바닥이 축축해져 노트북에 손자국이 남고, 땅을 디딘 발바닥이 간지러울 만큼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던 그 순간.

 

 

 

 

 

성우야, 형이 해결할게.

 

 

 

 

 

눈을 질끈 감으면 눈 앞은 온통 어둠. 떨어지지 않는 발을 엘리베이터 밖으로 디디면서도 한 번을 돌아보지 못했다. ? 노트북을 미끄러트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손으로 성우가 메신저에 답을 했다. ? 몸 전체에서 울리는 박동에 비해 흐트러진 손가락은 느릿했다.

 

 

 

도대체 뭘?

 

 

 

세상이 성우에게 친 호쾌한 뒷통수였다. 만만한 줄 알았지, 그렇게 비웃기라도 하듯.

 

 

 

 

 

 

 

 

 

 

 

 

 

 

 

 

 

일련의 사건들

처녑

 

 

 

 

 

 

 

 

 

 

 

 

 

 

 

 

 

사각의 공간, 언제 들어와도 숨이 막힐 듯 어지러웠지만 사무실이 건물 11층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버튼 판에 코를 박을 듯 서서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그게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반 이상 닫힌 문에 눈을 질끈 감고 벽에 기대 서는데 덜컹, 하며 다시 바깥으로 보이는 시야가 넓어졌다. 사이로 비집고 들어선 건 출근 직후부터 느슨하게 내려온 넥타이를 달랑이는, 저보다 키가 살짝 크고 몸은 훨씬 큰.

 

 

 

 

 

", 성우 씨. 안녕하세요."

 

 

 

 

 

강다니엘. 아침부터 얼굴을 가득 무너뜨리는 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일단 얼굴부터 굳혔다. 인사를 겸한 목례인지 아니면 단순히 여기 있다는 인지의 표현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을 뿐. 다니엘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제 반대편 벽에 붙어 섰다. 침묵을 잘 이기지 못하는 성향이, 짧은 순간 뒷목으로 향하는 손등에 빤히 보였다. 그리곤 어김 없이 의미 없는 추임새를 뱉는다. 어휴, 뛰어 왔더니, 제가 원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사무실에서도 대답하기 성가신 말들을 굳이 엘리베이터에서. 성우의 미간이 기어코 구겨졌다.

 

 

 

 

 

"금요일이네요."

 

"."

 

"......."

 

"......."

 

".......금요일 좋아하세요?"

 

 

 

 

 

평소엔 말 전체에 웃음을 범벅시키는 스타일이면서, 웬일인지 웃음기 없이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기어이 성우의 시선을 얻어 낸 다니엘은 허허, 하고 말 끝에 못 붙인 웃음을 마저 웃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우는 따라 웃지 않았다. 선하게 빙글빙글 웃던 웃음이 금방 허공에 흩어졌다. 비뚤한 시선을 마주하자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려 입술을 혀로 한번 훑는다. 그 모습에 약간의 쾌감마저 올랐다.

 

 

 

 

 

"다니엘 씨는 웃음이 진짜 많네요."

 

". 좀 별 거 아닌 거에도 많이 웃고 그래요 제가. 허허."

 

"세상 모든 게 다 재밌나 보다."

 

 

 

 

 

, 11. 문이 열리자마자 발을 내딛은 성우가 그 목소리를 또랑하게 뒤에 두고 빠져 나왔다.

 

 

 

아무리 타고난 원단이 느긋하고 듬성한다니엘이라도 방금 그 말에 담긴 이죽거림 정도는 단단히 느꼈을 법했다. 신입사원 4개월 차, 면접자 열 둘 중 제 옆에서 함께 면접을 봤던 두 명 중 한 명. 둘도 없는 동기니까 친하게 지내, 어깨를 툭툭 치는 부장 너머로 눈꼬리며 입꼬리를 한껏 접어내던 말간 얼굴. 건물의 반 층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이 호청년에게 얼굴을 굳히는 유일한 사람, 아마도 현재 강다니엘의 세계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을 인물, 그게 바로 저 옹성우였다.

 

 

 

 

 

"저기, 성우 씨."

 

"?"

 

 

 

 

 

작은 회사에서 어렵게 뽑은 두 막내인지라, 둘은 불 꺼진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먼저 전등 스위치를 누르고 책상에 자리를 잡는 성우의 뒤를 다니엘이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아직 채 켜지지 못한 맨 안쪽 형광등이 철사 튕기는 소리를 내며 몇 번 깜박였다. 성우의 자리 옆 프린터에 팔꿈치를 대고 선 다니엘은 이름을 불러 놓고 잠깐 말을 골랐다. 성우는 손가락으로 책상에 톡톡 박자를 맞추며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만 봤다. 유리에 손톱이 닿는 감촉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솔직히 말하면 아침이라 좀 피곤했다. 그래도 다니엘이 입술을 물며 어물거리는 양을 제법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 점심 약속 있으세요?"

 

"아뇨."

 

"저랑 같이 드실래요?"

 

"아뇨."

 

 

 

 

 

다니엘에게 강아지 귀 비슷한 게 달려 있다면 분명 이 시점에서 축 늘어졌을 거였다. 싱거울 정도로 간단히 대화에 종지부를 찍은 성우가 데스크탑 전원을 눌렀다. 위잉, 기계음이 텅 빈 사무실을 채웠다. 전임자에게서 받은 좀 낡고 먼지가 든 컴퓨터. 다니엘의 컴퓨터가 새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 성우는 왜인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다니엘이 바꿔 드릴까요, 하고 먼저 쭈뼛거렸다. 같은 날 같은 직급으로 입사해 놓고도 주어진 하드웨어가 다르다는 것, 그게 뭘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다니엘은 그런 악의 없이 무심한 친절이 당연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성우가 그걸 마음에 들어하는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제 앞에서 큰 어깨를 축 무너트리고 뒷머리를 긁작이는 양을 보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어서.

 

 

 

 

 

".....다니엘 씨라서가 아니라."

 

"......."

 

"전 누구랑 밥 같이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입술을 안으로 물고 한껏 굳어 있던 다니엘의 표정이 잠깐 풀렸다. 정말이지 알기 쉬운 사람이다. 이제 됐죠, 성우는 더 이상 옆에 선 커다란 덩치를 보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컴퓨터 비밀번호를 쳐 내는 손가락이 재빨랐다. 다니엘은 잠시 그 옆모습을 보고 멍하니 섰다가, 열 발자국쯤 굼뜬 발을 옮겨 제 자리에 가방을 올린다. 성우는 가방에 넣어 뒀던 이어폰을 꺼냈다. 엉망으로 구겨져 여기저기 매듭이 생겨 있었다. 저만치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모양새가, 꼬인 이어폰 줄만큼 성가셨다.

 

 

 

부산 사투리에 몸만 커다랬지 뭐 마려운 똥강아지처럼 옆에서 종종거리는, 한 살 어린 입사 동기.

 

 

 

 

 

"저기, 빠나나 하나 드실래요."

 

 

 

 

 

하나도 꾸미지 않은 날 것 그 자체. 꼬리 흔들고 다니는 건 자유지만, 엮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직 음악도 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꽂자마자 등 뒤에서 넘어 온 목소리가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무역업이 제 천직이라고 여기던 시절도 있었다. 세계를 누비며 비즈니스를 하는 것, 경영학도인 제게 그 이상의 낭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성우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영어는 물론 중국어, 스페인어까지 틈틈이 공부해 더 높이, 더 멀리. 위만 보고 달리다 콘크리트 천정에 머리를 찧어 피를 보고도 이 바닥에 남은 건 그 노력 때문이었다. 쌓아 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엔 성우는 너무 지쳐 있었다. 할 수 있는 일, 해 왔던 일이 아니면 무엇도 시작할 수 없는 연료 소진의 상태. 당시의 성우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소진".

 

 

 

 

 

"사장님 안녕하세요, 옹성우입니다. 옹성우요. , WN산업입니다."

 

 

 

 

 

직원수 삼십 명 남짓의 작은 제조기업으로 재입사하면서, 목표는 사라졌지만 경험은 남았다. 성우는 어디서든 보통 이상을 해 내 왔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형이었기에 이 곳에서도 짐이 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환경의 차이는 컸다.

 

 

 

 

 

"여기서 단가 더 낮추면 퀄리티 이슈 생깁니다. 그래도 상관 없으세요?"

 

 

 

 

 

부장이 낮은 파티션 너머로 성우를 마뜩찮게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서면으로 일하지 않고 구두로 일하는 방식이 익숙한 회사에서 성우와 같은 원칙주의자들은 손해 보기 십상이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있지 않으면 금방 꼬리를 자르는 거래처 사람들 때문에 덤탱이 쓰는 일도 잦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방식은 성우와 맞지 않았고, 철저함 등의 어휘로 표현되던 저의 강점이 융통성 없음 이라는 새로운 꺼풀을 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별 소득 없이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성우가 목을 좌우로 두 번쯤 꺾었다. 이런 통화를 하고 나면 목에 담이 오는 것처럼 뻣뻣해지곤 했다. 타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커피가 통화 한 번에 싸늘히 식어 있었다. 머그잔을 잠깐 잡아 쥔 성우의 귀에, 다니엘의 이름이 들린 건 그 때였다.

 

 

 

 

 

"니엘 씨 진짜 어쩌려구 그래. 무턱대고 잡아 오면 우리는 그냥 하라는 거야?"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커다란 놈이 그 앞에 기둥처럼 떡 버티고 서 있었던 탓이다. 또 뭘 저질렀겠거니, 크게 관심은 없었으나 커피를 두 모금쯤 홀짝이며 흘긋 시선을 뒀다. 난처한 듯 손바닥을 감싸쥔 뒷머리가 댕강하니 흰 목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흰색 셔츠는 뒤가 벌써 구겨져 뭉툭한 모양새였다. 

 

 

 

 

 

"진짜 할 수 있습니다. 이거 뚫어야 돼요. 한 번만 도와 주십쇼 과장님."

 

"아니 봐봐 강다니엘 씨. 내가 못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단가랑 납기를 어느 정도 맞춰서 발주를 갖고 와야지."

 

"일정 조율하면 불가한 거 아니라고 남양주 쪽에 연락 받았습니다. 과장님, ? 한 번만요..."

 

 

 

 

 

끝이 살짝 늘어지는 애원에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던 생산 파트 과장이 한숨을 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가 봐. 영업사원이 공장에까지 미리 손을 써 두고 본사 생산 파트에 발주를 한다는 건 절차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다니엘은 가끔 이런 기상천외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곤 했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제 자리 쪽으로 의자를 돌리려는데, 돌아선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다.

 

 

 

어이가 없어 잠시 머그잔을 입에 대고 몇 초를 보냈다. 분명 시무룩하게 풀이 죽었거나 화가 나서 부르르 떨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다니엘은 웃고 있었다. 저와 눈을 맞춰 주지도 않는 생산 파트 사람들에게 골고루 눈을 찡긋하며 돌아서는 꼴에 좌절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감사합니다! 잘 해 보겠습니다!"

 

 

 

 

 

그러더니 이 작은 사무실이 다 울리도록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안 맞아. 성우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벌써 몇 번째 했는지 모를 생각. 절차와 원칙보다 직감과 관계로 승부하는 부류. 그런 데다 제법 순진한 얼굴을 하는 게 도무지 밉지가 않아서. 씩씩하게 제 자리로 돌아간 다니엘은 의자를 빼며 읏챠, 등의 추임새를 넣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그 때 핸드폰 진동이 울리지 않았다면, 강다니엘이란 인간의 본질을 추구할 만큼 생각이 굽이쳤을 거였다.

 

 

 

 

 

성우야.

 

 

 

 

 

순간 몸이 크게 움찔했다. 차분히 머그컵을 책상에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어 메세지를 확인했다. J. 어린 성우의 입술을 벌려 황홀한 사랑을 밀어넣었다 지독한 어둠을 토해내게 했던 이의 이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차분히 눈가를 꾹꾹 눌렀다. 침착한 손가락은 그 날보다 빨랐고 덤덤했다. 사용자에게서 메세지를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차단하시겠습니까?

 

 

 

 

 

"막내 둘. 분기회식 준비 잘 되고 있어?"

 

". 식당 오늘 예약하겠습니다."

 

"고생하는데 오늘 점심 산다. 따라들 나와."

 

 

 

 

 

부장이 핸드폰을 쥔 성우의 뒤를 지나치며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성우, 안 가? 성우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엉거주춤 자켓을 쥐고 일어섰다. 핸드폰을 억지로 주머니에 밀어 넣는데 저만치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던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뭐 먹죠, 또 다시 웃음기가 가득 묻은 질문에 성우는 어깨만 으쓱하고 지갑을 챙겼다.

 

 

 

편한 자리가 될 것 같진 않았다. 하긴, 성우에겐 이제 편한 자리란 게 없었다.

 

 

 

 

 

 

 

 

 

 

 

 

 

 

 

 

 

 

 

 

 

 

 

 

 

 

 

 

 

 

 

 

 

 

 

 

 

김치찌개를 푹 퍼 내는 다니엘의 손이 야무졌다. 고기 좀 더 드릴까요, 묻는 다니엘은 입사 동기인 저에게 깍듯하게 형 대접을 했다. 고개를 저으며 그릇을 받아 든 성우가 끓어 오르는 찌개를 멍하니 보다 버너의 불을 줄였다. 부장은 아까부터 티비 속 뉴스에 시선을 빼앗긴 채였다. 아이고 저거 또 헛소리 하네. 안 그래? 다니엘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드물게도 성우의 입꼬리가 올랐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보지는 못한 듯 했지만.

 

 

 

 

 

"밥 더 먹을래요?"

 

 

 

 

 

테이블에 뒤집어 둔 핸드폰이 간헐적으로 몇 번 울렸다. 그 탓에 밥알이 입 안에서 잘 씹히지 않고 굴러 다녔다. 은색 밥공기를 왼손에 쥐고 밥을 한 숟가락 크게 퍼낸 다니엘이 귀신이 말하는 것을 보기라도 한 듯 눈을 꿈벅였다. 그러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밥공기를 그대로 내민다. 성우가 수저통에서 새 숟가락을 꺼내 아직 손 대지 않은 쪽을 크게 덜었다. , 그냥 주셔도, , 감사합니다, 근데 왜, 우물거리는 입에서 문장이 되지 않은 말들이 쉴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입맛이 없어서."

 

 

 

 

 

선택적 답변에 다니엘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러더니 말 없이 국자를 들어 고기 몇 점을 성우의 그릇에 더 옮겼다. 아무래도 본인은 입맛이 없으면 고기를 더 먹는 모양이지....

 

 

 

 

 

[ 성우야, 고기 좀 더 먹어. 입맛 없다더니 살 더 빠지는 것 같다. ]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재생이라도 된 듯 울렸다. 손이 파드득 떨려 국물을 떴던 숟가락을 놓쳤다. 빠른 손이 휴지를 뽑아 성우의 손을 덮는다. 숨을 고르게 쉬는 데도 몇 초가 더 걸렸다.

 

 

 

 

 

"회사 생활 어때? 할 만 하냐? 다니엘은 사고 좀 그만 치자, ?"

 

". 배우고 있습니다."

 

". 어때?"

 

"저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전 회사에서 에이스였다며. 얼마 전에 거기 품질 쪽이랑 식사 했는데. 옹 씨 아주 유명인사더만."

 

 

 

 

 

면접 때부터 들었던 얘기였다. 업계가 거기서 거기인 데다 워낙 특이한 성이라 도저히 이야깃거리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정면돌파하자고 이를 아득 물었던 건 성우 본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성우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억지인 게 노골적으로 티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다행히도 부장은 성우의 등을 세게 두어 번 두드린 것으로 과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 정도면 고마운 일이지. 얇은 몸이 잠깐의 충격으로도 흔들려 테이블에도 미세한 진동이 왔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다니엘의 시선이 얼굴에 올곧이 꽂혔다. 이 업계 사회 초년생들의 단체 카톡방엔 다 돌았다고 봐도 좋을 만큼 핫이슈였으니, 못 들어 본 얘기일 리는 없었다.

 

 

 

 

 

"니가 다니엘 좀 가르쳐 줘라, ? 이것저것. 아는 거 많을 거 아냐."

 

"."

 

 

 

 

 

그 말 속에 조롱이나 경멸이 담겨 있는지 아닌지, 재고 따질 생각은 없었다. 다만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을 뿐. 언제쯤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루한 불안은 이제 만성이었다. 억지로 음식을 삼키려 빈 물잔에 잠깐 손이 스쳤을 때 물이 금방 채워졌다. 철로 만들어진 물잔에 댄 손가락이 금방 차가워졌다. 물병을 기울인 다니엘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이후에 밥을 영 뜨지 못했다. 성우는 이를 닦으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형편없이 말랐다고 생각했다. 턱이 도드라진 얼굴에 굴곡이 선연했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그제야 꺼낼 정신이 들었다. 간단한 동작으로 차단으로 향하는 손가락에 망설임은 없었다. 성우야. 잘 지내지. 한번 볼 수 있을까. 벌써 이 년 전이었다. 입을 헹구며 셔츠 소매가 젖어 들어가는 것도 모른 걸 보면 아직도 완전히 초연하지는 못했다. 핸드타올로 손을 닦아내고 나서야 메신저 어플의 차단 버튼을 꾹 누를 수 있었다.

 

 

 

 

 

"됐다."

 

 

 

 

 

정말 몰랐잖아요. , 나 진짜 몰랐잖아. 그날 밤, 무릎을 꿇은 남자 앞에서 성우는 손을 발발 떨며 동이 틀 때까지 울었다. 사랑에게 속은 억울함과 세상이 저를 뒤틀어 보게 됐다는 두려움이 눈물로만 흘러 나왔다. 말해 주지 않았으니 알 방법이 없었다. 주말마다 본가에 내려간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었고 돌아온 그의 품이 너무나 따뜻해서 그 안전을 의심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남들과 같지 않아 내내 당당하진 못했어도, 제 사랑이 땅에 떨어져 경멸의 모습으로 구르게 될 거라고는. 남친도 쓰레기지만 당신도 공범이에요. 사내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 게시물에서 그 문장만큼은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공범. 미필적 고의.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라 그랬다.

 

 

 

공범이 아프다고 우는 건 반칙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밀어붙이고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거울에 얼굴을 잠깐 비춰 보고 화장실을 나서려는데 안쪽 칸에서 누군가 툭 튀어나왔다. 반 발짝 뒷걸음질을 친 성우가 빙글 웃는 얼굴에 반 발짝을 마저 물러섰다. 뽀득뽀득 비누를 문질러 손을 씻은 다니엘이핸드타올을 뽑아 손을 슥슥 닦았다. 혼잣말을 들킨 게 당황스러워서인지 발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꼬리를 물었던 생각들 중 밖으로 뱉은 말이 뭐였는지 빠르게 반추했다. 눈을 맞추는 다니엘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소화제 있는데."

 

"......."

 

"밥 같이 먹는 거 싫다 했잖아요. 그래서 오는 길에 사 갖고 왔어요."

 

"......."

 

"그리고 저는, 진짜 신경 안 씁니다. 모른다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다 아는 것도 아닌데."

 

"됐어요."

 

 

 

 

 

잠시 말을 잃었던 성우가 손에 쥐었던 칫솔 케이스를 딱 소리가 나게 닫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화장실 문을 밀어 젖히는 성우의 뒤로, 무슨 말인지 아시죠, 또 쓸데 없는 몇 마디가 뒤이어 붙었다.

 

 

 

 

 

"전 성우 씨 좋아하거든요."

 

 

 

 

 

저렇게 한 마디도 아니고 네다섯 마디씩 많다. 그 생각을 하면서도, 화장실 문이 닫히는 동안 한 발짝도 떼지를 못했다. 대책 없이 솔직하고 꼬임 없이 담백한 인간. 성우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조차 없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성우의 결이 강다니엘의 그것보다 훨씬 섬세하다는 데 있었다. 바싹 마른 마음결에 봄비 한 방울 내리면, 그걸로도 충분히 꽃을 피울 만큼.

 

 

 

속이 꾸물거리는 게 아무래도 소화제를 먹어 둬야 할 것 같았다.

 

 

 

 

 

 

 

 

 

 

 

 

 

 

 

 

 

 

 

 

 

 

 

 

 

 

 

 

 

 

 

 

 

 

 

분기회식은 매 분기 꽤 성대하게 치러지는 모양이었다. 다니엘에게 떠맡기고 모른 체 하면 그만이었지만 그럴 수 있는 위인은 또 못 되는 탓에, 식당 예약부터 자리 배치까지 세심하게 손을 댄 성우였다. 정작 당일이 되자 건배사 몇 번을 시작으로 별 프로그램도 없이 술병만 쌓여 갔다. 주문과 중간 계산을 다 챙겨야 하는 성우와 다니엘은 쏟아 붓는 알콜을 이기느라 물을 두 병은 비운 상태였다. 특히 다니엘은 주당 테이블에 끌려가 앉아 있었는데, 얼굴 전체가 벌건 아저씨들 사이에서 희고 말간 얼굴이 혼자 톡 튀었다.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눈을 가늘게 뜨며 히 웃는 게 영 맨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성우 씨 여기 고기 더 시켜두 돼?"

 

". 테이블 전체 3인분씩 추가해 놨어요."

 

 

 

 

 

센스 있어, 옹이 씨,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타 부서 사람들이 성우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잔을 들었다. 다들 술이 된 탓인지 건배를 할 때마다 술잔이 넘쳐 자꾸 손에 액체가 흘렀다. 벌써 겉면이 축축한 술잔을 마주 친 성우가 반쯤을 꼴딱 비웠다. 혼자 마셨다고 치면 한 병 반쯤 마신 것 같은데.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회사생활이라고, 이전 회사에선 숙취해소음료까지 꼭꼭 챙겨 마시고 전투처럼 술자리에 임하곤 했었다. 업의 특성상 술에 약해서는 살아남기 힘들기도 했고. 하지만 이 회사로 옮기고부터는 일부러 술을 줄였다. 환영회식마저 1차에서 마무리하고 돌아섰을 정도니까. 술이 오른 사람들 사이에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두려웠고, 그에 정확히 대처하지 못하는 건 더 큰일이었다.

 

 

 

 

 

"성우 씨 부사장님이 찾으시네~."

 

 

 

 

 

등 떠밀려 다니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다니엘의 흰 얼굴이 눈 근처부터 제법 붉어져 있었다. 얄쌍한 턱 탓에 마냥 둔탁해 보이진 않는 인상인데, 눈 밑이 발개지니 꽤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학습능력이 전혀 없는 걸까, 스스로에 대한 조소와 함께 홧홧한 볼을 손등으로 식히며 성우가 잔을 받아 들었다. 다니엘의 시선이 성우의 손 마디부터 얼굴까지 느리게 훑어 올랐다.

 

 

 

 

 

"성우 씨 진짜 잘 생기지 않았어요?"

 

"K대 나왔다며. 인기 진짜 많았겠는데."

 

 

 

 

 

소주가 목을 타고 쭉 넘어갔다. 술잔을 채 내려놓기도 전에 물컵이 앞에 슥 밀려 왔다. 다니엘이었다. 이런 친절은 이제 익숙하면서도 가끔 놀라웠다. 저의 외모와 학벌에 대한 화제가 몇 분쯤 계속될수록 내심 불안이 솟았다. 어디서 어떻게 어긋날지 모르는 게 회식 자리의 대화였다. 성우는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화제를 돌릴지 머리를 굴렸다.

 

 

 

 

 

"아 저는요 차장님? 저도 장난 아인데. 와 진짜 서운하네."

 

"아이 너는 성우 씨에 비하면 잘 생긴 건 아니지."

 

"요즘은 부산 아들이 대세다 아닙니까. 요새 저 테레비 나오는 아들 보면 다 부산 출신이든데."

 

 

 

 

 

눈썹을 아래로 한껏 끌어내리며 아하하, 웃어 낸 다니엘의 시선이 잠깐 성우 쪽으로 머물렀다 옮겨 갔다. 성우는 대각선에 앉은 부사장의 연이은 건배 제의에 휘말려 순식간에 세 잔을 연거푸 비운 참이었다. 어디서 술이 약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는 성우였지만 역시 공백기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다니엘이 불판에 있던 고기 몇 점을 성우의 접시에 올리는데도, 그걸 집어 먹을 정신도 없을 만큼 술잔 턴이 빠르게 돌았다.

 

 

 

 

 

"성우 씨! 전화 계속 오는데?"

 

 

 

 

 

두 잔쯤 더 마셨을까, 방금까지 있었던 테이블에서 핸드폰이 건네져 왔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 알 수 없는 숫자였다. 귀 쪽에서 박동이 둥둥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른 건 순전히 취기 탓이었다. 술을 마시면 조심성이 없어지니까, 취해서는 안 된다고.....

 

 

 

 

 

- 여보세요, 성우니?

 

 

 

 

 

술자리의 한가운데, 불에라도 덴 듯 파드득 놀라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성우에게 시선을 둔 사람은 딱 한 명.

 

 

 

 

 

"성우 씨 여기서 통화하지 말죠."

 

 

 

 

 

그리고 귀에 댄 핸드폰을 간단히 빼앗아 전원을 꺼 버린 사람도 한 명.

 

 

 

 

 

"괜찮아요?"

 

 

 

 

 

이 년 동안, 그렇게 물어 준 사람도 딱 한 명이었다.

 

 

 

 

 

 

 

 

 

 

 

 

 

 

 

 

 

 

 

 

 

 

 

 

 

 

 

 

 

 

 

 

 

 

 

 

 

언젠가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잠이 들 때까지 그의 목소리와 함께하던 때도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흘러 나오는 핸드폰을 베개 옆에 두고 누워 이불을 바스락거리던 날들. 다정한 성격 덕에 하루 걸러 하루는 잠들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 폭신한 감촉과 노곤한 느낌이 때로 그리웠는데. 성우는 제 핸드폰을 빼앗아 수신 차단 설정을 하고 있는 다니엘을 흐린 눈으로 응시하고만 있었다.

 

 

 

 

 

"진짜 합니다."

 

 

 

 

 

마지막 운행 시간, 성우와 다니엘이 앉은 칸에는 둘을 포함해 넷 남짓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옆을 흘기는 시선에 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니엘의 발음에도 평소보다 조금 더 바람 소리가 섞였다. 엉망으로 취한 사람들을 차례로 택시에 태워 보내고 정작 둘은 바나나우유 하나씩을 들고 지하철에 오른 참이었다. 다니엘은 성우의 핸드폰을 쥐고 놔 주지 않을 것처럼 흔들흔들, 평소라면 꿈도 못 꿀 짓을 하고 있었다.

 

 

 

 

 

"해요."

 

"번호 외운 거 아니죠, 그 새."

 

"안 외웠어요. 저 그렇게 머리 좋지도 않고. 저번에 카톡은 했는데 전화까지 올 줄은."

 

"머리는 좋은 거 같든데. 말을 못 믿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꾹꾹 메뉴를 찾아 들어가는 손엔 거침이 없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 성우가 문득 그 전화 너머로 들리던 목소리를 곱씹었다. 이제는 원망과 스스로에 대한 후회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담백한 목소리를 들으니 기억이 되살아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좋아한 마음도 한순간에 경멸이란 이름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까. 그 때의 반짝이던 자신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지하철의 소음이 귀에 왱왱 울렸다.

 

 

 

 

 

"했다."

 

"했어요?"

 

"이젠 전화 못 하겠네요."

 

"다행이네."

 

"나도 다행이네."

 

 

 

 

 

높낮이가 없이 둥글한 제 말에 변주하듯 음정을 붙인다. 고개를 살짝 숙여 맞춰 오는 눈동자에는 거짓이라곤 없어서. 호의를 가득 담은 눈을 마주하자 볼에 절로 열이 올랐다. 이렇게 꾸밈 없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에겐 거짓이고 위선이며 어둠이었을까. 취기 탓에 마음이 자꾸 약해졌다. 어쩌면 요즘 들어 부쩍 경계가 약해진 걸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정말 큰일인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또 그 회오리바람에 휩쓸리고 말 거였다. 성우는 스스로를 잘 알았고, 그래서 더 불안했다.

 

 

 

 

 

"난 성우 씨가.."

 

 

 

 

 

사투리가 섞여 제 이름 앞에 강세가 붙었다.

 

 

 

 

 

"그만 힘들었으면 좋겠어서."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지. 성우는 피시시 새 나오는 웃음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 금방 잠잠해질 테니 회사는 계속 다니라고, 어떻게 들어간 회사인데 이런 일로 나오기엔 들인 노력이 아깝지도 않냐고. 그런 이들에게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아 어쩌면 사랑이 그랬듯이, 이 절망도 온전히 둘의 것이구나,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세상에 맞서는 게 온전히 저 혼자임을 그 순간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렇게 어렸다. 제 등에 칼을 꽂은 게 세상인지 사랑인지 그것조차 모른 체 할 만큼.

 

 

 

 

 

"다니엘 씨는 잘 모르겠지만."

 

"......."

 

"저는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 힘들어하는 거."

 

 

 

 

 

때마침 지하철이 성우의 집 근처 역 승강장에 들어섰다. 성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손목이 뜨거운 온기로 감싸진 순간과 거의 동시였다. 출입문이 열리고 먼저 발을 내딛자마자 손이 확 이끌렸다.

 

 

 

 

 

"난 다른 방법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플랫폼, 한 쪽 손으론 여전히 성우의 손목을 쥔 채, 다니엘이 성우의 얇은 턱을 틀어쥐었다. 주름 없이 통통한 입술이 다가서는 데에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아까까지 먹었던 고기 냄새, 술 냄새, 달큰한 바나나우유 맛,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다니엘의 향. 제법 묵직한 향수와 살 냄새가 섞여 아득히 깊었다. 뒤로 내내 밀리다 결국 등에 찬 벽이 닿았다. 보는 사람이, 잠깐만, 키스 자체에 대한 거부감보다 그런 생각을 먼저 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성우는 더 이상 떨어질 데가 없었다. 무모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니엘의 손을 잡고 기꺼이 모르는 절벽으로 뛰어들기엔,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았다.

 

 

 

 

 

"......나한테 안 올래요?"

 

 

 

 

 

그럼에도 뜨거웠다. 다리가 풀려 앞으로 쏟아지는 팔을 제 어깨에 올린 다니엘이 성우의 허벅지 사이로 제 무릎을 끼워 넣었다. 입맞춤은 강렬하고 짧았으나 허리를 감는 팔은 느릿하고 깊었다. 어떤 물음에도 대답하지 못한 채 성우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어둠, 그 절망과 도무지 다를 바가 없는데.

 

 

 

 

 

"싫어요?"

 

 

 

 

 

눈을 뜨면, 그 자리에는 선하다 못해 투명한 갈색 눈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이란 이름으로 굳어진 돌덩이가 가슴에, 기꺼이 그 눈동자에 부서지고 싶어도......

 

 

 

 

 

"......싫어."

 

"......."

 

"싫어요."

 

 

 

 

 

기어이 팔을 풀어 내고 성우가 남은 숨을 몰아 쉬었다. 돌아서 걷는 성우의 손목엔 이제 어떤 감촉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옷깃에 그 깊은 향이 배어, 바람에 흘긋 향이 스쳤다. 도대체 뭘 어쩌자고. 계단을 오르며 성우가 눈가를 훔쳤다. 도대체 뭘. 언젠가의 그 물음처럼. 다니엘은 따라 오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승강장 계단을 다 올라 결국 주저앉았을 때에야, 마주 안고 싶어 서러웠다는 걸 알았다.

 

 

 

 

 

 

 

 

 

 

 

 

 

 

 

 

 

 

 

 

 

 

 

 

 

 

 

 

 

 

 

 

 

 

 

 

 

 

 

설상가상이었다. 빨간 신호. 운전대에 얼굴을 박은 성우가 현기증에 잠시 숨을 골랐다. 술기운이 아직도 목에 남았고, 출장지로 들어가는 길은 꽉 막혔고, 심지어 조수석에 강다니엘이 있었다. 엔진음이 오늘따라 귀에 크게 웅웅거렸다.

 

 

 

 

 

"괜찮은 거 맞아요?"

 

 

 

 

 

다니엘의 손이 어깨에 올라오려다 흠칫 멀어졌다. 눈 앞까지 다가온 앞차와의 거리를 애써 유지하며 성우가 눈을 힘겹게 꿈벅 감았다 떴다. 상황이 어떻게 이렇게 꼬일 수 있을까. 갑작스런 당일 출장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숙취, 그리고 전날 입을 맞춘 남자와의 동석.

 

 

 

출근한 지 삼십분도 되지 않은 아침, 제 책상에 부장이 서류 하나를 내던졌다. 너 이거 어쩔 거야. 성우에게 향하는 적개심이 부장의 눈에 형형했다. 계약해지. 내용증명. 놀란 눈으로도 그 정도 글자는 읽어낼 수 있었다. 내용증명을 보내 온 회사는 지방에 위치한 소기업으로, 농기구 부품 등을 만드는 가족기업이었다. 단가 후려치기는 물론이고 대금 지급 없이 납품만 요구하던 게 벌써 석 달 째라, 얼마 전 통화할 때 대금지급 없이는 물건 배송 드릴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한 적이 있기는 했다. 짚이는 건 그거 하나였고, 석 달간 대금이 입금되지 않으면 납품 중지하는 게 회사 매뉴얼이라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고 나자 쿵쾅거리던 심장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성우에게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물 쫌 드실래요?"

 

 

 

 

 

이 변수가 옆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너 혼자 가면 또 융통성 없는 소리만 하다 올 테니, 다니엘이랑 같이 가. 입만 벙긋하고 소리를 내지도 못하는 성우의 뒤로 다니엘이 언제 붙었는지 꾸벅 인사를 했다. 저 근데 면허가 없어서. 어제 입을 맞춘 후 처음으로 나눈 대화가 그거였다. 숙취 때문에 띵하던 머리가 한번 크게 돌았다.

 

 

 

 

 

 

 

 

 

차를 댄 곳은 지방 소도시의 두 번째쯤 되는 번화가였다. , 차 잘 대네요. 다니엘은 속도 없는지 차 문을 닫으며 그런 말을 했다. 3층까지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성우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할 말도 없었고, 무슨 말을 한들 제 의사와 다르게 전해질 게 분명했다. 사실 스스로의 의사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WN산업 옹성우라고 합니다. 대표님 뵈러 왔는데요."

 

"강 다니엘입니다."

 

"대표님 지금 잠깐 외근 가셔서.... 들어가서 기다리시겠어요?"

 

 

 

 

 

직원이 가리킨 곳은 '대표실'이라는 문패가 붙은 방. 분명 가족기업이라 들었고, 꽤 작은 사무실인데 대표실은 따로 두고 있는 게 의아했다. 아 네, 일단 명함부터 건네고 돌아선 성우의 앞에 큰 등이 먼저 섰다. , 여기 으리으리하네. 혼잣말을 하며 들어서는 양에 기가 차 등을 쿡 찔렀더니 아야야, 몸을 굽힌다.

 

 

 

 

 

", 골프를 아주 그냥...."

 

"......"

 

"대금을 안 넣었다고 안 했어요?"

 

 

 

 

 

소파에 정자세로 앉은 성우와 달리 대표실을 빙 돌며 이것저것 찔러 보던 다니엘이 기어이 골프 가방에까지 손을 댔다. 그 모습까지는 차마 넘길 수가 없어 성우가 다니엘의 양복 자켓을 홱 잡아챘다. 못이기는 척 성우의 옆에 앉은 다니엘이 말없이 성우가 넘겨 준 서류를 뒤적였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대표실 문이 열리고,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섰다. 몇 번 통화를 해 본 경험이 있어 목소리로 그가 대표인 걸 알았다. 성우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허리를 곧장 숙였다. 다니엘도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악수를 청했다. 공손한 척 하는 모양이 사회 초년생 치곤 제법이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신가? ? 오는 데 막히지 않았어요?"

 

". 대표님 보내 주신 서류 보고.... 놀라서 찾아왔습니다. 다시 재고해주십사 하고."

 

 

 

 

 

대표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고 나도 뭐... 그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 싫긴 했지만 지금은 강짜 부릴 타이밍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성우의 고개 위로, 다니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대표님 골프 좋아하시나 봅니다. 저도 골프 쫌 치는데."

 

"젊은 친구가 골프를 쳐? 사회생활 할 맘이 있나 봐?"

 

"요 근처에 좋은 필드 있던데요. 얼마 전에 와 봤는데 마, 넓어 갖고 다 돌지도 못했습니다."

 

 

 

 

 

엉거주춤 고개를 든 성우의 옆에서 다니엘이 눈꼬리를 휘며 웃고 있었다. 골프백을 뒤적거리던 게 그래서였나. 이젠 책장 위의 트로피까지 들고 대회 얘기를 줄줄 읊는다. , 이거 아무나 나가는 거 아닌데. 실력이 보통 아니신가 본데요. 대표의 표정이 슬슬 풀어지는 게 멀리서 봐도 느껴졌다. 어쩔 셈인지 몰라 발만 구르는 성우의 표정이 읽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대표님 이번에 계약만 딱 잘 풀어 주시면 제가 필드 한번 폼나게 모시겠습니다."

 

"아니 계약은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고, 대금 가지고 자꾸 그러니까. 밀릴 수도 있는 거를."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고개를 숙인 건 성우가 아니라 다니엘이었다. 아까까지 샐샐거리던 표정이 금방 굳어 있었다. 그런 다니엘의 머리 꼭지에 시선을 두고 탁자를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는 대표를 보다, 성우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영세업체라고 생각했지만 제법 번쩍거리는 사무실, 벽에 걸린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그림들, 찬장에 장식된 온갖 트로피. 더럽고 치사한 세상에 허리를 굽히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옆에서 누군가 같이 싸워 준 건 역시 익숙치 않은 일이었다. 고개를 든 성우가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다니엘 씨가 골프는 정말 잘 치는데, 대표님 실력까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도와 주는 마음, 곡해하지 않고 받겠다는 말이었다. 흘끔 돌아본 다니엘이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물었다.

 

 

 

 

 

 

 

 

 

 

 

 

 

 

 

 

 

 

 

 

 

 

 

 

 

 

 

 

 

 

 

 

 

 

 

 

 

결국 식사 자리까지 따라갔다가 서울로 가는 길에 오른 건 밤이 한참 늦었을 때였다.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저 대신 소주까지 몇 잔 얻어 마신 다니엘이 조수석에 힘없이 흐느적댔다. 노래 들을래요, 미끄러지는 손으로 라디오를 켜려고 하길래 제 핸드폰을 연결해 주고 아예 음악 어플을 켜 줬다. 다니엘은 창문을 내리고 노래를 잠깐잠깐 흥얼거렸다. 허스키한 목소리라 고음은 잘 나오지 않았지만 듣기가 나쁘지 않았다.

 

 

 

 

 

"나 그래도 짐은 아니었죠."

 

"."

 

 

 

 

 

으흐흐. 바보처럼 웃는다. 좀 자는 게 어때요. 성우가 조수석에 열린 창문을 올리며 왼쪽 깜박이를 틀었다. 곧 고속도로에 진입할 거였다. 집에 데려다 주고 간다는데도 기어이 성우의 집에 내리겠다고 떼를 쓰기에 더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알겠다고 했다. 시간을 좀 줄여 볼까. 차가 많지 않은 국도에서 엑셀을 눌러 밟았다. 평소와 다르게 속도 붙는 반응이 좀 늦다고는 생각했는데.

 

 

 

 

 

"...?"

 

"....왜요?"

 

 

 

 

 

엔진음이 컸던 게 이래서였나. 털털털 소리를 내더니 금방 속도가 느려졌다. 성우가 빠르게 오른쪽 끝으로 핸들을 틀었다. 퍼졌는데 이거. 흐느적거리던 다니엘이 몸을 바짝 세웠다. 큰일 날 뻔한 거 아입니까, 와 나 갑자기 사투리 엄청 쓰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웃음이 터졌다.

 

 

 

트렁크를 열어 경고등을 세우는 동안 다니엘은어버버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면허가 없다더니 자동차에 관련된 건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보험사에 전화를 마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연하에 사회 경험도 저보다 훨씬 모자란 느낌. 지나가는 차가 없어 가로등 불빛을 빼면 사방이 어둠이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있었던 일들이 모두 비현실적이라, 형편 없이 맥이 풀린 성우가 길가에 털썩 주저 앉았다.

 

 

 

 

 

"괜찮아요?"

 

"."

 

"아 내 진짜 놀랬다. 이런 적 있었어요?"

 

"저도 처음이긴 한데.... 하필 오늘 이럴 줄 몰랐네요."

 

"맞죠. 희한한 날이네."

 

 

 

 

 

여름이 다 지나 밤바람이 서늘했다. 다니엘이 진작 빼 둔 넥타이를 주머니에 넣고 자켓을 벗어 성우의 어깨에 덮었다. 이런 거 하지 마요, 정색을 하자 저는 더위를 많이 탄다며 딴청을 피운다. 만성적인 친절이 분명 불편했는데, 점점 익숙해지는 스스로에 어이가 없었다. 귀뚜라미 소리와 멀리서 지나가는 차 소리만 들리는 길, 길모퉁이에 나란히 쪼그려 앉은 두 사람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나 따라오는 거 싫었죠?"

 

"."

 

"성우 씨는 거짓말을 전혀 안 하네. 좀 해 주면 안 되나."

 

"거짓말도 해요. 가끔."

 

 

 

 

 

별도 많고, 생각도 많고, 공기는 좋은 그런 밤. 마음이 좀 풀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제 한 거는요?"

 

"어제?"

 

"내 싫다고 한 거."

 

 

 

 

 

푸스스 웃으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성우가 잠깐 다니엘에게 시선을 뒀다. 장난스레 눈썹이라도 찡긋 올릴 줄 알았는데 얼굴에 미소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답지 않네. 그 표정이 썼다. 나 때문에. 예쁜 복숭아 모양 얼굴에 걱정이 가득인 게 보기 좋지 않았다. 회귀에 대한 두려움, 끝없이 되풀이될 폭풍우와 그 속에서 속수무책일 자신. 속아 넘어가서도 그것도 사랑이라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던 숱한 밤. 세상에 죄를 지은 듯 고개를 숙이고 이를 까득 물어야 살아낼 수 있었던, 그 절망의 기억보다.....

 

 

 

내가거절할까봐, 내가 싫어할까봐. 이 큰 어깨가 가득 짊어진 불안에 마음이 더 쓰이는 건.

 

 

 

 

 

"다니엘 씨."

 

"."

 

"다니엘 씨는.... 저랑 안 어울려요. 그냥... 저는.."

 

 

 

 

 

불안한 건 피차 마찬가지다. 저만치 견인차의 불빛이 보였다. 말을 다 잇지도 못한 채 성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깨에 덮였던 다니엘의자켓을 그에게 돌려 주며 성우는 제 가슴에 뻥 뚫린 구덩이에 대해 생각했다. 스스로를 가두고 누구도 손 내민 적 없는 깊은 구멍. 누가 빠트렸는지도 모르면서 수없이 발을 헛디뎠다. 사치스러운 원망과 졸렬한 희망으로 살아 온 두 해.

 

 

 

아무리 눈부신 빛이 내려도, 그 가장 깊숙한 곳엔 결국 아무도 닿지 못하고...

 

 

 

 

 

"다 왔다, 그쵸."

 

"그러게요."

 

"저거 차 말고. 성우 씨."

 

 

 

 

 

아까까지는 짐짓 심각한 척 입술을 물더니, 올려다보는 얼굴이 금방 웃고 있다.

 

 

 

 

 

"나한테 거의 다 왔다, 말하는 거 보면."

 

".....?"

 

"성우 씨가 이만치 망설이는 거 처음이라서."

 

 

 

 

 

그러더니 제 손을 예고도 없이 옭아매 훅 잡고 일어나는 통에 하마터면 같이 넘어질 뻔했다. 아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달큰한술냄새가 끼쳤다. 말을 잃은 성우에게 이번에는 눈썹을 쓱 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초가을 밤을 금방 제 색으로 물들이는 신기한 사람. 그 색은 분홍 빛인 것도 같고, 태양 빛 그 자체인 것도 같고.... 끌려가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그 자체가 광원인 양.

 

 

 

 

 

"조금만 더 와요. 나 어디 안 가니까."

 

 

 

 

 

자켓을 걸쳐 입고 휘파람을 불며 견인차에 휘휘 손을 흔든다. 벙찐 성우의 앞에 견인차가 서고, 견인차 운전수가 앞문을 열어 두 사람을 태웠다. 차주세요? 아뇨, 저 분이. 아이고 여기서 퍼져서 놀라셨겠네. 그러게요. 옆에 분은요? 회사 동료요. 대화 전체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비상등이 똑딱이는 소리, 제 차가 견인차와 걸려 연결되는 소리, 이따금 다니엘이 허허, 하하, 따위의 웃음소리를 내고, 자꾸 스스로에게 깨물리는 손가락 끝,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뱃속. 어쩌면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기쁜 패배감 같은 것.

 

 

 

 

 

 

 

성우는 이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삶의 어느 한 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몇 초.

 

 

 

성우가 알던 삶의 종말,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의 시작이었다.

 

 

 

 

 

 

 

 

 

Fin.